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별에게 가는 길

by 초니 posted Jun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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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에게 가는 길




강 초 원




 

오래전부터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설은 늘 있었다. 이번 지구 멸망설은 6km 정도의 크기를 가진 미확인 소행성이 지구로 다가오고 있으며, 충돌하면 지구 멸망을 일으킬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지나가는 이야기겠거니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확인 소행성은 점점 지구의 공전 궤도에 가깝게 접근해왔고 지금 지구 멸망까지 17일 남았다.


2009년 5월 10일 지구 멸망 17일 전.


영훈은 친구 하나 없이 동아리에 가입한 것을 후회하며 댄스부 동아리실 앞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같이 들어가자”


문고리를 잡으며 제 등을 미는 재현의 손길에 영훈은 놀랐다. 등에 느껴진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랐지만, 그 손길이 재현이라는 것에 더 놀랐다. 재현은 댄스부 부장으로 저보다 한 학년 높은 선배다. 재현은 친절한 성격과 화려한 외모에 춤까지 잘 춰서 우리 학교 아이돌이라고 불리며 인기가 많다. 그런 선배가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나니 놀랄 수밖에.


“드...들어가려고…했어요”


말은 갑자기 왜 더듬은 거지. 재현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물론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다들 온 거지? 일단 편하게 앉아”


재현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선배들의 공연을 보는 것으로 OT를 대신한다고 했다. 자기소개는 피하고 싶었는데. 다른 부원들 하는 거 듣고 따라 해야겠다고 영훈은 생각했다.


“그럼 영훈이 맞지? 영훈이부터 시작하자”


재현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영훈은 화들짝 놀랐다. 왜 하필 나부터? 아니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나저나 아직 뭐라 할지 생각 못 했는데… 영훈은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저는 1학년 배영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뜸 들였다. 머릿속에선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입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영훈이는 댄스부 왜 들어왔어?


난감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영훈에게 재현이 말했다.


“춤이 좋아서요. 잘 추는 건 아닌데 좋아해요...”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무슨 말이라도 꺼냈다는 생각에 영훈은 조금 긴장이 풀렸다. 말을 마친 영훈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부원의 순서로 넘어가 부원들의 시선이 저에게서 벗어나고 영훈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처음이라 떨렸을 텐데 잘했어.”


영훈의 옆에 앉아 있던 재현이 웃으며 작게 말했다. 본인이 처음으로 시켰으면서. 영훈은 내심 재현이 미웠지만 웃으며 말하는 재현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자기소개가 끝나고 재현이 앞으로 우리가 배울 춤을 보여준다며 노래를 틀었다. 이 곡으로 다음 달에 있을 댄스대회에 나간다고 했는데 본인의 실력으로 따라갈 수 있을까 영훈은 걱정했다. 그러는 사이에 재현은 춤추기 시작했고 영훈은 그에게서 빛남을 느꼈다. 영훈은 저런 멋진 춤을 추는 것을 늘 꿈꿔왔기 때문에 재현처럼 빛나는 춤을 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2009년 5월 11일 지구 멸망 16일 전.


“배영훈. 오늘도 동아리 가?”


성운이 매점에서 사 온 피자 빵을 뜯으며 물었다.


“오늘은 안가”


오늘은 동아리 모임이 없는 날이다. 얼른 춤을 배우고 싶은 영훈에게는 쉬는 날이 싫었다. 그러던 중 동아리 활동이 없어도 자유롭게 연습실에서 연습해도 된다고 한 영훈의 말이 생각나 수업 마치면 바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구 멸망이 당장인데 무슨 동아리야. 게임이나 하러 가자”


지구 멸망이라며 게임은 무슨. 영훈은 뉴스에서 지구가 곧 멸망할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그저 또 흘러가는 이야기겠거니 했다. 대부분 그렇게 믿었다. 지구가 당장 내일 멸망한다 해도 영훈에게 특별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탈출구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마친 영훈은 곧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연습실에는 격렬한 춤을 춘 후인지 연습실 바닥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재현이 보였다. 그런 재현을 영훈은 저도 모르게 한참을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재현과 재현을 보고 있던 영훈의 눈이 마주쳤다. 영훈은 재현을 보고 있던 것을 들킨 것이 민망해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영훈의 모습이 웃겼는지 재현도 따라 웃었다.


“들어와 영훈아.”


무작정 연습실로 오긴 했지만, 누군가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한 영훈은 재현의 존재에 조금 당황했다.


“오늘 연습도 없는데 연습실에는 어쩐 일이야?


”아… 그냥 청소라도 할까 해서요”


청소는 무슨 청소. 그냥 혼자라도 춤을 춰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될 것을 청소라는 단어가 왜 자신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영훈은 당황했다. 재현 역시 생각 못 했던 대답이라 웃겼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청소? 청소 좋아해 영훈아?”


놀리듯 재현이 말했다. 청소를 좋아한다고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말을 잘못했다고 하는 게 덜 이상할까? 왜 재현이 앞에 있으면 긴장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영훈은 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청소… 좋아하긴 하는데… 사실 그냥 오고 싶었어요.”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와. 나는 항상 있으니까.”


재현은 연습이 없는 날에도 수업이 끝나면 매일 연습실에서 혼자 연습한다고 했다.


“아 선배. 어제 보여주신 춤 있잖아요. 그 노래 제목이 뭐예요?”


사실 영훈은 어제 재현이 춤을 보여준 순간부터 노래의 제목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타이밍을 놓쳐서 물어보지 못했다.


“Love You Gently. Usher 노래야. 노래 좋지?”


“네. 어제 듣고 계속 생각났어요.”


영훈이 꼭 한 번쯤은 춰보고 싶던 춤 스타일과 비슷하기도 했고 그 춤을 추던 재현이 빛나 보여서 영훈은 더욱 끌렸다.


2009년 5월 13일 지구 멸망 14일 전.


지구 멸망이 2주일 전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사람들이 점점 지구 멸망이 거의 사실이라는 뉴스 기사들이 보도되면서 하나 둘 믿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구 멸망이 코앞인데 일을 해야 하나, 학교에 다녀야 하나 등 다양한 이유로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져갔다. 오늘만 해도 반 친구들의 반 이상이 결석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던 친구들인데. 영훈의 가장 친한 친구 성운도 등교하지 않았다. 다들 지구가 멸망한다니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평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러 떠났다. 그 둘에 해당하지 않았던 영훈은 점심을 누구와 먹어야 하나 고민했다. 영훈은 혼자 밥을 먹으러 가기도 싫었고 입맛도 없었기 때문에 연습실로 향했다. 재현이 항상 연습실에 있다고 했지만, 점심시간에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연습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재현이 보였다.


“선배 점심 안 드셨어요?”


“응. 오늘 영양사가 안 나와서 밥을 못 했다고 빵 하나 주더라. 영훈이는 밥 먹고 왔어?”


“저도 별생각 없어서 안 먹었어요.”


자신을 부를 때 너라는 호칭 대신 늘 이름을 불러주는 재현이 좋기도 하면서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영훈은 재현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아무리 들어도 들을 때마다 낯설게 들렸다.


“영훈아 그럼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


“네. 좋아요”


시원한 것을 먹고 싶었던 영훈은 저도 모르게 신나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스크림 많이 좋아해? 엄청나게 신났네”


재현의 말에 영훈의 두 귀가 붉게 물들었다. 민망한 영훈은 먼저 연습실을 나섰다. 그런 영훈의 뒤를 재현이 뒤따라오며 계속 놀렸다.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붉어진 두 귀를 재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다 지친 영훈은 결국 재현과 나란히 걸었다.


“재현 선배. 선배는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어때요?”


침묵을 먼저 깬 건 영훈이었다. 재현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 재현이 학교를 안 나올까 걱정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별생각 없어. 진짜 멸망한다 해도 평소처럼 지내고 싶더라고. 요즘 학교 안 나오는 얘들 많던데 영훈이는 잘 나오네?”


“저도 선배처럼 그냥 평소처럼 지내고 싶어서요.”


영훈과 재현의 친구들은 대부분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영훈은 어차피 집에서도 할 일이 없고 학교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지금 열심히 학교를 나오고 있다. 사실 아직 지구 멸망이라는 말이 실감 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편의점에 도착해 한참 고민하는 영훈과 달리 재현은 바로 수박바를 집어 들었다. 고민하던 영훈은 재현을 따라 수박바를 들었다. 영훈은 수박바를 고른 재현이 귀엽게 느껴졌다. 많은 아이스크림 중 왜 수박바일까? 영훈은 궁금했다.


“선배. 수박바 좋아하세요?”


“그냥 수박이 먹고 싶어서. 영훈이도 수박 좋아해?”


“네. 저도 좋아해요.”


영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단지 재현을 따라 고른 것이었지만 이유도 재현과 같았으면 했다. 재현이 하는 것은 다 따라 하고 싶고 같이 하고 싶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재현과 영훈은 다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연습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각자의 반으로 갔다. 푹푹 찌는 날씨에 20 여분을 걸어서인지 영훈의 등은 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영훈은 재현과 걷는 동안은 덥다는 사실도 잊은 채 행복했다.


수업을 마치고 영훈은 곧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아직 연습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번 안 와봤지만 올 때마다 자신을 반겨주던 영훈이 오늘은 없었다. 하긴 수업 마치고 바로 달려왔으니 아무도 없을 만했다. 발은 계속 움직이며 걸었지만, 눈은 연습실 밖을 향해있었다.


“영훈이 일찍 왔네?”


기다리던 재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재현이 들어오고 바로 다른 부원들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오늘부터 연습을 시작한다는 재현의 말과 함께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춤을 한 번도 배운 적 없던 영훈은 연습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하필 자리도 뒤에 잡아서 춤을 알려주는 재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간다는 게 이런 건가 영훈은 생각했다. 영훈을 제외한 다른 부원들은 춤을 추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곧잘 따라 하며 몇 번 안 춘 것 같은데 벌써 춤을 외워서 추기 시작했다.


“영훈아 잘 모르겠어?”


멍하니 서있는 영훈을 본 재현이 영훈의 옆으로 와서 물었고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못 따라가서 연습하는 데 방해가 된 것 같아서 영훈은 부끄러웠다.


“처음 배우는 건데 이만큼 따라 하면 잘하고 있는 거야. 다시 알려줄게”


재현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었고 영훈은 혹시나 팀에 걸림돌이 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배웠다.


“영훈아. 단체 연습 끝나고 매일 나한테 더 배우고 갈래?”


“저는 좋은데 선배 시간 뺏는 것 같아서...”


“어차피 나도 연습하니까 괜찮아. 같이 하자”


영훈은 자신의 춤을 연습하기에도 바쁠 텐데 저에게 시간을 쓰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함을 느꼈다. 그런 영훈의 마음이 재현에게 들린 것인지 자신도 처음 시작할 때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영훈을 안심시켰다.


2009년 5월 14일 지구 멸망 13일 전.


안 쓰던 몸을 어제 춤을 춘다는 이유로 과하게 움직였더니 영훈은 온몸이 쑤셨다. 걸어 다닐 때는 물론이고 팔을 드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어제 재현은 춤추기 전 몸풀기는 필수라는 말과 함께 30분 동안 스트레칭만 시켰다. 나름 따라 한다고 하긴 했는데. 한 걸음 뗄 때마다 커다란 바위를 끌면서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스트레칭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연습실로 가던 영훈의 앞에 댄스부 부원인 우진이 나타났다. 우진과 영훈은 옆집에 산다. 가까이 살지만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색한 사이도 아니었다.


“댄스부 어때 할 만해?”


우진이 영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영훈보다 한 살 많은 선배라 작년부터 댄스부에 속해있었다. 작년부터 댄스부를 해서인지 OT 날 본 재현과 우진은 굉장히 친해 보였다. 영훈도 재현과 친해지고 싶었다. 아직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둘 사이였지만 영훈은 더 빨리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재현과 친한 우진이 부럽기도 하고 질투 나기도 했다.


“형. 재현 선배랑 친해요?”


물어보고는 싶은데 뜬금없을까 아끼고 있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우진은 재현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다. 부럽다. 친한 것도 부러운데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니. 영훈은 자신과 재현과의 거리가 더욱 멀게 느껴졌다.


“너도 재현이랑 친하잖아. 둘이 말도 잘하던데”


“저랑 재현 선배랑요? 재현 선배는 원래 착하니까 그래서 저한테 말도 걸어주시고 하는 거죠. 제가 뭐라고…”


영훈은 매우 놀라며 손을 양옆으로 휘저었다. 재현은 늘 웃고 친절하니까 자신에게도 그런 거라고 영훈은 생각했다.


“영훈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재현이 서 있었다. 분명 좀 전까지 복도에 아무도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거지. 영훈은 당황스러워서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욕을 한 건 아닌데 재현이 없는 자리에서 재현에 대해 떠들다 들켰다는 것이 영훈을 더욱 당황하게 했다. 영훈에게 재현은 동아리 부장 선배 그 이상으로 특별했다. 재현을 처음 본 순간 영훈은 자신이 되고 싶던 모습이 바로 재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현처럼 되고 싶었고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 그와 같은 연습실에서 같이 연습하며 친해지고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다 망쳐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영훈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교실로 뛰어갔다. 재현은 영훈을 곤란하게 할 의도로 말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영훈은 분명 재현이 기분 나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교실로 와 책상에 엎드려 영훈은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애초에 우진에게 말을 꺼내지 말걸. 아니 차라리 그냥 친하다는 말에 그렇다고 할걸. 계속 후회하다 보니 영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별일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영훈은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2009년 5월 15일 지구 멸망 12일 전.


지금 영훈은 OT 날 그랬던 것처럼 연습실 문 앞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어쩌면 그날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며칠 전 재현과 영훈은 점심시간에도 연습실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었다. 그렇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분명 재현이 있을 텐데 영훈은 그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재현이 자신을 보고 무시하면 어쩌나. 안 친한 것보다 못한 사이처럼 대하면 어쩌나. 아니 아예 화나서 안 와있으면 어쩌나. 영훈은 걱정이 많았다. 일단 재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들어는 가야겠다는 생각에 문을 열고 연습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연습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현이 약속을 잊었을까? 혹시 화나서 안 온 건 아닐까? 하며 연습실을 살피던 영훈의 눈에 거울에 붙은 메모가 들어왔다.


‘영훈아. 옥상으로 올라와.’


왜 옥상으로 오라는 거지? 혹시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저를 혼내려는 건가. 영훈은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옥상으로 갔다. 옥상 문 앞에는 출입금지라는 경고가 붙어있었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망설이며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옥상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재현이 영훈의 눈에 들어왔다. 재현은 긴장해서 얼어 있는 영훈을 제 옆에 앉혔다. 그리곤 듣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영훈에게 내밀었다. 영훈은 이어폰을 조심스레 귀에 꽂았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OST인 ‘변하지 않는 것’이 이어폰을 타고 들려왔다. 재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라고 웃으며 말했다. 화가 난 게 아니었나. 아무렇지 않게 저를 대하는 재현의 모습에 영훈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영훈도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던 시절 한동안 이 노래만 연주했을 정도로 좋아하는 노래였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며 긴장이 풀려서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눈을 떠보니 재현이 저를 보고 있었다. 영훈은 너무 놀라 소리치며 일어났다.


“왜 이리 놀라 영훈아? 먼저 잠든 건 너잖아”


재현이 웃으며 말했다. 긴장이 풀려도 그렇지 잠들다니. 영훈은 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었다. 자신도 어이가 없는데 재현은 얼마다 더 할까. 당황해서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선배. 저한테 화 안 나셨어요?”


“영훈이한테 화가 왜 나?”


재현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영훈에게 물었다. 영훈은 자신이 재현이 없는 자리에서 재현에 대해 떠든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런 영훈에게 재현은 자신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며 영훈을 다독였다. 그리고 앞으로 누군가 자신과 친하다 물으면 친하다 답해도 된다고 말했다. 영훈은 역시 재현은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2009년 5월 18일 지구 멸망 9일 전.


지구 멸망이 일주일하고 이틀 남은 지금. 학교에 있는 학생들은 평소의 삼 분의 일도 없었다. 선생님조차도 출근하지 않은 반도 대부분이어서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사실상 휴교에 가까웠지만, 자율적으로 나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중 영훈도 포함되어 있었다. 댄스부원들도 거의 사라지고 영훈과 재현을 포함해 4명만 남았다.


“우리 인원이 반도 없는데 대회 나갈 수 있을까? 아니 대회가 열리긴 할까? 지금 이 상황에?”


댄스부원인 우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애초에 나라가 지구 멸망으로 뒤숭숭한데 댄스 대회가 열릴 리가 없다고 영훈도 생각했다.


“대회는 사실 무산이지. 그래도 연습할 사람은 남아서 하고 갈 사람은 가도 좋아”


부장인 재현이 말했다. 그런 재현의 표정이 영훈의 눈에는 슬퍼 보였다. 얼마 전까지 대회 준비로 신나서 들떠있던 재현이었는데 힘이 빠져 보이는 재현의 모습이 영훈은 신경 쓰였다. 지구 멸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다같이 연습하고 있었을 텐데. 지구는 왜 하필 지금 멸망하는 것일까. 영훈은 대회가 아니더라도 재현에게 춤을 배워 한 곡을 끝까지 추고 싶었고, 시간이 되는 날까지 남아서 연습하고 싶었다.


“선배. 저는 계속 선배한테 춤 배우고 싶어요”


기운이 없어 보이는 재현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어서 영훈은 평소보다 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영훈은 지금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재현과 함께 춤을 추고 싶었다.


“그래 영훈아. 고마워”


재현이 웃으며 말했다. 웃는 재현의 모습을 보니 영훈의 마음이 놓였다.


영훈은 춤을 배우면 배울수록 잘 따라왔고 배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어느덧 재현과 같이 춤을 출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영훈아 오늘 집에 같이 갈래?”


“저 집에 걸어가는데 선배도 걸어가세요?”


“응. 나도 걸어가. 같이 가자”


연습을 끝내고 재현과 영훈은 같이 집으로 향했다.


“선배도 이쪽으로 가세요?”


우진의 말로는 재현은 우리 집과 반대 동네에 산다고 했었다. 영훈은 우진이 착각 했던 것일까 생각했다. 친한 친구라며 집도 모르고.


“응. 근데 영훈아 나한테 언제까지 선배라고 할 거야?”


“그럼 선배를 뭐라고 불러요?”


영훈의 물음에 영훈은 당황했다.


“재현이 형. 선배는 너무 딱딱하잖아.”


재현이 형. 재현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영훈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자신이 재현을 형이라고 부르다니 그러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가 선배를 형이라고 부르기가…”


“왜 이상해? 그럼 재현이라고 부를래?”


“아.아뇨 형이라고 부를게요”


영훈의 말에 재현이 웃었다.


“영훈아 아이스크림 먹고 갈래?”


재현과 영훈이 알게 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둘은 매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늘도 수박바를 집어 든 재현을 따라 영훈도 수박바를 집었다.


“선배는 왜 맨날 수박바만 먹어요?”


“영훈이 형”


“네?”


“형이라고 안 하면 대답 안 한다?”


“갑자기 형이라고 부르려니까 어색해요”


영훈에게 형이라고 부른 영훈은 귀가 빨개졌다. 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어려운 단어였나.


“영훈이 형. 내일도 학교 올 거죠?”


“응. 와서 영훈이랑 아이스크림 먹어야지”


재현이 갑자기 다른 친구들처럼 사라질까 걱정된 영훈은 재현에게 내일 학교에 꼭 나올 것을 약속받고 둘은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2009년 5월 20일 지구 멸망 7일 전.


지구 멸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학교는 텅 비었다. 영훈은 텅 빈 학교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조금 무섭기도 하고 심심했다. 연습실에 가면 재현이 있을 것 같아서 연습실로 향했지만, 텅 비어있었다. 아직 안 온 건가. 교실에 있을지도 모르는 재현을 찾아 영훈은 재현의 반으로 갔다. 하지만 거기에도 재현은 없었다. 영훈은 연습실에 앉아 재현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재현은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재현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영훈은 재현의 집도 모르고 휴대폰은 지구 멸망으로 인해 통신이 끊긴 지 오래였다. 혼자 연습도 하고 청소도 하며 연습실에서 재현을 기다렸지만 해가 질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 꼭 오기로 했으면서. 영훈은 내심 서운했다. 배가 고파진 영훈은 오후 8시가 돼서야 연습실을 나섰다. 서운한 마음을 가득 안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재현이 형…?”


“늦어서 미안해 영훈아.”


영훈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재현이었다.


“엄마가 갑자기 아프셔서 간호해드리느냐고 늦었어. 혹시 아직 학교에 있을까 싶어서 왔는데 다행이다.”


“혹시 무슨 일 생겼나 걱정했어요.”


재현의 얼굴을 보자 영훈은 언제 서운했냐는 듯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영훈아 그네 타러 갈래?”


“그네요?”


영훈은 학교 뒤 놀이터에 가 그네 타는 것을 좋아했다. 생각할 일이 있을 때 영훈은 늘 놀이터로그네를 타러 갔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도 하고 나무에 가려진 오래된 놀이터라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은 놀이터였는데 재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영훈은 궁금했다.


“재현이 형. 여기 자주 왔었어요?”


“자주는 아니고 예전에 가끔?”


“여기서 별 보면 진짜 예뻐요.”


영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현과 영훈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음 주에 멸망할 지구라는 것이 안 믿길 정도로 예뻤다.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별들이 영훈의 눈에는 오늘따라 더 예뻐 보였다.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별이 꼭 재현과 같다고 생각했다. 영훈에게 재현은 자신만의 밤에서 빛나는 별이었다.


“저 사실 학교 오기 전부터 형 알고 있었어요.”


“나를?”


“네. 예전에 형 춤추는 거 본 적 있어요.”


2년 전 학교에서 단체로 보러 간 댄스 대회에서 영훈은 재현을 보았다. 둘 다 어린 나이였지만 혼자 그 큰 무대에서 춤을 추는 재현이 영훈의 눈에는 빛나는 별 같았다. 그날부터 영훈은 재현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나도. 영훈이를 알고 있었어”


“저를요? 어떻게요?”


“비밀이야”


영훈은 재현이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말에 놀랐다. 그런 영훈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재현은 끝까지 영훈을 알게 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려준다는 말만 반복하며 재현은 웃기만 했다. 사실 영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훈이 재현을 알게 된 것보다 더 먼저 재현은 영훈을 알고 있었다.


2009년 5월 21일 지구 멸망 6일 전.


저번 옥상 출입 이후 영훈과 영훈은 옥상에 자주 들렀다. 원래 옥상은 학생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감시하며 관리할 선생님도 없는 지금 금지 구역이라는 말은 무의미했다. 그리 높지 않은 학교였기에 옥상이라고 해 봤자 3층 높이였다. 둘은 구석진 곳 그늘에 누워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음악 취향이 비슷한 걸 안 후로 둘은 거의 매일 노래를 같이 들었다. 재현과의 공통점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영훈은 기뻤다. 둘 다 돌잡이 때 마이크를 잡았다는 공통점에도 기뻐하는 영훈이었다. 둘은 함께 보낸 날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많았고 서로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흥미로웠다. 영훈은 본인의 이야기를 남에게 술술 털어놓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재현과 함께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재현과 함께 보낸 11일이 영훈에게는 그 어떠한 날들보다 의미 있고 행복했다. 영훈은 재현을 알기 전 무기력한 삶에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데 왜 하필 지금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일까. 이 행복한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함께하고 싶었다. 이런 영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확인 소행성은 점점 지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2009년 5월 25일 지구 멸망 2일 전.


지구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아 날씨도 이상해졌는지 아직 5월인데 한여름처럼 푹푹 찌는 더위가 계속되었다.


“소행성이 충돌해서 지구가 멸망하는 게 아니라 너무 뜨거워서 멸망하는 거 아니야?”


재현이 반팔을 펄럭거리며 말했다. 정말 재현의 말처럼 소행성 충돌 전에 지구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형. 내일 저랑 바다 보러 갈래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 냄새를 맡으면 더위가 조금 수그러들 것 같았다. 모든 이동 수단은 운행을 그만둔 지 오래였기 때문에 둘은 자전거를 타고 바다에 가야 했다. 얼마나, 어디로 가야 바다가 나오는지도 몰랐지만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영훈은 얼른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구 멸망이 2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학교에 나오는 학생은 없었다. 학교에는 정말 재현과 영훈 둘뿐이었다. 이젠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매일 학교로 왔다. 둘 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다. 학교 말고 다른 장소도 많았지만 둘은 학교가 좋았다. 재현과 학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영훈의 눈에 음악실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영훈은 입학하고 한 번도 음악실에 와 본 적이 없었다. 학기 초부터 공사를 한다며 교실에서 수업한 탓이다. 영훈은 재현을 끌고 음악실로 들어갔다. 공사 때문인지 넓은 음악실에는 피아노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영훈아. 피아노 한 곡 쳐줘.”


재현의 말에 영훈은 오랫동안 비어있던 탓에 먼지가 가득한 피아노를 털고 의자에 앉았다. 피아노 앞에 앉기는 했지만, 손이 굳어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음악실로 재현을 데리고 들어온 건 영훈이었지만 막상 피아노를 연주하려니 연주회를 앞두고 있을 때 보다 더 떨렸다. 영훈은 숨을 들이쉬며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실에 가득 울려 퍼지는 노래는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재현이 좋아한다던, 그리고 영훈도 좋아하는 그 노래였다. 재현은 조금 놀란 눈으로 연주하는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영훈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2009년 5월 26일 지구 멸망 1일 전.


영훈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제 준비를 마치고 몇 번이나 가방 속을 확인했지만, 자꾸 확인하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고 바다에 가자는 말을 꺼낸 건 영훈이었지만 사실 영훈은 자전거가 없었다. 들뜬 마음에 말부터 꺼냈지만, 자전거가 없다는 사실을 집에 와서야 알았다. 지난밤 혼자 분주해진 영훈은 우진에게 자전거를 빌렸다. 우진에게 자전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재현의 자전거에 얻어 타거나 출발도 못 할 뻔했다. 영훈은 서둘러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학교로 갔다. 멀리 떠나야 했기에 새벽부터 집을 나서는 영훈을 그의 엄마가 말리는 바람에 예정보다 출발이 조금 늦었다. 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니 역시 재현은 먼저 와있었다.


“형. 얼른 가요 우리”


영훈은 얼른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에 재현을 재촉해 출발했다.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둘은 표지판에 의존해서 달렸다. 이대로 가면 바다가 나온다는 확신도 없었지만 무작정 달렸다. 나란히 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계속 달리다 보니 영훈은 슬슬 배가 고파졌다. 재현도 마찬가지였는지 둘은 자전거를 멈추고 근처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재현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도시락을 꺼냈다. 가다가 배고플 것 같아서 집에 있는 반찬으로 주먹밥을 만들었다고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오기도 힘들었을 텐데 도시락까지 준비해온 재현의 모습에 영훈은 놀랐다. 재현은 못 하는 게 뭘까 생각하며 주먹밥을 집어 들었다. 재현이 만들어서 그런지 어느 주먹밥보다도 맛있게 느껴졌다. 후식으로 영훈이 가는 길에 목이 마를 것 같아서 챙겨온 사과 주스를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그렇게 계속 달리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둘은 페달을 더욱 더 힘차게 밟았다. 두 시간쯤 더 달렸을까. 드디어 눈앞에 바다가 보였다. 노을 진 하늘과 푸른 바다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둘은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마치 온종일 쉬지 않고 달려와 붉어진 둘의 얼굴처럼 붉은색을 띠었다.


“형. 오늘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가족 혹은 친구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날을 자신과 함께 해 준 것에 영훈은 정말 기뻤다. 재현은 특유의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훈아. 저번에 내가 널 알고 있었다고 한 말 기억나?”


영훈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궁금했지만 물어볼 기회가 없어 혼자 생각만 하던 영훈이었다.


“예전에 우리 집에 놀러 온 적 있는데. 기억 안 나지?”


재현은 영훈이 어릴 때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옆집에 사는 우진과 영훈은 어릴 적 자주 놀았었다. 그런 우진을 따라 재현의 집에 놀러 와 몇 번 놀다 갔다고 했다. 영훈은 어릴 적 일이라 그런지 기억나지 않았다. 영훈은 재현의 집에 놀러 피아노를 친 적이 있는데 그때 들려준 곡이 ‘변하지 않는 것’ 이었다고 했다. 영훈이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영훈을 보며 웃은 것도 어릴 적 영훈의 모습이 떠올라 웃은 것이었다. 노래 제목처럼 영훈은 변한 것이 없다고 재현은 생각했다. 영훈은 정말 몰랐다. 그래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이런 사실을 잊고 있던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자신이 먼저 재현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제야 댄스부 OT 날 제 이름을 알고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영훈이 재현을 알게 된 것보다 훨씬 전부터 재현이 저를 알고 있었다니. 영훈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너무 기뻤다.


영훈에게 재현은 남들보다 특별한 존재였다. 누구나 하나씩 품고 있는 자신의 우상. 영훈에게 그 우상은 재현이었다. 늘 영훈과 친해지고 싶었고 영훈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영훈이 이 학교로 오게 된 이유도 사실 재현 때문이었다. 영훈은 재현을 좋아했다, 그리고 존경했다. 재현을 향한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었지만, 그냥 좋았다. 영훈에게 재현은 항상 빛났고 눈부셨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남자로 좋아하는 단순한 연애감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꿈꿔오던 존재와 함께 하는 느낌이었다.


재현에게 영훈 또한 다른 의미로 특별한 존재였다. 형제가 없어 늘 혼자였던 재현에게 영훈은 동생 같은 존재였다. 처음 재현의 집에 놀러 와 신기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영훈을 재현은 아직도 기억한다. 부끄럼이 많았지만, 자신을 잘 따르던 영훈을 재현은 귀여워했다. 그래서 영훈을 친동생처럼 대했다. 영훈이 크고 나서 더는 자신의 집에 놀러 오지 않게 되었을 때 재현은 아쉬웠다. 그러던 중 재현이 다니던 학원 앞 놀이터에서 영훈을 우연히 만났다. 그런 영훈이 반가워 영훈에게 다가갔지만 야속하게도 영훈은 재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올라와 2학년이 된 재현의 앞에 영훈이 나타났다. 재현은 영훈과 다시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영훈이 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재현의 눈에는 어릴 적 영훈의 모습과 지금 영훈이 다를 것 없이 보였다. 여전히 귀엽고 아껴주고 싶은 동생이라고 생각해서 영훈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모든 일을 우리가 예상할 수 없듯이 영훈에게 재현은, 그리고 재현에게 영훈은 예상치 못한 것 투성이였다.


한참을 떠들다 보니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재현은 모래사장 위에 누웠다. 그런 재현을 따라 영훈도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별이 빼곡했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별은 영훈과 재현의 눈에 더 크게 보였고, 수많은 별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빛나는 것들이 재현과 영훈의 앞으로 내려왔다. 우리에게 정해진 미래가 없듯이 지구에도 정해진 날은 없었다. 인간이 지구의 종말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다. 예측한 날보다 하루빨리 종말이 찾아왔다. 대부분의 사람은 준비를 하지 못 한 채 종말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루빨리 찾아왔다는 이유로. 우리가 지구에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처럼 영훈과 재현도 서로에 대해 다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정해지지 않은 것이라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어서 더욱 끌렸을지도 모른다.


지구가 멸망하리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지구의 미래처럼 우리의 미래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재미없었을 것이다. 당장 1초 뒤에 미래도 모르며 살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는 게 아닐까. 지구 멸망을 앞두고 늘 함께하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낯선 혹은 알게 된 지 한 달도 안 된 누군가와 종말을 맞이하리라고 재현과 영혼은 둘 다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일 텐데 왜 익숙한 사람이 아닌 잘 알지 못하는, 알아가야 하는 사람과 함께 보냈냐고 묻는다면 아마 재현과 영혼은 이렇게 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재현을 향한 영훈의 마음을 정의 내리지 못 하듯이 정해진 답은 없다. 잘 알고 있어서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에 더 끌렸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이 편하지만 새로운 것을 알아가서 익숙해지는 그 과정이 재현과 영훈에게는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강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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