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상이 된 남자

by 진씨. posted Aug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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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이 된 남자



  이 남자의 전생은 다름 아닌 모기였다. 어느 고대 도시의 암모기였다. 산란을 앞둔 그는, 아니 그녀는 사람들의 피나 뽑아먹을 생각이었다.



  “여기 영양분이 많구나!”



  그녀는 피렌체의 어느 야외 전시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땀 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언어로 외쳤다. 사람들 사이를 윙 날아다니던 그녀는 조각상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팔린 어느 동양인을 발견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모습, 적당한 땀 냄새가 제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찜한 동양인은 사진만 찍어댈 뿐 모기가 제 살을 찔러도 못 알아챘다.

  이윽고 팔뚝이 가려워 긁던 동양인 남자는 그제야 모기를 알아챘고 씨팔, 이라고 속삭이며 손을 휘둘렀다. 훗날 그와 같은 동양인 남자가 될 이 모기는 그 손길을 피해 날아갔다. 그녀는 곧장 날아가지 않고 그 남자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어떻게 골려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이 올라간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조각상을 내려다보았다. 냄새도 나지 않고 미동조차 않는 그 조각상을 말이다. 순간 그녀는 마실 피도 없이 건조한 이 형상이 자신의 영양소들과 같은 모양이란 걸 깨달았다. 그녀의 눈은 조각이 나있어 모든 것이 조각 난 형태로 보였지만, 그런대로 이 걸작을 알아 볼 정도의 미적 감각은 있었다. 그것은 모기치곤 남다른 감각이었다. 저것들이 저렇게 아름다웠나? 그녀는 자신의 언어로 생각했다. 위에서 저 완벽한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꼭 신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의 첫 감정은 설렘이었다. 가슴이 떨렸고, 저 거대한 조각상을 사랑할 것 같았다. 그 수줍은 감정은 곧 동경으로 변했다. 나도 저렇게 긴 날개를 갖고 싶다. 그녀가 날개라 칭한 것은 조각상의 팔이었다. 그 팔이 갖고 싶었다. 그녀는 모든 이들을 사로잡은 저 거대한 예술품이 탐났다. 알을 잘 키우기 위한 영양소만 있으면 되는 다른 모기들의 검소한 번식 본능과는 다른 욕망이었다. 그녀는 곧, 저 예술적인 존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 조각상 안으로 들어가면 저렇게 될 수 있겠다고 모기는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모기치곤 고등한 생각이었다.

  단단히 마음 먹은 그녀는 조각상으로 달려들었다. 자신이 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뾱. 이 소리는 이 작은 모기가 거대한 조각상에 치어 죽은 소리다. 이 모기는 이 걸작의 눈두덩이에 핏자국을 내버리고 죽어버렸다. 물론 밑에선 절대 보이지 않을만치 소량이었지만 말이다. 이로써 그녀는 하늘나라에서 적어도 두 인물에게 욕을 들을 터, 하나는 일전에 달리던 자동차에 치어 억울하게 죽은 그녀의 모기 친구겠지. 하나는 물론 아주 오래전 이 거대한 상을 만든 조각가일테다. 허나 우리의 주인공이 가만히 앉아 꾸중을 들을 성격은 아니니 세 인물 사이에 어마어마한 싸움이 예상된다. 하지만 죽은 이는 말이 없고 하늘나라의 일은 아무도 모를 일이니 그 싸움은 그들만이 아는 이야기겠거니. 아무튼 그녀는 죽기 일보직전 외쳤다. 나는 꼭 저것이 되리라. 물론 그녀는 자신이 죽을 줄 몰랐고, 아무도 이 작은 모기의 유언을 듣진 못했지만 말이다.



  모기였던 그는 결국 조각상을 본 뜬, 아니 실은 조각상이 본 뜬 인간으로 태어났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마음대로 태어난 게 아니고, 누군가 인간으로 태어나라고 등을 떠밀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뿐이었다. 이 남자가 태어나 말을 배우기 전, 천장에 달린 모빌을 보며 옹알옹알 혼잣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옹알이가 아닌 한 줄의 시였다. 물론 아직까지 까먹지 않은 모기의 언어로 말이다. 세상 아기들이 그렇듯이 이 남자 역시 태어나길 예술가로 태어났다. 남자는 그 알록달록한 모빌을 본 순간부터 남몰래 시인으로 살았다.



  무럭무럭 자라 열 아홉 살이 된 남자는 잠을 많이도 설쳤다. 잠귀가 밝아 작은 소리에도 잠을 못 자기도 했고, 오밤중에 생각이 많았다. 자려고 눕다가도 별 생각이 떠올랐다. 곧 죽을 것도 아닌데 이러저러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차근차근, 하나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쳐지나갔다. 그러다가 남자는 일어나서 무언가를 썼다. 주마등에 나타난 장면을 쓰기도 하고, 일기나 소설이나 시 같은 걸 썼다. 별의 별 걸 다 썼다. 그냥 썼다. 욕으로만 가득 찬 문장을 쓰거나, 다 지난 일을 끄집어내 네가 못났니 내가 못났니 하며 일기장에 대고 따졌다. 남들은 서운한 일이 생기면 일기에 쓰겠다고 장난으로 말하지만 남자는 정말 썼다. 그는 그러고 놀았다.

  어느 날 무의식중에 그 선생에 대한 글을 썼을 때 남자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갑자기 왜 그 선생이 떠오른거지? 남자는 욕을 내뱉고 침대로 달려가 누웠다. 하긴 그 젊은 작문 교사는 이 열 아홉 예민한 소년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우선 예뻤고, 예뻤으며, 마지막으로 또 예뻤으니까. 그러고 보니 남자는 친구들이 그 교사에 대해 음담패설을 할 때 놈들을 때려눕혀 버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듯 싶었다. 그 교사가 담당하는 대학교 주최 백일장에 자꾸 참가하는 것도 겉으로는 대입 가산점 때문이라지만 사실은 그 선생 때문이었다. 교사는 낙방 끝에도 계속 도전하는 제자의 패기에 감동은 받았지만 미성년자인 이 소년을 이성으로 느끼진 않았다.

  꽃다운 열 아홉의 남자는 아직 꽃다운 그 선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상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렌즈 끼셨어요?”



  수업 중 뜬금없는 질문에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교사는 수능을 앞두고 한껏 예민해진 아이들이 간만에 웃자 덩달아 웃었다. 교사는 웃음 섞인 이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안 꼈는데 왜? 너무 맑고 투명하니? 라며 장난스레 대답했고, 아이들은 야유를 보냈고, 남자는 진지했다. 남자는 작품을 감상하듯 멀리서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는 솔로 문지른듯 반질반질거렸다. 남자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설마설마 했더니 저 선생이 천사가 맞았구나, 하고 생각했기에. 그것은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년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 정의하진 않았다. 사랑이란 좀 더 성숙한 감정이지 본인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일 뿐이라 생각했다. 동경일 수도 있겠다. 선생은 똑똑하고 어른이니까. 편의점에서 당당하게 맥주를 사마실 수 있으니까. 남자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길 바랐다. 첫사랑은 이왕이면 또래랑 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또래 반 여자애들보다 그 선생이 훨씬 예뻤다. 그는 설렘과 사랑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니 똑같은 건가? 남자는 헷갈렸다. 어쨌거나, 소년은 너무나 혼란스러워 그날 밤 그만 울어버렸다. 그건 어린 사춘기 소년의 가슴앓이라기 보단 혹여 자신이 선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켜 친구들에게 놀림 받을게 ‘쪽팔려서’ 였다. 별 걸로 놀리고, 별 걸로 놀림 받던 때였다.

  사랑임을 부정했지만 그는 분명 사랑에 빠졌고,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은 눈물이 많아졌으니, 무슨 말만 해도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며 작문 선생은 모성애를 느꼈지만 사랑을 느끼진 않았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반 여자애들이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 순수하다고 말이다. 남자애들조차도 저 새끼가 요즘 질질 짠다며 찐따 같다고 욕을 하면서도 속으론 귀엽다고 여겼으니 이 남자의 매력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실컷 울고 난 이 소년은 진정한 남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우쭐했다. 다 컸다는 생각에 뭐든 할 수 있을 듯 싶었다. 당장 지구를 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며 한껏 사나이다운 표정을 짓던 그는 이제야 자신이 사랑을 빠졌단 걸 인정했다. 이는 좋아한다는 것 이상의 느낌이었기에. 이 소년은 괜히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잡고, 다른 또래 애들과는 다른 듯 굴고, 짝사랑을 표현한 연애시를 습작하며 한껏 자신의 느낌에 취했다. 그런 그는 문예창작학과 면접에서도 긴장하지 않았다. 면접관 교수들은 어딘가 당당해보이는 이 학생에게 우리가 당신을 가르쳐야하는 이유를 대답해보라 말했다. 남자는 제가 지금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라고 패기 넘치게 대답했다. 면접관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남자는 그 대학에 합격했다. 운이 좋았다.

  그는 졸업식 날 또 다시 엉엉 울었다. 이젠 안 우는가 했더니 작문 선생과 헤어져야하는 건 슬펐나보다. 그는 교사의 연락처를 받아두었다. 매일매일 안부 문자를 전할 생각이었다. 어엿한 성인이 됐으니 이제 그녀와 사귀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릇파릇한 자신감이었다. 그는 한 달 정도 문자 메시지를 꾸준히 보냈지만,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이후 더 이상 그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대학엔 더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자는 허무하게 첫사랑을 잊었다.



  어느덧 청년이 된 이 남자는 제대 후 집에만 틀어박혀있었다. 복학을 하기도, 친구들을 만나기도 귀찮았다. 그는 바로 등단하고 싶었지만 시 한줄 얻지 못했다. 씻지도 않고 집에만 있는 날이 길어졌다. 그런 남자를 왠 모기가 윙 날아와 앙 물어버렸다. 모기는 이가 없으니 콕 찔러버렸다는 게 옳겠지만 어쨌거나, 모기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남자는 온 몸이 가려웠다. 모기 물린 데에 손톱으로 십자가모양을 만들다가, 모기 소리에 괴로워 하다가 도망치듯 욕실로 달려갔다. 이러다가 모기 밥 되지. 남자는 수염을 밀고, 실로 오랜만에 목욕을 했다.

  간만에 목욕을 마친 그는 자신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성인이 된 후 점점 살이 빠져 아주 날씬해졌으나 그렇다고 하늘하늘하게 마른 건 아니고 힘 있고 제법 다부진 자신의 몸을 말이다. 남자는 자신의 몸매가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운동도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도 이렇게 근육이 훌륭하다니, 자신이 새삼 젊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긴 팔다리와 마른 근육이 마음에 쏙 들었다. 역삼각으로 모양 잡힌 어깨와 허리는 남자다웠다. 남자는 자신의 몸이 고대 조각상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전신거울을 사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 태어나길 잘했지 딱정벌레로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어? 그 짧은 다리로 답답해서 말이야.”



  남자는 혼잣말을 내뱉고는 흠칫 놀랐다. 이 연극 같은 대사를 읊은 자신이 꼭 독백을 하는 연극배우 같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시선을 옮겨 찬찬히 자신의 얼굴을 뜯어봤다. 도톰하고 연붉은 입술을 바라봤다. 입술이 살짝 삐뚤어 비웃는 것 같은 입매였다. 옛날 화가가 그린 회화같기도 했다. 또한 아무렇게 흩트려놓은 벚꽃 두 잎 같다고 이 남자는 생각했다. 조각 같다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만이 딱 어울리는 그 잘생긴 코를 지나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검고 또렷했다. 눈매는 길고 뾰족한데 숱 많은 속눈썹과 어우러져 솜씨 좋은 순정만화가가 그린 그림 같았다. 눈가는 손으로 비빈 듯 붉다. 운 것이 아니라면 피곤해서겠지. 하지만 남자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붉은 눈이 애처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70년대 배우 같은 고전미도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 중에서 이 눈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묘한 얼굴에 한참 빠져들었다. 그 옛날 나르시시스트라는 외국인처럼 거울을 강물삼아 자신에게 빠져들었다.

  그는 자신이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시만 쓰기엔 지나치게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 남자에겐 아주 강렬한 깨달음이었다. 그는 갑자기 연기가 하고 싶었다. 자신은 아주 잘생겼고, 난데없이 독백을 했을 땐 제법 연기도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아침에 진로를 바꿔 곧장 연기학원에 들어갔다. 그의 부모는 집에만 있던 아들놈이 무슨 영어학원에라도 다니겠다는 그 말을 믿고 기꺼이 학원비를 내주었다. 연기를 하겠다는 것은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주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섞여 연기를 하는 게 혼자 조용히 앉아 시를 쓰는 일보다 훨씬 재밌었다. 배우지망생인 예쁜 여자애들이 자신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는 게 재밌었다. 그래서 남자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남자는 학원장에게서 영화 오디션 권유를 받았다.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감독이 연출하고 유명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였다. 하지만 남자는 망설였다. 저는 연극을 하고 싶은데요? 남자의 말에 원장은 이 영화에 출연하면 너는 스타가 될 것이고, 그 해 영화제 신인상은 네 것이며, 일단 유명해지면 연극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며 남자를 구슬렸다. 남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긴, 이런 얼굴은 더 널리 알려져야지. 남자는 결국 영화 오디션을 보았고, 감독은 자기 자신의 매력에 심취한 듯 구는 이 남자가 아주 마음에 들었기에 앉은 자리에서 그를 합격시켰다. 남자는 자신의 합격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기에 별로 기쁘진 않았다. 이 운 좋은 남자는 그렇게 영화배우가 되었다.



  그의 첫 역할은 주인공의 반항끼 넘치는 아들이었다. 비중이 크진 않았지만 남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비평가들의 말대로 야성적인 붉은 눈의 이 낯선 청년은 짧은 컷으로 많은 이들을 홀려버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사연을 담은 그 눈으로 금방이라도 포효를 할 것 같다나 뭐라나. 그렇게 그는 데뷔작 한 편으로 스타가 됐다. 배우 매니지먼트에선 앞다투어 그를 데려가려했고, 결국 그는 배우를 끝내주게 잘 키운다며 장담한 회사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대중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이 스물 넷 꽃미남의 모든 것이 궁금했고, 여러 매체에서는 그를 잡지의 메인모델로 싣고 그의 인터뷰를 다루었다. 수많은 인터뷰 때문에 그는 한말을 또 해야 해 귀찮았지만 대중들은 이 남자가 잠귀가 밝아 잠을 잘 못자며, 연극배우가 꿈이었으며, 새벽에 걷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취미로 시를 쓴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이 사실로 그는 감수성 짙은 고독한 문학청년이 됐다. 물론 이미지 메이킹이 지나치다며 많은 이들에게 비난도 받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남자는 한순간에 사람들의 욕망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는 인터뷰어가 남자에게 눈이 어쩜 그렇게 촉촉할 수 있냐고 물었다. 인터뷰어의 사심이 담긴 돌발질문이었다. 남자는 당황해 웃어넘기지 않고 자신의 이 붉은 눈은 사춘기 시절 선생님을 짝사랑하였고 그 첫사랑의 아픔으로 매일 밤 울었기에 붉어진 게 아닐까 대답했다. 그의 말은 큰 화제가 됐고 남자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이 인터뷰를 다룬 인터넷기사에는 인기 얻으려고 쑈를 한다는 댓글이 많았지만, 로맨틱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으므로 앞으로의 행보는 탄탄대로 일거라며 그의 매니저는 기뻐했다. 남자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인터뷰어의 질문에 타고 난 것이라 말하기 민망해 사연을 덧붙인 것 뿐인데 이렇게 이슈가 될 줄 그는 정말 몰랐다

  인기쟁이가 된 그는 밖에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 데뷔했지만 자신을 향한 시선이 민망했다. 그는 그 시선을 뚫고 자신을 오디션에 내보내준 학원장을 만나러갔다. 식사 한 끼 대접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학원장은 밥을 먹다말고 남자가 예전에 작문 선생을 보며 지은 표정을 따라지었다. 그가 그 눈빛을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이제 이 남자는 더 다양한 수식어를 얻었다. 제 2의 누구라느니, 반항기 어린 청춘의 눈빛이라느니, 늑대의 카리스마를 지닌 고독한 청년이라느니 남자는 그 문장들이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문장들은 남자 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얼굴을 곧잘 설명해주곤 했는데, 그는 그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어찌됐건, 반항기어린 청춘의 눈빛을 지닌 이 남자는 이제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넘쳐나는 인터뷰와 방송촬영, 광고촬영, 화보촬영 틈에 잠잘 시간도 없었다. 그는 그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씻지도 못하는 날이 많았지만 그의 피부는 하루도 푸석푸석한 날이 없었다. 늘 빛이 났고 심지어 투명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를 두고 어느 포토그래퍼는 뭍으로 나온 인어왕자 같다고 표현했다. 물론 남자는 이 표현이 몹시 민망했지만 말이다.

  남자가 팬레터를 받은 건 이제 슬슬 차기작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데뷔작이 워낙 성공해 차기작 선택에 스트레스를 받던 그였다. 그는 머리도 식힐 겸 팬들이 보내 준 팬레터를 읽을 생각이었다. 그 연애편지들을 읽다보면 온몸이 간지러우면서도 웃음도 나오고 수많은 악성댓글에 지친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소속된 회사로 훨훨 날아 온 수백 여 통의 편지더미 중에서 남자는 이상하게도 하나의 편지봉투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것은 다른 알록달록한 봉투들과는 달리 길고 새하얀 사무용 봉투였다. 그는 이 깔끔하고 단순한 봉투가 정말 팬레터인지 잠시 의심했다. 이 남다른 편지봉투가 자신의 관심을 끌려는 어린 소녀 팬의 연애편지라 생각했다. 이 애는 아마 자신은 또래들과 다르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중년 여인의 호소문일 수도 있겠지. 두툼한 걸 보아 꽤 긴 하소연을 담았나보다. 남자는 앞에 카메라가 있는 듯 멋들어지게 웃다가 못 이기는 척 편지를 꺼냈다. 편지를 꺼내보니 단순히 줄만 그어진 편지지에 손으로 정성껏 눌러 적은 긴 글이었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 제 편지를 읽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간밤에 당신 꿈을 꿔 처음으로 펜을 들었어요. 저는 화가라 그림만 그릴 줄 알지 누군가를 위해 글을 써본 적은 없거든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저도 당신처럼 눈가가 붉고, 귀가 예민하답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해요. 아, 내 전생은 혹시 토끼가 아니었을까? 하고요. 어떻게 하면 이 귀를 틀어막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어느 늑대의 앞발에 채여 허무하게 죽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다행이에요.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나서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요. 저는 아마 토끼였을 적부터 사람이 부러웠나봅니다. 그들의 작은 귀, 긴 팔과 다리, 우아한 몸짓 같은 걸요. 그래서 어느 전지전능한 인물이 저를 인간으로 태어나게끔 깜짝 선물을 준 게 아닐까요? 저는 항상 그 신에게 감사기도를 드린답니다. 기도문을 외는 건 아니에요. 그저 사람을 제 캔버스에 옮겨 그려요. 그토록 동경하던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람을요. 저는 이 일이 기도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인간으로 태어난 저는 최선을 다해 삶을 누리고 있어요. 몸매를 가꾸고, 화장을 공들여서 하고, 좋은 것만 먹고. 매일 책을 읽고, 신문도 읽고요, 손톱정리도 매일 하지요. 그렇게 저를 관리하고 나면 저는 나 자신이 꽤 잘난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답니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저를 항상 쳐다봐요. 제 향수 향 때문일 수도 있고, 제 몸매나 얼굴 때문일 수도 있지요. 제가 사실 꽤 예쁜 편이거든요. 그래서 당신의 팬싸인회 같은 덴 가지 않았어요. 혹여 당신이 저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죠. 당신은 이제 막 뜨고 있는 스탄데 여자와 열애설이라도 터지면 곤란하잖아요.



  남자는 여기까지 읽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여자의 얼굴을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라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밖에 없었으니까. 남자는 상상을 멈추고 다시 읽어내려갔다.



  혹시 웃으셨나요? 농담 맞아요. 저는 사실 예쁘진 않아요. 한 번도 당신을 만나러 가지 않은 건 당신을 본 제 눈이 멀어버릴까봐서죠. 이건 농담 아니에요. 시인인 당신에겐 진부한 표현인가요? 그래도 사실인걸요. 당신의 인터뷰를 읽다보면 자기 자신에게 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좋은 일이에요. 자신을 사랑하는거잖아요. 당신은 자기 자신과 쉽게 사랑에 빠지겠죠. 당신은 멋지니까요. 당신도 그렇고, 사람은 모두 아름다워요. 저 빼고요. 저는 사실 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자화상을 그리다보면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생긴다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자화상을 그리는 건 자꾸만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고 싶어서였어요. 다른 사람을 그리는 건 힘들었어요. 남들과는 눈도 못 마주쳐서 남의 얼굴은 그리지 못했지요. 사람의 눈이 참 무서웠거든요. 실제 눈은 물론이고, 그저 사진일뿐인 눈도 무서웠어요. 이상하죠? 사람은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눈은 무섭다니요. 병인가봐요. 저는 제 얼굴을 그릴 때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요. 화룡점정으로요. 제 눈이 화난 것 같은 눈이긴해도, 매일 보는 제 눈이니까 무섭진 않았어요. 다행이죠 그건.

  언제는 당신이 좋으면서도 질투가 났어요. 영화 한 편 잘 돼 많은 돈을 벌었을 테니까요. 물론 그것도 당신의 능력이지만 저는 질투났어요. 그때가 휴대전화 요금 몇 만원도 못 내고 있었을 때였거든요. 당신은 돈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겠죠. 그래서 질투가 났나봐요. 그 날 저는 당신처럼 배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배우가 돈을 잘 번다고 생각했거든요. 다짜고짜 연기학원을 알아보다가 곧 바보 같은 상상임을 깨닫고 웃어버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바보같았죠. 당신은 연기자가 평생 꿈이었을 텐데 저는 돈을 많이 벌 것 같다고 다짜고짜 배우가 되겠다니요. 부끄럽군요. 돈을 많이 벌 만큼 성공하기도 힘들테고, 배우로서 성공한다해도 그 수많은 시선을 제가 어떻게 견디겠어요 그쵸? 누군가 저를 쳐다보기만 해도 숨고 싶은데 당신은 어떻게 그 수많은 시선을 감당할 수 있는 거죠? 당신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보거나 쳐다볼텐데 말이에요. 질투 섞인 시선이나, 욕망어린 시선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저 역시 같은 눈빛으로 당신을 쳐다보겠죠. 물론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돌리겠지만요.

  질투가 사라지고 나서 저는 당신이 절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을 향한 나쁜 글들엔 눈물이 나왔어요. 절대 울지 않던 제가 당신 욕 좀 들었다고 울다니요. 잠도 못자고 피곤해 보이는 당신을 보면 마음이 아팠어요. 누군가의 팬이라는 건 설레고도 괴로운 일이군요. 저는 당신을 걱정하다가, 가슴이 찢어지다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죠. 당신은 저를 모르고 저도 당신을 알지 못하지만 저는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날 그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스크린 속 당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캔버스엔 제 얼굴만 있었을 텐데 지금은 온통 당신뿐이네요. 제 머릿속처럼요. 저는 사진 속 모델을 그릴 때도 아름다운 그 몸만 그릴 줄 알지 모델의 얼굴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당신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됐어요. 당신의 얼굴을 그리면서 저는 뭔가에 단단히 씐 줄 알았어요.

  귀신에 홀린 걸 수도 있고요. 그날 저는 홀린 것처럼 영화에서 본 당신의 얼굴을 그려봤어요. 더듬더듬 떠올리며 그리진 않았어요. 기억에 쏙 박혀있어서 쉽게 그릴 수 있었죠. 특히 당신의 눈이요. 사람들도 당신의 눈을 사랑하죠.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남의 얼굴을 그려보긴 처음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짝사랑이 가능하죠? 저는 이 감정이 꽤 낭만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태어나길 낭만적으로 태어났나봐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런 당신만 바라본 적도 있어요. 물론 사진이었지만요. 그렇게 남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 본 적은 없었어요. 당신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으면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 들곤한답니다. 감상한다는 표현이 기분 나쁘시다면 사과드릴게요. 그것 외엔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는 단어가 없네요.



  가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자려고 누웠다가, 가만히 서있다가도 그래요. 누군가가 제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바닷속으로 빠뜨려버리는 기분이에요. 그냥 가벼운 우울증이에요. 저는 서서히 가라앉을 때마다 숨을 쉬려고 당신의 얼굴을 떠올려요. 무표정일 땐 차가운데, 웃을 땐 아이 같은 당신의 눈을 떠올려요. 배우라서 그런지 참 얼굴도 눈빛도 다양하군요. 웃을 땐 순진한 당신의 눈을 떠올리다보면 저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지금 제 눈이 무척 따뜻하게 빛난단 걸요. 당신은 누군가의 눈을 이토록 빛내주는 사람이군요. 그런 적 있나요?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이 빛나본 적 있나요? 있겠지요. 당신은 시인이기도 하니까요.

  가만히 앉아 캔버스에, 혹은 모니터 속에 있는 당신에게 빠지다가 저는 거울로 제 눈을 보면서 당신을 찾아내려 했어요. 하지만 닮은 구석이라곤 눈가가 붉다는 것 밖에 없었죠. 당신을 닮고 싶었는데 그 부분이라도 닮아서 저는 좋아요. 예전엔 충혈 된 것 같은 이 눈이 싫었는데 지금은 좋아요. 당신처럼 사연 있는 눈이 아닌, 화난 것 같은 눈이지만요. 그러다가 저는 언제 한 번 남의 눈을 쳐다봤었어요. 제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다른 사람의 눈을요. 그날 흠칫 놀란 나머지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눈을 봤지요. 주문을 하겠냐던 그 목소리가 당신의 목소리와 비슷했거든요. 물론 그 아르바이트생은 당신이 아니었지만요. 아무튼 그 학생, 눈빛이 아주 따뜻했어요. 요즘 제 마음이 따뜻해서 그렇게 보인것일지도 모르지만요. 그래도 저는 누군가의 눈을 보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당신의 눈을 억지로 찾아내려고 했었는데, 이젠 그냥 사람의 눈을 보는 게 좋아요. 모두가 당신처럼 그렇게 눈매가 예쁘지도, 깊지도 붉지도 않지만 제각각 다른 눈매와 눈빛이지요.

  지금도 자꾸 웃음이 나오네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떠올리면 웃음이 나오잖아요. 제가 단단히 사랑에 빠졌나봐요. 당신은 단순히 인기 많은 배우가 아니에요. 제게 영감을 준 사람이에요. 당신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누군가요?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거죠?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겠네요. 저는 당신이 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남자는 테이블에 이 편지를 툭 내려놓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유리문에 흐릿하게 비친 자신의 조각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정리하다가 집게손으로 이 잘난 얼굴을 꼬집어 비틀었다. 곰곰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다 때려 치고 싶었다. 남자는 방 구석구석을 뒤졌다. 서랍을 열어보고 소파 밑을 살폈다.



  “이 놈의 회사는 펜도 없어.”

  


  남자가 말을 내뱉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원래 아무도 없어 조용했지만 더 조용해졌다. 물론 기분탓이었다. 그는 이 적막함이 소름끼쳤다. 남자는 대뜸 아무것도 없는 바닷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에 수치스러웠다. 누가 자꾸만 자신의 머리를 잡고 바닷 속으로 집어 넣는 것 같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요상하게도 외로웠다. 심심함과는 차원이 다른 낯선 감정이었다. 남자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한없이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스케줄을 위해 나가야하지만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갑자기 찾아온 요상한 기분에 엉엉 울고 싶었다. 엉엉 울고나서 뭐라도 쓰고 싶었다. 그림이라도 상관 없었다. 조각이어도 좋다. 쓰고 싶고, 그리고 싶고,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 그는 당황스러웠으며 혼란스러웠다. 유리문에 비친 자신을 보며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낯선 눈빛이었다. 이대로 쭈그려 앉아 더 깊은 곳으로 빠져 숨이 막힐 것만 같았지만 뭐, 썩 나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