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문- 맹인과 침입자

by 비타민씨 posted Jul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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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과 침입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햇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걷는 사람들. 그들 틈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해원. 웅덩이에 반사되는 태양 빛도 차창 유리벽에 반사되는 광선도 인도를 쏜살같이 지나가는 자전거도 스쿠터도 뛰는 인간도 그녀의 눈을 공격하진 못한다. 그녀를 공격할 수 있는 건 갑작스러운 개 짖는 소리, 시끄러운 경적 소리. 예고없이 튀어나온 돌부리, 주차콘, 돌출 기둥. 돌출 간판, 입간판. 그런 것들 뿐이다.

지팡이를 발견하지 못한 행인과 부딪힌 해원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다.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 넘어지지 못하게 해준다. 해원은 자존심이 상해 고맙다는 말 대신 인상을 쓰며 그에게서 팔을 뺀다.

휴대용 라디오를 튼다. 일기예보를 듣는다. 비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유쾌한 디제이 둘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듣는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는다. 슬픈 이야기는 싫다. 어쩌다 별것도 아닌 일도 울고짜는 사연이 나올 때면 채널을 돌린다.

공원에 도착한다. 초점 없는 눈동자의 해원은 벤치에 앉아 지팡이를 짧게 접어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생생한 초록의 나뭇잎들,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들꽃들, 천진난만한 얼굴로 뛰어노는 아이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존재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해원의 시각적 이미지는 스물아홉 살에 멈춰 있다. 앉아 있기 무료했던 해원은 딸에게 전화를 건다.

“운전면허 붙었어? 또 떨어졌어? 도대체 넌 잘하는 게 뭐냐. 남들은 한 번에 척척 붙던데. 나는 앞만 볼 수 있으면 그깟 운전면허 열 번은 땄겠다.”

그런 소리 할 거면 끊으란다.

“왜 나한테 신경질이야? 니가 운전면허 따서 엄마 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 좀 좋아?”

딸은 자기한테 신경 그만 쓰고 심심하면 남자를 만나라고 반응한다. 해원은 맘만 먹으면 남자 열도 꼬시는데 요즘 컨디션이 별로라 쉬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흐르는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해원의 집 옆으로 흐르는 도랑물 소리다. 들리는 순간 집 앞에 다 왔음을 알고는 안심을 한다.

해원은 곧장 샤워를 한다. 볼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욕실에는 수건과 갈아입을 속옷만 들고 들어간다. 문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샤워를 계속한다. 샤워를 마치고 속옷만 걸친 채 욕실 밖으로 나온다. 주방에서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오늘은 지선이 오는 날이 아니다.

해원은 안방으로 들어간 후 옷장 문을 연다. 겉옷을 꺼내고 문을 닫는다. 싱크대에서 수돗물 소리가 난 것 같다. 아까 손을 씻고 물을 안 잠갔나 싶어 그쪽으로 걸어간다. 손을 더듬어 수도꼭지를 찾아 레버를 내린다. 해원의 손 위로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포개진다. 해원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친다. 그것은 사람의 손이다.

“당신 뭐야?”

해원의 목소리가 주방 겸 거실에 메아리친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도둑이야? 훔쳐갈 만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돈이 된다면 주방 식기라도 가져가. 곱게 돌아가면 신고하진 않겠어.”

해원은 센 척하지만 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다. 앞도 볼 수 없는 가녀린 여자의 협박에 간 큰 무단침입자가 움찔이나 할까.

기대했던 후다닥 뛰어나가는 소리 대신에 도마에서 무언가를 써는 소리가 들린다. 해원은 날카로운 주방칼을 상상하고는 놀라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가 도마질을 멈춘다. 뚜껑을 여는 소리가 나고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된장찌개 냄새인데 도둑이라면 말이 안 되는 행동이다.

"배가 고픈 모양인데. 그럼 밥만 먹고 나가요.“

해원의 말에 상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누군가 해원의 등을 민다. 해원은 그의 힘에 떠밀려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가 해원의 팔을 잡고 눌러 바닥에 주저앉힌다. 해원은 겁에 질려 바닥에 앉는다.

잠시 후 발소리가 들린다. 한쪽 발을 약간 끄는 듯한 소린데 아직 확실하진 않다. 밥상 다리가 장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그가 해원의 손목을 잡아 앞으로 끌더니 손아귀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더듬어보니 수저다. 재차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벙어린가?’ 해원이 젓가락질을 쉴 동안에도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누군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밥을 먹기가 겁이 났지만 수저를 강제로 쥐어준 사람이 강제로 먹이는 일은 못할까 싶어 스스로 먹기 시작한다. 반찬을 집기 위해 손을 뻗을 엄두가 나지 않아 밥만 먹고 있다. 또다시 맨밥을 수저에 퍼서 입속에 넣는데 맨밥의 맛이 아니다. 코다리조림 맛이 난다. 딸은 만들 수 없는 반찬인데다 사온 적도 없는 반찬이다. 해원은 안 보이는 눈으로 요리를 해본 적이 있지만 주방칼에 손을 베인 후로는 요리를 하지 않는다. 상대는 그후에도 몇 번이나 수저 위에 반찬을 놓는다. 방금 한 것 같은 따끈한 달걀말이도 있다. 딸도 이렇게까지 해주지는 않는데 마치 아기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심지어는 오랜만에 만족스런 식사를 했다는 느낌까지 든다. 밥그릇을 다 비우고 수저를 내려놓는다. 이젠 뭘 강제로 시킬까 겁이 나 속으로 벌벌 떨고 있는데, 밥상이 위로 들려지는 느낌이 든다. 발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주방에서 수돗물 소리가 난다.

설거지를 하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해원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지금을 틈타 경찰에 신고를 할까 하다가 조용히 나가주기만 한다면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좀더 지켜보기로 한다. 정말 배가 고파서 밥만 먹고 나갈 생각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오히려 해원의 그런 행동이 상대로 하여금 원한감을 키우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방에서 “쨍그랑!” 소리가 난다. 바닥에 접시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다. 해원은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덴 없어요?” 라고 묻는다. 상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설거지는 됐어요. 내가 할 수 있어요.” 해원이 말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깨진 조각을 쓸어담는 소리에 파묻힌다.

수돗물 소리가 그친다. 설거지를 마쳤나보다. 능숙한 건지 대충한 건지 시간은 매우 짧게 걸렸다. 해원은 문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바닥이 삐거덕거리는 게 그가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확실히 그는 한쪽 발을 질질 끌며 걷는다. 그가 걷는 방향은 문이 아니다.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 방은 딸의 방이다. 절대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방이다. 해원은 신고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든다.

잠시 후 “위잉!” 하는 소리가 들린다. 청소기 소리다. 청소기는 딸의 방에 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져 방 안에까지 들어온다. 해원은 가만히 앉아 있기가 불편해 일어서서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준다. 먼지를 우악스럽게 빨아들이는 청소기의 소리는 예민한 청각의 소유자인 해원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다. 어서 끝내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차라리 먼지를 먹고 살테니 당장 끝내주었으면 좋겠다.

얼마 후 청소기 소리도 그친다. 가사도우미를 부른 집을 찾는 거라면 잘못 찾아온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까부터 대꾸를 하지 않으니 말할 맛이 나지 않는다. 이제 욕실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수돗물 소리가 들린다. 설마 그것까지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까지는 정말 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그가 없을 때는 청소라는 걸 딸이 왔을 때만 했으니까 1주일에 한 번 정도할 뿐이었다.

잠시 후 그가 욕실에서 나와 스윽스윽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장판 바닥을 걸레로 닦는 듯한 소리다. 이 집에는 밀대걸레가 없으니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닦고 있을 것이다. 해원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자기가 서 있는 곳도 닦을 수 있게 자리를 피해준다. 무언가 스윽스윽하고 지나간 자리를 발로 밟으니 역시 축축하다.

그때 바닥이 꿀렁거리며 수초간 흔들린다. 침입자가 놀랐는지 스윽스윽 소리가 순간 멈춘다. 해원은 놀라지 않는다. 시간마다 들리는 전철 소리일 뿐이다. 전철이 지나가자 침입자가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한다.

잠시 후 욕실에서 또 수돗물 소리가 들리다가 그친다. 큰일이라도 보려는 걸까. 낯선 사람이 자신의 욕실에서 큰일을 보는 상상을 하자 불결하고 소름이 끼친다. 그런데 물 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거친 사물로 바닥을 벅벅 문지르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걸레질도 모자라 이젠 욕실 청소까지 하려는 모양이다. 지독한 락스 냄새가 코로 들어온다.

전문 청소 업체에서 온 사람일까? 그런데 밥도 차려주고 같이 먹어주나? 복지관에서 나온 사회복지사나 자원봉사자 같은 사람일까? 장애인들을 위해 집안 일을 해주고 같이 밥을 먹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 줄 몰랐는데 새로 생긴 걸까. 무료일까? 나중에 어마어마한 비용을 청구하는 건 아닐까?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당사자한테 얘기도 안 해주고 막 들어오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사회복지 계통의 사람은 아니다. 혜택 하나 받으려면 얼마나 많은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렇게 허술하게 서비스를 제공해준단 말인가.

그는 역시 미지의 침입자다.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된다. 그가 욕실 청소를 끝냈는지 슬리퍼를 벗고 문 앞 발매트에 발바닥을 문지른 후 또 어딘가로 걷는다. 해원은 그가 가자마자 저 발매트를 세탁해서 햇빛에 바싹 말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집안일 남은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매일 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생각해내자면 쓰레기 버리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커다란 비닐봉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좋다. 이젠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것까지만 하고 갈 것 같으니 잠자코 있어보자.

근데 정말 그냥 갈까? 거주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맹인인 걸 안 이상 더한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을까. 해원의 상상력은 끝도 없이 뻗어간다. 이 침입자의 원래 목적은 돈만 가져가는 것인데 결벽증이 있어 더러운 꼴을 못 보는 사람일지도. 그래서 청소를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풀고 겸사겸사 집안에 숨겨둔 돈을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집안에 있는 현금이라고는 딸애가 용돈하라고 준 20만 원 중에 남은 10만 원 정도이다. 그건 장롱 속에 있다. 지금 해원은 장롱 문에 기대어 앉아 있다. 확실히 장롱 문은 열어보지 않았다. 그걸 달라고 하면 줄 것이고 그냥 가져간다고 해도 곱게 돌아가주기만 한다면 물론 아깝지만 몸이 다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생활비를 좀더 아끼면 될 것이다.

비닐봉지를 현관문 쪽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다음 또 주위가 조용하다.

“왜요? 돈 달라구요?”

해원이 지레짐작으로 묻는다. 침입자는 또 아무 말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닫는다.

“갔어요?”

해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허공에 대해 조심스레 말한다. 대답을 안 하거나 못한다는 걸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그의 의도를 파악할 방법으로 이것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이번 침묵은 다른 때와는 달리 그가 사라졌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침묵임이 확실하다. 느낌이 그렇다. 해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무도 없어요?”

해원은 여유를 부리며 괜히 한번 더 묻는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현관문이 열린다. 해원의 심장이 덜컹거린 후 다시 뛰기 시작한다.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려나보다. 또다시 그 지겨운 침묵이 주위를 감싼다.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고요를 깨뜨리며 해원이 말한다. 어이없게도 그가 인사를 하기 위해 들어온 모양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한번 해 본 것인데 정말 이것 때문에 들어온 모양이다. 이번에는 정말 나갔을 것이다. 해원은 현관문으로 더듬더듬 걸어가서 잠금 장치를 잠근다. 아마도 깜박 잊고 문을 잠그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해원은 냉장고로 가서 물을 한 컵 마신다. 한 컵으로 모자라 한 컵 더 마신다.

딸에게 이 기묘한 상황을 털어놓을까 하다가 괜히 걱정만 끼칠 것 같아 그러지 않기로 한다. 만약 한 번만 더 오면 얘기하기로 한다. 자기 전에 다시 한 번 잠금 장치를 확인한다. 문은 꼭 잠겨져 있다. 맹인인 것이 서러운 밤이다.

다음 날이 밝았다. 바람이 현관문만 흔들어도 깜짝깜짝 놀라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침대에서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집에 누가 있는 건 아닌지 귀를 기울이는 일이었다. 어제의 소름끼치는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다시 잠금 장치를 확인한다. 안방과 작은 방의 창문도 잠그고 사람이 통과하기가 불가능한 크기의 화장실 환기창도 잠근다.

어제 그가 온 시간은 오전 11시쯤이다. 지선이 정각마다 시간을 말해주는 휴대폰 어플을 깔아주었기 때문에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다. 해원은 11시가 가까워오자 긴장하기 시작한다. 강박증 환자처럼 또다시 현관문으로 가서 잠금 장치를 확인한다. 생전 안 잠그던 안방 문까지 잠근 채 그가 오지 않기를 기다린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그가 들어오던 방식과는 다르지만 시간은 그라고 말해주고 있다. 해원은 문을 열어주지 않을 작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거세진다. 안에 있는 거 안다며 문을 열라는 할머니의 말소리까지 들린다.

집주인이다. 월세 낼 날짜가 지났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이다. 고작 이틀 지났을 뿐이다. 어쨌든 해원은 깜박 잊었다며 당장 넣어드리겠다고 말한다. 해원은 딸에게 전화해 월세를 넣어달라고 말한다. 딸은 바빠서 잊었다고 말한다.

어쨌든 오늘은 그가 오지 않은 셈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이 집에 있는 것이 두렵다. 당장 이사를 가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경찰에 신고하기도 애매하다. 그가 가져간 것이 없고 해꼬지한 사실도 없지 않은가. 무단침입죄가 성립된다고 해도 그의 인상착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찰들은 아마 해원이 사람의 관심이 그리워서 경찰에 신고를 한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저 매일매일 잠금 장치를 확인하는 수밖에는 없다.

다음 날, 휴대폰에서 11시라고 외치는 소리에 해원은 또다시 긴장한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외에는 없을 것이다.

또다시 인기척이 들린다. 가만 귀기울여보니 문을 억지로 연 것이 아니다. 잠금 장치가 해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열쇠를 꽂고 돌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는 집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집주인? 집주인 할머니는 문을 두드릴지언정 열쇠로 열고 들어오진 않는다. 게다가 월세도 넣어주지 않았나. 그렇다면 집주인 할아버지? 하지만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는다. 그 노인네가 남의 집에 들어와 집안일을 해주다니. 게다가 그는 툭하면 기침을 해대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열쇠를 줄 정도면 엄청 가깝다는 건데,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한 이웃이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혹시......? 전남편? 해원은 이렇게 생각하고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친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발소리를 낸단 말인가.

“열쇠를 어디서 났죠?”

해원이 용기를 내어 묻는다. 그가 오늘은 어쩌면 선심쓰듯 대답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해원은 이건 엄연한 무단침입이라며 당장 나가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해원은 그가 나가지 않겠다면 자기가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현관으로 돌진한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갖다댄다.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게 느껴진다. 해원은 소름끼치는 느낌을 받으며 어깨에서 벌레를 떼어내듯이 어깨를 턴다. 해원이 재빨리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밖으로 민다. 그러나 문은 반대방향으로 당겨지는 거센 힘에 막혀 꿈쩍도 않는다. 해원이 더욱더 힘을 내보지만 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최대의 힘을 써버린 해원은 손에서 힘을 빼고 한숨을 쉰다.

“나한테 꽤 많이 반한 모양인데, 이거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네요.” 해원이 방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다. 짐짓 으스대는 투다. “제가 거울을 못 본 지 오래돼서 몰랐는데 아직도 제 얼굴이 매력적인가 봐요? 젊었을 때는 남자 꽤나 울리긴 했죠. 근데 그쪽은 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인가 봐요? 이렇게 무리한 방식으로 여자를 대하는 거 보니...... 짝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아는 입장에서, 그쪽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만 하면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볼 텐데 알지도 못하는 분의 사랑을 받아주기도 애매하고 참 곤란-”

그가 갑자기 해원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는다.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손바닥은 코까지 덮어버린다. 갑자기 숨을 못 쉬게 된 해원은 공포심을 느끼며 그의 팔을 다급히 친다. 그가 손바닥을 치운다. 방금 죽음의 공포를 맛 본 해원은 마구 팔을 휘둘러 그에게 타격을 입히고자 한다. 하지만 해원의 팔은 허공만 휘저을 뿐이다. 갑자기 뒤에서 미는 힘이 거세다. 해원은 내던져지듯 안방으로 들어간다. 해원은 자신이 시체가 되어 토막내어지는 상상을 한다. 폭력 앞에 나약한 존재가 된 자신이 혐오스럽다.

그는 또 싱크대에서 무언가를 한다. 또다시 밥을 차리는 모양이다. 해원은 어제 저녁에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싹 다 버린 상태다. 그가 반찬들에 무슨 이상한 약이라도 넣어놨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싱크대 수납장 문도 열린다. 거기에는 즉석 식품이 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후 전자렌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또다시 방안으로 음식 냄새가 들어오고 밥상이 내려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 당신과 밥 먹기 싫어요. 무서워서 같이 못 먹겠어요.”

그러나 그가 억지로 손에 수저를 쥐어준다. 해원이 잡지 않으려 하자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해원은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느낀다. 여자 손치고는 큰 편인고 남자 손 치고는 부드러운 편이어서, 여자 손 같기도 하고 남자 손 같기도 하다고 느끼면서 “아아!” 하고 소리를 낸다. 그러자 그가 손목에서 손을 놓는다.

해원은 밥을 먹는 척하며 손바닥에 뱉어서 몰래 밥상 아래에 버린다. 그렇게 세 번쯤 한다. 그러나 상대는 맹인이 아니다. 상대는 밥상을 수저로 두 번 내리친다. 해원은 아버지라도 되는 듯 구는 그에게 역겨움을 느꼈고 밥상을 들어 엎어버린다. 그릇 쏟아지는 소리와 사기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정적이 흐른다. 화를 낼 줄 알았던 상대에게서는 그 어떤 반응도 느낄 수가 없다. 다만 쏟아진 그것들을 쓸어담는 소리뿐이다.

그가 다시 밥상을 들고 주방으로 간다. 곧이어 또 전자렌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들은 딸이 사다놓은 것들이다. 해원은 그것들이 무슨 음식인지 알지 못한다. 아까의 재방송을 보는 듯 다시 밥상이 차려진다.

해원은 이번에도 밥상을 잡고 든다. 동시에 위에서 누르는 힘이 가해진다. 밥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해원은 저항을 포기하는 척하고 밥을 먹는다. 이게 뭐지? 해원은 무슨 음식을 준 건지 씹으면서 생각한다. 매운데 독특하게 매운 맛이다. 잘 먹어본 적이 없는 맛이다. 해원은 “퉤!”하고 뱉어 버린다. 아무리 참을성이 많은 사람도 이런 모욕까지는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감정 없는 로봇이나 기계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 해원은 마침내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때 해원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무슨 음식을 사다놓은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잘 됐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는다. 다짜고짜 우는 여자의 울음소리에 해원의 심장이 얼어붙는다. 왜 우는지 말하라고 해도 울기만 할 뿐이다. 해원이 어디냐고 묻는데 상대가 갑자기 전화를 끊는다. 해원이 다시 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는다.

전화를 끊었는데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환청을 들었나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바로 앞에서 들리는 남자의 울음소리다. 해원은 하도 황당해서 딸에 대한 걱정까지 잊을 지경이다. 이 기묘한 울음바다에 정신이 혼란해진 해원은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한다. 딸이 울자 이 남자도 운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해원은 갑자기 그의 팔로 추정되는 부분을 다짜고짜 붙잡고 묻는다.

“당신 뭐 아는 거 있어? 왜 우는 거야? 내 딸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 말을 하란 말이야.”

해원은 그의 몸을 함부로 더듬고 멱살을 잡는다. 그는 면바지에 까끌까끌한 소재의 셔츠 차림이다. 그는 해원이 더듬는 대로 가만히 있는다.

그가 울음이 복받쳤는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간다.

잠시 후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엄마.”

“지선이니? 무슨 일 있어? 아까 왜 울었던 거야?”

“내가? 아까 언제?”

해원은 지선의 반응에 당황하여 할 말을 잃는다.

“지방 출장 중이야.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전화할 수가 없었어.”

“정말이야? 누가 그렇게 말하고 시킨 거 아니야? 협박받고 있는 거 아니냐고.”

“엄마는 항상 상황을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야. 아무 일 없어.”

해원은 너무도 혼란스럽다. 좀전에 받은 전화는 뭐란 말인가. 또 그는 왜 울면서 밖으로 나간 것일까.

해원은 일어나자마자 늘 켜던 라디오를 켜지 않는다. 시끄러운 소리는 딱 질색이다. 아침으로 우유와 빵을 먹고 통 넓은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는다. 공원에 산책을 간다. 해원은 여느 때처럼 늘 앉던 벤치에 앉는다. 벤치 앞에는 <페인트칠 주의> 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사람들은 해원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상쾌한 바람이 해원의 얼굴을 스친다.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게 했던 지선은 그날 무사히 돌아와 해원과 함께 보냈다. 울면서 전화한 적도 없었고 휴대폰은 다행히 찾았다고 한다. 해원은 딸에게서 수상한 기운을 감지하려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여느 때와 다른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다.

해원은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에 대해 지선에게 말한다. 지선은 믿지 못하는 듯하다. 단지 엄마가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혼자 있다보니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존재일 거라고 추측하는 듯하다. 해원은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운하다.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태어난 딸. 다행히 의사는 유전이 아니라고 한다. 해원의 부모와 친가, 외가 식구들 모두 맹인은 없다. 딸이 만약 자신처럼 앞을 볼 수 없다면, 해원은 아마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간 걸까. 오지 않았으면 싶으면서도 그렇게 나간 그가 궁금하다. 해원은 엉덩이와 등에 갈색 페인트가 묻은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장애인을 보고 수군대는 인간말종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해원은 서러웠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진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온몸에 그대로 맞고 있다. 하얀색 원피스가 몸에 착 달라붙는다. 그때 무언가 옷 위로 덧입혀지는 게 느껴진다. 해원은 깜짝 놀라 어깨를 떤다. 자신의 어깨 위에 얹혀진 것은 트렌치 코트인 듯하다. 차갑고 축축하던 느낌이 사라지고 머리 위로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린다. 손을 뻗어보니 우산 손잡이가 만져진다.

해원은 불안감과 안심을 동시에 느끼며 그와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물비린내 때문에 다른 냄새는 묻혀버린다.

“딸은 돌아왔어요.” 해원이 혼잣말이라고 생각하고 말한다. “마음이 바뀌어서 돌려보내준 건가요? 당신은 나쁜 사람인가요? 좋은 사람인가요? 좋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나쁜 사람이었더라도 이제부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구요. 그럼 당신 사랑을 받아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저는 당신이 울면서 뛰쳐나간 순간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셍각해보니, 악으로부터 저희 모녀를 지켜주려면 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나을지도 몰라요.”

그는 역시 대답이 없었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해원은 실망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놓는다. 그녀는 몹시 당황했지만 한편 묘한 설렘을 느낀다.

휴대폰 벨소리가 들린다. 해원의 휴대폰은 아니다. 그가 황급히 벨소리를 꺼버린다. 설렘 속에 있던 해원은 또다시 혼란감을 느낀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멈춰서서 해원의 등을 떠민다.

“잠깐만 안으로 들어와요.”

해원이 그를 자진해서 집으로 불러들인 것은 처음이다. 그는 해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다.

해원은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외출복을 실내복으로 갈아입는다. 드디어 그의 정체를 알아낸 것 같다. 지선은 사별한 남편의 아이가 아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그의 휴대폰에서 난 소리는 지선의 벨소리와 동일하다. 그가 말을 하면 해원이 목소리를 알아들을 테고 그럼 거부감을 느끼며 쫓아낼지 모르니 말을 하지 않는 걸 테고. 열쇠도 이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으니 그가 갖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자 때문에 자식도 팽개치고 나간 사람이 여긴 왜 나타난 걸까. 그가 다시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는 게 느껴진다. 그는 요리사답게 주방을 가장 편안하게 여기는 듯하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해원은 또 다른 침입자인가 싶어 긴장하면서 귀를 기울인다. “엄마.”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딸과 침입자가 마주치면 무슨 일이 날까 걱정된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숨어있기라도 한 걸까?

“방금 있던 사람 못 봤니?”

해원이 딸에게 묻는다.

“아무도 안 보이는데?”

딸이 말한다. 해원은 농락당하는 기분이다.

잠시 후 발소리가 들린다. 한쪽 발을 질질 끄는 이미 여러 번 들어 익숙한 소리다. 그는 분명히 있었고 가지 않았다. 그런데 딸아이는 왜 안 보인다고 했던 걸까? 숨을 데가 없을 텐데......

어렸을 때 딸과 남편은 꽤 친했었다. 딸은 아빠가 가출한 게 돈을 벌어오기 오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다. 남편과 해원은 부부싸움을 해도 딸이 듣는 데서는 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었다. 남편은 다른 여자와 살면서도 딸을 보기 위해 종종 집에 오곤 했다. 몰래 딸을 데려가 해원의 속을 썩이기도 하였다.

그는 딸이 있는데도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 딸이 밖으로 나갔나 알아보기 위해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왜 불러?”라고 대답을 한다.

어디선가 벨소리가 들린다. 그 남자의 휴대폰 벨소리다. 그런데 잠시 후 들려오는 목소리는 지선의 목소리다. 해원의 신경이 또다시 날카로워진다. 지선의 통화 목소리는 오늘따라 작게 들린다. 해원이 알아선 안 되는 상대와의 통화인 게 틀림없다. 해원의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확신으로 굳어진다. 해원은 작은 방으로 건너간다. “걸리면 안돼.”라고 속삭이는 지선의 목소리가 들린다. 해원은 지선이 어디 있는지 손으로 더듬어본다. 침대에는 없고 책상 의자에 앉아 있다.

“지금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너, 니네 아빠랑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엄마, 정신 좀 차려.”

해원이 잔뜩 흥분하여 지선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그때 해원의 손목이 누군가에 의해 잡힌다.

“놔, 이거 놔!”

해원이 외친다.

“누가 잡았다 그래. 엄마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딸의 목소리다. 해원은 지선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창백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친다. 쫓기는 사람처럼 현관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간다.

비가 오려는지 젖은 흙냄새가 난다. 해원은 콘크리트 담장을 손으로 짚으며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끌고 모퉁이를 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손으로 막으며 담장 앞에 주저앉았다.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이 노릇을 어떡해. 내 딸까지 눈이 멀다니......”

가슴을 움켜쥐며 뱉어낸 한 마디가 뿌연 먼지 속으로 흩어진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쭈그려앉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끝-


성명 - 민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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