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문 <글쓰기 수업>

by 이루닌 posted May 2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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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수업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굶어죽더라도 결코 펜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얼마나 어렸던 외침인가. 학교 정문 앞에 펼쳐진 까마득한 고갯길은 현실을 우습게 알았던 학생 시절의 다짐을 비웃듯 위협적인 경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난한 글쟁이보다 나쁘지 않은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세상은 냉랭했고 말은 씨가 되었다. 대학교를 재학하면서 우연하게 얻은 기회로 단편집 한 권을 낸 이후로는 쭉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방생활을 해야 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하는 작은 신문사에 연재하는 칼럼의 원고료나 여기저기서 받아오는 외국 작품들의 번역 고료로 근근이 버텼지만 십 년 가까이 내 곁을 지켜주었던 담배와 연을 끊어야 했을 정도로 궁핍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런 와중에 쥐구멍 생활에 볕이 들어오려는 듯, 기회가 찾아와주었다. 지방에 위치한 국립대에서의 시간강사, 잘만해내면 무기계약식으로 길게 수익을 얻어낼 수 있단 점이 안정적인 수입을 필요로 했던 나로서는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게다가 학교 근방 원룸의 보증금이 서울의 촌구석보다도 3배나 저렴했다는 점 또한 큰 안심이 되었다. 종합강의동이란 건물에 들어선 후에는 본격적으로 강의 준비를 시작했다. 행정실에 들러 전자 출결이나 수업 진행에 관한 여러 설명을 듣고 기초교양 글쓰기에 대한 강의 자료가 들어있는 USB를 챙겨 강의실로 향했다. 새 학기의 첫 수업이어서 그런지 강의실에는 많지 않은 학생들이 앉아있었다. 첫 날인만큼 자기소개와 수업에 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끝으로 강의를 마쳤다. 짧은 시간 동안 기본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한 것에 불과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잔뜩 긴장을 했었던 탓인지 학생들이 나간 후 한숨이 절로 나오고 몸에 힘이 쫙 풀렸다. 강의 준비실로 돌아와 퇴근 준비를 하던 중, 행정실에서 설명을 해주셨던 조교 선생님이 찾아와 같이 저녁을 먹지 않겠냐며 물었다. 조금은 지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거절하려 했지만 학교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일러줄 것이 있다는 점과 새로 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밥을 사겠다는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식사 자체는 괜찮았지만 자리는 썩 좋지 못했다. 조교 분의 말이 지나치게 많았다. 학생들의 태도가 어떻다, 윗분들은 어떻다더라. 얼핏 듣기에도 과장되거나 억지스러운, 그다지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뒷얘기들을 우쭐한 태도로 이야기하는 모습은 친절했던 첫 모습을 싹 잊게 만들었다. 다음에도 밥 한 끼 같이 먹자는 그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리고 아마 될 수 있는 한 그와 어울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수업 주간에 들어선 후, 여러 형태의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강의는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천차만별이었다. 첫 시간엔 분량, 형식에 상관없이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주문했다. 자신의 학과, 취미, 성격 등을 쓴 학생도 있었고 장래희망이나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적은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름, 학과 ,학번만 달랑 적어놓고 나간 학생도 있었다. 논설문이나 설명문 같이 형식과 요령, 그리고 특히 어느 정도 분량을 필요로 하는 글과 같은 경우에는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종이를 바라보며 펜을 돌리는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저마다의 글을 볼 때면 문예부 동아리에서 친구나 선배들의 글을 서로 돌려 읽었던 때가 떠오르면서 시간이 되돌려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간단한 글이었음에도 눈길이 가는 표현이나 감정이 묻은 글들은 퇴근시간이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읽혀졌다. 늦은 밤이 되도록 읽지 못하거나 피드백을 남겨주지 못했을 땐 칼럼의 원고 작업과 해외 소설이나 카툰을 번역하는 일을 마친 후에야 코멘트를 남겨주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글을 첨삭하고 있었다. ‘진정성이야기하는 글을 주제로 진행했던 글쓰기여서 그런지 늦은 밤의 감성과 제법 어울리는 글들이 많았다. 글쓴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각자의 고유한 시선에 감탄하고 있을 때 즈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웬 남성의 목소리였다. “, 여보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여기는 종원파출소인데요,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송석정 학생이 어떤 어르신하고 다툼이 생겨서 일단 서로 데려왔고요, 학생 분께서 보호자 분이라고 연결해줬는데 맞나요?” 보호자란 말에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답을 이어갔다. “아아, . 맞습니다. 거기 위치가 어떻게 될까요. 제가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송석정? 분명 아까 읽었던 글들 중에서 봤던 이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 나를 보호자로 가리켰는지 보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 경찰서에 불려갔단 소식에 더 놀라 서둘러 집을 나섰다.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파출소 입구에는 적게 잡아도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술 취한 아저씨와 편의점 유니폼을 입고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송석정 씨 보호자로 왔는데 무슨 일입니까?” “, . 전화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여기 학생하고 여기 어르신하고 조금 소란이 있었나봅니다. 편의점 물건이 막 어질러져있고 어르신께서 학생 분의 손목을 잡고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제보가 있었고요. 두 분의 얘기나 cctv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제보만큼 심각하진 않았고 더 큰 일들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얼추 마무리되어가는 과정이긴 한데 보호자 분께서 학생 분 좀 진정시켜 주시고 몇 가지 확인해주셨으면 해서 불렀습니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경찰 분의 말에 대답을 한 뒤 그 학생을 쳐다봤다. 한 쪽 팔을 붙잡고 있는 학생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저기, 석정 씨.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학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경찰 분의 안내에 따라 파출소로 들어간 후 마련해주신 서류를 작성한 뒤 나왔다. 난리를 부렸다던 어르신은 이미 간 뒤였고 그녀는 파출소의 입구 등 밑에서 여전히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저기, 괜찮아요? 손목 아프면 응급실이라도 가볼까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하고는 돌아섰다. 강사로서 끝까지 책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그녀의 편의점 유니폼이 집 근처에 위치한 곳이란 것을 깨닫고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다시 알바하러 가는 거 에요? 시간도 늦었고, 몸도 마음도 놀랐을 텐데 오늘은 쉬는 게 어때요?”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계속 걸었다. 그녀의 태도는 일관적으로 차가워서 말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썼던 글이 떠올랐다. “석정 씨가 정말 그 글의 주인공이 맞나보군요.” 그러자 계속 앞을 향해 걷던 그녀가 휙 뒤로 돌아서 내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그제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 그러니까 글이란 게 그 사람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아까까지 수업 때 썼던 글들을 첨삭하고 있었는데 지금 석정 씨의 행동이랑 성격이 석정 씨가 썼던 글에서 느꼈던 기분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뭐였더라. , ‘빈 병에 관해 썼었죠. , ‘빈 병은 작은 입김에도, 손가락질 하나에도 쉽게 무너진다. 물이든 뭐든 채워져 있으면 병은 버티고 견디는데 나는 여전히 비어있다.’ 이런 식이었죠. 표현이 좋아서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은데.” “그녀는 답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혹시 아닌가. 제가 틀렸나요?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면 죄송하고요. 편의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말리지 못하겠네요.” 뭔가 허세를 부린 것 같아 민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런 기분을 날려줄 대답이 들렸다. “맞아요. 제가 쓴 거.” “, 다행이네요. 헛소리였으면 정말 창피했을 텐데. 강사 그만 둘 뻔 했네요.” “제가 쓴 글이 정말 괜찮았어요? 사실 매번 달아주신 칭찬이나 좋은 글을 볼 때마다 정말 맞나, 단순히 립 서비스로 해주시는 거겠지, 하고 넘겼거든요.” “, 솔직히 몇 명은 그렇게 하는 경우도 없진 않겠죠? 이것저것 일이 쌓여있어서 코멘트를 달아주는 것에 100%를 다 해본적은 없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도 석정 씨가 썼던 글처럼 마음 어딘가를 살살 건드리는 그런 글들을 보면 제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과 충고를 적어주곤 해요.”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발을 뗐다. 나 역시 그런 그녀의 옆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날 보며 물었다. “왜 안 물어봐요? 파출소에서 왜 하필 선생님을 보호자로 불렀는지.” 그녀의 질문에 잠깐 생각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정신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그런 것보다도 일단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 무엇보다 어떤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겼어요. 어떤 사람이든 마찬가지에요.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저는 굳이 제가 먼저 알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누구나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 그런가요. 역시 선생님은 어른이네요.” “혹시 그 말, 제가 나이 든 아저씨라는 건가요? 하하, 농담이에요.” 그녀는 픽 하고 살짝 웃어줬다. 그리고는 진정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 아버지란 사람이 바람을 펴서 도망을 갔대요. 그렇게 중학교 3학년까지 엄마랑 같이 지냈는데, 졸업식 날 모두가 꽃을 받고 있을 때 엄마는 무슨 꽃다발을 들고 오려나. 그냥 빈손으로 와도 될 텐데 하고 기다렸어요. 그렇게 식이 끝나고 북적북적하던 반이 비워졌을 때도 엄마는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고요.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급하게 집에 가보니까 식탁 위에 노란 메모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어요. ‘사랑한다. 우리 딸, 미안하다. 우리 딸.’이라고요. 그리고 그 뒤론 본 적이 없어요. 사라졌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고요. 정말 마법처럼 펑. 그 뒤로 지금까지 해도 잘 들지 않는 반지하에서 여기까지 왔네요.” “, 안 궁금해 하길 잘 한 것 같네.” 나름 무거워진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띄우려고 실없는 소리를 해봤지만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서 그저 묵묵히 걸었다. 편의점이 다 와갈 때 즈음, 그녀는 나를 향해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인사하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줄지를 몰라서 편의점 주위를 배회하다 새벽 4시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고 학교 마크가 새겨진 원고지가 나뒹구는 책상을 마주하자,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책상 옆 침대로 몸을 내던졌다. 해가 온 창문을 내리쬐고 칼럼을 봐주는 형한테 전화가 오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 요 근래 칼럼 원고 제출이 조금씩 늦어지는 점과 글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그의 볼멘소리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의 잔상을 확 날려줬다. 작업에 앞서 새벽의 기억이 담긴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새벽의 기운은 씻어지지 않았다. 물줄기가 머리를 때릴수록 무거운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는 석정 씨의 표정이 선명해져갔다. 요란하게 샤워를 마친 후, 어질러진 책상부터 정리했다. 첨삭하던 글들을 책상 옆에 가지런히 쌓고 보니 우연히도 석정 씨의 글이 맨 위를 자리했다. 첨삭을 한 표시가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눈길이 갔다. 어떤 글이었고 어떤 코멘트를 남겼었는지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내가 남긴 피드백이 립 서비스였었나, 가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씻기지 않은 지난밤의 향기를 담아 써놨던 코멘트 옆에 추가로 몇 글자를 더 적어놓았다. ‘당신의 글이 빈 병을 채우고 있어요.’ 그리고는 쌓여진 종이들을 책상 한 쪽 구석에 옮긴 후 노트북을 켜고 재촉 받던 칼럼을 써나갔다.

   이른 시간부터 어둠이 제법 짙어지기 시작한 어느 날, 칼럼을 봐주는 선배로부터 문자가 왔다. ‘메일 보냈으니 확인해라. 그동안 고생했다.’ 굳이 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고생했다.’는 그의 말에 대충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에 비해 칼럼에 소홀하다는 건 나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어 따지기나 애걸복걸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번역 일도 조금씩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의 문자는 잠시 모른 체 했던 나의 을의 처지를 상기시켰다. 느슨해진 정신을 조이고 담배를 피우는 시늉이라도 하며 책상에 앉아 남은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더 신중하고 정확하게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자정이 넘어가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졌다. 집중하고자 했던 마음 역시 서서히 흐트러졌고 그 자리를 여러 가지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공부든, 원고든, 첨삭이든 예전부터 언제나 일이 중간 지점을 넘어 섰을 때 잡생각은 내게 다가왔다. 잡생각은 그야말로 여러 분야의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잡념은 변화했다. 잡스러움보다는 한 가지 방향으로 모여들었고 그 끝엔 항상 석정 씨가 있었다. 물론 그녀뿐만 아니라 수업에서 만나는 모든 글들이 과거에 대한 향수를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주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더 조바심을 나게 하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글이었다. 그녀가 비추는 세계는, 그녀가 쓰는 여러 글들은 가라앉았던 나의 문심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글은 나로 하여금 그녀에게 동경을 느끼게 해줬다. 그녀의 젊음, 혹은 젊음의 관점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녀가 쓰는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운은 앞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황망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다시 읽어 본 그녀의 글들은 어두움을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그 흑빛을 재료삼아 앞을 그려가고 있었다. 단순히 젊어서, 어려서 미래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고 말로만 떠들어대는 거창한 의지가 아니라 주어질 기회와 시간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까, 고민한 흔적이 그녀의 소재나 표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 그녀의 글은 과거의 나뿐만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변해있는가를 돌아보게끔 해줬다. 현실에 허덕이는 내 모습에 비해 여전히 꿈을 꿀 수 있는 그녀가 한없이 부러웠다. 학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녀에 대한 동경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의 사색은 길어져갔다. 그렇게 사색과 망상을 멈추고 나면 항상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망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덥수룩한 앞머리를 뚫고 들어오는 노트북 화면의 빛에 정신을 차리고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만 원의 네 캔이 들어있는 맥주 세트와 편의점 족발, 그리고 더해지는 밤공기는 복잡한 마음을 그나마 진정시켜줬다. 세 번째 캔을 딸 때 즈음, 석정 씨가 편의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새벽 2시가 조금 넘어간 시점이었다. “지금 출근하는 거야?” 술기운에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오는 순간 지난 번 진상 어르신이 떠올랐다. 그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세상 민망했다. 그녀 역시 나의 말에 당황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다닥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 몸이 화끈거리는 듯 했던 나는 마지막 캔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두고 간 것이 없는지 테이블 주위를 서성이던 중 편의점 유니폼으로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이거 드세요.” 숙취해소음료였다. 괜히 웃음이 났다. 아까까지의 1L 가까이 되는 맥주보다 100ML정도의 목 넘김이 몇 배는 더 만족스러웠다. “고맙다.” 그녀는 편의점 안을 살짝 들여다보더니 아까까지 내가 앉았던 테이블에 앉고는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그 빛에 홀려버린 나는 집에 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내가 들고 있던 남은 맥주 한 캔을 따서 한 모금을 마신 뒤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이제 선생님 얘기해주세요. 선생님의 사정, 아님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 듣고 싶은 게 많아요.” 거침없이 맥주를 마신 것부터 나에게 던진 질문까지 무엇 하나 당혹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다시 한 번 찾아온 새벽의 기운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 나의 사정이라, 지금의 대학생들 앞에서 이야기하긴 좀 얄미울만한 이야기일까요, 앞이 막막하다고 할까,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하는 건가, 답답하네요. 흐흐” “이렇게 사는 게 어떤 건데요? 전 첫 시간에 선생님이 하신 얘기들 듣고 되게 부러웠는데.” “어떤 점이 부러웠는데?” 다시 반말이 튀어나왔지만 그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러려니 했다. “글로 돈을 버신다는 거랑 여러 분야에서 글을 쓰고 계신다는 점? , 아니 그냥 언제나 곁에 글이 있어왔다는 점이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랬구나.’ 라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그녀는 마치 선물을 준비한 듯 확신에 찬 목소리와 밝은 미소로 책 한 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이것도요.” 그녀가 갖고 온 책은 내가 쓴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었다. “너 이거, 어디서 구했어. 옛날에 나온 거고, 절판되서 구하기도 어려울 텐데. 혹시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니?” “, 처음 강의에서 자기소개하실 때, 되게 놀랐어요. 내가 알고 있는 책을 쓰신 분이 맞나 하고요. 근데 소설은 언급이 없어서 동명이인인가 했었는데 검색하다보니 성원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의 필자 소개란에 이 책 저자 분이시라고 나와 있더라고요” “아하, 그렇구나. , 좀만 늦었으면 나 못 알아볼 뻔 했겠네. 나 오늘 거기서 잘렸는데.” 내 말이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대학생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침묵을 깨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씨를 뿌려 봐 봐요. 뿌릴수록 거두고 뿌려야만 거둔다고 하셨잖아요. 커피 꽃. 책에 나왔던 건데 기억하세요? 푸흡, 멍청한 질문이었죠? 자기가 쓴 글을 까먹을 리가 없을 텐데. 제가 감히 뭐라 할 입장은 못 되지만, 선생님의 소설을 좋아했던 독자로서 한 마디 한다면 다시 소설을 쓰셨으면 좋겠어요. 지난번에 그러셨죠? 글은 글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고, 제가 선생님의 소설을 보면서 느낀 점은 선생님이 글을 참 좋아하시는 분이시라는 거, 그리고 글의 가치를 잘 알고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커피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않아도 그 자체에서 은은한 향을 내뿜는다는 걸 알고 있니? 근데 사실 모든 나무들이 그렇다? 자세히, 가까이, 들여다보면 각자의 싱그럽고 독특한 향이 있지. 그럼에도 사람들은 꽃을 피우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를 보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더라. 더 나아가 기대조차 하지 않지.’ 이 부분이요.” 그녀가 가리키는 부분은 형광펜으로 칠해져있었다. “여기 읽으면서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결과에만 목을 매는 내 모습이 몰인정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혼자 뭘 어떻게 아등바등하던 제게 여유를 줬다고 할까. 말이 빙빙 돌았지만 결과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처지가 어떻고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선생님의 글을, 이야기를 다시 보고 싶다는 점일까요?” 그녀가 읽어주는 내가 쓴 글의 느낌은 그 시절 내가 썼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더욱 힘이 느껴졌고 쑥스럽게도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다시 글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 것 같았다. “하아. 글이라. 오히려 저때만도 못할 거 같은데. 여유롭게 글을 쓸 형편도 아니고, 너는 어떠니? 너는 그래서 나중에 하고 싶은 직업이 뭐야? 작가야?”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얼마 안 가 답을 꺼냈다. “굳이 직업을 얘기한다면 솔직히 뭐라 답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현실이란 게 존재하니까. 근데 그렇게 귀찮은 현실 속에서도 글은 계속 붙잡고 싶어요. 나중에 뭘 하든 어디에 있든, 어떤 방식으로든 글은 계속 쓰고 싶어요.” 그녀의 답은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한심하게 여겼던 그 다짐은 어느 새 그 말을 외쳤던 열정 가득한 대학생 때의 떨림과 설렘으로 덧씌워지고 있었다. “하아. 그렇구나. 그랬었는데, 네게서 나온 환상에 시달렸어 그동안. 근데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었던 것 같아.”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보여줬다. 나는 그녀의 미소에 충만한 안도감을 느꼈다. 계속해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학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강의를 준비하고 있던 중, 행정실로부터 온 호출 메시지를 확인하고 행정실로 향했다. 날 맞이한 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행정실 조교였다. “저기 원 선생님, 잠시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그가 가리킨 컴퓨터 화면엔 얼마 전 편의점에서 석정 씨와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던 모습이 담겨있었다. 조교는 자랑이라도 하듯 내게 말했다. “얼마 전에 학교의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이에요. 다행히 지금은 삭제가 되긴 했는데 요새는 이런 모습에 별에 별 소리가 다 생길 수도 있어서요, 부정청탁이 얽혀있다든지, 학생과 강사 간의 사적이고 특수한 관계가 존재한다든지 말이죠. 윗분들께선 이번 일에 대해 조금 언짢게 생각하고 계셔서전해주는 내용 자체만으로도 황당했지만 그의 간신배 같은 태도에 더더욱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사진에 같이 찍힌 학생은 어떤가요? 혹시 그 학생에게도 이런 얘기가 갔나요?” 그는 더욱 딱딱해진 표정과 말투로 답했다. “아직 따로 연락은 취해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라고 느껴졌다. 나는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뗐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학교에서 진행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다 제 잘못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첫 만남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답을 내놓았다. “기말고사는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가요? 준비는 지금처럼 일단 하시되 결과를 평가하는 부분에선 제외되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장 계약 여부 또한 조만간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고요. 혹시 모르니까 배정받았던 사무실은 미리 조금 정리를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여지를 남겨둔 듯 이야기했지만 그의 말과 태도를 미루어봤을 때 사실상의 해고통지라 봐도 무방했다. 강의준비실로 돌아온 나는 멍하니 내 이름표가 붙어 있는 자리를 쳐다봤다. 너무 쳐다봐 초점이 흔들릴 때쯤 미처 끝내지 못한 학생들의 글을 첨삭하기 시작했다. 수업에서 강조했던 표현법이 쓰인 글들을 볼 땐 괜히 뿌듯했으며 누누이 언급했던 불필요한 단어나 표현이 적힌 글을 마주할 때면 어지간히도 고치기 힘든 습관이구나, 하며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학생들의 글을 읽는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괜히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20대만의 감정과 표현이 담긴 글들을 접할 기회를 놓치게 된 점이 안타까웠다. 네 편 정도의 첨삭할 글이 남았을 때, 석정 씨의 글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만의 독특한 소재와 그것을 꾸미는 세밀한 표현에선 변함없이 풍부한 감성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그녀의 글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 얘기, 해주고 싶은 얘기가 분명 남았던 것 같았지만 어떤 코멘트를 남겨줘야겠다는 생각보단 계속해서 그녀의 글을 읽고 싶었다. 그렇게 같은 글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 매료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머릿속을 요란하게 돌아다녔다. 마치 겨우내 굶주렸던 짐승이 잠에서 깨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헤매는 것 같았다. 험한 산기슭을 누벼야 했고 가죽을 뚫을 것만 같은 차가운 바람에 돌아서기도 했다. 그렇게 눈과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에만 안주할 때쯤 그녀의 글을 만났다. 간절한 본능이 그녀의 글을 읽을수록 끓어올랐다. 다시 한 번 펜을 잡고 싶었다. 펜을 잡고 싶은 본능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의 글에서 눈을 뗀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이름표에 시선이 닿았을 때, 방금 전과 같은 미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전체 첨삭을 마무리한 후, 강의를 들어갔다. 사진과 관련된 소란에 대해 일부 학생들은 알고 있는 듯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차분히 수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 여긴 강의에서 그녀는 강의를 시작한 처음 그 때처럼 뚜렷한 눈빛으로 수업을 따라왔다. 마치 강의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떠올렸던 본능에 힘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강의를 마치고 내가 머물렀던 사무실을 정리한 뒤 행정실로 가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창 외투를 걸치며 퇴근 준비를 하던 조교는 내 손에 들려있는 편지봉투를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봉투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행정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모든 게 정리된 기분이 들었다. 착잡하기보단 오히려 후련했다. 학교를 나오고 집에 다 와갈 때 즈음,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석정 씨를 마주쳤다. 그녀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자를 남겼다. ‘한 학기 동안, 부족한 저의 글쓰기 수업을 들어주신 점, 그리고 글쓰기란 무엇인지 되새겨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와 가볍게 샤워를 한 후, 책상 위의 노트북 대신 펜과 원고지를 집었다. 깊은 숨을 내쉬며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분히 원고지를 적셔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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