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기까지

by 만두 posted Apr 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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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기 까지

 



세상이 제 아무리 좋아졌어도 바꿀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아마 그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일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 선무당도 제 앞길은 모른다는 것처럼 내 인생에 갑작스레 불어 닥친 폭풍우 같은 시련 앞에 난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미래를 예견하고 애석한 운명을 바꿔보려고 해봐도 그건 더 이상 인간영역이 아니었기에, 후에 불어 닥칠 재앙을 감내할 자신은 없었다. 그 사람도 재앙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했고 단지 애석한 운명을 따르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말만을 남긴 채,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나타난 것처럼 갑작스럽게 내 곁을 떠났다. 깜박이조차 켜지 않은 채로 그렇게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공기가 언제나 내 곁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아직도 함께인 것 같고, 전화한통에도 달려올 것처럼 느껴질 만큼 아직 믿기지 않는다. 영원 할 것만 같았던 그 사람과의 지난날들이 거짓말처럼 한여름 밤의 꿈같은 존재가 돼버린 지금, 미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 그 사람이 떠나던 그 순간의 모든 걸 기억한다.

 

“날씨 진짜 좋다. 놀러가자”

“귀찮아.”

“왜, 가자, 옷사러가자"

 

그 사람이 떠난 그날은 마치 봄 같았다. 7월, 초여름의 날씨가 후덥지근할 법도 한데, 유난히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봄 같았다. 4월 같은 봄은 아닌 5월 같은 늦봄의 마지막 피날레와 동시에 여름의 서막을 알리는 날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좋은 날이었다. 김 첨지가 유난히 손님이 많던 운수 좋은 그날처럼.

 

“가자, 가자”“바빠”

“어차피 집에서 티비만 볼 거잖아. 하는 것도 없잖아.”

“그냥 귀찮아”

“다음에 어디 가자고 하기만 해봐”

 

생각해보면 그 사람, 참 독특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나가는 것조차 귀찮아하면서도 막상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처럼 좋아했다. 소처럼 일하는 모습이 부지런 한 것 같으면서도 아침잠은 유별나게 많았다. 꽃으로 치면 장미 같으면서도 무궁화 같은 느낌에 채소로 비유하면 양파 같은 사람이랄까? 말 그대로 독특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련한지 모르겠다. 세상 모든 일들에 관심이 많았고, 의문이 많던 그 사람……. 그 사람의 모든 말에는 ‘왜’라는 의문이 항상 들어가 있었다. 자칫하면 오해를 살수도 있는 말은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상처 주던 사람이었다. 가끔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고된 날들도 많았다. 의문이 생기면 풀리지 않을 때까지 내게 따지고 드니까. 다투기도 많이 다퉜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건데.

왜? 안하면 안 돼?”

“어 안 돼”

“왜? 윤여름 네가 하면 되잖아”

“아니, 좀 해주면 덧나냐? 고작 빨래 개는 거 하나 못 해주냐?”

“아니, 너 할 일이잖아. 왜 내가 해줘야하는지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해봐 그럼 해줄게”

“그놈의 육하원칙, 언젠가 내가 그대로 되갚아 준다."

“네가? 할 수만 있다면야. 언제든 받아들여줄게. 근데 넌 나보다 머리가 나빠서 내가 설명해도 이해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언제나 시작은 미미했다. 우리의 싸움의 서막은 늘 맛있는 거 한 입, 물 한 모금, 더 편한 자리, 더 예쁜 옷, 이런 사소한 일상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너넨 아직도 싸우니?”

“도대체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만나기만하면 싸워. 24이나, 17이나 별 차이가 없잖아 제발 사이좋게 지낼 순 없니?”

“아니, 엄마 이건 윤여름이 먼저 그랬다고”

“내가 뭘 언니가 먼저 그랬잖아.

”“아 시끄러, 너네 방이나 치워

”“어 이따가 치울게

“이따가 라고 하지 말고 지금”

“엄마가 지금 하라잖아. 아빠 또 큰소리 치기 전에 시키면 이따가 하지 말고 바로 치워라”

“이거 언니가 입었잖아. 그러니까 언니가 치워”

아주 이럴 때만 언니지 윤여름?”

 

응답하라 1988에 보라와 덕선이가 있다면 우리집에는 윤여름과 내가 있었다. 여름이는 덕선이였고, 나는 보라였다. 서러움 많은 둘째이면서 가족을 챙기는, 주변에서 놀리지만 늘 밝은, 집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덕선이처럼, 여름이도 그랬다. 그런 윤여름의 어학연수 선언은 그야말로 폭탄이었다. 처음엔 말뿐인 어학연수인줄 알았다. 내가 가고 싶어 했을 때도 말은 오갔으나, 말뿐 이였으니까 이번에도 말뿐일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늘 그런 줄 알았다. 나보다 여름이가 먼저 섭렵하게 된다는 걸, 비자가 나온 후에야 실감했다. 비자가 나오자 일은 일사천리였다.

“출국이 언제야”

“다음 달 첫째 주 월요일”

“학원은 언제 가는데”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가지”

“아니 무슨 출국이 평일이야. 보통은 주말에 하지 않냐? 바로 공부할 수 있게?”

“가장 빠른 날 비행기 표 급하게 구해서 그런거껄?”

내색은 안하려고 했지만,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를 자격지심 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직 가지 못했던 곳, 경험하지 못했던걸 여름이가 먼저 경험한다는 마음에 괜한 질투처럼 느껴져서 그랬었는지. 무엇을 경험하려하든, 언제나 우선권은 내게 있었으니까. 해외봉사, 여행, 옷, 하다못해 공부까지 내 경험이 먼저였다. 내가 언니고 여름인 동생 이였으니까.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겼었는지 모른다. 1다음에 2인 것처럼 너무 당연해 질투가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질투였다.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그저 철없는 언니에 불과했다. 나는

"윤여름, 잘 다녀와라”

“응, 나 진짜 열심히 공부하고 올게”

“그래, 건강조심하고. 기죽지 말고 넌 그냥 공부하러가니까 모르면 당당히 물어봐”

“응, 나 이제 입국심사 들어가니까. 언니도 약 잘 챙겨먹고 건강히 있어. 내년에 건강하게 보자 우리”

그 사람, 아무리 아파도 약은 절대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약 먹으면 자신이 약해보여서 싫다는 어쭙잖은 핑계만 대는 사람이었다. 독감에 걸려도 미련하게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미련해보였다. 약 먹으면 금방 나을 수 있는 감기조차 앓고만 있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 사람이 떠난 후에야 알았다. 그 사람은 약해보여서 약 먹는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약에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이 익숙해질까 두려웠던 것이라는 사실을. 늘 곁에 있었으면서도 감기보다 독한 약을 먹는 그 사람에게 왜 약 안 먹고 아프냐는 핀잔이 아닌 간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따스한 말 한 마디 조차 해주지 않았던 나였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서운하다고 했을 법한데 그 사람 그런 말조차 하지 않았다.

 

“뭐하냐?”

“어. 왔어? 우리 짐싸”

“아직도? 윤겨울 넌 오늘 학교 안 갔어?”

“나 오늘 졸업식이라서 학교 안 갔는데 여름언니 짐 챙기는 거 도와줬어”

“병원에서는 뭐래?”

“뭘 뭐래야, 검사만 받고 오는 건데. 나중에 결과 들으러 다시 가야돼. 나 좀 잘 거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마. 윤가을도 오면 전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난, 환자였다. 몇 달 전부터 스멀거리는 불길한 기운이 맴돌아 급하게 주치의 면담을 신청했었다. 갑작스런 증상호소에 가족들도 많이 놀라했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가족이었기에. 검사 결과쯤 듣지 않아도 내 몸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서서히 변해 가고 있는지.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을 주관적이지만 내 스스로 이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이었기에 나도 점점 커지는 불안감을 쉽게 말할 순 없었다. 괜한 걱정만 끼칠까 오히려 두려웠다. 더욱이 난,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렵게 돌아온 일상이 깨지는 게 무서웠고,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세상은 내게 남아있는 궁금증이 많은 새롭고 신기한 곳이었다. 그래서 더 받아들일 수 없어 말 못했다. 이 사실을 여름이가, 가을이가, 겨울이가 그리고 내게 가장 미안해하고 있을 엄마 아빠가 알게 하고 싶진 않았다. 미칠 듯 한 고통이 잇따라왔지만, 아직 목이 메여왔다.

"언니, 밥 안 먹어도 돼?"

“입맛 없어”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겼다. 그 사람이 떠날 것 같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두려움.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을 말로 설명할 방도는 없었지만, 미묘하게 다가오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난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그 설마라는 오만이 불러일으킨 비극일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조금 더 물어봤더라면, 내가 떠나는 것에 들 떠있지 않았더라면……. 그 잠시의 느낌으로 괜찮으냐고 물어봤더라면 난 지금 무겁게 느껴지는 이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을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애석한 운명을 뒤로 미룰 순 있었을까 잠시라도 정말 잠시라도 그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까?

 

“거의 다왔어 10분 뒤에 나와 윤가을”

“어”

“너 준비했어 안했어?!”

“이제 준비해야지”

“내가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 놓으라고 했지!?”

“아 거참, 금방 준비하네요, 여름 누님. 거참 성질 좀 죽이시죠? 주름지시겠네!"

“됐고, 빨리나와 언니 기다리게 하면 또 욕먹는다?"

 

 몇 년 전, 매일 밤을 울며 보낸 던 적이 있다. 하루는 심하게 눈이 부어 주변사람들이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을 때 밤에 라면 먹어 부은 거라고 둘러댔지만, 시실 나를 무척이나 아껴줬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을 했었다. 처음 경험하는 일에 서툴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다. 오랜 투병생활을 하셨지만, 그래도 영원히 볼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난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꽤 오랜 시간 슬퍼했었다. 아마, 그래서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지켜봤었기에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상황이라고. 내가 이렇게 변하고 있다고. 나 너무 무섭고, 두렵다고 미처 말하지 못했다. 그게 더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내 스스로 그들에게 상처 주는 게 미안하고 그 표정들을 지켜보며 말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난 끝끝내 그들을 보면서 말하지 못했다. 내가 이제 곧 떠날지 모른다는 그 말을. 그들에게 하지 못한 채 점점 야위어 갔다. 다이어트 한다는 말로 가렸지만, 아마도 날 품었던 사람들인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게 챙겨줬겠지.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걸 내가 알면 아파 할까봐 또 나를 배려했겠지. 그렇게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게 떠나게 되겠지. 이런 생각들이 점점 더 커질 때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제야 뒤늦게.

 

“야 윤여름 윤가을 윤겨울. 닭발 먹을래?”

“치킨 먹으면 안 돼?”

“응. 안 돼”

“아, 왜!”

“내가 사는 거니까”

“큰누나 제발. 닭발은 누나들이랑 윤겨울만 좋아하잖아"

가끔 가을이 놀리는 게 재밌었다. 오빠처럼 챙겨주는 가을이가 우리 남매들 유일한 남자라 기가 눌려있지만 난 안다. 가을이가 어른이 되간다는 사실쯤은. 생각이 점점 더 깊어져가는 가을이 보면서 내가 없어도 가을이라면 여름이과 겨울이를 잘 챙겨 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안도한다. 가을이가 있는 것에 감사하다.

“언니, 그냥 엽떡먹자”

“그래! 차라리 엽떡이 낫다”

“계란찜 추가해도 돼?”

“어. 그리고 카드결제”

 

겨울이를 보면 엄마 같을 때가 있다. 엄마보다 심한 잔소리, 엄마보다 심한 깔끔, 엄마 닮은 애교면 우리집은 웃음꽃 한 다발이다. 내가 떠나도 일상으로 잘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 해 줄 수 있는 겨울이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윤겨울! 혼또니 해봐”

“왜”

“아니면 옷걸이 춤!”

“자꾸 시키지 말고 빨래도 개고 책상 좀 치워”

“알았어. 해주면 할게!”

나와 겉모습은 가장 닮아있지만, 속안을 보면 뭐랄까 나라도 나보단 겨울이를 여름이를, 그리고 가을이를 찾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너무나. 어릴 땐 무척이나 싫었는데 가족이 많아 이젠 안심이 된다. 내가 일찍 떠날 운명이라 우리 가족이 덜 슬퍼질 수 있도록 단단히 질수 있도록 많은 가족을 보내 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간혹 엄마가 이런 얘기를 했었다.‘내가 널 너무 떠받들었어. 난 여름이한테 제일 미안해. 해준 게 너무 없어서’

처음에 그 말이 싫었다. 나에게 강요는 많이 했으면서. 왜 결국엔 여름이지? 이런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잠깐 머지않은 시간 내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엄마에겐 뭐든 내가 먼저였다. 엄마에게 난 늘 처음 이였으니까. 엄마 아빠의 첫 자식, 첫 돌. 뭐든 처음 이였으니까. 이제 서서히 정리를 하려보니, 내가 가장 미안해 할 사람은 남이 아닌 내 가족. 내 부모님이지만, 그중 으뜸은 여름이었다. 바로 내 뒤에 있는 윤여름. 내가 그늘을 만들어 가려버렸던, 내 소중한 동생 윤여름. 동행하면서 빛을 내주고, 길을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나는 동행이 아닌 그저 선두 하려했던 이기적 이였던 언니라는 걸 알았다.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못된 딸이고 나쁜 언니였으며 무관심한 누나였다. 해준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받기만 하고 대우받길 바랐다는 사람이었다. 내가 잘못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떠날 때가 되고나서야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애석하게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난 뒤였다. 더 이상 닦을 수도 담을 수도 없는 그런.

“근데, 작은누나 큰누나 선물 뭐 샀어? 큰누나 깐깐하잖아”

“그래도 내가 사다 준건 잘 썼어. 언니”

“하긴, 누나가 골라 준건 잘 쓰더라. 마음에 드나봐”

“가을아. 누나다. 이게 바로 누나야. 배워”

“뭐래오늘 큰누나 보면 진짜 오랜만이다. 빨리 보고싶네”

“웬일이냐 네가 언니를 다 보고 싶어 하고?”

“여전하겠지? 안 늙고?”

“당연히 그대로겠지. 언니가 늙겠니. 저기 윤겨울 있네. 윤겨울!”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 흔히들 말한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아니니까. 경험하기 전엔 장님이라 쉽게 얘기한다. 이제 그만 그 사람 놓아주라고, 편히 가게 두라고. 그래야 그 사람도 마음 편할 거라고. 떠난 사람은 오죽 힘들겠느냐고. 힘들겠지만 곁에 있어주겠다고. 안다. 나도 그 사람을 놔줘야 한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을 놓아주게 되면 그 사람의 자리를 채워나갈 자신이 아직 없다. 아직 날도와 달라고, 그 사람을 찾아 헤맨다. 그럴 때마다 울지 않고 웃어야 도와줄 그 사람인걸 뻔히 알면서도 연습이 부족한지 웃음보다 눈물이 먼저 그 사람을 마중한다. 또다시 봄이 왔지만 아직은 그리우면서도 밉다. 내 곁에 더 있지 않고 일찍 날 떠난 그 사람이.

 

“어? 뭐야 언니 빨리 왔네? 선물은?”

“가져왔다. 언니가 좋아 할 만한 걸로”

“뭔데”

 

봄이 끝나갈 무렵, 나의 공간을 온전히 깨끗하게 정리 한 채로 눈에 띄는 곳에 편지 한 장을 남겼다.

 

‘엄마, 아빠. 여름아, 가을아. 그리고 겨울아. 이 편지를 나도 같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읽게 될지 아니면 나 없이 읽게 될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는다면 나 없이 읽고 있겠지? 나 없으니까 짜증부리는 사람도 없고, 예민한 사람도 없고, 아픈 사람도 없고, 속 썩이는 사람도 없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편하지? 이렇게 알게 해서 정말 미안해. 혼자서만 준비했던 거 정말 미안해. 나 이기적인 사람이잖아. 그래서 끝까지 이기적 이려고 그랬어. 내가 편하게 가고 싶어서. 나 끝까지 못됐지?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도 마. 나 없다고 슬퍼도 하지 말고. 울지도 마. 그냥 나 생각하면서 웃어줘. 나는, 엄마아빠의 첫 번째라 행복했어요. 많이 다퉜지만, 그래도 언제나 행복했어요. 늘 봄 같은 삶이였어요. 받기만하고 힘들게만 하고 떠나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들. 잘 챙겨주지 못하고 떠나 미안하다. 너넨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있어 너흰 가장 좋은 동생들이야. 여름아, 어릴 때부터 내가 구박 많이 하고 창피하다고 했던 모진 말들 이젠 잊어주라. 너에게 정말 많이 미안해. 그리고 세상에 누구나 수없이 아파. 난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었을 뿐이야. 너무 통탄해 하지 말아줘. 애석한 운명을 바꿀 길은 없으니까.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는 것처럼 이 슬픔도 지나갈 거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이 폭풍우 같은 슬픔도 잠시뿐이야.’

 

그렇게 세 번의 계절이 지났다. 그 사람 말처럼 일상으로 돌아왔고 또다시 봄은 찾아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언니, 우리 왔어. 오랜만이지? 미안, 우리도 시간 맞추기가 되게 힘들더라고. 엄마아빠는 슬퍼하실까봐 여행 보내드리고 우리만 왔어. 나 잘했지?”

“누나만했냐. 다 같이 했잖아. 큰 누나, 잘지 냈지? 거긴 어때? 좋아? 우리 안보고 싶어?”

“큰언니, 나 남친 생겼어. 이제 나 솔로 아니다?”

“맞아. 언니, 윤겨울 좋다는 애도 있더라? 신기하지?”

“언니! 좋은날 이러지 말자. 큰언니, 여기 봄이야. 언니도 보이지? 되게 싱그럽고 따사로워. 진짜 날 좋다? 화창해. 언니 이런 날에 같이 있었으면 꽃구경가는 건데 아쉽다”

“야, 윤겨울, 넌 아직도 언니를 모르니? 쯧쯧. 언니 그런 거 싫어해”

“맞아, 누나 싫어해 꽃가루 날리는 날에 사람 북적거려서 짜증난대”

“왜 나 언니랑 꽃구경 간적 있거든!? 그때 시내도 갔다가 누가 언니 새 신발 밟았잖아. 언니 순간 욱해가지고 싸움 날 뻔 했잖아”

“언니, 보고 싶다. 진짜 많이 보고 싶다. 참! 언니, 생일 축하해. 오늘 언니 생일이라 그런지 날씨진짜 좋아. 진짜 날씨하나는 끝내준다”

“누나 선물 줘야지”

“참, 언니 거기 우리 없어서 심심하지? 그래서 내가 언니가 예전에 CD구웠던 거 가지고 왔어. 우리가 나중에 가면 적응하기 쉽게 언니가 춤 다 가르쳐놔”

“큰언니 감당하기 쉽지 않을걸."

“둘도 만만치 않아”

“야 윤가을 오랜만에 한번 맞아볼래? 날도 좋은데 먼지 나게 한번?”

 

그 사람……. 나를 갑자기 떠나 내가 사뭇 치게 그리워하는 그 사람…….떠올리기만 해도 눈물부터 흐르게 했던 그 사람, 우리언니 ‘윤봄’은 이름처럼 따사롭고 화창했으며 싱그러웠다. 시작하고 도전하는걸 좋아했으며,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진행중이였다. 언니는 언제나 만개한 꽃처럼 실없이 웃고 다녔다. 장난 많은 언니지만 이제 갓 피어오르는 새싹처럼 수줍음이 많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언니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그래서 언니가 있던 자리 이제 내가 채우려 하지 않고 비워 두려한다. 그래야, 봄이 와도 눈물 나지 않을 테니까. 봄이 와도 슬퍼지지 않고 웃을 수 있을 테니까. 언니 말처럼. 세상 누구나 병에 걸리고. 아프다. 우리언니의 병명은 스트레스였다. 늘 웃고 있는 그 모습에 가려져 알 수 없었다. 웃고있다고 그냥 넘겼다. 행복해 보이니까.

 

어느 날 언니가 그랬다. 사람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고.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게 사람 얼굴이라고 했었다. 난, 병원에 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를 돌보고 수백 명의 환자 이름을 보고 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병원에서 보지만, 우리 언니가 이곳에 환자로 내원할 수 있을 거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우리언니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언니도 의료진 이였으니까. 자신의 일에 누구보다 뿌듯해하며 돌보는 걸 힘들어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언니가 환자였다. 생각지 못한 일이였고, 그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때 알았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홀연히 영영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아파서 내원하고, 누군가는 생사를 오가고 있으며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한다. 태어난 생명에게만 봄이 아니기를. 언제나 우리에게 화창한 봄날이기를 바란다면 남을 챙기기보다 내 가족과 내 주변의 안녕을 먼저 돌아보기를.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를. 이 세상 어디에도 영원한 것이 없음을…….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에서 지금 곁에 있는 그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소중한 것임을 떠나보내기 전에 느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