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김윤정
아이는 바닷가로 나갔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내며 걸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 아이의 짧은 머리가 붕 뜬 채로 오래 지속되었다. 아이는 노래를 부르는 듯 흥얼거렸다. 아이는 붉은 목도리를 가슴에 품었다. 겨울을 기다리는 듯했다.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아이를 찾고 있었다. 아이는 노인의 목소리를 듣자 바닷가로 뛰어들었다. 아이의 입가에까지 바닷물이 차오를 때, 아이는 몸을 물 위에 띄웠다. 그대로 오랫동안 누워있었다. 노인은 아이를 보고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물이 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노인은 물을 끓였다. 그리고 마른 옷과 수건을 건네주었다. 아이는 젖은 옷을 벗어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둥근 바구니에 옷을 넣고, 잔뜩 구겨진 얼굴로 부엌으로 갔다. 김이 나는 물을 식탁 위에 놓았다. 아이는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둘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가 노인의 집에 찾아온 건 겨울이었다. 아이는 낡고 헤진 옷을 입고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맨발로 문 앞에 서있었다. 노인은 아이에게 맞지 않는 큰 옷을 주었고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주었다. 아이는 찡그린 얼굴을 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노인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았다. 노인은 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이는 노인의 집에 머무르며 노인의 집안일을 도왔다. 그는 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장래를 걱정하고, 동시에 과거를 궁금해했다. 아이는 묻는 말에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노인은 그가 벙어리인 줄 알았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아이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노인은 식탁을 닦으며 태연한 듯 물었다. 나무라는 말투도, 캐묻는 말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걱정하는 듯한 다정한 말투도 아니었는데, 그로서는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인 결과였다. 아이는 뒤를 돌아 노인의 눈을 보았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이는 접시 하나를 든 채로 몸을 돌렸다가, 다시 되돌리는 순간 접시가 싱크대 밖을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접시였던 조각들이 흩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이의 발목에 조각 하나가 날카롭게 스쳤다. 피가 주륵 흘렀다. 순식간이었다. 노인은 아이를 두 팔에 안아 들고 소파로 옮겼다. 아이는 떨고 있었다. 노인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이는 다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제 잘못인데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인은 아이에게 누나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종종 아이의 노랫말에서 누나라는 가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더 자세히 들으려고 가까이가면 아이는 금세 노래를 멈추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 나무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의 표정을 따라한 것이었다. 노인은 아이가 자신을 닮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노인은 인상쓰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미 새겨진 세월의 주름은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는 바닷가로 나갈 때에 언제나 붉은 목도리를 두 팔에 쥐고 갔는데, 하루는 노인이 목도리를 매는 법을 모르는가 싶어 매어주려고 하자, 아이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접시조각에 발이 찢겨졌을 때보다 더욱 심하게 구겨진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목도리를 돌려주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이는 그 말의 의미를 똑똑히 새겼다. 아이가 어두운 밤색 옷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을 때, 노인은 창가에서 아이가 돌아다닐 경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일과는 대부분 같았다. 노인은 그 일정한 경로 밖에서 벗어날 때에만 아이를 찾았다. 그럴 때에도 아이는 지친 기색 없이 돌아왔다. 마치 행복한 시간을 보낸 사람처럼 눈가에 밝은 빛이 돌았다.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노인은 창가에 기대어 머그잔을 들고 창 밖으로 지는 해와 아이의 걸음의 보폭을 세고 있었다.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노랫말이 궁금하여 고개를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모래사장 위에 아이는 혼자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파도를 타고 노인의 귓가에 닿았다. 노인은 아이를 혼자 두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서랍장 위에 놓인 밤색 모자를 급하게 흰 머리 위에 쓰고 그는 뛰쳐나갔다. 아이는 혼자 꺄르르 웃고 있다. 노인은 아이의 웃음을 처음 보아 놀랐다. 그리고 그 웃음의 출처를 물어볼 생각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씩, 모래사장 위에 노인의 발자국이 아이의 발자국을 덮었다.
누나 지금은 무슨 계절이야?
노인은 똑똑히 들었다. 아이의 입에서 나온 소리들은 노랫말이 아니었다. 아이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누구와?
노인은 아이에게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붉은 목도리를 가슴에 품고 두 팔로 꼭 끌어안은 아이의 모습에서 평화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노인은 발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아이를 응시했다. 아이가 멀어져 갈수록 노인의 눈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찼다. 이 바다에는 아이가 손꼽아 기다리는 계절이 있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오기에. 아이는 다음 계절도 두렵지 않았다.
그날 밤 노인은 목도리에 불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