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는
아주 갑자기 일어난 일이였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아빠의 여자 친구였던 탓에 이모로 불러야 했던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는 내 엄마가 되어 있었고 몇 달이 지나서는 외동으로만 자라온 나에게 형제라는 것 또한 생겨 버렸다.
형제가 있으면 어떨 것 같냐, 는 새엄마와 아빠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괜찮을 것 같다는 대답을 던졌던 게 바로 일주일 전이였나, 곧 나도 모르게 생겨버린 내 형과 같이 살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게 불과 이틀 전이였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다. 솔직히는 괜찮고 자시고를 떠나서 나는 별 상관자체가 없었지만 새엄마의 어딘가 측은한 표정에 억지로 기뻐하는 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적막한 집안, 나는 방금 눈을 떴다 . 엄마가 생겼다고 해서 크게 바뀐 일은 없었다. 단지 집안 식구가 또 다시 늘었다는 것, 지금은 한명이 더 늘어나게 됐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주말에도 늦게까지 늘어져 있는 나를 한숨을 쉬며 두들겨 패서라도 깨워서 잔소리를 하고 핀잔을 해주는 사람이 생기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새엄마는 직장생활을 하던 여성이었고 처음 세 달 정도를 같이 살다가 곧 발령이 난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빠가 집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금 같은 때뿐만 아니라 학교를 갔다 오면 텅 비어있는 집안에 나 혼자만 있는 일은 당연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보통 주말에야 부모님이 집에 붙어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주말에만 직장 외에 다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터라 장을 본다든지 하는 일들로 그마저도 밖에 나가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나도 곧잘 그런 일에 따라가곤 했다. 답지 않게 알람을 설정해서 일찍 일어나 나가는 부모님을 졸졸 쫓아가 어떻게든 가족의 그림을 내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가족이라고는 해도 워낙 낯가림이 심한 나에게 아직 말을 많이 해본 적이 없는 부모님은 낯선 사람과 같이 어색해서 그곳에 억지로 끼여있다는 느낌이 들어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러니 집안에 혼자 있는 것이 제일 편했다.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아무렇게나 해도 됐으니까.
그런 성향의 내가 친구가 많을 리는 만무했다. 당연히 외출할 일도 잦지 않아서 집안에서 시간을 아무렇게나 때우고 있자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멍하니 티비를 보다가 도어락의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름 자동적으로 일어나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했다. 평소는 해보지도 않던 인사를 하는 것이 아직도 낯간지럽기는 했으나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응, 대답하는 새엄마의 뒤로 낯선 얼굴이 보였다.
"안녕?"
본의 아니게 굳은 내 얼굴에도 반갑게 인사해주는 얼굴에 나도 따라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사람이 내 형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고, 곧이어 새엄마가 말을 꺼냈다.
"저번에 말해줬지? 네 형이야."
"반가워."
어? 응, 나도. 여전히 억지웃음을 지은 채였다. 같은 방 써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내가 가리켜준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나서 다시 측은한 표정, 새엄마가 잘 좀 부탁한다고 했다.
나한테 잘 부탁할게 뭐 있을까… 그 표정과 소리에 절로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만 같다. 낯선 사람은 무서워, 달갑지 않았다.
형이 생긴다는 것 자체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 이렇게 같은 공간에 오래 있어야하는 상황이 온 것은 곤란했다. 그러니까 낯선 사람이 나와 같은 곳에 속해지는 것과 직접 오랫동안 대면해야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였다. 애초에 같은 곳에 속해지게 되는 시점에서 대면을 피할 수 없게 되는 일이지만 꼭 가까워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방이 부족한 탓도 있었을 테지만 굳이 그와 나를 같은 방에 처넣은 것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그게 조금 곤란했다.
늦은 시각까지 거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어봤자 어차피 그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아니면 계속 내 눈치만 보는 새엄마 때문에 나는 정말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차라리 그와 어색한 공기를 나누는 쪽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 정도라서 힘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 자고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는 내가 읽지도 않는데 한 쪽 책장에 빼곡히 꼽혀있던 책들 중 하나를 빼내어 그것을 읽고 있었다. 전혀 내 취향이 아닌 가벼운 내용의 소설책이었다. 나는 잠이 오지도 않으면서 꾸역꾸역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때서야 그는 내 쪽을 보더니 책을 덮었다.
"너 몇 살이야? 엄마가 나보다 두 살 적다고 했는데."
어어, 그럴 거야. 그럼 형, 은 나보다 두 살 많으니까 고2인거야? 애써 살가운 듯이 행동하려하니 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형이라는 단어 또한 생소해서 더욱 말을 내뱉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는 갑자기 나를 향한 탐구심이 발동했는지 꿋꿋이 질문을 끊임없이 했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한, 두 마디의 대답이면 충분한 질문들. 중간 중간 끊기는 말들도 많았지만 원체 사람이 긍정적인지 내가 뚱한 반응을 보여도 여전히 밝게 이것저것 말을 꺼냈다. 분명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보니 평소 많이 하지 않는 말들을 더군다나 오늘 처음 본 낯선 사람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 못내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근데 우리, …이제 좀 자면 안 될까?"
아, 그럴까? 한창 신나게 요즘 보고 있다는 드라마얘기를 해주던 그는 말이 끊겨서 무안한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물론 나도 내가 생각해도 버릇없는 행동이었던 것 같아 후회하고 있어도 벌써 방안의 불은 꺼진지 오래였다.
"잘자."
나는 대답이 없다. 그도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그 다음날엔 그가 먼저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간혹 눈이야 마주치면 눈을 선하게 접고 웃어주기는 했지만 별다른 대화 같은 건 오가지 않았다. 우리가 나눴던 말이라곤 밥 먹으래, 응, 불 끌게, 응. 정도였다. 전날에는 나와 어떻게든 말을 하고 싶어 안달 난듯했었는데 그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에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으나 여전히 불편한 그와의 공간에서 억지로 대화를 하는 것보다 야는 서로 조용한 편이 나았다.
그렇게 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고 밤에 그는 새엄마와 함께 떠났다. 다음 주에 보자는 말만 남긴 채.
그가 가고 나서 나는 방에 처박혀 괜히 그가 읽고 있었던 소설책을 꺼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몰아친 일들은 내게 다 수용되기에는 너무 버거운 양이였다.
그는 정말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새엄마와 함께 찾아왔다. 엄마가 생겼어도 변함없이 적막했던 집안은 그 사람 하나가 더 생긴 걸로 조금은 시끄러워졌다. 그를 바라보며 하나 안 것이 있다면 그가 저래 뵈도 참 된 사람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예의도 바르고 성격도 깔끔해서 같은 방을 계속 씀에도 거슬리는 것 하나 없었다.
그 다음은 나를 대하는 태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는 확실히 내가 봐도 재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나에게 싫다는 말은 물론 그런 표현자체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며 내가 저와의 대화를 불편해한다는 것을 진즉에 깨달았는지 지금까지 내가 불편할만할 말을 붙이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아빠에게까지 친아들인 나보다 더 싹싹하게 구는 것이 사교성도 좋아 보였다.
그에 비해 나는… 단란한 셋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 늘 봐오던 적막한 집안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였다.
새엄마가 나를 본다.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히도 이번엔 좀 자연스러웠는지 새엄마도 대수롭지 않게 내게 웃어보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아빠가 나를 본다. 안타깝게도 입꼬리가 떨려와 도저히 올라간 상태를 유지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곧이어 그마저도 내 쪽을 보려 할 때 나는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짜증이 난다. 그가 싫지 않았었지만 어쩐지 미움이라는 감정이 그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런 내가 짜증이 났다. 쓰레기 같아.
왜그래? 다정한 목소리. 그것을 뿌리치는 상상을 해보지만 정말로 그것이 머리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애써 굳은 표정을 풀고 모두를 향해 웃어 보였다.
"왜요? 전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표정들이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사실 안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학부모 참관 일날 뒤에 서있는 엄마에게 인사하는 아이들이. 늦은 시간이면 저녁을 먹으라고 손수 엄마가 데리러 와주어서 엄마 손을 잡은 채 작별인사를 하던 아이들이. 비가 오는 날엔 우산을 든 엄마가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그렇다고 나에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나에겐 그런 아이들의 엄마대신에 할머니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늘 마음 한편에 엄마라는 존재가 걸리고 있었다.
너네 엄마는 왜 안와? 라는 물음에는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 엄마가 날 데리고 도망치던 날도 기억 못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큰 일이 있었던 것도 부부간의 큰 싸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 와서 보면 그저 성격차이로 인해 몇 번씩 있던 작은 다툼들에 지쳐 버티지 못한 엄마가 그 조금씩 쌓여져가는 스트레스들에게서 빠져 나가려 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새벽에 엄마가 나를 깨웠다. 내게 옷을 입히곤 엄마물건과 내 물건을 큰 가방에 담고선 내 손을 꼭 잡은 채 이제 막 동이 뜨기 시작해 희뿌연 바깥으로 나갔다. 새벽의 채도 낮은 회색, 진짜 우리가 없어져도 모를 정도로 우중충한 색이었다.
"우리 어디가?"
"응 우리 아들 새아빠한테 가는 거야."
그럼 여기는 다시 안와? 응 안와.
"그럼 난 안갈래"
나를 이끄는 엄마의 손을 뿌리친 채 나는 혼자 집으로 향했다. 의외로 살던 곳에 대한 정이 엄마보다 강했던 걸까. 그것은 아마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새아빠에게 간다면 엄마에겐 새아빠가 있다. 물론 내가 그때 따라갔다면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까지 엄마에게 간다면 아빠는?
아빠는 늘 일 때문에 나와 마주친 적이 적었을 뿐더러 무뚝뚝한 옛날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아버지상 그 자체라 내가 어색하게 느낄 정도였지만 와중에 아빠보다도 좋아하는 엄마를 보낼 정도로 나는 여기에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슬쩍 뒤를 돌아봤을 때 엄마는 멍하니 내 쪽만 보고 있었지만 나를 따라 집으로 다시 오지는 않았다. 차라리 별거 아닌 일로 맨날 우는 것보다는 엄마가 다른 곳으로 가서 웃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 딱히 같이 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홀로 집으로 가면서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엄마 또한 나를 따라 오지 않았다. 가는 길엔 나도 모르게 엄청나게 울었었던가. 다만 그저 넌 어쩌면 좋냐는 할머니의 말에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버림받은 걸까. 그런 생각은 빨리 지우려고 더욱 노력했다.
그래도 엄마의 행복이 부러움에서 오는 괴로움보다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새엄마가 일하는 곳을 따라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엄마까지 뿌리치며 지금까지 쭉 태어나서 살아왔던 곳을 떠나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별 감흥은 없었다. 별로 친했던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좋은 추억이 있던 것도 나쁜 추억이 있던 곳도 아니라 그랬을지도 몰랐다.
새로 이사를 가면 우리는 네 명이서 계속 살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그 곳에서 소속감을 가져도 되는 것이 맞는 거라 믿으며 낯선 곳으로 향하는 트럭에 몸을 실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같이 트럭에 없었다. 옆에 탄 새엄마에게 뭐라 묻기도 싫어 눈을 붙이고 잠에 들었다. 잠에 들기는 했으나 얕은 잠이라 주변 소리가 모두 선명히 들려왔다. 차가 덜컹거리는 소리. 아빠의 한숨소리. 새엄마의 전화소리. 전화상대는 그이라고 감히 예측할 수 있다. 그를 떠올리면 어딘가 열이 뻗쳤다. 그러나 내가 열이 뻗칠 이유 따윈 원래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더 열이 뻗쳤다. 그의 하얀 얼굴이 미소를 그린다면 그것이 더 심해진다. 애써 차가 덜컹거리는 소리에나 신경을 집중시켰다.
차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차에서 내려 보이는 것은 하얀 이층집이었다. 마치 그이처럼. 분주히 짐들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넓었다. 새엄마가 내방이라고 한 곳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방내부에 침대 두개만 덜렁 있었다. 분명 그와 같은 방이다.
그것을 깨달아서인지, 장시간 차에 타고 있었던 탓인지 왠지 무지 지쳐서 가까운 쪽에 있는 침대로 가 누웠다. 짐을 푸는 것을 도와줘야 할 텐데… 내방에도 상자가 몇 개씩이나 들어왔지만 내 눈은 감기기만 했다. 차에서 잘못 잔 것인지 목이 뻐근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감기려고 했다. 결국 감기는데 성공한 눈앞엔 암흑만이 펼쳐지고 상자들이 들어오는 소리들도 멀어질 만큼 이번엔 깊은 잠에 빠지고 있었다.
문득 잠에서 깼을 땐 주위가 어둑해지고 있었다. 왠지 목도 뻐근하지 않고 편한 느낌이 든다했더니 나는 곧바로 누워 이불도 반듯하게 덮고 있었다. 잠버릇이 별로 없어 처음 잠들었던 자세 그대로 깨는 것이 보통인데, 옆으로 쭈구려 잤다고 말하고 있는 내 기억과는 다른 상황이다. 혹시나 해서 슬쩍 옆을 보니 스탠드를 켠 채 책을 읽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 얼굴이 보이자마자 나는 다시 눈을 감았지만 짜증 때문에 심장이 거세게 뛰는 탓에 잠에 들 수가 없다. 정말 짜증이 난다. 사실은 그와 같이 잠자리에 들면서 한 번도 금방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처음은 불편함이었지만 불편함은 서서히 미움으로 미움은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그 이후로는 이런 식으로 심장이 마구 뛰어왔다. 그것도 기분이 나쁜데 그러다가 막상 잠에 들면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편히 잤던 것도 짜증이라면 짜증이었다.
"너, 자?"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선명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숨이 절로 멎었다. 이 순간 귀가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그가 그 뒤로 묵묵부답인 내가 잔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더 건네지는 않았다. 그제야 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슬쩍 실눈을 뜨고 그의 쪽을 봤을 때 나는 다시 숨이 멎을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나쁘다. 심장은 더욱 거세어 졌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생전 하지도 않았을 잠꼬대를 하는 척 몸을 돌렸다.
그가 싫다. 그러나 그를 싫어하기가 싫다. 나의 이런 모순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가 싫다고 해도 그와 함께한 시간이 특별히 흐르지 않게 변해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 시간은 좋든 싫든 흘렀다. 그리고 이제 날은 많이 차가웠다. 벌써 그랬다. 그와 처음 만난 건 막 따뜻해질 시기였는데 벌써 차가워지다 못해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때쯤에는 무언가가 늘 있었던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너 곧 생일이라며. 생일선물로 뭐 받고 싶어?"
맞아, 내 생일이었다. 내 생일이 이쯤이었다. 그러니까, 날이 많이 차가울 즈음.
참고서를 사기 위해 들렀던 서점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아는 척을 해 보이는 그에게 나도 인사를 해보이니 친구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뭐라 뭐라 하고는 내 옆으로 붙어왔다. 이런데도 친구와 같이 오는구나.
누군가와 외출한지가 너무도 옛날이 되어버린 내 기준으로 생각하고선 한참 뒤에야 원래 혼자 다니는 쪽이 좀 이상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문제집을 몇 권 훑던 그가 말을 꺼냈다. 하얀 얼굴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어?"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한다는 말이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인 게 어이가 없어서 그랬을까. 그것을 참느라고 입꼬리가 또 억지스럽게 올라가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가족으로 함께 있으면서 그의 생일을 맞이한 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알려는 노력도 안했었고 안다고 했어도 챙겨주진 않았을 것이다.
아침밥으로 나온 미역국에 아빠생일은 지났고 새엄마의 생일도 지났는데 누구 생일이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다 같이 그에게 생일축하노래를 불러줄 때까지 입을 다물었던 것이 끝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선물꾸러미를 내려놓는 그를 볼 때까지 목까지 차올랐던 말은 어디로 사라졌었는지 모를 일이였다.
그런데 그는 나까지 깜박할뻔한 내 생일을 운운하고 있었다.
"모자? 옷? 게임기? 말만 해. 형이 사줄게."
아니이… 바보같이 말이 늘어졌다. 나는 고개만 저었다. 왠지 볼이 뜨거웠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생일을 축하해준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생일이란 딱히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고, 애초에 주변에 사람도 없었으며 할머니도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고 아빠는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적었으니 생일이란 정말 말 그대로 태어난 날이라는 의미에 그쳤다. 그나마 생일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던 것도 새엄마가 생긴 후부터였다.
그는 내 대답을 재촉하는듯한 얼굴을 했다. 말끔하고 여유 없어 보이는 얼굴. 그래봤자 정말 딱히 떠오르는 대답은 없었다. 갖고 싶은 것이라는 잘해보지도 않은 생각과 오랜만에 가지는 그와의 대화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대답을 꺼낼만할 정신은 아니었다.
"그럼 나중에 알려줘. 나 일단 가봐야 해서… 집에서 보자!"
어, 어. 잘 가. 그 사이 그는 친구들 같던 사람들과 서점을 나갔다. 나가기 전 그는 날이 춥다며 얇게 입고 나온 나에게 약한 핀잔을 주면서 저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둘렀다. 허, 목도리를 만지작대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이제야 마음껏 올라간 입꼬리가 아플 정도로 시원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빠 심장이 거세게 뛰어 아파왔다.
어느덧 추워진 날씨에도 가게의 난방 탓인지 무지 더웠으나 목도리를 풀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생일 당일까지 그와 말 한마디 해보지 않았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세지 않던 날짜까지 세가며 뭘 달라고 해야 할지 생각했을 땐 약간 설렌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정말 갖고 싶은 것은 딱히 없었다. 그저 생일아침에 그가 축하의 한마디를 건넬 것이라는 약간의 확신만으로 충분했다.
막상 아침엔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긴 했으나 그것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는 새벽같이 나갔다는 새엄마의 말을 들으며 그의 빈자리를 보았지만 별로 실망스럽진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것이 굳이 실현되진 않았어도 정말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아침밥으로 나온 미역국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밥공기를 다 비울 수 있었다. 그리고선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치던 그의 목도리까지 단단히 매고서 왠지 평소보다 붕 뜨는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늘 가는 것이 불만이던 학교마저도 오늘만큼은 싫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간간히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축하를 받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다들 서먹하긴 했지만 애매한 시기에 전학 온 나도 챙겨줄 정도로 성격들이 좋았다.
몇몇이 선물로 준 과자 같은 것들을 챙기며 집으로 가는 길엔 정말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잘 가, 평소보다 크게 나온 내 목소리가 조금 부끄러웠지만 잘 가, 살갑게 흔들어주는 손들에 나도 조심스레 손을 흔들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에도 집까지 살짝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생일이란 것이 이렇게 좋은 날인거구나. 입에 걸린 웃음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써 없애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빨리 걸어서 그럴까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보이는 그의 신발에 가슴이 뛰어서 거센 숨 때문에 입김이 빠르게 사라졌다 다시 생겼다가 했다. 그에 목도리를 괜히 꼭 쥐었지만 역효과였는지 숨은 진정될 생각을 안 하고 더 거세지기만 했다.
애써 가슴을 부여잡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하얀 얼굴로 웃는 그였다. 그의 손에는 저처럼 하얀 케이크가 들려져 있었다. 부모님은 일을 나가 집안엔 우리 둘 뿐이었다. 그것은 그도 알고 있고 나는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보통은 마주치기를 꺼려했었기 때문에 작은 방에만 한정되었던 둘만의 공간은 지금 큰 집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늘 불편하기만 했던 둘만의 시간이 지금만큼은 불편하다기보단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안 하는 게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번엔 평소처럼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기분이 좋아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결론은 기분이 좋으나 나쁘나 그와 있으면 심장이 거세어진다는 것이었으나 어쨌든 지금 이순간은 좋다는 것이었다. 그가 입을 뗀다. 곧 심장이
"생일 축하해!"
내려앉았다. 무엇보다도 조용하고 차분한 설렘이었다. 별거 아닌 저 한마디가 얼마나 내 기분을 높이 띄울 수 있는 걸까. 그가 싫은 것이나 그를 싫어하는 내가 짜증나는 것이나 지금은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로 기분이 붕 떴다.
"네가 말을 안 해주길래 선물은 내 멋대로 사왔어."
맘에 안 들어도 네가 안 말해준거니까 불평하면 안 된다? 케이크를 받아들고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멍해있는 나에게 그가 또 다른 상자를 건넸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은 엄청난 일이였다.
하, 너무 벅차서 나도 모르게 큰 숨을 내쉬어 버렸다. 힘들다기보다는 너무 행복해서 숨이 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숨이 막혀 고이는 눈물들이 흐르지 않게 하려 눈에 힘을 줬다. 왜 그래? 걱정스러운, 다정한 목소리. 이번엔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아직까지 내려가지 않은 입꼬리와 자연스레 접히는 눈을 들어 올렸다.
"괜찮아."
고마워, 란 말도 입 밖으로 나갔지만 소리가 되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알아 들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거야. 찢어질 것만 같이 아픈 입꼬리에게서 오는 불안감에 오늘 새로이 깨달은 생일의 의미를 부여해본다. 여전히 불안했지만 마냥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저 여전히 웃고만 있는 그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지는 걸 안 들켰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생일이 지나고 얼마 있지 않아 나는 졸업을 하고 그와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이제 학교에서도 볼 수 있겠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나는, 글쎄… 어차피 같이 다녀봤자 1년밖에 같이 다닐 수 없었다. 저도 고3일 텐데 바쁘지 않을까.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은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가 선물로 사줬던 시계를 보며 나는 새로운 교실로 들어섰다. 그다지 유명한 브랜드는 아닌 시계지만 그와 같이 깔끔한 디자인이 꽤 맘에 들어 자꾸 눈이 가서 시간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이 버릇이 될 지경이었다.
여전히 그와 단 둘이 있으면 불편하고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별다른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심장이 거세게 뛴다. 그렇지만 여전히 싫기도 한 그에게 멀리 지나가다가도 내가 먼저 인사를 하기도 했고 예전보다는 대화가 늘었다. 그리고 그를 부를 때마다 형이라고 하는 것이 어색해서 주어를 빼고 말하던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려서 조금씩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해 형이란 말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이젠 곧 잘 그를 부를 때 서슴지 않게 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형, 작게 운을 떼본다. 속이 간질 간질거렸다. 자리에 앉아 그와 같은 교복을 내려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요즘 자주 올라가지는 것은 원래 헤픈 입꼬리가 아닌데 분명 그가 맨날 실실 웃고 있으니 나한테까지 옮은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웃지 않을 이유도 없어서 나는 그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다 교실로 들어오는 어떤 남자애와 눈이 마주쳐 괜히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힐끗 다시 남자애를 쳐다봤을 때도 남자애는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하다. 그렇지만 또 시계로 간 시선에 입꼬리는 쳐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와 같지 않은 요새 나는 이런 상태의 연속이었다.
이상한 버릇이 들어 헤실헤실 그처럼 헤프게 웃고 다닌 결과는 내 주변에 모인 친구들이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적이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어색해하는 나를 욕할 거라는 내생각과 달리 나를 챙겨주는 모습들에 점점 나도 그들의 속으로 녹아드는 듯 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가족들을, 그것도 내가 어렸을 적 평범히 단란했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사람들 사이라는 것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 문득 쳐다본 시계에서 그가 떠오르긴 했으나 이렇게 많은 친구들에게 나 또한 친구라고 인식되어진다는 것이 내게 너무 벅차 넘쳐서 금방 그는 밀려 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하는 것만으로 아직도 묘한 기분이 들어서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던 이유도 포함해야 했다.
모두가 잘해줬지만 처음 교실로 들어오다 웃는 나와 눈이 마주쳤던 남자애는 특히 더 잘해줬다. 간간히 그때의 나처럼 내가 쳐다보면 웃어주는 것이 왠지 그의 하얀 얼굴을 떠오르게 해서 은연중에 계속 쳐다보게 되었다. 왜 내가 그를 자꾸 떠올리게 되는지 모르겠어서 심장이 기분 나쁘게 거세어지지만 남자애에게서 연상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실제 그를 계속 쳐다보는 것은 무리가 있었지만 연상된 허상의 그는 그나마 덜 기분이 나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막상 허상이란 걸 알아차릴 즈음엔 기운이 쭉 빠졌다.
그와 함께 갑자기 내게 일어난 변화들과 그와의 상관관계를 알아보자면 많은 관련이 있는 듯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마주친 얼굴에선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두근두근 멋대로 뛰던 심장이 어느 순간 멈춰 버린다. 숨이 멈춘 잠시 제대로 살펴본 얼굴이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끌어올려진 입꼬리가 내려간 채 고개가 돌아갔다. 그를 봐서 기분 나쁜 것과는 다르게, 그리고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그는 밀려 버린 것이 아니라 숨어 있다간 이런 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나와 사람사이에는 왜 그가 존재하는가. 나와 그의 사이에 사람이 존재하는 건가? 답이 나오질 않는, 이해조차 하기 힘들면서 답이 필요한 것만 같은 질문들이 애석하다.
굳은 표정의 남자애에게는 미안할 따름이지만 그것의 해결까지 남자애에만큼은 제대로 사람과 사람사이를 성립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생일은 5월이었던가. 봄쯤이다. 하얘서 나처럼 겨울일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게 태어난 날까지도 그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어쨌든 몇 달 남지는 않았다.
갑자기 내가 그의 생일을 물으니 새엄마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날짜를 알려주시곤 웃기만 했다. 그와 비슷한 얼굴에 괜스레 얼굴이 뜨거웠다.
많이 풀리기야 했지만 아직 추운 날씨에 목도리를 매고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그한테는 무엇을 주면 좋을까 고민했다. 일단 내가 받은 것만큼은 해주고 싶었다. 먼저 그처럼 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떠올랐고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막혔다.
잠시 막막하기만 하다 불현듯 떠올랐다. 늘 그가 손에 끼고 사는 것.
책이 좋겠다. 부담스러운 가격도 아니고 방에서 슬쩍 훔쳐 볼 때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내 책과 그의 책이 합해져서 이미 두 쪽 책장을 다 채울 정도로 책은 많았지만 이만큼 적당한 것도 없었다. 오늘 방과 후 갈 목적지는 서점으로 정해졌다. 아직 그의 선물을 살 시간은 많았지만 당장 바로 사둬야 할 것만 같았다. 아니면 내 생일 때처럼 붕 뜨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서점으로 가야 하는데, 나는 텅 빈 교실에서 나 외에 유일하게 있는 남자애를 쳐다봤다. 서점으로 가려는 나를 잡아 세운 남자애를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니라 이렇게 마주하고 있었지만 나는 어서 서점으로 향하고만 싶었다. 게다가 남자애와 함께 있으면 늘 연상되는 그 때문에 남자애자체와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어서 계속 둘만 있는 교실이 마치 처음 그와 같이 있던 좁은 방같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거기에 그렇게 잘해주는데도 정말 미안하게 남자애를 볼 때마다 연상되는 그의 웃는 하얀 얼굴에 정신이 팔려 이름도 아직까지 모르고 있어서 마음은 더 불편했다. 이 애와 모든 것이 그와 관련이 되고 있는 것 자체가 가장 크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이나마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기위해 조심스레 명찰을 보려고 하는 순간 남자애가 가까이 다가섰다. 자연스레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뒤로 뺐다. 그의 얼굴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곤 곧 열린 입에서,
"있잖아. 나 네가 좋아."
나는 놀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심장은 거세어진지 오래였고 그 사이 그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만큼.
그제야 그가 아닌 남자애의 얼굴이 보여 확 밀쳐냈다. 하지만 쉽게 밀쳐지지 않아서 나는 교실 밖으로 뛰어갔다.
분명 지금 나는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뭐에게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저 점점 빨라지는 발에만 의지해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나는 남자애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해주는 게 고마워서 호감 쪽이라면 호감이었다. 비록 남자애의 호의가 내가 생각했던 방향의 호의가 아니라고 해도 굳이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그럼?
문제는 무엇일까. 얼마나 거세게 뛰었는지 목도리가 저절로 풀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멈췄다. 언뜻 나를 다정하게 부르는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얀 얼굴이 웃음을 지었을 즈음 문제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 것만 같았다.
거센 숨을 고르며 목도리를 주워들었지만 이미 목도리는 흙이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막히는 숨에 나는 울고 싶었던 것도 같다.
역시 친구라니 나한테는 가당치 않았나보다. 처음부터 나답지 않게 웃는 내내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었지만.
어느새 나는 또 모두와 멀어져 있었다. 이유가 뭐냐고 물을 힘도 없었다. 그러니 간간히 들려오는 게이새끼라는 욕에 반박할 힘이 없음은 물론이고 그런 비슷한 류의 욕으로 어떤 식으로 내 소문이 돌고 있을 지만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소문이 그렇게 돌까 봐 역으로 나에게 소문을 돌려버린 것일까.
남자애의 이름은 여전히 모르는 채였지만 이젠 마주쳐 주지도 않는 얼굴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호의를 그렇게 버릇없이 거절했으니 무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란 어렵고 알 수 없는 일이였다. 내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탓이니 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지만 나와 달리 사교성도 좋고 서글서글한 그가 이 상황까지 올리는 없었다. 문득 새엄마와 아빠와 함께 단란히 있던 그가 떠올랐다. 그 곳에서 나는 끼어 들 틈을 찾지 못했던 것까지.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을 만든 것도… 그렇다고 마냥 싫어하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아니었으며 어쩌다 나 혼자 모든 일을 자초한 것이었다.
어차피 원래 혼자였고 잠시 동안이나마 좋았으니 그다지 상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버티기 힘든 것이 한 가지 있었다면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아예 등을 반대편으로 돌려버린 친구들은 아니었다. 단지 흙투성이가 된 교복이나 생채기가 생긴 내 얼굴에 왜 그러냐고 물어보는 그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는 것이 괴로울 뿐이었다.
내가 계속 입을 닫고 있을수록 그는 입을 열었다. 그 상황이 그냥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부러 집에도 늦게 들어가고 주말이면 어디든 쏘다녔다. 그가 말이라도 걸라 할 세면 빠르게 그 자리를 떴다.
새엄마나 아빠의 걱정스런 물음도 불편했지만 이젠 말붙이기를 포기한 듯 나를 빤히 보기만하는 그가 제일 불편했다. 그의 시선이 너무 짜증스러웠다. 뭔데 저렇게 다정한 걸까. 그와 눈이 마주칠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그리고 그렇게 대답한 나는 사실, 정말로, 괜찮… …았다.
어릴 때 가벼운 불면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나에게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존재였고 어떨 땐 아빠까지 대신해 주었던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맨날 속상하다고 피우셨던 담배 탓인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피우시던 담배의 이름은 라일락이었는데 아직도 그 꽃을 보면 할머니가 생각났다.
여하튼 그런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다. 할머니의 시체가 화장터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만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늘 함께 자던 할머니가 없는 며칠은 잘 잤었다. 그러다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였는데 아직 주위가 한참은 어두운 때였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3시 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자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아서 별로 보지도 않던 티비 앞으로 가서 시간을 때우다 동이 틀 때 쯤 잠이 왔었다. 그저 처음엔 별거 아니라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꽤나 오래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꽤 어린 나이였는데 갑자기 깨진 생활리듬에 편치 못했고 그 늦은 시간 티비를 본다고 내 소리에 깨기도 했던 아빠에게 혼났기도 많이 혼났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도 그 시각 즈음엔 눈이 저절로 떠졌고, 다시 잘 수도 없었다. 그것이 어떻게 나았는지는 기억에 없고 그냥 어느 순간 계속 잘 잤던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그것이 왜 지금 갑자기 도진 것인지는 더 알 수가 없었다. 주위는 아주 암흑이었지만 금방 익숙해진 어둠에 이제 막 3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이 보였다. 슬쩍 옆을 봤더니 그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이상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내 상태에 대해 왜 그러냐고 묻지 않는 그에 늦게 싸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내가 일찍 들어오기 시작한 대신 그가 이렇게 늦게 들어오곤 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정도가 심하다. 아무리 늦어도 11시 전에는 꼭 들어오곤 했는데, 독서실이라도 간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공부도 열심히 하는 편이니까. 어쨌든 이 순간 그에 대한 생각은 하기가 싫었다. 왠지 불길한 기분에 숨이 턱 막혔다.
눈을 감아도 역시나 오지 않는 잠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들리는 방문 열리는 소리에 나는 그대로 다시 뜬 눈을 감았다.
조용한 발소리는 분명 그였다. 나는 최대한 잠을 자는 척을 했다. 여전히 막힌 숨이 불편하긴 했으나 인위적이나마 숨을 마시다가 뱉는 것을 동일한 간격으로 반복했다.
그의 발소리는 어느 순간 끊겼지만 슬쩍 뜬 실눈으로 본 그의 침대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때 그가 내 침대에 털썩 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재빠르게 눈을 꼭 감았다.
머리칼 사이로 손이 부드럽게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되려 그가 묻던 것처럼 내가 물어볼 뻔했지만 나는 계속 잠을 자는 척을 했다.
"있잖아."
정말 싫다. 심장은 또 거세어진다. 그의 목소리에서 꺼내진 나를 향한 말은 뭔데 저렇게 다정하게 들리는 걸까. 그러고 보면 그의 시선도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쉴 새 없이 내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지만 그런 그의 손까지 다정해서 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흐느끼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짜증이 났다. 불길한 기분은 여전했다.
형이 너 잘 챙겨주지 못해서 늘 미안해. 근데,
여전히 다정한 말투였다. 더 이상 그가 입을 열지 않았으면 바랐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또한 내가 바라는 대로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형은 언제나 네 편이야."
그것만 기억해줘. 그의 목소리는 올곧았다. 다행히 나는 그를 등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채 다 삼켜지지 않은 눈물이 감은 눈 사이로 무작정 튀어나와도 그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머리 쓰다듬어주면, 잠이 잘 온대. 그래서 어릴 때 엄마가 나한테 자주 그렇게 해줬어.
내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말하는 건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니까 형이 너 잘 때까지 계속 머리 쓰다듬어 줄게.
다만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쓰다듬어지는 머리에 정말로 신기하게 금방 잠이 와서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나와 사람사이에는 그가 있는 것이 아마 답이 아닐까 싶었다.
다음날 나는 사과하는 아이들과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오해해서 미안해. 그 말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제야 그 아이의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와는 아주 다른 이름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나는 예전처럼 실실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게 어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쓸쓸하게도 들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것에서 오는 불안함이나 불길함때문이였음이였다.
다시 이렇게 친구들과의 사이가 돌아오게 된 것이 기쁘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너무 답답해서 나는 또 숨이 막혔다. 왜 이렇게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을까. 그 와중에도 그의 시계는 한 번도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일없이 시간이 잘만 흐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형은 언제나 네 편이야, 그의 말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너무나도 싫어 짜증이 이까지 났던 적 그가 없는 사이 내게 새엄마가 그의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그도 나처럼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다. 그렇다고 새엄마가 우리 엄마처럼 도망을 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키우겠다고 했던 그의 아빠의 이끌려 새엄마와는 떨어진 채 나처럼 아빠와 생활했다고 했다. 나는 그나마 할머니라도 함께 있었지만 그에게는 정말 아빠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그 아빠는 그를 거의 내어놓다시피 키웠다고 했다.
하나있는 가족은 신경도 안 써는데다, 집은 엉망이고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던 그 상황에서 어떻게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커 온 그가 다행이라 새엄마는 덧붙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와 끊어진 연락에 새엄마가 수소문해서 그를 찾았을 때 그는 보호소에 맡겨져 있었다고 했다. 부모가 둘 다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그렇게 있던 그한테는 너무 미안해서 새엄마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는데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였던 것 같다.
새엄마는 나한테도 미안했지만 그를 그대로 둘 수도 없던 상황이라 그 곳에서 그를 데려와 같이 살게 됐던 것이라 했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던가. 아마 괜찮아요, 라고 답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로, 괜찮았다. 여전히 그는 싫었었고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그를 생각하며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으나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새로운 가정을 꾸린 엄마에게 그가 얼마나 방해될지를 생각하며 자책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혼자만 힘들 줄 알았다 생각했던 내가 조금 원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늘 내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는 게, 하지 않는 게 짜증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나 그럴까 그는 불과 며칠 전의 나처럼 흙투성이의 교복을 입고 얼굴에 생채기를 가득 단 채 집으로 왔다. 불길함은 결국 현실로 쫓아와 나를 괴롭혔다. 따뜻해지고 있는 날씨는 더욱 원망스러웠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대신 그가 게이란 소문이 이젠 학교전체까지 퍼져 있었다.
내편이라고 하던 그의 말이 이런 의도였으면 필요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당장이라도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쉽사리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목소리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억울했다.
나는 그처럼 하고 다니다가 사람들이 모이고 그이생각에 누군가를 밀어냈다가 다시 사람들과 멀어지고 이제는 그가 직접 손을 써서는 내게 다시 사람들이 모이게 해줬다. 나와 사람사이에는 그가 있으니 따지고 보면 나와 그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왜 난 이것을 지금 깨달은 것인가.
혼자 허여멀건한 얼굴, 선명하게 남은 파랗고 빨간 상처위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는 꼴에 왜 내가 다 서글퍼지는 것인지.
나만 힘들고 지쳐 있다고 은연중에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는 저보다 그런 이기적은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를 생각해줄 차례라고, 생각은 하지만, 쉽사리 행동은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나와 달리 자연스레 누군가에게 녹아들던 그와, 나의 차이인걸까. 나와 비슷하면서도 더 심한 환경이었던 그에게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짜증이 났다, 정말 그가 싫어서, 싫어하기 싫어서.
점점 내 얼굴위에 상처는 희미해지는 반면 그의 상처는 점점 선명해졌다. 그러고 보면 늘 우리는 반대되고 있었다. 그래야 우리는 맞물릴 수 있다는 것처럼. 한번이라도 우리가 같은 상황을 겪은 적은 우리가 만나기도 전에나 있었을까 싶었다.
이전에 내가 겪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이따금씩 그는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서 들어오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부모님에게 그는 평소와 같이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은 나였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더 짜증이 나는 것은 내가 몰래 부모님께 모든 것을 알려 주려 한다는 것을 그는 또 어떻게 알고 그러지 말라고 야속하게 말하고는 또 나를 향해 샐쭉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화가 이만큼 난 내가 그에게 크게 뭐라 뭐라 소리를 치고 어떻게 그렇게 미련하냐고 화내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뿐 이었고 실제로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소리 죽여 우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그마저도 나 따위가 뭐라고 이런 일로 우는 것인지 자책이 들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그의 뻔뻔한 얼굴에 내가 다 서러웠다.
차라리 그가 어떻게 해서 소문의 주인공을 저로 돌린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방법이나 용기가 없는 것도 바보같았다.
나날이 갈수록 그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역시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순탄하게 잘 돌아가고만 있어서 또 반대되는 이것이 또 그렇게나 서러웠다. 그의 시계도 여전히 순탄하게 열심히 잘만 돌아가고 있어서 그의 생일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날은 벌써 따뜻해져서 필요 없어진 흙투성이의 목도리는 속이 불편했다.
"형, 어디가?"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방에서 그는 짐을 챙기고 있었다. 온통 피멍까지 시퍼렇게 들어있는 왜소한 팔은 그의 것이라도 나와 같이 쓰던 것들은 피해서 옷가지나 물건들을 간소하게 챙겼다.
그런 그에게 형, 이라 내뱉은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그는 잠시 나를 봤다.
"응."
"가면 다신 안와?"
아마 그럴거야. 그는 잠시 생각하다 그렇게 말하고선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가는 것 인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 오지 않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떠나던 그 새벽녘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떠난다면 앞으로 작다고 생각했던 방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질 것을 상상했다. 그러면 이 방이 터무니없이 넓어서 나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그는 여전히 느리고 꼼꼼하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가지 말라는 말은 너무 이기적인데 이기적이니까 그런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그는 정말 그럴 것만 같아서 함부로 내뱉지를 못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 해도 나는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은 더욱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는 분명 그런 말을 하는 나에게 더 미안하다고 할 것이었으니까. 그 말은 정말로 듣기가 싫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결국 그는 멀리 있는 외가 친척쪽으로 가 전학을 하기로 결정지어졌던 것이었다.
바로 며칠 전 한쪽 눈이 크게 부어오른 채 집으로 돌아온 그의 꼴은 아주 엉망이었기에 순식간에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곧 수능이 다가오는 애매한 시기인데도 착한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의 잔학성을 버티기에는 너무도 길게 느껴질 남은 시간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조금만 더 잘못 부딪혔으면 실명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새엄마는 눈물을 터트렸다. 모든 게 내 탓이란 생각에 나는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만약 그대로 내가 그의 상황까지 갔으면 어땠을지 생각을 해봤다.
끔찍했으나 차라리 나였으면 좋았다. 나는 또 울음을 삼켰다. 뭘 잘했다고 내가 울 수 있을까.
떠날 때까진 학교를 잠시 쉬고 있으라는 말에도 그는 안대를 해 한쪽만 보이는 눈을 휘어지도록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동생이랑 한번만이라도 같이 등하교하고 싶어요, 란 별거 아닌 이유였다.
그마저도 막상 우리가 한 것은 나는 앞장서 걷고 그는 꽤 멀리 떨어진 채 날 뒤따라 걷는 같이 간다고 하기도 뭐한 등하교였다. 티 나게 같이 있으면 나까지 또 그런 일을 당할까봐 발을 맞추지 말라고 한 것은 그의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말에 화를 내지 못했다.
대신 나는 확실히 그에게 해주어야만 하는 말을 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고마워.
그 말을 꼭 그가 떠나기 전에 해주어야만했다. 난 그와 함께 그 짧다면 짧고 길다하면 긴 시간동안 그에게 빚진 것이 많아서 그에 갚아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데, 시간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물론 그 말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되진 않을 것이었지만 꼭 하고만 싶었고 나에게는 아주 잘 꺼내지지 않는 어려운 말이었다.
만약 내가 그에게 저 말을 하게 된다면 흘러가듯이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었다. 그리고 분명 아니라고 할 그가 아니라고 하기 전에 나도, 나도 형의 편이라고.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바보 같지만 그가 너무나도 싫은데, 너무나 좋았다. 그의 뒤따라오는 소리까지 다정하게 들려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것을 억지로 삼켜내느라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절대 그가 내 꼴을 안보기만을 바랐다.
가족얘기를 묻는 사람들, 애초에 내 주위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굳이 그 얘기를 꺼내야만 하는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선생님과의 상담시간에 내 신상을 적은 서류를 훑어보던 선생님이 뭔가 이상한 점을 찾고는 묻는다.
여기 엄마가 없다고 적혀 있네. 왜 그런지 선생님이 물어봐도 될까? 평소 듣지도 못했던 선생님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면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숨기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갑자기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안타까운 듯 한 눈빛을 한 그 사람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부러 더 당당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내 사정을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말한다.
너는 참 용감하구나. 그런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때는 약간 선생님에 대한 비웃음이 났던 것도 같다.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내 아픔을 다 안다는 투로 말하는 것이 같잖기도 했다.
그러나 금세 선생님을 향한 나의 적의는 풀어졌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선생님이 분명 악의를 가지고 했던 말이 아니란 것을 알기도 했고 결국 그럴수록 더욱 비참해지는 것은 내 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탓하기만 하는 짓은 하기 싫었다. 애꿎은 사람을 탓해봤자 나아지는 일 따윈 없고 결국 그것이 쓸데없는 감정소모에다가 자괴감만 더 키우는 그것이 그만큼 생산적이지 않다 못해 마이너스인 일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내가 나아지자. 내가 못나서, 내가 엄마아빠를 둘 다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전부 내 탓이니까. 남을 탓하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 자책하는 쪽을 선택했다. 차라리 내 탓을 하는 쪽이 속이 편했다. 뭐든지 누가 잘못을 했던 간에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인정을 하면 모든 일이 쉽게 해결되었으니까.
그런데 나를 자책만해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를 만나고 나서 내 모든 것은 너무 달라져서 혼란스러웠는데 멋대로 가버리려는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것을 나에게 감당시켜놓고 어딜 함부로 가버리려고. 나는 처음으로 남 탓을 해보이고 싶었다. 당당히 나는 잘했다고 목 놓아 울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그가 이런 나를 바꿔놓았고. 거지같은 놈들이 그를 저렇게 만들어놓았다고.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떡하면 좋은지. 니들이 모두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니들이 어서 해결해달라고만 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멋대로 그를 보낸다고 결정한 새엄마나 아빠를 원망했다. 그것을 수락한 그도 모두 모두 너무 싫었다. 그런데도 너무 좋아서 나는, 나는 또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삼킨 울음만 모아도 모두를 빠뜨려 죽일 수만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나는 그가, 형이 너무나, 좋아서. 심장이 거세어져서,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며칠 안 남은 그와의 하교에서 아쉬워하는 그를 먼저 보내고는 서점을 들렀다. 솔직히는 나도 아쉽긴 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같이 하는 것 같지도 않은 거 하루쯤 안하면 어때? 애써 그걸 숨기기 위해 그런 식으로 밖에 말하지 못했던 나를 지금에서야 보자면 정말 재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답지 않게 진짜 오늘만큼은 나랑 가고 싶다고 애원했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급한 일이였으니 어쩔 수가 없다. 당장 내일이 그의 생일이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심각했으나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그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는 늘 부모님이나 내게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지금이야 한번 큰일이 날 뻔하고 그나마 덜 괴롭힘 받는 것인지 상태가 괜찮아 보이긴 했어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고 별 상관은 없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도 괜찮지 않았다.
서점에 들러 책을 골랐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어색한 방안에서 나를 기다리며 그가 읽고 있었던 내 취향이 아닌 가벼운 내용의 소설책. 그것의 후편이 새로 나온 것이 보였다. 더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그것과 베스트셀러로 나온 책을 두어 권 정도 집어 계산에 포장까지 했다.
요새 있던 일 중에선 제일 괜찮은 일이였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붕 뜨는 기분에 책을 들고선 서둘러서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버릇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언제 고장 난 것인지 시곗바늘이 멈춰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발걸음도 서서히 시곗바늘처럼 멈춰갔다.
시계야 고치면 되는 거지. 그러면 되는 건데, 도대체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덮친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나는 이상하게 무거워진 발을 억지로 이끌고선 최대한 빠르게 집까지 향했다. 점점 발걸음은 달음박질로 바뀌어 빈 거리에 내 발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벽을 때리고 다시 내 귓가로 들어오는 그 소리에 마치 나는 쫓기고만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멈춰버린 그의 시곗바늘에 쫓기고 있는 것일까. 숨이 심하게 벅차 올라서 눈앞이 하얘졌다. 마치 그처럼 하얗다.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앞이 하얗기만 한 눈이 시려웠다. 어느새 따가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잘 안 보이는데 흐르는 눈물에 시야는 더 방해를 받았다.
거센 숨이 멈추지 않고 들어갔다 나왔다가 했다. 거친 숨은 속을 따갑게 헤집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전화가 왔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에 계속 휴대폰을 놓을 뻔했지만 어떻게 그것을 들어냈다. 발신자는 새엄마였다. 나는 전화가 끊기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새엄마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더니 곧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울음을 토해내셨다.
그러니까 그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고장 난 시계를 바라봤다. 고친다고해서 멈춘 시간은 돌아갈리 없었다. 나의 고맙다는 말은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
이건 명백히 내 탓이었다. 내가 오늘 그와 함께 가지 않아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지 나를 잡던 그를 그대로 보내 버려서. 이깟 책 따위가 나에게서 그에게 모든 것을 갚아야 할 기회들을 앗아갔다.
게다가 고작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그딴 재수 없는 말이었다는 게, 결국 나는 울음을 삼켜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내 탓을 한다 해도 남 탓을 한다 해도 어떻게 해결 될 수가 없는 일이였다. 이것만큼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새엄마의 측은한 표정보다 더 꽈악 내 목을 졸랐다.
우리 형이라고,
그를 욕하는 녀석들에게 고함을 지른다.
가지마,
가려는 채비를 하는 그에게 말한다.
나도 늘 형편이야,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그래, 그렇게까지 하는데 같이 가야지,
나와 그는 같이 하교한다. 그는 갑자기 돌진하는 트럭에 치일 일 따윈 없었고 안전하게 집으로 도착한다.
그리고, 고마워… 그는 책을 받아들곤 웃는다. 늘 하던 것처럼, 하얀 얼굴이 웃어준다면 내 심장은 거세어진다. 기분이 나빠서. 그가 싫어서. 내가 싫어서. 그래도 그의 멈춰버린 시간이 돌아 올리는 없다. 나는 다시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그럼 다시 안와? 응 안와.
정말로 괜찮았을 리는 없었다.
송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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