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쩝쩝나무 posted Feb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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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7

 

좋을 텐데. 너의 손 꼭 잡고 그냥. 이 길을 걸었으면.

 

뭔지 모를 노랫소리에 끌려 잠을 깼다.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꿈은 처음이다. 무슨 노래였을까. 누구나 금방 잠에서 깨면 방금이라도 생각날 듯 했던 꿈들이 잊혀 진다. 잊혀 진다기보다는 안개처럼 희미해져버린다.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하는 꿈이라니. 시각장애인들이 꾸는 꿈이 걸까? 계속 눈은 뜨지 않고 오늘도 그려 나갈 내 반복되는 생활을 상상해본다. 상상이라는 표현이 올바른지 모르겠다. 상상이라고 하기엔 매일 그 상상이 실제로 벌어진다. 나는 일어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세수를 하고.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여 수업을 받고. 점심시간이 되면 누구보다 더 밥을 일찍 먹기 위해 의미 없는 올림픽이 열릴 것이고. 10시가 되어서 집에 돌아 올 것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손가락. . . . 입술. 허벅지. 무릎. . 발가락. 어느 것 하나 감각이 없다. 이 뜬금없는 상황에 뜬금없게도 어제 같은 반 짝지인 진우와 나눈 얘기가 생각났다.

, 너 가위 눌러본 적 있어?”

아니 살면서 한 번도 안 눌려봤어. 갑자기 왜?”

어제 인터넷에 돌아다니다 가위눌리는 법을 봤는데 너무 신기하거야. 그래서 내가 어제 그 방법을 쓰고 잤거든? 근데 진짜 가위눌렸어. 나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나는 공부할거야. 그런 유치한건 너나 하세요.”

니가 그런다고 부산에 있는 K대 들어갈 수 있을 거 같냐?”

적어도 너처럼 호주가서 사는 꿈은 안 꿀거야.”

야 호주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데!”

그래 나는 어제 분명히 진우가 말한 가위눌리는 방법을 듣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설마 내가 가위를 눌리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생각보다 가위를 눌린다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가위보다는 내 휴대폰을 쥐고 있지 않은 것이 어쩌면 고통이다. 일어나서 내 휴대폰을 찾으려고 덤벙될테니 말이다. 마침내 눈을 떴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은 떠진다.

그런데. 낯선 곳이다. 어쩌면 아직 꿈 속 인줄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 낯선 곳이다. 그나저나 너무 답답한 것은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왜 내 몸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 누가 테이프로 내 몸을 칭칭 감아놨나? 아니면 내가 김밥이 되었나?

당황스러워서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든다. 하지만 이성적인 나니까. 나는 차분히 생각해본다. . 도저히 모르겠다. 나름 생각해내려고 머리를 쥐어짰더니 두통이 오는 것만 같다. 너무 답답하다. 도저히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드는 걱정은 하나밖에 없다. 지각. 지각을 하면 담임선생님에게 쏟아지는 잔소리를 들을 것이고, 진우에게는 지각 벌금으로 1000원을 줘야한다.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지각이 더 걱정된다. 이런 상활일 때 꼭 외치는 말이 있다. 엄마. 엄마는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만병통치약과 같은 존재이다. 엄마만 있으면 뭐든지 해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젠장 할. 입도 움직이질 않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하얀 벽, 그 하얀 벽에 걸려있는 푸른 초원이 그려진 액자, 푸른 잎과 사랑스런 꽃이 있는 화분, 네모난 냉장고, 과일이 올려진 탁자, 갈색 소파.. 뭐지 이 곳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른쪽으로 내 눈을 돌렸을 때, 누군가 내가 누워있는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다. 보아하니 내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 분명 내 손인 것 같은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

엄마인가? 엄마! 엄마!!’

아무리 외쳐봐도 외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엄마라고 하기엔 얼핏 보기에도 젊은 여자다. 우리 엄마가 아니다. 도대체 뭐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눈을 뜬 것 말고는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입이 텁텁하고 목이 마르다. 당장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지만 손가락은커녕 내 혀조차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마치 태양을 한 조각 삼킨 것 같다. 하지만 목마름도 잠시. 역시나 너무 답답하다. 당장 이 곳을 나가고 싶다. 답답함 뒤엔 머리가 아파온다. 누군가 단단한 줄로 내 머리를 두르고 꽉 쪼이는 듯한 두통이다. 아악. 하고 소리를 외치고 있었지만 역시 외쳐지지 않는다.

그렇게 혼자 고요한 외침을 하고 있을 때 내 손을 잡고 있던, 아니 내 옆에 잠들어있는 누군가가 부스스하게 잠을 깨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다. 이쁜 여자다. 눈이 마주친 그 여자와 나는 잠시 정적이 이른 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울먹울먹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운다. 서럽게 우는 건 아니지만 뭔가 안쓰럽다.

갑자기 나를 안고 이번에는 서럽게 울었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운다. 여자가. 처음 보는 여자가. 나를 안고 운다.

 

6

 

OOO. 라면 먹으러 가자

5분 뒤에 수업이야. 그리고 다음 시간 수학이야. 수학쌤한테 걸리면 죽어.”

괜찮아 임마. 이제 내일이 수능인데 누가 뭐라고 해.”

아 출출하긴 한데.”

소심해갖고 새끼. 오늘은 이 형님이 쏴준다 임마

 

눈을 떴다. 뭐지 꿈이었나. 잠깐. 여긴 어디지. 낯선 곳이다. 공기마저 낯설다. 힘겹게 몸을 움직인다. 자고 일어난 몽환한 기분에 팔과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곧 내 의지를 따른다. 자리를 잡고 침대에 앉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여기는 어디지?’

납치범들이나 스토커같은 사람들은 방은 아닌 것 같다. 하긴 내가 납치당하거나 스토커를 당할 만큼의 가치 있는 놈은 아니다. 방은 누군가의 일상적인 방인 것 같다. 설거지거리. 노트북. 옷이 걸려있는 옷장.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가방과 옷들. 책상에 쌓여있는 책들. 옷을 보아하니 남자 옷 같다. 떨어져있는 옷을 집으려 할 때 내 팔등에 적힌 글자가 보인다.

‘010-5426-8588’

글자가 아니라 숫자다. 숫자가 아니라 번호다. 누군가의 휴대폰 번호다. 누군가 내 팔등에 써놓았다. 8588.. 8588...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옷을 집지 않고 내 팔등에 적힌 휴대폰 번호에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저 번호의 주인이 나를 여기로 데려와서 잠 재웠을 것이다. 마침 바닥에 휴대폰이 떨어져있다. 마치 당장 전화라도 하라는 듯이 휴대폰이 눈 앞에 있다. 침을 한번 삼키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갑자기 망설여진다.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해야 하는가? 뭘 물어봐야하지? 내가 왜 여기 있고 왜 내 팔등에 당신의 번호가 적혀있냐고? 아니면 영화 올드보이처럼 누구냐 넌?’ 이라고 말해볼까?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무작정 통화버튼을 누르려는데 이 휴대폰의 최근 통화기록에 나와 있는 번호가 내가 누르는 번호와 똑같다. 나는 고민이 된다. 대체 뭘까. 고민 끝에 통화버튼을 누른다. 연결음이 나온다. 알 수 없는 노래다. 내 취향의 노래가 아니라 음악이었다면 당장 꺼버렸겠지만, 나에게 답을 줄만한 사람의 연결음이기 때문에 참고 기다린다.

받아라. 받아라. 첫 질문을 뭐라고 하지???’

여보세요? 오빠? 오빠야?”

제길. 첫 질문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전화가 연결되어 버렸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다. 그리고 나를 오빠라고 부른다. 나를 알고 있는 걸까?

오빠. 어디 아퍼? 왜 연락 안 해? 어제 삐진 거 맞지?”

질문이 쏟아진다. 내가 질문을 쏟고 싶은데 하나도 질문하지 못했다.

.. 저기요. 혹시 저 아시나요?”

무슨 소리야? 영준이 오빠 아니에요?”

제 이름은 영준이가 맞는데. 그 쪽이 누구인가요? 제 팔등에 번호가 적혀있네요.”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오빠 지금 집이야? 지금 오빠 집으로 갈게.”

여자는 그렇게 자기 멋대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 내가 원하는 답은 하나도 듣질 못했다. 어안이 벙벙하고 당황스럽지만 일단 여자가 온다니. 아니 뭐 꼭 여자 때문은 아니더라도 지금 내 몰골을 봐야겠다. 아마도 화장실에 거울이 있겠지. 화장실이 저쪽인가. 그런데 내 팔등에 적힌 번호에 통화를 하기 위해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발이 움직이질 않는다. 내 눈 앞에 멀쩡해 보이는 두 발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말도 안 된다. 나는 내 발을 만져본다. 감각이 없다.

초등학생 때 TV에서 본 것처럼 무릎을 주먹으로 내려쳐본다. 그러면 TV에서는 발이 앞으로 자동적으로 튀어 오른다고 했다. 이게 무슨 법칙이었지? 아니. 그 딴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건 내 주먹으로 내 무릎을 몇 번이나 쳐도. 얼마나 세게 쳐도. 내 발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 발이 내 발이 아닌 것 같다. 억지로라도 일어나려 버둥거리다 바닥에 털썩 쓰려져버렸다. 거짓말 같은 상황. 당혹스러움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 어이없는 상황. 나는 다시 일어나려 옆에 있던 TV를 짚고 팔에 온 힘을 집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온 힘을 집중한 탓인지 TV가 내 머리로 떨어져버린다.

 

 

 

 

 

5

 

집에 도착한 나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침대에 앉아서 TV를 켜고 즐겨보는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해주는 채널을 찾는다. 오늘은 재방송을 해주는 채널이 없는 날인가 보다. 혼자 리모콘을 마구 누르다가 흥미가 없는 방송들이 싫어 그냥 TV를 꺼버린다.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라서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자리를 잡고선 앉는다. 인터넷 창이 켜진 화면에 단어를 쳐본다. 트루먼 쇼. 트루먼 쇼는 내가 중학교 때 본 짐캐리 주연의 영화이다. 내용은 주인공 짐 캐리가 평소와 같은 일상생활을 하는데 하루하루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알고 보니 짐 캐리의 이런 생활이 촬영되어 전 세계로 방영되는 내용의 영화이다. 설마 내가 짐 캐리? 라고 혼자 생각하다가 나는 그냥 짐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아까 병원에서 들었던 알츠하이머를 검색해본다.

 

초기에는 주로 최근 일에 대한 기억력에서 문제를 보이다가 진행하면서 언어기능이나 판단력 등 다른 여러 인지기능의 이상을 동반하게 되다가 결국에는 모든 일상생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발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기능 상실의 속도는 환자 마다 상이하다.

 

상당히 무서운 병이다. 이 무서운 병을 의사는 그렇게 우스갯소리로 말했다는 건가? 나쁜 의사다. 블로그를 보니. 아는 언니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는데 언니 자신은 자기의 문제를 기억 못했고 결국엔 걷는 법까지 잊어버려 지금은 병실에서 식물인간처럼 숨만 쉬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블로그에는 알츠하이머가 변형되어 보통 정신적인 기억부터 잊어가는데 변형된 알츠하이머는 신체적인 기억부터 잊어간다는 글도 있었다.

아직 원인도 그리고 치료도 밝혀진 것이 없는 불치병이라고 한다. 세상에 이런 병도 있구나 하고 관련 검색어에서 영화 메멘토를 클릭한다. 10분마다 기억을 잃어가는 주인공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예전에 TV에서 방영하는 것을 잠깐 본 적이 있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주인공이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에 중요한 기억들을 문신으로 메모하는 장면이다.

혹시나 하고 생각해봤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기억은 뭘까? 명장면을 따라하고 싶어졌다. 따라하고 싶어졌다는게 변명일 수도 있다. 어쩌면 혹시 모를 두려움이 나도 모르게 있는 것 같다. 팔등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기억?

피곤한 하루 덕분인지 잠이 몰려온다. 그래 일단 자자. 자고 나서 생각하자.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고스란히 눕는다. 어제도 그랬듯이.

 

4

 

병원을 나서니 벌써 밤이 드리워졌다. 오늘은 사람들이 붐비는 날이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만 먹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심각했으면서 이제 배가 고프단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역시 나도 사람인가 보다.

그 상황을 잊을 만큼 배가 고팠던 탓인지 순간 머릿속에 지금 먹고 싶은 것들이 수 십가지가 떠올랐다. 혼자 자취를 하면 이 점이 참 편하다. 내가 먹고 싶은 건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다.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다. 시간은 1920. 배가 고플 만도 하다. 오늘 따라 거리에 사람이 많다. 소중이 말에 따르면 오늘이 개강한 날이니까. 한 숨을 내쉬고 치킨을 사서 집에 가서 먹기로 한다. 어느 치킨집을 갈까. 모르겠다. 오늘은 육체도 정신도 너무 피곤하다. 하루 만에 내게 무슨 일이 벌어 진걸까. 그저 집에 가는 길에 보이는 치킨집에서 포장해 가야겠다.

집에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 선다. 언제나처럼 차는 자기 갈 길을 찾아 달린다. 나와 같이 횡단보도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휴대폰을 보고 있다. 무리가 같이 있어도 모두 하나같이 자신의 휴대폰을 두드리기에 바쁘다. 평범하다. 어제도 봤고. 그 어제도 본 모습이다. 그래 변한 건 없다. 파란 불로 바뀐 횡단보도를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건너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몇 년을 밟아도 흰 선은 흰 선으로 남아있다. 그래 변한 건 없다. 전화가 울렸다. 화면 창에는 진우가 띄어져 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인 진우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진우 웬일이야?”

웬일은 뭐가 웬일이야. 나 내일 호주가니까 전화했지.”

웬 갑자기 호주? 학교는?”

나 휴학하고 호주에 워킹홀리데이 간다고 했잖아.”

놀랄 기운도 없다. 단지 지금 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은 한 번 더 인식해 줄 뿐이었다.

아 그래. 이제 기억났어. 가서 언제 온다고 했지?”

“1년이라고 했잖아. 여자친구한테 쓰는 관심 반의 반만큼이라도 관심 좀 가져라. 이제 준비 해놓고. 전화하는 거야.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진우에게는 말하고 싶다. 지금 내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다. 니가 호주가는 것도 모르겠고, 방금 병원을 다녀왔고, 하루가 너무 낯설다고 말하고 싶다. 채영이에게도. 소중이에게도 말하지 못 할 것 같지만 고등학교 친구인 진우에게는 말하고 싶다.

뭐야? 영채랑 헤어지기라도 했어?”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그냥 호주 잘 다녀오라고. 내일 가기 전에 전화해.”

무슨 일인지 몰라도 힘내라. 내일 다시 전화할게.”

결국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하지 못했다. 진우에게 지금 내 상황을 말할 수가 없다. 진우가 그저 장난으로 받아 들 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우는 의리가 상당하다. 고등학생 때 진우가 얼마나 의리가 강한 아이인지 깨닫게 해준 사건이 있다.

우리집에는 내가 어릴때부터 키워오던 멍개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가 있었다. 나의 유년기 시절을 함께 보내고 나와 함께 자라던 강아지였다. 하루는 엄마가 멍개를 데리고 새벽에 산책을 다녀오시다 멍개를 잃어버렸다고 하셨다. 나는 너무 놀라서 엄마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고 멍개를 찾으러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멍개를 외치고 다녔다. 학교에도 가질 않고 멍개를 찾으러 다녔다.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지만 그런 이유로 결석을 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하셨지만, 난 그럼 그냥 결석으로 해달라고 하고 선생님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렇게 멍개를 찾아 혼자 울먹이며 돌아다니고 있을 때, 진우가 저 멀리서 교복을 입고 뛰어왔다.

야 뭔데 어떻게 왔어? 학교는?”

담임한테 얘기 들었어. 멍개 집 나갔어?”

엄마가 산책하고 돌아오시면서 아줌마들이랑 수다 떠는 사이에 사라졌데. 그런데 너는 어떻게 왔어? 학교는 어쩌고?”

그냥 담임한테 그럼 나도 결석처리 해달라고 했지. 그런데 너 목소리 진짜 크네. 전화하려다가 목소리 듣고 여기로 왔어.”

얼른 멍개 찾아야 되잖아. 고맙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와준거네.”

사실 나도 그냥 땡땡이 친거야. 미안해하지마. 내가 솔밭부터 돌아오면서 찾아볼게. 니가 여기서 저쪽으로 오면서 찾아봐

그 때 사실 겉으로 티는 안냈지만, 진우가 나 때문에 학교도 결석처리하고 와줬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고 고마웠다. 그리고 멍개를 찾은 건 내가 아니라 진우였다. 진우가 솔밭을 지나다가 코끼리 바위 쪽에서 강아지가 낑낑대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멍개 주위로 길고양이들이 둘러싸고 위협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마치 기합을 잡는 것처럼.

내가 멍개를 찾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에 진우가 장난으로 한 얘기라는 걸 알지만. 난 그저 고마웠다. 진우가 자기의 일도 아닌데 나를 위해서 자기의 시간과 체력을 소비해 주다니. 정말 고마웠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아 물론 나에게는 상당히 큰 일이였지만. 남들이 보기엔 이런 사소한 일에도 자기 일인 마냥 도와주는 진우가 있어서 고마웠다. 이 사건 말고도 진우의 의리를 알게 해준 사건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고등학교 생활을 함께 보낸 진우라는 친구가 있어 나는 참 든든했다.

그런 진우에게 지금 나의 상황을 말하면 진우는 어떻게 할까? 모르긴 몰라도 마산에서 지금 내가 있는 부산까지 슈퍼맨처럼 날아 올 것이다. 설사 그게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 호주를 가는 지금이라도 말이다. 방금 전화를 하면서 진우가 내일 호주를 간다는 것은 몰랐지만, 진우가 예전부터 호주를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진우는 고등학생 때부터 호주에 유학을 갈 거라고 말했었다. 항상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Australia Orange is My Life”

유일하게 내 모든 고민을 공유하는 진우였지만 걱정시키기는 싫었다. 그리고 아직 확정된 것도 없지 않은가? 괜한 말로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게 하기는 싫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치킨이 먹고 싶지 않아졌다. 그저 집에 가고 싶다.

 

3

 

하루가 이상하다. 아니 시간이 이상하다.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걸까?

어영부영 수업을 마친 나는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이상하다. 지금 이 기이한 상황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내 휴대폰이 어디 있는지 이다. 휴대폰이 없으니 불안하다. 휴대폰은 왠지 내게 답을 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휴대폰이 없으니 날짜도 모르겠고. 시간. 연락처. 약속. 모든 것이 멈춘 것 같다. 집에 휴대폰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강의실을 나와 계단을 걸어간다.

선배!”

병원을 가볼까라는 생각도 하면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간다.

영준선배! 왜 들었으면 못 들은 척 해요!”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내 앞길을 막는다. 내가 이 여자의 선배인가 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름을 모르겠다. 그래도 얼굴이 이쁘니까 친한 척 하고 싶었다.

수업마치고 가시나 봐요. 저 방학 때 휴대폰 바꿔서 번호 지워졌어요. 번호 가르쳐 주세요~”

여자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휴대폰을 꺼낸다. 제길. 가르쳐 주고 싶은데 내 휴대폰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에 가르쳐 줄게.”

뭐야! 비싼척 하지마요. 4학년 늙은이한테 번호 물어봐주는 여자가 어디 있다고!”

‘4학년? 내가 4학년이라고?’

선배 진짜 재미없어! 저 먼저 수업이라 먼저 갈게요. 다음에 소중선배랑 같이 봐요.”

앞모습이 이쁜 여자는 뒷모습도 이쁘다. 어쨌든 지금 뭔가 잘못되었다. 나는 3학년이다. 그래. 저 이쁘장한 여자가 다른 사람을 나로 착각했나 보다. 난 흔하디 흔하게 생긴 얼굴이니까.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학교를 나선다. 아까는 정신없이 학교를 오느라 주위 건물이나 학교 건물을 보지 못했는데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뭔가 많이 달라졌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있던 8호관이 깔끔한 새 건물처럼 보이고, 건물 벽의 색이 누렇게 변해서 보기 싫었던 3호관 건물이 형형색색으로 칠해져 있고, 그 옆에 있는 카페는 처음 보는 카페이다. 학교 정문을 벗어날 때 쯤 횡단보도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휴대폰 가게에서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횡단보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고 있다. 내 휴대폰을 찾고 싶다. 아니 휴대폰이 보고 싶다. 분명 나에게 답을 내려줄 휴대폰. 집에 분명히 내 휴대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 만에 달라진 건물들을 바라보고. 달라진 사람들을 느끼면서. 휴대폰이 있을 집까지 걸어왔다. 원룸 출입구 비밀번호. 내 방 현관문 비밀번호. 바뀌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비밀번호들이 맞다. 그런데 왜 학교 건물들과 사람들은 바뀐 걸까? 의아하면서도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내 방이다. 소중이 다음에 내 유일한 친구인 TV. 그 다음 친구인 노트북. 침대. 베게. 냉장고. 세탁기. 화장실. 커텐. 뭐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역시 내가 어제 과제를 하고 늦게 잠들었던 내 방이 확실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내 휴대폰을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찾아헤매이고 나의 하루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휴대폰은 내 침대에 누워있었다. 영채에게 문자가 여러 개 와있었다.

오늘 개강이라 사람이 많네.’

오빠 오늘 친구들 봐야 돼서 못 볼 거 같애. 미안해.’

삐졌어? 내일은 꼭 산책하자. 사랑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에선 데이트는 커녕 영채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문자를 확인한 나는 폰 화면으로 돌아가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였다.

‘2013. 3. 4.’

휴대폰을 보자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나는 학교 앞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학교 앞에 병원들은 건물 벽의 색이나 형태는 변했지만 병원이름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아니 그대로여야 했다. 그런데 어느 병원 가야하는가? 나는 병원들을 보며 주춤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아 물론 처음이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나는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나는 감기가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고, 두통이 심해도 약국에 가서 간단한 약만 먹고 사는 삶을 살았다. 병원이라는 곳은 내게 맞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지금 내게 벌어진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기에 병원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7층에 있는 신경내과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문 앞에 서서 잠깐 망설였지만 휴대폰을 한 손에 쥐고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간호사에게 간단한 접수를 하고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10분만 기다리다 소식이 없으면 그냥 나가야겠다. 나는 환자가 아니니까. 나는 정상인이니까. 마침 내 이름이 불려 졌고, 나는 진료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3월달이라 아직 쌀쌀하죠? 어떻게 오셨나요?”

의사선생님은 생각보다 젊었고, 가식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걱정과 고민이 생겨도 남에게 잘 말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해결해버리는 나로써는 지금 내 상황을 남에게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내게 말을 하라고 강요하는 의사선생님의 눈빛 앞에서는 더욱 말하기 싫었다. 나는 꼭 쥐고 있던 휴대폰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 이 상황은 나 혼자로는 해결할 수 없다. 말을 해야 한다.

... 지금 좀 이상해요. 제가 알고 있는 시간이랑 현재 시간이랑 너무 달라요. 저는 어제 과제를 하고 잤는데 오늘이 개강하는 날이고, 후배가 저를 아는데 저는 후배를 모르고,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저는 모르는 노래에요.”

... 최근에 정신적으로 무슨 충격을 받은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거 없는데... 그냥 제가 생각하는 것 보다 시간 흘러가 있는 거 같아요.”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시고요. 혹시 우울증이나 정신병으로 진료받으시거나... 그리고 혹시 최근에 교통사고 뭐 큰 사고 당하신 적 있나요?

아니요. 그런 적 없어요.”

... 제 소견으로 보기에는 정신적인 충격인해서 기억해야하는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인 것 같습니다. 뭐랄까요. 그런 거 있잖아요. TV드라마나 영화 보시면 주인공이 교통사고로 후유증을 겪는데 일시적으로 기억을 못할 때가 있잖아요. 아마도 영준씨도 교통사고는 아니더라도 그 만큼의 충격을 받음으로써 이런 증상을 나타나는거 같네요.”

아 네... 언제쯤 괜찮아 질까요?”

지금 확실한 원인과 증상을 몰라서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네요. 되도록 평소처럼 생활하시고, 혹시나 영준씨가 기억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주위분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정밀 검사 원하시면 내일 다시 오세요.”

성의 없는 상담에 일어나려는데 장난스런 표정으로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 혹시 알츠하이머일 수도 있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시덥지 않다. 사고? 정신적 충격? 한 평생 사고 없이 건강하게 살아온 나로써는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치? ? 정밀검사해서 돈 벌어먹으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있었다. 순간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 영역에는 안사람이라고 표시되었고, 영채라는 걸 알았다.

여보세요?”

왜 연락도 없고 문자 답도 안 하는 거야? 삐졌지?”

안 삐졌어. 친구들 만나고 있어?”

방학 때 못했던 수다 카페에서 계속 떨고 있어.”

오빠 진짜 안 삐졌으니까 걱정하지말고 재미있게 놀고 나중에 전화해.”

. 알겠어. 고마워. 나중에 연락할게.”

 

2

 

정신없이 학교에 도착했다. 뛰어오느라 너무 숨이 찬다. 그런데 뭔가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지만, 오늘 따라 풋풋함이 느껴진다. 이유를 모르지만 왠지 생기가 도는 학교 때문에 나도 기분이 들뜬다. 문과대 강의실을 찾아 들어간다. 단점일 수 도 있고, 장점 일 수도 있는데, 1학년 때부터 우리 과의 강의 실은 거의 바뀐 적이 없다. 한 층에 있는 강의실 모두가 우리 과의 강의실이다. 편하기도 하지만 때론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수업이 있는 424호로 갔는데 아무도 없다. 또 공지도 없이 강의실이 바뀐 것 같다. 이럴 때는 그냥 4층의 강의실을 한 번 돌아다니다 보면 내가 수강해야 할 강의실이 나온다. 강의실 끝 창문가 옆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내 유일한 대학교 친구 소중이다.

소중이와 1학년 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다. 1학년 때 나나 소중이나 서로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같은 과 학생이라는 것만 알았고 지나칠 때 형식적인 인사를 하는 정도의 사이였다. 그 때 나는 대학교를 들어와 대학 연애라는 것에 빠져 살았고, 소중이는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신없이 살아갔었다. 우리 둘이 친해진 데에는 큰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둘 다 군대를 같은 시기에 다녀왔고, 복학을 하고 보니 동기 중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이런저런 변명이 있다고 해도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같이 다니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소중이와 나는 마치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처럼 마음이 잘 맞았고, 서로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항상 우리의 만남은 장난스런 인사로 시작된다.

어이 브라더~”

너구나 3반 이쁜이가. 갑자기 왜 그렇게 끝에 앉았어? 앞에 앉자.”

갑자기는 뭐가 갑자기야. 어차피 오늘 수업도 안 할건데. 여기 앉아서 폰으로 게임이나 하다가 대충 교수 말 듣고 가야지

왜 수업을 안 해? 이번 수업 윤수남교수 수업아니야? 2시간 꽉 채워서 하잖아.”

무슨 소리야. 오늘 개강한 날인데. 윤수남교수도 개강하는 날에는 수업 안한다고.”

뭐라고? 오늘 개강일이라고?”

나는 소중이의 유치한 장난이 재미가 없었다. 그나저나 소중이는 하룻밤 사이에 노안이 되어버렸다. 하루 만에 노안이 찾아오다니. 외모 얘기에 민감해하는 소중이라 왜 이렇게 늙었냐는 농담은 하지 않았다.

재미없어 임마. 과제는 했어? 나는 어제 과제하다가 늦게 자서 피곤해.”

진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약 빨았어?”

소중이의 말장난에 피식 웃으며 대받아치려고 할 때 윤수남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뚱뒤뚱. 살이 쪄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마치 살찐 돼지가 오리 걸음을 흉내내면서 걷는 거 같아 혼자 속으로 피식하고 웃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어제 수업에 본 모습에 비해서 살이 심하게 더 찐거 같다는 것이다.

뭐지? 어제 밤에 라면을 온 몸으로 먹고 잔건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혼자 속으로 말하며 피식 웃는다. 윤수남교수님은 말이 가끔 재미있는 농담도 수업 중간에 던지시지만 성공확률이 낮은 개그를 자주 던지신다. 그저 재미없는 개그만 하다가 거기서 종종 얻어걸리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신다. 하지만 학생들은 행여나 점수에 반영 될까봐 가끔 억지미소를 짓곤 한다. 우리 과는 1,2 학년 때 다양한 수업을 듣다가 3,4학년 때는 필수 과목인 윤수남교수님의 수업으로 대부분 채워지기 때문이다. 권위라는 건 참 무섭다. 곧 수업이 시작할 것이다. 윤남수교수님은 한 사람씩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1학년때부터 내가 항상 소중이 앞에 출석이 불리고 그 다음 바로 소중이가 출석을 불린다. 소중이는 실컷 폰을 만지다가 내가 출석을 부르면 바로 다음에 대답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출석을 부를때면 언제 불릴지 몰라 긴장을 하고 있지만, 소중이는 그저 폰만 바라보고 게임만 하고 있다. 가끔 출석을 부를 때 내가 장난삼아 일부러 대답을 안 하면, 폰만 보고있던 소중이는 자신도 출석을 하는 것을 까먹고 수업을 시작하면 나랑 눈이 마주칠 때 내가 씨익 웃곤 한다.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출석을 다 부르신 후 건네신 윤남수교수님의 한 마디는 내 뒤통수를 쳤다.

다들 방학은 잘 보냈나? 개강 첫 날이라 아침에 일어날 때 고생 좀 했겠네. 이놈들 살이 오동통하게 올라서왔어. 교수님만 호~올 쭉 해진거 같애. 다들 교수님처럼 운동 좀 열심히들 하라고. 하하하

교수님의 말도 안 되는 개그에 애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억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방학이라고? 오늘이 개강 첫 날이라고? 이럴수가. 당장 폰을 꺼내서 날짜를 확인 해야겠다. 항상 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는 버릇이 있어서 뒷주머니에 자연스레 손을 넣었는데 휴대폰이 없다. 제길. 마음이 급해진 나는 가방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뒤진다. 휴대폰이 없다. 옆에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소중이의 폰을 뺏어 날짜를 확인한다.

야 왜 이래! 최고점수 경신 중 이었는데!”

휴대폰에는 똑똑히 날짜가 나와있었다.

‘34

이럴 수는 없다. 분명 꿈이다. 나는 꿈꾸고 있다. 폰을 뺏긴 소중이가 내 표정을 봤는지 왜 그러냐고 물어본다. 평소 장난이 심했던 소중이지만 이번만큼은 장난을 치지 않고 나를 유심히 바라본다. 장난을 쳐줘. 하지만 소중이는 웃지 않는다. 그 만큼 내 표정이 심각한걸까.

아 아니야. 내가 어제 술을 많이 마셨나 보다. 미안.”

아니다. 난 분명 어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난 어제 윤수남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를 밤 늦게까지 끝마치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제를 지금 이 가방에 넣어 왔단 말이다.

나 말고 누구랑 술을 마셔? 아 영채? 좋겠다~ 여자 친구도 있고.”

너도 소영이 있잖아.”

. 소영이랑 헤어 진지 좀 됐잖아. 그만 놀려라.”

? 헤어졌다고? 저번 주에 너희 100일기념 여행 갔다 왔잖아. 강원도 춘천 남이섬에!”

야 그게 언젠데. 그만 놀려. 재미없어. 안 그래도 외로워 죽겠는데. 수업 끝났다. 이 형님은 먼저 가련다. 영채랑 데이트 잘해~”

나는 혼자 강의실에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는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볼을 꼬집어본다. 아프다. 꿈이 아니다. 그럼 이건 현실이라는 말이다. 다시 폰을 찾아서 뒷주머니, 자켓의 안주머니, 가방을 뒤져본다. 휴대폰은 없다.

 

1

 

좋을 텐데. 너의 손 꼭 잡고 그냥. 이 길을 걸었으면.

 

아침이다. 눈은 뜨지도 않고 머리는 그저 베개에 푹 박은 채 침대 바로 옆 탁자 위에 손을 뻗어 알람이 울리고 있는 내 휴대폰을 더듬더듬 찾는다. 휴대폰을 살짝 집었다가 놓쳐버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은 마치 어디선가 불이 나서 신고가 들어온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 보다 몇 배는 더 크게 알람을 울리고 있다. 너무 귀찮지만. 귀찮은 것 보다 시끄러운 것이 싫은 나는 결국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고 알람을 끈다. 그리고는 다시 눕는다.

나는 아마 전생에 오뚝이는 아니였을거다. 아침은 너무나도 귀찮다. 아침이라는 건 누가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러다 나는 왜 학교를 다니는가 부터 시작해서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다다르게 된다. 비단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내일은 토요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일으켜준다. 오늘만 버티면 내일은 아침이라는 고문 없이 잠이라는 열매를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

몇 년 째 알람음은 성시경의 좋을 텐데라는 곡이다. 휴대폰을 얼마 전에 바꿨는데도 이 점에 있어서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유별나게 좋아하는 곡은 아니지만 그냥 오래되어 익숙해진 탓인지 바꾸기 쉽지 않다. 전에 좀 더 시끄러운 곡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영채가 절대 바꾸지 말라고 해서 그냥 놔두었다. 영채가 이 노래를 선택해준 것은 아니다. 영채를 만나기 전부터 이 노래는 항상 나와 같이 해왔다. 내가 왜 이 노래를 내 알람소리로 했는지. 언제부터 이 노래가 나와 같이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내 휴대폰 안에 이 노래가 있었던 것이다. 당연이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아차. 오늘도 깜빡할 뻔 했다. 아침마다 내 여자친구인 영채에게 모닝콜을 해서 깨워줘야 한다. 통화목록을 검색해 안사람을 찾고 통화버튼을 누른다. 물론 나는 누워있다.

역시 뭔지 모를 통화음이 나온다. 유난히 노래를 많이 알고 좋아하는 나지만 몇 년째 만나는 여자친구의 통화음이 뭔지를 모르겠다. 내 취향이 아니라 딱히 제목이 궁금하지도 않다.

여보...........”

어 우리 이쁜이 일어났어? 일어나 아침 8시야. 학교 갈 준비해야지.”

으으응... 고마.....”

얼릉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 바보야.”

. 오빠도 학교 잘 갔다 와. 아침 챙겨먹고 가고. 오늘 첫날이니까 파이팅하자.”

어 알겠어 좀 이따 봐~. 사랑해.”

응 고마워. 나도 사랑해.”

매일 아침마다 제일 먼저 듣는 목소리는 영채의 목소리다. 내 시간표가 오후이고 영채 시간표가 오전일 때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영채에게 모닝콜을 해주고 나는 다시 잔다. 물론 어쩔 때는 귀찮고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영채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스럽게 불러주는 내 여자친구니까.

근데 뭐가 첫날이라는 거지? 무슨 꿈을 꾼거야.’

이렇게 나의 하루는 영채로 시작한다. 정신이 깬 것은 알람이고 정신을 들 게 하는 것은 영채다. 몸을 움직인 나는 화장실로 가서 소변을 보고 씻기 위해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어젯밤 레포트를 한다고 늦게 자서 그런지 얼굴은 팝콘마냥 빵빵하게 부었고. 머리는 말 그대로 새집이다. 교수들은 왜 이렇게 이기적인지 모르겠다. 학생들이 자신의 수업만 듣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가 얼마나 할 게 많은데!

혼자 투덜거리며 세면을 하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은 나는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면서 옆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른다. 옆머리가 뜨는 모양이라 어릴 때부터 머리를 말릴 때 옆머리를 누르는 버릇이 잇다. 몇 년 째? 아니 몇 년이나 된지는 모르겠다. 그냥 시간과는 관련 없는 습관인 것 같다. 이렇게 머리를 말린 나는 주방으로 가서 밥을 먹을 준비를 한다.

흐음. 오늘은 뭘 먹지?’

이렇게 고민한다 해도 자취생의 아침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저 아침을 잘 먹는다고 해봐야 참치캔이다. 밥을 먹고 바로 설거지를 해야 집에 냄새가 안 나기 때문에 그저 배가 채울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이 잘 먹는 아침이다. 오늘은 계란후라이를 먹을까. 냉장고를 열고 계란을 집으려 하니 혼자 있는데도 손이 무안할 정도로 계란은 하나도 없었다.

흐음... 계란을 언제 다 먹었지? 밑에 칸에 놔뒀나?’

냉장고를 요리조리 아무리 뒤져도 계란은 없다. 계란후라이가 먹고 싶다는 마음은 접어두고 오늘도 고추참치캔을 따서 테이블에 밥과 나란히 올린 후 꾸역꾸역 입에 넣는다. 이건 먹는 게 아니라 그저 입에 넣는 것이다. 혼자 이렇게 먹는 게 처음에는 뭔가 서러웠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나의 고향은 원래 마산이다. 고등학교까지 마산에서 생활한 후 대학교를 부산으로 왔다. 1학년 때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 하다 군대를 전역한 후 기숙사 신청 시기를 놓쳐서 2학년 때 부터는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 3학년인 지금은 그냥 혼자 사는 게 편해져서 자취 생활을 계속 이어 가고 있다. 대학교를 처음 진학할 때 어머니 품을 떠나 처음 지내는 거라 많이 어색하고 외로웠다. 그리고 1학년 때 기숙사에서 영채를 만나게 되었고, 지금 까지도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그저 외로워서 만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간단한 아침을 먹고 있을 때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이 알람이 울리면 내가 옷을 입고 학교에 갈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 한다. 설거지는 학교를 갔다 와서 하기로 하고 숟가락과 밥그릇을 싱크대 물에 담궈둔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꺼낸 물을 컵에 따르고 마신다. 이제 옷을 차려입고 학교를 갈 준비를 한다. 개미집처럼 여러 문이 있는 원룸빌라 사이를 나와서 학교로 걸어가는데 원룸 앞에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통들이 보인다.

아차. 쓰레기 버려야 되지.’

이른 수업 시간대도 아니니 깜빡했던 쓰레기를 가지러 다시 원룸으로 들어간다. 요즘 들어 깜빡하고 잊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도 크게 신경쓰진 않는다. 문제는 없으니까. 원룸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방에 불이 켜져 있고, 화장실 불도 켜져 있고, 심지어 냉장고 문까지 열려있었다.

뭐지? 내가 불을 안 껐었나?’

기분이 뭔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화장실 불을 끄고, 방의 불도 끄고, 냉장고 문도 잘 닫고 나왔다. 나오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뭔가 떨떠름했지만 그래도 수업에 자칫하면 늦을 수 있으니 약간 걸음을 빨리 걸었다. 다시 원룸빌라 사이를 걷다가 갑자기 뭔가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쓰레기!’

다시 원룸으로 뛰어간다.

 

기억을 잊는다. 잃는다.





성명 :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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