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속청

by 송코치 posted Jun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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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석청

 

1.

 

오늘도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집을 나섰다. 나는 한 달 전부터 동네 인근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황 회장이라는 양봉업자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황 회장은 번질번질 약간 대머리 끼가 있는 인물인데, 혈색도 좋고 키와 골격이 큰 인물이다. 50대 후반이지만 골격이 크고 다부진 것이 생활력이 무척이나 강해보이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회장의 칭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만난 다음에 그는 회장이 되었다.


양봉업을 하기 전에 그는 여러 가지 사업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말솜씨 하나는 일품이었다. 대학 재학 중인지라 아직 사회생활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너무 말솜씨 좋은 사람은 주의하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신봉하고 있는 터였다. 아직 판단하기 전에 설득당해 중대한 결정을 해버린다면, 가끔 돌이키기 힘든 경우가 생긴다는 것을 재삼재사 반복해서 배운 까닭이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는, 봉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해마다 방학 동안에 서울의 벌침학회에 가서 벌침을 배워왔던 경험이 있다. 그 때문에 더더욱 양봉원에 아르바이트 하기를 희망했었다. 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집에서 50분 거리의 이곳에서 근무하는 행운을 갖게 된 것이다. 알바비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계약한 두 달 동안 벌침 외에 벌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울 것을 기대했기에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탐독하던 지역 일간지의 고 기자가 쓴 취재 기사와 칼럼을 보고 좋은 인상을 갖고 양봉원을 찾아왔던 첫 날, 황 회장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세계관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업무상 비밀 준수 서약서였다. 사인을 하고나서야, 그는 나에게 업무에 대해 브리핑을 해주었다. 아주 실망스러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맡긴 것이다.

 

누나친구들이 말하는 때가 묻지 않은 대학생으로, 고지식한 구석이 있었던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여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전부 이야기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아주 지속적으로.

 

대학에 들어 가 첫 번째 얻은 아르바이트 장소는 곰탕집이었는데 사장은 내게 끓는 곰탕 국물에 우유를 부으라고 시켰다. 조금 더 뽀얀 색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외국산 젖소 뼈는 한우 뼈만큼 국물이 우러나오지 않는가 보다 했다. 우유를 넣는 게 특별히 해로운 일은 아니겠지만 원산지를 속여 한우사골 곰탕으로 파는 사장에게 항거하기 위해 신문사에 제보했다. 다음 날 어디선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사장은 내 뺨을 쳤고 나는 잘렸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 자리는 어떤 마트였다. 창고관리직이었는데 정작 맡겨진 일은 식품의 유효기간을 고치는 일이었다.

 

적어도 먹는 것 갖고는 장난치면 안 돼. 내 배 채우자고 남의 뱃속에 들어가는 걸로 장난하는 거잖아.’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다른 자리로 바꿔달라고 관리자한테 말했더니, 그날 저녁 에, 일당을 받아가라고 전화가 왔다.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함께.

 

세상은 늘 왜 내 맘 같지 않을까?’

  

물을 때마다 누나친구들은 내게 말했다.

 

너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


세상이 법대로 원칙대로 되길 바라는 게 기대가 큰 거야?”

 

애냐? 어른들은 다 인정하고 살아. 넌 언제쯤 어른 될래?”

 

2.


나는 정해진 시간마다 20킬로그램짜리 설탕부대를 어깨에 메고 산기슭을 돈다. 벌들이 쏘지 못하게 방충복과 방충장갑과 밀짚모자를 쓰고, 모기장으로 얼굴을 넉넉하고 꼼꼼하게 중무장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벌통 근처에서 설탕물이 말라 땟구정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낡은 황색 플라스틱에 물과 설탕을 넉넉하게 붓고 근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휘휘 저어주면 벌통에서 벌들이 설탕냄새를 맡고 나와 식사를 한다. 물론, 각각의 벌통들에 호스로 연결된 메인물통에 묽은 설탕물을 벌통까지 공급해주는 일도 한다. 하지만, 가끔 가느다란 호스가 진득해지게 마른 설탕물에 막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일도 발생하기 때문에 이중으로 삼중으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반 양봉농가에서도 꽃이 아직 많이 피지 않거나 여름에 장마가 져서 밀원이 많지 않으면 설탕물을 공급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황 회장의 꿀벌들은 내가 주는 설탕물에만 의존해서 편하게 설탕 밥을 먹는다.

 

벌들은 정해진 시간에 내가 와서 주는 설탕물에 익숙해진 탓인지 멀리 날아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벌들은 주는 설탕 밥에 길들어져서 의욕부족이어서인지 운동부족이어서인지 팔팔하지 않았다. 굳이 단물로 배를 쉽게 채울 수 있는데 멀리까지 고생을 해가며 비행할 필요는 없으리라. 게으른 돼지 같은 꿀벌 녀석들.

 

황 회장은 나를 찾아 온 전 씨 아저씨를 통해 내가 벌침을 놓을 줄 알게 된 이후 자신을 황 회장이라고 부르라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황 회장은 양봉원 대표 황덕선으로, 황 사장으로 불리는 게 전부였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그냥 꿀 장수 황 씨라고 불렀다. 나를 통해 그는 황봉벌침협회 황 회장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 회장은 양봉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나를 자신의 수제자라고 소개했고 협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벌침교육을 하라고 시켰다. 그는 벌침을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벌침 교육을 빌미로 생 봉을 추가로 판매할 수 있었다.

 

황 회장은 벌침 교육을 하는 일에 더했던 것이 약간 미안했던지 내게 시급 2천원을 추가해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했다.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적거리자 황 회장은 내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럼…… 2100?’

 

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시급 천원 더 받는 것으로 황 회장의 일을 돕는데 동의 했다. 더 많은 돈을 받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 같았다. 방학이 끝나면 나는 어차피 이 일을 그만 둘 생각이고, 황 회장은 결국 내가 씌운 일회용 플라스틱 왕관을 벗게 될 것이다.

 

3.

 

내가 전 씨 아저씨로 부르는 전서민 아저씨는 지역의 작은 시 문학상공모전에서 입선한 후 생업인 슈퍼를 때려치우고 문인으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운영하던 작은 슈퍼를 정리한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50대 중반의 아저씨였다. 최근 사회복지관에서 벌침봉사를 하던 나를 만나 내게 몇 가지 벌침을 배우고 나서 내가 알바 생으로 근무하는 양봉원에 찾아 왔었다.

 

넉살좋은 황 회장은 생 봉 외에도 전서민 아저씨에게 꿀이며 프로폴리스를 팔아 재꼈다. 물론, 설탕물을 먹인 벌들이 만든 사양 벌꿀이었다. 황 회장은 자신의 사양 꿀에 대해서 희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적어도 자신은 꿀에 설탕을 섞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 섞지 않는다는 의미이리라. 그런 까닭에 절대 가짜 꿀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물론, 아주 엄밀히 말해 황 회장의 벌들이 늘 황 회장 표 설탕물만으로 배를 채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소수의 꿀벌들이 설탕물을 공급해주는 시간 외에도 외출했다가 벌통에 들어가는 것도 간간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설탕물을 공급해주고 벌들이 쉽사리 당분을 챙기게 한 것은 사실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황 회장의 논리라면 어떤 사기꾼도 24시간 사기를 치지 않으면 자신을 정직한 사람으로 말할 수 있어야 옳다.

 

전에 나는 바른 소리를 해서 알바 직을 몇 번 잃었던 경험을 어머니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옳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고 동조를 얻어 위로 삼을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아서 입바른 이야기 좋아한다고.

 

물론, 그것은 평소 어머니의 반응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죽어서 죄로 간다고,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없이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어머니의 고된 노동의 아픔이 푸념처럼 입에서 잠깐 새어나온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고통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나이를 먹으면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변해갈까? 아니 변할 수 있을까?

 

나는 학비조달을 위해 알바 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드러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사기의 방조범이 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벌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더 나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마다하고 들어가겠노라고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얼마 전 들어가기로 한 마트의 떡볶이 코너 서빙과 설거지 일은 주인이 높은 보수를 약속했지만 나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번 방학은 여기서 때울 수밖에 없다고 나를 달랬다.

 

황 회장은 전서민 아저씨에게 제대로만 먹으면 말기 암 환자도 살리는 꿀의 효능을 이야기 했다. 동네 슈퍼 운영과 문학 외에는 세상을 잘 몰랐던 전 씨 아저씨가 황 회장의 이야기를 제대로 판단할리 만무했다.

 

꿀은 말이야, 혈액순환 장애와 불안정한 기의 흐름을 정상화시켜준다고. 사람한테는 수분 섭취가 굉장히 중요하지. 그런데 무분별한 수분섭취보다 꿀을 통해 혈액까지 수분을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야.”

 

황 회장은 달지 않고 향긋한 도라지 꿀 발효효소를 만드는 법이나 효소 섭취는 소화에 도움을 주므로 음식과 효소를 함께 섭취하는 게 좋다는 등 꿀 효소를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전 씨 아저씨의 얇은 귀는 조금씩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말이야. 여러 꿀들이 있지만, 목숨 걸고 가장 귀한 꿀 히말라야 석청을 찾아서 헤매는 자들이 있지. 석청이란 산의 절벽 천장 돌 틈에 매달려있는 꿀이야. 삼으로 치면 산삼에 해당되는 거지. 히말라야 석청이란 그 석청 중에 최고란 말이지. 보통 사람은 말야. 너무 귀한 지라 히말라야 석청을 구할 수조차도 없어. 게다가 그 석청채취란 정말 힘든 거야. 집을 지키는 수 만 마리의 산벌들을 피해가며 외줄에 매달려 벌집을 채취하는 거야. 로프에 매달려 산벌들을 쫒기 위해 나뭇잎과 가지를 태운 연기로 쫒아가며 힘들게 꿀을 따는 거야. 때로는 수 만 마리 산벌에 쏘일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흔들리는 줄에 매달려 채취하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과정이지. 산벌들에 쏘여가며 채취하는 것을 보람으로 알고 석청을 채취하는 거지.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해내겠나. 그건 어쩌면 사명감 같은 것일 수도 있어.” 황 회장은 이 말을 하면서 눈가가 촉촉하게 젖기까지 했다.

 

정말그런가요?”

  

전서민 아저씨는 감화된 게 틀림없다. 그는 시인의 감성을 발동시켜 황 회장의 말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나 처음에는 초보이기 때문에 아찔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게다가 석청을 채취하는데 바위가 금이 가거나 무너져 내릴 수도 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는 거야. 석청은 기본적으로 진통, 소염효과가 있는데다가, 만성 위염, 만성 장염, 두통에다가 복통에도 좋아. 전부 사람의 혈행과 경락이 제대로 통한 결과지. 이 중에서 석청의 효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혈행을 돕고 오장육부 경락을 뚫어주어 몸에 양기를 불어넣는다는 거지. 양기 알지? 양기! 히말라야 석청이야 말로 양기에는 왔다 야.”

 

황 회장은 엄지손가락을 힘 있게 치켜 올렸다.

 

양기요?”

 

그렇지. 양기지! 자네처럼 몸이 빈약한 사람도, 끝내주는 양기를 갖게 된단 말이지. 아내와 자네가 같이 먹으면 필시 좋은 결과를 낼 걸세. 시인인 자네의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에다가, 자네 아내는 수학과를 나와 경리를 한다니 아이가 생기면 수학적 머리까지 이어받을 테니, 수재가 안 나온다고 어찌 장담하겠나? 게다가 신묘한 히말라야 산이 내린 석청의 정기를 받아 담대하고 용맹함도 갖출 거라고. ! 그렇고말고! 40년 동안 꿀을 다뤄 온 내가 보장함세.”

 

솔깃하긴 한데요. 그런데, 값이 꽤 비쌀 것 같은데……

 

, 한 번 먹어보겠나?”

  

전 씨 아저씨가 우물쭈물하자,

 

내가 어디 없는 소리를 할 사람인가? 믿고 한번 복용해 보게. 내가 특별히 값은 잘 해줄 테니.” 황 회장은 전 씨 아저씨의 귀에 속닥였다.

 

어유, 이렇게나 비싸다구요?”

 

이 사람 참. 답답하네! 이건 산삼에 버금가는 거야. 아니 산삼 이상이지. 목숨 걸고 따는 히말라야 석청이 아 정도면 완전 거저지. 사람 참. 천재아들 하나 얻고 싶지 않아? 아내가 노산인데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영영 아이 하나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정도일 줄은……

 

몇 달치 주문이 밀려 있는데다가, 정치인 나리들한테도 선물용으로 불티나게 나가고 있는 제품이라니까. 요샌 금전 수수 잘못했다가 패가망신 할 수도 있으니 이런 물건들이 오히려 인기라네.”

 

……

 

, 사람 참. 우리 양봉원 자주 출입하는 고 기자 있지? 자네도 그 사람 똑똑한 거 잘 알잖아. 그 고 기자도 내 양봉원에서 히말라야 석청을 사가겠다고 약속했어. 워낙 정보에 밝고 똑똑한 기자 양반인지라 제품의 진가를 금세 알아채고 자네보다 먼저 뚝딱 주문했지.”

 

고 기자님도요?”

 

그래. 고 기자.”

  

황 회장은 전 씨 아저씨의 어깨를 툭 친다.

 

이 사람. 믿고 사. 속고만 살았어? 히말라야 석청 효과는 산삼을 넘어선다니까 글쎄.”

 

전서민 아저씨는 늦게 결혼을 한 분이었다. 나이 51살에 50세인 현재의 아내를 만났다고 했다. 전 씨의 아내는 두 번 임신을 했으나 모두 유산했다. 50세면 폐경이 될 나이였기 때문에 어쩌면 아이가 생기는 것이 더 어렵다. 결혼한 누나 친구들에게 들어서 이쯤은 알 수 있었다.

 

전 씨 아저씨는 황 회장에게 히말라야 석청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듣자마자 어느 순간부터 전 아저씨는 히말라야 석청의 신도가 되어버렸다. 나도 황 회장의 말만 들으면 마치 몇 백 년 묵은 산삼의 효능이 있을 것 같았다. 야비한 사기꾼 같으니.

 

사실 사양 꿀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꿀에 관한 한 황 회장의 말을 귓등으로만 듣고 있었다. 전 씨 아저씨는 처음에는 나를 통해 여기에 왔으면서도 기사로 부풀려지고 풍채 좋은 황 회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분위기였다. 황 회장이 전 씨 아저씨에게 속닥거릴 때마다 잔심부름을 하다가 전 씨 아저씨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속지 말라는 듯 표정으로 신호를 했지만 전 씨 아저씨는 못 알아챈 것인지 내 신호를 무시했다. 결국 그는 황 회장의 가짜 히말라야 석청을 살 것이다.

 

불쌍한 아저씨. 히말라야 석청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최소한 위험하지는 않을 거에요. 어차피 설탕물일 테니까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4.

 

황 회장의 히말라야 석청 운운에 고무되어 한동안 잘 안 나갔던 학회였지만, 일을 쉬는 날 일정을 조정하여 전에 다니던 벌침학회에 나가보았다. 원래 서울의 학회에서 벌침을 배웠지만, 지역에도 학회가 있는 것을 알고 정보 교환 차 몇 번 나갔던 것이다. 내가 사양 벌꿀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알지만, 황 회장이 언급한 히말라야 석청 꿀이 내가 설탕을 급여해 기르는 꿀벌이 만든 것인지, 네팔에서 수입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히말라야 석청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 곳에서 벌침을 배울 때 알게 되었던, 믿을 만한 벌침 선배들을 만나 물었다.


히말라야 석청에 대해서 혹시 아시느냐고. 그들이 말해준 것에 인터넷으로 정리한 것을 더해보니 다음과 같았다.

 

히말라야 석청의 최대 군락지는 네팔 북부에서부터 티벳과의 접경지대라고 하는데, 이 지역은 티벳 계통의 구룽족이 사는 곳이라 했다. 이들이 주로 석청을 채취한다 했다. 이곳은 해발고도가 2000m 이상의 고산지대인지라, 벌들이 석청을 만드는데 당연히 고산식물들이 채밀원이라고 했다. 네팔에 32종이 넘는 랄리구라스라고 하는 꽃이 주요 채밀원인데 아피스 꿀벌(석청을 만드는 꿀벌의 일종)들이 채밀을 한다고 했다. 아피스 꿀벌들은 고도에 따라 2000m급 낮은 고도에서는 아피스 세라나가 약독성의 빨간 랄리구라스 꽃으로부터 꿀을 취하고 그 이상 고도에서는 아피스 플로레아 독성있는 분홍색 랄리구라스로 꽃으로부터 꿀을 취하고 3000m 이상의 고도에서는 아피스 라보리오사가 흰색 랄리구라스와 각 야생화에서 꿀을 취하는데, 여기에 맹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결국 히말라야 석청이란 채밀 장소의 고도에 따라 인체에 해를 입힐 수 있는 독성분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외에도 고려할 만한 자료들이 많았다.

 

이거 채밀원의 고도가 중요하다는 건데 히말라야 석청을 잘못 알고 먹었다가는 자칫 건강을 해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식약청에서 히말라야 석청의 위험성에 대해서 고지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알바 가는 날, 황 회장에게 히말라야 석청의 채밀 고도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 회장은 우물쭈물 얼버무리더니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야이, , 이 자식이 아침부터 욕 나오게 하네. 어디서 쓸데없는 것만 알아가지고. 안전하다고! 새꺄! 어른이 좀 안전하다고 하면 안전한 줄 알지! 벌침 좀 쓸 줄 안다고 오냐오냐했더니 어디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른을 훈계하려 들어? 니가 벌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황 회장은 내 머리를 검지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아니회장님. 저는 히말라야 석청이 그렇게 귀한 것이라는데 적정 고도에서 안전하게 채취한 것인지 궁금해서요. 회장님 고객이 히말라야 석청을 드시고 혹여 불상사라도 나면 안 되겠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씀드린 거에요.”

 

불상사라니? 불상사라니? 불상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가 다 알아서 안전하게 할 테니까 잡소리 말고 가서 어서 꿀벌 밥이나 주고 와. 짜슥아! 아침부터 헛소리 팽팽 하지 말고!”

 

5.

 

손님도 아니면서 황 회장의 양봉원을 뻔질나게 들락거린 이가 있었다. 지역신문사에 다니는 고 기자란 인물이다. 고 기자는 서울명문대 출신으로 서울의 모 신문사를 다니다가 언론자유를 위해 투쟁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지역발전에 사명감을 갖고 이곳에 내려와 신문사에 지원했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에 들은 바로는, 고 기자는 사실 비리기자로 면직되었다는 루머가 있다. 세상 모든 루머가 전부 사실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글을 믿고 내가 여기에 온 걸 보면…….

 

처음엔 잘 몰랐었지만 고 기자가 다닌다는 이 지역의 A신문은 이 지역 시장이나 정부에 관련된 기사는 잘못된 정책에도 온통 칭찬 일색이요. 지역 내에서 일어난 소소한 다툼이나 주민들의 민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눈을 감았다.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 기자의 글이 특히 그랬다고 한다. 고 기자는 지역 내의 채석장 관련민원에서부터 건물, 생활 편의에 대한 많은 민원제보를 차후에 실어주겠노라는 이야기로 시간을 번 후 업주를 만나러 다니는 것 같았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내가 전부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에 대한 소문은 매우 좋지 않았다. 고 기자는 황 회장과 자주 어울려 다녔는데, 풍문에는 룸살롱 같은 곳에서 지역의 정치인들과도 만나는 것 같았다. 성매매가 불법이 된 지 오래지만, 룸살롱 같은데서 성매매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선배들의 말을 들으면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조금이라도 노는 남자들은 어디서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매우 잘 안다. 똥은 똥끼리 뭉친다고, 황 회장과 어울리는 사람들 모두가 구린내 나는 사람들이다.

 

혈색 좋은 사양 꿀 파는 사람이나 엉터리 기사 쓰는 사람이나 그 놈이 그 놈이다. 멀리 꽃에서 꿀을 딸 생각을 하지 않고 설탕물 단내에 홀려 달려드는 꿀벌보다야 기자가 훨씬 아이큐가 높을 것 아닌가? 처음엔 서울 명문대 출신이라는 고 기자가 황 회장의 비리를 비밀취재하기 위해서 위장교제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 추측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잔칫날 쓸 돼지를 더 유용하게 쓰기 위해 계속 살을 찌우고 공을 들이는 것처럼. 그런데 내 기대가 너무 컸다. 고 기자는 황 회장을 든든한 밥줄로 삼고 있는 비리 기자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 회장의 방대한 인맥을 얼핏 알아채고 나서는 고 기자는 그 줄에 조용히 섰다.


황 회장이 읍내에 입금하라고 심부름을 보낼 때, 우체국에 꿀 선물을 빙자한 뇌물가끔은 진짜 꿀이나 진짜 국산 석청을 구해 보내기도 한다을 보낼 때, 그의 광범위한 인맥의 폭을 알 수 있었다. 고위 공무원, 정치인, 법조계 사람들까지. 물론, 황 회장의 선물이나 입금을 받았다고 해서 전부 악인인 건 아닐 게다. 아주 순수한 친분이나 개인적인 빚 갚음일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엉터리 같은 이 사람이 곤궁한 처지에 있게 될 때 그들의 호의에 찬 전화는 빛을 발할 테지.

 

솔직히 사회선배들이나 아버지 친구 분들 말씀에 요새는 뉴스가 너무 천편일률적이라고 한다. 진짜 뉴스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제 TV나 신문 같은 매체는 더 이상 뉴스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제는 TV나 신문을 더 이상 믿지 못한다. 아마도 황 회장의 가짜 히말라야 석청처럼. 질문에 발끈해 할 때 대충 알아챘다. 어쩌면 황 회장이 만든 가짜 꿀일 수 있겠다고. 만일 그런 게 맞다면 히말라야의 채밀 장소의 고도를 확인할 이유도 없고 궁금해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냥 설탕 꿀을 그렇게 비싸게 팔아 젖힌다는 말이야?

 

고 기자는 황 회장의 집에 자주 들른다. 취재가 이유라고 말은 하지만, 별 하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부어라 마셔라 황 회장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어딘가로 둘이 양봉원을 비우고 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접대 차 일 것이다. 황 회장은 고 기자와의 그런 친분 덕택에 지역신문에서 지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인으로 자주 등장했다. 그리고 그가 파는 모든 양봉관련 상품들은 최상급으로 둔갑했다. 잘만 먹으면 산삼의 효과에 버금간다는 그의 히말라야 석청도 그러했다.

 

오히려 인터넷 많이 하는 고등학생, 대학생 아들 딸래미 녀석들이 나보다 더 사회를 잘 알아. 이제는 훈계도 제대로 못하겠어.’

 

얼마 전 일요일 날, 우리 집으로 나와 바둑을 두러 오신 강 집사 아저씨의 말이다.

 

그 말도 옳다. 하지만, 인터넷을 보통 사람 정도는 하는 나 같은 사람도 A신문을 보고 속아서 황 회장 같은 사람을 만났다. 아무리 인터넷이 전 국민의 매체가 된 세상이라고 해도 인쇄매체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6.

 

기자씩이나 되가지고 알 만한 사람이 어디서 행패야?”

 

사무실에서 엑셀로 장부를 정리하는데 밖에서 황 회장의 고성이 들렸다.

 

당신이 이럴 수 있어? 나한테 뭐 무슨 좋은 꿀 선물한다고 하더니 사양 꿀 준 거 아냐? 꿀 좀 안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냥 설탕 꿀이라고 하던데.”

 

이사람 보소. 내가 당신한테 이 명목 저 명목으로 돈 준 게 얼만데,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거야?”

 

기자면, 정직하게 취재하고 목숨 걸고 특종이나 잡으러 다닐 일이지. 겨우 관제 기사나 받아쓰는 주제에 꼴에 기자라고 자네가 히말라야 석청을 알기나 해?”

 

설탕물 먹여 가짜 꿀이나 만드는 사기꾼 주제에 누가 누구를 욕해?”

 

밖이 소란스러워 문을 살짝 열어 문틈으로 보니 고 기자는 약간 술에 취해있는 듯 했다.

 

고 기자는 격앙된 얼굴을 하고 벌꿀단지를 가지고 와서 황 회장의 면전에 들어보이고는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감히 나한테 가짜 꿀을 줘?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이럴 수 있는 거야?”

 

물론, 고 기자는 황 회장이 황덕선 대표였을 시절부터 황 회장을 알았을 것이다. 내가 황 회장을 알기 훨씬 전부터 황 회장을 알았던 눈치였으니까. 고 기자는 황 회장을 오늘에 이르게 한 공로자가 맞긴 하다. 그렇다고 황 회장이 자신을 믿음으로 대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고 기자는 사람을 확실히 잘못 봤다. 사기꾼은 원래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조변석개하는 황 회장을 신실한 사람으로 보았단 말인가?

 

이거 봐. 고 선생, 당신이 나한테 잘한 게 뭔데 언성을 높여?”

 

잘한 게 없다니. 말이 돼? 내가 없었으면 당신이 있었을 것 같아?”


고 기자는 흥분해서 금테 안경을 추겨 세우며 삿대질을 했다.

 

그래? 다 돈 받고 해준 일이면서 뭘 그래? 뭐 하나 내 일 도와주면서 공짜로 해준 일이 없잖아?”

 

황 회장은 느물거리는 말투로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방충망을 손질하고 있다.

 

고 기자의 행패 따위 별로 안중에 없다는 투다. 나는 이 둘의 다툼을 뿔테 안경 너머로 지켜보다 짐짓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컴퓨터로 돌아와 장부 정리를 했다. 내심 고소하다고 생각했지만, 괜히 고래 등에 새우등 터질 일은 안 만드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둘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살금살금 걸어가 문을 표시 나지 않게 열어 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비록 문틈으로 보는데 만족해야했지만, 재미있는 이 둘의 싸움 관람을 포기하긴 싫었다.


황 회장님, 정말 서운합니다. 귀한 히말라야 석청이라고 받아서 귀한 사람에게 갖다 줬더니 다음 날 바로 도로 가져가라고 연락이 왔단 말이요, 감정해보니 다 가짜라고

  

약간 울컥한 목소리로 고 기자가 내지르듯 말했다. 오늘 따라 그의 감색 정장이 왠지 더 푸르러보였다.

 

오호. 당신이 요새 기웃거린다는, 그 이 모 의원한테라도 갖다 준 모양이지?”

 

정치권에 기웃거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황 회장이 고 기자 먹으라고 준 히말라야 석청 꿀이라는 것을 당 간부에 상납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미리 이야기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좀 더 좋은 것을 주었을 텐데.”

 

황 회장은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쳐다보며 약간 비꼬는 투로 말했다.

 

당신이 똑똑은 하지만, 정치를 할 정도의 위인은 안 되는 것 같은데

 

뭐라구? 이 사람이!” 격앙된 고 기자는 황 회장의 개량한복 멱살을 잡아 올렸다.

 

허허. 이 사람 행동거지 봐라. 언론인이 이렇게 경거망동해서야.”

 

고작 벌이나 치고 꿀이나 파는 양봉업자 주제에

 

발끈한 고 기자는 불빛에 비친 얼굴이 상기된 것이 술이라도 한 잔 어디서 걸친 것 같았다. 평소 조금 기분 좋으면 형님, 형님하던 황 회장에게 이렇게 막말을 내뱉는 것을 보니 석청을 갖다 준 사람에게 제대로 망신을 당했나 보다.

 

키가 큰 황 회장은 가소롭다는 듯이 멱살을 잡은 고 기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 움직이는 처신 좀 봐라. 배운 사람이라 좀 다른 줄 알았더니.”

 

나 아니었으면 당신이 이렇게 성공이나 했을 줄 알아?” 고 기자는 멱살 잡은 두 주먹에 더욱 핏대를 세운다.

 

이거 치워. 당신 신문사 편집국장, 사장, 전부 내 사람이 되었는데……. 자네, 나를 이렇게 막 대해도 되나?”

 

이 사기꾼 같은 놈아. 내가 당신 가짜 꿀 때문에 망신을 당했다고.”

 

허허. 이 사람 참. 정말 대책 없구먼.” 황 회장은 혀를 끌끌 찼다.

   

이 때 전서민 아저씨가 양봉원에 들어왔다.

  

황 회장님. 전에 부탁드렸던 히말라야 석청 들어왔나요?”

  

그렇지. 들어왔지. 어여 오게. 어이. 김 군아!”

  

. 회장님.”

  

전 작가 선생님한테 히말라야 석청 하나 꺼내 드려라.”

  

, 회장님.”

 

전서민 아저씨는 고 기자와 황 회장의 멱살싸움을 보자, “뭔 일이래유?” 했다.

  

신경 쓸 것 없고, 석청 빨리 받아서 가시오.” 황 회장은 손사래를 쳤다.

  

황 회장은 끈질기게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고 기자를 딱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뒷짐만 지고 있었다.

나는 내심 가짜임이 분명한 히말라야 석청 꿀 한 단지를 황 회장의 집무실 벽장에서 꺼내 와 전 씨 아저씨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 순간, 고 기자가 황 회장을 잡은 멱살을 놓고 석청 단지를 번개같이 낚아챘다.

 

? 고 기자님. 히말라야 석청. 그건 내 거에요.”


. 히말라야 석청? 웃기고 있네.”

 

고 기자는 두 손 높이 석청 단지를 들어 올려 바닥에 내 팽개쳤다.

 

와장창!

 

석청 단지는 보기 좋게 산산조각이 났다. 꿀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이쿠! 내 석청.”

 

석청은 무슨 석청? 그거 가짜 꿀이요. 이 사람한테 꿀값 다 내어 달라고 하시오.” 분이 안 풀린 듯, 황 회장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고

기자가 말했다.

 

전 씨 아저씨가 황 회장을 바라보자, 황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단지가 깨졌으니 돈은 못 내주겠네. 단지 깬 사람한테 돈 내 달라고 하던가? 상품이 망가졌는데 돈을 어떻게 내 주겠나?”

전 씨 아저씨는 고 기자를 봤다.

 

그게 가짠데, 가짜 석청 잘못 먹으면 황천 길 가는 거 몰라요? 내가 당신 생명의 은인이요! 은인!” 고 기자는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내심 고 기자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냥 사양 꿀 정도가 아닌, 특이한 석청 꿀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황 회장이 뭔가를 더 집어넣었다면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을 일 같았다.

 

깨진 석청 꿀단지는 처참하게 깨져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왱왱거리며 벌들이 하나 둘 깨진 꿀단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설탕에 중독된 벌들이야 꿀이든 설탕이든 가리겠는가? 단 맛이 나면 그 뿐.

 

깨진 꿀단지를 바라보는 전 씨 아저씨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얼굴은 곧 터져버릴 것처럼 충혈이 되었고 제 멋대로 일그러졌다.

 

야이. 시팔 놈들아! 내 석청 물어 내.”

  

아저씨의 입에서 우왕하고 울음소리와 짐승 같은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선 빈약한 체격을 가진 아저씨는 고 기자와 황 회장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가 두 사람의 멱살을 동시에 잡았다.

 

나는 늘 담담하고 우아한 말만 하던 시인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짐짓 놀랐다. 그것보다는 평소 고상하던 시인 아저씨의 감정이 한순간에 짐승처럼 무너져 내린 것에 더 놀랐다. 하지만 곧 이해했다. 전서민 아저씨의 석청은 그냥 꿀단지가 아니라, 아이를 갖고 싶은 희망 그 자체였으니까. 내가 그리 신호를 드렸는데도 모른 척 하시더니. 가엾은 아저씨.

 

전 씨 아저씨는 두 사람의 멱살을 가장 적극적으로 잡고 있었으나 분노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담담히 컴퓨터로 매출 장부 정리를 끝내고 있는 동안 내내 세 사람은 서로 멱살잡이를 하면서 서로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느 누구의 편도 들기 힘들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이들의 이해관계에 개입할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멱살잡이가 너무 길어져서 경찰에 연락을 할까, 손으로 전화모양을 만들어 황 회장에게 신호를 보내니, 황은 전화하지 말라는 눈짓을 한다. 사실 계속 뒷짐을 지고 있는 골격 큰 황 회장이 작정하고 완력을 부리면 두 사람쯤 손쉽게 제압할 것 같았다. 황 회장의 입장에서는 폭력사건으로 신고를 했다가 경찰조사를 시작하게 되면 가짜 꿀이 도마에 오를 테니 경찰의 행차가 그리 달갑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세 사람은 한데 얽혀 멱살잡이를 계속 했다. 양봉원이 있는 산기슭이 인근 동네에서 거리가 좀 떨어져있는 덕택에 싸움구경꾼이 없는 것이 이들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귀 밝은 먼 동네의 개들이 컹컹 짖었지만 이들은 그 소리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쉽게도 나는 이 흥미로운 싸움의 결과를 모른다.

 

근무시간 외에는 칼 퇴근을 하기로 황 회장과 미리 약속을 해두었던 까닭이다.

 

퇴근을 하는 내 가방 속에는 아까 엑셀로 정리한 황 회장의 장부 사본과 양봉현장 사진, 고 기자와의 대화를 담은 mp3 녹취파일이 담긴 USB가 들어있다.

 

불행히도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누나친구들 말처럼 애초부터 어른이 되기엔 글러먹은 애였던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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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송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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