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by 바르셀로나 posted Apr 10,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심판



 누군가 그에게 왜 이른 나이에 은퇴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스물여덟이면 다 해먹었을 나이 아니냐고 넉살좋게 반문했다.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는 좋은 신붓감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있으니 결혼설에 대한 질문은 삼가 달라고 했다. 차를 탄 그는 평소보다 두 배의 시간을 할애하여 기자들을 겨우 따돌렸다. 그가 초인종을 눌렀다. 매미소리만 간간히 날 뿐,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마당 앞을 지키고 있는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아 그대로 열렸다. 노인네가 겁 없는 건 여전해, 라고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비밀번호를 누른 후 현관문을 열었다. 눈앞에 빨갛고 작은 구슬로 꿰어진 장식 줄들이 흔들거렸다.


 그의 외할머니는 집에 없었다. 소파에 뜨개질을 하다 만 흔적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뜨개질로 장갑이나 목도리를 만들어 신부님이나 세례를 받은 아이에게 선물하곤 했다. 집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수화기를 들었다. 그의 외삼촌이었다. 네가 왜 거기 있니? 라는 외삼촌의 퉁명스런 물음에 그는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요? 라고 반문했다. 외삼촌은 집에 그 혼자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는 마당으로 나갔다. 풀잎 위에 잠자리가 앉았다. 그는 잠자리의 날개를 재빨리 잡았다. 그리고 잠자리의 꼬리를 라이터의 불에 갖다 댔다. 그는 부르르 떠는 잠자리를 잠자코 보았다.


 다음 날 그는 다시 외할머니의 집을 방문했다. 자신을 뒷바라지했던 외할머니에게 돈 봉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집안에 들어갔을 때 외할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는 외할머니의 장례식 수속 절차를 밟았다. 변호사는 그와 그의 외척에게 할머니가 어제 저녁에 유언장의 내용을 조금 고쳤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유언장의 내용을 모두에게 전달했다. 외할머니는 그에게 조금도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외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변호사는 그에게만 종이 상자를 건넸다. 외삼촌이 그에게 종이 상자를 이 자리에서 열어 보라고 했다. 그는 거절했다. 외삼촌이 우리는 상자 안에 든 내용물을 볼 권한이 있다고 소리쳤다.


“한때 저를 독살하려고 하셨던 분들에게 무슨 권한이 있다는 거죠?”

“말조심해라! 그때의 상황을 파악하기엔 넌 너무 어렸다.”

“그럼 말씀해 보세요. 아무 문제없던 개가 제 밥그릇을 가로채자마자 눈을 뒤집어 까며 죽어버린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할머니의 유산이 제 독차지가 될까봐 겁나셨나 봐요?”

 그의 대꾸에 외삼촌은 변호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외가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핏줄을 운운하며 모욕적인 말을 했다.

“전 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를 모욕하는 건 할머니를 욕보이는 거라는 걸 명심하세요.”

“우리 어머니는 미련했지. 나는 어머니에겐 동정심밖에 느끼지 않는다. 고작 너에 대한 가여움 때문에 스스로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셨던 거야!”

“생판 남인 저를 거둔 게 할머니께 그리 가혹한 벌이었던 건가요?”


 외삼촌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상자를 흘끔거렸다. 나머지 외척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가 들고 있는 상자에 쏠려 있었다. 여태껏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변호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에게 혹시 자신이 필요할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귓속말했다. 그의 외삼촌은 그와 변호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변호사의 심중을 떠보려 들었다. 변호사는 외삼촌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에게 명함을 남긴 변호사는 자리를 떴다.


 장례식장에서 외가 사람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지인 몇몇이 얼굴이 알려진 그를 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에 대해 소개하기를 쉬쉬했다. 저녁대가 되자 사람들의 방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밖으로 나갔다. 악수를 나누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는 난간에 기대어 허공을 응시했다.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얼굴은 앳돼 보였으나 키가 꽤나 큰 여자였다. 그녀는 스무 살을 앞둔 그의 외사촌임을 밝혔다. 그는 그녀가 갓난아기일 때 잠깐 본 기억이 났다. 그녀는 경기를 빠짐없이 봤다는 말을 전하며 그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단 한 번도 외가로 찾아온 적이 없을 만큼 바빴느냐고 핀잔했다.


“아무도 안 믿는 거야! 하긴 내 친척이라는 증거가 단 하나도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오빠가 한 번이라도 우리 집에 오게 해 달라고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지 알아?”

 그가 가볍게 웃었다. 갑자기 그녀가 난간 위에 발을 올렸다. 검은 치마가 말려 올라가며 그녀의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왜 이리 멍한 표정이야? 그나저나 이제 오빠 은퇴했으니까 이번 명절엔 꼭 나보러 와.”

“못 가.”

“오빠가 우리 가문의 구멍이래. 그러게 여자 좀 적당히 만나지 그랬어.”

“스캔들 때문이 아니야.”


 그녀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그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함께 사진이나 찍자고 했다. 몇 번 사진을 찍고 나서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빠가 좀 깐깐하지? 나도 죽겠어. 이번에 입시 실패하면 외국으로 보내 버린대.”

“할머니 아들이잖아. 똑같네.”

“할머니도 오빠를 꽤 닦달했구나?”

“선수로 데뷔하지 못했다면 분명 난 집에서 쫓겨났을 거야. 내가 머리 나쁜 걸 진즉에 깨닫고 운동 쪽으로 강력히 밀어붙이셨지.”

“나도 할머니를 알았다면 좋았으련만. 대체 무슨 이유로 할머니랑 오빤 우리와 멀리 지냈던 거야?”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봐. 네 가족은.”

“그럴 리가.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할머니를 본적이 없으니 눈물도 안 나! 생판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온 거 같다니까.”

“나도 그래.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야. 오빠는 당연히 눈물 흘려야 하는 거 아니야?”

“난 할머니의 손자가 아니야.”


 그때 그의 외삼촌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다가 빠르게 표정 관리를 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외삼촌을 향해 걸어갔다. 외삼촌은 그를 훑어본 뒤 그녀를 데리고 뒤돌아섰다. 여차저차 장례식을 마무리 지은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 누워만 있었다. 그는 왠지 외할머니가 남긴 상자를 열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이 형사임을 밝혔다. 형사는 서은주를 아느냐고 물었다. 상체를 일으킨 그가 수화기를 부여잡고 용건을 물었다. 형사는 서은주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그에게 조사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는 형사의 말에 그는 수긍했다. 형사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는 밧줄에 상체가 묶인 서은주가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다. 경기에서 승리하고 언론이 자신의 활약을 주목할 땐 더더욱 그랬다. 그에게 서은주는 외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가족과 친지가 아예 없더군요. 기껏해야 잠깐 함께 일한 동료정도밖에. 당신의 존재를 알기 전까진 서은주 씨에게 원한이 있을 만한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각별한 사이었더군요. 방에서 당신의 편지들을 발견했거든요.”

“저 또한 서은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전 지금까지 오년 간 그 여자가 어디에 사는지 몰랐으니까요.”

“갑자기 왜 연락이 끊겼습니까?”

“저야 모르죠. 퇴원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당신이 입원하고 있는 중에 그녀가 떠났다는 말입니까?”

“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서은주가 베란다에서 절 밀었거든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보세요.”

“서은주는 베란다 난간에 걸터앉는 습관이 있었어요. 저도 자연스레 버릇 들여 버렸죠. 제가 난간에 걸터앉았을 때 거실에 있던 서은주가 제게 왔어요. 그리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절 밀었죠.”

“서은주 씨가 당신을 밀기 전 뭐라던가요?”

“자긴 평생 독신으로 살고 싶다고 했어요. 그것도 조용히. 전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했죠. 그랬더니 대뜸 자길 떠나라 하더군요. 제가 싫다고 하자 사고가 벌어졌어요. 이게 다에요.”

“거긴 몇 층이었습니까? 정확히 당신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었나요.”

“2층이요. 별로 무섭지 않은 높이여서 집 안쪽이 아닌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서은주와 대화할 땐 고개만 돌렸고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그 당시 선수였고 지금보다 체중이 좀 더 나갔을 텐데, 서은주 씨의 힘으로 그리 간단하게 떨어질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전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어요. 당신에겐 제가 마치 일부러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나봅니다.”

“그저 질문한 겁니다. 그런데 난간에 앉은 이유가 단순히 버릇 때문입니까?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너무 부주의했던 건 아닌가요.”

“전 난관에 걸터앉는 걸 좋아했었어요. 더구나 중요한 시합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약간의 스릴이 더없이 필요했죠. 자꾸 황당한 의심을 하시네요, 형사 양반.”

“그렇다면 당신이 서은주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다는 의심은 어떤가요. 제법 타당하지 않습니까?”


 그는 경찰서를 나왔다. 그리고 기지개를 피며 형사의 말을 곰곰이 따져 보았다. 서은주는 뺑소니를 당했다. 형사는 사고 당시 서은주가 바로 병원에 갔더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범인은 목을 졸라 서은주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서은주의 머리를 둔기로 여러 번 내리쳤다. 형사는 서은주의 얼굴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경찰서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의 정면엔 수많은 자동차가 즐비했다. 문득 그는 차 안의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해가 뜬지 오래였으므로 어두운 차 안에 누군가의 눈동자를 발견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두 눈을 찡그리며 차 안을 확인했다. 암흑의 물체가 움직이는 것도 같았으나 이내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저 멀리 교복을 입은 그의 외사촌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그녀 옆에 앉았다. 자신의 번호를 어찌 알았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녀가 그를 껴안았다.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그는 그녀가 왜 이러는지 짐작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필시 할머니와 비슷한 방식으로 외삼촌은 그녀를 압박했으리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녀가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놀러가고 싶다며 그를 졸랐다.


 외삼촌이 그의 뺨을 때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외삼촌은 신문을 그의 발 앞에 내던졌다. 신문 맨 앞장엔 그와 그녀가 껴안는 사진과 그의 집으로 함께 들어가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는 무덤덤하게 외삼촌을 응시했다. 빠른 시간 내에 그녀가 △△그룹의 셋째 딸임이 밝혀졌다. 최근에 불거졌던 결혼설과 더불어 △△그룹이 그의 스폰서였다는 의혹이 번져갔다. 그리고 △△그룹의 상무가 자신의 첫째 딸과 그의 만남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그가 셋째 딸과 눈이 맞아버렸다는 추측 등이 난무했다. 그녀와 그가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될 것이었으나 외삼촌은 이를 꺼려했다. 그는 이 사실이 반드시 밝혀질 것이며 먼저 자기 쪽이 말하지 않는 한, 언론이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라며 빈정댔다. 외삼촌은 가만히 있으면 조용해질 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과 다신 사적으로 만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기자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기자에게 △△그룹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다만 △△그룹의 셋째 딸에 관해선 그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으나 그녀가 고교를 하루빨리 졸업하기만을 고대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의 언급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가 파렴치하다는 말부터 낭만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룹의 주식은 번창했으며 셋째 딸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장례식장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입증되어 수사 대상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뺑소니 사건과 관련해 그가 셋째 딸과 결혼하기 위해 서은주와의 과거를 은폐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을 시켜 과거의 연인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이를 뺑소니로 위장했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 그와 서은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한 명 때문에 그가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롱 댓글이 수백 건에 달했다. 그는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룹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언론의 초점을 흐리게 할 작정으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조장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엄포했다.


 그의 외삼촌은 비밀리에 정보 입수에 능한 사람 여럿을 불렀다. △△그룹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할 만한 허점을 찾아내라는 것이 외삼촌의 요구였다. 이에 그의 메일함을 해킹한 사람은 개인 소유의 목적으로 그와 서은주가 함께 있는 걸 녹화한 영상을 손에 넣었다. 그들이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기도 하며 집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던 일상의 장면이 영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 그들은 서로 애무하는 도중에 임신 문제로 약간의 실랑이를 벌였다. 해커는 서은주가 피임을 요구했음에도 그가 이를 무시하고 관계를 다소 무리하게 가지려는 것으로,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도록 영상을 재편집했다.


 그의 외사촌이 현관문 밖에 서 있었다. 표정은 밝았으나 그녀의 코끝은 빨개 있었다. 외삼촌이 흥분할 때 의외로 침이 많이 튀기는 거 알고 있지? 하며 그가 그녀에게 농담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조금만 있다가 가도록 해. 치가 다 떨린다, 고 그가 말했다. 그녀의 주도 하에 그들은 영어 철자 맞추기 게임을 했다. 그는 단 한 문제도 맞추지 못했다. 그녀가 혼자 승승장구하자 그는 오디오에 축구 게임 시디를 넣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광경인지 어리둥절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는 차츰 키 조작에 익숙해졌고 시간가는 줄 모른 채 게임을 즐겼다. 여러 판을 한 끝에 그녀가 주머니에서 박하사탕을 꺼내 입에 넣고는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그리고 박하사탕을 하나 더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박하사탕을 건네받았으나 손에만 쥐고 있었다.


“서은주라는 여자가 무용하는 거 봤어?”

 그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볼일 없었지? 잘했다면 애 때문에 무용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월등하진 않았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무용수였어.”

“그런데 왜 애를 선택했는데도 오빠를 떠났을까. 오빠한테 같이 살자고 하거나 낙태를 하거나 둘 중 하나 아냐?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나라면 안 그래.”

“너라면 어떡할 건데.”

“오빠한테 결혼하자고 했겠지.”

“하하. 다 헛소문이야. 믿지 마.”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사탕을 오물거렸다. 그리곤 그의 손에 있는 박하사탕을 빼앗아 자신의 입 속에 넣었다. 그녀의 양 볼엔 붉은 기가 있었다. 게임에 너무 열중했나봐. 열 나, 라고 중얼거린 그녀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그녀에게 입맞춤했다. 그녀는 머뭇거렸으나 저항하진 않았다. 어색한 서로의 몸짓은 점점 대담해져갔다. 서늘한 바람이 더운 열기를 식힐 즈음에 그는 그녀의 곁에서 물러섰다.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와이셔츠의 단추를 잠갔다. 베란다로 간 그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녀가 신음하며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묻은 소량의 혈흔을 발견했다.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간 후 조금 있다가 초인종이 울렸다. 그가 현관문을 열자 외삼촌이 들이닥쳤고 경찰 두 명이 그를 응시했다. 경찰들이 그를 연행하려 했다. 화장실 문 앞에서 그녀가 소리쳤다.


“가족을 신고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아버지!”

 경찰들은 언짢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머리가 약간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와이셔츠가 주름져 있었다. 외삼촌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짐승만도 못한 네 애비처럼 너도 척하면 착이지. 이젠 하다못해 동생에게 집적거려? 네가 감히! 너를 벌할 수만 있다면 내 모든지 하고 말겠다.”

“동생이라뇨. 저 애와 전 남남 아닌가요?”

“뭐라고? 그래서 저 앨 꼬드겼단 말이냐?”

“마음이 동한다면 그럴 수도 있죠. 무슨 문제가 있나 싶네.”

그의 외삼촌은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저와 정말로 가족이 될 수도 있겠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저 앤 네 외사촌이야. 정말 크나큰 죄악이라도 저지를 생각 인거냐?”

“저를 평생 외가로부터 배척하려던 분이시잖아요. 이제 와서 사촌이네 뭐네 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의 멱살에서 손을 뗀 외삼촌이 멍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옷깃을 세웠다. 외삼촌은 그녀에게 자신의 차 안에 가 있으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간 후 외삼촌은 그를 베란다로 불렀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외삼촌이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기어코 네게 알려주지 않았나 보군. 너는 어머니의 막내딸, 그러니까 내 동생에게서 태어났다. 네 할머니의 친손자임은 틀림없단 말이다. 다만 네 어미가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몸으로 널 낳았을 뿐이지.”

“제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가문에게서 거액을 뜯어낸 뒤에 노름판에 뛰어들었고 취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제 어머니는….”

“내 동생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다. 에, 그러니까 네 애비가 내 동생을 일 년 가까이 감금하고 이를 온갖 협박거리로 일삼았지. 일 년이라니! 우리는 체면도 있고 해서 그 지독한 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네 어미는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자살했다.”

 외삼촌의 말에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외삼촌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왜 그런 오해를 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늘 제게 냉담했죠. 독살로 죽었어야 했던 저 때문에 외가와 연도 끊고 어쩌다 제 부모에 대해 물으면 화부터 내거나 묵묵부답…. 그래서 주워온 자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머리론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할머니의 핏줄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보 같은 생각을 했구나. 어찌 됐던 우리는 여러 모로 네 얼굴을 보기가 껄끄럽다. 너에게 죄가 있건 없건 간에 말이다. 네가 우리 가문의 일원이라는 걸 세상에 알려서 좋을 게 하나 없다. 되도록 우리 가문을 위해 행동을 조심하도록 해라.”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지 않을까요?”

“그건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나머지 기자들은 알아서 처리하겠다. 너만 입을 열지 않으면 문제없을 거다.”

“제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정말 맞는 건가요.”

“부탁이다. 어머닌 왜 널 축구 선수로 키웠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행실이 이 모양인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흠, 은퇴도 했으니 앞으론 조용히 살아갔으면 한다.”


 이튿날, 서서히 파급돼 왔던 그와 서은주의 영상이 결국 언론과 대중에게 대대적으로 퍼졌다. 이에 그는 형사로부터 다시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뒤늦게 영상을 접한 그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허위 소문과 짜깁기 영상에 대한 사람들의 입방아를 잠재우기 위해 필요한 진실만을 밝혔다. 그에게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그중 한 기자의 질문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기자는 그에게 숨겨둔 아들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어디에 소재해 있는지 꽤 상세한 정보를 열거했다. 그가 흥분을 억누른 목소리로 자신에겐 숨겨둔 아들 따윈 없다고 답했다. 기자는 그의 아들이 소재했다는 곳에 직접 갔다며 끈질기게 그를 추궁했다. 그리고 남자 아이가 찍혀 있는 사진 한 장을 들어 보이며 정말 모르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다른 기자들은 처음 접한 정보였다. 남자 아이가 찍힌 사진에 플래시가 연신 터지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크게 웃었다.


“어느 집 아들 사진을 도용하셨나요, 기자님? 설마 당신 아들은 아니겠죠?”

“실례를 무릎 쓰고 선수촌에 있는 당신의 사물함을 뒤졌습니다. 다행히 칫솔이 있어서 편법으로 유전자 감식을 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98%라고 씌어있지 않습니까?”

“기자님과 아들 분의 유전자 감식 결과를 보여주고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기자 회견이 끝나기도 잠시, 그는 곧바로 경찰서에 가야만 했다. 그리고 세 시간 째 조사를 받았다.

“서은주가 임신을 원하진 않았었지만 제가 일방적으로 관계하려 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몰래 피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임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한테 말했겠죠. 전 모르는 일입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당신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 있고 강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서은주 씨의 입장에서 후자 쪽에 무게를 더 싣고 있는 셈이죠. 만약 당신이 미래가 창창한 무용수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했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에게 종이 상자와 명함을 건넨 변호사가 떠올랐다. 그는 변호사를 불렀다. 변호사는 서은주를 살해했다는 증거 불충분으로 그가 풀려날 것을 확신했다. 한숨을 쉰 그는 변호사에게 자신의 자식이 있다고 한 기자의 말이 신경 쓰인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자식이 소재하고 있다는 곳에 찾아가 진상을 파악해줄 것을 변호사에게 부탁했다.


 외삼촌이 그녀를 추궁했다. 그녀는 그의 집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얼버무렸다. 그녀의 대변에도 외삼촌은 거북함이 가시지 않았다. 더구나 회사 내에서도 마뜩잖은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외삼촌은 그의 요구로 서은주를 대신 살해했다고 거짓 자백할 사람을 몰래 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취기로 인해 비틀거리다가 소파에 쓰러졌다. 소파 맞은편에 덩그러니 놓인 상자가 그의 눈에 띄었다.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고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가 무작정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잔뜩 짐을 싸온 채 안절부절못했다.

“나랑 떠나자.”

 그녀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윽고 코웃음을 친 그가 그녀를 집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어차피 우리 남남이라며!”

“뭐?”

“오빠가 그때 아빠한테 그랬잖아. 호주에 아빠 별장이 있어. 일단 그곳으로 가자, 응?”

“집으로 돌아가.”

“나 임신했단 말이야!”

  그가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녀는 엄지손톱을 물어뜯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빠가 결국 알아버렸어. 오빠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어.”

“외삼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사람 부른 걸 엿봤어! 오빠를 감옥살이하도록 만들 게 분명해. 아빠 성격 알잖아.”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배를 쓸었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그녀의 말에 갑자기 그가 정신없이 달려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붉은 목도리가 담겨 있었다. 목도리는 미처 다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목도리 위에 ‘요셉’이라고 적힌 쪽지 하나가 있었다. 그는 한참을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난 늘 네 아빠를 가해자라고 여겼어.”

“왜?”

“내가 죽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언젠가 기필코 나를 죽일 거라는 공포에 떨면서 살았거든.”

“오빠한테 피해 준 사람은 모두 가해자인 거야?”

“응.”

“그럼 난 피해자고 오빠는 가해자인 건가.”

“그럴지도.”

“그런 게 어디 있어.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 똑같아.”

“똑같다니. 그건 불공평한 말이야.”

“아니. 우리 둘 다 피해자고 가해자이기도 해. 그래도 그땐 서로 동의하고 잔거잖아. 오빤 아니었어?”

 그가 변호사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는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가 고아원에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전했다. 그리고 고아원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그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도 따라 나섰다.

그는 남자아이를 마주했다. 기자가 보여주었던 사진 속 아이였다. 아이의 눈동자는 뚜렷하고 새까맸다. 그는 아이의 목에 붉은 목도리를 감아주었다. 그녀가 아이를 보더니 네가 요셉이구나, 했다. 그는 아이의 세례명을 요셉으로 지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는 아이와 곧잘 어울렸다. 가을바람이 제법 쌀쌀해졌다. 그는 그녀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맞잡은 그들을 뒤따라갔다.



김수현

sshh93@naver.com

010-3340-2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