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향(殘香)

by 월가하 posted Aug 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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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하고 달콤한 향이 사랑스럽게 하늘거리며 코 점막을 두드린다. 진하지만 역하지 않고, 달지만 메슥거리지 않는 향이라고, 걸음을 멈추며 가만히 생각했다. 무슨 향일까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리면 제법 잘 꾸민 듯한 문이 창문 유리 사이로 오렌지빛 등불을 뿜어내며 묘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것에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후각이 예민한 사람도 거리낌 없이 끌어당기는 향이라니, 신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출처를 알 수 없는 확신이 온몸에 엄습하며 문을 열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저가 그토록 찾던 향이 저곳에 있을 것이라는, 정신을 지배하고 전신을 짓누르는 지나친 확신. 그랬기에 문을 열었다. 그 묘한 위압감을 풍기며 오렌지빛을 휘두르고 있는 문 너머의 향을 좇았다. 그 행위을 굳이 단어의 나열로 표현해 보자면 광신도, 혹은 맹목적 사랑. 딸랑 하는 자못 흔한 방울소리와 함께 퍼지는 오렌지빛 위로, 라벤더 향과 흡사한 분위기의 목소리가 귓가에 걸음 했다.

"어서 오세요."

*

 도환은 후각이 상당히 예민했다. 그는 후각이 신기할 만큼 발달했는데, 모두가 느끼지 못하는 향을 홀로 느끼고 얼굴을 일그러뜨릴 정도였으니 자칫 피곤할 정도의 후각이었다. 물론 덕분에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곤 하지만, 도환은 계속해서 온갖 종류의 향을 맡아야 하는 제 직업을 썩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어떤 향은 너무 진해서 어지러웠고, 또 어떤 향은 너무 가벼워서 금방 사라져버렸다. 조향사라는 직업 자체가 여러 종류의 향을 만들어야 한다고 해도 제작한 향들이 묘한 경계선을 지나친 이상 의미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향들을 걸러내는 게 도환의 역할이었다. 물론 도환의 직업이 조향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본인의 뛰어난 후각을 응용해 만들어진 향들을 점검했다.
 그런 그에게도 긴 시간 동안 찾길 바랐던 향이 있었다. 가볍게 몸 위에 내려앉으나 쉽사리 흩어지지 않는, 그러면서도 제 본인의 색을 가지고 인간이라는 존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향.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어울릴 수는 없으나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어울리리라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도환이 머릿속으로 끝없이 그려내는, 그래서 간혹 실제로 맡아지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는 그 향은 그가 34년간 만나봤던 모든 사람과 다 잘 어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환 씨, 오늘도 고마웠어요."

 미묘히 입꼬리만 올려 빙긋 웃는 형상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성이 가늘어진 눈으로 도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조금 무른 사람이라면 별생각 없이 웃으며 대꾸해줬겠지만, 그렇지 못한 도환은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을 얼추 읽어내곤 무덤덤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저를 싫어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조금만 향이 틀어져도 태클을 거는 도환이었으니 그 향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유독 이 팀만 야근 일수가 잦은 것도 도환의 끝이 없는 태클이 있어서라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친절하게도 인사를 하러 와주다니, 도환은 그녀가 명백히 비꼬기 위해 말을 건넸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인사하기 귀찮으실 텐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도환이 딱 잘라 말하자 여성의 얼굴이 조금 벌게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름도 모르겠는 여성의 수모 따위,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도환은 제 짐을 챙겨 그 공간을 벗어났다. 물론 이렇게 빠져나올 경우,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신을 깎아내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말도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도환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발을 내디디며 잠시 어제를 회상했다. 어제는 일이라는 명목하에 샘플까지 가져와 코를 혹사시켰고, 그 스트레스에 못 이겨 잘 하지 않는 술에 손을 댔었다. 그리고 반쯤 흐려진 정신으로 몸을 가누며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섰었다. 깜빡깜빡, 눈이 아릴만큼 색이 진해 보이던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기억났다. 그것과 유사한 가로등을 세 번 지나치고 네 번째가 될 무렵, 나른하게 코 끝에 맺히던 향이 있었다. 그것에 홀려 고개를 돌렸고, 오렌지빛을 뿜어내는 문을 발견했다. 오렌지, 밝은 주황빛의 색. 그 문에 시선이 닿은 짧은 순간에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히자 라벤더 향이 입혀진 듯한 목소리가 귓등을 타고 흘렀다. 사늘한 온기를 지닌, 얼핏 들어도 라벤더를 연상시키는 가녀린 여성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탁, 어느새 도환의 발걸음이 멎었다. 홀렸다. 이 단어 외에는 도무지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살갗이 일어나며 소름이 등골을 달렸다. 도환의 눈이 정면의 문을 바라봤다.

어젯밤의 장렬했던 오렌지빛이 도환을 기억 속에서 잡아끌었다.

*

 5일이 지났다. 그 소름 돋는 향에 홀려 찬란한 오렌지빛을 뿜어내던 문 앞에 발길을 멈춘 뒤, 벌써 5일이나 지나버렸다. 그 짧은 닷새 내내 도환은 꿈속에서 그 향을 뒤좇았고, 이젠 슬슬 지쳐가려 하고 있었다. 매일 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소름에 넋을 놓았다. 그날 밤 코끝에 맺혀버리고 만 향이 지독하게 몸에 배어서 끝까지 도환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새어 나온 피로가 뇌를 집어삼켜가서 티는 내지 않을지언정 도환의 정신적 체력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속을 게워내고 싶어졌다. 한껏 피로해진 몸에 견디기 힘든 독한 향과 스트레스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안 그래도 무거운 몸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머리가 피로에 엉망으로 뒤섞여 지끈거렸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힌 도환이 맹독에 절은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약한 소리 한번 않는 도환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끝내 떨쳐내지 못한 향을 미친 듯 좇는 꿈이 두려워 잠조차 편히 자지 못했고, 그 연유로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 눈가가 팽팽하게 아려왔다. 평소엔 흘려듣지 않았던 조향사들의 말 한마디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한 상태였다.

"도환 씨, 오늘 피곤해 보이는데 이만 돌아가세요."
"……괜찮습니다만."
"아니요,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도환 씨가 평소에 열심히 하셨으니 보내드리는 거예요. 빨리 가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신 다음, 내일 오세요."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상사의 말에 저가 그렇게 티를 냈나 싶어 얼굴을 쓱 문지른 도환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순, 핑 하고 흔들리는 시야에 움직임을 멈췄다. 다행스럽게도 순간의 흔들림은 한 번으로 그쳤지만, 이 한 번이 언제 두 번, 세 번으로 늘어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 도환은 인상을 찌푸리며 부족해진 잠을 채워 넣을 방법을 생각했다. 지금 상태로서는 자는 게 진정 자는 것이 아닐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해결 방법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퉁, 신발코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에 도환이 생각을 멈추고 정면을 응시했다. 제 앞을 가로막은 단단한 유리문에 뒤에서 그를 황당하게 쳐다보는 조향사들의 모습이 비쳐 이 상황이 조금 민망해졌다. 사실 평소의 제 이미지를 생각하면 조금이 아니라 많이 민망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도환이 괜스레 민망함을 덜어보고자 뒤돌아 인사를 하며 문을 열었다. 덜컹하고 문이 열리자 그 사이를 통해 깨끗한 공기가 스며들어 도환의 옷에 묻은 진한 향을 털어냈다. 한순간 훌훌 날아가 버리며 흩어지는 향에 버릇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문득 숨이 막혀왔다. 그 향. 도환을 홀려 그 문 앞까지 가게 만들었던 그 향이 언뜻 코끝에 스치는 것 같았다. 분명 코는 아무런 향도 인지하지 못했는데 이상하게도 뇌는 그 향을 느끼고 도환이 발걸음을 내딛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5일 전의 그날 문을 열어볼 것을. 도환이 무겁게 호흡을 삼키며 단 두 번 갔음에도 다리가 기억하고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어쩌면, 도환은 그 불면증의 해결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 방법대로 해결해버린다면 스스로가 그 향에 중독돼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암암리에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은 도환의 직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진짜 멀지 않아서 되려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차라리 너무 멀어서 가는 데 오래 걸렸다면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한 번쯤은 더 생각했으련만 그리 멀지 않으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불면증은 해결해야겠다 싶어 도환이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열 의향으로 문을 밀자 훅 하고 너무도 손쉽게 열려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순간이었다.
 딸랑,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던 단조로운 방울소리가 톡톡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날의 향이 물살처럼 밀려들어왔다. 도환의 눈이 크게 치떠지며 그 향에 반응했다. 코끝에 맺혀있던 향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작은 파동을 만들어냈고, 그 작은 파동은 곧장 물먹은 솜의 무게처럼 불어나 순식간에 도환의 정신을 잠식해갔다.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득히 먼 곳. 그곳이 설령 제 코앞이라 할지라도 도환은 그 거리감을 인지하지 못 했을 것이다. 마치 금단의 구역에 발을 딛기라도 한 것처럼 도환의 팔이 가늘게 떨려왔기에, 도환의 무의식은 저가 서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님을 확신했다. 저가 방금까지 발을 딛고 있던 문의 바깥과 지금 당장 제 발이 닿아있는 문의 안은 완벽히 다른 세계였다. 또롱, 풀잎 위 빗방울이 젖은 흙을 다시 한 번 적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 흙은 이미 젖었으나 그 위로 떨어진 물방울은 명백히 제 존재를 드러내며 땅 위에 자리했다. 누군가에게는 한낱 빗방울일지 몰라도 그 작은 움직임은 거대한 대자연의 일굼 중 하나였다. 그 젖은 흙 위로 발자국을 찍어내며 나아가자니 싱그러운 과일향이 뺨을 더듬으며 미소 지어주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붉음을 띠는 뺨이 그토록 고와 보일 수 없었다. 신발에 묻어 나오는 흙의 수분은 결코 오염된 것이 아니었고, 하늘거리며 제 옆을 맴도는 과일향은 결코 거북하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여태껏 함께 해온 향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향이었으나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한 가지 종류의 꽃에 국한된 것이 아닌, 온갖 꽃이 다 섞여서 내는 자연스러운 야생화들의 향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 꽃들 사이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직접 개조해 또렷한 향을 가진 꽃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각각의 꽃이 소박한 향을 흐르게 해 거대한 강물을 이룰 뿐이었다. 결국 그 강물 앞에 무릎을 꿇은 건 인간이었지만 그건 지극히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가벼우나 천박하지 않고, 그 가벼움 속의 울림은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무언가. 하지만 결코 짓누르는 무게는 아니었기에 불편이란 없었다. 저가 찾던 향. 그토록 찾아헤매어 쳇바퀴 돌듯 조향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만든 향. 아아, 결국 인간은,

 태초를 향할 뿐이었던가.

 그리고 그 순간 라벤더 향이 들렸다. 그래, 들렸다. 그 강렬한 오렌지빛에 넋을 빼앗겨 처음 문을 열었던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잊지 못 했던 라벤더 향을 입힌 목소리.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내려져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그 깨끗한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도환은 처음으로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

 자발적으로 향수 집을 찾아간 그날 이후로, 도환은 일을 마치면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향수 집을 방문했고 라벤더 향을 덧씌운 그녀 또한 이제 익숙해졌는지 웃으며 맞이해주었다. 삼일 전에 알게 된 그녀의 이름은 한여은. 도르르 혀 위를 구르는 부드러운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쯤 되니 도환으로서는 퇴근시간이 절로 기다려질 정도였다.
 사뿐히 인도 위를 걷는 도환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부드럽게 풀린 표정은 나른했다. 도환은 여전히 그 향을 갈망해 꿈에서조차 끝없이 좇지만, 요 근래 들어서는 꿈의 끝이 올 즈음엔 그 향을 움켜쥘 수 있었다. 손에 감기는 향의 감촉에 취해 있노라면 어느새 향은 여은으로 변해 도환에게 미소 지어주고 있었다. 그녀를 닮은 투명한 미소는 도환이 그 위에 제 색을 마구 칠해주고픈 욕구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가 제 색으로 물들기를 바란다. 저와 동화되어 한없이 저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는 욕심을 심장 아래로 꾹 짓누르며 도환이 깊게 심호흡했다. 눈앞에 서 있는 문이 언젠가의 태초로 통하는 문처럼 보였다. 도환은 눈을 감고 이 뒤에 펼쳐질 장면을 그렸다. 단조로운 방울 소리와 그 청명함을 가르는 라벤더 향 목소리. 어서 오세요 하는, 누구에게나 들려줄 법한 말이었지만 그 뒤에 제 이름이 뒤따르면 그것은 결코 흔한 말이 아니다. 빨리, 그녀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도환이 문고리에 손을 얹고 문을 밀자 역시나 방울소리가 울렸다. 딸랑, 어쩌면 제 집의 초인종 소리보다 더 귀에 익을지도 모르는 방울소리가 청명했다. 살며시 콧잔등 위를 노니는 라일락 향이 먼저 그를 반겼고, 이내 따라오는 여은의 목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그녀의 얇은 입술이 움직이며 제 이름을 담아내자 도환이 웃으며 여은에게 다가갔다.

"새로 조향하고 계십니까?"
"네, 저번에 라일락 향을 기본 베이스로 샴푸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한 번 더 부탁드린다고 연락을 주셨거든요."
"확실히, 여은 씨의 향이라면 연락할 가치가 있지요."
"쑥스럽게도 오늘따라 띄워주시네요, 도환 씨."
"사실이니까요."

 실제로 저도 그 향에 끌려서 오게 된 것 아닙니까. 낮게 웃으며 조곤거리는 도환의 말에 아직 풋내가 엿보이는 미소를 지은 여은이 샘플 병을 매만졌다. 분홍의 매니큐어가 잘 어울리는 손가락은 세심하게 향을 조율했고 그 조율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향을 맡으며 도환은 그 답지 않게 느긋함을 즐겼다. 그가 겉옷을 벗으며 옆에 위치한 의자에 앉을 때쯤, 그새 조향에 집중하기 시작한 그녀의 눈은 자못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잠시 내려 묶은 머리카락이 차분히 그녀의 등에 올라앉아 있었고, 그것은 평소의 모습과 대조되어 보여 도환에게 묘한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한 번 겉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도환은 아예 턱까지 괴며 그녀의 외관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전체적으로 파스텔 같은 분위기가 나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겉모습을 이루는 하나하나는 뚜렷한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웠지만 유독 도드라지는 입술은 연한 체리색이었고, 그것을 바라보던 도환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계속해서 달음박질치는 심장이 체내를 울리며 얼굴로 열이 확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덜미며 얼굴이 달아오른 냄비 마냥 뜨끈거려 급히 열을 식히려 하는데, 그런 도환의 귀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다 됐어요. 도환 씨, 검사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드럽게 천장을 향하는 호선의 입매와 반달이 된 눈매가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예쁜 분홍의 입술은 말랑할 것이 분명해 보였고, 생글거리는 눈동자는 그 안의 생기를 그대로 비춰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생기를 넘어 대자연을 비춰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도환의 머릿속을 채워갔다. 그 향을 조향한 사람이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대자연에 반해버린 건가. 그 향도 그렇고, 이 조향사도 그렇고. 제법 낯부끄러운 생각을 하며 여은이 내미는 샘플 병을 받은 도환이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여은을 향한 감정과는 별개로, 감별을 위해 순식간에 날을 세운 후각이 미세한 향을 잡아냈기 때문이다. 콧속의 신경을 사로잡는 샘플 향은 고작 샘플임에도 여은의 제작품이라는 것을 표현하듯, 샴푸 향으로 쓸 것이기에 조금 진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오점을 잡아낼 수 없었다. 샘플 병을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음에도 아직 코끝에 머무는 게, 지나가는 사람의 코를 휘어잡는 데 일말의 문제도 없으리라.

"좋네요. 역시 여은 씨는 다릅니다. 흔한 라일락 향을 이렇게 조율하다니, 감탄만 나오는군요."

 도환의 말에 샘플 병을 진열대에 놓아둔 여은이 뺨을 긁적이며 맑게 웃었다. 칭찬이 쑥스러운 게 틀림없었다. 옅은 붉은 빛이 감도는 뺨은 마치 찹쌀떡 같아 꼭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고, 연홍의 입술은 매끄럽게 몸체를 휘고 있었다. 오물오물, 무언가를 뱉는 입술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벚꽃의 색을 띠면서 그 사이로 흘러넘치는 소리는 라벤더 향이 입혀진 게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문득, 저 입에 입 맞추면 라벤더 향이 날까, 하는 생각이 도환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건 단순한 충동이었고 또한 무의식이었기에 도환에게 그 생각을 의심할 이성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묻힌 이성이 무의식을 누르지 못한 그 순간, 도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이는 여은의 눈을 바라봤다. 따뜻했다. 그대로 넋 놓은 채 여은과 시선을 마주하던 도환은 몇 초가 지나서야 저가 그녀에게 키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 번 사실을 깨닫자 구석에 쭈그려있던 이성이 무럭무럭 되살아났고, 화들짝 놀라 급히 입술을 뗀 도환은 여은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며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제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걱정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즉 제 입술에 남아있는 온기가 기꺼워 도환은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목덜미가 뜨끈했고, 그보다 더한 귀는 뜨끈한 정도가 아니었다.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온통 뒤섞여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그대로 한참을 얼버무리던 도환은 여은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곳을 뛰쳐나왔다.
 열심히 뛰어가면서도 도환은 아까 그 상황을 상기했다. 여은의 입술은 도환의 상상처럼 말랑하고 따뜻했으며, 또한 부드러웠다. 라벤더 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심장이 간질간질해지는 향이 느껴져 입술을 떼고 싶지 않았다. 화악, 더 이상 붉어질 것 같이 보이지 않던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당황을 드러냈다. 그렇게 도환이 한참을 안절부절하고 있는 사이, 가녀린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 도환 씨……!!"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방황하던 도환의 발이 멈췄다. 사늘한 온기의 목소리는 가쁜 숨소리와 뒤섞여있었고 그럼에도 특유의 라벤더 향은 지워지지 않아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붉은 얼굴의 도환이 자신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돌아보자 예상한 그대로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저 못지않게 붉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은이었다. 아, 진짜, 저렇게 반응해주시면 괜히 기대하게 되지 않습니까. 속으로 타박은 하고 있지만 결코 싫은 감정은 아니어서, 도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괜찮습니까라고 말하려던 찰나, 그녀의 손에 들린 제 겉옷이 보였다. 저걸 가져다 주러 오신 걸까. 어렴풋이 짐작하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식었다. 그새 또 그녀가 저를 위해 달려왔다고 착각한 심장이 약한 맥박으로 서운함을 드러냈다. 온몸이 쳐져 기운이 쭉 빠졌지만 도환은 내색하지 않으며 여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한참을 색색이던 그녀가 도환의 겉옷을 그에게 내밀며 그를 올려다봤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은 달린 탓일까, 아니면 저를 향해 심장이 뛰는 탓일까. 억측이겠지만 제발 후자이길 바라던 순간이었다.
 꾹, 무언가 말랑한 게 도환의 입 위로 도장을 찍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도환은 잠시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내 아까의 그것임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당황해 입술을 떼기엔, 의식적으로 한 행동에 귓가를 물들인 그녀가 어여뻐 그럴 수 없었다.

"저랑, 연애하실래요?"

 그렇게 물어오는 그녀의 연갈색 눈엔 오롯이 도환만이 들어차있었다.

*

 딸랑,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소리가 거리에 나앉으며 그 존재를 알렸다. 활짝 열린 문은 그 안으로 햇살을 잔뜩 들여보내고 있었고, 그 햇살 위로 도환의 구두가 발그림자를 그렸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가게 내를 훑으며 그녀를 찾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그녀를 보고 싶었고, 품안 가득 안고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열린 문의 너머에서 향을 좇기 바빴으련만 이젠 향이 아닌 인간을 좇는 스스로의 모습에 도환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깊어지는 감정의 골은 심해의 해곡만큼이나 심장에 뿌리내리고 있었으나, 그의 몸은 지치기는커녕 활기를 얻어 갔다.

"일찍 오셨네요, 도환 씨."

 상냥히 웃으며 방에서 나온 여은이 도환에게 부드럽게 눈을 휘어 보였다. 한 떨기 꽃 같은 미소는 아직 오전인데도 그 수려한 미모를 발해, 도환의 심장 아래를 톡톡 두드렸다. 기분 좋은 고동이 체내를 채워가자 도환은 그것을 그대로 얼굴 위에 드러내며 여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달콤한 향이 폐 속에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향이라면 질식해 죽어도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이 도환의 무의식에 똬리를 틀며 그의 입가가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 향은 저를 이곳으로 인도해준 거대한 흐름이었고 그 거대한 흐름의 끝엔 사랑스러운 잔향이 남는다. 그것은 그가 이곳에서 깨달은 것이고 여은이 바로 그 잔향이었기에, 그녀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긋한 미소를 그린 도환이 그녀와의 거리를 0으로 좁히자 예의 그 작은 몸이 그대로 품에 쏙 안겨오는 게 느껴졌다. 이 가녀린 꽃을 이대로 저 혼자 보고자 하는 게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역시, 좀 더 미래를 약속해도 괜찮지 않을까.

"제가 당신의 미래에도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일 년 뒤든, 십 년 뒤든, 가능하면 죽는 그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희망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떨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떨림을 눈치챈 여은이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미미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한치의 미동도 없었기에 도환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순수한 미를 담은 눈꼬리가 접히며 도환이 좋아하는 미소가 그림같이 그려졌다. 그 웃음이 허락의 의미일까, 가늠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라벤더 향이 들렸지만, 평소와 다른 열기가 숨어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간이 지나 향이 흩어져 사라진다 해도, 사람들은 그 향을 잊지 않아요. 바로 잔향이 남아있기 때문이죠. 전 당신에게 있어 잔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그녀 다운 허락의 말에 도환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풀어질 대로 풀어지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가 곧장 그녀에게로 허리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급하게 맞부딪힌 입술과는 다르게 키스는 상당히 정중하게 이어졌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은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어느새 꽉 붙잡고 있는 서로의 손에서 은빛의 금속이 반짝이며 그 존재를 여실히 알리고 있었다. 아득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들의 손에 남아있을 반짝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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