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씨(無名氏)

by 작은작가 posted Apr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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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無名氏)


나의 인생은 처음부터 불행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행운의 여신이라는 신을 떠받들고 살아가고 있다. 행운의 여신은 다른 신들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에 현신하여 사람들에게 그녀의 능력을 사용해 수많은 축복을 내렸다. 그로 인해, 나라는 더 풍요로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나도 여신님의 축복을 받으며 유복한 가정에서 다정한 어머님과 아버님, 사랑스러운 동생들과 함께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이 찾아온 것은 단 한 순간이었다. 시작된 곳이 어딘지 모를 거대한 불꽃은 나의 소중한 모든 것을 앗아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살아남았다. 아니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다행인 것 같지도 않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이 불타버렸으니까. 불이 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그러게 여신님께 충분히 기도를 드렸어야…… ‘,‘여신님께서 보살펴주시지 못한 것 같아요.’ 같이 바보 같은 소리만 해댔다. 역시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오늘 내 이야기의 끝을 맺기 위해, 바다를 찾았다. 조용한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하지만, 어리석은 내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없이 푸르른 날씨에 바다는 아름다운 푸른 빛을 띄며, 역동적인 파도소리를 냈다. 잠시나마 그 광경에 자신이 이 곳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잊었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그 순간이 나의 이야기를 이어가게 할 전환점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걸로 네 자신은 만족하느냐?”


절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는 나를 중후한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아름다운 광경에 인식하지 못 했던 것일까, 죽음을 앞두고 수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인식하지 못 했던 것 일까.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이에   10걸음 떨어진 자리에 그 남자는 서 있었다. 낡은 누더기를 걸치고, 낡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써, 얼굴이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겉모습은 한없이 볼품없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네가 만족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누추한 남자가 한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혹시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아니, 그의 얼굴은 모자의 그늘에 가려져 나를 정말로 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지. 너는 그 날의 일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가?”


그 날? 무슨 말씀이신가요?”


네 모든 것이 불타버린 날.”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가 그 날의 일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인가. ‘혹시 불을 지른 범인이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 당신이 어떻게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요? 당신은 그 날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건가요!”


나의 목소리는 한없이 격양되어 있었다. 그와 반대로 그는 흔들림 없이 서있는 자세에서 고개만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지. 단지 네가 그 일에 대해 알고 싶다면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제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당신에게 부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네가 하려던 일을 계속해도 좋다네.”


갑자기 나타나 마치 나를 아는 듯한 말투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그 덕분에 나는 시간만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이제 죽을 것이기에 그다지 중요하진 않지만, 앞으로 조금이다. 하지만, 절벽의 끝자락에 다다라 바라본 바다는 아까와는 다르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짙고도 어두운 파란빛으로 내가 자신을 향해 뛰어내리기만을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보였다. 죽는 것이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분명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한 걸음인데, 왜 나는 이 걸음을 때지 못하는 것인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에게 무엇이 이 한 걸음을 방해하는 것인가이대로는 뛰어내리지 못할 것 같다. 인식해버린 두려움에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 치듯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얼마나 한심한가 하고 스스로 생각한다. 뒷걸음질쳐 돌아온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아까와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다-에 아직도 그는 서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벌어진다고 아직도 거기에 서서 지켜보고 계신가요? 행색이 초라하신 것을 보니 저에게 무언가를 원해 계속 그렇게 계신 거 같은데, 저에게도 이제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어요.”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향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다. 아까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행운의 여신이 축복해주고 있는 이 나라 안에서 나는 한 번도 그와 같은 차림의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행운이 여신이 우리나라를 찾아 온 이후, 모두가 축복받고 그로 인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은 없다며, 주변 어르신들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면 그 말이 사실인가하고 의심도 들지만 그래도 이웃의 도움으로 전부 잃고 난 뒤에도 살아갈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의 행색을 보거나 태도를 보면 어쩌다 보니 우리나라까지 오게 된 외국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결국 나는 끝을 맺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 마음만 복잡해져 돌아간다. 집은 불타 없어졌지만, 마을의 사제님이 신전 근처에 잘 곳을 마련해 준 덕분에 비바람을 피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비록 언덕 위에 있어 마을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고,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장식되어있는 거대한 신전과 달리 조그마한 방에 화장실이 달린 정말 볼품없는 건물이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 불평할 여유는 없다.


돌아가는 나의 발걸음에 맞춰,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던 그가 나를 따라 오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따라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두려움을 느껴 조금 걸음을 재촉하여 걸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아까와 같은 속도로 계속해서 나를 쫓아왔다. 그렇게 나와 그의 거리는 멀어졌고 따돌렸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조금은 죄책감도 들었지만 그와 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묵고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 창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서성이는 사제님이 보였다.


사제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듯 사제님은 눈을 크게 뜬 채 온 몸의 살이 흔들릴 정도로 급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형제님이시군요. 그렇게 놀래시면 늙은이 심장에 좋지 않습니다. 안에 계실 줄 알고 찾아왔지만 반응이 없어서……. 어딘가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별 일은 아니고 잠시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사제님은 그제서야 마음이 안정되셨는지 언제나처럼 자상히 웃으시며 그러시군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나요?”


! 실은 생활하시는데 불편하신 것은 없나 하고 걱정이 되어 찾아와 봤습니다만, 그저 늙은이의 쓸 데 없는 걱정이었나 보군요.”


하하, 사제님 덕분에 모든 것을 잃은 제가 생활할 곳이 생겨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


사제님은 자상한 웃음을 지며, 나의 말에 연신 고개를 저으며 더 잘해주지 못 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렇게 주변에 사제님과 같이 자상히 돌봐주는 사람이 남아있는데 매일과 같이 죽으려 마음먹는 나를 보면 많은 사람들은 왜 그러는지 이해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로 인해 모든 것이 타버린 그날의 상처는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형제님을 위해 여신님께 기도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만, 바쁘신지 대답이 없으시더군요.”


아닙니다. 그렇게 노력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 이후로 사제님은 희망을 가지라는 등의 말을 남기고는 바쁘신 일이 있다며 신전으로 돌아가셨다. 홀로 방에 남은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화재가 난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무엇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렇게 벽이나 천장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벽이나 천장을 보며, 잃어버린 부모님의 얼굴이나 화목했던 가정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생각하려고 하면 더욱더 괴로워져 눈물이 날 것 같았기에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제 흘릴 눈물이 남아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나는 반갑지 않은 노크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튼 늦은 밤에 방문한 반갑지 않은 방문자를 위해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한다. 지금 시간에 찾아온 방문자를 반갑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자고 있는 나를 깨운 원흉이며, 사제님도 이 시간에는 찾아오시지 않기에 그리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열고 그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그 방문자가 생각을 뛰어넘는 최악의 방문자라고는 생각하지도 못 했다. 낮에 절벽에서 보았던 볼품없어 보이는 남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나는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였는가.”


? 무슨…… 아까도 그렇고 그렇게 알지 못할 말만 하신다면 더 이상 오지 말아주세요.”


그는 고개를 조금 들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그가 나를 본 것처럼 느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낮에도 그렇고 그의 얼굴은 거대한 챙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본다고 느껴질 때마다 온 몸의 감각이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모르는가?”


그의 모습과 다르게 중후한 목소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죄여왔다. 부정할 수 없다. 왜 나는 그의 질문에 대항하지 못하는 것인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일 뿐인데…….


당신은 대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으면서, 도대체 저보고 어쩌라는 것입니까?제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아무것도. 정작 네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겠지. “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 질문에 답했다.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그는 나에게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라고 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하고 싶은 일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다. 물론 떠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두려워 방관했던 그날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저는 이제 어쩌면 되는 것입니까?”


그건 나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잃은 그 장소로 돌아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는지 그 장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내버려두고 돌아가버렸다. 과거를 다시 한번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고통에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지 말았으면 했던 아침이 찾아왔다.  불청객이 다녀간 이후, 생각에 잠겨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정신이 멍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아직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세면대까지 걸어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받아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몽롱한 정신이 씻겨나간 자리에는 불안만이 가득하였다. 지금에 와서도 정말로 그곳을 찾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가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제지하듯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 밖에는 초라해 보이는 그가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굳이 이곳까지 찾아오지 않아도 갈 생각입니다.”


나는 방금 전까지 했던 생각이 괜히 마음에 찔려 묻지도 않은 말에 변명을 해버렸다. 그 역시 그런 건 묻지 않았다는 듯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답이 없는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전하고 나갈 채비를 하였다. 채비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잠시나마 근엄해 보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지나쳐 언덕을 내려갔다. 선선한 아침바람을 느끼며 나는 오늘 처음으로 기분이 편해졌다. 하지만, 마을까지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그에게 궁금한 것에 대해 물어보며 시간을 보내자 생각했다.


당신은 무언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에게 알려주실 마음은 없으신가요?”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네. 아니,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군.”


역시 그에게서 내가 원하는 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나는 방금 전까지의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다 생각하며 조용히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가다 잠깐씩 그를 보면 초라한 겉모습과 다르게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우리 집, 아니 모든 것이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까지는 좀 더 가야 한다. 거리는 내가 떠나기 전과 많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부족함이 없는 마을은 사람들로 가득 차 조금은 어수선해 보일 정도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거북하게 느껴지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북한 것은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은 나를 그 때와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얼른 이곳에서 떠나고 싶다.


더 이상은 안 되겠네요.”


무슨 말인가? 목적지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그는 눈 앞에 있는 것을 보라는 듯이 돌아가려고 하는 나의 옷깃을 잡아 세웠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 내가 잊고 있었던 가장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검게 불타 땅 위에 이리저리 흩뿌려져 있고, 불에 타도 버티고 서있던 벽도 비바람에 풍화되어 그 모습을 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불쾌하다. 그렇기에 이곳 사람들도 아직까지 이 불쾌한 장소를 처리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봐도 기분 좋지 않은 곳이네요. 그건 그렇고 전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건가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난 그 질문에 대해 답해 줄 수 없다네.”


그는 이번에도 역시 질문에 대한 답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답을 추구하는 나도 이상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로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 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찾아와 거북했던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곳에 돌아왔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하다. 이렇게 돌아와 다 타버린 집을 다시 보고 있으니 가족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요리를 먹으며 함께 웃으며 지내던 그 때가 생각나 더더욱 마음이 괴로워졌다. 그 때의 화재만 아니었어도 지금도 다같이 어머니의 밥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괴로운 마음에 눈을 돌리려 했지만, 다 타버린 집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멍하니 비어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밥을 먹던 식탁도, 아버지와 같이 책을 읽던 의자도 모두 타버려 잿가루가 되어 검게만 보인다. 동생이 가지고 놀던 곰인형도 저렇게 가슴언저리나 팔에 검게 탄 자국이 남아있지 않은가.


곰인형이 아직 남아있어? 그 화재로 모두 타버렸을텐데?”


나는 검게 타버린 집의 잔재들을 해치며, 동생의 곰인형이 남아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아직 동생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떻게 그 화재 속에서 인형이 타지 않고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곰인형을 검게 탄 파편 사이에서 들어올렸다. 이곳 저곳 검게 탄 자국이 남아있지만, 형태를 잃지 않고 남아있었다. 곰인형의 존재만으로 동생이 이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곳에 온 것은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곰인형을 가지고 가려는 순간, 곰인형이 있던 자리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주었다. 날개를 단 누군가가 승리를 축복하듯 고개를 들고 팔을 높이 든 문양이 새겨져 있는 금빛 휘장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휘장을 집에서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이렇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이라면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일까? 이 문장은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축복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 안 조각상과 닮아있다. 벽에 새겨진 그림도 이 휘장의 문양과 닮아있었다. 신전의 물건인 것일까? 나는 사제님에게 가져가 물어보기로 하고, 바지주머니 속에 휘장을 넣어두었다. 마을까지 오는 길은 불안뿐인 불안한 걸음이었지만, 동생의 곰인형을 찾아 돌아가는 길은 무언가 안심이 되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나에게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작지만 큰 힘이 되었다. 머물고 있는 곳에 다다르자 문 앞에 서계신 사제님이 보였다.


어딘가 다녀오는 길이십니까, 형제님?”


잠시 마을에 좀 다녀왔습니다.”


, 그러시군요. 희한한 일이네요. 형제님께서 마을에 다녀오시다니. 다시는 안 가실 줄 알았지만, 늙은이의 착각이었군요. 하하.”


웃으며 대답하는 사제님의 몸은 덜덜 떨고 있었다. 어딘가 몸이 안 좋으신가 보다.


사제님, 어딘가 불편하신가요? 몸이 떨리고 계신데요. 힘드시면 돌아가 보시는 것이……


, 아닙니다. 늙어서 그런지 가만히 있어도 덜덜 떨리더군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뒤에 서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그게 저도 마을에 내려가다 처음 본 분이라 잘 모르지만, 어쩌다 보니 같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내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그러십니까? 이거 어떻게 하죠. 오늘 점심은 형제님 한 명분만 준비 했는데, 손님이 계실 줄이야.”


괜찮습니다. 제 것을 나눠먹도록 하죠.”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이거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는 건 제 쪽인걸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야……. 그럼, 이 늙은이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점심 기도를 올려야 해서.”


조심히 돌아가세요, 사제님


그렇게 사제님은 돌아가시고, 나와 그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우선 그곳에서 가지고 온 곰인형을 침대의 베개 옆에 두고, 사제님이 가져오신 점심식사인 빵과 스프를 반으로 나누어 각각 접시에 담아 식사 준비를 마쳤다. 사제님이 가끔씩 방문하시면 앉으시는 의자에 그를 안내하고는 나도 의자에 앉았다.


별 것 없지만 드세요.”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입을 열었다.


기도는 올리지 않는 것인가, 너희의 그 신이라는 존재에게?”


사제님과 식사를 할 때는 올리지만, 저희 집은 원래 식사 전에 기도하지 않아서요. 지금도 식사 전에 기도 하지 않아요.”


그런가.”


그는 무언가 납득한 듯이 입을 다물고는 다시 가만히 앉아있었다.


안 드시나요?”


나에게 이것들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먹지 않아도 된다.”


무슨 소리세요.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잖아요. 안 먹으면 쓰러질지도 모른다고요. 이상한 소리 마시고 먹어요.”


그래도 그는 전혀 먹을 생각이 없어 보여, 나는 먹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좋아요. 당신이 먹지 않는다면, 저도 먹지 않겠어요.”


그럴 필요는 없다. 정말 나는 이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이번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포기한 듯이 빵을 집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먹으니까 좋잖아요.”


정말로 이것들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 , 그러시겠죠. 얼른 드세요.”


그가 식사하는 것을 보며, 나도 다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끝마친 후, 나는 침대에 누워 오늘 찾아낸 곰돌이 인형을 안아보기도 하고, 두 팔로 들어 바라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불탔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찾아낸 자그마한 희망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곳에서 주웠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곰인형을 침대에 내려놓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휘장을 꺼내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휘장에 대해 사제님께 물어보는 것을 깜박했네.”


나는 휘장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신전까지 가기로 했다. 물론 그도 나를 따라 신전에 간다. 가까운 곳에 신전이 있었지만, 이렇게 신전에 가는 것은 오랜만이다. 불이 집에 타 신전으로 사제님이 데리고 오셨을 때 이후로는 처음인가. 언제나 사제님이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오셔 안부를 물어봐 주셨다.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많이 고생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죄송한 마음이 든다. 신전에 도착하자,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보는 신전의 웅장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양 옆으로는 휘장과 같은 모습을 한 하얀 조각상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양 옆의 거대한 창으로부터 바닥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사제님이 기도를 올리시는 제단이 보였다. 제단은 일반 바닥보다 조금 턱이 높았고, 그 위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상 위에 황금빛 초와 황금으로 만든 잔 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역시 휘장과 같은 모습의 거대한 그림이 걸려있었다. 갑자기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비교되어 실망감이 느껴졌다. 웅장한 신전의 모습에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을 뻔 했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사제님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제님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사제실에 계신 듯 하다. 사제실은 제단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나있는 통로를 따라가면, 우측에 있는 방 중 하나였다. 사제실 앞은 아까 보았던 조각상보다는 작지만, 금빛으로 빛나는 조각상이 문 양측으로 서 있다. 어쨌든, 나는 사제실에 가기 위해 왼쪽으로 나있는 통로를 걸어갔다. 사제실에 다 와 갈쯤, 사제실 안에서 사제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문이 조금 열려있나 보다.


…… 결국…… 찾아…….”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사제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격양되어 있었다. 사제실에 가까워질수록 목소리는 더 뚜렷하게 들렸다.


그가 마을까지 내려갔습니다. 혹시 알아채지는 않았을까요?”


…….


돌아와서 그렇게 달라진 점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데려왔는데 행색으로 보아하니 그렇게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


사제실 앞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사제실의 문이 조금 열려있었고, 그 사이로 거대한 금빛 수조와 같은 곳을 보고 이야기하는 사제님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 나는 들어가지 않고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 그날의 일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두에게 불신자에게 일어난 불행으로 알도록 소문을 흘렸습니다.”


…….


그날의 일이라면 나의 모든 것이 불타버린 그날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신자에게 일어난 불행은 무슨 소리일까. 그날 일어난 모든 일은 가족의 부주의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났던 것일까. 지금까지 알았던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로 인해 나는 손에 있던 휘장을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떨어져 바닥에 부딪친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우듯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렸지만, 사제님 또한 그 소리를 듣고, 무엇인가 확인하려는 듯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떨어진 휘장을 황급히 주워 그를 데리고 사제실 바로 왼쪽에 있는 문을 열었다. 다행히 잠겨있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숨었다. 문을 통해 사제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해 급하게 뛰어다닌 듯 심장은 요동을 쳤고, 식은땀이 흘렀다.


……인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사제님의 목소리가 들린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다. 아마도 사제님이 다시 들어가신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 나는 조금 문을 열어 문틈 사이로 복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사제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긴장감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동안 사제님은 보살펴 주기 위해서가 아닌 감시하기 위해 나를 가까운 곳에 두고 바라봐왔던 것일까.


저는 이제 어쩌면 좋은가요? 아니, 당신에게 묻는 것도 우습군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의지하려는 걸까요? 처음부터 당신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요. 그러면 이런 사실을 알 필요도 없었고, 단지 그 날이 불행했다고만 생각했었겠죠. 이런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고요!”


흐느낌에 가까운 말로 나는 지금의 모든 상황을 그의 탓으로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 주저 앉아 있는 나를 내려보듯 고개를 조금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괴롭다면 그만 두거라.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다면 일어나서 움직이거라.”


역시 그는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단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할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난 그를 향해 질문하고 의지하려는 건가. 나는 고개를 살짝 들고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실소했다.


좋아요. 어차피 죽으려 했던 목숨인데, 뭐가 더 아깝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드리죠.”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사제님의 방은 문이 닫혀 아까처럼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닫힌 방문 앞에는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물체였다. 주변을 돌아보니 그것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사제님 방 양쪽에 서있는 금빛 조각상 중 오른쪽에 있는 조각상의 날개의 끝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아마도 사제님은 이 조각상을 보시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각이 조각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라 생각해 다시 들어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조각은 어째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일까? 숨어들기 전까지 조각상은 멀쩡했었다. 그런 의문을 뒤로 하고 나는 신전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가지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여벌의 옷 두 벌과 집이 불타고 난 후 보상으로 받은 돈 몇 푼만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에 탄 그곳에서 발견한 곰인형을 챙겼다. 하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머물 곳은 물론이고, 진실을 알기 위해 향해야 할 곳도 알지 못 한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닷새 정도 걸어가면, 너희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살고 있는 곳이 있다더군.”


아마도 그는 나에게 그 신을 찾아가 직접 물어보라고 하는 것이겠지. 그는 내가 그곳에 찾아가면 알게 될 답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답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내가 직접 답을 찾아내기를 원하는 것 같다. 전보다 상황은 더 불안해지고 앞으로 힘든 일도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이 길의 끝에서 모든 불안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머물렀던 숙소에 헤어짐의 인사를 건넸다. 사제님의 이곳에 머물게 해준 속내는 좋지 못한 것이었지만, 이 건물자체는 나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해준 감사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늘을 올려다 본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푸른 하늘이 돋보이는 맑은 날씨다. 떠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다. 내 뒤를 따라 걸어오는 그가 보인다. 처음 그를 봤을 때와 다름없이 낡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낡고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초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넓은 챙에 가려진 얼굴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항상 넓은 챙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이 궁금해지지만 어떻게 해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접어둔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나는 그에 대해 또 하나 알지 못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기본적이고 지금까지 몰라왔던 것이 더 이상하게 생각되는 질문이다. 나는 오늘에서야 그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손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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