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發芽)

by 소이 posted Apr 0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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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아


숨소리들은 조밀하고 정교하게 몸덩이를 합쳐서 세차게 창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 밤이었다. 김은 샤워를 하고 나와 붕 뜬 기분으로 앉은뱅이 책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살아는 있으나 화면이 꺼져있던 컴퓨터의 동그란 모양의 성감대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니 모니터에서는 화악 반응이 일었다. 깜깜한 방에 은은하게 켜져있던 구식 램프에서 나오는 빛에 비해 그 자극은 너무 강렬해서, 그는 침대 위에서 자고있는 아내의 눈치를 슬몃 보았다. 곧 자극에 익숙해진 눈은 모니터에 글자를 인식했다. 받은 메일함에는 읽지 않은 메일이 이백 삼십 개가 와 있었다. 와우. 라고 그는 실제로 중얼거렸다. 메일들의 제목은 하나같이 비슷했으며, 이름란을 적은 칸에만 각양각색의 이름들이 써 있었다. 김은비 김형욱 신병준 유은지 안은희- 뜻밖의 반응에 새삼스러워진 그는 마우스 휠로 메일함을 주룩 내려보았다. [당신의 글을 책으로 써드립니다.] 한 문학 커뮤니티에 이 이벤트의 취지와 목적, 출처, 출판업과 작가를 겸하는 그의 직업까지 적어올렸다. 적지 않은 분량이었고 기껏해야 이삼십 명 정도의 참여를 예상했던 그에게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와우'였다. 읽을거리와 일거리가 배로 늘어나버렸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 분량때문에 책에 싣지 못하게 된 사람에게는 뭐라고 답장을 해 줘야하냐는 소심한 고민에 빠졌다. 시계는 한시를 갓 넘어가고 있었다. 모든 글을 읽고 판단하는 작업부터 해야한다. 늦은 시간이니 하나만 읽고 자야지, 하는 마음에 가장 나중에 보냈던 아이의 메일에 들어가서 [발아]라는 제목의 글을 받았다. 글를 받는 그 몇 초 동안 그의 눈길은 수신자 이름에 머물렀다. 유소이. 소이라, 예쁜 이름이구나.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니 눈 아래에는 긁힌 상처가 있었다. 검붉고 가는 선은 손가락 마디 하나정도의 길이로, 귀를 향해 사선으로 그여 있었다. 그녀는 나뭇가지에 긁힌거라면 파상풍의 위험이 있다고까지 생각했으나 단지 보기 흉해 노란색 캐릭터밴드를 붙혔다. 머리를 두어번 만지작거리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기억 속 오랜만의 외출이라서 눈 앞에 보이는 녹림이 새삼스러웠다. 마당에 진흙 길을 다섯 걸음쯤 걸어나가 대문을 여니 콰드득하는 소리가 께름칙하게 산중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는 녹슨 것처럼 얼룩덜룩했고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문을 다시 닫을 땐 열 때보다는 작은 콰드득 소리가 났고, 마침내 문이 닫혔다. 그녀는 총총거리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흙길위를 달렸다. 봄에 이 길에서 조금이라도 달리면 먼지가 일어 한참을 콜록거리지만, 먼지가 일기에는 아직 추운 날씨다. 오 분 정도 가파른 경사를 내려오니 그루터기만 남아 삐죽한게 보기 흉한 마른 논들이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휴대폰에 시선을 두고 시골의 퍽퍽한 길을 걸어가는 그녀는 흙색의 배경에서 톡 튀어나와있었다.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잡아 여보세요라며 귀에 대고 꺄륵거리는 모습은, 논밭이 펼쳐진 배경과는 달리 요염하고 발랄했다. 버스정류장의 낡은 나무의자 위에 그녀의 복숭아향이 묻었다. 그 향을 지나칠새라 저만치서 낡은 버스가 그녀의 앞에 성급히 멈춰섰다. 그녀는 통화를 끊을까 생각하다가 휴대폰을 어깨에 끼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천원짜리를 냈다. 험악하게 생긴 버스기사가 문을 닫을 생각없이 그녀를 꼬아보자,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 아, 저 학생이에요. "

[무엇이 그녀를 학생으로 만들었나.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단지 배우고자 한다면 학생인건가. 혹은 성인이라는 그들만의 구성원이 되기 전, 정확히는 여덟살부터 열 아홉살까지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하나의 단어인건가.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배움의 조건이 대학이 아닌 이상, 모든 교육과정을 독학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선택한 결정. 누구와도 아닌 그녀 자신과의 치열한 합의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눈높이보다는 높이 있었으므로 선택은 차라리 현명했었다. 부모님- 자식에게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던- 은 그녀의 기억에 없다. 별로 필요하지 않을것도 같았다. 고아도 아니였고,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흙범벅이 되어 돌아오는 할머니와 살았다. 언젠가 궁금해서 할머니에게 제 부모님의 근황을 물어봤지만 좀처럼 설명해주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자면 할머니는 남과 핏줄의 중간쯤이라고 그녀는 무심코 정의내렸다. 사랑을 주되 철저히 물질적이며 끄트머리에는 나중에 니가 다 갚을 거라는 암묵적인 표시가 묻어나는 표독스런 사랑. 어린 그녀의 입맛엔 씁쓸한 흙맛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현명했고 발랄했다. 그건 별의 영향이었다. 정해진 등산 코스가 있는 산, 그 곳곳에 있는 망원경과 꼭대기에 있는 천문대는 그녀의 전반적인 이상향을 만들었다. 천문대에는 '언니'두 명과 '오빠'한 명이 있었다. 언니나 오빠라고 부를만한 나이를 가진건 스물 일곱살 여자 한 명 뿐이었지만, 모두들 어리게 불리고 싶어했기에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가정이 있던 큰 언니와 큰 오빠와는 달리 작은언니는 그녀에게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줄 수 있었다. 그림을 전공한 작은언니 덕분에 처음으로 찌릿한 창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처녀작은 새까만 배경에 빛나는 네 개의 별이었는데, 그건 그녀 자신과 옆에서 만원경에 눈을 대고 열심히 별들에 몰두해가는 그들이었다. 그녀에게 언니오빠들이 별이듯 그들에게도 그녀는 별만치 소중했기에. 학생이었던 시절 대부분의 추억은 낡아빠진 천문대에서 꾸었던 몽롱한 꿈들이었다.]

[취미를 붙혀 그림들은 스케치북 속에 쌓이고 스케치북도 그녀의 방 안에 쌓였다. 대상이 자연물이었기에 수채화로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 대부분이었고, 종종 인물화도 그렸다. 다른 매체가 없으니 오로지 하나에만 몰두하는 것이 습관이자 장점이 됐다. 그녀는 꽤 오래 그림을 그렸다. 욕심이 그녀의 가슴에서 새싹처럼 트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작은언니의 소개로 커뮤니티를 시작해,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과 연락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림 명문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라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그녀가 잘 실감하지 못하자 짙은색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연락은 끈끈하게 이어져 그녀는 그에게 많은 걸 배웠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그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는 우상이었으며 푸르렀다. 그 짙은색의 그림을 처음 따라그리고 작은언니에게 보여주니, 네 색깔이 조금 더 다채로워졌다, 라며 제 일인 양 기뻐했다. 몸은 자라 작은언니보다 키가 커졌고, 그녀의 그림들은 더 많은걸 담았으며, 앳되기보단 여성에 가까운 농익은 복숭아향을 풍겼다. 친구가 없었던 그녀는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만남을 찾는것을 취미로 삼았다. 그 곳에서 만난 여자아이는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눈에띄게 보였으며 초면에 '너처럼 맑은 애는 처음이야'라고 말했다. 마침 사는지역도 비슷해, 큰맘먹고 외지로 나가 시내에서 친구를 만났다. 촌년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고 옷을 샀으며 노래방엘 갔다. 신기한 문화였다. 짙은 그림을 그리는 선생님에게 그 친구 얘기를 해주니,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때 그는 처음으로 만나자는 기색을 비췄다. ]

[그는 처음으로 만나자는 기색을 비췄다. '영월이면 두시간이면 가지 않나? 네 얼굴도 한 번 보고싶은데.' 몇 개월동안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그에게서 막상 만나자는 말을 듣자 그녀는 조금 망설여졌다. 아직은 안돼, 본능이 주는 경고를 헛듣지 않았고, 그에게 어물쩡하게 답을 주었다. 이해하지 못하거나 만나기 싫다는게 아니라 조금 조심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현실은 언제나 눈높이보다 높이 있었으니까. 설렘에 취해 방방거리다 보면 내리고 있었던 가랑비에 푹 젖어버려 감기에 걸리는게 당연하니까. 그는 똑똑하니까 내 의도를 알아주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가 다행히 더 이상 추근대지 않았으므로 연락은 계속되었고, 문득 그것은 깊고 애틋해졌다. 그녀는 그를 생각하며 벚꽃잎이 여남은 연못을 그렸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와 그는 종종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그것이 누구를 향한건지는 잘 알지 못했다.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했을뿐더러 깨져버릴 것 같은 환상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한게 발단이었다.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를 향한 사랑은 갈수록 깊어졌으므로.]

[친구같은 선생님은 퍽 좋은 이미지이다. 쉽게 상대에게서 존경심에서 비롯한 애정을 끌어낼 수 있고, 상대가 그 분야에 열정적일수록 멘토에 대한 관심도 커져가게 된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마음을 전부 얻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수단이었으며 공을 들인 관계에 순진한 그녀가 톡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 큰 나무에서 온 힘 다해 맺어 바닥으로 떨어뜨린 첫 열매. 새빨갛고 조금은 새까만 버찌같은 그 열매를 처음으로 먹는 전율이 일 정도로 황홀한 순간 - 그는 휴지로 성기를 틀어막았다. 비집어나오는 희끄무리한 죄책감들을 전부 닦아내어 휴지통에 버리고, 팬티와 겹쳐있는 바지를 힘겹게 끌어올렸다. 비대한 몸덩이에서는 행위가 격정적이었다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즙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보낸 멀끔한 사람의 사진과는 다르게 그는 조금 더 납짝하고 헐거웠다. 익명성이 사라질 때 외모가 이미지에 주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그는 자위했다. 그녀의 여린 잔상은 그의 너저분한 방에서 이후로도 계속 어른거렸다.]

그녀는 남자를 찾으려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카페 어디에도 혼자있는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비어있는 창가쪽 자리를 찾아 앉아서 기다려도 영원히 볼 수 없을것만 같은 거리감만이 느껴졌다. 영월 시내에 있는 그 카페는 애써 고풍스러움을 풍기고자 했으나 그러기에는 채광이 너무 밝았고, 카운터가 플라스틱이었고, 입구는 유리문으로 되어있었다. 카운터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여직원이 무서운 곳이었다. 그의 것까지 시켜야하나, 주문을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모두가 자연스러운데 그녀 혼자만 우왕좌왕했다. 마치 들어와야할 왕자역이 제때 나오지 않자 대본을 까먹어버린 여자주인공같이, 그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는 머리 위로 쨍 내리쬤다. 그의 연락은 답이 없었고 관객들의 곁눈질이 따끔거려 그녀는 그 모순적인 장소에서 무작정 벗어났다. 딸랑하고 유리문에서는 소리가 났고, 밖에는 칠 미터 가량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크기의 건물들이 할아버지의 어긋난 치아처럼 누렇게 즐비해 있었다. 영월이란 지역은 그런 곳이라는 걸,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마따나 이름은 아름답지만 그것 뿐이라는 걸 그녀는 모를 리 없었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지만 어디든 갈 수 없을 것 같은 답답함에 더욱 옷깃을 가슴쪽으로 잡아밀었다. 인적은 드물었고 길은 넓었다. 버스정류장도 늙었고 카페 맞은편 편의점도 늙었다. 그녀만 톡. 아주 붉게 톡 튀어나와있었다. 휴대폰이 바람소리보다 크게 울었다. 간만에 온 그의 연락이었고 울먹거림을 참지 못한 채 물었다.

" 오빠야? 왜 안 와?"

[그녀에게 분출하는 정복욕은 억눌려 찌부러진 농도짙은 분노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돼지라고 키득거리던 스쳐가는 여자들, 그에게만 치던 심각한 장난들과 웃어넘기던 의자 뒷모습들, 정규수업이 아닌 예체능을 한다는 것에 대한, 저와 다른 길을 인정치 못하는 학생들의 비아냥들. 내면의 상처는 그의 그림에 짙은 색을 안겨주었다. 밤에는 받은 상처만큼 연필로 종이를 그었다. 붓으로 종이를 그었다. 칼로 손바닥을 그었다. 그림들에서는 피가 튀었고 손바닥에는 물감이 튀었다. 무엇이 잘못된건지도 알지 못하던 그가 불현듯 그림들을 봤을 때, 그는 허연 면에 낭자하게 굳은 핏자국들을 닦아낼 수 없었다. 그저 눌러담았다. 그 풍만한 가슴속에, 차곡차곡 포개어. 그러나 문득 피들이 자의가 아니라 그들의 의해 흘려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포갠 자리는 얼마 안가 이기심으로 썩어 문드러졌다. 한창 커뮤니티를 시작할 때였다. 악으로 원하던 대학에 합격을 했음에도 그를 향한 남들의 시선이 별반 달라지는 게 없음을 느끼자, 그는 외모보다 경력을 먼저 보게되는 그 세계에서 활동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주었고 그들은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가 꿈꾸던 이상적인 세상. 그곳에서 그는 상류층이었고, 귀족이었고, 교수였고, 모든 이들의 멘토였다. 그에게 발현된 건 보상심리였다. 무시당한 만큼 대접받고 싶어했다. 뿜어나오는 피와 정신을 차리면 느껴졌던 고통들을 세상에 전해주고 싶어했다. 그 때 그는 발께에 떨어진 작고, 그와 다른 빛을 내뿜던 씨앗을 보았다. 또, 그녀의 그림.]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 와 간다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라고 나긋하게 안심시켰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물기가 묻어났고 그는 그것을 금방 알아챘다. 왜 그래? 울었어? 그녀의 교태섞인 대답, 아니. 온다면서 연락을 안 하잖아. 미안해. 어제 휴대폰의 배터리 충전을 못 했었어. 말하며 갓 세자리에서 두자리 숫자가 된 배터리 용량을 흘끔 쳐다봤다. 거짓말은 버스시간처럼 자연스러워야 했다. 이제 다와가. 조금만 기다려. 그는 통화를 끊고 약속 장소와는 동떨어진 영월 외곽지에서 내렸다. 통화를 거의 반 강제적으로 끊긴 그녀는, 이 사람이 왜이러지, 한숨을 폭 쉬고, 터벅거리며 자신이 내렸던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바람은 뒤에서 그녀를 재촉했다. 조금은 어색할것도 같았지만 그의 성격상 그렇지 않을것도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 혀 뒤를 맴돌아 잠시 걸음이 늦춰졌을 때, 바람이 뚝 멎었다. 들려오던 자잘한 생활소음들이 마치 백 미터 뒤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듯 아득하게 주위에서 울렸다. 공간의 심박수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께름칙한 기분에 옆 길로 가기 위해 건물 사이 난 샛길로 발걸음을 옮기니, 세상에는 저 멀리에서 검정색 군모를 푹 눌러쓴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와 너밖에는 남지 않았다. 묘한 정적이 일었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신발 아래로 깨진 소주병이 빠직 소리를 내며 밟혔다. 그 순간 공간은 다시 태동하였다.

남자는 스쳐지나가나 싶더니 그녀를 잡아끌고 골목을 나와 오른쪽 건물로 들어갔다. 그녀는 팔을 요란스레 휘적거리며 끌려갔다. 우악스럽게 앞질러가는 거구의 남자에게 잡힌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 빌라인듯한 건물 지상층에는 4평정도의 공간과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은 감옥처럼 얇은 쇠기둥으로 막혀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문이 있었다. 쇠기둥에는 녹이 슬어있었고 남자는 계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그것을 열었다. 콰드득하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는 다시 닫힐 때도 울려퍼졌고, 그제서야 사태룰 파악한 아래층 계단에 남자와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는 그 소리를 왜 빌라 사람들이 듣지 못할까 헛되이 생각했다. 영월이라 그랬다. 아마 평생 사람은커녕 벌레조차 그 소리에 놀라지 않으리라. 남자는 우선 당황스러워 비명하는 그녀의 뺨을 흉터 가득한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얼굴에 붙어있던 캐릭터밴드가 뜯어져 바닥에 굴러 붉게 그어진 흉터만이 남았다. 얼굴에 흉터는 그녀가 소리칠 때마다 짝- 하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손바닥과 만났다. 그 소리도 사람들은 듣지 못할 터였다. 공간은 그녀에게만 더욱 아득해졌다. 사실, 무엇보다 그녀가 참기 힘든 건 소리였다. 규칙적이고 찐득한 남자의 신음소리, 살이 부딛히는 소리,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은 데에서 나오는 히끅거리는 숨소리. 더 심한것도 당할 지도 모를거란 생각에 아픔은 참아내었고 비대한 살덩어리는 지독하고 거칠게 그녀를 몰아세우더니, 이내 무감각해졌다. 모두 무감각해졌다. 그것은 마치 태풍이나 지진같은 재앙이 닥친 뒤의 허탈함이어서, 누군가를 생각할 여유는 커녕 주위 사물의 존재조차 모호해졌다. 남자가 입에서 긴 악취를 내뿜고 주섬주섬 바지를 챙겨 갈 때에도 그의 탓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뒹구는 피 묻은 캐릭터밴드처럼,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먼지속에 누워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타구니에는 핏자국과 허엿한 액체가 찐득하게 묻었고 저녁은 무겁게 그녀의 위에 내리앉아있었다.

이러다 죽겠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모두에게 뭐라고 말하지. 여기서 어떻게 집에 가더라. 생각들은 갑자기 물이 끓듯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밖에서 갈까마귀가 길게 두 번 울었고 그녀는 그것을 신호삼아 몸을 조금 움직였다. 로봇이 삐그덕거리듯, 새 책을 피듯, 조심스럽고 뻑뻑하게. 고통과 더불어 먼지묻은 옷을 챙겨입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디야?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기없이 말라있었다. 나 집이야. 하루종일 연락을 안받길래 그냥 집으로 와버렸지. 무슨 일 있었던거야? 이어지는 그녀의 변명, 아니. 잠시 일이 있어서. 쿨럭. 다음에 기회있으면 또 봐. 그의 대답, 알았어. 집에 가서 연락해.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한시름 놨다는 듯 그제서야 철문을 열었다. 콰득- 소리가 가슴 깊이 쑤셔들었다. 숨이 턱 막혔다. 그에게 이렇게 추잡한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었고,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였다. 애초에 그가 주위에 있었더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였다. 이 차갑고 먼지많은 영월에서 누가 누구를 도와줄 것인가. 그녀는 차가운 먹물을 머금은 할아버지의 입, 그와 같은 공간에서 무겁게 유영했다. 달도 없는 밤이었다. 건물들의 창 속은 정감있게 빛났지만 거리는 반대로 황량했다. 잠자코 도로변에 앉아있다가 마주오는 택시- 한대를 놓쳤다. 끌려오며 지갑을 어딘가에 떨어뜨려 그녀에게 남은 건 동전밖에 없었다는 걸 기억했다. 턱. 턱. 발소리가 공허한 달동네에 퍼졌고, 마침내 그녀가 내렸던 버스정류장 맞은 편에 도착하자 쓰러지듯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그와 자신을 강간한 검은모자의 남자를 동일시하지 못했다. 검은 모자의 남자는 그와의 약속 도중에 만난 강도나 벼락같은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일이 있던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와의 약속을 찢어놓은 파렴피한 자신이었다. 그는 나처럼 얼마나 설레었을까, 그를 바람맞힌 만큼 그녀는 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이 통증은 그 일 다음 날부터 자주 속을 목적없이 드나들어 상처를 벌렸다. 밴드를 어디에 붙혀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고, 어디에 난 지도 모르는 상처는 도통 아물 생각을 않았다. 아랫배를 드릴로 후벼파는 아픔과, 얼굴에 난 피멍에서 뎅- 하고 울리는 아픔. 시도때도 없이 드는 자책어린 생각들과 창피함. 수치스러움. 잊고 살았던, 어렴풋한 그녀의 머릿 속 괴물들. 성에 대한 여러 잡지식들. 피임을 해야할까, 기껏해야 토하러 화장실에 뛰쳐가기나 하고, 약국에는 어떻게 가야하지, 어그적하면서 걸으면 티가 날 지도 몰라, 따위의 끊임없이 늘어지고 늘러붙는 거미줄같은 생각들. 그녀는 버틸 수가 없었다. 신고를 해 볼까. 언니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가 나를 혐오스럽게 생각할지도 몰라. 휴대폰을 손에 핏대가 설 정도로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하는 습관이 생겼다. 눈을 뜨고싶지 않아서 눈을 뜨지 않았고, 이불 속에서 음부를 때 밀듯 밀어보기도 했다. 다시 피가 날 것 같아 곧 그만두었지만.]

그렇게 사흘이 지나 너는 잠시 둘러싸고 있던 이불을 풀었다. 보라색 침대보는 땀으로 진하게 덮혔고, 감기가 조금 들어간 듯 기분이 조금 나아져 밖을 보자 밖에는 허연 눈들 사이로 진회색빛 구름이 흘러나왔다. 눈이 변한 물방울들이 두어 개 창문에 놓여있었다. 구름 틈 사이로 간간히 흘러나오는 오후의 눈보라가 닿는 곳 끄트머리에는 스케치북 더미가 멀뚱하게 방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림. 그녀의 별들이 담기고 녹여낸 이상향을 담은 채집물들은 그 끔찍한 일을 겪는 동안에도 그 곳에 그대로 있었다. 새삼 들떠서 스케치북 더미를 쏟아 마침내 처음 썼던, 작은언니가 준 자주색 표지의 4절 스케치북을 펼쳐보았다. 처녀작인 네 개의 별은 짙은 파랑색들 사이에서 희미하지만 열렬하게 발광하고 있었고 그녀는 별들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내 사람들. 내 그림. 한동안 별들에 젖어있다가 다음 그림으로 넘긴 그 순간, 그녀는 우연히도 그가 생각나서 며칠간 꺼져있어 주머니에서 덜렁거리던 전화기의 전원을 켰다. 그에게 온 문자들은 수십 통에 달했다. 문자들을 확인하다가 그녀는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휴대폰 뒤로 다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 곳에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얼굴은 하얗게 질려, 휴대폰을 잡고있었던 오른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퀘퀘묵은 고통이 육체를 너머 비로소 그녀에게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칼로 제 목을 긋는 상상을 했다.

[AM 8: 24] 모닝. 일어났어? 뭐 해? 음, 답이 없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나 이제 학교 가. 다녀올게.
[PM 12:10] 뭐야, 아직도 답이 없네. 혼자 공부한다고 이렇게 막 늦잠 자도 돼?
[PM 5:02] 바쁜가. 뭐 하는데 답이 없어.
[PM 5:30] 아. XX.

[다음 날, AM 4:32] 너 신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누군지 아는 거 확실해? 내 이름이 H인 것도, K대학교에 다닌다는 것도 확신할 수 있어? 네 지갑 나한테 있어. 너 신고하는 거 조금이라도 티 나지? 너 걸레라고 증명사진이랑 인터넷에 올릴거야. (사진) 보이지?ㅋㅋ. 좆같이 생겼네. 나같은 돼지한테 따먹힌 기분이 어때, XX, 너도 나처럼 집에서 혼자 자위하고 그러는거 아냐? 아 답답하네, 답장 좀 해봐.

[그 다음 날, AM 4:41] 죽었냐?ㅋ

휴대폰은 그녀가 미처 보지 못했던, 스케치북 위 그림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렸던 짙은색의 그림이었다. 그녀는 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서 그것을 그렸고 작은언니는 그림이 조금 더 다채로워졌다고 칭찬을 했다. 그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 그림은- 갈색 물감을을 물기없는 붓으로 거칠고 날카롭게 칠한 흙 속에서, 자그마한, 눈을 크게 뜨고 봐야지만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씨앗이 웅크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씨앗은 갈색 상처들 틈에서 맥을 추리지 못했고 돋아나려니 위에 덮인 흙이 너무나도 깊었다. 깊고 어두운 그 곳에서 웅숭그리고있던 그 씨앗 위에, [죽었냐?ㅋ]라고 켜져있는 휴대폰이 놓였다. 이젠 눈을 크게 떠도 씨앗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연하여 그 일을 당했을 때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열심히 그와 돼지와 검은 모자를 연상시키며, 그렇게 멍하니 죽어갔다.

"살아는 있나."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텁텁하게 말했다. 숨을 가쁘게 쉬던 그녀가 이불 속에서 끄덕거려 이불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할머니의 눈길이 흔들리는 이불가에 채 닿는가 싶더니, 이내 쾅 닫히고 다시 주위는 조용해졌다. 그녀의 숨소리만이 징그럽게 이불을 감쌌다. 눈발이 흐드러지게 만개하여 대문으로 가는 길이 며칠째 보이질 않았고, 눈송이들은 소리없이 창을 두드렸다. 뭐다러 아프노. 할머니는 겨울에 그녀가 아플 때 마다 그렇게 말하고 골골거리는 그녀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성의없이 툭 던지고는, 말았다. 용돈을 놓는 자리에 만원짜리가 더 얹어져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병원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가 의자에 앉아 대기하면서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었던 걸 기억했다.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는 절대로 기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명심했다. 환상처럼 둥둥 떠다니는 기억 속, 할머니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야한다고 외치던 그녀의 희망은 그런 기억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고통이 다시 그녀를 덮쳤다.

[왜 그렇게 모질어야만 했나. 키우며 정이 들 법도 한 것이, 무엇이 두려워 그걸 기피하는건가. 작고 꾸물거리는 생명은 여전히 늙고 주름이 졌을 때 할머니의 손에 넘어왔다. 하나 있던 딸아이가 죽으며 넘겨준 핏덩이였고 딸아이는 그 길로 죽어버렸다. 실수란다. 자기를 이따구로 키워주신 건 어머니이시니까, 당신이 책임지라면서. 포대기를 넘겨받을 때 할머니는 아이가 들을까 귀부터 막았다. 더 할말이 없으면 일어나겠다고 날 서린 말투로 할머니를 난도질하며 대문을 콰득- 닫고 나간 딸아이가, 차를 타고 산에서 나가는 길에 역주행을 했다고. 딸애 친구가 슬퍼하는 기색 없이 예의상으로 말해주었다. 핏덩이는 장례식에서도, 집으로 되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지겹도록 울어댔다. 마치 자기도 모든 걸 잊으려는 듯 비명을 지르며 가삐 숨을 쉬었다. 할머니가 정신을 차린 건 집으로 걸어가는 오르막길에서였다. 아이는 지쳐서 잠이 들었고 밤이 선득하게 다가왔다. 침으로 온 등을 적셔놓은 이 아이가 자라며 지 엄마를 얼마나 닮을까 헤아려 보다가 영감 딸 모두 가고 결국 남은건 둘 뿐이구나, 하는 동질감이 밤처럼 다가왔다. 나이에 겨워 숨을 고르려 잠시 쉬다가 포대기를 풀고 아이를 잘린 나뭇동에 올려놓았다. 아이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고 달빛이 그 위를 비추었다. 비장하게 말했다. 밥은 맥여 줄쿠마. 니 얼마나 큰 씨앗인지는 내 모르것으나, 늬 애미 맹키로 안 크도록, 니가 그렇게 안 자라주면은 좋겠다마는. 중얼거리는 할머니의 눈에 여태 않던 물기가 서렸다. 할머니는 걸친 듯 비스듬히 아이를 품고 있었다. 밖이 추워 아이가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어스름한 집으로 들어가서 포대기를 풀었다. ]

그녀가 다시 까무러친지 일 주가 지났다. 폭풍이 지나간건지 그만한 크기의 무력함이 짓밟고 간 건지. 하여튼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다시 눈부신 아침이었다. 시간은 엇비슷하게 흘러갔고 그녀는 그 속에 잠겨서 질식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다 마침내 눈을 떴다. 머리는 헝크러져 있었다. 몸을 조금 비틀자 요의가 몸을 관통하여 화장실로 달려갔다. 드디어 생리현상이 일어나는구나! 그녀는 새삼 정신을 차린 것 같아 차분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주황빛으로 가득한 - 아마도 전등 때문이리라- 화장실을 나오니 할머니가 오두커니 거실 한가운데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실과 반대로 난 2미터 가량의 창문에서는 아침 햇살이 폭발하듯 할머니의 뒤로 쏟아져나왔고 그녀는 후광때문에 검은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이 절뚝거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걸음 걸음마다, 공간에서 무언가 깨지고 있었다, 왜 이제야 그게 깨지는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의 기분은 포근하면서 따스한, 천문대에 올라가던 기분과는 또 다르게 태양 그 자체를 처음 대면한 범람의 기분이었다. 어릴 적 그녀를 품어준 것이 달빛이었다면 지금 앞에 서 있는건 햇볕이었다. 깨지던 건 어색한 할머니와의 관계이자, 해와의 만남을 가로막던 흙빛 상처들과 그의 잔상들이었다. 모순이었던 땅속에서의 삶. 그녀 혼자 길을 찾고, 날카로운 것들에게 상처입어가며 조금씩 자라나던 새싹이, 기어코 피어난 것이다. 그녀는 할머니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던 할머니는 깨져버렸다. 막연히 상상하던 태양은 실재했다. 할머니는 그녀의 등허리를 힘써 쓰다듬었다. 새싹의 훈기가 채 가시지 않은 등에서는 할머니의 거친 손주름이 느껴졌다.

그녀는 모든 것을 말했다. 너무 울어서 끅끅대느라 잘 전달이 됐을지는 모르겠으나, 말 할 수 있는 모든것들을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고 끊임없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간간히 고개돌려 눈물을 닦아내며 한 마디 말도 없이 쓰다듬었다. 해는 더욱 떠올라 동향의 창문에서 퍼져나오던 빛그림자는 점점 짧아졌다. 집은 다시 고요해졌으며 그녀의 후련한 숨소리가 할머니의 가슴팍에 가득했다. 그녀는 할머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씽끗 웃기까지 했다. 할매, 나 코좀 풀고 올게. 오야.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말꼬리가 슬몃 올라간 대답이 너무나 좋아서, 세수를 하며 한번 더 울었다. 감정의 기복은 수시로 일어났다. 할머니는 가만히 있다가 오늘도 밭에가긴 글렀다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부엌으로 사라졌다. 칼로 도마치는 규칙적인 소리가 그녀의 귀에 얹혔다. 간신히 오후가 된 시간이었고 너는 방으로 가서, 배터리가 없어 다시 꺼져버린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아마 그곳에 [죽었냐?ㅋ]라고 적힌 화면이 그때까지 켜져 있었다면 심장은 콱 아파왔겠다. 그래도 끝에는 들어서 할머니에게 보여 줄 용기는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잠잠한 흑색의 휴대폰을 드니 놓였던 그자리에는 여전히 웅숭그리고 있는 씨앗이 존재했다. 그녀는 다음장을 넘겼다. 공백의 자리는 그녀의 가슴을 다시 뛰게 했다.

봄이 왔다. 그녀는 낮에 집에서 세 끼 챙겨먹으며 공부를 했고 밤에는 천문대로 가서 작은언니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간만에 본 그 사근사근한 얼굴과 말투가 반가워, 보자마자 껴안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뭔 일이니, 너 눈에 다크써클 생겼다. 하도 울어제껴서 그렇죠 뭐. 싱글싱글 웃으면서도 이유는 얼버무렸다. 그걸 되새기는 짓은, 땅에 떨어진 울퉁불퉁한 떡잎을 주워다 새 이파리에 대보거나, 변태한 성체에서 나왔던 허물에 다시 들어가보는 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할머니 외에 아무에게도 모든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한동안 시원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의 날이 계속되었다. 집밖을 나올때마다 들리던 콰득-소리가 여전하기에 할머니에게 말해서 대문을 헐어버렸다. 그녀는 그 때 속에서 한번 더 무언가 깨졌던 것을 느꼈다. 일상을 되찾아가며 무언가 깨진다는 느낌을 받는게 빈번해졌다. 익숙해지려고, 그렇게 깨져 흩어진 조각들을 이어붙히는 일을, 밤에 작은언니와 하였다. 그녀에겐 자신의 그림체가 생겼다. 할머니와 안았을 때 폭발했던 햇빛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 컴컴하던 지하계단에서 떨어져있던 캐릭터밴드를 그렸다. 누런 치아같은 영월을 그렸고 잠깐이던 그와의 모순된 사랑을 그렸다. 눈물을 삼켜가며. 가슴을 움켜쥐어가며 그렸다. 마침내 그 봄이 끝날 때, 스케치북 마지막 장에는 해와 달을 향해 자라고있는 가련하지만 기운찬 새싹이 있었다.

김은 글을 읽고 종장에 메모를 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원고에는 소이의 필체가 아닌, 그의 필체로 짤막한 글이 한 줄 새겨졌다. [ 싹이 피어났구나. 지금은 겨울이라 수 백 개의, 수 만 번의 숨소리들이 창 밖에서 비명을 지른단다. 소이야. 봄이 올까. 그 모든 소리들은 싹을 틔울 수 있을까.]



장성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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