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사(夕陽死)

by 란지에 posted Apr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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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사(夕陽死)









툭, 후둑. 붉은 생명이 방울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의 시선이 옅게 허공을 더듬었다. 초점조차 맞지 않는 시선이었다. 그래도 그 모습을 찾겠다고. 이 숨이 다 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향한 열망에 바치겠다고.
 

"ㅡ."

 
이름조차 알지 못 하는 주제에 그저 네 존재를 읊었다. 이미 한참은 질려 파랗게 변해버린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마지막 숨을 바쳐서라도 네 곁으로 갈 테니, 더는 혼자 두지 말라고, 제발. 차라리 네 곁으로, 날 데려가. 그래서, 그래서 나는ㅡ.
 
입술이 떨어졌던가. 손을 뻗었던가. 아아, 흐르는 붉은 목숨. 닿았던가. 그렇게 눈을 감았다.
 
 
 
*
 
 
 
늦가을의 주홍빛 햇살이 들이치는 창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옅은 색이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는, 마치 손을 대면 부서져 내릴 얼음꽃처럼. 그가 그 붉은 빛에 머리를 기대며 부드러이 눈을 감았다. 그럴 때였다. 달칵,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드르륵,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기도 잠시, 느닷없이 들린 소리에 그가 부스스 눈을 떴다.
 
 
"어라, 누나? 무슨 일이에요?"
"어, 유온아, 깨있었니? 어휴, 말도 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너도 이제 고생 좀 하겠다. 미안해서 어쩌니."
 
 
고생?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는 도로 고개를 들었다. 옆의 침대에서는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쯤 저 너머를 가린 커튼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누군가 옆자리로 들어오게 된 모양이었다. 저와 같은 병실을 쓰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니. 그는 고개를 잠시 기울였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제 또래예요? 남자애?"
"응, 한두 살 어린 남자애인데, 하여간 되게 시끄러워질 지도 모르겠다. 그냥 실려오기만 한 애라서."
"보호자 없어요?"
"고아라던데? 지금까지 혼자 살았는지, 원. 속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유온아. 아무래도 다른 병실에는 두기가 조금 그래서......"
"아니에요, 친구야 생긴 거 같아서 좋은데......"
 
 
여즉 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같이 이야기를 주고받던 간호사도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마주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잠시 분주하던 간호사들은 잘 부탁한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병실을 나섰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그는 병실의 문이 닫히고서야 느릿하게 손을 내렸다. 하얗게 펄럭이는 환자복 사이로 커다란 키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가느다란 손목이 얼핏 비쳤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아래로 내려선 다리가 이리저리 허공을 휘젓더니 곧 근처에 놓인 검은 슬리퍼를 꿰어찼다. 느릿한 걸음이 곧 병실 안에 터벅터벅 울려퍼졌다.
 
그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커튼을 조금 열어젖혔다. 아까는 이불 밖에 보이는 것이 없더니, 이제는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한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짙은 주홍색 머리칼. 곱게 감긴 눈꺼풀에 작게 들려오는 숨소리. 그는 침대 옆의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소년의 옆에 앉아, 침대에 붙여진 환자카드로 눈길을 돌렸다. 류시하. 열여덟살. 내가 두 살 형이구나. 시하, 시하 친구야. 그는 그 이름을 몇 번 더 입 속에서 굴려보았다. 나쁘지 않은 어감이다. 서유온, 제 이름은 둥글기 짝이 없는데. 류시하, 네 이름은 어쩐지 모난 돌 같구나. 앞으로 얼마나 더 정을 맞아야할까, 너는. 그의 눈길이 부드러이 아래로 내려갔다. 주사 바늘이 꽂혀있는, 마디가 한참 도드라진 하얀 손. 손목 아래부터는 하얀 붕대가 한참 감겨있었다. 팔이 부러진 걸까. 이렇게 실려와서 수혈과 수액 바늘이 꽂혀서는 고작 팔이 부러져? 부딪치거나 떨어졌다면 다른 곳에도 붕대가 감겨있어야지. 그는 아마ㅡ. 그의 옅은 갈빛 눈동자가 말끄러미 짙은 주홍빛 머리를 응시했다.
 
 
"친구야."
 
 
나지막하게 소년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픈 사람은, 혹은 아팠던 사람은. 아픈 사람을, 혹은 아팠던 사람을 알아볼 줄 안다. 친구야, 우리는 방금 처음 얼굴을 맞댔지만서도. 나는 네 아픔을 알아볼 수 있을 길을 걸어왔어서. 너는 알아볼까. 너는 과연 내 아픔을 알아볼까. 지금 와서는 욕심인가. 친구야.
 
 
"아프지 말자."
 
 
그의 손이 소년의 하얀 손등을 부드럽게 덮어주었다. 아아, 따뜻하다. 우린 괜찮을 거야, 친구야. 아프지 말자. 그가 부드러이 웃음을 지었다. 방 안에는 아프고도 따뜻한 고요가 흘렀다. 늦가을의 햇살이 지고 있었다.
 
 
 
*
 
 
 
꿈이려나. 소년은 손가락을 들어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프지 않다. 정말 꿈이구나. 소년은 그제야 아래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 이 곳은, 그래, 그 곳이구나. 제가 그렇게나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 집이다. 소년은 몇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집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안에서는 희미하게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저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소리다. 그저 익숙한, 폭력의 소리. 소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안으로 옮겼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콰장창. 쨍그랑. 익숙한 소리가 소년의 귓가를 때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거실의 광경. 시계가 내던져져 깨진 유리가 사방으로 튀었고. 뒤엎어진 탁자와 깨진 술병들의 파편이 한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욕설과 구타의 소리. 음파를 느끼는 것마저 고통이었음에도, 소년은 그 곳에 말없이 서 있었다. 빌어먹을 고모부였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 온갖 욕설과 폭력을 일삼던. 소년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즈음이면 언제지. 그 때 저렇게 얻어맞고 어떻게 되었더라. 기절했던가. 그러고보면 저는 그 십 년을 무슨 생각으로 버텼던 걸까. 그저 폭력과 무관심 밖에는, 어릴 적의 저를 이루던 것이 없었는데도. 소년의 얼굴은 금세 어딘지 우울하다는 듯 변해버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그는 식식거리며 거친 숨소리를 내더니 이내 손에 들린 술병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거실에는 황폐한 공간의 드넓음과 그 가운데에서 아픔에 떠는 아이 하나만이 남았다. 소년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곧 몸을 돌려 아이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아니, 어릴 적의 자신은, 한껏 몸을 움츠린 채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소리를 참으려는 듯 욱욱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소년은 제게로 다가가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버석, 유리 파편이 밟히는 소리가 울리고. 소년은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어린 시절의 저를 가만 쓸어보았다.
 
 
"......어떡하냐, 너. 곧 있으면 더할 짓도 하는 새끼가 네 아비랍시고 나타날텐데."
 
 
항상 굴곡의 연속 가운데에서도 악착같이 버티던 그는 더 이상은 없고. 행복을 바라 버텼던 시간은 결국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애초에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어버려서, 저는. 발악하던 그 시간의 존재 가치는 더 이상 없다고. 소년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야, 있잖냐. 이렇게 처맞은 날에는 차라리 뒤져버리자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잖냐. 그래도, 그래도...... 살다보면 행복해지겠지, 그런 생각 하나로 살았잖냐."
 
 
소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는 단지 그 말 하나로, 그 실날 같은 작은 가능성 하나로 그 시간을 견뎠다. 살다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어떻게든, 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저를 다독이며 걸어왔는데. 지금은, 지금은ㅡ.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 때, 차라리 그 때 죽어주지 못 해서, 그 뒤에 더 험한 일을 겪게 해서...... 내가, 주제도 모르고, 그 꼴에 물거품 같은 꿈을 가져서...... 그래, 내가, 내가 미안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봐. 욕심 내어서는, 감히 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봐. 그래서 지금에 와서 벌을 받는 건가봐. 내가 괜히 그를 바라서. 이게 그 죗값인가봐. 그러니까, 그건 전부 다 내 탓이라고. 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것은 결국 제 뜨거움을 감당하지 못 했다. 몇 년만에 느껴보는 벅찬 울음인지 이제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무거웠다. 지금 와서야 택한 죽음의 무게도, 지금까지 버텨왔던 시간의 무게도. 그저 눈물날 만큼 무거웠다. 그렇게 너는, 나는. 말없이 설움을 삼켰다. 이미 죽어버린 나마저도.
 
 
 
*
 
 
 
하얀 복도. 하얀 옷. 하얀 발목. 온통 흰 빛 뿐인 복도였다. 타박타박, 복도에 울리는 발자국의 소리마저도 희었다. 사람들은 죽어가기 때문에 병원에 온다 했었나. 아니, 사람들은 죽기 위해 이 곳을 찾는다. 이 하얀 빛에 잠식되고, 표백되어 숨을 거두기 위해. 그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숨을 거두기 위해 이 곳에 왔다. 그렇지만 무언가 하나가 다르다면. 그는 이미 잠식되어 있다는 것. 고작 형체도 없는 빛 주제에 그를 잠식시려 하다니. 숨조차 아등바등 앗아갈 주제에. 그의 하얀 걸음이 복도 바닥을 스치다 어느 한 곳에서 우뚝 멈추어섰다.
 
 
"어라, 또 안 먹어요?"
"아, 유온이네. 그래, 상처도 봐야하고, 다른 검사도 해봐야 하는데 일어날 생각을 안 해."
 
 
그는 간호사의 손에 들린 식판을 가만 바라보았다. 하얀 쌀죽 반 그릇과 반찬 두어 가지. 저런 간단한 것조차 입에 대지 않으려 하는 소년은. 소년이 잠에서 깨어난 지도 벌써 삼일 째였다. 그렇지만 소년이 잠에서 깨어났던 그 날의 일을, 그는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이 곳이 어디인지 자각하자마자 터져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려 애쓰던. 왜 살아있냐고, 왜 죽지 않았냐며 서럽게도 외쳐대던. 아아, 제가 그를 모를 리가 없지. 그는 식판에서 고개를 돌렸다. 여전한 밝은 웃음이었다.
 
 
"친구야가 이온 음료를 좋아할까요?"
 
 
 
*
 
 
 
"친구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년은 부스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옆으로 돌아누운 소년의 앞에 누군가 쪼그려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린 시야에 소년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친구야, 이온 음료 좋아해? 아무 것도 안 먹고 그러면 큰일 나!"
 
 
누구더라. 목소리는 귀에 익은데. 옆 침대를 쓰던 사람인가. 맨 처음 잠에서 깨어나 반쯤 발작하던 제 목소리 사이로 들리던, 다급하게 저를 진정시키려던 목소리다. 소년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랴.
 
 
"친구야, 이온 음료 싫어해? 밥 다 남겼잖아, 친구야. 이거 마시고 또 자!"
"......"
"친구야, 내 이름은 알아? 이거 진짜 안 마셔? 그러다 쓰러지고ㅡ"
"시끄러우니까 좀 닥치고 꺼져."
 
 
제 답 없이도 한참을 혼자 조잘대는 그에, 결국 입을 열어 쏘아붙였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로 잘까, 하던 찰나에 옆에서 들려온 난데없는 웃음소리가 다시 소년을 깨웠다. 소년은 도로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제 겨우 목소리 들려주네. 친구야, 말할 기운은 좀 났어?"
"......"
"말할 기운이 있으면 이제 삼킬 기운도 생길 거야. 잠도 기운이 있어야 자는 거 모르지, 친구야?"
 
 
환한 웃음. 마냥 밝기만 한 미소, 아아. 그래, 저것은 소년이 마지막으로 잡았던 그 미소였다. 마냥 맑은, 마지막을 밝히는 그ㅡ. 소년은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 결국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짧게 웃으며 들고 있던 이온 음료 캔을 건네주었다. 소년은 말없이 그가 건네준 캔을 받아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에, 곧 쏟겠다 싶어 캔을 금세 입가로 가져갔다. 잘 보니 캔에 하얀 빨대 하나가 꽂혀있었다. 철저하게도 준비했다 싶어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렇지만 며칠이나 지났다고 웃음이 지어질까봐. 소년은 빨대를 입에 물었다. 몇 번 무언가를 삼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세 빈 공기를 빨아올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소년에게서 빈 캔을 다시 건네받고는 여전한 미소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착한 친구야네. 이제 다시 코야할거야?"
"......아니."
"화장실이라도 갈래? 도와줄까?"
"대답이나 해 봐. 내가 정신 든 지 며칠 째냐."
"오늘이 삼일 째야, 친구야!"
 
 
그의 말에 소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만 더. 네 이름."
"나?"
 
 
조금 망설이는 듯 도륵 시선을 옮기던 그가 결국 소년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름답고도 위태로운 미소였다. 잡으면 금세 사라져버릴 것 같은 빛. 빛이 한 마디를 읊었다.

 
"유온이야, 친구야. 서유온."
 
 
 
*
 
 
 
삼 일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던 소년은, 다음 날부터 조금씩이나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도 감았고, 병원을 돌아다니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기도 했다. 사실 그가 옆에서 소년을 도와준 것이 더 컸다. 식사를 도와준다며 죽 한 그릇을 결국 다 먹인다던가. 가만히 있으면 찝찝할 거라며 소년의 머리를 감겨준 것도 그였다. 움직여야 기운이 돈다며 소년을 데리고 병원을 한 바퀴 돈 것도, 텔레비전 앞에 소년을 앉히고 뉴스를 같이 본 것도 모두 그였다. 소년은 매번 귀찮다며 그를 밀어내다가도, 시무룩해진 그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그의 말을 전부 들어주고는 했다. 얼핏 보기에는, 소년은 정말로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친구야, 기운 없지? 책 읽어줄까?"
 
 
그렇지만 그는 어쩐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이 괜찮지 않다는 그 사실 하나를. 소년은 아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그를 위해서라는 것처럼 그는 소년의 곁에 머물렀다. 소년이 그를 밀어내려 손을 뻗으면 그는 오히려 그 손을 잡아주며 웃어주었다. 소년이 말 한 마디 없을 때에도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혼자 이야기를 이어갔다. 소년이 잠에 들 때에 잘 자라며 이불을 덮어주는 것도 그였다. 오늘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복도를 같이 걸어가던 그가 소년에게 고개를 슬 기울였다. 소년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까 간호사 누나가 뭐라고 했길래 이렇게 기운이 없어, 친구야."
"그냥 놔 둬."
"한참 얘기하길래 지쳤나 해서......"
 
 
그래, 그 질문이 정답이었다. 확실히 소년은 지쳐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택했던 이상 주변에서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방금도 간호사가 찾아와 상담을 받아야 한다며 한참 말다툼을 하고 간 참이었다. 그렇지만 직시하고 싶지 않다고. 이런 현실 같은 것. 소년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나 했더니 그대로 걸음이 멈추었다. 제 생각에 빠졌었는지, 소년에게서 몇 걸음이 더 멀어지고 나서야 그가 자리에 멈추어섰다. 그가 느리게 몸을 돌렸다. 소년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는 말없이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친구야, 간호사 누나가 상담받으라고 했지."
"......"
"우리끼리는 솔직해지기로 하자. 어때?"
"......어."
 
 
소년이 느리게 입을 뗐다. 어느 질문에건 그리 무리가 되지 않을 대답이었다. 그가 부드러이 웃음을 지었다.
 
 
"싫으면 안 해도 돼."
"......"
"억지로 시키는 거 아니야. 친구야가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런데, 그러면, 음...... 조금 힘들어질 지도 몰라. 친구야가."
"안 힘들어."
"우리 솔직해지기로 했잖아. 거짓말하면 안 돼."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데."
 
 
소년의 심장에 몰아치는 소용돌이. 다시 포기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빛은 항상 제가 어둠인 줄로만 알고 있다 했다. 소년 또한 다르지 않았다. 무너진 조각을 하나하나 다시 쌓아올리면서, 삶에 대한 동경을 도로 소유해도 괜찮은지. 그를 다시 소유할 자신이, 그렇게 해도 괜찮은지 확신이 없었다. 누군가 제게 그를 쥐여주며 괜찮다, 그렇게 한 마디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소년은 차라리 제가 수동적인 빛이 되기를 원했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던 따뜻함이기에 더욱 차가웠다는 말이, 유독 이해하기 쉬웠다. 소년을 지켜보던 그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다시 소년의 손을 쥔 그가 질리지도 않을 웃음을 지었다.
 
 
"친구야, 우리 잠깐 쉬어갈까?"
"......어디서."
"어디든 친구야가 쉬고 싶은 곳에서."
"쉬면서는. 뭐 할 건데."
"그러게, 잠을 자나......"
 
 
그가 부드러이 웃었다. 차라리 부서진 조각은 영원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힘들지만 않으면 돼."
"......"
"지쳤으면 조금만 쉬었다 가자. 나도 다리 아파, 친구야."
"......"
"할 수 있지?"
 
 
소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는 항상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의 따뜻함, 그것만 있다면 저는 얼마든지 괜찮을 수 있었다. 그래, 이번에는 네가 그 따스함을 줘. 무너져내린 어린 생명에게 한 순간만 빛을 내려줘. 그 흔한 동정이라 해도 좋았다. 소년은 그만큼이나 절박했다. 살려달라는 그 작은 몸부림을 네가 이해한다면. 잠시라도 좋으니, 제발. 소년이 시큰해지는 눈가를 무시하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제게 내려준 허락인 것 마냥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
 
 
 
소년은 여전히 제 아픔을 감당하지 못 하는 듯 흔들렸다. 그렇지만 그 진폭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점차 사그라드는 시계추의 움직임. 언젠가는 그도 멈출 때가 있을 거라고, 그는 가끔 그리 말했다. 소년은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버리려 했으나 다시 주어진 삶.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그는 다를 것이 없겠지. 그는 어떻게 버텼을까, 이 곳에서. 그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려나, 소년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야."
"응, 친구야."
"너는 왜 여기에 있냐."
"나? 어...... 아파서?"
"치료받는 것도 없잖냐. 약 먹는 게 고작이면서."
"친구야, 혹시 스토커야?"
"얻어맞고 싶지."
"아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네가 제일 멀쩡해 보이던데. 요양 왔냐."
 
 
소년의 말에, 그는 느릿하게 눈을 몇 번 끔벅이다 곧 옅게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저것은 웃음이 아니다. 명백한, 울음이다.
 
 
"아니, 나는, 죽으려고. 죽으려고 왔어, 친구야."
"......무슨 소리야."
"한 달."
"한 달이 왜."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죽는대, 친구야. 오래 살면 한 달이래."
 
 
소년이 입을 연 것이 무색했다. 소년이 아무 말이 없자 도리어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인가, 울음인가.
 
 
"뭐가 그렇게 심각해, 친구야!"
"그러면 내가 웃어야 되냐?"
"웃어야지, 그럼!"
 
 
소년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제 앞에 뻔히 앉아있는 주제에 얼마 안 있으면 죽어? 이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이건, 그래. 이건 불공평하다. 소년의 생각을 갈라내기라도 하듯이 그가 나지막히 소년을 불렀다.
 
 
"시하 친구야."
"왜."
"있잖아, 지금은 내가 이렇게 친구야랑 얘기하고 있지만, 혹시나 말이야. 내가 친구야도 못 알아보고, 움직이지도 못 하고, 헛소리도 막 하고...... 그럴 수도 있어."
"......"
"그래도 나 모른 척하면 안 돼? 주사 맞고 나면 또 친구야한테 웃어줄 수 있으니까...... 막 헛소리 하고 그래도, 나중에 나 싫어하면 안 돼?"
"......"
"약속해주라. 나중에도 나하고, 그렇게 놀기로."
"......그래, 약속할게."
 
 
그의 말에 서린 서글픔. 그것이 너무도 익숙해서. 소년은 결코 쉽게 하지 않겠다 다짐하던 약속을, 그에게 하나 내주었다.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데도, 제게 기꺼이 그 시간을 내어주기로 한 그 때문에. 소년의 말에, 그는 정말 기쁘다는 듯이 밝게 웃었다. 소년은...... 그래, 소년은. 차라리 그가 울기를 바랐다.
 
 
 
*
 
 
 
"그건 대체 무슨 책이냐."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소년이 그의 옆에서 그의 손에 들린 책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아까까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웬 일로 먼저 말을 걸어주지,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머릿속에 어제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사람의 죽음이 역시 쉬운 것은 아닌가보다. 그가 쓰게 웃었다.
 
 
"소네트라고 알아, 친구야?"
"생긴 거 보니 시 같은데."
"비슷한 거야! 이건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이 쓴 소네트를 모아놓은 책이야."
"시집 같은 거네."
"그렇지, 되게 재미있어, 친구야도 볼래?"
"시집은 재미 없어서 안 봐."
 
 
그렇게 말한 소년이 그의 옆으로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그가 옅게 웃음을 지었다.
 
 
"한 구절 읽어줄까?"
"그러게 관심 없ㅡ"
"들어둬서 안 좋은 거 없다?"
 
 
소년이 투덜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마저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툭, 소년의 옆으로 책 하나가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책이었다.
 
 
"......야."
"......아, 친구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옆으로 휙 기울었다. 놀란 소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콰당탕,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년이 간신히 그를 받아 안았다. 그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야, 정신 차려봐. 왜, 왜 이래. 약 안 먹었어?"
"......저기......"
"저기? 저기 왜. 갑자기 왜 이러는데!"
"......약통......"
 
 
그를 끌어안은 채 시선만을 돌려 그가 쓰던 서랍장 위를 훑어보자, 익숙한 푸른 약통 하나가 보였다. 소년이 우악스럽게 약통을 잡아채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붉은 빛을 띠는 작은 알약들이 수를 알 수 없게 들어있었다.
 
 
"입 벌려. 입 벌려, 빨리!"
 
 
소년이 마구 손에 알약을 털어냈다. 슬슬 거친 숨을 뱉으며 고통에 찬 소리를 내뱉는 그가,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버릴 것 같아서. 조금만 더 곁에 머무르라고,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지금 떠나지 말라고. 바들바들 떨리는 소년의 손이, 알약을 쥐어 그의 입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옆에 있던 물컵을 쥐어 그의 입가까지 대주는 것마저 손이 떨려 간신히 해냈다. 그가 약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년의 손을 떠난 물컵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마저 제게서 떨어져나가 산산조각날까, 소년은 그를 더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통에 찬 낮은 비명이 소년의 심장을, 고막을 부수고. 제발, 사라지지 마. 떠나지 마.
 
그가 고른 숨소리를 내쉬며 잠이 든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때까지도 소년은 그를 안은 손을 놓지 못 했다. 제 품에 머리를 기대고는 한잠이 든 그를 침대에 눕히면서도, 고통을 견디다 못해 제 옷자락을 거머쥔 그의 손을 떼어내면서도. 숨소리마저도 고통에 차 있는 것 같아서. 항상 제게 웃음만을 보이던 그는. 넘어져버린 의자를 똑바로 세워 소년은 자리에 앉아 옆에 떨어진 그의 책을 주워들었다. 펼쳐진 곳에는 19라는 숫자와, 시 한 구절이. 시가 아니라 소네트라 했던가.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소년이 느리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두어라. 후세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비록, 낡은 세월이여, 네가 죄를 범하더라도 나의 사랑은 나의 시 속에서 젊어 영원하리라...... 그래, 사랑 말인가. 길을 가는 것 말인가. 너는 충분히 아름다움의 표본이야. 그러니 그만 걸어도 돼.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말아달라고. 젊어 영원함을 가지라고, 차라리. 그의 옆에서 소년은 말없이 그의 손을 쥐었다. 미지근하다. 왠지 모르게 서러웠다. 우리는, 한 번이면 되었는데, 한 명만이었으면. 어쩌다 재수 없게 우리는 둘이나 되어서. 소년의 손이 기도하듯 포개어졌다. 그의 손을 쥔 채로 소년은 말이 없었다. 네 손이 뜨겁지 않아 눈물이 났다. 그래, 단지 그것뿐이었다.
 
 
 
*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어째 한 시간 시간이 지날 때마다 무너져가는 듯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 했고, 걸음을 옮기다말고 넘어져 혼자 일어나지 못 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웃으려고 그렇게나 애를 썼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감히 무너져내릴 자신이 없었다. 소년은 식사 때마다 그의 옆에서 밥을 떠먹여주거나, 그를 휠체어에 앉혀 병원을 산책하거나, 텔레비전 앞에서 그와 같이 앉아있기도 했다. 소년은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나는 그래도 되게, 드문드문 아픈 편이래. 말기 환자들은 다 침대에서만 산다던데, 나는 며칠 건너서 며칠만 아프고......"
"그래서 다행이라는 식으로 얘기하지 마라. 정말 다행인 새끼들은 아예 건강하게 태어나니까."
 
 
평소보다 배는 느릿하게 말을 잇는 그 사이로, 소년이 제 말을 먼저 쏟아버렸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소년은 차라리 그가 운명을 저주하고 원망하기라도 했으면 좋았다. 차라리 울었으면 좋았다. 아무렇지 않아 하는 그의 웃음이 짜증났다. 그렇지만 그는 또 다시 웃었다. 그것이 제 전부라는 양. 곧 꺼질 것을 아는 촛불 마냥. 서글픔이 울분이 될 것 같아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어, 아저씨, 또 오셨네요."
"뭐?"
 
 
여전한 웃음, 여전한 목소리, 여전한 눈동자. 그는 여전히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뭐? 소년은 왠지 모를 오싹한 느낌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때리려고요? 그러다 정말 동생들이 알아채요."
"......"
"안 보일만한 곳에만 해주세요. 아, 하지 마, 아파......"
"......야."
"아, 아파봤자지. 맞아, 상관없겠다. 저 어차피 일찍 죽는댔거든요."
"야, 너ㅡ"
"그냥 지금 죽을까요? 아저씨, 하던 도중에 목 조르는 거 좋아한ㅡ"
"서유온!"
 
 
텅 빈 병원의 복도. 그 가운데에 서서 웃음 짓는. 아니, 울고 있는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거렸다. 소년이 다급하게 그를 붙잡고. 아아, 그가 웃었다. 높다란 웃음소리가 미친 듯이 복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하, 재미있죠, 아저씨! 저 이제 죽는대요!"
"서유온, 서유온!"
"저 죽는대요! 아하하, 죽는대! 그렇게 살고 싶어서 별 짓을 다 했는데!"
"정신 차려, 야!"
"저 죽어요? 죽어? 왜? 그러면 나는 왜 살았는데?"
"서유온, 정신 좀 차려......"
"차라리 그 때 죽여주지. 왜 살렸어요? 나 왜 살았어? 이럴 거면서?"
"제발, 서유온, 제발......"
 
 
미친 듯이 올라가는 목소리. 그리고 한없이 무너지는 목소리. 힘없이 비척이는 그의 마른 몸을 끌어안고, 소년은 입술을 터뜨릴 듯이 깨물었다. 나 보고는 괜찮을 거라며. 살아달라며. 그런데 너는 왜 죽고 싶다고 말 해. 아니잖아. 너 죽고 싶은 거 아니잖아. 왜 거짓말 해, 왜. 결국 그의 무릎이 꺾이고, 그가 자리에 반쯤 주저앉았다. 소년보다 한참은 큰 키의 그였기에, 소년은 그를 겨우 안아 쓰러지는 것만을 막고 있었다. 미친 듯이 올라가던 목소리는 어느 새엔가 멎어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나 왜 살았을까. 그 때 그냥 죽게 놔두지."
"......서유온."
"아빠 보고 싶다. 엄마도, 가현이도, 찬들이도 보고 싶다."
"......"
"나 이제 죽는대. 그렇게 살려고 했었는데...... 다 쓸모없어졌네. 나 죽잖아."
"......"
"나 죽으면...... 누가 아주 많이 울어줬으면 좋겠다."
"......서유온, 제발,"
"아주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그가 쓰러지는 걸 억지로 막고 있느라 소년에게 더는 빈손이 없었다. 다만 입술만을 꾹 깨물었다. 혹시나 소리라도 새어나갈까봐, 피도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혹시나 제 소리를 듣고 그가 고개를 들면, 그 감당 못할 제 슬픔은 돌보지도 않는 주제에, 또 저를 달래줄까봐. 착해빠진 너니까. 그렇잖아, 지금까지 얘기 한 마디 하지 않던 소리들이, 제정신이 아닐 때에야 새어나오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어, 대체. 우리는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나 큰 잘못이었을까. 죽어 마땅한 죄였을까. 그를 끌어안은 손이 희미한 떨림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소년은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소년의 턱 끝에 매달린 방울이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감은 그의 두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살자, 우리. 무너지지 말고, 떠나지 말고. 기억해달라는 말은 너무도 슬펐다. 언젠가는 잊힐 것을 가정으로 해야만 가능한 말이었으니. 소년은 그를 끌어안았다. 차라리 빌고 싶었다. 영원을 가지고 싶었다.
 
 
 
*
 
 
 
며칠 동안 아프면 며칠 동안은 또 괜찮다더니, 그 말이 아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삼일을 그렇게 내리 앓더니, 그는 또 그 웃는 얼굴로 멀쩡하게 주변을 걸어다녔다. 그가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소년은 하마터면 식판을 그의 얼굴에 던져버릴 뻔했다. 그는 여전히 부축을 필요로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가 다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몇 배는 나았다. 소년은 그 며칠 동안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를 안다는 듯이 그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늦가을의 햇살을 감상하듯 그는 가만히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창가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소년은 말없이 이불을 끌어다 그의 무릎을 덮어주었다.
 
 
"어, 오빠?"
 
 
그럴 즈음이었다. 갑자기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자아이 한 명과 남자아이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에 들어오는 모습과 그를 부르는 것이 살 자연스러웠다. 소년이 입을 열 새도 없이 여자아이가 소년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옆에 새로 들어오신 분이신가봐요. 유온이 오빠 동생이에요."
"우리 또래 같은데, 누나? 형은 자?"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길래. 조용히 해라, 깨겠다."
"세상에, 우리 형보다 엄마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했다니......"
"서찬들, 또 등짝이 가렵니? 누나가 긁어줄까?"
"살려만 주십쇼."
 
 
그의 동생들이라더니 그 성격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소년은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는 병실을 나가려 몸을 돌렸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려던 찰나 그가 결국 일어났는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퍽 반가워하는 목소리여서 소년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소년이 문을 닫았다. 그들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
 
 
 
가을이 한창이었다. 소년은 잔디밭 한가운데에 주저앉아서는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로 비치던 붉은 노을은 생각보다 한참은 붉었다. 언젠가 그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노을이 왜 붉은지 알아? 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타오르는 거야. 마지막 빛을 다 하고 지려고 그렇게 붉은 거야, 친구야. 나는 그래서 노을을 보고 있는 게 좋아. 안간힘을 쓰고 있잖아. 누군가는 봐줘야지. 아니, 소년에게 노을이 붉은 이유는 고작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피를 내어 타오르기에. 그렇기에 붉고, 그렇기에 마지막임을 아는 거라고. 그래서 차라리 노을은 그의 빛이었다. 저를 마지막으로 태워 빛나는, 네 빛이다. 소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붉음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바스락,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들려오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읏차,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리고, 그가 소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생들이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의 옅은 눈이 노을빛을 받아 붉은 색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은 잠시 그렇게 말이 없었다.
 
 
"친구야."
"어."
"이거 비밀인데, 친구야한테만 말해주는 거야."
"그래."
 
 
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가라앉던 눈동자가 사라지고 그의 옅은 목소리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고요했다.
 
 
"나는 사실, 살고 싶었어."
"......"
"되게 많이...... 살고 싶었어."
"......"
"그래도 이거 비밀이야, 친구야. 내가 많이 살고 싶었다는 거...... 비밀이야."
"......그래, 비밀이야."
 
 
그래, 우리는 결코 단 한 순간도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손에 넣어보려 애쓰던 그것은, 우리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만 있다면 내 빈 손에 남은 모든 것마저 네게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너는, 그 때. 그 곳에 없을 거잖아. 시간이 무거웠다. 볼을 스쳐지나가는 늦가을 바람에 흘러 담긴 시간이, 너무 무겁다. 소년이 나직하게 입을 뗐다.
 
 
"바람 차다. 들어가자."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으켜 세워달라는 듯 소년에게로 팔을 뻗었다. 전에는 한 번도 부려본 적 없는 어리광이었다. 소년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밝게 웃었다. 소년은 노을을 다시는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
 
 
 
동생들을 보기 위해 그의 몸은 잠시 기한을 얻었을 뿐이었던 듯. 그는 그 날 이후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고통에 신음하는 횟수가 잦아졌고, 제 몸을 가누지 못해 돌아눕는 것 하나 하지를 못 했다. 입으로 무언가를 씹어 넘기는 것도 힘들어, 그는 하루 종일 수액을 맞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렇게나 웃으려고. 입을 여는 것도 힘겨워하면서, 어떻게든 누군가를 보면 웃어주려고. 소년은 그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감히 울 수가 없어 웃었다. 약해지는 몸에 그는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 그래도 소년은 그의 옆을 지켰다. 식사 때에는 그의 옆에서 밥을 먹었고, 병원도 한 바퀴 돌았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기도 했다. 그가 좋아하는 셰익스피어 소네트집을 들여다보거나, 창가에 앉아 밖을 보거나, 노을이 지는 하늘의 바람에 창문을 열어두기도 했다. 가끔 그가 정신이 들어 부스럭거리면 말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그가 웃으면 마주 웃어주었다. 그가 다시 잠이 들면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그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소년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어떻게든 그를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는데도. 그가 제 손을 잡아줄 수 없다는 것에 그가 더 슬퍼할까봐. 차라리 혼자 슬퍼하려고.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몇 번이나 보았던 그의 소네트집이었다. 그가 항상 창가에 기대 노을 빛을 등 뒤로 받으며 책을 넘기던 모습이 눈에 선해서. 혹시나 제가 그 모습을 잊기라도 할까봐. 오래 기억해주기로 했는데 잊어버릴까봐. 소년이 그의 서랍장 위에 책을 도로 올려두었다. 문득 창문이 열려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문을 닫아야겠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서 옆의 창문을 닫았다. 드르륵.
 
 
"......친구야?"
"아, 미안. 깼냐."
"응...... 아니야, 그냥 깼어."
 
 
그가 부스스 눈을 뜨고는 아직 졸음이 그득한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가 부드러이 웃음을 지었다. 소년도 옅게 마주 웃었다.
 
 
"나 꿈 꿨어, 친구야."
"무슨 꿈 꿨는데."
"친구야가, 나 가지 말라고 막 울길래, 친구야 달래주는 꿈 꿨어."
"......개꿈이네."
 
 
소년의 말에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소년이 이불을 끌어올려 다시 그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밤이다. 늦었어, 얼른 더 자."
"자다가 깼는데 또 코야할 시간이야?"
"그러니까 다시 자."
"친구야는 안 자?"
"너 자는 거 보고."
 
 
소년이 도로 그의 옆에 앉았다. 그의 옅은 눈동자가 저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말없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내 그가 웃었다.
 
 
"친구야."
"왜."
"내가 떠나는 게 슬퍼?"
"......아니."
"응, 다행이다...... 안 슬퍼서."
 
 
그의 웃음에, 소년이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는 소년의 거짓말을 알아챘고, 소년은 그의 거짓말을 알아챘다. 그래, 우리 잠시만 거짓말하기로 하자.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앞으로도 슬프지 말고, 친구야."
"그래."
"많이, 웃어야 돼?"
"......"
"울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그렇게."
"......"
"행복해야 돼?"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에 소년은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 일 없잖아, 갑자기 왜 이러지. 네가 잠들면 나는 또 이불을 정리해줄거고. 또 책을 뒤적이다. 또 잠이 들 텐데. 그러면 또 내일이 올 거고. 우리는 내일, 또......

행복, 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을 내일에서, 나는.
 
 
"......그럴게."
 
 
소년이 웃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웃었다. 그 또한 웃었다. 맑게 웃었다. 알잖아. 우리는 우리로 충분하다. 더 이상 생길 비극을, 우리는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나는 이 곳에서 지더라도, 친구야. 너는 나처럼 슬프게 지지는 말아. 비극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 이상의 눈물을, 우리는 결코 원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시하 친구야."
"그래."
"나 다시 잘 거야."
"그래, 밤이니까 자야지."
"오래...... 잘 지도 몰라."
"......많이 졸린가보다. 피곤하면 자야지."
"응, 맞아...... 나 잘 때까지만 손 잡아주라, 친구야.“
 
 
그의 말에 소년이 말없이 그의 손을 제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아, 이번에는. 차라리 미지근하지도 않아. 차가워. 네 손이 너무 시리다. 소년은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그가 웃고 있었다. 소년은 혹여나 제 울음이 새어나갈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친구야, 나 잘 때까지 자장자장도 해주라."
"바라는 것도 많네."
"응, 왠지 오늘은 어리광 부리고 싶어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소년이 한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토닥여주었다. 아아, 너무도 작은 박동이 손에 전해져서. 그 작은 박동이 얼마나 따뜻했던지 소년은 하마터면 그대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저를 다독이는 소년의 손길에 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시하 친구야."
"왜."
"고마워......"
"......그래."
"응, 잘 자......"
"......잘 자."
"잘 자, 친구야......"
 
 
평소처럼 그가 밤인사를 건넸다. 소년은 그의 손을 다시 고쳐 쥐었다. 왜 이렇게 손이 차냐. 따뜻하게 해줘야겠다, 춥지 않게. 토닥토닥, 구원받았던 인간이, 싸늘한 구원자의 손을 쥐고. 깨지 않을 잠에 든 그를 위한 자장가마저도 잠에 들게 하려고. 고요한 잠의 시간이 그의 온기를 잠식할 즈음 소년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서유온."
"......"
"자냐."
"......"
"그래...... 자는구나."
"......"
"좋은 꿈꾸고. 푹 자고. 중간에 아파서 깨지 말고. 이불 걷어차서 감기 걸리지 말고."
"......"
"잘 자...... 잘 자."
"......"
"......"
"......"
"......서유온."
"......"
"......가지 마."
 
 
그가 눈을 감고서야 소년은 그의 손을 쥐고 고해할 수 있었다. 가지 마, 제발. 더 이상 혼자이고 싶지 않다고. 저를 일으켜 세워둔 주제에, 왜 정작 저 자신은 스러져버리냐고. 내일은, 서유온. 너 여기에 없냐. 어디로 갔길래 없냐. 하늘로 돌아갔냐, 혼자. 나는 어떻게 행복해져야 하냐. 겨우 잡았던 인연이 이렇게 사라지면, 나는 대체 어떻게. 네 손은 이렇게 차가운 주제에. 쏟아지는 설움에 막힌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가지 마. 소년은 그가 영영 잠들고 나서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가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분명 슬퍼했을 것을 알아서. 혹시나 편히 눈도 감지 못 할까봐. 설움을 게워내느라 막힌 숨이 거칠었다.

소년은 시리게도 울었다. 이미 제 소리를 듣지 못 하는 그의 차가운 손을 쥐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가 혹시나 다시 잠에서 깨어 저를 달래주기라도 할까봐, 소리조차 내지 못 한 채로 서럽게. 가지 마, 제발.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저는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였다. 여전히 저를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여전히 살기를 바랐다. 그러니 네가 나를 잡아줘야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일어서고, 네 손을 잡아 이렇게까지 왔단 말인가. 네가 이렇게 떠나버리면, 나는. 소년의 울음은 밤이 깊도록 잦아들지 않았다. 노을이 잠식당했다.
 
 
 
*
 
 
 
바스락, 이불을 정리하는 손길이 분주함을 띠고. 얼추 정리가 다 된 듯하자 소년은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침대를 한 번 둘러보던 소년은 몸을 틀어 그 옆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지는 노을에 비친 침대가 온통 붉었다. 소년은 말없이 빈 침대를 응시하다 손을 들어 괜히 만질 곳 하나 없는 이불을 정리했다. 그의 흔적은 이제 하나도 없었다. 몇 시간 전까지 그가 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세상에 무언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죽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쓸쓸했다. 노을빛에 비친 소년의 눈가가 붉었다.
 
 
"야. 나 병원 나간다. 다시 안 올 거야, 그냥 도망가는 거야."
 
 
잘했지, 나. 소년이 이불을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그 손에 닿았던 붉음이 사라져 내렸다. 소년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입가에서 단어가, 쓸쓸함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이제 너도 아프지 말고. 내가, 기도할게. 내가 많이 울어줄게. 오랫동안 기억해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도 행복해야 돼. 이건 내가 내주는 숙제야. 한 오십년 뒤에 확인하러 갈 테니까 꼬박꼬박 해 놔, 알았지. 소년이 옅게 웃었다.
 
 
"좋은 꿈꾸고. 울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해야 돼."
 
 
소년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붉은 노을 빛이 그의 눈꺼풀 위를 쓸어내렸다. 나는 죽기 위해 살았다. 그렇다면 너는 살기 위해 죽었는가. 그래, 너는. 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살기 위해 죽은 너를, 나는 영원을 감히 붙잡아 기억하겠다고. 이 고요한 붉음.
 
 
"잘 자, 서유온."
 
 
고요했다. 처음부터 이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저 노을만이 지고 있었다. 아아, 그 붉음에 죽을 것 같았다.







이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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