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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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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씩 밟을 때마다 계단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빼면 집은 무척이나 고요해서 이곳에 계단과 나만이 존재를 증명하려 발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빨리 끝내야지 생각을 하는 순간, 계단이 마침내 끝났다. 조용했다. 너무도 조용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올라왔지. 복도를 바라보았다. 하얀 바닥과 하얀 벽면. 그리고 짙은 갈색의 문이 양쪽 벽에 붙어 있었다. 문이 너무 많았다. 세 발자국을 가면 양 옆에 문이 있다. 천천히 걸었다. 세발자국, 세발자국. 끝없이 이어졌다. 이 문들은 어디로 이어지는 거지. 무서웠다 문을 열기가. 손잡이로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무엇이 있을까. 내가 찾는 게 있을까.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지? 문 너머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누구를 찾고 있었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도 여기 그대로 서있는 것도 무서웠다. 어떡할까 고민하는데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끼이익. 누군가 계단을 밟는 소리다.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진다. 나는 멍하니 복도 위에 서서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무섭다. 누가 올라오는 거지? 누군가 저 복도 끝에서 나타나는 것도 무섭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도 무섭고 그대로 서있는 것도 무섭다. 한없이 무섭다.

 

나는 문 하나를 선택했다. 눈을 감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눈을 떴다. 긴 복도다. 흰 복도와 흰 벽. 그리고 벽에는 수많은 문들이 붙어 있다.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었다. 복도는 끝나지 않았고 문들도 사라지지 않았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긴 복도를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조용했다. 조용했기에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을 때 내가 즐기고 있는 적막을 깨는 그 불청객이 무서워졌다. 복도 끝에서 문이 열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 붙은 문이 하나씩 열리고 닫히기 시작했다. 끼익거리며 열렸다가 쾅 하고 닫혔다. 그 문들이 나에게 한발자국씩 걸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문 하나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 눈앞에 펼쳐진 또 다른 복도. 흰 복도와 흰 벽. 그리고 수많은 문들. 문 속의 길, 문 속의 문. 나는 걷고 문을 열고 걷고 문을 열었다. 더 이상 보이는 건 없다.

 

예전에 어떤 작가가 단편소설을 일주일에 하나씩 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작품이 어떤지를 일단 떠나서 괴물 같은 놈이다. 어찌됐든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뜻이니까.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를 전제한다. 특정한 세상을 만들어 누군가 살게 하고 어떤 행위를 하게 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일단 창조되고 나면 작가의 손을 벗어난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아있게 만드는 것 자체가 죽을 만큼 힘든 일이다. 내가 만들어낸 인물 중에 아직 내 머리 속에 살아있는 이들은 별로 없다. 다들 어딘가에서 나도 모르는 흐름 속에서 죽어버렸다. 제대로 살아있는 건 내 데뷔작의 주인공 뿐이다. 어쩌면 나는 저주 받은 작가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뭔지 사는 게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 나는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젊음이라는 외투를 거친 내 또래들은 항상 뭔가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만큼의 에너지도 없었고 그들이 보고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로 학교 도서관에 박혀 있었다.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주로 소설들을 뒤적이는 편이었다. 문학 코너에 신작은 별로 없었지만 옛날 책들은 많았다. 옛날 소설들을 차라리 좋아했다. 절대 들떠서 얘기하지 않으니까. 한 동안은 나도 매우 들뜬 기분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썼던 원고들은 모두 태워버렸다. 도저히 내가 쓴 글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역겨웠고 가벼웠다. 그 후로 나는 안 팔리는 소설가가 되어버렸다.

 

김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데뷔작을 낸 출판사에서 아직 일하고 있는 친구인데 간간히 연락을 하며 내 원고를 보내곤 했다. 초창기에는 나를 천재작가라고까지 추켜세우던 약간 과장스런 표정과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곤 했는데, 요 몇 년간은 나와의 통화에서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기자의 모습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보내는 원고는 항상 재미도 없었고, 도저히 출판사 사장을 설득할 만한 다른 매력적인 요소도 없었으니까. 언제 갑자기 괜찮은 게 나올지 몰라 그저 전화번호부에서 내 이름을 지우지는 않는 정도로 신경을 써줄 뿐이다. 신호가 길게 간다. 최근에는 내 번호를 지웠는지도 모른다. 스팸 정도로 생각하고 무시하고 있는 건가. 초조함, 불쾌함을 지나 절망감을 절반 정도 지났을 때, 그가 전화를 받았다.

 

민상아 오랜만이다.”

 

그에게 인사를 하는 내 목소리가 굉장히 이질적으로 들렸다. 평소에 인간관계를 잘 챙기며 타인에게 호감을 주려 애쓰는 타입도 아니지만 안 팔리는 작가라는 이름표가 붙어버린 지금의 상황 속에서 뭔가 다급했는지 술자리에서가 아니면 절대 부르지 않던 녀석의 이름을 직접 부른 것이다. 수화기 너머에서도 잠깐의 침묵이 느껴진다. 녀석도 당황했을 것이다.

 

이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감정이란 걸 정확히 메스로 도려낸 듯한 말투가 그가 대답한다. 처음 만나 같이 작업을 하면서부터 알았지만 그는 결과에 매우 휘둘리는 타입이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나의 두 번째 소설을 출판하는데 열성적으로 지원해 담당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내가 보여준 초고에는 시큰둥했다. 너무 임팩트가 없고 내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구상한 이야기의 배경과 의도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는 이런 내용으로는 절대 출판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야기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손댈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생각했던 방향과 많이 달라졌지만 녀석은 매우 좋아했고 기필코 베스트셀러로 만들겠다고 자신했다. 녀석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에 압도되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책은 많이 팔렸다. 여기저기 인터뷰에 불려 다녔고 원고의뢰도 많이 들어왔다. 내가 진짜 성공한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쉴새 없이 글만 썼던 것 같다. 그리고 옆에는 항상 녀석이 있었다. 내 이야기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지만 그의 말대로 하면 분명 책은 많이 팔렸다. 나는 돈도 많이 벌었고 유명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쓴 책을 읽었다. 재미있다고 했다. 책의 어떤 부분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뭐라고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는 차라리 김기자가 대답해줘야 했다. 나는 그 부분이 재미있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글이 써지지 않았다. 오래 전에 내가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곤 했다.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감정선 위에서 상투적이고 희극적인 해프닝 뿐이었다. 내가 쓴 글에는 그런 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김기자는 다른 작가를 담당하게 되었다. 아니 여전히 나도 함께 담당하였지만 이젠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새로운 원고를 보내주고 의견을 물어도 글쎄요, 라는 말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 녀석 얼굴 본지도 참 오래된 것 같다.

 

나는 이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작가이기에 김기자가 지극히 의례적일 뿐인 인사를 건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도 최근 조금씩 다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녀석의 출판사가 최근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쪽을 전문으로 하는데 제대로 된 히트작도 없고 이대로 가다간 회사 자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야 그럭저럭 지냈지 뭐. 회사는 어때? 요새 젊은 작가들 중에서도 그리 튀는 애들은

없던데.”

 

떡밥을 던졌다. 우리가 출판사 얘기나 하며 연락하는 사이는 분명 아니었으니까. 녀석은 분명 뭔가 있을 거라고 넘겨짚을 거다.

 

그러게요, 공모전 당선됐다고 해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작품도 없고 아예 다른 길로 가버린 애들도 많아요. 요샌 정말 물건이 없어 죽겠다니까요.”

 

요새 뭐 누가 글 써서 먹고 살려고 하나. 사람들이 잘 보지도 않고 말이야.”

 

녀석이 결국 먼저 물었다.

 

선생님은 요새 준비하시는 거 없어요? 오래 쉬셨는데 하나 내셔야지 않겠어요?”

 

, 지금 준비하는 게 있긴 한데…”

 

어떤 이야깁니까?”

 

녀석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얹어졌다. 준비라는 단어에서 냄새를 맡은 것이다.

 

아직 결말 부분을 생각 중이긴 한데… . 미로에 대한 얘기야.”

 

미로요?”

 

녀석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내 이야기에 개입하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자기 안의 미로에 갇힌 사람의 이야기. 오랫동안 생각해 온 주젠데, 스스로의 도그마에 빠져버린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 미로는 출구 자체가 없을지도 모르겠어.”

 

내 대답을 듣고 녀석은 잠시 침묵했다. 둘 중의 하나이다. 대답할 가치가 없거나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거나. 다행히 아마도 두 번째였던 듯 하다.

 

출구 없는 미로라, 괜찮은 테마네요. 원고 언제쯤 나와요?”

 

한달 정도? 마무리하는 대로 보내줄게.”

 

나는 내 출구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린다. 차 안의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노래들이 나오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운전을 하고 있으면 내가 원래 있던 곳이 아닌 낯선 세계를 헤매는 기분이 든다. 주위의 풍경이 낯설어 보이고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덮는다. 결코 환영의 인사는 아닐 것 같다. 오랜만에 내려가는 고향의 근처 어딘가에서 뭔가 경고를 하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라디오 볼륨을 일부러 더 키웠다. 주위에는 다른 차들도 없다. 나 홀로 경고를 무시하며 어떤 곳을 향해 질주하는 기분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만에 가는 곳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선택한 곳인데 갑자기 이게 잘한 선택인지 의문이 든다. 나는 그곳이 그립지도 않고 반갑지도 않다.

 

미리 철구형에게 연락해 두었다. 집안끼리 가깝게 지내서 어릴 때부터 항상 함께 어울렸던 형인데 아직 고향에 남아 펜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2년이나 방치해둔 옛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철구형의 펜션에서 한달 간 묵으며 글을 쓸 생각이다. 오랜 동안 연락도 없다가 불쑥 무슨 일이냐며 화를 냈지만, 철구형은 이내 풀어진 목소리로 걱정 말고 내려오라고 했다. 항상 나를 먼저 신경 써주던 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펜션이 보인다. 오늘밤은 아마 밤새 철구형 술상대를 해줘야 할거다.

 

그래 어떻게 지냈냐?”

 

함께 저녁을 먹으며 소주를 한잔 따라주며 형이 물었다.

 

그냥 뭐. 되는 대로 있는 대로 살았어요.”

 

임마 그게 뭐냐. 잘 살아야지. 아직 혼자냐?”

 

나는 2년 전에 이혼했다. 생각해 보니 2년 전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가 떠나가고 어머니도 떠나갔다. 김기자도 나를 거의 떠나갔었지. 쓴 웃음이 난다. 와이프는 나의 팬이었다. 아니 팬인 적이 있었다. 학교 후배였는데, 내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나의 글을 좋아했다. 분명히 멋진 작가가 될 거라고 좋은 소설을 쓸 거라고 나를 응원했었다. 어쩌면 내 글 속에서 스스로의 판타지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삶은 현실이고 나는 현실 속에서는 판타지를 만드는 재주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때가 바로 2년 전이었다. 꼴 같지 않게 마지막으로 만난 날 나는 그녀에게 소설 하나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녀가 좋아했지만 내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소설. 그 말을 했을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집에 틀어박혀 그 생각만 했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 진짜 나.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하나하나 반추해 갔다. 내가 처음 쓰기 시작했던 때, 나를 끌고 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야기를 하나씩 구상하며 표현하려고 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김기자가 그걸 막았었고, 나 스스로가 그것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다시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결국 그것이었다. 혼자의 힘으로 찾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다시 일 하려고요. 여긴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정리하려고 온 거에요.”

 

잠시 동안 둘 다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었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에 돌아온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정오가 다 되어서 일어났다. 펜션에는 다른 손님도 없었고 철구형도 볼 일이 있는지 어딜 나간 것 같았다. 혼자 상을 차려 깨작거리며 배를 채우고 집을 나섰다. 비는 다 개었고 화창한 햇살이 동네를 비추고 있다. 이 동네는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평화롭지만 음울한 느낌이 서려있는 이 길. 어릴 때부터 이 길을 빨리 걸어서 벗어나곤 했다.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느낌이 들지만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조용히 혼자 길을 따라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모두 일을 나갔는지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다. 나를 아는 체 할 사람이 없으니 다행이다.

 

시간이 꽤 된 것 같아 펜션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왔던 길을 다시 따라 걷는데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분명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 뿐인데 새로운 길을 따라가는 것 같다. 아무리 걸어도 펜션이 나오지 않았다. 갈래길도 얼마 되지 않은데 이 좁은 동네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미로도 아닌 곳에서 길을 잃다니, 미로에라도 빠지면 나는 절대 출구를 못 찾을 것이다. 투덜거리며 길을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길을 찾았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많이 걸었다. 집에 들어가서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집중하기 힘들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파 결국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도 늦게 일어났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방에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노트를 꺼내 지금까지 쓴 걸 읽어 보았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써보았다. 이런 결말이라면 내가 생각했던 주제와 거의 맞을 것 같긴 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굉장히 허술해 보였다. 다른 방식으로 결말을 써보았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써내려 갔다.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절대 내가 원하는 결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빈 페이지를 펼쳐 놓고 다시 펜을 들었다. 나는 거친 선을 그었다. 가로로 세로로 계속해서 그었다. 한 페이지가 가득 차게 되었고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그건 미로였다. 머리 속에서 이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답답해서 머리를 감싸고 있는데 밖에서 철구형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방문을 열고 나갔다.

 

민재야, 어쩐대냐. 재형이가 죽었다네.”

 

재형이?...”

 

처음엔 재형이가 누구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을 뒤지며 그 이름을 찾았다. 맞아 재형이, 재형이가 있었다. 이 곳에서 항상 함께 있었던 건 철구형과 나 그리고 재형이 셋이었다. 왜 이제까지 재형이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런데 재형이가 죽었다니.

 

재형이가 죽다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철구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대. 이렇게 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냐.”

 

재형이는 여린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집에서 자주 쉬었다. 철구형과 내가 일부러 재형이 집에 찾아가서 이야기도 많이 하고 건강할 때는 억지로 끌고나와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다. 사실 글을 잘 썼던 건 재형이였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다. 집에 가득 쌓인 책을 읽으며 자기가 쓴 글들을 나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분명 재형이는 멋진 소설가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좋지 않은 몸 때문에 학교에도 못 가고 결국 이곳에 계속 남아 살게 된 것이다.

 

형이 나 대신 좋은 글 써줘.”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갈 때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다. 꼭 재형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느새 글을 쓰고 있었다. 다른 일 다 제쳐두고 글만 쓰고 있을 때 재형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재형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였을까. 고향에 잘 내려오지도 않았지만, 내려와도 그를 항상 챙기지는 않았다. 그의 얼굴도 내 기억 속에서는 거의 잊혀졌다. 내가 글을 쓰고 소설가가 되고 다시 또 다른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무얼 하며 지내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했을까.

 

철구형과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바로 재형이집으로 향했다. 펜션에서 꽤 떨어져 후미진 곳이었다. 철구형과 둘이 이렇게 그곳을 찾아가니 옛날 생각이 났다. 재형이는 매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집에 들어가서 재형이의 영정사진 앞에 섰다. 아주 어릴 때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의 재형이는 전혀 늙지 않았다. 웃지도 않고 찡그리지도 않은 표정이다. 그의 얼굴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부끄럽고 아쉬웠다. 재형이의 어머님은 작은방에서 계속 울고 계셨다. 철구형과 함께 가 인사를 했지만 계속 울고만 계셨다.

 

친척이 많지 않은지 집에 와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마을 사람 몇 명만이 앉아 있었다. 우리도 그 무리에 끼어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다. 철구형이 나를 소개시켰다.

민재 기억하지? 소설 쓰는 친구. 이번에 일 때문에 내려와서 우리 펜션에 있다가 나랑 같이 왔어.”

 

민재 오랜만이다. 몇 년 만에 본거 같네?”

 

길수형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는 고향에 눌러앉아 농사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예 길수형, 오랜만에 내려왔는데 이런 자리에서 인사 드리네요. 연락 못 드려 미안해요.”

 

아니야 아니야, 서울에서 바쁘게 살았는데 어떻게 일일이 챙기냐. 잘 살고 있지?”

 

네 형, 그럭저럭이요.”

 

옆에 있던 영수도 아는 체 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동년배 친구였다.

 

새끼, 옛날 그대로네. 내려오면 연락 좀 해라 임마.”

 

멋쩍게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영수와 함께 온 제수씨에게도 인사를 했다. 테이블에 다섯이 앉아 술을 한잔씩 따르며 재형이 얘기를 했다.

 

재형이가 그래도 몸이 많이 건강해져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도 좀 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왜 그랬을까?”

 

길수형이 말문을 열었다. 재형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했을까 궁금해서 내가 물어보았는데 영수가 끼어들어 대신 대답해 주었다.

 

걔가 원래 소설가 되고 싶어 했잖냐. 요새 막 글을 써가지고 여기저기 출판사에 보내고 그랬어. 뭐 좋은 답은 안 오는 것 같았지만…”

 

재형이는 꿈을 놓지 않았었구나.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을까.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을 텐데. 기억하기로 재형이의 글은 무척 섬세했다. 아픈 몸 때문에 자신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었지만 그런 만큼 상상이 더 크고 세밀했다. 그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있었다. 현실의 경계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시하고 어쩌면 보지 않으려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더 보듬고 형상화하려 했다. 궁금했다. 그가 최근에 다시 쓰기 시작한 글들이. 재형이 쓴 글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민재형

 

재진이었다.

 

재진아, 피곤하지? 이쪽에 와서 좀 쉬어라.”

 

  길수형이 재진이를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는 다시 나를 불렀다.

 

민재형, 전해줄 게 있어요.”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진이 앞에 섰다. 재진이도 아무 말 않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2층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재형이 방임을 기억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재진이를 따라 그곳으로 갔다. 옛날과 똑같이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고 그의 채취가 느껴진다. 이곳에서 그는 계속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책상 위에 노트가 몇 권 올려져 있었는데 재진이가 그 중에 한 권을 집었다.

 

민재형에게 전해 주라고 했어요.”

 

그 노트를 받아 겉면을 보았다. 단정한 글씨로 습작 3’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나에게 남긴 글. 재형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무척이나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이 내 앞에 다가오자 덜컥 무서워졌다. 내가 받아서 읽어도 되는 것일까. 재진이의 목소리에 뭔가 강한 힘이 걸려 있는 것처럼 나를 하나의 선택지로 이끌었다.

 

, 이 방에서 천천히 읽어요.”

 

조용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렸다. 재진이는 방을 나갔고 나는 재형이의 책상에 앉아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짧은 이야기들이었다. 택시기사는 죽은 사람을 손님으로 태웠다. 그 손님은 죽어 있지만 살아 있기도 했다.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는 그 사람은 가고픈 곳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었다. 어떤 작곡가는 죽어버린 부인을 살아있게 만드는 곡을 만들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곡이기도 했다. 작곡가가 그것을 바라는지 죽은 사람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재형이가 쓴 이야기들은 모든 경계가 모호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 환희와 고통, 이 모든 것의 구분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 일치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났으며 누군가는 살아있지도 않고 죽어있지도 않았다. 어떤 길은 이어짐을 전제하지 않으며 어떤 입구는 들어감에 목적이 있지 않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재형이의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었으며 그곳을 뚫고 나갈 용기도 없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 길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그곳을 뚫고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한동안 그 속에서 나는 모든 것을 얻어가며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민재, 나와 똑같았다. 그는 또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발을 딛는 모든 곳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아무도 그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문득 스스로가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빛과 소리, 시간조차 사라져 버린 절망의 장소. 그는 소리를 질렀다. 이건 미로야, 출구가 없는 미로라구.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재형이의 방을 서둘러 나왔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밖은 캄캄하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으나 달도 구름에 가려 있다. 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서 나는 옷깃을 여미었다.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었다. 한 모금 빨고 상가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담배를 피웠다. 집안으로 들어가서 재형이의 영정사진 쪽으로 걸어갔다. 재형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표정이 슬펐다. 고민과 불안의 흔적인 듯 눈가의 주름도 보인다. 재형이의 사진은 분명 어릴 때의 모습 그대로였는데 전혀 다른 사진처럼 보인다. 한발자국 떨어져서 다시 쳐다보니 분명 다른 사진이다. 저건 내 얼굴이다.

 

나는 철구형과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테이블 쪽으로 갔다. 철구형에게 말했다.

 

, 저기 영정사진 어떻게 된 거에요? 왜 내 얼굴로 바뀐 거죠?”

 

형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한번 더 물었지만 고개도 이쪽으로 돌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전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서로 얘기를 하고 있다. 영수가 말하고 있다.

 

재형이가 몸은 건강해졌는데 사실 머리는 좀 이상해졌어요.”

 

뭔 소리야 그게?”

 

재형이가 출판사 여러 군데에다 원고 보내고 했다고 그랬잖아요. 재진이한테 들었는데, 사실 재형이가 말만 그랬지 제대로 쓴 원고는 하나도 없었대요. 출판사에서 직접 전화해서 재진이가 받았는데, 재형이가 자꾸 빈 종이 수십 장을 자기네 출판사로 보낸다고 왜 이러냐고 항의했대요 글쎄.”

 

무슨 소리지 그게. 내가 지금 재형이가 쓴 소설들을 읽고 왔는데. 내가 읽은 그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니. 나는 정신이 점점 몽롱해지며 힘이 빠졌다. 그들에게 말을 다시 붙일 기운조차 들지 않았다. 힘을 끌어 모아 가까스로 영수에게 말을 걸었다.

 

영수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번에도 내 말은 무시되었다. 철구형이 영수의 말을 받았다.

 

재형이가 너무 힘들어서 마음을 다쳤나 봐. 아마 재형이는 죽어서도 자기가 못다 쓴 이야기 쓰고 있겠지.”

 

나는 비틀거리며 다시 영정사진 쪽으로 향했다. 사진이 없었다. 재진이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테이블도 사람들도 없었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 집이 되어 버렸다. 결국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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