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 그늘진 추억 아래에서

by 화조풍월 posted Apr 09,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플라타너스 그늘진 추억 아래에서


 봄날의 어느 맑은 오후에, 나는 창신동 어느 공원의 정자에 몸을 뉘인다. '지봉골 공원'이라고 불리는 이 공원은 작고 볼품없는 공원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유년시절이 담긴 소중한 장소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용인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근 10년 간 접점이 없었던 장소였지만 과거에 대한 나의 막연한 기억은 나를 이곳으로 초대했다. 그렇다고 이 장소가 그때의 추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이 우레탄 바닥은 과거에는 전부 흙바닥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주 올라갔던 산모양의 빨간 정글짐은 더 이상 없다. 지금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거라고는 내가 앉은 정자 옆의 플라타너스 나무가 전부인 듯싶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공원이 변했듯 나 역시도 정말 많이 변했다. 소설책과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던 순수한 열 살짜리 소년은 어느새 대학에 입학했고 소설과 피아노를 즐기기는커녕 부끄럽지만 돈과 명예를 쫒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당장 그 때 다니던 초등학교로 가서 생활기록부에 적혀있는 장래희망 란을 보게 된다면 나는 그걸 몰래 찢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마, 작곡가나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적었던 것 같다.


 각설하고, 내가 지금 내 유년시절이 담긴 이 장소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말이 좀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거의 10년간을 용인에서 보내며 치열한 입시경쟁에 빠져 있었던 나는, 사실 창신동 시절의 기억들을 고이 접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렸었다. 그것은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시절에 대해 '그냥 그런 시절이 있었지' 정도로만 치부해버리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우연한 기회로 나는 유년시절의 나와 다시 대면할 수 있었다. 보문동에서 K대학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안암동고개가 있다. 나는 보통의 경우에는 지하철로 통학하기 때문에 저 고개를 지날 일이 없었지만, 어느 날,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만 하는, 그 지하철의 귀찮음에 염증을 느끼고 버스만 갈아타고 학교에 간적이 있었다. 편하게 앉아서 버스를 타다가 학교 앞 쯤에 다다라서 나는 그 안암동 고갯길 언덕이 자꾸 눈에 밟혔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익숙해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고갯길은 어린 시절 버스를 타고 자주 넘어 다녔던 길이었다. 어린 시절 그 고개를 보고 '저게 아리랑고개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아리랑고개는 정릉에 있고, 저 고개는 분명 안암동고개인데 말이다. 아마도 어디서 잘못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어쨋든, 안암동 고개를 아리랑 고개로 착각했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나니 문득 재밌어져서, 나는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그 시절을 회고하는데 온 생각이 잠겼다. 그러던 중 생각난 것이 잊고 있던 누군가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었다.


 지금의 나는,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흔히 말하는 '여자친구'가 없다. 뭐, 능력이 없어서 못 사귄다거나 성격에 문제가 있다던가, 이런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대단히 가볍게 여기고 있는 세태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뿐이다. 단 적인 예로, 내 친구 중 하나는 오랜 관계를 가졌지만 사귀던 여자의 마음이 변해 순식간에 차여버리고는 크게 상처받았던 적이 있다. 그런, 후회하고 상처받게 되는 감정의 소모 같은 것들을, 나는 걱정하는 것이다. 그라우초 막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저렇게 될까봐 나는 일부러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것이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여자 친구가 없는 이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비록 겁쟁이라고 보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겁쟁이인 나에게도 사실은 '여자친구'라고 불릴만한 그녀가 있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잃어버릴 수는 없는 그런 기억이다.


 초등학생 때의 나는 키도 크고 공부도 꽤 잘했지만 좀 맹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아이들을 결집하고 이끄는 리더는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냥 평범하고 이성에게는 수줍음이 많은 그런 소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좀 게을러서 지각을 자주했다. 하루는, 선생님에게 혼나고 다른 애들보다 30분 먼저 학교에 오라는 벌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열 살짜리 소년은 남들보다 30분 일찍 등교를 하게 되었다. 궁시렁 거리며 등교 길에 오른 소년은 한 소녀를 보게 된다. 당시 그 소년의 눈에는 소녀가 어떻게 보였던 것일까. 아마, 소년은 소녀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던 것 같다. 그 후로 게을렀던 소년은, 더 이상 30분 일찍 등교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그 소녀를 보기위해 매일같이 30분 일찍 집을 나오기 시작한다. 때문에 소년과 소녀는 서로 눈이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같은 학년의 동급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부끄러웠던 것일까, 소년은 소녀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그런 지지부진한 날들이 한 달쯤 되었을 때, 처음 말을 건넨 것은 소녀였다.


" 안녕, 너 요즘 자주보이더라 "


 소년은 처음에는 당황해서 그 말을 듣고 어버버 거리다가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그날 소년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내내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을 자책했다. 그리고 내일은 꼭 소녀에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소년은 없던 용기를 쥐어 짜내서 소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 어.. 안녕, 오... 오늘도 만났네. "


 정말 바보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때 요전의 날처럼 또 소녀에게서 도망쳐 버렸다면, 소년은 계속 소녀에게서 도망쳐 다녔을 것이다. 그래서는 영영 소녀와 친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말은 황무지에 튼 새싹처럼 무지했던 소년과 소녀의 관계에 자그마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 이후로 소년과 소녀는 함께 등교를 하게 되었다. 엄청난 관계의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녕? 잘 지내? 정도의 상투적인 대화만을 주고받을 뿐, 서로는 그 2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의 대부분을 묵묵히 보냈다. 그 때의 소녀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은 그 시간이 너무 두근거려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소년은 그 당시 십 세 소년의 머리로는 도통 설명할 수 없는 소녀에 대한 알 수 없는 마음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또, 그런 마음을 남한테 들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해 숨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혹여나 말할 때에도 소녀를 바라보지 않고 앞을 바라보면서 괜스레 아무것도 아닌 듯, 담담한척을 하려고 애썼다. 머저리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고 쓸데없이 중저음을 하면서 말이다. 바보 같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순수했던 소년과 소녀의 기압은 한 학기 동안 별다른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소년과 소녀가 5학년이 된 후, 그들의 관계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왔다. 우연치 않게, 그 두 사람은 같은 반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년과 소녀의 사이에 새로운 교집합이 생겼다. 여전히, 5학년이 되서도 그 둘은 함께 등교했다. 그 동안 학교 내에서는 새로운 무리들이 생겼고,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5학년이 되면서 새로이 '이성'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성 친구, 성 그리고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은 높아져갔다. 그래서 이성간에 그룹을 지어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고, 소년과 소녀도 그 조류를 피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소년과 소녀는 같이 다니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그 시절 유행하던 '덤블링장'에 가게 되었다. 다 큰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도대체 의미 없이 방방 뛰는 게 뭐가 재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참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거의 한 시간 반 정도를 여덟 명이서 방방 뛰다가 지친 우리들은 남은 시간동안 뭘 할까 의논을 했다. 그러다가 꽤 재밌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 이성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교 고학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가 있었는데 묻는 말에 꼭 진실로 대답해야 하는 '진실게임'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질문은 아무거나 괜찮았지만, 좋아하는 애가 있어? 이상형이 누구야? 같은 멋쩍은 질문들이 주류였다. 진실게임을 하자는 어떤 아이의 의견에 대부분이 동의했다. 소년은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소년은 매일 같이 등교하는 그 소녀에게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서는 계속 돌아갔고 술래는 소년을 지목한다. 술래는 소년에게 물어본다. 너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야? 어떤 사람을 좋아해?


 거짓말을 하면 그냥 그런대로 넘어갈 일이였다. 아이들이 관심법을 써서 소년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소년의 쿵쾅거리는 마음속에서는 소년이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기류와 함께 소년의 머리속 한 켠에서는, 지금 거짓말을 해버리면 자기 마음을 배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소녀를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년의 머리 속 다른 한 켠에서는 또, 바로 지금이 소녀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마구 피어올랐다. 그런 복합적인 상념들이 소년의 머리 속을 뒤덮었다.


 소년이 마음을 다잡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심한 소년은 입을 열었다. 나는 OOO를 좋아해. 순간 장내에는 침묵이 일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진짜? 진짜? 아이들은 웃으며 소년에게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소년은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아이들은 소년을 놀렸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아이들의 놀림 따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소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소년은 학교로 나서는 것이 두려워졌다. 소년은 몇 개월 동안처럼 학교 가는 길에 소녀를 만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나와 같이 학교에 같이 가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소년은 쉽사리 발을 옮기지 못했다. 소년은 결국 평소보다 5분 늦고 말았다. 소년은 침울하게 걸어 나갔다. 하지만 언제나 만났던 그 자리에서 소녀는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같이 학교를 갔다. 아이들은 소년과 소녀를 가리키며 누구와 누구가 사귄다, 며 놀렸다. 소년은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기뻤다. 그 중에서도 소년이 가장 기뻤던 것은, 아이들에게 그런 놀림을 받는 소녀도 그런 짓궃은 놀림에 대해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소년과 소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해졌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 동안 소년과 소녀는 더욱 가까워 졌다. 하루는 소녀가 먼저 소년의 집을 찾아왔다. 소녀는 이번 일요일에 같이 놀 수 있냐고 물었다. 소년은 좋다고 했다. 그 주의 일요일은 너무도 따스했던 봄날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근처에 있던, 낙산이라는 산으로 올라갔다. 봄날 낙산 길은 봄꽃들로 만개했었다. 하얀 벚꽃, 노란 개나리, 분홍빛 진달래. 소년과 소녀는 어색하게 한손을 잡고 꽃구경을 하며 걸었다. 잔잔한 봄바람이 꽃들을 흔들었다. 왠지 그 모습을 보는 소년과 소녀의 마음도 흔들리는 듯 했다.


 마침내 소년과 소녀는 산의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곽 너머로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는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말했다. 저기 보이는 집이 우리 집이고, 저쪽은 너희 집이야. 그리고 우리는 항상 저 부근에서 만나잖아, 그렇지? 소년은 그렇다, 라고 말했다. 둘은 자연스럽게 산 정상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산 정상에서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 대한 참 많은 얘기를 했다. 좋아하는 것, 취미활동, 고민거리,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소년과 소녀가 서로에 대해 점점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둘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지금껏 하지 못했던 좀 더 솔직한 감정들을 풀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가 참 잘 맞는 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낙산의 성곽 길을 따라 내려온 소년과 소녀는, 바로 지금 이 '지봉골공원'으로 오게 된다. 근처 골목의 구멍가게에서 산 400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진 정자 아래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그들은 수줍어서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로 어물쩡 어물쩡, 어느새 인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봄 오후, 석양이 지는 고요한 가운데 소년과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사라져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서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 소년과 소녀가 만났을 때, 소녀는 차마 소녀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있던 소년에게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소년이 먼저 소녀에게 소녀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줄 차례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년은 말했다.


" 우리 사귈래? "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응 "


 소년과 소녀의 얼굴에는 잠시 동안 붉은 빛이 맴돌았다. 붉은 석양이 채 지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태양빛이 반사된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플라타너스 그늘진 정자 아래에서, 소년과 소녀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 때 처음으로 소년은 소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다. 소년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소녀는 그걸 보고는 웃으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주었다. 둘은 각자의 엄지로 서로의 마음에 도장을 찍었다. 그 후로 소년과 소녀는 참 많은 추억을 쌓았다. 남산으로 놀러도 가고, 숙제를 하러 덕수궁도 같이 가고, 생일파티도 같이 즐기고, 문방구에서 이천 원짜리 커플링을 사서 끼우고 다니기도 하였다.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별은 무언가 채 제대로 꽃피기도 전에 찾아오고 말았다. 소년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떠나며 소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에게 떠난다는 소식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아마 그 당시의 소년은 그 소녀에게 자기가 먼 곳으로 떠나고 이제는 보기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전해야할지 잘 몰라서, 부끄러워져서, 또 그런 행동들이 약한 모습으로 보일까봐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을 해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없이 떠나게 된 것 같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핸드폰이 대중화된 시절도 아니었고, 만나려거든 그 집의 문을 직접 두드리면서 찾아가던 시절이었기에 둘 사이의 연락은 영영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지금, 소년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그 때의 그 정자와, 그 때의 그 플라타너스 아래에 앉아 부끄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과거를 기다리고 있다. 그 때, 우연처럼 10년 전 그 날 그곳에 있었을 것만 같은 소녀가 내려와 플라타너스 그늘진 정자 아래에 앉는다. 엎어지면 포개질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은 서로를 힐끔힐끔 응시한다. 하지만 이내 그만 두고는, 소녀, 아니 이제 성년이 되어버린 그녀는 먼저 일어서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진 우레탄 바닥을 무심히 지나간다. 저 너머로 보이는 창신동 고개의 암반들이 세월의 풍파에 깎여 나갔듯이,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희석되고 옅어져버려 남녀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니, 혹여나 어렴풋이 기억하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가 너무나 오래되어 버린 일이기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혹은, '이미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기에 이제 그런 추억들은 들춰내 보았자 서로에게 폐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그런 모종의 두려움들 때문에 둘은 서로에게 인사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마치 시간이 두 사람을 희롱하듯 두 사람은 서로를 무심히 지나쳐버리고 만다. 두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소년도 소녀도 그리고 공원도,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버리고 말았다. 다만, 정자 옆의 플라타너스 나무만이 두 사람의 추억을 간직한 채로 서있을 뿐이다.



김천주  010 - 9185 - 3276

 yuine1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