영원한 꽃

by qorhvk posted Feb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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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꽃

가끔씩 아직도 가슴이 미워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6살 저는 한 손 가득 산에서 꺾은 꽃을 들고 저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한 사내를 찾아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의 손에 도라지꽃을 쥐어 주면 그는 웃으며 제 손을 잡고 절 잔디 밭으로 데려 갔고 저는 그의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지요.

"조금 있으면 꽃이 지겠구나."

"그럼 더 이상 도라지꽃도 피지 않겠지요?"

"꽃은 지는데 여전히 꽃향기가 나는 것 같다 나는."

그사람의 그 미소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아름다워서 다시 더듬으며 생각하고 떠올리고 느끼고 싶었는데 그것은 저에게는 욕심이었을까요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오던 길 어떤 사내 한 명이 제 손을 잡았습니다. 너무나도 차가웠죠.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어딘가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저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들이 겁에 질린 채 삼삼오오 모여 있었지요. 두려웠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속으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 사람을 부르며 누군가 저를 구해주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저의 이 뚫린 마음의 구멍만 더 커져갔습니다. 나무로 된 집. 그리고 나뉘어져 있는 방. 우리들은 한 명 아니면 두 명 짝을 이뤄 작은 칸으로 들어갔습니다. 쾌쾌한 냄새가 저를 감쌌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리고 곧 투박하고 거친 손이 제 어깨를 쓰다듬었습니다. 강제로 눕혀진 제 몸에 닿인 바닥은 차갑기 그지 없었습니다. 살려 달라고 빌어 봤자 제게 돌아 오는 것은 답 없는 메아리 같은 비웃음.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웃음 소리. 그리고 들리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 느껴졌던 우리들의 슬픔. 항상 그들을 상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그 사람이 지금도 저는 생각 납니다. 나를 웃으며 지켜 보던 그. 그리고 이런 나를 지켜 볼 그. 그 상반된 두 표정의 차이를 이길 자신이 그때의 저에겐 없었습니다.


나의 눈물을 마치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관통하듯 마치 꽃처럼 퍼져 오르듯 나를 덮쳐 왔고 하루 하루를 소녀들이 흘린 눈물 위에서 춤춰야만 했습니다. 하루는 그곳에서 알게된 저의 동무가 제게 이러더군요. 애를 가졌다고. 그 아이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뱃속의 이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난 이 아이를 사랑할 자신이, 사랑을 줄 자신이 없다고. 며칠 후 그 아이의 배는 갑자기 홀쭉해졌습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습니다. 저게 내 미래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하루 하루 그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이들의 얼굴과 겹쳐져 더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나를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이미 죽었을까 나는 이 마음을 이제 거둬야 하나.

그렇게 세월이 지나 드디어 저희들은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16살 소녀의 모습이 아닌 조금은 성숙해진 여인으로 돌아 왔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딛으며 나의 집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습니다.


애써 그런 시선들도 환영이라 생각하며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에게 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 순간 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집은 난장판이었고 부모님은 돌아가신지 오래 내 부모 묻혀 있는 곳도 알지 못한 이 불효자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 하늘 아래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 곳만 벗어나면 다 끝일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 살 날이 남았고 지금 나를 보는 그 시선들은 따뜻하지 않다 하지만 저는 어떻게든 이겨 보려고 저를 대신에 하늘로 올라간 제 벗들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끊어질 것 같은 다리를 움직여 제가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봤던 그 잔디밭에 힘겹게 앉았습니다. 하늘은 푸르렀습니다. 그림 같았습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위해 그려 놓은 한 폭의 그림처럼 찰랑거렸습니다.

"왔구나."

그런데 뒤에서 다시는 듣지 못할 것만 같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사람은 예전의 소년의 모습은 씻어 버리고 조금 더 건장해진 체격에 약간 난 수염, 인자한 미소로 저를 불렀습니다. 그는 말 없이 제 옆에 앉아 제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 살결이 제 손에 닿으니 몸이 녹아버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꽃이 저버렸구나."

"이제 다시는 피지 못하겠지요."

"꽃은 졌는데 여전히 꽃향기가 나는 것 같다 나는."

저는 놀라 그를 쳐다봤습니다. 그는 제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몇 걸음 걷다 멈춰 저에게 말했습니다.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은 남들의 사랑을 얻을 수 없겠지. 하지만 만약 그 향기 없는 꽃을 좋아하는 이가 나타난다면 그 꽃은 영원한 꽃으로 남아 있겠지."

저의 손에 들린 도라지꽃은 그의 말을 끝으로 부서져 흩날렸습니다. 제가 너무 꽉 쥐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가 꽉 쥐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을까요 저는 꽃잎들이 뭉개져 사뿐히 내려앉은 제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숨 쉴 때마다 꽃의 향기가 제 숨결과 섞여 들어 왔습니다. 이미 향기도 잃고 부서져 버린 꽃이었지만 이것도 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제 첫사랑과 고통 그리고 마지막 사랑을 떠나보낸 그 날은 제가 꽃이 된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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