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공모-측간각시

by susia1223 posted Jul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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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간각시 


비가 개고 오후와 밤이 조우하는 시간이었다. 공원에 나온 아이는 처음 보는 남자아이와 나뿐. 고인 빗물을 찰박찰박 밟으며 말없이 놀다가 남자아이가 우연히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 반짝이는 게 무언가하고 바라보니 반지였다. 녀석은 내게 첫 대면인 주제에 말했다. 반지는 남자가 여자한테 끼워주는 거래. 맹랑한 녀석. 요즘은 애나 어른 할 것 없이 TV를 같이 봐서 보고 배운 것이려나. 그래도, 반지는 반지였다. 그땐 알지 못했지. 헐렁하게 빙빙 돌아가는 반지가 다시는 못 껴볼 물건이라고는. 아무 소리 없이 내 또래 예닐곱으로 보이는 소년이 끼워준 반지를 한없이 쳐다보았다. 갑자기 녀석이 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뒤늦게 묻는다. 그런데 네 머리카락은 왜 그렇게 길어? 부끄러워진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도망쳐버렸다.

 

내가 사는 곳은 인적이 드문 공원 화장실. 이곳의 나이는 곧 내 나이와 같았다. 내 나이는 올해 17살. 머리카락이 발아래까지 넘쳐나 빗질하며 밤을 지새우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그 밖에 또 다른 낙이 있다면 반지를 10년 동안 매만지며 가끔 이 공원에서 농구하는 반지 소년을 훔쳐보는 것. 녀석은 아주 건장하고 말쑥하니 제법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억해주고 있을까. 나는 당시 헛돌던 반지가 제 손가락에 맞을 때까지 기다렸다. 반지가 손가락에 꼭 맞으면 그 반지 소년을 다시 만날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반지가 내 엄지손가락에 올해부터 딱 맞았으니, 이제 그 소년을 만날 준비를 해야 했다.

 

자, 이쯤에서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은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칠흑같이 검다는 긴 생머리의 아가씨, 바로 측간 각시이다. 요즘 것들은 집지킴이 신들을 모시지도 않고, 제주도 무속신화에서는 나를 못된 측도 부인이라 하기도 한다는데, 내 고향은 강원도요, 결혼도 안 한 여염집 아가씨라. 단지 내 아버지는 하늘이시고, 어머니는 바람이신지라.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내가 있었고 어머니는 조용히 나를 어루만져주셨다. 나의 몸은 형체가 없지만 아주 없지만은 아닌지라. 어떻게 생겼는지 이목구비는 스스로 못 보았어도 부모님을 비롯해 다른 신들, 길고양이까지 내가 양귀비도 울고 갈 미인이라 하더라. 단지 내 신체 부분 중 유독 마음에 안 드는 부위는 지나치게 긴 머리카락. 벼락 맞은 소나무로 만든 빗을 사용해 이 고집 센 머리카락을 빗을라치면, 내 진이 몽땅 빠지는 듯했다.


나는 매월 '6'이 들어간 날짜에만 사람에게 모습을 보일 수 있는데, 이놈의 긴 머리카락 때문에 처녀 귀신이 될 지경이다. 나 측간 각시는 사람을 해하는 악신으로 여겨진다는데, 그렇다면 겁이라도 먹고 측간에 오지 말 것이지, 이곳 공원 화장실에 술 먹고 토악질하거나 변기와 싸우고 가는 녀석들이 심심찮게 내 머리빗질을 방해하곤 한다. 밤이면 말벗 해주는 길고양이마저 그런 술주정뱅이들 때문에 발길이 뜸해졌으니, 긴 밤이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5월 16일, 싱그러운 풀향기에 취해 공원 길을 걸을 때였다. 나는 내 머리카락들을 가채 머리처럼 만들어 틀어 올린 뒤 님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생각해낸 묘안은, 정성으로 땋은 머리를 나뭇가지 몇 개에 꽂아 고정하는 것. 머리가 무겁다지만 반지 소년과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나는 설레임으로 가득 차 공원입구까지 그를 마중 나갔다. 10년 전 그가 끼워준 반지를 엄지손가락에서 만지작거리자, 역시나 농구공을 들고 공원으로 오는 게 보이는 소년. 그가 틀림없었다. 뭐라 말을 걸까. 기억하고는 있을까. 반지를 보여줄까. 한껏 들떠서 소년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갑자기 소년의 뒤에서 들리는 내 또래 여자아이의 외침. 나는 급히 몸을 숨겼다.


"준후야!" 

그럭저럭 예쁘게 생긴 계집아이가 아마도 반지 소년을 부르는 듯했다.

"어. 승아야, 무슨 일이야?"

반지 소년이 웃으며 뒤를 돌아본다.

"오늘 16일이잖아. 혼자 공원 가는 건 위험하지 않아?"

무슨 뜻일까.

"아직 길거리에 사람들도 많은데 뭘..."

"너 어릴 때 머리 긴 귀신 여기서 봤다며. 반지까지 끼워주고. 안 무섭니? "

계집아이가 마치는 말이 채다 들리지도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는 '머리 긴 귀신'이란 단어가 메아리칠 뿐이었다. 나구나. 나에 대해 말하는 거구나. 어머니이신 바람이 차갑게 그들 사이를 떼어놓았다. 어머니는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마음에 품는 게 아니란다.


머리카락이 주체할 수 없이 자라고 또 자라서 어느 날인가 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이 든 길고양이 하나가 내 앞에서 여유 있게 기지개를 켰다. 요망해 보이는 그것은 내가 너보다 세상을 더 잘 알지 하며 깔보는 시선으로 아기 우는 소리를 흉내냈다. 그 모습이 측간 각시인 나조차 소름 돋아 그 후론 울고 싶을 때 소리 없이 울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공포를 주는 존재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지금이 그때. 나는 마음 속 깊숙이 답답하고 메슥거리며 시큰거리는 존재를 눈가로 끄집어내야 했다. 또르르 떨어진 눈물에 고개도 떨구며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고개를 숙이자 꽂아둔 나뭇가지도 떨어지더니, 땋은 머리는 풀리고 말았다. 산발이 된 내 모습. 홍안이면 무엇하랴. 머리 긴 귀신일 뿐인데. 한낱 귀신이 하는 첫사랑이 그렇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나는 아무리 풀내음이 진해도 머리를 땋지 아니했으며, 머리를 정성스레 빗지도 아니하였다. 진짜 귀신이 된 셈이었다. 공원 화장실에서는 점점 냄새가 심해졌고, 나는 가끔 화장실 불 끄는 장난 정도를 인생의 낙으로 삼게 되었다. 결국, 공원 주변의 주민들이 환경조성에 너무 소홀했다 싶었는지, 공원 공사를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갈 곳이 없어져 길고양이와 찜찜하게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아마도 오늘은 26일이리라. 또 6이 들어가는 날이구나. 무던하게 날짜를 되뇌는데 공원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가 났다.

"전화 왜 안 받니... 왜, 왜! 이 메시지 들으면 꼭 연락해줘. 나 기다릴게. 나 그 공원에 있어. 꼭 나와줘, 기다릴게"

열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날 귀신으로 불렀던 계집애의 울음 섞인 음성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간은 새벽 3시쯤이었다. 이 새벽에 우는 소리 내는 너야말로 귀신 아니냐고 따끔히 일침을 가해주리라. 그런데 계집아이 아니 승아라는 아이는 머리카락이 나처럼 긴 것도 아닌데 무슨 울 일이 있는 걸까. 나는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길고양이는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다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마음이 순간 갈등한다. 나 원 참, 첫사랑 반지 소년과 정답게 대화한 원수 같은 계집아이를 걱정하다니. 아니지, 말해주고 싶었다. 넌 사람이고 머리카락도 길지 않잖냐. 오히려 정돈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적당히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 아니냐. 뭐가 그리 슬프냐. 앞뒤 사정은 모르나 집에 들어가라. 내가 정말 혼구멍을 해주리라. 그래, 딱 큰 마음 먹고 눈을 떴다. 아니 그런데 그 계집아이가 어느 틈에 울음을 그치고 날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굳어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승아, 그 계집아이는 내 몰골을 보고 충격 을 받은 게 분명했다. 가로수만이 우리 사이에 빛을 띄우고 있었으며 어머니 바람도 움직이지 않으셨다.


"너, 너...는...."

계집아이가 말을 더듬으며 잇지를 못했다. 나 또한 사람에게 모습을 보인 게 그 반지 소년 이후 처음인지라 당황스러웠다. 어릴 때야 뭣 모르고 내 모습을 노출해도 되었지만, 지금은 너무 길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추한 귀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예쁘구나... 이름이 뭐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저 계집아이가 실성했나? 거울도 못 보는 내가 산발하고 있는데 예쁘다니. 이런 경우를 두고 사람이 귀신한테 홀린다는 거구나 하고 실감했다. 

"내가 울어서 놀랐지? 너도 강원 고등학교 다니니?"

눈물을 닦으며 동네 친구 대하듯 대담한 그 아이의 행동에 맥이 쭉 빠졌다.

귀신으로 안 보이나? 우선은 '응'이라고 얼버무리기로 했다.

"아...울고 났더니 속 시원하다. 나는 승아라고 해. 최승아. 그냥...내 얘기 들어줄래? 모두가 자고 있을 시간이라서 얘기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부탁할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계집아이...아니 승아는 입술을 푸르르 풀더니 오른손을 펴서 들었다가 무릎에 올리고 주저앉았다. 그 추임새가 마치 별일 아닌데 말이야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릴 때 호감을 느끼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러면 그들에게 실망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어서 함부로 환상 품지 말라고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일부러 하곤 했지. 그러면 그들이 알아서 내 곁을 떠나곤 해. 그런데 준후가 여태껏 그 사람들처럼 내게 다가온 거야. 나한테 관심을 가져 주고, 좋게 봐주고...용기내게 해주고...난 또 부담이 되기 시작했어. 그런데 여태껏 해 온 습관대로 내게 호감 많은 그 아이를 떼어낼 수가 없더라. 대신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지는 거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그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나 원래 질투도 많아. 준후가 어릴 때 반지 끼워준 여자애가 있다고, 그 아이를 다시 보고 싶다고 하지 않겠어? 그 여자아이, 귀신일 거 같은데... 그 귀신은 얼마나 좋을까? 준후의 첫사랑이잖아. 참, 넌 준후를 모를 수도 있겠다. 1학년 4반에 농구 잘하는 애야. 그냥, 1학년 4반에 농구 잘하는 애라고 하면 애들이 다 알아들어. 준후 말하는 거구나 하고...근데 넌 몇 반이니?"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그 반지 소년이... 날 보고 싶어했다고? 귀신인 나를? 반지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승아란 계집애에게 대꾸조차 못했다. 승아는 또 뭐라 뭐라 말을 하는데, 그 와중에 어머니 바람이 내게 속삭였다. 반지소년이 오고 있다고. 내가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했다. 반지 소년을 만날 것인가. 내가 사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을 지켜보니 인생은 이보다 더 고민의 연속이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승아야! 어디 있니?!"

공원을 가득 채우는 반지소년의 음성. 그가 왔다. 승아는 눈이 번쩍 띄었다.

"어? 준후 왔나 봐! 근데 너...그러고보니...머리카락이..."

승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걸까? 길바닥까지 널브러져 있는 내 머리카락들을 이제야 보다니. 나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응, 내 머리카락이...좀 길지? 오늘 이야기 고마웠어."

승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을 벌리긴 했으나 소리가 안 나오는 듯했다. 씁쓸하지만 그들에게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반지 소년의 목소리가 

"승아야, 오늘 26일인데 왜 여기 왔어? 그리고...바닥에 이건...반지잖아?"


아아- 나는 승아라는 계집아이에게 첫사랑을 양보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애가 얘기한 것처럼 첫사랑으로 기억해주는 내 님에게 내가 사실 지저분한 측간 각시, 화장실의 신이란 걸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돌려준 반지를 그들이 버리더라도 난 미련을 버리면 되는 것, 단지 그 뿐. 나는 그들의 인생을 부러워하지 않고 내 운명을 사랑하기로 한다. 때문에 이제 다시 정성껏 머리를 빗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총각 귀신이라도 만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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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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