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실어증 그리고 오필리아
1.
물방울이 내 동그란 안경알에 떨어졌다. 분명 오늘 비가 내린다는 말은 없었지만 아까부터 무거운 공기에 힘입어 소나기가 내릴 것이라는 내 예상이 적중한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까운 곳에 꽃가게가 있어 우선 그 밑으로 피해야겠다 생각했다. 점점 많은 물방울들이 떨어지더니 이내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려왔다.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꼽고 베토벤의 피아노 ‘Romance No.2 in F Major Op. 50’을 들으며 눈을 잠시 감았다. 부산히 떨어지는 빗방울소리와 피아노의 연주가 어우러져 들려왔다.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다. 잠깐 비를 맞을까 생각했지만,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톡톡 건드리는 것이 느껴져 움찔했다. 뒤를 돌아보니, 한 조그마한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다. 가게 주인인가보다. 잠시 비를 피하고 있는 나그네에게 관심이 생긴 것일까. 기다려도 아무 말이 없어서 내가 먼저 말을 건네기로 했다. 한 쪽 이어폰을 빼고 최대한 공손히 말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요. 우산을 빌리면 좋겠지만, 급한 게 아니라 그치는 대로 가려고 합니다.”
‘…’
아무 말없던 그녀가 내 말을 듣더니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굳이 들어갈 이유는 없다. 소나기는 잠시 뒤면 그칠 것이다. 단지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내 발목을 적시는 것이 거슬릴 뿐 그 외에 불편할 것이라고는 없었다.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그녀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비가 그치길 바라며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내 등에 노크했다.
“아,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
그녀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손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뭐가 들려?
내가 듣는 음악을 묻는 것인 모양이다. 주머니에서 아이팟을 꺼내 듣고 있는 음악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젓더니 다시 그 종이를 보여주었다. 당황스럽다. 뭘 묻고 싶은 거지?
그 종이를 내 아이팟에 올려놓고 그 위에 펜으로 글자를 적어 다시 보여주었다.
‘귀머거리.’
그러더니 다짜고짜 뒤로돌아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시 멍청하게 서있었다. 도대체 이 꽃가게 주인이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그녀도 테이블에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입 고리가 살짝 올라갔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티 내지 않으며 가게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내 아이팟은 일시 정지 시켰다.
가게로 들어서자 화사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알록달록 많은 꽃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움에 잠시 내가 들어온 이유를 잊고 감상을 할 뻔 했지만, 이내 다시 그녀를 바라보고 말을 뱉었다.
“심심하셨나 보네요.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이상한 질문을 하지 않나, 귀머거리라고 하는 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별로.’
그녀는 말을 못하는 것일까? 또 종이에 써서 내게 보여주는 것이 맘에 걸려 물어보았다.
“말을 할 줄 몰라요? 왜 계속 종이에 써서 얘기하는 거죠?”
‘실어증.’
“아…실례했습니다. 괜한 질문을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갑작스레 연민이 들었다. 불편한 사람에게 따져 묻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괜찮아.’ 그녀가 미소 지으며 내게 쪽지를 보인다.
“아까 그 질문은 뭐죠? 뭐가 들리느냐고 물어 봤자나요? 음악을 물어본 게 아니에요?”
‘아니’
“그럼 뭘 물었던 거죠?”
‘너. 눈 감고 듣던 것. 행복한 모습.’
“빗방울 소리와 음악을 듣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이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미안하지만 전 이만 갈게요. 비가 그칠 곧 그칠 테니까.”
‘잘 가. 또 봐.’
그녀가 웃으며 건네는 쪽지를 무심한 듯 한번 보고 돌아서서 가게를 나왔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 내가 왜 그 여자를 또 보겠는가. 참 세상에 별 사람 다 있다고 생각하며 가게를 나와 이어폰을 끼웠을 때, 밖은 비가 그쳐있었다. 내 이어폰을 통해 베토벤의 5th Symphony 가 흘러 나왔다.
2.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빛이 따갑게 이마를 때려서인지, 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불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습한 날씨이다. 짧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식료품점에서 오늘 저녁거리를 사려고 나온 나 역시 그렇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걷고 있는데 어제 그 이상한 주인의 꽃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인적이 드물어서 인지 그 전까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가게였다. 이제 사람들은 꽃을 사지 않으니까. 로망이 사라지고 실리와 이익이 우선시되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진화해 버린 것이겠지. 어쩌면 그녀가 이 거리에서 로망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녀가 실어증에 걸렸는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고 호기심이 들었다. 잠시 들리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겠다 싶어서 그 가게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잠시 멈춰 생각했지만 역시 궁금하다.
“안녕하세요. 꽃이 필요해서 사려고 왔어요.”
그녀가 보인다. 하얀색 롱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밖의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또 왔네.’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그녀가 내게 적었다.
“그래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또 보게 됐네요. 반가워하지 말아요. 난 아니니까.”
‘무슨 꽃이 필요한데.’
딱히 생각한 꽃이 없어서 잠시 머뭇거린다. 능청스럽게 넘어가는 게 좋겠다.
“무슨 꽃이 어울릴 거 같아요? 책상위에 꽃아 놓으려고 하는데 마땅히 생각한 게 없어서.”
그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일어나 연보라 빛의 꽃다발을 포장해서 가져온다.
“이게 무슨 꽃이에요? 색깔이 신비감을 줘서 맘에 드네요.”
‘라일락.’
“아하. 꽃들에도 다 꽃말이 있다면서요. 라일락의 꽃말은 뭐죠?”
그녀가 미소 짓는다. 이전엔 몰랐는데 그녀의 미소가 처음 맑다고 느꼈다.
‘그 정도는 집에서 찾아봐.’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 정도도 얘기를 안 해줘요?”
‘그래야 오래 기억하지.’
재밌는 사람이다. 내가 물어보려했던 것이 기억나 입을 땠다.
“그런데 왜 실어증에 걸린 건가요?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요.”
‘내 목소리. 아무도 안 궁금해 해.’
“이유가 그거예요? 답답해서 어떻게 살아요. 얼마나 안 했는데요?”
‘그다지 불편하지 않아. 기억 안 나.’
충격을 받았거나 사건이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물었건만, 이런 이유인줄 몰랐다. 갑자기 허무감이 몰려와서 탄식할 뻔했다.
“그랬군요. 저는 저녁거리 사러 가야해서 이만 갈게요. 많이 파세요.”
‘응. 잘 가.’
가게를 나서서 거리를 걷는데 처음으로 내게서 인위적이지 않은 연보라 빛 향기가 배였음을 느꼈다. 은은하게 배인 향기가 회색 거리를 색칠하듯 번져간다고 느꼈다. 식료품점에서 베이컨과 달걀 몇 알, 콘 샐러드 캔을 사서 계산대로 향했다. 그 때 식료품점에서는 파가니니의 Caprice No.24.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저기 빨간색 담배 한 갑도 같이 주세요.”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조촐한 저녁식사를 먹은 뒤, 인터넷으로 라일락의 꽃말을 찾아보았다. ‘사랑의 시작, 첫사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꽃. 그녀는 내게 왜 이런 꽃을 추천하였을까. 사실 바쁜 일상 때문에 연애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치스럽게 여겨졌고 그리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 어느새 낭비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함이란 단어는 이제 일기장에서 찾아야 할 단어 정도가 되어 버린 나를 깨달았다. 잠시 베란다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게 첫사랑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그때로 돌아가 나의 풋사랑과 재회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음 한 편에 부끄러움과 아쉬움, 그리움이 들 때 쯤 눈을 떴다. 밖에서 차들이 성을 내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고 붉은 색과 하얀색의 불빛이 어두운 밤거리를 이리저리 배회했다. 낮에 샀던 담배가 생각이 났다. 한 계피를 물고 불을 붙였다. 한숨과 함께 하얀 연기가 밤하늘로 흩어졌고 어둠은 그 연기를 감싸 앉았다. 거리의 불빛과 내 손에 작은 불빛이 희미해져 갈 때쯤, 내가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맨 정신으로 잠에 들기 어려울 것 같아 맥주를 사러 내려가려고 했으나 곧 그것마저 귀찮다고 느껴서 침대에 누었고 곧 이어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분명히 긴 꿈을 꾸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3.
어제보다는 구름이 많은 날씨. 뜨거운 태양을 가려준 구름 덕분인지 집에만 있기에는 아쉬운 주말이라고 여겨졌다. 산책이라도 할 생각으로 집 밖으로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정해지지는 않았다. 근처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가져야겠다. 오늘 따라 사람들이 많다.
“주문하시겠어요?”
보통 때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을 것이다.
“혹시 여기 라일락으로 만든 차도 있나요?”
“네? 아니요. 저희 가게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네요. 손님.”
바리스타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
“아, 네.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예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앉아있을 만한 자리를 돌아보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 다들 시끄럽게 자기 얘기를 떠드느라 이 곳이 얼마나 어수선한지 모르는 모양이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겠다는 계획은 무산됐다.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어떤 종류의 커피를 좋아할까? 허브 차를 좋아할까? 날씨가 더우니까 아이스 음료가 낮겠지?’ 이 생각을 하는데 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죄송한데 캐모마일 허브티도 아이스로 한잔 주세요.”
캐모마일이 제일 무난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추가로 결제 부탁드릴게요. 테이크아웃 하시죠?”
“네, 카페에 자리가 없어서.”
테이크아웃 잔에 담긴 커피와 허브티를 가지고 카페를 나섰다. 그 잠시 동안 얼마나 큰 소음 속에 있었는지 확연히 느껴졌다. 그녀가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말하고 싶어 하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는 않아보였다. 자연스럽게 꽃가게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들뜨는 기분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향긋한 꽃향기와 수수께끼 같은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신났다.
역시나 그녀가 가게 안에 있다. 유리창을 통해 몰래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주말에도 가게를 여시네요? 아르바이트는 안 쓰세요?”
그녀가 이전과 같이 맑은 미소로 화답해줬다.
‘응. 안녕. 누가 하려하겠어. 안 뽑아.’
“그렇겠네요. 월급은 줄 수 있겠어요?”
‘네가 걱정할건 아니지.’
그녀가 실소를 짓는다. 새로운 표정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요. 나도 바빠서 여기서 일 할 생각으로 물어본 건 아니니까.”
‘? 바빠? 백수 아니야?’
“참...날 대체 뭐로 보는 거예요? 저도 어엿한 직장이 있어요!”
‘아. 매일 와서. 미안.’
입을 가리고 웃는 그녀. 그녀를 보는 나도 웃고 있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면서 그쪽 것도 하나 샀어요. 허브티 좋아해요?”
‘응. 센스 있네?’
“이 정도는 센스 축에도 못 들죠. 아직 감동하면 안돼요.”
‘그래. 안 할게.’
노란색 파스텔 톤의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내가 건네는 캐모마일을 마신다. 잘 어울리는 색깔로 사왔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나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에게 말했다.
“어제 라일락의 꽃말을 찾아봤어요.”
‘그래? 잘했어.’
“그런데 그 꽃을 추천해준 이유가 꽃말이랑 관련이 있어요?”
‘그럼. 있지.’
“왜요.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연애도 못 해봤을까봐?”
‘아니야? 미안.’
“자꾸 그렇게 놀리지 말아요. 내가 화를 안내니까 재미 들렸나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만큼은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사실 봤어. 그날.’
“뭘 봤다고요?”
‘소나기 온 날. 네 표정.’
“내 표정? 표정이 왜요?”
‘라일락이 어울리는 표정.’
“참나. 그런 표정은 무슨 표정이람.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마세요.”
‘그래서. 그때 무슨 소리를 들었어?’
“그땐 음악을 들었다니까요? 빗소리와 함께. 다른 소리는 들은 게 없어요.”
‘아직 이해 못했네.’
그녀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내게 적었다.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까.
“그런데 어제 라일락을 사고 당신이 한 얘기를 이해했어요.”
‘무슨 얘기?’
“다른 사람들이 당신 목소릴 듣고 싶지 않아서 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요.”
‘그래. 위로는 필요 없어.’
“위로할 생각은 없어요. 대신 난 듣고 싶어졌어요. 당신 목소리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실어증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계속해서 궁금했다. 그녀의 미소 뒤엔 어떤 목소리가 있을까.
‘역시 특이해.’
“우리 만난 지도 꽤 됐었는데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제 이름은 아도니스예요.”
‘가까이 와봐.’
그녀가 내게 적은 것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내 왼쪽 귀에 가까이 대고 처음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내 이름은 오필리아야.”
그녀의 입술에서 연보라 빛 향기가 나와 내 귀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