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by 로현 posted Jun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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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우리 집은 어느 쪽에 속하냐고 굳이 묻는다면 돈에 여유가 있는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누구든 들으면 알 수 있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이셨고 어머니도 집에서 취미생활을 즐기며 여유가 넘치는 삶을 살고 계시는 전업주부셨다. 어릴 적부터 내 눈에 비쳐진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한 치의 그을림 조차 없는 이상적인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었고 그런 환상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당연한 것은 없었다. 불행은 너무 많은 걸 가진 자를 시기라도 하듯이 중학교 입학을 앞둔 2월 아버지의 회사는 부도가 났고 결국 우리 집은 15평짜리 전셋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돈이 없어지자 너무나 쉽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집을 나가버렸다. 당시 나의 나이는 14살이었고 이혼이라는 충격을 받아드리기에는 너무나 여리고 어린 나이였다. 어머니와 이혼 후 아버지는 택시 기사로 일하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비하기에 빠듯했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기뻐 할 수 있도록 공부를 죽기 살기로 했다. 전교 1등이라 적혀있는 성적표를 보는 그 날만이 아버지가 유일하게 해맑게 웃는 날이었다. 아버지에게는 1등이라고 적혀있는 그 종이는 유일한 삶의 희망이자 동아줄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새벽에 대리운전으로 나가셨다. 나의 대학등록금을 모으시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새벽에 대리운전을 하시자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 일이 적었다. 낮에는 택시기사 잠깐 택시에서 잠을 자고 새벽부터 대리운전 다시 아침에는 택시기사 그런 일상을 3년을 반복하셨다. 3의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어버렸는데 눈을 떠보니 집에 아버지가 들어와 계셨다. 2년 만에 본 아버지의 모습은 폭삭 늙은 나약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라면에 소주를 드시며 울고 계셨다.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한 후회인지 아니면 과거의 영광에 대한 후회 인지 어떤 것에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건 너무나도 아버지의 모습은 처량해보였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의 아버지에게 나는 다가가지 못한 체 그저 문 뒤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지금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하던 아버지도 나도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버지를 동정하는 것에 대한 자기혐오일까? 어째 되었든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켜보는 것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사랑합니다.” 라는 말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명문대에 입학을 했다. 죽기 살기로 공부했던 만큼 전액장학금도 받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새벽에 대리운전을 했다. 그런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꼈던 나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반항 아닌 반항을 했다.

아버지 이젠 그만 대리운전을 하세요. 대학등록금은 제가 공부해서 장학금으로 다니면 되요. 그러니깐 이젠 새벽에 일을 나가세요.”

나의 말에 아버지는 웃으시며 말을 하셨다.

괜찮아 돈을 많이 벌어야지 너희 엄마도 돌아오지

어머니이라는 말에 나는 그만 아버지에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축척된 분노였다. 돈이 떨어지자 나의 곁에서 떠나버린 여자. 나에게 비쳐진 어머니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직도 아버지가 그런 여자를 잊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나의 이성의 끈을 놓게 하였다.

그딴 여자 어머니라고 부를 자격도 이유도 없어요. 아버지 돈만보고 들어온 기생충 같은 여자잖아요.”

광수야 어머니를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래도 너희 엄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다 내 잘못이야.”

아버지가 한 없이 나약해 보였다. 아직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사시고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 아버지가 7년의 시간동안 그렇게 열심히 사셨던 이유는 자신이 마음속에 묶어 둔 죄의 참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말다툼이 있고 나서 언제부터인가 집에 들어가는 일이 적어졌다. 잠은 친구 집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시작했고 생활비는 과외 같은 것을 하며 충당했다. 그렇게 1년을 아버지와 담을 쌓으며 살아왔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아버지와의 일로 마음 한 구석에 죄의식이 나를 고통스럽게 조여 왔다. 그렇게 죄의식에 못 이겨 몇 번을 집 앞까지 왔지만 다시 돌아갔다. 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그 두 마디만 하면 될 것을 하지 못해 몇 번이나 씁쓸한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와 싸운 뒤 6개월이 흘렀다. 더 이상 나는 집을 찾아가는 일은 없어졌다. 명문대에 다니는 나에게 부족한건 없었다. 돈은 과외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잠은 자취하는 여자 후배들의 자취방에서 해결했다. 처음에는 여자후배와 사랑을 나누는 일에서 결핍된 애정을 채웠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고 헤어지는 여자 후배들은 언제나 같은 말을 하며 헤어졌다.

선배는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사시네요. 저는 대용품인가요? 선배의 결핍된 애정을 채우기 위한 인형. 그뿐인가요?”

어째서 일까 사랑을 줬는데 진심을 100% 줬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들은 항상 떠나간다. 마치 나의 어머니처럼............ 여자는 믿을 수 없어......

대학생 3학년이 될 때 까지 수많은 여자와 사귀었다. 그렇지만 1달도 안되어 헤어지고 그것을 계속 반복했다. 있을 곳이 없어지면 다시 여자를 만들어 여자의 집에서 살았다.

대학교 3학년이 되자 나는 학교에 창 남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소문은 어느새 학부모의 귀에도 들어가고 결국 하던 과외는 그만두게 되었다. 상관없었다. 모아둔 돈은 꽤 있었고 고시원이든 어디든 들어가서 살면 그만이니깐.

고시원을 들어가 3개월쯤 살았을까. 영장이 날아와 군대에 입대했다. 훈련소 수료식날 다른 훈련병들은 부모님이 이등병 계급장을 붙여주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 한 조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부모님이 아직 안 오셨나보네 곧 올 거야

조교의 말에 나는 씁쓸한 표정과 한숨 섞인 말투로 말을 하며 이등병 계급장을 스스로 붙였다.

저희 부모님은 안계십니다.”

아직도 아버지의 일에 미련을 못 버려서 일까? 조교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을 갈기 갈기 찢기는 고통이 느껴졌다. 잊지 못 할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나를 덮쳐 왔다.

자대 배치 후 중대장과 면담을 했다. 중대장은 나의 생활기록부를 보더니 몇 가지 물어 봤다.

여기 아버지 번호가 왜 없니 아버지에게 전화 걸어 줄 테니 번호 좀 불러봐

제게 아버지는 없습니다.”

나의 말에 중대장은 생활기록부를 다시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했다.

기록부 상엔 살아계시는 걸로 되어있는데?”

저는 아버지와 연락 안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은 이젠 없습니다.”

중대장은 나에 말에 잠깐 고민을 하더니 걱정되는 얼굴로 말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아버지잖아? 강요는 안하겠지만 아버지를 만나 보는 것이 어떻겠니? 아버지도 너를 보고 싶어 할 거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중대장은 내가 상병이 될 때까지 끝임 없이 설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와 만나지 않겠다고 확고한 의지를 표현했고 결국 상병을 달고 중대장은 포기 했다. 다만 상병 진급 식 날 중대장은 나에게 한마디를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만나게 해 줄 테니깐

하지만 전역을 할 때 까지 나는 중대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아니 못 찾아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아버지와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다짐한 결심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언제나 현실에서 도망 다녔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 아직도 아버지와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 주제에 자신은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익숙해져 언제나 자신을 기만하며 살았다.

아버지와의 일을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는 것에 매달렸다. 죽기 살기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신을 기만하며 자신을 연기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나의 옆에는 아내와 자식이 생겼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생기고부터 마음이 조금 편안해 졌다. 마음 한구석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은 조금씩 작아졌고 그렇게 살다보니 아버지를 조금씩 잊기 시작했다.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을 입학한 뒤로 부터는 삶에 찌들어 아버지는 이미 마음에 떠 난지 오래였다.

아빠 나 전교 1등 했어

아들이 중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성적표를 들고 왔다. 아들의 기대에 찬 얼굴. 그것은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라는 얼굴과 함께 내 웃음을 기대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마치 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그것처럼........

아들의 모습에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자신의 모습과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도 아버지의 웃음을 보기 위해 공부했던 적이 있었지........’

나는 언제부터인가 웃질 않았다. 현실에 치이고 여러 가지 고민 속에 살다보니 웃음이란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아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웃길 바라면서 1등 성적표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난 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환한 아버지의 미소를 보여줬다.

나의 아버지도 그랬을까?............

아버지가 웃은 것도 나와 같은 미소였을까? 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미소.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던 것일까?

지나가 버린 과거의 조각들을 돌아보며 아들과 아내와 함께 외식을 했다.

IMF가 터졌다. 그리고 회사는 대량의 정리해고를 했고 그 해고 목록에는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흐흐흐흐흐흐허허허

해고 명단을 보며 실성한 사람처럼 그저 헛웃음과 눈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들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집을 살 때 빌린 은행 빛도 상당히 남아 있었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사실대로 말하자. 1달 뒤 이혼 서류와 도장을 들고 왔다. 어릴 적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도 이런 삶을 살았었지...........’

모든 걸 체념한 체 아내가 가져온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한동안 술을 벗 삼아 살았다. 술 없이는 지금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맨 정신을 유지하면 죽어버릴 것 같아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하지만 벗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통장잔액과 비례했다. 통장잔액은 0을 찍었고 술 먹을 돈 조차 없었다. 술을 먹을 돈이 없어지자 술과 멀어졌다. 술과 멀어지니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고 그때부터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보인건 아들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나의 앞에는 시간이 되면 밥상이 놓여있었다. 아들은 새벽에 알바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모든 걸 포기한 자신과 달리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이 집의 가장이 되었던 것이다.

집안의 어린애는 자신이었다. 현실에 무게에 눌려 그저 회피만 하려고 했지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의 방에 들어가자 책상에 성적표가 있었고 책상위에는 가족사진과 함께 포스트잇에 한 줄의 글귀가 써져 있었다.

장학금만이 답이다. 대학은 꼭 졸업하자

그 글을 읽자 수개월의 밀렸던 후회가 나를 덮쳤고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택시 기사가 되었다. 아들에게는 생활비 걱정 말고 공부만 하라고 말했다. 돌아와 보니 나의 인생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택시 기사로 일해 보니 회사를 다닐 때 겪지 못했던 그리고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고통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수많은 진상고객들 그리고 자신의 권위와 직위를 과시하는 사람들.

야 빨리 못 가냐? 이러다가 늦으면 책임질래?”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렇게 말을 해도 나는 그저 웃으면서 죄송하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과거 나도 택시를 탈 때면 이런 식으로 택시기사들을 대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그리고 집에 있는 아들을 떠 올리며 고통을 이겨나갔다.

아들은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들었다. 그 순간 아들도 나도 너무나 기뻤다. 과거 암울했던 과거의 모든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 아들은 과외를 하며 여자 친구와 동거를 시작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택시 기사 일을 마치고 새벽에 집을 들어오면 나를 반겨 주는 것은 차가운 냉기뿐이었다.

술은 언제부터 인가 다시 나와 벗이 되었다. 점차 아버지의 그리움과 아버지가 겪었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하며 나는 죄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울고 울고 또 울고 씻을 수 없는 죄에 이제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그 과거에 후회하며 다시 나는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은 언제나 같은 날이었다. 언제 있는 진상 손님을 도착 장소 까지 태워주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어느 여학생이 택시를 잡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손님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여학생 앞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멈추자 남학생이 나왔다. 남학생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이었다. 아들도 아버지를 보자 멈칫 했지만 그냥 모르는 척을 하며 택시에 앉았다.

아들은 나를 필사적으로 모른 척 했다. 나도 그런 아들을 보며 마음은 편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모른척하며 차를 몰았다. 아들과 여학생의 대화를 들어보니 여학생은 아들의 여자 친구 인 듯 했다. 어째서 일까? 내가 아버지다. 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서 아버지라고 말할 정도의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를 어째서 나는 못하는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아들을 거울을 통해 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저기요

내가 거울로 자꾸 힐끗 힐끗 아들을 쳐다보자 여학생은 화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왜 자꾸 뒤를 그렇게 쳐다봐요? 엄청 기분 나쁘거든요? 안 그래 오빠?”

여학생의 말에 아들은 몇 초 간 말이 없었다. 아들이 말이 없자 여학생은 아들을 격하게 몰아쳤다.

오빠 왜 그래 설마 지금 이 아저씨 편드는 거야? 이 아저씨가 잘못했잖아 자꾸 기분 나쁘게 쳐다 보는게 잘 한 거야? 택시 기사 주제에 분수를 알아야지 어릴 때 막장으로 인생을 살아서 배운게 없으니깐 이런 거나하고 사는거 아니야?”

아들은 결국 여학생의 편에 섰다.

아저씨 왜 그렇게 우릴 쳐다봐요 기분 나쁘게

아들이 나에게 화를 내자 여학생은 만족했다는 듯이 아들에게 애정을 표현했다.

역시 내 편은 오빠 밖에 없어

택시는 도착 지점에 도착했고 아들은 씁쓸하게 요금을 건냈다.

됐어요. 학생 아까는 미안했어요. 그냥 들어가요.”

여학생은 그 말에 좋아 했고 아들의 표정은 어둡게 변해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술을 마시며 한 없이 울었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 집을 나갔던 아들이 그 일이 있고부터 1주일이 지났을까 설렁탕을 포장해서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집을 찾아 왔다.

아버지 그때 죄송했습니다.”

아들은 먼저 사과 했다.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아버지 사실 저는 아버지가 부끄러워요

아들에 말에 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집에 안 들어 왔던 건 지금까지 아버지가 부끄러워서 안 들어 왔어요. 친구들은 아버지가 다 좋은 회사 다니는데 나 혼자 택시 기사를 하고 있고 그걸 애들에게 말하기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나는 잠시 생각을 한 뒤 아들에게 말했다.

그럼 왜 돌아왔니

여자 친구와 헤어졌어요. 사실 그때 아버지가 가시고 사실대로 말했어요. 여자 친구는 질렸다는 듯이 벌레 보는 표정을 지으며 제게 말했어요. 헤어지자고 그때 생각났어요. 내가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별거 아니었구나. 그리고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가 생각났어요. 물론 한때 아버지도 방황을 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키우려고 열심히 살았잖아요. 그런 아버지를 이런 일로 잃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과 하려고 왔어요.”

아들에 말에 나는 아들에게 과거의 자신의 죄를 털어놨다.

아버지 그렇게 후회하면 할아버지를 찾으시면 되잖아요.”

하지만 너무 시간이 지났어.”

시간이 지나면 어때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지도 모르잖아요. 돌아가시고 나서는 늦어요. 속죄도 그리고 화해도 할 수 없어요. 아버지는 더 이상 용서받지 못하게 되는 거라고요.”

아들의 말에 깊은 고뇌에 빠졌다.

수십 년간 방치해놓은 나의 인생의 숙제. 그것을 하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아들은 끝없이 나를 설득했고 결국 아버지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 수 십 년간 연락이 끊어진 아버지의 행적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간 곳은 아버지가 택시기사를 하시던 시절 자주 식사를 하시던 기사식당이었다.

저기 혹시 아버지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다면 아무거나 라도 좋으니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식당주인은 잠깐 수상한 사람처럼 바라봤지만 사정을 설명하니 입을 열었다.

그 양반 여기서 항상 점심을 먹었지 수년간 매일같이 점심을 먹으로 왔어 그때마다 말버릇처럼 말 하는 것이 아들이 명문대 다닌다고 근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면서 그러더라고

식당주인은 잠깐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언가 떠올랐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온 날에 그런 말을 하더만 아들에게 심한 말을 했다고 사과하고 싶다고 다시 보는 날이 생긴다면 미안하다고 꼭 말하고 싶다고.”

식당주인의 말에 나는 눈물이 흘렀고 마음을 헤집는 격한 감정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의 그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나처럼 죄인처럼 살아왔던 건가. 나는 아버지를 죄인으로 만든 쓰레기 같은 멍청한 자식이었다.

자 국밥 니 아버지가 마지막 날 그러더라 만약에 아들이 오면 국밥 한 그릇 내주라고 이미 예전에 국밥 비는 지급하고 가셨어

식당주인은 내게 돼지 국밥 한 그릇을 내놓았다. 조촐하지만 어느 비싼 정식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국밥을 먹으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아버지와 내가 살던 집이었다. 맨 처음 이곳에 오지 않았던 건 아직까지도 두려워서 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와의 재회를 나를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집 문을 두드리자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연했다. 수십 년간 아버지가 그곳에 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에서 실망과 안심의 마음이 소용돌이 쳤다. 내가 가려고 하자 집 주인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저기 혹시 그 할아버지 아드님이세요?”

?

나의 말에 집주인은 잠시 집으로 들어가더니 편지봉투 한 장을 들고 나왔다.

이거 예전에 살던 할아버지가 만약에 아들이 찾아오면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편지에요.”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받고 집주인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차로 돌아와 떨리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편지를 개봉했다. 편지봉투에는 만원 5장과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들아 미안하다. 내가 그날 잘못했다. 그러니 제발 돌아와 주렴 언제든지 상관없어

밥은 먹고 다니는지 모르겠구나. 일단 돈을 넣어놨으니 꼭 밥은 먹고 다니렴. 그리고 다시는 너희 엄마 이야기 꺼내지 않을 테니. 제발 돌아와 주렴 부탁이다.

제발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이 편지를 읽게 되면 꼭 연락해 주렴

 

아버지의 편지에는 아버지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계속해서 전화 음이 울려 퍼지고 아버지는 전화를 계속해서 받으시지 않았다. 마음이 몹시 심난 했다. 유일하게 잡은 아버지의 단서를 무의미로 날리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였다.

전화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어느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실례지만 박찬수씨 휴대폰 아닌가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여자는 다소 날카로운 말투로 말을 했다.

박찬수씨 아들 되는 사람입니다.”

이제 와서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

여자의 목소리는 심각해져만 갔다. 왜 일까 안 좋은 감이 나를 집어 삼켰다.

일단 아드님 제가 알려드리는 장소로 오시죠

여자는 장소를 말해줬다. 나는 장소를 듣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체 어느 정도 무엇이 일어났는지 깨달아 버렸다.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아니라고 내 생각이 잘못된 거라고 부정을 강하게 하며 할수록 강한 부정이 강한 확신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의 확신은 확정이 되어 있었다. 도착한 장소는 장례식이었다. 나는 안내원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아버지가 안치되어 있는 방을 물었다. 그러자 안내원은 전화기를 들더니 어딘가 전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젊은 여성이 화가 난 상태로 안내원이 있는 장소로 왔다. 그리고 그 여자는 다짜고짜 나에게 화를 냈다.

당신이 아들이라고 말 할 수 있나요?”

여자는 화를 냈지만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죄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만을 기다리며 항상 죄인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한 번도 안 찾아오다 지금에서야 무슨 낮 짝으로 찾아왔나요?”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고개 숙인 나에게 있는 힘껏 화를 냈다가 말을 멈추고 잠시 자신을 진정 시킨 뒤 다시 말을 했다.

일단 아버지 있는 곳으로 가시죠

아버지가 있는 장소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장례식에 사람이라곤 살아생전 아버지를 도와주던 봉사자 2명이 다였다. 나의 마음은 바람이 불면 떨어질 것 같은 꽃잎처럼 불안과 안타까움 그리고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듯이 휘감겨져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천천히 아버지의 곁으로 갔다. 이제는 용서도 속죄도 할 수 없다는 마음에 나는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세상이 끝을 고하듯이 더 이상 죄인으로 그리고 기댈 곳이 없다는 서러움이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것이 꿈이라면 악몽이었다면 깨어나길 바라면서 그리고 그것이 덧 없는 바람이라는 것도 알면서 모든 것 알아 챈 뒤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에 후회하며 나는 울고 또 울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저기 정신이 드세요?”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나는 장례식장에 있었다.

맞아 나는 아버지 장례식장에 왔었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장례식 한구석에서 누워 있었다. 여전히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개미 한 마리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사람이 몰려들어도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말이 옳았을까? 아버지 젊었던 시절 그리고 부도가 나서 망하기 직전까지도 만났던 사람들은 아무도 찾아오지도 아버지를 도와주지도 않았다. 옛날 일을 기억해보니 부도가 난 직후 아버지의 곁에 사람은 떠났다. 어머니도 친구도 직장 부하들도 아버지의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 전부 아버지의 돈 때문에 몰려든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의외로 아버지도 불상한 사람이었네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나를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곁에는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친구도 동료고 가족이었다. 그런 내가 아버지의 곁에서 떠났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싸움하나로.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불상한 사람이었다. 부와 명예를 손에 넣었어도 진짜 친구와 가족은 없었으니깐.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여자는 나를 장례식장 홀에 있는 작은 카페로 데려갔다. 그리고서는 가방에서 편지 한 장과 통장 하나를 꺼내어 나의 앞에 올려놨다.

이건 제가 할아버지에게 받은 편지와 할아버지가 평생 모은 재산이에요.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제게 아들이 돌아오면 전해달라고 맡겨놓은 겁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편지를 읽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들아 이 편지를 읽게 된 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나를 용서해주렴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아버지지만 사랑했다.

그것만은 알아주렴.

네 인생에 해준 것은 없지만 이 돈으로 꼭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혹시나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다면 걱정마라 나는 행복하게 살았으니깐.

너도 너의 행복을 찾아 살아가거라. 마지막 선물을 그 통장에 넣어놨어 받아줘.

사랑하는 아버지가.

 

내가 편지를 다 읽고 편지를 내려놓자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평생 당신을 기다리면서 당신이 오는 날만을 생각하며 아침 점심 저녁 전부 2인분으로 밥을 차렸어요. 당신이 오면 같이 먹을 수 있게 항상 말이에요. 제가 할아버지의 담당 봉사자가 된지는 2년 밖에 안됐지만 적어도 그 2년 동안 저는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꼈어요. 그렇기에 저는 당신에게 화가 난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리워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그런 당신에게 할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 쓰지도 않고 돈을 모았어요. 당신이 돌아오는 날 옛날처럼 돈으로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당신이 알기나 해요? 그런데 당신은 장례식 마지막 날 와서는 할아버지에게 사과도 그리고 용서도 하지 않은 체 할아버지가 남긴 사랑만 들고 간다는게 저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거에요.”

여자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진심을 말하고서는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나는 아버지의 편지와 통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몸은 화장되고 있었다.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본 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엇이 그리 즐거웠던 것일까. 장례식장이라면 아들이 찾아와 줄 거라는 기대감에 행복했던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는 다른 무언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아버지를 납골당으로 모시는 것으로 나의 아버지를 찾는 여행은 끝이 났다.

그렇게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가족이 있는 집으로........

아버지 돌아오셨어요?”

아들이 나를 반겼다.

어 돌아왔어

나는 여행의 길에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아들에게 해줬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 숨겨왔고 나의 죄의 연대기를 숨김없이 아들에게 말해줬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줬던 편지를 보여줬다.

아버지 마지막 선물은 뭐였나요?”

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래서 아직 안 열어 봤어

그래도 마지막 선물인데 할아버지의 마음을 봐서 열어보세요. 그게 할아버지가 원했던 일이잖아요.”

사실 나는 통장을 열어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이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열었다가는 아버지에게 돈을 바라고 간 불효막심한 아들로 될 거 같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에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통장에 얼마가 들어있든 이 통장에 손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통장을 열었다. 그리고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 어린애처럼 넋을 놓은 상태로 웃고 울기 시작했다.

통장에는 글귀 한 줄과 돈이 들어 있었다.

아들아 옛날 살던 집 너의 추억이 담긴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거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것 밖에 없구나. 추억은 줄 수 없어도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살아가라 집주인에게 이야기를 해뒀어 이 돈이면 집을 살 수 있을 거다

아버지의 마지막 웃음의 이유가 머리속에서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건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웃음과 추억을 선물했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미소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없는 동안 아들에게 추억을 줄 수 없다는 죄의식 속에서 아들에게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게 오직 그것 하나로 살아오신 것이다.

나는 집주인에게 통장을 가지고 찾아갔다. 집주인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집을 내 명의로 바꿔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하고 내 앞에서 사라졌다.

늦었네. 네 아버지는 너와 같이 이곳에서 다시 살길 원했는데

우리 가족은 마지막 아버지의 선물인 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은 이사가 되었다고 나를 데리러 왔다. 아들의 차를 타고 집 앞의 대문에 서는 순간 과거의 추억들이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말했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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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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