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연애전선

by 럼블 posted Jun 10,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연애전선



내 나이 25. 인생사 순풍만범이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고난과 역경은 크게 없었다. 인간관계가 협소해서 이렇다 할 갈등도 겪은 적 없다. 웬만한 일에도 무덤덤하고, 감정적으로 흔들린 일도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간혹 친구와 어울리다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생긴다.

 

 사실 요즘,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는데…….”

 

연애 상담. 말을 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 편해서 맞장구만 치다 보니, 어느새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상담 상대로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나는 연애의 자도 경험해본 적이 없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건 조언이 아닌 이야기를 들어 줄 상대였다.

 

 그렇구나, 이번엔 어떤 사람?”

 

오늘의 상담자는 대학교 동기 하리. 과는 다르지만 교양 수업에서 만났고 합이 잘 맞아 친구가 되었다. 하리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소위 금사빠였다. 얼마 만나지 않았음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꽤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된 바로 다음 주에 그녀는 연애 상담을 해 왔다. 그 이후 약 3개월 간 무려 30번 정도의 연애 상담이 있었고, 그 중 상대가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이야. 내가 찾는 책을 바로 찾아줬는데,”

 

이런, 또 지나가는 친절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다. 그래도 이번 건 평범했다. 언제는 생수 병을 따는 모습에 반했다고 했을 땐 얘 정말 괜찮을까, 싶었으니까. 지금까지 그녀의 사랑이 이어지는 최장 기간은 2, 최단 기간은 이틀이었다. 다행인 점은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금사빠 기질을 자각하고 있어서 고백만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사랑에 빠진 순간을 즐기다가 간혹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 주변에 토로하면서 풀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그녀의 기질이었다. 말할 때마다 상대가 바뀌니 성실하게 응했던 사람들이 질려서 차츰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렇게 점점 사람들과 멀어지니 외로움은 더 증폭되고, 외로움을 달래고자 감정의 변동이 더 커지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내게 물었다.

 

 넌 내가 안 이상해?”

 뭐가?”

 상담이랍시고 말은 하면서, 상대는 매번 바뀌고열심히 들어줘도 결국엔 흐지부지 끝내고….”

 아니, 별로. 네 얘기 듣고 있으면 재미있고.”

 ??”

 , 너처럼 연애 상담 같은 거 해 오는 애들 많이 봐. 난 지금까지 누굴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진짜?! 어떻게?!”

 아니, 지금 그게 요점이 아니지. 아무튼, 남들 연애담 들어도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듣기만 하거든. 근데 그런 애들은 그런 걸 더 좋아하더라. 조언 하나보다 맞장구 하나가 더 좋은 거지.”

 “…….”

 나한테 연애 얘기는 그냥 판타지야. 그래서 듣다 보면 재밌어. 네 얘기도 재밌고.”

 그랬구나…….”

 생각해 보니 내가 더 이상한 거 아냐? 상담해오는 애들 고민을 심심풀이 땅콩 취급하는 게?”

 , 우리 둘 다 이상하네.”

 , 그러네. 그래서 잘 맞는 거 아니겠어?”


그 날의 그녀는 정말 환하게 웃었다. 보는 나도 저절로 기분 좋아지는 웃음이었다. 서로가 이상하다는 걸 인증한 날이었지만 전혀 기분 상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후련했다. 그 날 나는 직감했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콤비가 될 것이라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눈 앞의 하리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서 그 사람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장황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줄줄 감상을 내뱉고 있었다. 3자가 보면 나는 감정 쓰레기통으로 보일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동정해왔다. 내게 상담이랍시고 제 말만 내뱉는 사람들에게 분개했다. 하지만 글쎄? 이건 상부상조다. 그들은 제 감정을 마음껏 풀어내 시원해지고, 나는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어린애 마냥 즐기고 있다. 특히 연애담은 말하는 상대가 격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연극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 누군가는 아연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래, 그 땐 너무 솔직하게 말해 버렸어. 조금 내숭은 떨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느새 그 사람은 가버린 뒤였으니까.

근데누구였더라?

 

 책을 받으면서, 손이 닿았어! 단단하고 햇빛에 그을린 게 얼마나 멋지던지.”

 체육과 사람이었을까?”

 그런가 봐! 머리는 짧게 쳤는데, 그게 굉장히 그 사람하고 잘 어울려서,”

 

딴 생각을 하면서도 맞장구 타이밍은 놓치지 않는 나의 순발력! 하리는 워낙 이런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 말할 때 패턴을 파악한 지 오래였다. 하리는 사랑이 시작된 그 순간을 온갖 화려한 미사어구를 섞어 묘사한다. 그녀의 말만 들으면 마치 서로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기라도 한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고, 하리의 그 사람은 아마 하리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했겠지. 지나가는 인연이었고, 애초에 그게 당연했다. 하리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사랑은 껌과 같다. 씹을 땐 오롯이 집중해서 씹는다. 쭈욱 늘려도 보고, 풍선도 몇 번 불어보고. 그러다 단물이 빠진다. 단물 빠진 껌은 더 이상 씹을 필요가 없다. 뱉어서 버린다. 삼키면 몸에 좋지 않으니까. 껌을 씹을 때, 너무 소리 내서 씹으면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뱉을 때 아무렇게나 뱉으면 보기에 좋지 않다.

 

그녀의 사랑은 그렇다. 한 순간의 꿈이고, 곧 사라질 하찮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을 말하는 그녀는 굉장히 맑게 빛난다. 매번 바뀌고 사그라지는 감정에 단 한번도 소홀한 적이 없었다. 남들은 흉볼지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사랑에 충실했다. 사랑에 들떠있는 하리는 정말 행복해 보인다. 보는 사람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이렇게 행복해 하는데, 금사빠가 무슨 문제가 되나 싶었다. 물론, 과거 상대 측이 무슨 오해를 해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고 들어서 입 밖에 꺼내지는 않는다. 소동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얘기를 하는 하리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서 대충 지레짐작하고 넘어갔다. 나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하리의 연애 상담을 빙자한 구연동화-사랑의 시작이 끝났다. 굉장히 후련한 표정에 아직 발그레한 걸 보니 이번은 꽤 오래 갈 듯싶다. 하리가 사는 스무디를 받고 헤어졌다. 일종의 상담료였다. 아무리 듣는 걸 잘해도 길어지면 힘든 법이고, 항상 이야기가 재미있을 순 없어서 나름의 보상을 받고 있었다. 그래 봤자 밥 한끼 아니면 음료나 간식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까톡!

 

오늘은 딱히 톡 보낼 사람은 없을 텐데. 카톡이 오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과 단톡 아니면 상담이다. 단톡은 다 진동으로 해 놨으니 상담 관련일 것이다. 발신자, 은정이 언니.

 

[오랜만이야. 잘 지내? 혹시 시간 되면 만날 수 있을까?]

 

은정이 언니는 작년에 졸업한 선배로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다. 같은 학과의 선후배로 처음 만나 꽤 친하게 지냈다. 하리를 만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연애 상담을 했었다.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따로 연락은 했어도 만나자는 약속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니! 진짜 오랜만이네요. 오늘은 좀 그렇구. 내일 만나요!]

[그럼 내일 점심 어때? 밥 사줄게!]

[정말요? 그럼 저야 좋죠!]

[내가 학교로 갈게. 후문에서 보자]

[네 언니]

 

언니는 신입생 OT에서 만나 지금까지 사귀고 있는 애인이 있다. 동기라서 1년만에 군대를 갔는데도 끝까지 기다렸고, 결국 졸업할 때까지 이어져서 우리 학과의 반쯤 전설이 된 선배였다. 언니의 상담은 사실 상담이라고 하긴 좀 그랬다. 언니는 굉장한 순애보였고 언니의 애인도 그에 만만치 않아서 딱히 갈등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근데 나한테 연애 상담을 해 오는 이유? 하리와 비슷하다. 다만 하리는 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왔다면, 언니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방파제로 내세운 것이다.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달달 해서 듣다 보면 토 나올 지경이라던가.

 

나야 만사태평 꺼려할 만한 일도 아니었고, 언니는 만날 때마다 정말 이것저것 퍼주기도 해서 너 좋고 나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언니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일상 하나하나가 사랑으로 넘쳐 흘렀다. 언니에게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반드시 블랙 커피를 지참하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였다. 나에게 연애는 완전한 판타지, 다른 세계 이야기나 마찬가지라 전혀 상관 없는 농담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완전 내성을 갖춘 나에게 언니는 호감을 보였다. 그야 여태껏 대화 중에 속이 메스껍다는 반응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리고 찾아온 다음 날 점심시간. 학교 후문 근처에서 제일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언니와 만났다. 맛집이지만 가격대가 주변 식당보다 좀 높은 편이라 한참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점심 값 굳었다며 들떠서 언니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전 같았으면 메뉴를 고르면서도 하나하나 애인과의 추억을 되새겼을 텐데 오늘은 조용하다. 주문을 마치고 나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대화의 물꼬를 틀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정도로 언니는 조용했다.

 

나 있지…….”

, 듣고 있어.”

 

밑반찬이 나올 때쯤, 겨우 언니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그 사람하고 계속 갈 수 있을 지 모르겠어.”

어어?”

 

이건 진짜다. 머리 속에서 폭죽이 하나 거하게 터졌다. 뒤통수가 찡 하니 땅기는 게 느껴졌다. 언니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싸웠어?”

 아니.”

 그럼 그냥 싫어졌어?”

 싫지도 않고, 밉지도 않아. 그냥…….”

 

한참 말을 고르던 언니는감흥이 없어.’라며 자신의 생각에 결론을 내렸다. 고개를 든 언니의 표정은 예상과는 다르게 그림자 없이 반듯했다. 그래도 언니의 눈은 빛이 한 줄기 꺾여 있었다.

 

 내가 걜 얼마나 좋아했는데. 너도 알지?”

 암요암요, 잘 알지. 싸우다가도 얼굴 보면 풀리고 막 꿀 떨어지고 그랬잖아.”

 그래, 그랬지. 근데내가 좀 지쳤나 봐.”

 “…전에 자주 싸우기라도 했나 봐?”

 . 지금은 화해도 했고, 시간도 좀 지난 일인데….”

 

요점은 쌓이고 쌓여서 결국 폭발했다는 거다. 아무리 언니가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사랑이 넘쳐 흘렀다 해도 일단 사람이었다. 껌뻑 죽을 만큼 달라붙어 있어도 애인은 타인이었다. 가족끼리도 싸우는데 타인이면 오죽하랴. 실제로 언니와 자주 만났을 때도 몇 번 애인과 싸운 걸로 상담하기도 했다. 내가 도움이 됐다는 건 아니고, 그냥 커플끼리 얼굴 한 번 보고 풀어져서 끝났다.

 

 한동안은 내가 마음이 식어버린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 애와의 추억거리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어. 근데 결국 다 정리했어, 했는데, 휑한 방을 보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을 거 같아? 아쉽다? 섭섭하다? 슬프다? …… 그냥 방 넓어졌네, 시원하네, 이런 생각만 들더라.”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역시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답게 빛깔부터가 달랐다. 일단 먹기는 하는데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음식을 뒤적이기만 하고 제대로 먹고 있지도 않았다.


 그 애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겁고, 힘들 때 존재만으로도 버팀목이었어. 그래서 군대에서 걔가 보내준 편지 하나가 너무 소중했지. 졸업 논문으로 바빠도 어떻게든 시간 쪼개서 만나고…….”

 언니 그 때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링거 맞고 그랬잖아.”

 그래도 행복했으니까.”

 

과거를 회상하듯 언니는 멍한 표정이었다. 분명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하는 말인데 무미건조했다.

 

 여전히 걜 사랑했던 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확실히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좋아한다고는 못하고?”

 맞아. ……마음 식는 게 진짜, 무섭더라.”

 무서워?”

 그래, 무서워. 나한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젠 아무 감흥도 안 들어.”

 

내게 심정을 토로하는 언니는 동시에 진짜 자신의 마음을 찾아가는 것처럼 계속 할 말을 골랐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엄청 씁쓸하다. 내 마음이 이렇게 변해버려서 너무 씁쓸해.”

 “…….”

 무감각해지는 게, 싫어지게 되는 것보다 더 무서워.”

 

말하는 내내 마구 뒤섞이던 언니 몫의 음식은 깔끔하던 조합은 온데간데 없이 마구 흩뿌려졌다. 내가 다 먹는 동안에도 얼마 먹지도 않더니 결국 반 이상 남기고 수저를 놓았다. 언니는 그 이후로 아무 말 없었다. 그대로 헤어지고 나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언니는 그 사람하고 헤어진 거야, 뭐야?”

 

굉장히 찝찝한 여운을 느끼며 학교로 돌아갔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내 연애 상담 경력 중 가장 뒤가 구린 이야기였다. 식후 커피나 사러 갈까, 하고 생각하던 중 문득 오늘 반납해야 하는 책이 생각났다. 왜 하필이면, 도서관은 후문에서 제일 먼데. 속으로 툴툴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강의까지 아직 시간은 있지만 여유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도서관에 도착했다. 슬슬 기말고사가 다가오는 시기라 그런지 도서관에 사람이 많다. 반납 코너에도 줄이 늘어섰다. 시간이 될까? 아슬아슬하게 될 것 같으니 기다리기로 한다. 줄 끝으로 가는데, 뭔가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

 어어? 정우?”

 

서로 눈이 마주치자 나는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봤다. 초등학교 동창 정우! 같은 동네에 살고 있고, 무려 3학년부터 4년 간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였다. 내가 여중, 여고라서 떨어지긴 했지만 그 전까진 꽤나 친하게 지냈다. 이사 갔다는 소식은 없어서 계속 같은 동네인데 항상 절묘하게 경로가 어긋나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다.

 

 너 여기 대학이었어?! 뭐야, 언제부터?”

 그러는 너야 말로! 우와 이게 무슨 우연이 다 있냐?!”

 너 군대 갔다며!”

 ! 그게 언제 적 얘긴데벌써 제대했지!”

 

얼마 전 입대 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는데, 어느새 제대한 모양이다. 또래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던 정우는 항상 눈에 띄는 아이였다. 장난기도 많아서 자주 아옹다옹 다투기도 했다. 군대 다녀오면 사람 된다더니 키는 큰데 마르고, 피부는 마냥 허옇던 애가 온 몸이 그을리고 팔에는 힘줄도 돋아 있었다.

 

 멀대가 사람 됐네!”

 뭐래, 빗자루가!”

 

어렸을 적 별명까지 들먹이면서 우리는 예전처럼 웃었다. 몇 년 만에 만났음에도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만남에 긴 공백이 있었어도 우리는 한 번도 끊김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넌 무슨 학과야?”

 기계공학! ? 디자인인가?”

 , 맞아 디자인! 미디어이기도 한데근데 너 기계 좋아했냐?”

 , 나 이래봬도 어린이 과학경시대회 나가면 1등상은 다 내 차지였거든!”

 어차피 행글라이더 멀리 날리기였잖아!”

 

정우는 그래도 1등은 1등이지!’ 하면서 화를 내는 척하다가 결국 크게 웃는다. 새삼 신기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하기는커녕 이렇게 반가운 적은 난생 처음이다. 내가 이렇게 수다스러웠나? 내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했다. 신나서 서로 목소리가 커지니 일단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곧 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나 강의 시간 다 됐다!”

 지금 몇 신데? , 나도 곧 시작이잖아!”

 넌 어디로 가? 난 강의 B동인데.”

 , 나도 B! 5!”

 2그럼 빨리 가자. B동이 여기서 제일 멀잖아.”

 

수업 가기 싫다’, ‘나도가는 길에 잡담하면서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언덕 위에 있는 B동은 경사가 급해서 오를 때마다 헐떡이는데 정우는 아주 멀쩡했다. 녀석은 나를 저질 체력이라고 놀리며 낄낄댔다. 욱해서 툭툭 치는데도 일부러 맞아가면서 끝까지 웃었다. 그래도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물론 부르는 건 멀대빗자루였다.


계단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자 바로 앞에 하리가 서 있었다. 나는 놀라서으갹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아 내 심장이야. 뭐야! 놀랐잖아!”

 

진짜 과장 조금 보태서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간 기분이다. 하리는 무슨 장승처럼 바로 뒤에서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나보다 하리가 더 놀란 표정이다. 놀라다 못해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환자 같은 얼굴색에 되려 내가 또 식겁했다.

 

 하리, 하리야? 뭐야 너 안색이 왜 그래.”

 아니……. 아까 그 사람누구야?”

 ~ 초등학교 동창! 오랜만에 만났어. , 나는 쟤가 여기 있을 줄은 꿈에도 몰라서~”

 

나도 모르게 TMI를 줄줄 읊자니 하리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말을 멈추자 하리는 시간이 되었다며 나를 이끌고 강의실로 향했다. 뭘 끌고 가기까지 하냐는 말을 하기엔 하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잠자코 따랐다. 언제나 듣는 강의,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았는데 하리는 내내 아무 말고 하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항상 잡담을 빙자한 연애 상담을 수업 시작 직전까지 하는데 무척 얌전하다. 그대로 교수님이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된다. 필기를 하는 척 하리를 슬쩍슬쩍 훔쳐 보는데 시간이 갈수록 안색은 나아지고 있었다. 별 문제는 아닌가, 안심하고 졸음과 사투를 벌였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이 막판에 던진 기말고사 공지를 되새기면서 한숨을 쉬는데, 하리가 말했다.

 

 아까 본 그 사람 말야.”

 ? 누구?”

 , 네 동창이라는….”

 ~ 정우? 걔가 왜?”

 정우라고 하는 구나…….”

 

하리는 정우의 이름을 몇 번 입에서 굴려보더니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설마.

 

 잠깐, 혹시 새로운 시작이니? 그럼 최단 기록이야?”

 , 아냐! 아냐! 아냐! 그게 아니라!”

 

이번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소리친다.

 

 네 동창이라는 사람이! 도서관에서 만난 그 사람이야!”

 “……네에?”

 

이 때, 내 표정은 정말 최고로 멍청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이름: 김예림

이메일: optimus3001@naver.com

핸드폰: 010-8587-5662



Articles

9 10 11 12 13 14 15 16 1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