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소동

by 충전중 posted Apr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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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소동

 귤빛 같은 하늘이 저 위로 펼쳐졌다. 물려받은 것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반짝이는 눈으로 격하게 반응하는 하늘을 바라봤다. 코로 가져간 손등에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표면장력으로 맺혀 떨어졌다. 이런 유형의 마음에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서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출근할 때 흰 눈도 살짝 날리던 아침이었는데 그 담벼락으로 떨어지던 하얀 눈이었는데 어쩐지 그런 상충하는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니 코끝이 시큰해왔다.


“첫날, 첫 시간 보러가요.”

그는 내게 약속을 받아냈었다.


 #1                                        <초대형 로봇 자살 후 생기는 소동>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답게 노을 지는 모습을 두고도 소란스러웠다. 나는 의뭉스런 눈빛으로 아파트 주민들을 바라봤다.


“옆집 로봇이 자살했대요.”

“왜요?”

“인공지능을 가지니까 고뇌를 한 거죠.”


아줌마는 안타까운 듯 혀를 차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걸어가고 있었다. 가방을 뒤적이며 꺼낸 열쇠로 아파트 현관을 열었다. 큐빅 주렁주렁 달린 키홀더를 신장위에 올려놓고 오다가 사온 큰 비닐봉지도 신발장위에 올려놓은 채로 부츠의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사들고 온 비닐봉지를 식탁에 가져갈 힘이 소진되었다는 듯 소파에 놓아둔 채로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가 방으로 가 코트를 벗어 장롱에 걸었다. 옆집 로봇이 고뇌를 한 건데 로봇이 수명이 다 되었다는데 마치 내가 혹시나 독감이 걸린 걸까 걱정 되 벌떡 일어나서는 주방에서 손을 한참동안이나 씻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한 컵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있다.

나는 리모컨을 들고 눌렀다. 때마침 뉴스를 하고 있었다. 자막에는 로봇 어쩌고저쩌고 라고 뜨더니 어떤 여자 기자가 리포팅을 하고 있었다.


<뉴스>

<로봇이 생활고로 목 메달아 있는 걸 보고 옆집에서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소정 기자입니다.>

<이번에는 로봇의 투신자살 소식까지 있는데요. 연결해보겠습니다. 하승후 기자!>


<인터뷰>

“네...쓸어 담았어요. 경비원이니까요”

<로봇의 투신자살을 두고 장례식을 치러야할지 고심하던 경비원은 빗자루를 가지고 나와 쓸어 담았다고 합니다.>


<로봇에게 인권을 부여하자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는데요. 게다가 로봇들의 시위가 연일 있는 가운데 국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국회에서도 반응을 안 할 수가 없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로봇에게 인권을 줘야한다는 입법이 계류 중입니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도 고민이 많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처음으로 로봇 국회의원 공천권을 두고 치열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만당의 한 4선의원은 말도 안 된다고 완강히 부인 하지만 당내에서조차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며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반면 국민투표의 비용을 생각하면 로봇 국회의원 공천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많다고 합니다. 비례대표로 할지 직접 로봇에게 공천권을 줘야할지를 두고 고심 중으로 전해졌습니다.“

<로봇의 증가를 두고 정부가 고심 중인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번에는 청와대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지환기자!>

<청와대가 국무회의를 소집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선 국무회의를 통해 협상테이블을 열어놓겠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협상이 이뤄지면 특별법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박지환 기자! 그렇다면 협상전망은 어떻게 예측되어집니까?>

<우선 로봇 측 대표는 협상테이블이 만들어지는 것을 환영하는 입장으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 측은 대표로 누구를 어떻게 구성할것인지 아직 정해놓지 않아 공식 논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반 국민들 역시 양쪽이 팽팽할 것으로 예상돼 추이를 지켜보자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갤럽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60퍼센트 이상으로 반대의견이 아직 강한데요. 하지만 이 여론조사에는 로봇의 여론이 전혀 반영되지 않아 여론조사를 놓고 왈가왈부가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시민들 반응을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저는 찬성 하는데요. 이제 로봇은 우리와 너무 밀접한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도 공천권을 주어야죠.”

“저는 반대하는데요. 나날이 증가하는 로봇에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수족관에서 물고기가 부딪치는 사고로 잠시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는 사례도 있었잖아요. 길에서 로봇을 보면 사실 좀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어요. 이런데 로봇이 원내에까지 들어가면 나아가 대선에 까지 나온다면 혼란만 가중될 것 같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로봇협상 시안을 앞두고 기대하는 목소리와 우려하는 목소리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렇듯 정부의 고심 또한 커질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www뉴스 박지환이었습니다 >

<네 박지환기자 수고 많았습니다.>


난리인가 싶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이슈라도 된 듯 각종 방송사들이 앞 다퉈 소식을 차례대로 전하고 있었다.


<초대형 로봇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습니다. 20XX 에 롱롱사에서 탄생한 로봇으로 지난 반세기동안 로봇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특히 로봇 원내 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도 많아 쉽지 않을 전망으로 보여 집니다. 추이를 지켜보던 가운데 사건이 발생하여 매우 안타까운데요. 로봇증가가 인구 증가를 앞설 것으로 나타나 이를 대처하는 입법이 시급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초대형 로봇의 자살로 충격여파가 대단한데요. 이참에 로봇 원내 진입을 반대하는 의견과 이제는 허용해야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로보샤가 경찰 경감으로 내정돼 영화 로보캅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 유력 일간지의 주장에 따르면 이번 내정에 청와대의 입김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인데요. 이런 추측이 조심스레 나오는 것이 친로봇으로 알려진 청와대 비서실장의 영향일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로보샤는 어떤 로봇인가요?>

<네, 경감으로 내정될 로보샤 내정자는 20**에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으로 원칙주의 로봇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로봇 같다는 비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국민들의 반발이 다소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인 로보샤의 프로필을 알 수 있을까요?>


기자는 판넬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네. 로봇 로보샤의 프로필을 보도록 하죠. 알려진 대로 로보샤는 20**에 ‘잉텔로’사에서 만들어진 로봇으로 로봇학교를 코스대로 거친 엘리트로 알려져 있는데요 행정학 및 경찰학 인공지능 센서를 부착했습니다.>


<한편 이번 미국 국방부 차관에 로봇이 내정되어 UN국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도 전해주시죠>

<네. 미국 국방부 차관에 로봇이 내정되었는데요. 터미네이터 형이다 범블비 형이다 의견도 분분한데요. 아직 로봇의 모습은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외관상 사람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번 미국이 국방부 차관에 로봇을 내정함으로써 로봇의 입지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발 나아가 충분한 논의 없이 군사에까지 개입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UN국들이 반발을 하고 있군요?>

<네. 그렇습니다. UN국들의 반발은 쉽사리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아직 로봇의 프로필이 공개되지 않은 이상 미국 또한 이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을 텐데요. 고심이 깊어지는 만큼 조만간 공식 브리핑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최기자!!>



빰빰빰빰빰빰빰빰빰

<스포츠 뉴스입니다. 먼저 오늘 화제가 되었던 야구 소식입니다. 지난 시즌 우승을 하고도 포스트 시즌에 연속 두 경기를 어이없이 역전패 하며 시리즈 트로피를 고스라니 헌납하며 내어주었던 kk, 선수 드래프트 소식입니다.>


<기록을 살펴보던 프런트는 오늘 전격적으로 로봇선수를 영입한다는 발표를 내놓았습니다. 팬들은 환영하고 있는 가운데 선수 측에서는 거센 반발이 예상됩니다. 연봉 협상에서 우위를 점유한 ‘로팔’로봇의 영입이 가시화 되고 있는 가운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는 전언입니다. 지난 스프링캠프에 참가하고도 주전으로 뛰지 못했던 ‘로팔’로봇은 프런트가 선수단 몰래 2:1 트레이드를 감행하므로 전격 성사가 되었는데요 이르면 다음 달부터 타격 연습에 들어간다는 구단 측의 설명입니다. 이로써 내년에는 로봇 선수를 타석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와 우려가 연이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소식이 오늘 알려지자 각 구단 측은 로봇 선수영입에 열을 올리며 선수 찾기 레이스에 적극적으로 돌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지난번 시즌 중반까지 2위권에 머물며 우승을 노리던 do 와 지난 시즌 줄곧 하위권에 머물던 gg는 로봇선수 영입으로 중위권으로 뛰어 오르겠다는 계획입니다. >


“어휴~~세상이 어찌될라고. 로봇은 무슨 얼어 죽을 췟”

나는 리모컨 전원을 꾹 누르며 주방으로 갔다. 그때였다. 띵~~띵~~~띠리링~~~하며 청량하게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옆집에 사는 빙고라지요?”

“비 아이 엔 지요?”

“네 맞습니다.”

“근데 왜요?”

“피자를 만들었는데 같이 먹어요.”

문열어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먹는 것에 약한지라 피자라는 소리에 그제 서야 현관을 열어주었다.

“잠시 만요”

정말이지 어떤 잘생긴 남자가 떡하니 피자를 들고 서있었다. 뭐 가끔 보는 사이이니 인사는 생략해도 되겠다 싶어 그냥 서있었다. 그랬더니 그는 조금은 민망한 듯 랩 잘 씌워진 피자 접시를 코끝까지 들어 보였다. 어쩌지? 들어오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나는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그를 여전히 바라보고만 서있었다. 그리고는 피자를 보며 말했다. 전적으로 피자가 먹고 싶어서였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주방으로 시장바구니를 가져갈 힘도 없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들어오세요.”

“네”


그는 그제 서야 현관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피자접시를 건네받았고, 그는 신을 벗어 거실로 들어왔다. 평소에는 지나치며 몰랐는데 뭐 좀 잘 생겼네 어쩌네 그런 생각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지만 거실에서 보는 그의 눈빛은 너무 진지하며 따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솔직히 피자에 관심이 있었다. 밥하기 정말 너무 귀찮은 날이었는데 피자를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여기 앉으세요. 접시랑 포크랑 컵 들고 올게요.”

그를 거실에 우두커니 세워두고 주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사실 식탁에서 나란히 먹는 것도 괜찮겠지만 너무 앞서가는 것이다. 식탁은 그런 곳이다.

거실에 한상 가득 펴놓고 우리는 피자는 먹었다. 각자의 접시에 놓고 포크로 찍어먹자는 것인데 그는 처음 피자를 한 조각을 뜯어 내 손에 직접 들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아직 따뜻했다. 많이 먹으라고 했다. 나는 왠지 가슴이 떨렸다. 그래도 피자를 접시에 놓고 포크로 끝자락부터 조금씩 잘라 먹었다. 쉬림프도 들어간 피자다. 그는 요리를 잘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먹고 있는데 한참 먹고 있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속눈썹이 예쁘세요.”

“네?”

나는 순간 콧등에 땀을 닦으며 풉 하는 콧바람과 함께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뭘 그렇게 놀라요? 속눈썹이 예뻐서 예쁘다고 말했는데..”

“네”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은지 피식 웃으며 그를 한번 바라보며 남은 피자를 포크로 콕 찍어 한 번에 입안에 넣었다.

“그런데 저 고백할 게 있어요. 사실은....”

치즈를 쭉 늘여 뜨려 접시에 담았다. 포크로 잘라서 다시 입안에 넣었다. 나는 입안에 들어있는 피자를 천천히 씹으며 그를 바라봤다. 입안에 가득 들어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오물오물 거리며 있는데 그는 아무 말이 없다. 조금은 떨려오고 있었다. 고백 한다라...고백..? 무슨 고백? 내가 생각하는 아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자가 여자한테 하는 그 고백은 아니겠지? 그런데 이 남자 고백한다고 하고서는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지? 나는 계속 피자를 씹다가 꿀꺽하고 삼켰다.

“저.....”

“네 말씀하세요.”

나는 애써 침착하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사실은....로봇이에요.”

“뭐라구요????????”

나는 소름이 끼쳐 소리를 쳤다. 뭐.....라.....구....요.....? 얼마나 소리를 크게 질렀는지...나도 깜짝 놀랐다. 피자를 먹다가 물을 찾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2

“엄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는 땀이 흥건하게 젖은 채 눈을 살며시 떴다. 앞에는 놀라 소파 앞으로 달려온 유빈이 눈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꿈꿨나봐.”

“무슨 꿈?”

“아냐...아무 꿈도. 그러니까 게임 좀 그만해. 네가 게임을 하니까 내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 꿈에까지 나왔나봐.”

“뭐가? 네오에얼리가?”

“아냐.”

확실히 감기가 심하게 걸린 게 맞았다. 독감 주사를 맞았어야 했는데 하는 마음이 그제 서야 들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 번 코감기 알약이 어딘가 서랍에 남아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이리저리 찾기 시작했다. 역시나 알약이 몇 알 남아있었다. 항생제로 보이는 약도 집어 들었다. 나는 금방 화색이 돌아 알약을 가지고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약 몇 알과 함께 삼키는 물이 왜 이렇게 꿀맛인지. 너무 꿀꺽꿀꺽 삼켰나 싶을 만큼 차갑기는 했지만 달고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이른 저녁을 유빈이와 빵과 우유로 때우기로 하고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은 가까운 곳에 산책을 갔다. 그때였다. 저기 보이는 것은 그였다. 꿈에까지 나온 그다. 이것도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었다. 꿈에 나와서 반가운지 정말 반가운지는 잘 몰랐지만 그런 곳에서 그를 보니 무척 반갑기는 했다. 마치 엄청 친한 누군가를 만난 기분마저 들었다.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왜냐면 꿈에 나왔기 때문이다. 꿈에서 본 그는 마치 친한 친구처럼 대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감기에 걸린 걸 한 눈에 알아보겠는지 그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네...안녕하세요...”

그는 밝고 따뜻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코맹맹이 소리가 매력적이시네요.”

“감기 걸렸어요. 벌써 며칠짼데 아직 이러고 있어요....”

“매력적이지만 빨리 나으셔야겠네요. 감기약은 드셨어요?”

“아뇨...”

잦아드는 바람에도 햇살은 눈부셨다. 겨울이 지나가는데 아직 봄은 더 있어야 될 것 같은 찬바람이 불었다. 어딘가로 가든 마음이 따뜻한 사람 만나는 걸 기대하게 된다고. 어딘가로 가든 마음이 따뜻한 사람 만나는 걸 기대해야 한다고 그럼 만나게 된다고. 그런데 정말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반짝이는 햇살처럼 마주고보는 살며시 웃기만 했다. 하긴 무슨 말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그 동네 보건소에서 일하는 공보의라고 했다. 공보의라 하면은 의사가 군복무 대신 하는 일 아닌가? 그는 보건소에 한번 놀러 오라며 인사치레 같은 멘트를 한번 하고는 헤어졌다. 역시 감기에 관한 그의 직업병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퇴근길이었다. 그도 퇴근길이었다. 다소 늦은 저녁시간에 큰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그는 ‘저녁식사는 하셨어요?’ 라고 물었다. 그것 역시 그냥 인사치레 같은 멘트였다. 그래서 ‘아뇨, 집에 다 왔는데요.’ 라고 정말 별 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그가 난데없이 대뜸 말했다.


“우리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

“...................”

나의 침묵은 몇 가지였다. 집에서 나의 퇴근만을 기다리며 저녁을 굶고 있을 유빈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났고, 그 다음으로는, 이 공보의 의사 선생님은 이 낯선 동네에 와서 아직 같이 저녁 먹을 친구하나 찾지 못해 항상 혼자 산책하는 나를 밥 같이 먹을 친구로 낙점 했나 였고 그 다음 몇 가지 이유는 좀 복잡해질 수 있으므로 아예 넣어두기로 했다. (꿈에는 예지 능력이 있다는 둥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로봇이었던 그가 떠올라 실없이 웃고만 있었다.) 한참을 말이 없는 나를 보며 그는 말했다.

“저쪽에 잣 호두 죽 잘 하는 곳이 있는데 눈에도 좋고 감기에도 좋다는 데 같이 안 가실래요? 저도 일 하고 와서..”

그는 한쪽 손으로 가방을 어깨에 다시 올리며 말했다. 역시 그랬다. 동료애 같은...음...나쁘지 않군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말했다.

“잠시 만요.”

그리고는 얼른 저쪽으로 가서 핸드폰을 꺼내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너무 반가운 듯 빨리 오라 재촉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건넨 말은 말이다.

“오늘 엄마 일이 좀 남아서 그러는데 너 배고플 테니까 전자레인지 밑에 만원 있지? 그걸로 뭐 좀 시켜먹고 있어. 엄마 빨리 갈게.”

“응”

유빈은 먹고 싶은 게 있었는지 아주 신나서 ‘응’이라고 대답했다. 엄마가 일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어서 적응중이기는 했다. 가끔 교회에 갈 때 내가 출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유빈이에게 물어본단다. ‘엄마는 어디가고 혼자 왔니?’ 그러면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엄마 어제 야간 했어요.’

사실 야간이 아니고 야근인데 말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진땀이 나고는 했다. 그렇다고 일을 많이 하는 건 아닌데 저녁 약속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말했더니 어찌하다 보니 ‘야간’일을 하게 되었다는.

아직도 교회에 빠질 때마다 사람들은 야간을 하는 줄 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르시는 분들 중에는 간호사라고 알고 계시는 분들도 상당 있었다. 나이트근무인줄 알고 말이다. 유빈의 ‘야간’ 발언 때문에 아무튼 나는 매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한참을 통화하다가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보고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다가가니 어색함이, 그는 이 상황이 어떨지는 모르나, 조금 밀려들기는 했다. 하지만 여느 동료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레 죽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방석까지 놓여있는 아늑한 꽤나 손님이 많은 집이었다. 통유리로 바깥도 보였다. 건물들 사이로 차들이 한참 지나가고 인도로는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요? 저는 처음 보는 곳인데...”

“네...하하..혼자 지내다보니까 아무래도 밥집을 잘 알죠. 하하하”

“네..후후”

그곳 여기저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방 쪽도 한번 쳐다보고 각 테이블에서 맛있게 먹고 있는 손님들 모습도 힐끔 쳐다보고 .그러다가 뜨거운 육수 물주전자를 들고 주문 받으러 오는 서빙직원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그를 바라봤다.

“뭐 드실래요?"

그는 자상한 눈빛이더니 나를 바라봤다. 내가 메뉴판을 보고 있자 그는 다시 말했다.“여기는 소고기 죽, 전복죽, 호두 잣 죽, 야채 죽 이렇게 맛있더라고요.”

“하하 그래요? 괜히 제가 감기 걸려서 같이 죽 먹는 거 아니에요? ”

“아뇨, 저도 죽 좋아해요.”

그래서 우리는 잣죽을 먹게 되었다. 뭔가 고소함이 물씬 풍기는 게 그가 이곳을 추천한 게 그냥 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참 숟가락을 들고 죽을 먹는데 그와 언뜻 눈이 마주치자 괜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왠지 믿을만한 든든한 친구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이 얼마만인지 떠올리며 소중한 느낌을 간직해야지 했다. 그것은 언제든지 그가 이곳을 떠날 것이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한참을 떠올렸다.


“꼭 다른 사람과 같은 필요는 없죠.”

“그렇긴 하지만....그럴 때는 불안하죠. 새로 산 샤프나 잘 깎여진 연필로 다이어리를 써본 적 있어요? 좀 지나서 읽어보면 그제 서야 내 마음을 알 것도 같은.”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거나 하는 것처럼요?”

그는 뭔가 말할 듯이 하더니 한참을 머뭇거렸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숙였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아팠던 기억이 치유될 것 같은 예감 말이다.


한참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서로 대화를 나눈 것이 좋았던 시간임에는 분명했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집에 오니 아이는 까치발을 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에 내리던 조명이 반짝이며 더욱 눈에 들어왔다.

“밥은?”

“응. 볶음밥 시켜먹었어. 짜장 볶음밥”

기특하다. 나는 일찌감치 씻고 침대에 귤을 담아 까먹으며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꼭 다른 사람과 같은 필요는 없죠.’ 어쩐지 그 말이 위로가 되고 있었다. 물론 집에서는 회사일은 뒷전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아주 열심히 일해주고 왔기 때문에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그를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뒤척여도 역시 아침은 밝아왔다. 나는 유빈에게 용돈을 주고 있었다. 지갑에서 10000원을 꺼내 주면서 말했다.

“너는 어린이니까 너한테는 만원도 큰돈이야.”

나는 지갑을 딱하고 눌러 가방에 넣고 유빈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말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말을 하다 마니까 아이는 나를 쳐다봤다.

상자 속 곰돌이 인형, 강아지 인형을 장롱 문을 열고 넣었다. 네오프렌 성분의 합성고무로 만들어진 다트도 고유의 향기를 더하며 장롱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유빈이의 겨울 점퍼 모자를 떼어놓으며 소리쳤다.

“그렇게 걷지 마”

엉거주춤 걷는 것이 보여 소리친 것이었는데 유빈이는 혼내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엄마, 이것 좀 봐. 웃겨. 키키”

유빈은 스마트폰을 들고 뛰면서 다가왔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병아리 떼 뿅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이런 노래를 배웠던 듯 한데 잠시 추억에 잠기는 것도 잠깐, 유빈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쨍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뭘 보라는 건지 무척 신나하고 있었다. 내가 들뜸에 부응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유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이 너무 초롱하고 사랑을 갈망하는 눈동자였다. 머리를 보니 염색기가 좀 빠져나간 상태였다.

“앞머리 좀 잘라줄까?”

나는 그제 서야 유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언제나 나에게 위로를 주고 있어 하는 무언의 눈빛을 다시 보여줬다. 유빈이는 다소 느닷없는 나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며 그러나 평소처럼 한껏 신나하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유빈이가 한참을 키키키키 거리며 액정을 눌러가며 보여준 것은 게임 캐릭터와 만화 캐릭터였다. 만원으로 아이템을 장만한 듯 했다. 웃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며 어정쩡한 웃음으로 “와~~크크큭”하며 웃어주고 있었다. 그럴 사이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광고판 부착비가 입금이 안 되었다는 메시지였다. 곧 거래처에 전화를 걸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지금 알아보고 전화 드릴게요. 안 들어가 있으면 오늘 안으로 입금할게요.”

나는 바로 알아보고 꼭 입금을 시키겠다며 부랴부랴 말하며 일단은 전화를 끊었다. 겉옷을 챙겨 입고 지갑을 들고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현관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에 버튼을 누르고서야 운동화를 바로 신으며 운동화 끈도 묶고 있었다. 회사에서 인터넷뱅킹으로 분명히 부쳤었는데 나는 손으로 입술까지 뜯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실은 입금은 지난 주 중에 되었어야 했고 광고는 주말에 바로 나갔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뭔가 초조함이 밀려왔다. 입금보다도 일처리가 잘되지 않은 것에 대한 초조함이었다. 그리고 그 초조함은 은행 ATM 기계에 찍힌 거래내역서 위에도 그대로 보였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나는 혀를 차며 얼굴을 붉히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어쨌든 곧바로 입금을 하고 곧바로 전화를 해서 사정을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힘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입고 나온 두터운 회색 니트 안으로 땀이 다 나는 듯 했다. 한참을 아파트 놀이터 가로수 아래로 터덜거리며 걸었다. 업무용 지갑에 달린 액세서리 수술 구슬방울이 아랑곳 않고 반짝이고 있었다. 시원한 커피라도 벌컥벌컥 마실까 싶어 테이크아웃 커피 집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군데 발견하고는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때였다. 그로 보이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커피 컵을 들고 있는 그의 손목도 보였다. 그가 나가다 고개를 돌리더니 놀라며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런 그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애틋한 감정 같은 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카페모카를 시킬 동안 갈 길을 가지 않고 커피를 들고 바깥에 서있었다. 몸에 베인 매너랄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아무튼 그 옆모습을 보고 있으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달달한 휘핑크림을 잔뜩 올려달라고 부탁까지 한 까페모카를 빨대로 당기며 피로와 긴장을 풀고 있었다. 휘감아 놓은 휘핑크림에 그제 서야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이제 곧 봄이 온다는 햇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같이 걸어가다 엉뚱한 표정으로 저녁약속이 있냐고 물었다. 다소 흥분된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럴 때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잊었다는 듯 멍하게 그를 바라봤다. 이 모든 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동료와 구내식당에서 밥 먹는 느낌이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기분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말이다. 그의 눈을 볼 때마다 거의 동시에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눈을 애써 피해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마침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 새순이 눈에 띄었다. 잠을 설치던 지난밤도 떠올랐다. 어두운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으니 그가 쳐다보고 있었다.


“아...어젯밤에 뭐 살게 있어서요. 사이트마다 둘러본다고 잠을 못 잤더니..”

“네...하하”

“그러죠. 같이 점심 먹어요.”

“뭐 먹고 싶어요?”

그는 우리 맛있게 먹어요 같은 미소와 눈빛이었고 나는 그러겠노라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걸었다. 그것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는 아니었고 어쨌든 그런 간단한 대답을 하는 동안에도 이런 눈빛의 변화를 그는 보편적인 여자들의 심리와 말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그는 남자고 나는 여자니까. 자리를 잡고 그와 앉았다. 기름으로 튀긴 바싹한 닭이 나왔다. 그것의 공식적인 이름은 유자소스 치킨 샐러드였다. 자꾸 포크가 갈 정도로 달콤하고 맛있는 소스였다. 나는 한참 집어 먹다가 티슈를 가리키며 한 장 빼달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맛있게 먹느라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기 위해서였다. 그래놓고 그런 내가 너무 자연스러워 티슈를 받는 동안 움찔했다. 그럴 때 일시적으로 잠깐잠깐 침묵이 흐르긴 했지만 즐거운 식사시간이었다. 상큼하고 신선한 분홍빛 샐러드 향기가 코끝을 타고 들어왔다. 나는 포크로 채소를 드레싱에 섞어 입안에 가득 넣었다. 떨렸다. 집에 있는 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뭔가 그에게 내러티브를 말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간단하게 끝낼 예정이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말로도 괜찮았다. 왜냐면 그는 객지에서 만난 그냥 좋은 친구니까. 그 편안함으로 티슈를 뽑아 입가를 한 번 더 닦았다. 하지만 그가 좋은 건지 어쩐 건지 나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가 좋아지는 건지 말을 못하고 있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유빈이였다.

“잠깐만요~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나는 핸드폰을 들고 저쪽 구석에 가서 소곤거리듯 전화를 했다.


#3

나는 식탁을 차리며 지난 주말에 산 새 그릇을 처음으로 식탁에 올리며 떨려오는 마음을 문득 엄지손가락으로 콧등을 세게 누르며 다독이고 있었다. 마치 정체성을 잃은 나를 뭐라고 하듯이 세게 눌렀다.

“오늘 야근 있는데 올 때 뭐 사올까?”

“치킨. 소금 찍어먹는 치킨 그거 맛있었어.”

“알았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유리문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숨이 탁하고 막힐 만큼 차가운 빗방울이었다. 공기는 좋았는지 투덜거리지 않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우산을 가지고 내려왔다. 어깨를 움츠리며 우산을 폈다. 차가운 비바람 결에도 봄을 알리는 나뭇잎에도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나는 일을 마치고 그 길을 다시 걸었다. 야근하고 오는 길이다. 가끔 거의 모두가 소등한 아파트라도 항상 불 켜진 집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더랬다. 그래서 분명 밤새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며 시험 잘 치라며 허공에 말도 건네고, 새벽에 일하러 가는 길이라면 파이팅 하라고 혼잣말도 했었다. 아무튼 치킨을 사들고 나는 걸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팔을 붙잡았다. 한쪽 팔에 치킨박스 봉지가 담긴 것도 잊고 그를 바라봤다.

“놀라셨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면서 걸어요? 몇 번을 불렀는데...”

“그러셨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쩐지 오늘은 일이 많았고 완벽모드의 일처리가 필요했던 날이었다. 복사해서 세무서로 팩스를 보내며 일을 마칠 때까지만 해도 치킨을 아삭아삭 먹고 씻고 팩을 붙이고 푹 자야지 했었다. 하지만 한통의 전화로 역시나 야근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그런 날씨를 신경이라곤 쓴 적이 없었던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건 날씨가 주는 괜시리 우울한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말이다. 나의 노곤한 눈빛마저도 위로가 되요 라고 말하듯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써 기억에서 배제한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질었던 그 사람에게든, 나 스스로에게든 꼭 보이고 싶은 그런 날이 될 것 같았다. 이미 그것은 진짜 너무 완벽한 상황과 짜릿함이 아니라 슬픔마저도 나룰 수 있는 그런 행복감 같은 게 스치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전혀 알 리 없는 기분 같은 걸 느끼고 난 후 접한 그의 눈빛은 햇살에 섞인 바람이 나뭇잎이 마구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것처럼 벅차다는 걸 알았다. 언어는 아닌 설음 같은 “쓰” 발음의 감탄사가 잇달아 한숨으로 나왔다. 비 때문에 정말 추웠거니와 망설임 같은 아님 마치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처럼 말이다. 매운 이나 뜨거운 이나 뭐 hot 으로 같으니. 예전 그와 만났을 때 마치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며 불안해하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퇴근 후 유난히 달이 밝아보였었다. 스니커즈의 새하얀 운동화 양쪽을 묶고 다리를 모아 그 달빛아래에 섰다. 나는 나의 내면에 흐르는 은하수의 밤물결에 귀 기울이고자 입김까지 불어대며 서있었다. 꾀 추운 날이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표지 예쁜 시집과 같은. 게다가 슬픔을 오롯이 나눌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 하고 입김을 핑계로 한숨을 내쉬고 있던 날이었다. 그 간절함이란 누군가에게 너무 하찮아 나의 간절함을 알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미 초코로 만들어진 케이크에 각종 초콜릿을 종류별로 다 붙인 케이크, 이가 시릴 정도라도 좋으니 딸기티라미수 아이스크림에 얼음 눈꽃송이 알알이 박힌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고 볼이 빨간채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그를 기다렸다. 나는 마치 파티가 귀찮다는 듯이 오븐을 열어 노릇노릇한 닭요리를 식탁에 올려놓을 것이다. 나는 그런 주말 계획을 다이어리에 칸칸이 채워 넣었으며 일할 때는 잘 사용하지 않던 색연필과 색색 팬이 담긴 긴 통을 활짝 열어 재낀 채 하나씩 뽑아 쓸 때마다 호들갑스레 동료들에게 그의 자랑을 늘어놓고는 했다. 나는 침묵과 고요를 두려워했지만 그런 순간은 나를 내면적으로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나를 비춰주는 이 달빛이란 게 말이다. 새로운 용기라도 주듯 혼자서 형광등을 갈아 끼울 때에도 그런 날들이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칠 흙 같은 어둠이 물을 게워냈었다. 임신이었다. 그가 당황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뱃속의 아이를 사랑했다. 은행에 소형 자동차세를 내야하는 것이 떠올랐다. 언젠가라는 말은 나를 꿈꾸게 했는데 종국엔 그것이 유효했는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아이를 얻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비운의 직원이었지만.

“이것만은 알아줘야 돼”

나는 울며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다음 말은 잇지를 못했다. 학습하고 경험하고 각인했던 수많은 말들도 그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도 떨어지는 빗방울보다 못했다. 아이를 보며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랬던 아이였는데 한쪽 팔에 치킨 봉지가 담긴 것도 잊고 그와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헉.....”

따뜻하고 향긋한 치킨향기가 코끝으로 느껴졌다.

“이거 오다가 사왔는데 드실래요?”

나는 멋쩍은 분위기에 치킨봉지를 그에게 건네줬다. 그는 얼떨결에 치킨봉지를 받고서는 멋쩍은 듯 웃었다.

“우리엄마는 되게 헌신적인 분이셨는데...어쩐지....”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지 개연성이 없을 만큼 엄마이야기를 불쑥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치킨 가방을 계단에 올려놓고 다시 한참동안 키스를 했다.

“잘 자요”

“다음에 또 봐요”

배고파 죽겠어 라고 노래를 부르며 집에 왔어도 위를 채워 넣는 일에 소홀히 했었는지 모른다. 먹어도 먹어도 허전한 것 보다는 배고파서 허전한 것이 낫다는 나의 지론에 유빈이는 코웃음을 치곤했다. 퇴근 후에 먹을 걸 포장해서 사가거나 퇴근 중에 피자를 미리 시키는 것이 일상화가 되어갔다. 사실 아이는 봉지를 들고 오면 무조건 잘 먹는다. 대부분 저녁 식사로는 부실하다 싶은 것들이다. 김밥이든 샌드위치든 떡이든 떡볶이든 아이는 무조건 잘 먹는다. 가끔 치킨처럼 뭔가 부피 큰 걸 사오면 굳이 자기도 나눠 내겠다고 돈을 주는 게 웃겼다. 게임을 하느라 스마트폰을 압수당하는 것 빼면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락 가게 스티커를 야무진 손가락으로 꼭 붙여놓던.

“힝.......치킨 사온다고 했잖아.”

“아참....깜빡했네. 오늘 야근에다 일이 워낙 많아서...우리 그냥 치킨 요 앞에 파 닭 시키자.”

나는 얼른 보이는 대로 베란다에 빨래를 걷으며 생각했다.

“엄마, 이것 좀 봐. 너무 웃겨. 키키키키키키키”

“응. 이것만 걷고 가볼게.”

스마트폰을 넘겨보다가 웃긴 게 나오면 꼭 나를 불렀다. 그렇게 같이 웃으면서 그래서 아직은 덜 외롭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나는 아직 젊다. 미래를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은퇴까지는 아직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교회를 마치고 걸어오는 길에 시소라도 태워주고 오던 놀이터를 건너뛰고 오는 것이라면 달라진 점이랄까. 그게 좋은 점이라면 바로 지금처럼 빨래를 볼 때다. 나는 치킨이 올 때까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블로그에 업데이트를 시키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부를 궁금해 하는 친구들 때문이다. 아이와 관련된 전적이 있는 터라 소문은 거의 루머수준으로 퍼져간다. 그래서 이런 일상을 업데이트한다. 우정의 소중함은 해가 갈수록 익어가는 포도주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는 냉장고로 가서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우유를 컵에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부어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감기에 걸렸는지 티슈를 한가득 뽑아와 코까지 흥~~흥~~킁~~~킁~~하며 풀고 있었다. 티슈에 파묻혀있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이비인후과 가볼래?”

“아니, 됐어.”

“가야돼. 놔두면 안 돼”

나는 오랜만에 블로그로 수다를 떨며 아이에게 말했다. 때로는 비밀댓글로 수다를 떨었다. 그저 만약에 만약에 이런 일이 닥친다면 어떻게 할 거야? 같은 물음이었다. 친구들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때로는 이런 나를 매우 흥미롭게 대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좋은 거야. 사람 마음에 사랑이 생긴다는 건 좋은 거니까. 나 스스로 이런 결론을 도출시켜놓고 치킨을 기다렸다. 파와 닭이 포장되어 배달되어왔다. 김이 나는 치킨을 보자 아이는 너무나 기뻐했고 나는 한숨이 나왔다. 만약에....그에게 아이를 설명해야한다면..............어떻게.............어떻게........

“엄마, 안 먹고 뭐해?”

“응????”


#4

“i kissed 3times last week"

이 말인즉, “나는 지난주에 3번 키스했다.” 이다. 이마, 볼, 입술 이니까.

“Did you kiss 3 hours?"

하하하하하 모두가 웃었다.

“time is hour? kkkkkkk"

"just kidding!! just joking"

농담이에요. 타임이 우리나라 말로 시간이니까 저쪽 직원이 세 시간동안 키스했어요? 라고 농담을 하니 외국인이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나도 농담이라며 웃었다.


“난 사랑에 빠졌어요. 감당할 수 없는 물결이 나에게 왔죠. 네, 짜릿했어요.”

“네 우리는 키스하는 사이에요. 전도유망한 배우와 애 딸린 이혼녀가요. 틈만 나면 분위기가 생기면 장소가 어디든 우리는 키스하죠. 그런 염려는 하지마세요. 우리는 결혼 같은 거 안 해요. 하하하 앞길 창창한 그의 인생 망칠 일 있어요?”

빨래를 개며 영화를 보고 있었더니 나를 위해 만든 영화인지 헷갈릴 정도다. 나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본적이 여러 번 있어서 그저 신기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

“엄마, 엄마, 이리와 이것 좀 봐.. 웃겨 키키키키키키”

“스마트폰 좀 그만해!!”

나는 아이에게 소리쳐놓고 하마터면 울컥할 뻔 했다. 그때였다. 전화가 왔다.

“우리 내일 저녁 먹기로 한 거....”

“저 거기 없을 거예요.”

“끊지 말아요.....”

“알았어요. 갈게요.”

지금 이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쳇....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뇌에 빠졌다. 고뇌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눈물도 났다. 안되겠다. 내일 고백해야 겠어.............나는 밤새 뒤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사실...저.........”

“아니요, 저부터 말할게요..............사실은...........로보트.......”

“네??? 로봇???알고 있었어요. ”

나는 식당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저기요...저기요...이건 가지고 가세요. 아이 선물인데.....”



  

                                                                                            한은경 010-7425-0221/hej82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