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창하 posted Jun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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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냄새가 풍겨올 때쯤, 난 언제나 그곳으로 돌아간다. 하염없는 그리움이 흘러간 시간처럼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 바람에 흩날리는 사소한 기억 한 장마저 날카로운 추억이 되어 차갑게 가슴을 베어오는 곳.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곳의 명확한 형체는 기억 속에서 흐려진다. 흐릿한 기억의 공백을 대신하는 것은 불투명한 아름다움이다. 난 그곳에서 모든 감각을 상실한 채, 공기의 여백 사이를 티끌처럼 떠다니는 아름다움만을 인지한다. 아름다움은 잘게 부서진 빛의 조각들이 되어 내 앞에서 명멸한다. 난 그 환상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면 기억은 실재적인 형상을 부여받아 눈앞에 펼쳐지고, 난 다시 기적처럼 그 거리 위에 서게 된다. 거리 위를 수놓았던 아픔의 흔적들은 파문처럼 이는 그리움에 삼켜져 자취를 감추었다. 난 어떤 고통도 느낄 수가 없다. 단지 찬란한 아름다움 앞에서 눈이 부실 뿐이다. 난 그 꿈길 위를 걷는다.

 꿈길은 언제나, 줄지어선 은행나무들의 황량한 가지들이 바람의 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초라한 거리에서 시작된다. 거리의 한 쪽 편에는 낡은 술집들이 다가올 밤을 기다리며 깊은 잠에 빠져있다. 난 거리에 내려앉은 오후의 권태를 헤치며, 여기저기 갈라진 틈이 드러난 보도 위로 걸음을 내딛는다. 어디선가 봄의 진득한 향기가 흘러나와 공기의 흐름을 타고 내게로 스며든다. 그것은 이제 막 가지 위에 돋아나기 시작한 새순의 냄새라 하기에도 애매하고, 겨울의 냉혹한 구속에서 해방된 강물의 냄새라 하기에도 애매하고, 공기를 아늑하게 데워오는 따사로운 봄볕의 냄새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그것은 단지 봄의 냄새일 뿐이다. 그 어떤 표현도 그 냄새의 뚜렷한 형상을 묘사해내지 못한다. 난 그 냄새 속에서 어떤 속삭임을 듣는다. 그 소리는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나지막한 음성을 일구어내는 미세한 떨림이 반복적으로 귓가를 맴돈다. 봄의 냄새와 나를 향한 속삭임은 감각적인 구분을 잃고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거리 위를 떠다닌다. 난 나를 부르는 이 그리운 냄새의 근원을 향해 닿으려 한다. 꿈길은 가슴을 저미어오는 향기와 속삭임으로 어지럽게 흩어지며 나를 집어삼킨다.

 난 길 한복판을 막아선 녹슨 철문과 마주한다. 시간이 불러들인 사나운 바람은 철문 위에 입혀져 있는 검은 칠들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날카롭게 울부짖는다. 철문은 바람의 성화에 못 이긴 채 삐거덕 삐거덕 구슬픈 신음소리를 낮게 읊조린다. 난 반쯤 열려있는 문의 틈새로 몸을 비집어 넣는다. 완만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길을 따라 얼마간 걷다보니, 높다란 울타리처럼 주변을 둘러싼 반듯한 사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꽤나 경사가 있는 나선형의 계단이 꾸불꾸불 몸서리치며 그 사이를 기어오른다. 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연기는 바람을 타고 계단 위를 스쳐 흐른다. 난 회색빛 연기의 뒤꽁무니를 좇는다. 계단의 가파른 경사가 숨을 차오르게 한다. 그러나 호흡의 힘겨움을 느낄 수 없다. 그곳에 존재해야할 고통은 꿈길을 지탱하는 그리움의 일부로서 녹아든 채 내게서 증발해간다. 다 타들어간 담배의 꽁초가 계단 아래로 굴러 내려간다. 난 계속 위를 향해 올라간다. 하나의 계단 뒤의 하나의 계단, 차례차례 그 위로 걸음을 옮긴다.

 계단의 끝에 이르자, 주변엔 오후의 나른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거대한 고딕풍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푸르스름한 담쟁이덩굴들이 시간을 타고 기어오르는 고독의 잔해처럼 건물들의 등을 휘감는다. 봄볕이 여러 갈래로 조각난 채 내 발 아래 떨어진다. 난 그 위로 걸음을 내딛는다. 시간의 무게를 머금은 고독들이 발아래서 소리 없이 부스러지는 것을 느낀다. 길은 고딕풍의 석조건물들 사이에서 복잡한 미로처럼 얽혀 들어간다. 벗어날 길 없는 심연에 삼켜진 듯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난 오직 공기 속을 흐르고 있는 이 아스라한 향기만을 의지한 채 앞을 향해 나아간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묵묵히 땅을 딛고선 벽의 서늘한 단면들이 쉴 새 없이 나를 막아선다. 난 그 사이를 유령처럼 스르르 미끄러져 간다. 한순간 햇살이 밝아지며 먼지 쌓인 조각물들이 낮게 웅크리고 있는 좁은 길목을 환히 비춘다. 봄의 냄새가 더욱 짙어진다.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저 길의 끝에 이른다면, 이 향기의 명확한 윤곽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아가리를 벌린 채 움직이지 않는 조각된 동물들을 지나쳐 재빨리 걸음을 재촉한다. 그리움의 중심을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간다.

 벽 사이로 꺾어진 길목의 끝에는,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풀들 사이로 접어드는 완만한 나무 계단이 펼쳐져있다. 계단은 수풀로 둘러싸인 경사면을 빙 둘러 뻗어나간다. 난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눅눅하게 가라앉은 풀냄새가 주변을 포근히 감싸온다. 이윽고 계단의 끝에 이른 나는 화강암으로 포장된 널따란 보도와 마주한다. 보도는 확 트인 평지 위로 쭉 이어지다가 커다란 광장과 맞닿는다. 바람 앞에서 고개를 흔들고 있는 잔디들로 빼곡히 뒤덮인 푸른 광장이다. 광장 주변은 보초병처럼 주위를 경계하는 늙은 침엽수들로 둘러싸여있다. 그 아래 일정한 간격으로 낡은 벤치들이 배치되어있는데, 어지러이 흩어진 뾰족한 나뭇잎들이 흘러간 시간의 두께만큼 그 위에 쌓여간다. 난 눈을 감는다. 갑작스레 시간이 뒤엉킨다. 빛은 소리 없이 사그라지고, 바람은 갈피를 잃고 허공 속을 맴돈다. 눈을 뜨자, 달은 광장 너머로 웅장하게 형체를 드러낸 석조건물 위에 덩그러니 떠오른 채, 구름 사이를 부드럽게 유영한다. 봄볕은 어느 샌가 뒤엉킨 시간 아래로 가라앉아버리고, 완연한 어둠만이 그 두터운 단면을 눈앞에 드러내 보인다.

 난 광장을 가로지르는 보도 위에 줄지어서있는 은빛 조명들의 손짓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주변을 둘러싼 푸른 잔디들도, 늙은 침엽수들도, 오래된 벤치들도 모두 밤공기 속에 과거의 유물처럼 잠들어있다. 서늘하게 빛을 내는 은빛 조명들만이 나지막한 시간의 호흡을 느끼게 한다. 봄의 냄새는 밤공기 속에서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니, 어디선가 흘러들어오는 달콤한 술 냄새와 뒤섞여 오히려 더욱 짙어져만 간다. 보도를 따라 앞으로 걸어갈수록 그 윤곽은 선명해진다. 난 그리움의 중심에 도달했음을 느낀다. 이윽고, 광장의 끝에 이른다. 반듯하고 폭이 넓은 낮은 계단이 어둠 사이를 쭉 뻗어 올라가있고, 그 위에는 시간의 무게를 등에 업은 웅장한 석조건물이 위엄 있게 서있다.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조명들이 내뿜는 아스라한 은색 불빛들은 어둠에 반쯤 가려진 건물 위에 고독의 질감을 더한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어렴풋이 맴돌던 음성의 형체가 손에 잡힐 듯 뚜렷해진다. 난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걸음마다 부서지는 회한의 부스러기들.

 난 계단의 중간 지점에서 걸음을 멈춘다. 술에 취한 밤의 공기는 내게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 어디에도 섞여들지 못한 것만 같은 지독한 단절감. 난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움의 무게가 나를 주저앉힌다.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느끼고, 아찔한 향수를 머금은 채 선명하게 다가오는 봄의 냄새를 음미한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다. 어깨 위엔 술에 취해 붉어진 연의 자그마한 얼굴이 사뿐히 얹혀져있다. 몽환적인 달빛이 어둠 속에 가라앉은 연의 얼굴을 반쯤 비춰 보인다. 그 윤곽을 구성하는 매끄러운 곡선이 밤사이를 부드럽게 비껴 흐른다. 난 연의 눈을 바라본다. 몽롱하게 젖어있는 눈동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나를 향해있다. 연의 불규칙하고 가파른 호흡이 내 피부 위에 와 닿는다. 숨을 내뱉고 있는 둥그런 입술의 촉감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깊은 숨결이다. 내 모든 그리움의 근원. 날 이곳으로 이끌어온 봄의 향기. 내 귓가를 맴돌던 희미한 울림의 주인. 널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시간들을 거슬러 다시 돌아온 거야. 연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저 마주 잡은 두 손을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어루만질 뿐이다. 난 고개를 돌린다. 광장을 가득 메운 푸른 잔디들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밤 아래를 기어간다.

 난 꿈과 현실의 경계를 바라본다. 그곳에 서있는 지독한 상실감을 바라본다. 꿈은 현실을 모방한다. 그리움을 반죽하여 그럴듯한 세계를 빚어낸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순환한다.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던 순간들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로 승화된다. 마치 지나간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 떠나버린 시간들도 언제나처럼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엔 존재의 핵심이 부재한다. 난 연을 바라보지만 그녀의 존재가 지닌 뚜렷한 실재감을 느낄 수가 없다. 연이 증발해간다.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거품처럼 투명하게 흩날리며 공중으로 흩어진다. 난 홀로 이곳에 남겨진다. 아직도 어깨 위에 선명히 남아있는 연의 무게가 공백의 크기를 절감케 한다. 계절은 돌아온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들은 영원히 지나간 시간 속에 머무를 뿐이다. 계절은 그것들을 데리고 오지 못한다. 상실된 것들은 돌아오는 계절의 횟수만큼 두텁게 기억 저편에 쌓여간다. 난 그 과거의 부스러기들을 바라보며 더욱 깊어지는 그리움과 마주한다. 충족될 수 없는 그리움이 나를 이끄는 곳은 가슴 아픈 상실감으로 현실과 구분 지어진 허무한 꿈길이다. 난 다시 꿈길 속에 삼켜진다.

 공중으로 흩어진 연의 그림자는 기다란 회한의 꼬리를 드리우며, 광장을 둘러싼 늙은 침엽수들 너머로 사라져간다. 난 그것을 좇아 달린다. 또 하나의 시간을 넘어 숨이 차도록 달린 곳에서 연은 다시 희미한 형상을 부여받는다. 그곳은 붉은 가로등이 아련한 빛을 내리쬐는 좁은 골목이다. 연은 집을 향해 걸어간다. 난 연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와 걸음을 맞춘다. 골목은 완만한 오르막을 그리며 더러운 콘크리트 벽 사이를 헤쳐 나간다. 갈 곳 없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진다. 연은 이따금 형체 없는 문장들을 내게 건넨다. 시간의 흐름에 말끔히 씻겨 내려진 그 문장들은 의미를 잃은 채 그저 하나의 소리로서 내 귓가에 닿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하다. 난 그저 연의 목구멍에서 솟아오르는 그 막연한 울림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을 뿐이다. 우린 붉은 가로등들을 하나하나씩 시야에서 지워가며 그 찬란한 밤길을 걷는다.

 골목은 가로등 아래에서 어렴풋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아름다운 화단 사이를 가로지른다. 오르막의 경사가 조금씩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창문 사이로 삶의 빛을 쏟아내는 건물 몇 채들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연은 자신의 하루를 포근히 감싸줄 그 빛 속으로 돌아가려 한다. 느리지만 힘이 넘치는 걸음이 성실하게 연을 인도한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연의 손길은 이따금 내 손등 위를 가볍게 스친다. 난 그 손을 움켜쥐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연의 마음에 드리워진 얇은 베일을 걷어내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 안에서 차디찬 거부의 몸짓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막아선다. 난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밤 아래를 걷는다. 닿을 듯 말 듯 긴장된 거리감을 유지하는 연의 몸짓이 이 밤과 함께 영원으로 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영원토록 깨지지 않을 꿈에 대한 갈망이다. 현실의 명확한 대답을 유보하는 기나긴 꿈. 그러나 연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스라한 빛 속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난 빛 속으로 삼켜져가는 연의 그림자를 하염없이 좇을 뿐이다.

 우린 연의 집으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 위를 오른다. 계단의 끝에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형광등 불빛들이 새어나오고 있는 커다란 건물 하나가 우뚝 서있다. 연은 그 입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러더니 건물 앞 가로등 아래 줄지어서있는 작은 나무 벤치들 쪽으로 나를 이끈다. 우린 그 위에 걸터앉는다. 밤에 삼켜진 거리가 우리의 발아래서 소리 없이 꿈틀거린다. 연은 나를 바라본다. 다시 형체 없는 문장들이 연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이 흘러나온다. 그 문장들은 은은한 봄의 향내를 품으며 공중으로 흩어져간다. 난 문장들의 꼬리가 어둠 속을 헤엄치며 사라져가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 걸까? 나는 두렵다. 연의 마음에 드리워진 작은 천 조각을 걷어내야만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두렵다. 그 천 조각을 걷어내고 마주해야만 할 깊은 심연이 무척이나 두렵다. 그 심연 속에는 내가 영원토록 이해하지 못할 수많은 어둠들이 매서운 폭풍처럼 회오리치고 있으리라. 그 어둠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연의 문장들은 영원히 형체 없는 울림으로만 내게 닿아올 것이리라. 그리고 이 모든 찬란한 봄을 함께 지새운다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무자비한 환멸의 찌꺼기들과 마주해야만 할 것이리라. 그 환멸 속에서 가슴을 에는 고독과 마주하며 우리는 서로를 원망하는 무수한 세월들을 견뎌야만 할 것이리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 속으로 집어삼킨다.

 나는 도망친다. 두려움으로부터 부리나케 도망친다. 밤을 흐르는 연의 문장들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연을 기다리고 있는 찬란한 빛 속으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연은 빛에 삼켜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눈부신 망각 속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밤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깊고 깊은 회한이 그 사이로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난 다시 한 번 연을 향해 손을 뻗어 본다. 그러나 연은 이미 그곳에 없다. 흐릿한 그림자만이 빈 공간을 너울거린다. 어둠 속에 아로새겨진 작은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세계를 잠식해나간다. 이윽고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난 회한의 유물들로 가득 찬 세계의 폐허와 마주한다. 유령처럼 공허한 연의 환영들이 꿈을 꾸듯 흔들리며 춤을 춘다. 난 그 환영들을 결코 사랑이라 부르지 못한다. 연의 문장들이 내게 안겼던 서늘한 두려움은 결코 사랑이라 불리어질 수 없다. 난 연을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술 냄새가 뒤섞인 봄의 향내에 취해 잠시 연의 몸을 원했을 뿐이다. 봄이 지나면 사그라질 순간의 조우는 결코 서로의 존재를 위로하지 못한다. 그래서 난 연을 빛 속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우리는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가만히 웅크린 채 서로를 영원토록 이해하지 못할 운명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떠나고 내게 남은 이 커다란 회한의 덩어리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회한의 덩어리들은 도대체 무엇이라 불리어져야만 한단 말인가? 나는 그 공허한 의문들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다. 뼛속을 사무치는 회한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아갈 뿐이다. 또 다른 꿈이 폐허의 한가운데서 돋아난다. 난 피할 도리 없이 다시 한 번 꿈속에 잠식되어간다.

 좁은 방 안은 농밀한 어둠으로 빽빽하게 메워져있다. 심해에서 마주한 태곳적의 어둠. 그곳엔 공기가 없다. 어둠은 나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난 더러운 침대 위에 누워 수면 아래 가라앉은 해초처럼 천장만을 바라본다. 반복되는 벽지무늬 사이로 흘러가는 어둠의 조류. 닫아놓은 불투명한 창 사이로 어디선가 뻗어 나온 희미한 빛들이 새어든다. 빛의 조각들은 작은 물고기가 되어 방 안을 헤엄친다. 농밀한 어둠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나간다. 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심해어들의 유연한 몸짓을 두 눈으로 좇는다. 그것들은 단단한 그물에 갇혀버린 듯 어디로도 달아나지 못한다. 몇 번이고 같은 자리만을 맴돌 뿐이다. 차디찬 바람이 낡은 벽을 통과하여 내 몸 위로 스며든다. 난 냄새나는 이불을 턱 밑까지 잡아끈다. 심해의 한기는 냉혹하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마저 꽁꽁 얼려놓는다.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난 정지된 어둠 속에 갇혀버린다. 이 낡고 좁은 방은 마치 무덤과도 같다. 내 삶은 생물학적인 작용과는 무관하게 죽음과 한없이 가까워진다. 깊은 밤이 흘러가고 새벽의 여명이 슬금슬금 공기 속에 솟아오를 때까지 나는 눈을 감지 못한다. 두 눈을 똑바로 치켜든 채 지옥과도 같은 심해 속에서 죽음을 또렷이 바라본다.

 날이 밝아온다. 해가 차오른다. 빛은 어둠을 걷어낸다. 그러나 어둠의 본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다. 밤은 지났지만 방 안은 아직도 어둠의 잔해들에 잠식되어있다. 창 사이로 햇살이 스며든다. 햇살은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일직선으로 뻗어 들어와 직사각형 형태의 자그마한 도형을 벽 위에 그려놓는다. 난 그 위에 손을 얹어본다. 빛은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손 틈 사이를 스르르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밤이 지나도 난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일 수 없다. 방문을 열면 마주하게 될 세계의 허무가 견딜 수 없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허무를 위로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죽음을 이겨내기 위해 거대한 탑을 쌓아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은 천상의 영원에 닿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높이 탑을 쌓아올린다. 인생의 모든 영광을 탑의 완성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소모시킨다. 하루하루 높아져만 가는 탑을 바라보며 그 속에 영원히 새겨질 자신들의 이름을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그들은 패배한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탑의 잔해들 속에서 그들은 절망한다. 그러나 시간은 고통의 굴레 속을 영원히 순환하고, 그들은 또 다시 거대한 탑을 쌓아올린다. 무너져버릴 꿈을 위해 지옥 같은 허무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진다. 그것이 문 밖의 세계다. 난 그곳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허무의 본질을 바라본 이에게 남은 것은 지독한 권태뿐이다. 삶은 어떤 의지도 소모하기를 거부하고, 갈 곳을 잃은 시간들만이 내 곁에 남아 허공을 방황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넘쳐나는 권태들마저 또 다른 권태들로 메워놓는 것뿐이다. 한없는 권태를 부둥켜안고 죽음으로 가라앉아가는 것뿐이다.

 난 구원을 바란다. 세계의 허무에 대해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탑의 잔해에 짓눌려 죽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목청 높여 소리친다. 그러나 누구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탑을 쌓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절망에 빠진 내 앞에 자신이 쌓아올린 조그마한 탑을 자랑스레 내보인다. 나를 조롱하고 욕보인다. 탑을 쌓고 있지 않는 나를 세계의 변방으로 내몬다. 난 이 좁은 방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린다. 이 모든 절망은 결국 나 혼자만의 것임을 깨닫는다. 그 누구도 바라볼 수 없는 어둠으로 채워진 거대한 심연임을 깨닫는다. 난 그 누구의 이해도 구하지 않는다. 나 혼자만의 절망 속에서 고독을 삼킨다. 방 안에 어둠이 찾아들고 그 어둠을 몰아내는 또 다른 해가 몇 번이고 창밖으로 떠올라도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닫혀버린 방문은 시간조차도 밀어낸다. 나의 시간은 이 좁은 방에 틀어박힌 이후로 그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한다.

그때 다시 한 번 어렴풋한 봄의 냄새가 탁한 공기 속을 비집고 코끝에 닿아온다. 난 그 냄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언가에 취해버린 듯, 냄새의 흔적을 좇아 침대 위에서 유령처럼 스르르 몸을 일으킨다. 발에 부딪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뒤로한 채 방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빽빽하게 들어선 어둠의 잔해들을 힘겹게 걷어내며 한 발짝 한 발짝씩 앞을 향해 내딛어본다. 허약해진 두 다리는 몸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난 중심을 잃고 방 한가운데에 쓰러진다. 그러나 봄의 냄새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허공 속을 맴돌며 끊임없이 나를 유혹한다. 난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킨다. 힘겨운 걸음을 내딛는다. 이번에는 날 어디로 이끌려는 것이냐? 난 봄이 이끄는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방문을 열어젖힌다.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찬 세계와 마주한다. 눈꺼풀 위에 내려앉은 봄볕의 무게가 두 눈을 찌푸리게 한다. 또 다른 꿈이 나를 집어삼킨다.

난 축제의 분위기로 한껏 달아오른 넓은 잔디밭 위에 서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춤을 춘다. 햇살이 빚어놓은 아름다운 육체들이 뒤엉킨다. 역동적인 움직임들이 공기 속에 아로새겨진다. 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음악이 고조되고 현실은 망각된다. 의미 없는 함성들이 커다란 무리를 이루며 허공 위에 흩어진다. 달콤한 술 냄새가 춤을 추는 이들의 살 위에서 피어오른다. 땀이 흘러내리고 몸이 젖어간다. 햇살이 짙어진다. 뜨거워진 공기는 숨통을 막아온다. 그럼에도 춤은 끝나지 않는다. 더 고조된 흥분 속에서 육체는 격렬히 움직인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다. 하늘 위에 붉은 흉터자국을 남긴 채 해는 모습을 감춘다. 넓은 잔디밭 위로 거대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함성이 터져 나온다. 공기가 식어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춤을 멈출 생각이 없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한 춤은 영원토록 이어진다. 산등성이 위를 살며시 흘러가던 노을빛은 흔적도 없이 저물어간다. 어둠이 내려앉는다. 음악소리는 어둠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오더니, 이내 어둠 그 자체를 집어삼켜버린다. 사람들은 밤을 맞이한다. 어둠을 집어삼킨 찬란한 밤을 맞이한다.

 음악이 멈춘다. 춤을 추던 사람들의 움직임도 멈춘다. 음악이 사라지고 남은 허공 속의 여백은 사람들의 속삭임들로 채워진다.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외침들과 웃음들이 그 사이로 섞여든다. 음악이 멈춰도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축제를 즐긴다. 서늘해진 바람이 공기를 차갑게 식혀 와도 육체는 조금 전의 흥분을 기억한다. 아직도 공기 속을 흐르고 있는 음악의 잔해들이 밤을 환하게 밝힌다. 그것들은 하늘 위로 솟아올라 눈부신 불꽃이 된다. 커다란 파열음이 울려 퍼지면서 아름다운 불꽃들이 흘러내린다. 잘게 부서진 빛의 조각들이 어둠 사이로 스며든다. 사람들은 소리친다. 한껏 들뜬 웃음소리로 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꽃들을 맞이한다. 난 불꽃처럼 아스라이 흩어져가는 나의 시간들을 생각한다. 손에 잡힐 듯 쏟아져 내리는 빛의 조각들이 내 안의 심연을 밝혀온다. 헤아릴 수 없는 아련함에 가슴이 시려온다.

 그리고 그곳엔 연이 서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뒤섞인 채 밝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연이 그곳에 서있다. 우리는 공중에 피어오르는 무수한 빛의 파편들 아래서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서로를 바라본다.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다. 허공에 흩어지는 거대한 파열음들만이 반복적으로 귓가에 와 닿아 간헐적인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연의 모습은 희미하게 흔들린다. 그녀의 미소가 어지러이 회전하며 정지한 시간 사이를 맴돈다. 난 연에게 닿으려 한다. 느릿해진 시간의 흐름을 헤치고서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다. 몽롱한 움직임이 천천히 나를 이끈다. 그러다 문득 정지된 시간이 해체된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되찾는다. 시간의 흐름이 유연하게 축제의 밤사이를 비집고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재회의 기쁨과 축제의 흥분이 우리를 달리게 한다. 멀리서 쏟아지는 불꽃들의 긴 터널 아래를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허공에 채워진 두터운 어둠 사이로 다시 한 번 찬란한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닿는다. 난 연을 힘껏 껴안는다. 응축된 어둠 속에서 파열하는 빛의 덩어리들처럼, 격렬한 그리움이 무수한 단절의 벽을 허물고 솟아오른다. 홀로 삭혔던 시간의 무게가 손끝에 더해진다. 연은 내 품 안에서 그 무게를 오롯이 견뎌낸다. 난 연의 손을 움켜쥐지 못하게 했던 잔혹한 두려움을 잊는다. 차가운 심해에서 홀로 견뎌냈던 시간들이 그녀의 온기에 엉겨들어 떨어져나가질 않는다. 난 어느 술 취한 봄날, 내 어깨 위에 얹혀져있던 연의 얼굴을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틀어박은 좁은 방 안에서 그 얼굴의 무게를 얼마나 곱씹었던가를 생각한다. 난 연을 더욱 뜨겁게 끌어안는다. 세계의 허무는 망각된다. 영원한 망각이 어둠 사이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연의 몸 주위에 단단한 장벽을 드리운다. 이번에는 결코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으리라. 내 심연의 어둠을 걷어낼 이 눈부신 빛을 흘려보내지 않으리라. 어둠을 타고 쏟아지는 무수한 빛의 조각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우리를 휘감아온다.

 그러나 연은 사라진다. 축제의 불꽃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그라진다. 춤을 추던 사람들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간다. 남아있는 열기를 사그리 끌어 모아 침묵이 내려앉은 잔디밭 위를 떠나간다. 난 황량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다. 나 역시 돌아가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는다. 진득하게 나를 물고 늘어지는 짙은 심해 속으로 몸을 돌려야함을 깨닫는다. 연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직도 손끝에는 그녀의 육체가 전하는 선명한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난 그 감각을 되새기기 위해 몇 번이고 두 손을 움츠렸다 펴본다. 하지만 소리 없는 어둠만이 비어있는 손 틈 사이로 새어나갈 뿐이다. 공허한 침묵이 주변을 감싸온다. 생생하게 박동하는 축제의 기억들이 남겨진 침묵에 무게를 더한다. 나는 허무의 가혹한 폭력 앞에서 무참히 짓밟힌다. 존재의 구심점 안으로 한없이 움츠려든다.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나의 존재는 심해의 밑바닥 바로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실낱같이 명멸하는 연의 희미한 환영에 매달린 채 가까스로 스스로를 붙잡는다. 그러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난 미끄러진다. 절망과 고독의 깊은 수렁으로 겉잡을 길 없이 굴러 떨어져나간다. 연의 환영은 잔디밭을 집어삼킨 두터운 어둠 속에 잠식되어간다. 이제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춤을 추던 사람들도, 하늘 위를 수놓았던 무수한 불꽃들도,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던 연의 아련한 웃음도.

 눈을 뜨자 천장을 수놓은 익숙한 벽지 무늬가 어둠 속에서 어지러이 소용돌이친다. 빛의 입자가 그려낸 자그마한 심해어들이 무의미한 몸짓으로 그 사이를 헤엄쳐나간다. 오래된 침대에서 풍겨오는 역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갔을까? 몸에 베어버린 절망의 단조로운 나열 앞에서 시간에 대한 감각은 무뎌져간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허무의 낯익은 단면들이 잃어버린 시간들의 자리를 대체한다. 그것들은 오직 단 하나의 귀결을 향해 나를 인도한다. 죽음에 대한 갈망. 그 원초적인 갈망 앞에서 모든 관념들은 가치를 상실한다. 나는 끝을 향해 표류한다. 모든 아픔이 커다란 댐에 가로막혀 더 이상 흘러오지 못하는 강의 하류. 그리고 난 바다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을 깊은 허무의 바다. 내 내면 속에서 끓어오르는 모든 기억들이 흔적도 없이 가라앉아버릴 거대한 심연의 바다. 그러나 아픔이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로든 갈 준비가 되어있다. 설령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하더라도. 심지어 한 줌의 삶조차 존재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심해의 어둠이 나를 휘어 감는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어둠의 아가리에서 새어나와 모든 의지를 녹인다. 의지가 사라진 육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미끌미끌한 어둠의 촉수에 단단히 붙잡힌 채, 한 점, 한 점, 조금씩 먹혀들어갈 뿐이다. 이따금 난 담배를 피운다.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어둠 한 가운데로 연기를 뿜는다. 텁텁한 입안으로 허무가 흘러들어온다. 의식이 몽롱해진다. 절망은 무게를 더하고, 고독은 단단해진다. 이제 더 이상 벗어날 도리가 없다. 모든 것들이 내가 맞이한 영원한 패배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줄 뿐이다. 난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 위에 얹어놓는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무너져 내리며 재떨이를 치고 만다. 침대 모서리 위에 놓여있는 재떨이가 바닥을 향해 구른다. 툭 소리를 내며 쌓여있던 담배들이 쏟아져 내린다. 먼지 쌓인 방바닥에 담뱃재가 흩뿌려진다. 어둠이 두 손을 단단히 옥죄어오고 있는 탓에 나는 재떨이를 향해 손을 뻗지 못한다. 바닥으로 추락한 재떨이의 처참한 몰골을 그저 바라만 본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데도 흘러내리지를 않는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도 어둠은 잔인하게 나의 주둥이를 틀어막는다.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하다.

 똑똑. 그때 죽음만큼 깊은 어둠 속으로 방문을 두드리는 나지막한 소리가 조심스레 새어든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다시 한 번 똑똑.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바닥의 위로 흘러들어오는 이질적인 소리, 어둠이 결코 삼켜내지 못하는 명확하고도 또렷한 소리. 그 소리는 더러운 침대 시트 위를 기어 올라와 내 귓가에 자리를 잡는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방문 밖에 서있을 낯선 이가 나의 목숨을 끊기 위해 찾아온 죽음의 사자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난 이불을 움켜쥐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두 귀를 틀어막고 그 무시무시한 울림을 외면한다. 그러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멎지 않는다. 똑똑. 똑똑.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죽음의 소리. 난 죽음을 겁내고 있다. 어리석은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갈망을 좌절시키고 있다. 난 공포에 사로잡힌 채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영원히 순환하는 고통 속을 부유할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신기루처럼 피어오르며 허공 속에 흩어진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방문이 서서히 열린다. 살짝 벌어진 문의 틈 사이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린다. 홍수가 난 강물처럼 방 안으로 범람하는 빛의 물결은 거대한 파도를 이룬다. 파도는 거세게 요동치며 나를 덮쳐온다. 거대한 빛의 장막이 드리워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난 두 눈을 감는다. 요란한 빛의 파동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눈꺼풀 위를 짓눌러오는 빛의 무게가 조금씩 덜어지기 시작한다. 난 서서히 눈을 뜬다. 옅어져가는 빛의 장막 사이로 사물들의 형체가 드러난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이불들로 어지러운 침대 위, 버림받은 삶의 의지가 처량하게 너부러져있는 더러운 방바닥 위를 지나, 먼지가 한가득 쌓여있는 신발장에까지 시선이 다다르면, 반쯤 열린 방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사이로 어렴풋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난생 처음 보는 낯선 이도, 내게 종말을 선고하기 위해 찾아온 죽음의 사자도 아니다. 무척이나 익숙한 그림자다. 허무한 공기 속을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리는 몸의 윤곽, 그 위에 얹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자그마한 얼굴, 바람 사이를 유연하게 헤엄쳐나가는 기다란 머리카락. 연이다.

 연은 무리 진 빛의 덩어리들을 헤치며 조금씩 나를 향해 다가온다. 아주 느린 걸음이다.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절망의 흔적들은 연의 발목을 잡아채지 못한다. 연의 두 발은 그 하찮은 부스러기들을 하나하나씩 지르밟으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연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절망은 소리 없이 부서져간다. 연이 내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빛은 방 안의 깊숙한 곳까지 서슴없이 스며든다. 구석진 곳에 내려앉아있던 눅눅하게 응축된 어둠마저 빛에 내몰려 자리를 잃는다. 빛은 침대 위에 엎어져있는 내 처참한 몰골을 환하게 비추어온다. 난 마치 발가벗겨진 것처럼 맹렬한 수치감을 느끼고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연이 나를 그냥 지나쳐버리기를 바라본다. 그녀가 아무것도 볼 수 없기를 바라본다. 그러나 연의 시선은 나를 향해 고정되어있다. 연은 나를 똑똑히 바라보며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나의 몸뚱어리가 연에게 안길 혐오감을 생각하며 깊은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연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계속 걸음을 내딛는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내 내가 엎어져있는 더러운 침대 앞으로 연이 다가온다. 은은한 봄의 향내가 절망의 냄새 사이로 피어오른다. 연이 내게 손을 내민다. 두려움과 수치심에 바닥을 향해 고개를 쳐 박은 내게로 곱고 흰 손이 내밀어진다. 난 그 손을 움켜잡는다. 연이 나를 잡아끈다. 깊고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부터 나를 끌어낸다. 난 연의 이끌림에 따라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문 틈 사이로 걸어 나간다. 모든 것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어렴풋한 봄의 향내가 나의 꿈길을 인도한다. 난 연의 손을 더 단단히 움켜쥔다.

 우리는 어느 샌가 봄볕이 장맛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거리 위를 걷고 있다. 내려앉은 봄볕은 불어난 강물처럼 너울대며 거리의 주변으로 넘쳐흐른다. 넘쳐흐른 봄볕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웅덩이가 거리의 곳곳에 고여 아름다운 물결을 이룬다. 투박한 모양새의 낡은 건물들이 빛의 잔물결 위를 부드럽게 떠다닌다. 한 움큼의 미풍이 불어와 거리에 늘어선 건물들을 희미하게 뒤흔든다. 식욕을 자극하는 달콤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새어나온다. 난 연을 바라본다. 연의 가지런한 이마를 타고 봄볕이 흘러내린다. 봄볕은 연의 미간 사이를 천천히 미끄러져 내리다 코끝에서 둥글게 맺힌다.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둥근 입술이 그 아래서 붉게 빛난다. 연의 입술이 나를 향해 장난스러운 언어들이 속삭인다. 언어의 형체가 공기를 타고 투명한 울림이 되어 거리 위에 번져간다. 봄의 향내가 내딛는 걸음마다 가득하다. 우린 봄의 일부로서 녹아든다. 사소한 웃음 하나하나가 봄볕이 되고, 바람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고 흐릿한 꿈처럼 기억 안에 새겨진다.

 우리는 좁은 골목으로 접어든다. 오래된 상점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한가로운 오후의 정경을 관망한다. 상점들의 발밑에는 두터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림자는 슬금슬금 우리의 발 아래로 기어 올라와 보도 위를 검게 물들인다. 여기저기 묻어난 그림자의 얼룩들이 햇살과 뒤엉켜 복잡한 문양을 그려낸다. 우리는 마치 한 쌍의 체스 말처럼 보도에 새겨진 문양들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지저분한 광고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콘크리트 벽이 상점들의 대열 건너편으로 길게 뻗어있다. 벽은 굽이치는 골목의 흐름을 따라 유연하게 꺾어진다. 우리는 벽의 꼬리를 따라 계속해서 걷는다. 회색빛의 석문이 봄볕 아래에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자리에서 벽은 자취를 감춘다. 햇살이 석문의 각진 모퉁이를 조용히 비껴 흐른다. 우리는 석문 아래로 걸어 들어간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야트막한 오르막길이 석문 안쪽으로 펼쳐진다. 연은 나를 앞지르며 춤을 추듯 가벼운 몸짓으로 오르막길을 오른다. 연이 나를 돌아본다. 빛 속에 녹아드는 연의 웃음이 나를 잡아끈다. 난 연을 따라 걷는다.

 오르막길의 한쪽 편에 펼쳐진 경사면 위로 봄꽃들이 흐드러지다. 그 건너편으로는 햇살 속에 스러져가는 잿빛 건물들이 오후의 단잠에 깊게 빠져 들어있다. 우리는 잠이 든 건물들을 하나씩 지나친다. 별다른 특징 없이 엇비슷하게 늘어선 건물들이 우리의 걸음 뒤로 재빠르게 물러난다. 오르막길의 끝에 짧은 평지가 펼쳐지더니 이내 낮은 경사의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우리는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 내려간다. 내리막길의 끝에는 먼지 쌓인 벤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광장이 들어서있다. 우리는 광장을 지나쳐, 엎드린 바람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좁은 길목을 걷는다. 높게 뻗은 가로수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넓은 그늘을 드리운다. 잿빛 건물들의 대열이 우리 옆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잠에 빠진 낡은 건물들은 또 다시 시간 속으로 스러져간다. 연은 문득 걸음을 멈춘다. 연이 걸음을 멈춘 자리에는 스러져가는 건물 한 채가 환영처럼 너울거린다. 연은 사라져가는 환영을 잠시 붙잡아두려는 듯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건물을 응시한다. 그러더니 나의 손을 잡아끌고 건물의 내부에 자리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오랜 시간 동안 숨죽이고 있던 공기의 서늘한 단면이 나의 이마를 스쳐 흐른다.

 건물의 내부는 어두컴컴하다. 희미하게 새어드는 봄볕이 건물의 내벽을 어렴풋하게 비추어낸다. 차가운 질감의 흰 벽이 지나간 시간의 얼룩들로 군데군데 물들어있다. 벽은 텅 비어있는 복도를 따라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배열된 문들이 벽 위에 들러붙어 굳은 침묵을 지킨다. 고독과 향수가 뒤섞인 황량함이 복도 바닥 위에 흩뿌려진다. 또각또각. 우리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시간이 부서지는 소리가 서늘한 공기 속으로 울려 퍼진다. 부서진 시간은 건물의 내벽에 작은 균열을 드리운다. 균열이 우리가 지나간 자리를 집어삼킨다. 공허한 환영들이 우리의 걸음 뒤편에서 무너져 내린다. 부서진 환영의 잔해들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려가는 어둠이 우리의 발밑에 놓인다. 우리의 걸음이 가까스로 어둠을 비켜선다. 연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어둠을 피해 달아나는 두 발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다. 그저 미소를 띤 채로 텅 빈 복도를 가로질러갈 뿐이다. 난 묵묵히 연의 뒤를 좇는다. 나의 절망은 연의 손길을 따라 그녀의 의지가 갈망하는 빛을 향해 이끌려간다. 하지만 우린 단지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결말을 향해 접어들고 있을 뿐이다. 연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꿈이 부서져 내리는 허무의 종점을 알지 못한다.

 복도의 끝에서 우리는 허공을 향해 뻗어있는 긴 계단과 마주한다. 계단에서는 눅눅한 지하의 냄새가 풍겨져온다. 서늘한 공기가 계단의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며 주위를 휘감는다. 우리는 계단 위로 걸음을 내딛는다. 계단의 끝에 자리한 작은 창으로부터 햇살이 흘러들어온다. 범람하는 봄볕이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와 우리의 발끝에 닿는다. 계단을 오를수록 빛은 짙어진다. 모든 기억이 계단 끝에 놓인 작은 창 안에 집약되어 눈부신 빛으로 명멸한다. 그것은 때론 우리를 집어삼킬 듯 크게 아가리를 벌렸다가도 이내 시야 밖으로 한없이 사그라져간다. 사라질 듯 희미하면서도 그 어떤 현실보다도 선명하게 우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우리는 그 손짓을 따라 기억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걸음이 떼어진 자리에서 계단은 허무의 심연으로 무너져 내린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과거들이 어둠 속에 삼켜져간다. 그 어둠이 지금의 꿈마저 잡아채지 못하도록 나는 연의 손을 더욱 힘껏 부여잡는다. 하지만 예정된 꿈의 소멸은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내딛는 한 발짝 한 발짝만큼씩 우리에게 가까워질 뿐이다. 연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환한 미소로 모든 허무를 망각의 영역으로 내몰아갈 뿐이다. 허무가 망각된 자리에 아련한 봄의 향내가 퍼져온다. 그리움과 회한이 뒤섞인 슬픈 냄새다.

 우리는 계단의 끝에 이른다. 황혼으로 접어드는 오후의 빛이 계단의 끝에 선 연의 몸을 휘감는다. 아득한 빛의 무게가 내 눈꺼풀을 짓눌러온다. 빛의 몸집이 커져간다. 계단의 끝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빛에 삼켜진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져 간다. 연의 육체는 빛에 삼켜진 채 그 형태를 잃는다. 이제 연은 기억이 집약된 하나의 덩어리로서 존재하게 된다. 연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빛의 덩어리만이 그녀의 육체가 존재하던 자리에 남겨진다. 그리고 어둠이 기어오른다. 연이 결코 알 수 없었던 허무의 심연이 빛 사이로 스며든다. 난 그 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마주한다. 모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허망한 세계의 폐허와 마주한다. 무가치한 수고로움과 그 수고로움이 야기하는 고통스러운 적의와 마주한다. 그 상처를 결코 치유해내지 못할 서로의 마음들과 마주한다. 그 마음속에 깃든 영원한 몰이해와 마주한다. 연이 결코 보지 못했던 그 모든 어둠들과 마주한다.

 그렇게 나는 사라져간다. 어둠이 내 발목을 잡아끌어 한없는 절망 속으로 내동댕이친다. 끝없는 하강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헛된 수고로움으로 끝나버릴 꿈이었다 해도 그 꿈속에서 느꼈던 찰나의 위로를 사랑으로 여겨야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렸다. 빛의 덩어리가 눈앞에서 서서히 멀어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그라진다. 난 꿈에서 깨어난다. 회한의 한 가운데에 무참히 버려진다. 봄의 냄새가 회한의 등줄기를 타고 아련하게 퍼져온다. 이 지독한 봄의 향내만은 영원토록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명멸하는 과거의 부스러기들 속으로 몇 번이고 나를 이끌어갈 것임을 생각한다.


이창하 klkl93@naver.com 01082548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