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문 백야

by 밤의황제 posted Jun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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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강선우


하늘이 하얗다. 내 마음도 그렇다. 이제 난 저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한다. 어두운 하늘 속에 갇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여야 한다. 그렇게 오늘 새로운 세계로 떠난다. 우리가 아는 그런 새로운 세계가 아니다. 적어도 내 지인들은 가보지 못한 세계다. 나는 점점 떠나가고 있는데 그들은 어찌 저리 평화로운지. 행복한 모습. 매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 이제 정말 끝이구나. 나에게 이런 순간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우리 모두 알고 있었을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평해지는 바로 이 순간. 학벌도 명예도 모두 까맣게 불타 사라지고 난 진정한 나 자신으로 남는다. 진실로 나를 마주할 때. 항상 나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가 아는 상식 안의 단면일 뿐 이 모습이 정녕 나의 실체, 형태란 말인가. 난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달려왔단 말인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거라면, 끝이 정해진 것을 알았더라면, 조금 더 행복하게 조금 더 여유 있게 아주 조금 더 사랑할 것을 그랬다...

 

암흑의 시작을 비추는 주마등 앞에 섰다. 이곳이 정녕 세상의 결말이란 말인가. 예상대로 쓸쓸하고 초라하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이곳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꿈을 꾸지도 사랑을 할 수도 없다. 텅 비어버린 맘속에 무엇 하나 피워낼 수 없는 이곳을 지옥이라 일컫는 것인가.

 

도착 했구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 일흔 들어 보인 할아버지가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분명 주위엔 아무것도 없는데도 자꾸 훑어보며 웃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젊으니. 아무래도 동지가 없는 모양이구먼?”

동지라뇨?”

~ ! 황천길 동지! 쓸쓸하지 않겠어.”

 

할아버지 말씀대로 황천길 가는 길도 삼삼오오로 가는 방식일까? 아직도 비참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 내 사정 하나 모르는 할아버지의 즐거운 반응에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할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허리를 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물론 나도 따라가야겠지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돌아온 길에 미련이 남아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젊으니!”

 

앞으로 걸어가던 할아버지가 다시 내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왠지 나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 여긴 어디입니까? 저흰 언제까지 이 어두운 길을 걸어야 합니까? 혹시 아는 거 없습니까?”

여기? 어디긴! 우리들의 또 다른 세상이지 뭐.”

아닙니다! 이곳은 지옥입니다. 우리들의 세상은 저기 있단 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돌아온 길까지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다른 세계이니 이 세계만의 법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른과 난 평등해질 수 있는 걸까? 언제부터 하나하나 다 지켜왔을까. 사람을 해치고 상처 입혀도 괜찮은 세상이라면 이 사람은 날 어떻게 할까.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보니 또 혼란이 찾아왔다.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세상. 괜스레 눈물이 났다. 울컥하는 마음에 뜨거운 것을 몇 방울 흘리다보니 괜한 두근거림이 차올랐다. 이런 감정이 느껴지니 아직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젊으니.”

 

나의 무례한 행동과는 다르게 할아버지의 얼굴은 주름 접힌 밝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한 평생 살며 이렇게 인자한 미소는 처음이다.

 

뭘 그렇게 서둘러? 두 번 죽을 일 있겠나? 차근차근 생각하세. 혹시 아나 이 길의 끝이 또 다른 생의 시작일지.”

 

그 말씀에 조금은 편해졌다. 설득 당하고 있다는 것에 미세한 내적 스크레치가 느껴졌지만 방금까지의 나의 생각이 바보같이 느껴진 것에 색다른 후회가 밀려왔다.

 

가세.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딨으랴. 누구든 다 그런 거지.”

 

할아버지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바라봤다. 앞이 잘 안보이시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요리조리 흔들다 까치발을 들어 암흑의 끝을 투시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르는 것을 이미 다 이해한 듯 할아버지는 주마등 빛 속에 얼굴을 담고 눈을 감았다.

 

자네 인생 얘기하기엔 충분한 거리구먼. 물론 나 또한.”

 

잔잔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단단히 묶여졌다. 할아버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고 나도 잇따라 당겨졌다. 우리는 천천히 주마등 빛을 스치며 긴 길을 따라 걸어갔다.

 

할아버지는 어쩌다 여기로 오셨어요?”

? 글쎄다. 버스가 종점에 서면 자네는 어떡할 건가?”

..? 내려야겠죠..”

종점에서 다시 타야한다면?”

기다렸다 타아죠..?”

버스는 오려면 멀었어. 그런데 버스비가 없다면?”

...?”

 

할아버지의 말이 자꾸만 이상했다.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말은 분명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뭘 가리키려 한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더 이상의 배움과 깨달음은 필요 없는 세상에 종착했으니.

 

돈이 있어야 버스를 타지?”

....일반적으론 그렇죠..?”

우린 지금 정확한 버스를 타러 가는 거네.”

정확한 버스요? 무슨 말씀..”

버스 잘못 타면 환승하고 또 갈아타야 되잖나. 너무 번거롭고 무의미한 시간이야. 우린 1번 버스 탔으니 이제 2번 버스 타러 가는 거야. 애꿎은 3번 버스 타지 말자고.”

그럼 1번 버스 다시 탈 수 없나요? 1번 버스 다시 타고 싶은데..”

막차 보내놓고 이제 와서 찾음 어떡하나. 자네 첫차부터 막차까지 어땠나? 난 크게 보자면 기쁜 일, 슬픈 일 반복이었네. 작고 큰일들 이지만 결국 그 일들을 겪을 때 제일 먼저 반응 하고 느끼는 건 내 감정이니까.”

 

내가 머리가 나쁜 것일까. 대강 알아들을 수 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이기 싫은지도 모른다. 이미 놓쳐버린 인생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제대로 된 뭐 하나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보내버린다니. 그 뒤의 말씀은 잘 들리지 않았다. 괜히 멍해지는 게 이게 삶의 허무함, 회의감, 절망감... 자괴감 일까. 삶을 향해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온 것은 이번이 처음일 거다.

전까지 불 같이 화를 내던 할아버지는 잠잠해 지고 우린 고요히 길을 따라 걸었다. 실은 아까 할아버지의 말씀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좀 달라진 건 주마등이 이렇게 예뻤나?

할아버지는 자꾸 아무것도 없는 칠흑 속을 두리번거렸다. 무엇이 보이는지 자꾸만 한 곳을 보곤 웃고 같은 표정으로 고개만 옮겨 다녔다.

 

자네는 나이가 어떻게 되나?”

“35살입니다.”

그렇구먼, 난 몇 살 같여?”

..일흔..중반 정도 되 보이십니다.”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는 여전했다. 어딘가 이상했던 건 내 나이를 말했는데도 할아버지는 변함없는 얼굴이었다. 놀랍지 않은 것일까?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건 백세의 약 3분의 2 시간을 보낸 할아버지에겐 놀랍지 않은 일인 걸까. 그 누구나 할 법한 탄식마저 나오지 않으니 괜히 나까지 담담해져갔다. 이 나의 모습이.

 

일흔 중반? 그렇구먼, 많이들 환갑 지나면 다 같은 나이로 생각해. 나도 그랬어. 젊어서 청년부터 늙고 갱년기 보내고 환갑 오면 그 다음 부턴 같은 인생이지. 친구들은 나랑 똑같이 주름살 늘고 예전의 얼굴은 이미 쭈그러져 알아보기도 힘들어. 그때부터 우리들은 젊을 때 느껴볼 수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해. 누군가는 인생의 회의감과 공허함을 느낀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부터 시작 된 자유를 느끼지.”

...”

자네도 그래, 난 전자였어. 자네는 지금이 전자구만.”

제가 그런 다구요?”

그래, 자네 지금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아. 내가 자네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자네 그 표정 여기까지 가지고 왔구먼.”

 

나는 지금 내 얼굴을 모른다. 말을 듣고 보니 서서히 내 모든 신경은 등을 돌려 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왠지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원래 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힘을 풀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놓아버리면 눈썹 위로부터 겉을 감싸는 근육들이 한꺼번에 당겨왔다. 그것을 견뎌내는 것 보단 차라리 힘을 꽉 주고 있는 게 오히려 편했다.

 

뭐가 그리 불만인 게야?”

 

할아버지가 물었다. 나도 궁금해졌다. 자꾸만 불편한 마음에 무엇이 불만일까. 딱 하나로 정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여러 가지로 분산되어 실루엣으로 사르르 스쳐갔다. 차근차근히 정리해 보려 해도 자꾸만 불안해지고 급해져 깊게 떠올릴 수 없었다. 그냥 놓쳐버리고 싶었다. 이게 진심일까? 두려워지고 귀찮아지고 하기 싫어지면 피해버리는 게 바로 나였을까? 나 자신을 알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난 왜 이렇게 돼 버린 것에 후회하는 것일까. 하나의 욕심이려나.

 

이봐 자네!”

....?”

뭘 그리 생각해? 무엇이 불만이건 지금 와서 되뇌어봐야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자꾸 떠오릅니다...이상하게 자꾸만 스쳐지나 가는데 자꾸 마음이 꿈틀거리는 게 짜증도 나고..”

그치? 실은 나도 그래. 단 하나의 불만 없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정적이지 않더라도 우리 집사람, 아직 철 안 든 반백 살 자식들. 그 모든 게 불만이야. 불만 이였어. 저 녀석은 왜 저럴까. 이렇게 할 수도 있는데 왜 저렇게 하지?”

 

내 얘기 같았다. 그 분의 말씀에 끼어들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생각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사소하게 다가왔던 것들이 모두 씨앗이 되어 불만이라는 꽃을 피워냈다. 그들이 밉지 않았지만 하나의 행동에도 불같이 달려들었고 모든 걸 정정하려 했었다. 훈계했고 돌아오는 것은 듣지 않았다. 그들에게 잘못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게 누구든 어떤 사람이건 난,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랬다.

 

결국 인정받고 싶어 했지.”

 

그 분의 말씀은 마음의 저편까지 훅 와 닿았다. 아까 느껴지던 불만스런 마음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을 걷는대도 주마등 하나로 먼 길까지 밝혀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이마의 근육은 그 모습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천천히 내려 앉히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그땐 그랬어. 뭐가 그리 급했는지 자식들 얼굴. 하나하나 예쁜 곳이 얼마나 많은데.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되는 것인데. 이놈의 색안경은 나이가 들수록 두터워지나봐. 아주 그냥 고급 선글라스여.”

 

할아버지가 갑자기 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작게 떨리는 목소리를 울렸다.

 

그래... 그러면 되는 것인데. 뒤늦게 잘해주려니 안되고 나 자신 하나 바꾸는 게 정말 힘들더라고. 나 없으면 받아낼 금덩어리들이라도 받으면 어째 쫌 나아지것지 하고 그렇게 허송세월 보내왔지. 근디 지금은 그게 다가 아닌 거 같여. 자꾸만 걸으면서도 저 놈의 밝은 등만 보면은 못난 자식들, 이제 막 걸음마 땐 손주 녀석들. 나 없다고 가슴치고 있을 우리 집사람. 자꾸만 걔들이 비춰. 등 하나엔 우리 아들. 또 저기엔 우리 딸. 건너편엔 집사람. 뒤돌아보면 정말 있을 거 같아서 못 보겠는 것이여. 걔들은 아직 여기 오면 안되니께. 나도 참 몹쓸 놈이지. 그렇게 못살게 굴고 맨날 구박하고 호통 쳤는데도 지금은...이상하게 지금은 자꾸만 보고 싶어. 정말 못 본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보고 싶어. 매일 보고 당연히 봐야지 했던 사람들이 눈앞에서 없어지고 나니깐 이러는 것이여.”

 

마음속으로 눈물이 났다. 그렇게 말하니 나도 보고 싶은 사람이 한두 명 떠올랐다. 차근차근히 보고 싶은 마음이 금방이라도 돋아났지만 어떻게든 억눌렸다. 슬프지만 담담하게 받아드리려는 할아버지를 따라 내 마음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할아버지를 닮은 우리 아빠와 엄마. 형 동생들. 사촌 누나. 이모 이모부. 별로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까지. 어쩌면 어느 순간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었다는 것에 놀라웠다.

 

자네, 잠시만 앉아봐.”

? 바닥에요?”

그래, 의자가 없잖여.”

 

할아버지의 말을 따라 주저앉았다. 그리곤 천천히 내 눈을 감기더니 눈썹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근육이 풀리며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굳어있던 인상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 쉽진 않았다. 잘 내려가다 어느 구간에 걸려 계속 당기고 있었다. 당겨질 때 마다 좋지 못한 기억들이 자꾸만 스쳐갔다.

 

이마에 힘을 빼려고 하지 마! 마음에 힘을 빼란 말이야. 천천히. 그냥 받아 들여.”

 

잘 안될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 나의 마음에 낯선 온기를 채워준 그 분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될 거 같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머리가 맑아졌다. 괜찮아졌고 그 사소한 모든 것들을 밀쳐내기 보단 모두 삼켜버렸다. 그것도 아주 크게. 꿀꺽.

그러니 자연스레 힘이 풀리고 다시 편안해졌다. 아직까지 후유증은 남아있었지만 잔 찌꺼기를 소각하는 작업 정도로 여겨야겠다. 그러니 왠지 미소가 쉽게 띄어졌다.

 

인물 좋네.”

 

웃었다. 웃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일 줄이야. 단지 인정하고 받아들기만 했을 뿐인데 모든 게 이렇게 편안해질 줄이야. 아직 이런 말이 어색하지만 생전에 알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그들을 위해 웃을 수 있었을까? 이 웃음이 다른 웃음으로 전해질 수 있었을까.

 

...그런데 아까보다 빛이 더 늘어난 것 같지 않아요?”

 

어딘가 아까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빛이 늘어나니 주위는 더욱 밝게 빛났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확실하게 보였고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굉장히 잘 보였다. 주름 사이사이에 빛을 머금고 천사 같은 웃음으로 나에게 하는 말이

 

난 잘 모르겄는디?”

 

하시곤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나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를 뒤따라갔다. 그때부터인가 마음속에 꽉 막힌 응어리가 조금은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체한 것들이 명치 안쪽으로 꽉 막혀있는 것처럼 내려갈 듯 말 듯 애매한 느낌이었다. 뭐 그래도 아직까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저 할아버지는 왜 저렇게 태연한 것일까. 물론 아까 많은 얘기를 나눠봤지만 여전했다.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는 사람이었다. 단지 젊고 늙음에 차이는 아닐 텐데.

 

어르신.”

?”

지금 쯤...장례 준비하고 있겠죠?”

그렇겠지? 곧 먹을 게 많아지겠구먼.”

? 먹을 거라뇨? 여기에 그런 건 안보입니다만..”

 

할아버지는 갑자기 자리에 멈췄다. 그러곤 기대에 부푼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놀랍기도 했다. 주름 가득한 아이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영 이상했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으흠. 솔직히 전부터 궁금했어.”

? 뭘요?”

아니~ 있잖어. 그 우리 제사 음식 차려둔거~”

제사음식? ..설마?”

그거 우리가 내려가서 먹어야 될까? 여기로 가져다주려나?”

?”

옛날 어른들이 자주 말하잖어. 음식 차려두면 먹으로 온다고~”

 

처음 들었을 땐 터무니없었지만 고민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곤 똑같이 고민하다보니 정말 궁금해졌다. 그러며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 명절이면 다들 모여 웃고 떠들고 헤어질 때면 금방 만나겠지 하며 자연스레 보냈던 그 시간들. 물론 그 외의 시간도 똑같이 보냈긴 마찬가지다. 단 하나의 시간조차 소중히 못하는 내가 어떻게 다른 시간을 소중히 보낼 수 있겠는가. 막연한 후회는 여기서 끝내고 싶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추억 때문에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 떠먹여주진 못하니깐 저희가 가야겠죠..”

그치~ 정말 갈 수 있었으면 좋겄어. 그래도 손주 녀석들 의젓하고 늠름하게 자라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괜히 그런 거보면 지갑 열리잖어.”

하하. 그래서 전 세뱃돈 못 받았나 봅니다.

정말? 우짤까이..”

 

이후로 우리 사이엔 한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옛 생각에 잠겨 웃고 슬퍼하며 하나하나 소중하게 더듬거렸다. 그러다보니 역시 아직까지 모두 보내기엔 부족했다. 나도 이렇게 놓아주기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어떠할까. 도저히 그것들은 떨쳐지지 않았다. 물론 할아버지도 마찬가지겠지. 결국 여기로 와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버린 그리움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혀 있을 것이다.

 

자네, 결혼 했어?”

? ? 아뇨...”

결혼 안하고 뭐했어? 우리 땐 그 나이면 애가 국민학교여.”

..하하 그렇죠. 결혼은 일이 끝나면 하려 했어요.”

무슨 일? 끝나는 일이라니.”

일을 많이 해서 승진하고 또 승진해서 멋있게 하려 했죠.”

 

그래 그랬었지. 아주 잠시나마 그리운 얼굴 하나 더 스쳐갔다.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첫사랑일까나. 기억할수록 차갑거나 가슴 아픈 것이 아닌 아련하고 따뜻하고 잠시나마 모든 걸 잊게 해주는...빠져들게 하는 단 하나의 특별함. 간단하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더니 아무것도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와버렸구나. 정말 한심하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동정하는 것 같지만 걱정스럽고 하지만 어딘가 안타까운 비슷하지만 구분하기엔 다른 얼굴. 그렇겠지. 얼마나 안쓰러울까. 나 같아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네.”

?”

이런 말 이제 와서 물어보는 게 실례인지 모르겠다만..”

무엇입니까?”

 

할아버지의 떨리는 입술사이로 잔잔히 세어 나오는 미세한 진동은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물론 이제 와서 실례가 될 말이 어디 있겠나. 곤란해 하는 할아버지를 위해 어떻게 말을 해야 위안이 될까.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자네 연애는 해보았지..?”

..?”

아니 난 걱정이 돼서~. 우리 아들 친구 녀석도 연애 한 번 못해봐서 그 나이까지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것이여...걱정스럽지 정말.”

..”

아니지? 아니겄지?”

..아니에요...”

 

힘이 빠졌다. 예상과는 다른 질문에 당황스럽기도 했고 자칫하면 정말 실례가 될 번한 질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야 주름의 평온을 찾았다. 잠깐의 먹구름이 왔다 사라진 것처럼 굉장히 말끔한 용모를 하고 계셨다. 정말 그 표정이 그 말을 하려는 표정이었다니. 충격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근데 말이여. 참으로 신기혀.”

무엇이요..? 제가 연애를 해봤다는 것이요..?”

아니~ 무슨 소리 하는 거여. 그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

..”

 

무슨 뜻일까? 깊게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만나서 함께 대화를 주고받으며 옛날일도 떠올리고 지금도 치열하게 생각을 하고 나누고 있으니 정말 산사람 같여. 이제 다시는 못 할 줄 알았는디. 한 번에 요절해 버리면 그것이 끝인 줄 알았는디. 정말 이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인 것 같여.”

아까부터 계속 얘기하고 계셨잖아요. 새로운 시작.”

허허. 그랬었지. 참으로 웃겨. 마실 수 있는 산소는 다 마시고 가야지 했던 철부지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와 쭈글쭈글해지니 세월 참 웃기다 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여. 그때나 여기 와서나 세월에 우습고 지나간 시간이 너무 빨라 회의감 들 때도 종종 많었지.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변한 건 시간이지 내가 아니었어. 내가 뭘 하든 간에 시간은 흘러갔던 것이여. 내가 고놈을 쫓아간 것이여. 고놈이 날 쫓아왔어야 했는디.”

 

할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말하셨다. 나도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이 돌아가는 필름처럼 사르르 스쳐갔다. 분명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소한 모든 것까지 난 시간을 기다렸다. 때를 기다렸고 언젠가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들 가족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위인의 말은 위인이니깐 하는 거겠지. 가볍게 넘겼다. 만약 그렇게 보냈더라면 지금의 난 단 하나의 후회도 없었을까? 정말 인정하기 싫고 다른 말이나 핑계라도 대보고 싶었지만 지나가는 순간들이 모두 다른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이라는 생각에 더욱 괴로워졌다. 언젠가 그 누군가. 가장 편한 말이지만 가장 위험한 말이란 걸 알았다면 지금 웃을 수 있었을까.

 

자네에게도 서서히 빛이 찾아오고 있구먼.”

?”

 

할아버지가 발밑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곳을 따라 바라보니 자그맣게 빛나는 꽃 한 송이가 천천히 봉우리를 피우며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연분홍빛의 아름다운 꽃이었다. 한 평생 꽃에게 매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이 꽃은..?”

난 잘 몰라~. 그것이 자꾸만 빛나더라고.”

 

꽃을 보면 따고 싶은 마음이 들까? 무심코 지나쳤던 꽃들. 어느 사람은 예쁜 꽃을 따 사진을 찍고 얼굴 어딘가에 꼽곤 한다. 그런 마음이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꽃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생명을 뿌리내린 꽃이라면 그 자리에 가만히 두고 싶었다. 누군가 내 무덤을 짓밟는 것 또한 싫으니.

생각을 마치고 다시 앞으로 시야를 넓히니 봉우리를 간직한 다색의 빛들이 하나 둘씩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미소 같았다. 나를 반겨주는 따뜻한 미소. 집 안에 들어가면 누군가 맞이해 줄 미소. 어딘가에 가면 친구든 누구든 맞이해 줄 그 미소. 누군가 한 명은 꼭 해줄 것만 같은 혹은 해줬으면 하는 지금에 그것은 너무나도 이상적인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냥 그런 것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것들이라 무슨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 하나에만 집중 되었다. 말이 떨어지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먼저 어디 쯤 가고 있을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 황홀한 관경을 본다면 어디도 떠나지 못 할 테니깐.

 

어때? 예쁘지?”

.....”

이런 곳을 두고 천국이라 하는 건가?”

천국이요..?”

우리 착하게 살았나봐.”

하하..그런가요..?”

이제 자네 얘기 해봐.”

? 무슨.”

어쩌다 여기 온 거여?”

 

맞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아 잊고 있었다. 더럽혀진 유리를 한 번의 펀치로 여러 파편을 만들어낸 그 순간. 서서히 떠올랐다.

 

글쎄요~ 저는..”

 

우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역시 가야할 길이 아직 남아있었다. 저 먼 곳까지 이 빛은 펼쳐져 있으니 천천히 피어오를 때까지면 될 것이다. 그럼 우리가 원하는 길에 도달하지 않을까.

 

뭔데? 뜸들이지 말고 얘기 해봐.”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그때 나의 끝을 맞이하던 순간. 어떻게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날..차에 치였었어요.”

교통사고야?”

....”

 

말하면서도 어딘가 따끔거리는 게 자세히 말하기 싫었다. 동정하며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도 싫었고 더 자세히 얘기하면 어딘가 모를 부정적인 마음이 순식간에 닥쳐와 목구멍 끝을 턱하니 가로 막았다.

 

어땠어?”

?”

아팠어?”

글쎄요. 너무 순식간이라.”

내가 봤을 땐 좋았을 것 같네.”

 

웃으면서 말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만 보이는 할아버지의 모습만 보곤 판단할 수 없었다. 하기도 싫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할아버지를 만나고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그 사람의 단면을 보곤 완전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일까. 정말 나를 알고 하는 말일까? 그 말을 들은 후에 할아버지에게서 눈을 땔 수 없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은 어땠을까.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빛들의 아우성은 나를 향해 빛발치고 내 눈엔 그것이 할아버지의 후광을 만들어갔다. 정말 단 하나라도 잘난 것 없이 지나간 인생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자존심에 화를 내고 짓밟으려 했었다. 그럴수록 짓밟히는 것은 나의 감정, 나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결국 숨고 피하는 것은 나였다. 한 번도 나 자신에 떳떳하지 못해 화만 냈던 나. 이젠 떳떳해질 이유가 생겼다. 가질수록 짓밟을수록 행복해지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모두 나를 알아달라는 형형색색의 신호탄일 뿐이었다. 나도 알았을까. 그것은 잘못된 신호탄이었다는 것을. 단 하나의 사랑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자네, 어이 자네!”

..?”

왜 울어?”

 

할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자꾸만 울렁거리는 게 미꾸라지 같았다. 하나의 뜨거운 물줄기가 턱 끝에 맺혀 천천히 스며들 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기억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스쳐갔던 모든 기억들이 생생하게 잊혀 지지 않는다고 했었나?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 순간에도 나를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가 도로에...있었어요,”

자네, 드디어 솔직해 진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부끄러워하지 말어. 잘했어. 그 아이는 자네 덕에 행복을 더 느낄 수 있잖아. 지금 자네처럼.”

“...”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구부러진 인상과 흐트러진 마음을 꼭 붙잡고 다닌 나였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조금 달랐다. 자세히 집중해보니 정말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숨 쉬는 게 편해지고 마음까지 맑아졌다. 몸과 머리는 가벼워지고 좋은 느낌이 자꾸 스며들어왔다. 심장이 점점 두근거렸다. 또 다른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시야는 한층 더 넓어진 것 같았다.

 

..우와..”

이제 자네도 보여?”

이게..여기가 원래 이랬습니까?”

그럼. 뭐 눈엔 뭐만 보인다지?”

 

하늘이 보였다. 새하얀 하늘. 너무나도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언제부턴가 시커먼 어둠들이 걷혀나갔는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순백의 천공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천히 내려다보니 어느새 꽃들이 활짝 피어올랐고 사이사이 새파란 잎들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너무나도 더럽혀진 내 마음을 한 번에 정화시켜주는 기분이었다.

 

자 이제 가는 길 덜 심심하겠지?”

...당분간 여기에 머물러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럴까? 차분히 가볼까~?”

 

할아버지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도 얼른 따라 앉았다. 다시금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마지막을 맞이하던 그 순간. 난 지금과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정말 진심으로 뭔가를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 지금까지 그것이 무엇인지 그 진심이라는 것을 들추기 싫어 매번 피하고 감추었지만 이젠 아니다. 더 이상 숨고 싶지 않다. 내 진심을 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금 감추었다. 감추는 거야 내 전문이니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거처가야 할 마지막 기억. 그래 난 그때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난 정말 진심을 다해..웃고 있었다.

언젠가 만나게 될 또 다른 순간을 위해 난 다시 준비한다. 그때가 된다면 반드시 웃을 것이다. 이 하늘을 머금은 새하얀 미소를 지을 것이다. 사랑할 수 있다. 꿈이 아니다. 아름다운 정원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닮아갈 것이다. 언젠가 만나게 될 그 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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