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희
여자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골까지 쨍한 악다구니가 텔레비전 스피커를 통해 집 안 전체에 퍼졌다. 재방송되고 있는 연속극은 막 절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사랑의 정점과 권태기가 동시에 들어있는 드라마 한 편. 불타오르는 사랑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남녀 한 쌍은 부모도 친구도 버리고 시골로 도망 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모두가 반대한 결혼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모두 두 편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볕이 좋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는 주말 오전. 저런 하극상을 보며 허송세월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 몸과 꼭 같은 온도로 따뜻해진 소파 때문에 그랬고, 노곤해지는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눈이 감기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눈을 덮은 눈꺼풀 속으로, 더 짙은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멀리서 전화벨이 울렸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잠깐의 선잠이었지만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부엌 식탁으로 다가갔다. 부엌에 막 들어섰을 때 즈음, 전화벨이 뚝 끊겼다. 몸을 부르르 떨어대던 전화기의 진동도 멎었다. 전화기를 들어 통화목록을 살펴보았다. 진 혜영. 이라는 고딕체 글씨가 목록 제일 위에 떠 있었다.
혜영은 내 대학동기였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소파에 돌아가 앉았다. 인조가죽 아래에 겹겹이 쌓인 스펀지들이 새삼스레 딱딱하게 느껴졌다. 왜 전화를 걸었을까. 나는 혜영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이 조금 꺼려졌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혜영은 이따금 내게 전화를 걸어 보호자 행세를 하곤 했다. 통화를 할 때 마다 열심히 살고 있냐고 채근하는 혜영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시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 화면에 다시 혜영의 번호가 떴다.
전화를 받았다. 혜영은 글 쓰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얼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방해한 거야? 미안해. 전화 받을 수 있어?”
“응, 괜찮아. 말 해.”
“아, 별로 안 바쁘구나. 다행이다. 혹시 너 준희 기억해?”
준희는 혜영과 친한 대학 후배였다. 내가 준희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건 ‘길다’는 느낌뿐이었다. 목도 길었고, 손가락도 길었고, 말도 길었다. 나는 어렴풋한 준희의 실루엣을 떠올리며 무릎을 모아 앉았다. 추리닝 무릎부분에 조그마한 구멍이 나 있었다. 무릎에 잡힌 주름이 틈으로 보였다. 구멍으로 보이는 무릎을 긁으며 전화를 받았다. 혜영이와 이야기를 괜히 부산을 떨고 싶어진다.
“준희가 재작년부터 자취했던 건 알고 있지? 과 조교로 취직해서, 학교 근처 원룸에 살잖아. 과 선배가 쓰던 방 이어받았다고 내가 그랬었잖아.”
“응. 기억나.”
“근데 알고 보니까 거기 원룸 사장이 완전 또라이였대. 샤워하는 소리가 너무 크다, 여자가 라면을 너무 게걸스럽게 먹는 거 아니냐. 속옷빨래는 손으로 해라. 이러면서. 완전 변태 아니냐? 그래서 준희가 사생활침해 그만하라고 부탁했는데 주인이 갑자기 노발대발 화를 내면서 나가라그랬대.”
“응.”
나는 무릎을 긁던 손을 들어 반대쪽 귓구멍을 후볐다. 왠지 습한 것 같았다. 손톱 끝에 노란빛을 띄는 부스러기가 끼였다. 후, 귀지를 불어내자 혜영이 잘 듣고 있는 거냐며 물어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혜영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딱딱한 소파에 계속 앉아있으니 허리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상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혜영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응, 응. 투박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내 목에서 난 소리가 맞을까. 잠시 내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근데 혜영아. 네가 전에 너희 집 혼자 살기엔 조금 넓다고 했었잖아.”
짙은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오기 시작했다. 발가락을 움츠려 보았지만, 나는 불안이 곧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혜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준희가 두 주 동안 머물 곳이 없다고 전해왔다.
“그래서 말인데, 준희가 이 주일만 너희 집에서 살면 어떨까 싶어서. 네가 학교 근처에 살아서 준희가 출퇴근하기 편할 것 같더라고. 이건 그냥 내가 물어보는 거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근데 어디든 구해지기만 하면 방세는 제대로 낼 거라더라. 너 요번에 책 낸 거 좀 안 팔렸잖아.”
사실이었다. 작년의 주말의 나였다면 영화를 보러 나갔을 테지만, 텔레비전 앞에서 드라마를 보는 게 내 유흥의 다였다. 영화 값이 너무 비싸졌다. 내게는 비싼 영화 값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혜영의 말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문화생활을 줄이고, 옷값을 줄였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식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식탁에는 뜯어보기 두려워 쌓아둔 카드 고지서 더미가 있었고, 꼬박꼬박 써나가던 가계부는 이미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어쩔래? 빨리 정해줘야 준희가 다른데 구해보든 일주일 더 버티든 할 텐데.”
“언제 방 빼야 하는데?”
“다음 주 금요일 이었나 그럴걸.”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쌀도 다 떨어져가고 있었고, 대중교통을 탈 돈이 아까워 외출도 줄였다. 준희, 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쌉싸래한 느낌이 드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당장 필요한 돈은 메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언제 이사 오는데?‘
“준희한테 네 번호 보내놓을게. 그럼 글 열심히 써. 화이팅!”
전화가 끊겼다.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해야할까. 두려워야 할까. 설레어야 할까.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나니 별안간 배가 고파졌다. 텔레비전에서 격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 조연이 주인공 남자의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 드라마는 끝났다. NG가 많이 났었는지 남자 배우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왜 항상,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저 모양일까.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벨이 울려서 핸드폰을 확인 했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무심코 끊으려다가 준희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콧소리가 섞인 여자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해왔다.
“언니, 저 준희에요. 진짜 오랜만이에요! 룸메이트가 생기는 게 내내 꿈이었는데, 그게 언니라니 진짜 기분 좋은 거 있죠?”
준희는 잔뜩 흥분해서 자신이 공동생활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청소는 잘 하지만 남이 주변을 어질러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갈비찜을 한 시간 안에 만들 수 있고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는 삼십분 안에 끝낼 수 있다면서.
“이사는 다음 주 금요일에 하려구요. 언니 그날 시간 괜찮아요?”
“응. 나는 뭐 항상 집에 있지.”
“어, 그러면 시간도 제 맘대로 정해도 될까요?”
“그렇게 해. 정해지면 연락 줘.”
수요일 오후 한시. 준희의 짐이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활짝 열린 문 밖에서는 바람소리만 들렸다. 무거운 짐을 옮기는 소리나, 준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곧 2시가 되었다. 준희는 10통의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손바닥을 크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생글생글 웃는 준희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사가 시작된 것 이었다. 인부들은 신발을 신은채로 집 안을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거실에 짐들을 내려놓고, 하나씩 준희의 방으로 옮겼다. 준희 역시 신발을 신고 들어와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니, 나 물 좀 주세요. 원룸 짐 싸면서 먼지를 너무 많이 마셨더니 목이 말라요.”
나는 서둘러 부엌으로 갔다. 컵 건조대에는 내 컵과 준희의 컵이 뒤섞여 정리되고 있었다. 나는 준희의 컵에 물을 담아 갖다 주었다. 준희는 한숨에 물을 마시고 소파에 등을 기대 눈을 감았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거실 바닥에 앉았다. 크고 작은 상자들이 끊임없이 거실에 쌓였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지친 기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끊임없이 짐을 들고 들어오는 인부들 사이를 비집고 준희의 방 앞으로 갔다. 인부들은 준희의 침대를 옮기고 있었다. 좁은 방문을 통과하기엔 너무 큰 침대였다. 이리저리 침대를 돌려보며 방 안으로 옮기려 하던 인부들은, 침대 모서리가 비닐 장판을 찢고 나서야 침대 틀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방 배치는 얼추 다 끝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방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침대,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상, 남은 공간에 빈틈없이 서있는 책장. 제대로 발 디딜 틈이나 있을까 싶었다. 발가락을 세워 찢어진 장판 사이를 살살 긁어보았다. 엄지발톱만 한 구멍 사이로 시멘트의 거친 질감이 느껴졌다.
직원들은 자장면을 한 그릇씩 먹고 이사를 마무리했다. 집에 들어왔을 때처럼, 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박스들을 정리하고 현관에 깔아놨던 담요도 척척 접어 치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와 준희 둘 뿐이었다. 나는 집안 곳곳에 찍힌 발자국들을 따라 기어 다니며 걸레질을 했다. 이마에 난 땀이 손등으로 떨어졌다. 준희는 제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준희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책을 정리하는 일이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는 마지막 발자국을 다 지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걸레냄새가 배인 손으로 땀을 닦았다. 온 몸에서 젖은 걸레 냄새가 풍겼고, 온 몸이 다 축축했다. 가볍게 샤워를 할 요량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변기 커버가 올라간 채 오줌자국이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검은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찍혀있기도 했다. 나는 다리를 뻗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슬리퍼를 하나씩 신었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지우고, 변기를 닦았다. 내 몸에 흐르는 게 물인지 땀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준희는 청소를 다 마칠 때 까지 콧노래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옷을 벗고 물줄기 아래로 들어갔다. 정수리부터 따뜻한 물줄기가 흐르며 몸에 묻은 냄새를 씻어 내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며 화장실과 마주본 준희의 방을 건너보았다. 준희는 기다렸다는 듯, 배가 고프다며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훑어보았다. 장조림, 멸치볶음, 숙주나물이 차례로 쌓여 있고, 전날 저녁에 한 밥이 담긴 밀폐용기가 제일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준희는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며, 얼른 밥을 먹자고 말했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준희의 벌린 입 사이로 장조림이 씹히며 형체가 변해가는 과정이 보였다. 묽어진 밥과 장조림이 뒤섞여 갈색의 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평소 반찬을 잘 해 먹지 않는 나에게는 장조림 한 통 만드는 것이 꽤 큰 행사였다. 고기를 한 시간 가까이 삶고, 식히며 생기는 기름 층을 다 걷어내고, 메추리알은 따로 삶아 껍질을 다 벗겨내어 만든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차려놓은 상만 내려다보며 밥을 먹었다. 준희의 젓가락은 자꾸만 장조림으로 향했다. 자꾸만 줄어드는 장조림을 바라보며 아까워하지 말자고 나를 다독였다. 준희는 장조림 국물에 밥을 비비는 내 숟가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 했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왜?”
“그냥, 언니도 편식을 하는구나 싶어서요. 언니는 고기만 주로 먹나봐요.”
대답 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대꾸를 하면 날 선 대답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밥을 씹으며 넘어오려는 말을 겨우 참았다. 고기 향과 간장 냄새가 풍겼다. 이따금 마늘이 씹히기도 했다. 준희는 멸치볶음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마늘이나 꽈리 고추는 쏙 빼고 대가리까지 성하게 달린 멸치만 골라 먹었다. 멸치볶음도 빠르게 줄어들어갔다. 나는 준희의 젓가락질이 점점 더 신경 쓰였다. 내가 밥을 제대로 씹고 있는지, 입에 마늘이 들어갔는지 메추리알이 들어갔는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준희는 남은 밥을 싹싹 긁어 먹는 것으로 식사를 끝냈다.
밥을 다 먹은 준희는 식탁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준희의 시선은 의자 등받이에 걸린 내 카디건에 닿았다. 가을에 곧잘 입고 다니다가 날씨가 추워져 가끔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갈 때 걸치곤 하는 것이었다.
“언니, 저 카디건 되게 예쁘네요.”
“어, 저거 쓰레기 버리러 갈 때 입는 거야.”
“아, 진짜요? 저 잠깐 봐도 될까요?”
나는 등에 깔린 카디건을 빼 준희에게 건넸다. 준희는 어깨에 옷을 걸쳐보더니 팔을 하나씩 끼웠다. 팔 부분은 팽팽하게 당겼고, 카디건의 끝부분은 어정쩡한 위치에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했다. 준희는 카디건을 입은 제 모습을 내려다보더니 잘 어울린다며 손뼉을 쳤다. 나는 준희와 카디건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몸에 딱 달라붙은 비즈 장식은 어깨에서 돋아난 것 같았고, 팔은 옥죄어와 살이 볼록볼록 솟아나 있었다. 준희는 카디건을 벗지 않고 집 구경을 했다. 현관의 내 구두를 신어보더니 아무렇게나 벗어놓았고, 큰 맘 먹고 산 챙 모자를 써보더니 소파 아무데나 던져 놓았다.
나는 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고 몸을 일으켰다. 준희는 거실에서 부엌까지 달려 들어와 상을 치웠다. 카디건 끝자락이 장조림 국물에 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나는 그릇을 모아 개수대에 넣었다. 준희는 첫날밤을 같이 지내는 기념으로 맥주 한 잔 마시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저녁을 많이 먹어 배부르다고 했다. 배가 부르면 아파트 근처의 공원을 걷자고 물어오는 준희에게 걸레질을 하도 많이 했더니 무릎이 아프다고 말했다. 준희는 나와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어 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나는 실시간 검색어를 하나씩 검색해보며 준희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알람이 울렸다. 8시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세찬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준희가 샤워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거실 소파에 앉아 준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선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10시 20분이었다. 소변이 마렵기 시작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화장실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물소리는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죽죽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를 듣고 있자니 배를 짓누르는 느낌이 점점 더 심해졌다. 10분이 흐르고, 또 10분이 더 흘러도 준희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물소리가 잠시 끊겼다.
“준희야,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러는데 언제쯤 나와?”“저 이제 샴푸 씻어내는데요.”
“좀 빨리 하고 나와 주면 안 될까?”
“언니, 그냥 들어와서 누세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자꾸만 지금 상황을 곱씹었다. 내 집에서,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이렇게 오줌을 참고 있어야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준희만 없었어도 내가 이렇게 40분을 날릴 일은 없었다. 나는 다시 화장실로 가 문을 두드렸다. 주먹에 감정이 실려 문 두드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물소리가 다시 끊겼다.
“언니, 그냥 들어오세요. 안 볼게요.”
“소리는 어쩌고.”
“제가 계속 물 틀고 있을게요. 진짜 신경 안 쓰이니까 그냥 들어오세요.”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문고리를 돌렸다. 뿌연 증기가 화장실 밖으로 몰려나왔다. 준희는 이제 린스를 바르고 있었다. 나는 준희의 몸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며 바지를 내렸다. 변기 커버에 온통 물이 튀어 엉덩이가 축축해졌다. 그러다가 나를 쳐다보고 있던 준희와 눈이 잠깐 마주쳤다. 준희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물을 틀었다. 린스를 헹궈내며 물 아래에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 휴지로 변기 커버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일어서서 바지를 올리고 변기 뚜껑을 닫았다. 준희는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몸에 거품을 칠하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씻으며 준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증기를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그 후로도, 물소리는 30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드라이어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준희가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틈새로 준희가 내는 소음이 스며들었다. 지금까지의 아침은 항상 조용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았다. 소변을 참아야 했고, 식사시간도 평화롭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이어폰을 찾으려 몸을 일으켰을 때, 드라이기 소리가 뚝 끊겼다. 혜영은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머리를 빗으며 내 방을 기웃거렸다.
“왜?”
“손톱깎이 어디 있어요?”
“거실 텔레비전 앞에.”
준희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거실로 향했다. 경쾌한 듯 한 허밍은 온 집 안을 들쑤시고 다녔다. 이내 딱, 딱, 하고 손톱 깎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문 밖을 쳐다보았다. 왠지 정수리 쪽이 환한 느낌이 들었다. 방 맞은편의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은 반 정도가 물에 젖은 채 활짝 열려있었고, 바닥은 물 범벅이었다. 엉킨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나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어 머리카락을 수챗구멍으로 몰았다. 물이 튀어 바지에 자국이 생겼다. 준희의 밝은 머리카락은, 한 번에 수챗구멍으로 몰리지 않고 화장실 바닥을 떠돌았다. 나는 발로 바닥을 슥슥 밀어 머리카락을 모아 휴지로 훔쳤다. 준희는 화장실에 머리를 디밀고 손톱깎이를 변기통 위에다 대고 몇 번 흔들었다. 준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긴 눈매가 유령처럼 화장실에 잠시 머물렀다 밖으로 나갔다.
엄지손가락에 축축한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거머리 같기도 했고, 거미의 다리들이 서로 꼬여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덟 개의 눈을 가진 거미를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손을 흐르는 물에 씻어 보아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다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떼어 변기에 버렸다. 손을 깨끗하게 씻고 화장실을 나오려다가 다 닫히지 않은 선반을 발견했다. 선반 밖으로 드라이어기의 까만 전선이 선반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드라이어기를 꺼내 전선을 단정하게 감은 뒤, 선반에 넣고 화장실 불을 껐다. 발가락 사이에 머리카락 한 가닥이 끼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다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손톱깎이를 발견했다. 지렛대 부분을 접지 않아서 반달모양의 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준희의 방으로 향했다. 자꾸만 손톱이 밟혔다. 발톱인 것 같기도 했다. 하얗게 각질이 낀 손톱 조각들은 눌린 것도 아니고 박힌 것도 아닌 상태로 발바닥에 붙어있었다. 손톱들은 레드카펫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준희의 방. 나는 방문을 두드려 준희를 불러냈다. 준희는 문을 벌컥 열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준희의 뒤로 보이는 방은 금방이라도 바퀴벌레가 기어 나올 것처럼 더러워 보였다. 하루 만에 저런 상태가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멍하니 옷 더미를 쳐다보다가 준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참 말끔하게 생겼는데.
“준희야, 바닥에 손톱 떨어진 것 좀 치워줘.”
“네. 그럼 손톱 치우는 김에 청소기 한번 싹 돌릴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괜찮아요. 안 그래도 한가했는데 제가 할게요.”
해맑게 웃고 있는 준희를 보고 있다가 그냥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틀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 상하면 안 되지.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한 거야. 답답하게 막힌 것 같은 가슴을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자꾸만 순진하게 웃는 준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선량한 원룸주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음씨 좋은 아줌마일까, 참을성 많은 아저씨일까. 깊고 굵게 자리 잡은 세 줄의 이마주름과, 축 쳐진 눈 꼬리, 둥근 코끝에 달린 깊은 인중, 가는 입술. 평생 화 한번 낸 적 없는 것처럼 생긴 사람이겠지. 아마 살면서 처음 화낸 대상이 준희일지도 몰라. 지금 첫날이라 눈치를 본다고 본 게 저런 걸까. 혜영이는 준희의 성격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걸까.
저번 일요일, 혜영의 전화를 받은 손이 간질거렸다. 한 대 때려달라고 설설 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 진동모드로 설정되었던 핸드폰도 짜증났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절대 혜영이의 전화를 받지 않겠어. 몇 번이고 후회를 하며 컴퓨터를 켰다. 영화를 봐야했다. 아니면 음악을 들어야 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설을 참으려면 다른데 관심을 돌려야 했다. 뮤지컬 영화를 틀었다. 화면 속에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소녀들이 뛰어다니며 경쾌한 노래를 불렀다. 턱을 괴고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멀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소나무 향기가 풍겨왔다.
영화는 한없이 경쾌했다. 고난도 역경도 경쾌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모든 것을 이겨냈다, 서로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고. 각자 배려했다. 마음씨 착한 등장인물들을 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준희를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영화 안의 사람들처럼, 모두 언젠가 지나갈 일로 대하면 되는 것이었다. 웃는 얼굴로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극적인 화해 뒤에 흘리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흐느끼는 소리와,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착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별안간 바닥에 딱딱하고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이 아니라면, 준희의 짓임이 틀림없었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웃는 얼굴로 대하자고 스스로와 약속한 뒤였다. 문을 열자 수납장에 넣어 놓은 것들, 소파 위에 쌓아두었던 신문들,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잡동사니들이 바닥 위에서 뒹굴고 있는것이 보였다. 나는 마스크를 낀 채 내 방으로 들어서는 준희를 붙잡았다.
“지금 뭐해?”
“청소기 돌리는 김에 대청소하려고요.”
“그래서 지금 하는 거라고?”
“네. 지금 딱 하고 싶어서요.”
“내 방에는 왜 들어가는데?”
“대청소잖아요. 온 집안을 싹 청소하는!”
나는 준희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준희는 내 방을 꼭 치워주고 싶다며 우겼다. 나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준희를 피해 노트북과 핸드폰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발 디딜 틈이 없어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하얗게 먼지가 앉은 소파를 대충 털어내고 앉았다. 겨우 다스려놓은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준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내 책을 바닥에 다 흩어놓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이고, 이 작가는 내가 싫어하는 작가라며 내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나는 이어폰 틈으로 들어오는 준희의 목소리를 못들은 체 했다. 준희는 언니, 언니 하며 나를 몇 번 불러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콧노래 소리가 끊겼다.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방을 청소하러 들어간 것인지, 방을 구경하러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내 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도, 준희가 혼잣말을 하는 소리도. 나는 노트북을 접고 방으로 다가갔다. 준희는 활짝 펼쳐진 책을 한 권 들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준희를 흔들어 깨웠다. 준희는 화들짝 놀라며 깨더니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아, 언니. 나 아직 피곤이 다 안 풀렸나 봐요. 낮잠 좀 자고 다시 치울게요.”
“네가 바닥에 다 흩어놓은 건 어쩌고?”
“좀 자고, 일어나서 싹 다 치울게요. 그냥 두세요.”
준희는 좀비처럼 일어나 제 방으로 갔다. 나는 엉망이 된 내 방을 둘러보았다. 거실과 부엌 청소는 준희에게 맡긴다 쳐도, 방 청소는 내가 해야만 했다. 작가별로 책을 모아 책장에 꽂았다. 팔과 손바닥에 먼지가 묻어났다. 텅텅 빈 책장과, 바닥을 가득 메운 책들. 사방이 조용했다. 아주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책을 치웠다. 주말에 봤던 연속극이 기억났다. 귀가 울리도록 소리 지르는 사람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손을 날리는 주인공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며 재미를 느끼는 이유가 그거였구나.
책을 다 치우고 나니 바닥을 굴러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책 위에 쌓여있던 먼지들이 방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손을 씻고 팔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뒤 청소기를 꺼내러 거실로 나갔다. 거실도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잘 수납되어 있던 것들까지 죄 바닥에 내려와 있었다. 손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신문을 모아 소파 위에 쌓고, 약통을 정리해 수납함에 넣었다. 코로 먼지가 들어왔다. 금방 목이 칼칼해졌다. 어지르는 건 금방이어도, 치우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생각해보니 나는 3일 내내 청소를 해왔다. 이사를 하기 전날, 이사를 온 날, 그리고 이사 온 다음 날. 나는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해가 다 저물어갈 때 쯤, 정리가 대충 끝이 났다. 준희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밟히는 먼지들이 조금씩 사라졌다. 걸레로 바닥을 닦아야할 것 같았지만, 그러기에는 몸이 너무 피곤했다.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꽤 크게 느껴졌다. 푹 자고 있던 준희에게도 그랬는지, 어두운 방에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이불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준희는 눈을 비비며 방 밖으로 나왔다. 나는 준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 청소기를 돌렸다.
“언니, 왜 청소해요. 제가 한다니까.”
“됐어. 거의 다 했어. 너 피곤해 보이는데 다시 들어가서 자.”
“언니 아니에요. 청소기 제가 돌릴게요.”
나는 준희의 말을 무시하고 부엌으로 넘어갔다. 청소기 소음 때문에 못들은 체 할 생각이었다. 준희는 휘청거리며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다시 병든 닭 마냥 졸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을 마저 청소하고 청소기를 껐다. 발바닥에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발을 씻지도 않고 방에 들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목을 한껏 꺾고 잠이든 준희를 깨웠다.
“나 어디 좀 나갔다 올게. 반찬 제대로 없으니까 뭐라도 시켜먹어.”
“1인분은 배달 안 될걸요? 언니 어디가요. 내가 김치찌개 해주려고 했는데.”
“그럼 2인분 시켜서 남겨. 나 나갈게.”
준희는 현관문을 나서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 하더니 신발장 문을 닫아버릴 뿐이었다. 굳게 닫힌 복도 창문 바깥으로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1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을 울려대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는데, 혜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준희에게서 벗어나니 혜영도 반가웠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전화 빨리 받네. 맨날 전화 끊을까 말까 고민할 때쯤 받더니만.”
“핸드폰을 들고 있었어. 근데 전화 왜했어?”
“준희 때문에. 준희는 너랑 사는 거 좋고 편하대. 고작 이틀 살았는데 벌써 가족처럼 편하다네. 눈치 보며 살지 않아도 되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 끝까지 차올라 있던 준희의 흉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혜영은 내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혜영이에게 소리가 닿지 않게 조심하며 침을 삼켰다. 준희가 정말 좋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무슨 저런 애가 있냐고 화를 내야 할까. 혜영이도 준희가 어떤 아이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준희를 내게 떠맡기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할 뿐 일수도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술을 떼었다. 혜영이를 떠보기 위해서였다.
“근데, 준희는 뒷손이 좀 없는 것 같던데.”
“그래도 시키면 다 하지 않아? 자기가 저질러 놓은 건 꼭 자기가 처리하고.”
“그래도 언제까지 내가 지적해주고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너 또 예민하게 굴지. 그러니까 네 옆에 사람이 없는 거야. 준희만 한 애가 어디 있니?”
혜영이 예의 그 따박대는 말투로 어조를 바꾸었다. 나는 혜영이 내게 ‘피와 살이 되는’이야기를 해 주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하지만 혜영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이사 오자마자 짐 싸서 도망갔을걸. 아마 앞으로도 준희만큼 너한테 잘 맞춰주는 사람은 없을 거야. 걔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리고 너 성격 맞춰 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이니?”
한숨을 쉬었다. 혜영은 나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것일지도 몰랐다. 혜영이의 경쾌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노래를 부르는 듯 한 말투가 낮에 본 영화를 상기시켰다. 한없이 긍정적이고 이타적인 주인공들. 딱 혜영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앞치마를 펄럭이며 춤을 추는 여주인공과 수화기를 붙들고 재잘대는 혜영을 떠올렸다. 방정맞고 수다스러운 게 꼭 닮았다. 나는 묵묵히 걸으며 혜영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혜영은 그러니까, 하면서 지금까지 해온 말들을 정리하려 했다.
“그래서 말인데, 계속 같이 사는 건 어때?”
나는 별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어두워진 휴대폰에서 혜영이 하는 말이 아직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 전원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그래도 혜영의 목소리는 계속 귓전에서 아른거렸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번잡한 마음이 조금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내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마트에 가달라고 했다. 택시가 출발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동네 대형 마트에 도착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라 사람이 많았다. 나는 카트를 뽑고 마트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무료 시식 행사하는 것도 몇 개 집어먹고, 카트기에 토마토나 냉동만두같은 것들도 조금 담았다. 발바닥이 조금 아파온다고 생각 할 즈음에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계산을 하러 가는 길에 있는 빵 코너 앞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얀 두건을 머리에 쓴 종업원이 고구마 케이크를 반값으로 판다고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미 배도 부르고, 조미료 향에 한껏 취한 사람들은 케이크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같은 말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종업원에게서 어떤 절박함이 묻어났다. 케이크를 팔지 못하는 것이 종업원 탓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파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일까. 나는 케이크 하나를 들어 보았다.
“이거 오늘 바로 안 먹어도 되고, 냉장고에 하루 이틀 넣어 놨다가 먹어도 괜찮아요. 반값 할 때 사 가요. 이 케이크 맛있어요.”
“하나 주세요.”
냉동만두와 토마토 옆에 고구마 케이크가 하나 놓였다. 집까지는 걸어갈 생각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들어보니 준희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다. 전화를 걸고 싶지는 않아 문자를 남겼다. 케이크를 사 갈 테니 포크와 앞 접시를 챙겨놓으라고. 만두와 토마토가 든 봉지와 케이크 상자를 각 각 한 손에 하나씩 쥐었다. 하루는 너무 길었고, 팔에 힘은 하나도 없었지만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생각하면 힘은 절로 솟아났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속으로 시시한 명언들을 중얼거렸다. 상자 안에 든 케이크가 자꾸만 기우뚱거렸다.
응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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