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또 별 볼 일 없는 하루. 이전의 날에 비하면 따분해서 몸이 저릴 정도다. 하지만 어렵게 해낸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기뻐서 날뛰어야 할 정도겠지.
그런데 나는 지금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아니, 몹시 나쁘다.
분명 모든 게 내 의도대로 흘러갔다.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어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주 흥분된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나쁘다. 이유도 모른다는 게 나쁜 기분을 더 최악으로 만들어준다. 아, 생각 없이 비실비실 걸어 다니다 운 좋게도 가까운 곳에 벤치를 발견했다. 그늘도 없고 앉아서 볼 구경거리도 없는 외로운 벤치지만 뭐 지금으로써는 최고다.
대충 걸터앉아 생각을 해보자. 무엇이 문제인 거지? 내 위대한 발견은 마침내 모두에게 증명되었다. 부와 명예는 약속된 것이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위대한 사람 중 하나가 된다니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나는 과학자다. 정확히 하자면 사람의 근본인 정신을 연구하는 학자다. 나는 분명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고집 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불쌍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 마침내 남들에게 인정받는 위대한 과학자 중 하나가 되었다. 사실 난 이런 잡다한 것들은 신경을 안 쓴다. 나는 단지 내 능력을 시험받길 원했고 그 시험을 거뜬하게 통과했다. 나는 항상 눈빛이 달라지는 남들의 시선 속에 살아왔고 가만히 있는 날 비난하는 화살 속에서 견뎌왔다. 나는 나 자신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남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그 이유를 생각해왔지만,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고, 그런 생활은 계속되어 혼자 다니기만...
어? 내가 계속 혼자였던가? 아니다, 나에겐 누군가가 항상 옆에 있었던 것 같다.
혹시 가족 중 하나인가? 아니, 절대 아니다. 가족들은 나를 언제나 혐오했으니까.
그러면 대체 누가 내 곁에 있었던 거지...
“이봐,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이상한 자세로 하는 거야?”
남자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형태의 남자와 여자가 서 있다. 아마 내가 생각에 빠졌을 때 나오는 우스운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나 보다. 남자의 지루한 몸짓을 보니 아마 꽤 내 옆에서 서 있던 듯하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
대충 얼버무리고 자세를 바로 한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자 누군가 했더니 내 연구를 도우려고 몇 주 전부터 합류한 샤넌 밀너와 베데트 사르트르다. 사르트르는 초창기부터 같이 일을 같이 진행해 익숙해진 사이고 밀너는 늦게 합류했음에도 붙임성으로 금세 거의 모든 연구원과 친해졌고 결국에는 나와도 어느 정도 말을 튼 사이다. 이런 면은 정말 경이롭다고 생각한다. 나와 잡담 한 마디라도 나눈 사람은 손에 꼽으니까.
“그런 자세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연구를 해낼 생각이 나온 건가? 이제 너 같은 자세를 한 사람을 보면 같이 연구나 하자고 해야겠어.”
건들건들한 태도로 밀너가 이런 말을 해온다.
“열심히 찾아봐.”
기분은 계속 나쁜 상태였지만 차갑게만 대하기엔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대답은 해준다.
“또 단답형이네. 나는 네가 이 긴 연구만 끝나면 말이 더 많아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것참 대단한 착각이다. 오히려 연구 기간이라 너와 말을 몇 배나 많이 한 거야.”
사르트르가 내 생각을 정확히 대변해준다.
“그럼 넌 연구가 끝났는데도 계속 이런 상태인 거야? 지금은 축배를 들고있어도 모자랄 상황인 것 같은데.” 밀너가 대화를 계속하고 싶다는 듯 자세를 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요새 나에겐 이런 말들만 오간다. 너는 성공했으니 당장이라도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이 된 양 놀라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나태한 놈들이 정말 분야에서 최고인 영재들인가 의심이 간다. 그리고 이놈도 그놈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부류...
”아니면 아무리 너라도 그녀가 마음에 걸리는 건가?” 밀너는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사르트르는 “샤넌! 이런 식으로는 안돼!”라며 밀너의 입을 막으려 애썼다.
나는 내 몸의 감각이 요동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재빨리 “그녀?”라고 되물었다. 알 수는 없어도 세계가 뒤틀린듯한 기분이다. 내 말에 은은히 웃는 듯한 표정을 짓던 밀너는 표정이 급격히 경멸하는 표정으로 굳어지더니 자세를 나에게서 멀어지게 취했다. 그의 몸짓에 나는 방금의 무력감이 잊힐 정도로 행동이 격해졌다.
“설마 했는데, 너 정말로 그 실험까지 완벽히 성공했군. 나는 이곳에 온 이후로 과연 그렇게까지 할까 궁금했는데 말이야, 결국 해버렸군. 너는 정말 훌륭한 미친 과학자야.” 도대체 내가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달려 들으며 말해본다. “그렇게 비꼬기만 하면 무언가 나올 줄 아는 건가? 그딴 말만 지껄일 거면 꺼져.” 하지만.
“내가 마냥 비꼬기만 하는 거로 보이는 건가? 나라면 너의 곁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그녀에게 최소한의 예우는 해줬을 거야. 아무리 시작부터 잘못되었다지만 이건 아니지.” 내 곁에 남아있던 그녀? 누구지? 내가 전혀 기억 못 하는 누군가인가보다. 누구일까... 지금 내 기분과 강하게 연관돼 있는 듯 나는 끊임없이 생각해 내보려 한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혀. “당장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이러한 내 의문들은 밀너의 “케이티 카메런. 이름을 들으면 뭔가 떠오르려나?”란 말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몇 년 전의 한참 밝은 낮 아래, 이 도시는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 빽빽이 늘어선 건물들, 나아갈 기미가 안 보이는 자동차들로 가득 차있다.
여기 우리가 주목할 이 남자는 자신의 손에 든 무언가를 휘갈겨 놓은 듯한 수첩에 눈길을 고정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자신 외에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한 모습은 마치 그의 눈에 다른 이들은 안 보이는듯하다. 바삐 어딘가를 향해 가던 남자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 허름한 건물이 남자의 주거지이다. 평소와 같이 계단으로 향하던 중 남자는 처음으로 다른 곳에 주의가 끼쳤다. 옆에서 맹렬히 말다툼하고 있는 두 여성에게다. 한 중년의 여성은 샤일라 반 로센달이라는 이 건물의 주인이고 다른 젊은 여성은 처음 본다. 남자는 방세를 두고 벌이는 다툼일 것이라 예상해본다. 작은 키의 젊은 여성과 큰 몸집의 중년 여성의 다툼은 겉으로 보기엔 상대가 안 돼 보였다.
“저는 분명 여기에 산다고 들었다니까요! 제가 거짓말이라도 할 이유가 있나요?”
“이유고 자시고 그런 괴팍한 놈은 이곳에 한 명도 없다니까! 나야말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저는 분명히 이곳으로 알고 왔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안 나갈 거예요!”
“아니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 당장 안 나가!” 바로 옆에서 이러는데도 남자는 관심 없다는 듯 척 척 계단 위로 올라간다. 남자는 언제나 운이 없는 편이었다. 머뭇거리다간 불똥이 튈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곳에 천재에, 어리고, 잘생기고, 이상한 걸 찾는 미치기까지 한 놈이 어딨다는 거야!” 남자는 계속 올라간다. 하지만 걸음걸이는 느려졌다. “제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요! 그냥 기억을 연구하는 어린 과학자가 있다고 해서 온 거라고요!”
서로를 보며 씩씩대는 두 여성은 동시에 발소리가 끊긴 계단 위를 올려봤고, 멈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에.
“뭐야, 저 녀석이 그 천재란 녀석이야?”
“에이 무슨 소리예요 제가 듣기로는 10대에, 잘생기고, 세기의 천재라고 했어요.”
남자는 당황한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자신에게 찾아간다고 꽤 오래전에 들은듯하다. 아니 확실히 기억해냈다. 5년 전에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교수가 자신을 도와주겠다며 후일에 사람을 보낸다고 했다. 근데 그게 지금? 예상하기 힘든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이건 좀 아닌듯싶었다.
“저기 혹시 디클랜 슬레이터란 분 아시나요?” 젊은 여자는 아주 확실한 말을 해왔다.
정적이 잠시 흐른다. 그리고 남자는 시인한다.
“네, 그리고 들었던 말들을 종합해보니 제가 맞는 것 같네요.”
“5년은 좀 심했네요. 그리고 죄송해요. 소란을 피워버렸네요.”
“아니 뭐, 괜찮아요.”
남자와 카메런은 자리를 옮겨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여자는 자신을 케이티 카메런이라고 소개했고 남자도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오면서 간단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실수로 몇 번 눈을 마주쳤는데 눈이 매력적인 푸른색인 게 남자의 뇌리에 남았다.
“그런데 교수님이 말해 준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정말 본인이 맞나요?”
남자는 원래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카메런의 의심에 자신도 한 번 의심해본다.
“저야말로 교수님이 보낸 사람이란 걸 어떻게 믿죠?”
“이미 믿고 계시잖아요. 그것보다 대답이나 해줘요.”
남자는 이 말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동의하기에 열심히 답변해준다. 교수와 만났던 일화들,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 등을 요점만 살려서 대답해준다.
“음, 맞는 것 같네요. 당신일 것 같다는 확신은 들었는데 혹시나 해서요.”
이런 반응에 남자는 당혹스러워하지만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것보다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해본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죠?”
“교수님이 말해주셨거든요. 제가 인재를 좀 찾고 있었어요. 똑똑하고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잘생긴 데다 저보다 어린 사람을요.”
남자는 카메런의 말을 듣고는 이 여자가 연구 파트너를 찾고 있다고 단정 지었다. 이런 일은 두 번 겪은 적이 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뒤의 두 조건은 파트너로서는 상관없는 말이지만.
“하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죠. 그리고 소문만 듣고 찾다가는 항상 말과는 다른 편이고요.”
남자는 자신을 가리킨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남자는 누군가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집중이 안 되고 신경 쓰인다. 혼자가 훨씬 낫다. 빨리 거절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하고 싶은 목적은 대충 알겠네요. 하지만 전 안 할 겁니다.”
“예? 벌써 눈치챘나요? 공부만 한 사람치곤 눈치가 빠르네요. 맞아요. 남자친구 찾아 헤매고 있어요.”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못한 말에 남자가 놀라며 눈이 커진다.
“꺄하하, 농담이에요. 바로 반응이 나오니까 재밌네요. 저는 저와 함께 일할 동료를 찾고 있어요. 음, 지금은 당장 연구를 같이 진행하자는 건 아니에요. 서로 알아나 두자 이거죠.”
“그, 그래요. 근데 전 혼자 하는 게 편하거든요. 그리고 저에게 뭘 기대하셔도 얻는 게 없을걸요.”
“누가 뭘 기대한대요?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 알고 있자는 거죠. 인맥 넓혀서 안 좋을 건 없잖아요?”
남자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것에 당황했지만,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카메런이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지쳤어요.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죠.”
갑작스레 이별을 고한 카메런에 남자는 당황해 뭐라도 말하려 하지만 말문이 막힌다.
“다음에 또 만나요. 천재 과학자 씨.”
카메런은 먼저 일어나 유유히 사라졌다. 남자는 멍하니 금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뒷모습을 쳐다보다 그녀가 자신의 메모지에 적어준 전화번호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아쉬움을 느낀 그다. 계속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만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카메런은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제야 카페를 떠난다.
지금 나는 달려가고 있다.
바로 전의 상황에서 나는 한참이나 대답을 재촉했지만 밀너라는 녀석은 질렸다는 듯 어디론가 가버렸고 뒤쫓아 가려던 나를 사르트르는 막아 세웠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큼 과격하게 사르트르를 닦달했다. 그러자 그녀에게 나온 한 마디.
“그렇게 알고 싶다면 슬레이터 교수님에게 가봐.”
그래서 지금 가고 있다. 사실 난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지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숨 가쁜 것이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고양된 상태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가고 있다.
케이티 카메런? 나는 그런 이름을 모른다. 처음 듣는다. 밀너는 그녀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진 여자를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잠시 현기증이 난다. 너무 과하게 움직였나 보다. 하지만 계속 움직인다. 지금 당장은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처음 들은 그 이름 때문에 미쳐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건물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올라간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슬레이터를 만날 수 있다. 주변 동료들의 “이봐, 왜 그래?” “뭐야 무슨 일이야?”하는 소리는 모두 무시한다. 나답지 않은 모습에 당혹스런 모양이지만 지금 난 어쩔 수 없다.
교수의 방문을 밀어젖힌다. 그러자 앉아있는 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나이는 50대 후반으로 나와 아주 작은 인연이 있어서 이 연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대체 왜 카메런이라는 여자와 이 교수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르트르를 믿고 말을 꺼냈다.
“케이티 카메런이 누구죠?”
“누구냐고?”
기가 차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그리고 서서히 의자를 돌리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한다.
“네 연인이라고 해도 모르겠지? 그럼 잊힌 옛 연인이라고 해두지.”
연인?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런 기억은 전혀 없다.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은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데.
“전혀 모르는 표정이군. 네 연구는 정말 완벽한 모양이야. 역사에 길이 남겠어. 그녀는 마지막까지 널 위했는데 말이야.”
“밀너나 당신이나 내 연구를 들먹이는데 지금 상황과 대체 무슨 연관이죠?”
“그야 네 연구는, 그래 이 대답이면 다 설명이 되겠군. 분명 너는 모든 게 기록되고 증명될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더 이상은 눈뜨고 보기 어렵군. 너는 기억조작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어.”
기억조작? 나는 공황장애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지 않았나?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날 속이고 있나? 아니면 나 혼자 미쳐버린 건가?
“제대로 말해주자면 너는 케이티 카메런이라는 네 연인을 대상으로 실험했지. 너는 ‘누구보다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완벽하게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되려 싫어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마저 그녀를 잊게 된다면, 관계는 없던 일로 될 수 있을까?’ 이런 걸 궁금해했었지.”
이 말이 진실인가라는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교수가 내민 종이엔 모든 진실이 적혀있었고 교수가 넘긴 USB엔 내 모습이 녹화되어 있었다. 모두 교수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케이티 카메런이라는 여자는 내 연인이라는 건가?
모든 의문과 혼란으로 사고는 뒤죽박죽이 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머리가 아파졌지만 의외로 전보다는 나아진 기분이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러면 지금 케이티 카메런이라는 여자는 어디 있는 거죠?”
“케이티.”
남자가 카메런을 부른다. 그녀는 예상 못 했다는 듯 놀라며 환한 얼굴로 반겨준다.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종종 만나서 서로의 연구에 관한 이야기나 쓸데없는 말을 하며 지낸다.
남자는 자신의 삶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다른 누구와 이렇게 오래 만나기도 처음이고 카메런을 만나고 나서는 일상생활에서 운도 크게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어쩐 일이야? 내가 부르기 전에는 나올 생각도 안 하더니?”
“넌 여기 올 때마다 키를 놓고 가잖아. 그래서 생각난 김에 와봤어.”
“이제야 알아준 거야? 그래도 대견하네. 이젠 그런 것도 눈치채주고.”
여기는 남자와 카메런만의 장소다. 저 멀리 강이 보이는 언덕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서로가 좋아하는 곳이다. 카메런은 이곳에서 혼자 여러 생각을 하곤 했다.
“여긴 언제나 조용해서 좋아.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아.”
카메런의 말에 남자도 조용히 동의한다. 줄지은 건물들과 자동차들로 가득 찬 도시와는 다른 세계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남자는 언제나 카메런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말로는 다 못할 고마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그런 곳으로 떠날까?”
“풉, 여행 가자는 거야? 안돼, 요새는 할 일이 너무 많아. 일 생각에 제대로 쉬지도 못할 거라고.”
남자의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카메런은 자연스레 대처한다. 이런 남자의 대화방식에 익숙해졌다.
“여행 말고. 그런 곳에서 살자고.”
“아예 옮겨버리자고? 글쎄, 우리 같은 사람이 그런 곳에서 뭘 하고 먹고사나.”
“그러면 언젠가는 그런 곳에서 살아가자.”
남자의 말이 진심이란 걸 카메런도 눈치챘다. 이런 말을 하는 남자가 재밌는지 어떤 곳을 원하느냐고 물어본다.
“구체적으로 말해봐. 한 번 알아놨다가 나중에 옮기자.”
“지루하고 한적한 바다에 단정한 집에서 살고 다른 도시와는 먼 곳.”
카메런도 같이 그 장소를 그려본다. 썩 나쁘지 않은 곳 같다.
“그 바다 주변에 둘이 걸을만한 자그마한 해안가도 있으면 딱 맞겠다.”
둘은 서로에게 기대 언젠가는 올 그 날을 같이 그려본다.
차가 달린다. 뒷좌석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차갑지만. 그게 오히려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유지해준다. 나는 지금 교수가 말해준 곳으로 가고 있다. 곧 있으면 내 연구의 발표회가 있지만, 교수의 말에 따르면 그건 어차피 자신이 하기로 되어있다고 한다. 뭐 내가 해봤자 나는 내용도 제대로 모르니, 아니 애초에 나는 지금 상황조차 이해가 되지 않으니.
“곧 있으면 도착이야, 기억은 돌아왔어?” 사르트르가 걱정된다는 듯 말을 걸어온다.
“나는 줄곧 그 부분이 불안했어. 이렇게 네가 후회한다면 기억을 대체 어떻게 돌아오는지. 너는 그때 누구도 말릴 수 없어서 놔뒀지만 난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어. 그래도 너희는 누구보다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했으니까 서로 기억을 찾을지도 몰라.”
내 기억은 그대로다. 자료들을 읽어봐도 다른 사람 이야기인 양 보인다. 하지만 곧 도착이라는 말에 몸이 가볍게 떠는 거로 보아 카메런이라는 여성과 나는 강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운전은 사르트르가 해주고 있다. 나를 이렇게 도와줄 사람은 사르트르뿐이다. 아마 내 상태가 진정된 듯 보이니 말을 건넨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호의에 나는 가볍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뭐?”
“고맙다고.”
“... 기억에선 사라졌었을지 몰라도 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야. 만나면 잘 대해줘.”
사르트르가 대견하다는 듯이 말을 해온다. 그러고 보니 예전의 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가 멈추고 사르트르가 먼저 내린다. 뒤이어 나도 내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바닷가다. 한적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물소리가 들려온다. 집들은 간격을 가지고 여유 있게 늘어서 있다. 허름하지 않고 단정한 게 맘에 든다.
“잠시만, 분명 여기 근방이라고 쓰여 있는데...”
주택들 외에는 별다른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흔한 상점이나 음식점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 있다기엔 눈길을 뻗어도 이어진 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외부와 단절된 곳처럼 보인다. 잠깐. 무언가 생각난다.
“그녀가 이런 지루한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뭐야 설마 잘못 가져온 건가?”
재빨리 기억해내려 애써본다. 처음 보는 광경이지만 언젠가 머릿속에 그려본 기억이 난다. 누군가와 같이.
“아닌데... 교수님이 이런 때에 실수하실 리가.”
지루하고 한적한 바다. 단정한 집. 다른 지역과 먼 곳. 그리고
“둘이서 걸을만한 자그마한 해안가.”
“뭐?”
“잠시만 기다려봐.”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나아간다. 바다 쪽으로, 해안가로.
그리고 난 내가 찾아온 사람을, 연인을 만났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푸른 눈, 흩날리는 금색 머리카락, 그리고 작은 키.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시야가 흐려졌고 머리는 어지러워졌다. 그러면서 온몸은 떨리고 마치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내게 소중한 연인이 있다면 저기 서 있는 여자가 틀림없다.
들릴 리 없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를 내본다.
“케이티.”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보는 순간. 나는 나와 그녀 사이의 기억인 모든 감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도.
창문 너머 빗소리가 들린다. 유리를 타고 흘러내려 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남자는 생각에 잠겨있다. 그에게 케이티 카메런이 다가온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옆에 앉는다.
“또 무슨 생각?”
조그만 연구소에서 작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남자는 카메런의 졸업 프로젝트를 도와주고 있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제 뭘 더 추가하기엔 지쳤어. 그냥 이대로 끝낼래.”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어떤 발상인지는 나중에 들어보면 안 될까? 오늘 할 일은 끝내고 가야지.”
요 몇 주간의 강행군으로 지칠 대로 지친 카메런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기억과 감정을 완벽히 지우고, 다른 것으로 대체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카메런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말하는 남자를 질책하고 싶었지만, 그의 발언은 무언가 무섭게 느껴져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근본적인 곳에 손댈 수가 있다면 사람들이 왜 기억 때문에 고생하며 살겠어.”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환자들만 말하는 게 아니야. 인생 자체의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억조작을 말하는 거야.”
카메런은 남자의 상태가 약간 흥분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마치 지금이 남자의 원래 모습이라는 듯 남자는 빠르게 격앙되어갔다.
“사람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도 지울 수 있을까? 아니 그 감정 자체를 없던 일로 할 수 있을까?”
점점 더 남자의 발언은 이상해져 간다. 카메런은 당장 이 망상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 차려! 그런 일은 절대 되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그딴 일을 해서 어쩌게!”
이다음 남자의 발언은 예상 밖이었다.
“혹시 지금 너와 나의 관계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까?”
카메런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건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케이티, 이런 일이 가능만 하다면 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공헌을 하는 거라고. 우리는 엄청난 발견을 하는 거야!”
카메런은 이 남자에게 환멸을 느꼈으나 그와 동시에 동정심도 느껴졌다. 무엇이 이 남자를 몰아세우고 있는 걸까. 어렴풋이 짐작하기에 그의 곁을 지켜주며 치유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
“잘 들어.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건 공헌도 아니야. 비참한 결과만을 가져올 거야.”
하지만 자신의 머릿속에선 이미 결과가 나왔는지 남자는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케이티, 이번 한 번만 도와줘. 가능성이 없다면 바로 포기할게.”
카메런은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여태 지내온 자신을 고작 실험체로 생각한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졌다.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하면 그가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걸까. 그러면 이런 것에 집착하지도 않을 텐데.
“그래. 네 맘대로 해. 그렇게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버려.”
그리고 안된다면 이런 생각은 다시는 하지 말고 나와 평범하게 살아가자.
카메런의 바램은 언제나 그를 위해서였다.
분명 케이티는 나를 향해 돌아봤으나 그 이상의 반응이 없다. 역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겠지. 새어 나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선다.
“누구시죠?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그녀는 날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정체 모를 혐오감마저 느끼겠지. 내가 의도했으니까. 그래서 난 사죄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카메런씨. 당신은 절 기억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전 당신을 알아요.”
“대체 누구신데 절 아시는 거죠? 더 다가오면 도망갈 거에요.”
아아 케이티, 우리 시작했던 때로 다시 돌아가자.
“전 당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어요. 그걸 사죄하러 왔어요.”
“전 분명 경고했어요.”
케이티가 나에게서 뒤돌아 버린다. 침착하지 못한 내가 실수를 저지른 거다. 당황한 나머지 본론부터 말한다.
“당신과 저는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하지만 저 때문에 이렇게 돼버린 거죠. 당신에겐 잃어버린 기억이 있어요. 그걸 되찾아주러 온 거에요.”
케이티가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고.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믿고 계시잖아요.”
케이티가 날 처음 만난 날 나에게 주었던 말을 돌려준다.
어떻게 해서든 기억을 되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료도 충분히 수집했고 계획도 세워놓았다. 일단 그녀를 데려가야 한다.
“... 그래요. 이상하게도 당신을 믿고 있네요. 하지만 제가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는 것에만 동의할게요.”
“그래요. 그걸로 됐어요.”
눈앞에 그녀가 서 있지만, 오늘은 그만 물러가야 한다. 그녀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한다. 그리고 같은 장면을 반복시키면 기억을 찾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만난 것만으로 만족할게요. 다시 찾아올게요.”
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괜찮다. 정말 괜찮다.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추억과 감정이 사라졌을지라도. 그녀만은 이곳에 남아있다.
“여전히 기억이 안 나나요?”
케이티에게 묻는다. 나는 이곳에 머물면서 사르트르를 통해 여러 물건을 조달받았다. 그리고 내가 했다는 연구자료들을 토대로 케이티에게 여러 실험을 하는 중이다.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다시 기억을 되살리는 걸 고려하지 않아 방법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나는 계속 노력할 거다. 언제까지나 그녀와의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할 것이다.
“기억은커녕, 짜증 나기만 하네요. 이게 뭐예요. 어디 나가지도 못해서 답답하고 머리만 어지럽고.”
하긴 요새 거의 침대에만 누워있었으니. 지칠 만도 하다. 오늘은 멈추고 바람이라도 쐬게 해줘야겠다.
“그럼 나가죠.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요.”
“당신이랑요? 무슨 소리예요. 짜증의 원인이 당신이란 거 몰라요? 저 혼자 나갈 거예요.”
어?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나 때문에 기억을 잃은 데다 지금은 나 때문에 갇혀있으니.
케이티가 일어난다. 나는 여러 장치를 떼준 다음 가도 좋다고 말해준다. 정말 날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슬퍼지지만, 옆에 있다는 사실은 기쁘다. 만약 그녀가 기억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고 하면 이런 구실로 계속 붙잡아 두고만 싶다. 그런데 그녀가 나가지 않고 문앞에 서 있다.
“뭐해요, 저 상처 하나라도 나면 안 된다면서요. 옆에 있지 않아도 괜찮은 거에요?”
뭐? 아 그렇구나.
나는 재빨리 나갈 채비를 하고는 뒤따라 나갔다.
이 마을은 조용한 곳이다. 마을 주민들은 바다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수는 많지 않으니 사람들이 바다로 일하러 간 날에는 마을엔 정적이 흐른다. 그녀를 앞에 두고 나는 뒤를 따라서 걷고 있다. 케이티의 어깨가 축 처져 보인다. 진짜 힘들었었구나.
“카메런씨. 그렇게 힘들면 당분간은 멈출까요? 아, 완전히 관두는 건 안 돼요. 당신은 꼭 기억을 되찾아야 해요. 제 잘못이기도 하고 당신과 저의 추억을 모두 없앨 순 없거든요.”
“당신은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이러고 있는 건가요?”
그런 의미가 아닌데.
“당신이 사랑한다는 케이티란 여자는 과거의 나인가요 지금의 나인가요.”
케이티가 예상 못 한 질문을 해온다. 말하자면 둘 다다. 하지만 케이티가 묻는 건 자신도 모르는 과거의 자신을 생각해 이러는 것이냐는 말인 거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과거의 자신에 의존해 서로 이럴 이유가 없지 않냐고 묻는듯하다.
“하,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는 내 애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와가지고.”
케이티가 혼자 푸념을 늘어놓는다. 나는 그저 조용히 뒤따라갈 뿐이다.
“여긴 너무 시끄럽고 복잡한데.”
그 마을에서는 도저히 차도가 없어 장소를 옮겼다. 케이티와 내가 만난 그 도시로. 케이티는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계속해서 불만을 말하고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케이티에게 잊게 된 기억이 어떻게 대체되었는지 물어봤다. 나는 케이티 카메런이라는 여성이 완전히 지워진 채 기억조작이라는 연구는 공황장애에 관한 연구로 바뀌어있었다. 케이티는 자신이 도시에서의 생활에 질려서 그 마을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지워진 채.
케이티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한다. 또 나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 대한 기억도 지워졌나 보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본다. 우리가 함께했던 장소들을 둘러보면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다.
제일 먼저 내가 살던 건물로 가봤다. 로센달 여주인을 보고도 기억을 하지 못했다.
같이 쓰던 연구실로 가봤는데 케이티는 여러 장치에 흥미만 느끼고 별다른 건 없었다.
둘만이 가던 언덕으로도 가봤지만, 케이티는 조용한 게 맘에 든다는 말만 하고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웬만한 건 다 해봤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힘내요. 그렇게 축 처지면 나까지 처지네.”
온종일 실망한 상태로 돌아다니니 신경이 쓰였나 보다. 어떡하나, 방법이 없다고 하면 케이티를 붙잡아둘 구실이 없어지는데.
우린 처음 대화를 나눈 카페로 가기로 했다. 나는 그곳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별 기대 없이 갔다.
“여기서 처음으로 만났다고요? 인테리어는 예쁘네요.”
케이티가 커피를 마시며 말한다. 내 기분도 모르고.
서로 마주 보며 앉아있어 케이티의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봐본다. 푸른 눈. 금색 머리카락. 그리고 앉아도 작은 키. 왠지 옛날 생각이 나 웃음이 지어진다.
기억을 잃은 그녀와 지낸 감상으로는 그녀를 처음 만난 시절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처음엔 쌀쌀맞았지만 지낼수록 그녀의 원래 모습이 나왔다. 거침없고 당당한 모습. 그리고 날 걱정해주는 모습도.
이렇게 생각되니 마치 자신만 옛날로 돌아온 듯해 기분이 묘했다. 내가 뭐가 달라졌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변한 자신이다. 그녀 덕에 남을 배려하고 존중해주고 천천히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내가 잊고 지내던 나를 찾아준 것이다.
내 앞에 앉은 그녀는 여전히 그녀다.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다. 함께한 기억이 없어도 추억이 사라져도 앞으로 만들면 된다. 이제 그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내 앞에 있으니까.
“카메런씨, 우리 여태 통성명도 하지 않았죠?”
“서로 알고 있는데 굳이 할 필요가 있나요.”
“그래도 해요. 서로 이제부터 다시 잘 지내자는 의미로.”
“좋아요. 전 케이티 카메런이에요.”
“제 이름은 다니엘 테일러에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