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증

by kalifa posted Mar 1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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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반증


 

 무척이나 더운 해였다.

2002 한일 월드컵이 이제 막 끝나고, 사람들은 잠시 동안의 기쁨도 잊고 다시 자신들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모진 삶속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야만 했던 무렵이었다. 그 무렵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이는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영민이었다.왜소한 체격에 깡마른 인상. 그러나 알 수 없이 그 눈에서 만큼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보였다. 그의 집은 가난했고, 대학을 보낼 형편이 되지 못한 그의 부모는 그를 대구의 어느 직업전문학교로 보내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약간의 푼돈과 달방을 얻어 주고 그를 내쫓듯 품에서 내보냈다. 한 동안 그는,아무 할 일이 없었다.혼자서 시내를 서성이기도 하고,공원 벤치에 앉아 연신 시간만 때우는게 그의 일상이었다.그의 부모의 바램대로 대구라는 도시에 혼자 남겨졌을 뿐이었다.영민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공원의 구석진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게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가끔씩 말을 걸어오는이라곤,교회 전도부에서 나왔다며 팜플렛을 건네고 이번 주말에 꼭 나오라고 말을 건네는 사람,그리고 길을 묻는 사람들이 전부였다.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이 외롭다고 느껴진적이 별로 없었다. 텅빈 회색도시에 혼자서 유령처럼 떠도는 자신의 존재가 퍽이나 재밌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곳에선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의 이름이 무엇이고 고향이 어딘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그의 가장 큰 기쁨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무도 그가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그는 그 도시의 유령이었다.온 도시가 그의 땅이었고,그가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는 이도,뭐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이도 없었다.외로움은 점점 더 옅어져갔다.

그는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정말 다양한 부류의 인간군상들을 다 구경할 수 있었다. 폐지 줍는 노인들,총총 걸음의 연인들, 시험이 끝나 일찍 학교를 마친 학생들,산책을 나온 엄마와 아기들,

더 이상 삶에 대한 미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인생들도 있었고,아예 벤치에 술상을 마련해 놓고 술판을 벌인이들도 있었다.아마도 영민은

스스로가 그 도시의 시장 쯤 되는 듯이 여겨졌다. 아무것도 가진것도, 아무것도 그의 친구가 될 순 없었지만,그 누구도 그에게 그의 혼자라는 죄를 묻지 않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그날도 벤치에 혼자서 앉아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었다.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영민은 조금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는 급한대로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의 정자 아래로 몸을 숨겼다.비가 그치길 한참이나 그는 기다렸다.그 때 였을까? 그의 눈에 아주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펼쳐졌다. 정자 아래서 시선을 고정한채 서있는데 도로 건너편 편의점 앞 화물차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조수석의 그녀는 나이가 30대 초반, 운전석의 남자는 아마 이제 막 환갑을 치룬 나이정도 보였다.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남자는 그녀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폭행하고 있었다.나이는 꾀나 있어보였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체격의 남자였고,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그의 주먹질을 받아 내고 있었다. 영민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생각을 하고, 신고를 하는게 나을까? 하고 핸드폰을 꺼내며 망설였다.

어찌나 남자 주먹이 우악스러웠던지 꾀나 먼 거리에서 보였던 화물차가 덜컹덜컹 요동칠 정도였다. 영민은 조금 겁이 나기도 하고, 스스로가 조금 비겁하게 까지 느껴지긴 했으나 괜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화물차 조수석의 문이 덜컹하고 열리더니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곤,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보단,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주위를 살피며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비가 온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고,거리를 지나는 사람이라곤 그닥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운전석의 사내는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그 사내는 싸구려 항공점퍼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한 모금 깊게 피우곤, 꽁초를 차창 밖으로 던진 다음 어딘가로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

그녀는 몹시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하늘색 반팔 셔츠에 하얀색 스카프를 목에 걸치고 있었다. 물론 비에 흠뻑 젖은 채로.

그녀는 영민 에게 다가 왔다. 이제야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었나 보다.

두 사람은 한 동안 정자 아래에서 같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영민 이었다. 아무리 말이 없는 영민 이었지만, 최소한 괜찮으시냐고 묻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자존심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낯선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네…….괜찮아요.

그녀의 콧잔등과 입가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영민이 그의 주머니에서 휴대용 화장지를 건네려는 순간, 그녀는 몹시도 그를 경계하며 한 발짝 멀어졌다. 그리곤 목에 메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얼굴의 피를 대충 닦아내었다. 빗물에 섞여 피는 쉽게 닦아낼 수 있었지만,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영민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간 해선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그였지만, 비도 오고, 여자가 그렇게 까지 폭행을 당하고 자기 옆에 서있는데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차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이번엔 그녀가 조금 경계를 푼 듯 보였다.

네.감사해요. 괜찮아요.

지나가는 소낙비인 줄 알았더니, 비는 쉽사리 그치질 않았다. 영민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같이 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다친 사람을 언제까지고 빗속에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은 주위를 둘러 폐지 줍는 노인이 놓친 듯한 펄프박스를 찾아 내었다.그것으로 비를 피할 셈이었다.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 였지만, 일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제일 먼저 싸구려 경양식집이 눈에 띄었다.

저기로 갈까요?

영민이 물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눈으로 대답을 하였다. 영민은 일단 좀 따뜻한 것을 먹여야 겠다는 생각에 우동이 생각났다.

영민은 우동을 주문하고 말없이 테이블을 찾아 그녀와 함께 마주보고 앉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좀전의 일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약간의 슬픔의 기색과 체념의 낯빛을 띄긴 했으나 결코 얼마전의 일을 겪은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우동이 나오자, 후루룩 하고 뜨거운 국물부터 삼켰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까는 왜 그러신거 에요.

영민이 물었다. 물론 스스로 주제 넘는 오지랖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뭐라도 말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남자 분은 누구세요? 하고 또 물었다.

그녀는 의외로 침착하면서도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저희 아버지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왜 그러신거 에요? 영민이 재차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가끔 있는 일이에요.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시간이 흘러도, 서로가 나눌 수 있는 대화는 그 사건의 스펙트럼을 벗어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우동 국물이 식어갈 무렵,영민은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경혜에요.이경혜.

그녀가 애써 웃음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대화의 스펙트럼이 그 사건을 약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 부터였다. 영민도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고, 고향이 어디며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고, 지금은 부모님의 바램대로 직업전문학교라는 곳을 다니기 위해 조금씩 사정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신 고개만 끄덕일 뿐,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강릉이 고향이고 아버지와 함께 화물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며 잡다한 생활용품을 팔며 사는 여자라 말했다.

그러다 영민의 눈이 그녀의 목덜미 약간 아랫부분에 놓였다. 처음 봤을 때 흰색 스카프로 목을 가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피를 닦아 내느라 목에 메었던 스카프를 풀고 나니 그녀의 목덜미 주위에 커다란 하얀 반점이 보였다.

목 주위에 그 하얀 반점은 어쩌다 그러신거 에요? 화상자국인가요?

그러자, 경혜는 냉큼 다시 스카프를 쥐어짜낸 다음 자신의 목덜미를 가렸다.   약간 당황한 영민은 자신이 좀 지나쳤던걸까?하고 생각하였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별거 아니에요. 백반증이라고,피부의 멜라닌 색소가 점점 빠져나가면서 피부가 하예 지는 병이에요. 어릴 땐, 오백 원 자리 동전만한 크기였는데, 이게 점점 더 커지더니 지금처럼 되었어요.

아 그러시구나…….제가 괜한걸. 여쭸나봐요.

경혜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녀가 활짝 웃어보였다. 덩달아 영민도 기분이 조금 으쓱해졌다. 낯선 대도시에서 근 한 달 여 만에 누군가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비록 어리긴 하지만,한 남자로서 위기에 처한 여성을 나름의 방법으로 도왔다는 뿌듯함이,그리고 그녀가 활짝 웃어주었다는게 스스로에게 조금 자랑스러졌다.

그녀는 조금씩 영민에게 경계심을 풀어나갔다.

직업전문학교라면 어떤걸 배우고 싶으신 거에요? 경혜가 물었다.

사실 영민은 그 딴것에는 별다른 고민 없이 지내왔던 터 였다. 그저 부모님의 바람대로 기술이나 하나 배워보고자 왔을 뿐, 그 동안 무엇을 알아보거나, 자신이 무엇을 이 도시에서 해야할 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그냥 기술이나 하나 배워보려고요…….

어떤 거요?

음…….뭐 그냥 자동차 정비나, 컴퓨터도 있고...중장비 기술 같은 것도 있고..

이렇게 대충 얼버무렸다.

경혜는 말하지 않았지만 영민의 사정과 속내를 이미 눈치 채었다. 자신과 별반 다름이 없는 인생이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지독한 아웃사이더임을 알아보았다.

아웃사이더에겐 아웃사이더 냄새가 난다.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오랫동안 혼자서 삶을 지내온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특유한 냄새....아니...후견이랄까..

이런저런 대화가 지속되었다. 어쩌다가 경혜는 자신의 나이를 말했다. 낯선 남자에게 자신의 나이를 알려 주는 건 사실조금 껄끄러운 일이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어린 영민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딱히 상대적 연장자로서의 위치 라기 보다 여성 특유의 모성애적 마음이 그녀로 하여금 영민에게 마음을 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표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첨부터 딱히 분노나 좌절 같은 기색은 없는 그녀의 표정 이었지만,뭐라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초췌함과 무기력함이 천년동안 비를 맞아 패여 버린 인자한 불상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녀의 표정의 변화는 그러 했다.무뚝뚝함 도 아닌, 깊은 애정이나 사랑도 아닌, 의도된 친절이나 훈련받은 예절도 아닌 그저 묵묵한 미소가랄까...

영민은 자신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그녀에게 굴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 남자로써 약한 여성을 구해내었다는 당당한 자부심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어느덧 그녀의 알 수 없는 미소에 자신이 점점 굴복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딱히 자신이 그녀보다 나이가 어려서도 아니 었고, 알 수 없는 온화함과 편안함이 그를 그녀 앞에서 자신이 오히려 상대적 약자임을 느끼게 만들었다. 대화의 주도권은 점점 그녀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혜가 이렇게 말했다.

아...그럼 나도 영민씨처럼 지금하는일 때려 치고 기술이나 배울까요?

그녀가 이젠 농을 치며 말을 건넸다.

저랑 같이 배워요.

영민이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별안간 파...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린채 웃어버렸다.

영민은 조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이 그 스스로 조금 수면위로 떠올랐던 까닭이다.그러나 영민은 그 까닭을 알진 못했다.

재밌겠네...나랑 같이 배워요.

그럼 하시던 일이랑 아버지는 어쩌시구요....영민은 어정쩡한 대답을 했다.

뭐,될대로 되라죠?하하하...

그녀는 이제 쾌활함 까지 보였다.

농담인지 진담인지,영민으로선 알길이 없었다.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영민에게 연락처를 물어보았다.평생 누군가에게 마음을 쉬이 열어본적도 다가가본적도 없는 영민이었지만,그녀에겐 마치 무장해제 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렇다고 그가 낯선 대도시에서의 외로움이나 사람의 정에 대한 배고픔이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굴복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영민 역시도 그녀 못지않게 오랜 세월을 혼자서 보내왔던 터라, 혼자라는 사실이 주는 외로움이나 두려움 따위는 익숙해 진지가 오래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영민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그녀에게 마음이 열리고 있음을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멈추 었고,그것으로 영민과 경혜는 헤어졌다.

그날 저녁 싸구려 모텔 달방으로 돌아온 영민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그러나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이었다.또 다시 지루한 시간들이 그의 머리맡에 다가와 그의 게으른 시간을 깨웠다. 영민은 시내를 서성였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저속한 유흥주점 간판들, 미인항시대기, 전국에서 두번째로 싼 휴대폰집, 새벽까지 마시다 게워낸 토사물들, 바닥에 휘날리는 전단지들, 그 모두가 그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영민은 깨달았다.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자신이 이 어마어마하게 큰 대도시에 버려진 사생아와 같은 처지임을...그 동안 몰랐었는데, 외로움 따위는 잊어버렸다고 생각 했는데,그게 아니었다.

그때부터였다.

영민은 외로움의 처절함에 뼈가 사뭇쳤다.왜 인지는 몰랐다.

지루하고도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여전히 구석진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홀로 휘파람을 불어 보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길고양이에게 은근슬쩍 다가가 과자부스러기 나부랭이를 나누어 주는게 그의 일상이었다.

이 주쯤 지났을까…….

한 통의 문자가 그의 휴대폰을 울렸다. 혹시 그녀일까..하고 기대했던 영민은 실망하고 말았다. 얼마전 그냥 상담이나 받아보자는 생각으로 들렀던 직업학교에서 국비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광고 메시지였다.

젠장.....

영민은 아주 조그맣게 입술을 열고 욕지거리를 내 뱉었다. 자신의 처지가 새삼 처량 하겠 끔, 그제사 느껴졌던 이유였다.

그 황량한 대도시에서 그렇게 지내다보니, 영민은 생각이 났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부모님 눈치와 등쌀에 못 이겨 쫓겨난 듯 밀려왔지만 그제사 이젠 뭔가 시작해야 함을 알았던 것이다. 문자메세지를 보낸 학원을 다시 찾아갔다.

어떤걸 배우고 싶으세요?

상담원이 물었다.

생각해본적 없던 영민이었다.

음.....

마치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 무슨 햄버거 고를지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처럼, 그저 팜플렛 위에서 열심히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제과제빵,일식요리사,자동차정비공,잡다한 컴퓨터자격증, 굴삭기 같은 각종 중장비 기술, 그리고 디지털카메라 사용법 같은 가벼운 교양강좌 나부랭이가 개설되어있었다.

어느 것 하나 영민의 마음에는 딱 이거구나 할만한 게 없었다. 팜플렛 뒷장을 넘겼다.포토샵,디자인,유화그리기,석고제작,웃음치료사.

영민은 돈벌이가 될 만한 기술을 배워야만 했다.그러 자면 중장비기술이나 일식요리사 같은 것이 그나마 유망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왠지 정이 가지 않았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는 그냥 아무거나 해보자라는 생각에 아주 의외로 석고상제작을 해볼까 라는 생각을 한다.그게 뭔지도 모르고,그냥 그저 자기가 그나마 손재주 있고 어릴적부터 무엇인가 만드는 것이 좋아던 그였기에, 그것을 선택한다.

매주 월 수 금 하루 3시간씩 수업이 진행 되었다.학교 다닐 때, 얇디  얇은 미술책에서 석고상을 보았고, 고등학교 시절 미술실 청소를 하다 슬쩍 석고상을 만져보았을 뿐이었다.

강좌는 1년 과정 이었고, 처음 그는 어딘가에 속해서 꾸준히 다닌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수업에도 자주 빼먹곤 하였다.

하지만 영민은 점차 그것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자기 손에서 무언가가 창조된다는 것. 그의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그 무엇이 실제로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조금씩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다.

처음 몇 달간은,초등학생들이 가지고 노는 찰흙으로 연습을 하였다. 그리하여 플라스틱 끌이나 칼로 그냥 닥치는대로 만들어 보았다. 주로 대상은 자신이 공원벤치에 앉아서 구경했던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 이었다.그들의 삶에 지친 표정들, 혹은 쉴 새 없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표정, 폐지 줍는 허리 굽은 노인들의 표정, 시험성적이 좋았던 탓인지 해맑게 웃는 학생들의 표정, 그 동안 벤치에 앉아 관찰했던 그 모든 인간 군상들의 표정이 그의 작품대상이었다.

반 년쯤 지났을까…….

그의 실력도 이제는 그나마 어느 정도 형태가 보이는 듯 한 실력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수업이 없는 날에는 공원 벤치에 앉아 일회용 도시락을 까먹거나, 캔 커피를 마시거나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어느새 그는 그녀와 만난 이후로 그에게 찾아왔던 외로움 따위의 감정이 다시 옅어져 감을 느꼈다. 여전히 그는 행여나 그녀가 그에게 연락을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거나, 아니면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볼까하고 생각을 하였지만,

또 막상 그리 내키지 만은 안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의 빈자리를 대신해 나간 것은, 아주 요상하게도 그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었다.

단 한번 만났을 뿐 이었는데, 왜 그리 그녀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는지 영민 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할 것이 그 넓은 대도시에서 그처럼 우연 비스무리하게 만나 생면부지의 남녀 가 밥 한 끼 같이 한다는게 어쩌면 귀한 인연이 아니 던 가. 더군 다가 영민의 처지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리고 짐작컨대, 그녀 또한 그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남아있으리라. 별 보잘 것 없는 일이 었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그의 도움으로 그 날의 무너졌던 자신을 애써 추스릴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 아닌가. 그리 생각하면, 그녀 또한 그가 조금은 남달리 생각될 법도 하다.

비록 시간이 반년이나 지나 기억에서 조차 멀어져버렸을 테지만...

 

어찌돼었던 간에,

영민은 계속 성실히 학원을 다녔다.하면 할수록 흥미가 생겨 이제는 학원을 가지 않는 날이면 내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하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학원사람들과 인사조차 하지 않던 영민 이었지만, 차차 사람들과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고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이곳에 오게 된 사람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물론 공원벤치에 앉아서 구경할 때 만큼 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학원 안에서도 있었다. 배우는 사람들의 나이 대중도 없었고, 신분이나 직업의 유 무,귀 천 따위도 없는 그야말로 난장이었다.

또 게 중에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집이 가난해 대학 대신이 이곳을 선택한 청년들도 있었고, 퇴직 후 마땅히 시간을 보낼 곳이 없어 그곳으로 찾아온 이도 있었 으며, 못 배운 설움에 한이 맺혀 그곳을 찾아온 노인들도 있었다.

영민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점차 이런 생각이 자라났다. 내가 벤치에 앉아 혼자서 세상 구경하는 것 이나,   지금처럼 온갖 인간 군상들이 뒤섞여 있는 이곳에서 내가 무언가 흥미를 갖고 무엇을 배우는 것이나, 자신의 과거를 캐묻거나 왜 혼자냐고 죄를 묻거나, 자신의 아웃사이더 냄새를 역하게 여기는 이 조차도 없었으며, 그는 그곳에서 홀로이면서도 홀로가 아니고, 함께 있 돼, 그는 여전히 혼자라는 자유마저 박탈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곳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영민의 기술은 점차 나아져갔다. 이제는 플라스틱 도구가 아닌 전문가들이 쓰는 끌과 칼을 장만하여 실력을 더해갔다. 그는 이제 단순히 아무것이나 뚝딱하고 빗어내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단순한 석고상이라도 그 안에 단순한 외형이 아닌 삶의 메시지,그 동안 자신이 관조해온 세상에 대한 통찰,온간 군상의 내면의 아픔,외로움.그리고 자신이 살아오며 줄곧 느꼈던 인간에 대한 연민 등을 담아내야 함을 깨달았다.

영민은 더욱 더 분발하기 시작한다.   도서관에 들러 디자인관련 서적을 찾아보고, 미술 관련 서적과 미학에 관련된 책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에는 어려웠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게다가 한번도 자신이 제대로 교육받아본 적 없는 분야에 스스로 발을 담그고 스스로를 교육해 나간다는 것이 영 쉽지 만은 않을 일이었다. 책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랐고, 그저 처음에는 사진과 그림들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전체 수업이 8할 쯤 완료되었을 때,   그녀에게서 문자 한통 도착 했다.어떻게 지내느냐고 묻는 경혜의 문자 였다. 영민은 순간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걸로 끝인줄 알았는데,그녀가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었다.영민은 반가웠다.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잘 지내요. 학원도 꼬박꼬박 잘 다니고요.

이어진 경혜의 문자.

그때 정말 고마 웠어요. 영민씨 아니었으면 그날 참 서러웠을거 에요.

 

별걸요. 덕분에 저도 마음잡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걸요.

 

네?

 

아무튼 그렇다구요. 나중에 한번 만나서 또 밥 한 끼 같이 해요.

 

그래요 영민씨. 고마워요.잘지내세요.

경혜의 마지막 문자였다.

 

영민은 그날 본 그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더운 여름철 한사코 스카프로 자신의 상처를 감싸야만 했던 그녀.   그렇게 비참하게 남자에게서 폭력을 당하고도 내면의 끓어오르는 모성애 탓에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오히려 일으켜 세우던 그 묵묵한 미소.

삶에 대한 회한도 아닌, 체념도 아닌, 무엇보다도 절망도 분노도 아닌, 그렇다고 타고난 상냥함이나 훈련된 예의바름 아닌, 그 모든 것을 초월한 그 담담한 미소. 처절하게 외롭고 아프면서도,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영민에게 처음으로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선물한 그녀의 미소.

영민은 이제 그 그녀의 미소를 자신의 작품으로 조각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 하루 한 낯의 기억을 되새기려 그는 몸부림을 쳤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1년의 수업이 종강을 하고 졸업작품 발표회가 다가왔다.

영민은 사력을 다해 그녀의 미소를 담아내려고 애를 썼다.수십번 만들었다가 부수고, 다시 새기고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영민은 비가 오는 날 아직 약간 덜 굳은 석고상을 들고 일부러 공원을   찾았다. 덜 굳은 탓인지 형태가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날 그녀에게서 봤던 그 묵묵한 미소의 느낌이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영민은 다시 석고상을 닦아 내고,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붉은색 스카프를 그 석고상의 목에 둘러 메었다.그리고 목덜미 아래 흰색 반점들이 있었던 위치 에는, 영민이 직접 하나하나 꽃자수를 새겨 넣었다. 

그날 밤,영민은 그 석고상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졸업 작품 발표회에 그대로 내어 놓았다.빗물을 맞아 얼룩덜룩 해진 대다가 형태가 많이 일그러져 버렸지만, 그날 그가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미소의 느낌에는 더욱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영민은 그대로 출품을 한다.

의외의 결과였다. 그의 작품이 최우수 졸업 작품으로 선정 된다.기존의 석고상들이 하나 같이 그림같은 미남 미녀의 상, 혹은 영웅과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처럼 불완전속에서 그처럼 완전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었던 영민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엿본 영민은 이제 아예 미대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가난한 그의 부모님이 었지만,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의 무엇인가에 대한 열정과 성실에 희망을 가지며 약간의 학자금대출을 받아 그를 대학교에 보내기로 한다.

영민은 그곳에서 여전히 아웃사이더이면서도, 아웃사이더가 아닌,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함께이되, 자신의 자유를 방해받지 않는 여전한 자유인이었다. 그는 여전히 영원한 이방인이면서도 세상의 주인이었고, 그 누구도 그의 혼자됨을 비웃거나 그를 정죄하지 안았 으며 다만, 이상할 정도의 열정으로 학업에 심취하는 그가 동료학생들로 하여금 존경의 대상이 되기는 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등록금이 면제되는가 하면, 이따금 학생발표회에서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대상으로 조각상을 만들 었다. 아마도 그는 평생 그때 그녀의 묵묵한 미소를 완전에 가깝게 만들어 나가기로 한 작정 이었나보다. 항상 작품을 만들고 난 후에는 그는 매번 붉은색 스카프로 그 석고상의 목덜미 부분을 가리곤 했다. 그것이 그녀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이었으리라.

그의 졸업작 발표회가 있던 날.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 었고, 그의 동기들과 교수님들 조차 그의 작품성를 알아보고 어떻게 그러한 감정을 석고 안에 새겨 넣을 수 있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혹시 그 석고상의 주인이 따로 있는것 아니냐 고까지 했다. 거기에 관해선 영민은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날 밤,영민은 그녀의 연락처를 보고 먼저 연락한번 해볼까...하고 생각을 하였다. 이번엔 문자가 아니라 직접 통화가 하고 싶었다. 어색함이나 긴장감 따위의 감정이 아니라 이젠 어엿한 성인으로서 자라난 자신의 모습과 자랑스러운 그의 지금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마도 근4년만인 것 같다.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다.이어 지는 통화음 끝에 통화는 약 2초가량 이상한 잡음소리와 함께, 날카롭고 높은 여자의 짜증섞인 목소리와 함께 뚝 하고 신호가 끊겼다. 

영민은 문득 다시 그 비 오던 그날의 생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찌된 일일까.....

다시 핸드폰을 꺼내 재차 통화버튼을 눌러 보려했지만 왠지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녀에게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민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 그동안 그는 나름대로 번듯한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이젠 어엿한 성인이 되었는데 그 동안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지 나이를 조금 더 먹고 생각해보니 이제야 그 동안의 그녀의 안부와 삶이 그려지기 시작했다.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날품팔이 딸. 화물차 한 대로 전국을 떠도는 유랑민의 삶. 술만 마시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남자의 주먹…….

고향이 강릉이라 하였던가…….

그는 내심 한번 찾아가 볼까…….하고 생각하였다. 고향이 강릉이란 것 외에는 아는 것은 없었다. 팔도를 떠도는 그녀이기에 그곳에 찾아간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확률조차 없었다. 괜히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의무감이 다시 느껴졌다. 비오던날  5년 전 그때처럼…….그는 그냥 여행 삼아 한번 강릉을 찾아가기로 한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바닷가 마을이었다.

여느 바닷가도시들처럼 바닷가특유의 약간의 비릿한 공기냄새가 먼저 그의 코를 자극하였다. 정박해 둔 작은 어선들, 그물을 수선하는 아낙들, 일찌감치 동네 대포 집에서 술판을 벌린 억센 어부들의 손목들. 여러 가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도시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안았 지만, 그녀의 고향이라는 생각에, 마치 그녀의 품안에 들어와 있는 듯 했다.이곳에서의 그녀의 삶이 어떠했을까 그는 나름의 상상을 해보는 것이 싫지만은 안았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너무도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전에 공원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던 때처럼, 바다가 보이는 항구 근처에 조용히 앉아 다시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불현 듯,다시 자신이 지독히도 외로운 아웃사이더임을 깨달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일까? 비릿한 바닷가마을 특유의 공기 냄새…….바로 이 냄새였다. 이 냄새가 아웃사이더 특유의 냄새와 닮아있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게 아웃사이더 였다. 횟집 앞을 지키는 똥개도, 지나가는 아주머니도, 배달가는 중국집 아저씨도, 출항을 준비하는 어부들도, 방파제 위의 낚시 꾼 들도, 그물을 손질하는 아낙들도, 모두 아웃사이더였다. 그들 모두에게서 그 냄새가 난 까닭이었다. 비릿한 공기는 그 도시의 모든 것을 홀로 있게 하면서도 같은 아웃사이더라는 품안에 서로를 기대게 만들었다.

그는 왠지 그 도시가 그의 고향처럼 느껴졌다. 영민의 표정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져간다. 그 때의 홀로됨의 자유로움이 그를 나름 충족시킨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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