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문 - 금의야행

by 다이무리 posted Aug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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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야행

 

성당 문 앞에서 본 건 어릴 적 불장난을 하다 화상을 입은 발가락이었는데 아직도 가끔 자다가 화끈거렸고 지난 밤 역시 그랬다는 게 떠올랐다.

 

나는 거기서 자랐다. 누구는 낙후된 시의 외곽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재개발 진행을 막는 난폭한 주민이 사는 동네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밤이 되면 모든 불빛이 꺼지고 난 뒤에 흡혈귀라도 돌아다닐 거 같은 으스스한 곳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을 거기에서 살았음에도 그 모든 말이 틀렸다고도 맞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조명이 끝나는 곳의 다리는 유일한 출구였다. 이백 미터 남짓한 길이의 다리 밑으로 짧은 강이 흘렀다. 다리 난간에서 물속이 옅게 보일 정도로 수심이 얕았다. 뾰족한 돌이 땅에 박혀 있어 그걸 밟고 건널 수 있긴 하지만, 물살이 약한 편이 아니라 휩쓸리기 쉬웠다. 강에 대해 잘 모르는 외지인들은 꼭 다리 난간에서 다이빙한 뒤에 크게 다쳐 집으로 돌아갔다. 여름이 되면 할아버지들이 이름 모를 물고기에게 고래 모양의 과자를 던져줬고 겨울이 되면 얼음 위에서 팽이를 굴렸다. 강변에는 작은 산책로가 있었지만,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꾸 어디선가 비린내가 난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는 다리에선 맡을 수가 없었다. 다리는 폭이 좁아서 큰 트럭이라도 오면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은 그냥 멈췄다. 고모부에게 들은 얘기로 옛날에는 강이 워낙 길쭉해서 유람선도 지나다녔는데 흙으로 강을 조금씩 막은 뒤 작은 배로 이동할 수 있는 섬이었고 그마저도 올림픽이 지나자 다리가 놓였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언제 올림픽인지는 기억하지 못한 채, 바르셀로나인가, 애틀랜타인가, 시드니인가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리를 건널 때마다 뭔가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나를 업고 다리를 건너던 엄동설한에도 부는 바람마다 족족 휘청거리는 다리를 믿지 못했다고 늘 말했다. 그런 게 꼭 있다고, 무너질 듯 버티고 있는 게 오히려 더 가련하게 보일 때가 있다고, 그래서 그냥 무너졌으면 하는 게 있다고. 그 다리는 대학교 기숙사로 가는 버스를 탄 날에 기괴한 소리를 냈다. 나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열린 창문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한낮의 온기가 어쩐지 쌀쌀하게 느껴졌다. 버스가 다리 중간에 딱 멈췄을 때,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아주 오래 열지 않은 철문을 조금씩 잡아당길 때 나는 쇳소리가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왔다. 정말 찰나였다. 문 너머에 있을 사람들, 물건들, 감정들을 겪지도 않았는데 마치 주마등처럼 지나간 것만 같았다. 나는 창문을 닫고 두 눈을 감은 채 작게 말했다. 誰能出不由戶. 나는 그 단어를 말한 뒤엔 한 음절 한 음절 무슨 뜻인지 조금씩 떠올렸다. 누가 문을 열지 않고 나갈 수 있으리. 다리를 벗어나서 제일 먼저 본 건물이 성당이었다.

 

처음 미사를 드렸을 때였다. 가사도 사람도 분위기도 전부 낯설었다. 무작정 걷다가 다리를 건넜고 아치형 정문을 지나 작은 공원까지 둘러보고 나서 성당 안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잠깐만 둘러보고 바로 나가려 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려 안쪽으로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누가 봐도 미사를 드리러 온 것처럼 보이는지 얼떨결에 자리에 앉게 되었고 곧 미사가 시작됐다. 몸이 배배 꼬이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귀신에 홀린 듯 거기로 돌아온 지 일 년이 지났는데도 그게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막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노래가 멈췄다. 신부님이 가까이 다가와 한 소절씩 끊어서 성가를 불렀다. 나는 입만 뻥긋뻥긋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연우를 만났다. 연우는 내게 악보를 보여주며 어딜 부르는지 손가락으로 짚어줬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자 작게 물었다.

처음 오세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모 마리아상 아래로 촛불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두런두런 신부님의 목소리만이 성당 안을 채웠다. 다들 조금씩 웃거나 작게 중얼거렸고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마리아상 옆으로 플래카드가 두 개 걸려 있었다. 왼쪽은 자비로움을 사는 삶이었고 오른쪽은 말씀을 사는 삶이었다. 눈이 서서히 감겼다. 잘 생각은 없었는데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특유의 분위기랄까, 누구도 감히 들어오지 않고 또 누구도 감히 나갈 수 없는. 나를 깨운 건 연우였다. 연우가 깨웠을 땐 성당 안은 조용했다. 기둥 위의 조명도 다 꺼진 뒤였다. 캄캄하고 미진한 가운데 촛불만이 일렁일 뿐이었다. 연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꾸벅 인사를 한 뒤에 성당 문을 열었다.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느새 연우가 내 뒤에서 같이 문을 밀었다. 찬 바람에 기침이 나왔다. 연우는 그날 다리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며 자기가 걸친 갈색 코트를 내 어깨에 덮어주고 웃으며 말했다.

다음 주에 돌려주세요.

저 혹시 이 다리 흔들리는 거 알아요?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을 쥐고 아무도 없는 강변을 걷는 사람처럼, 나는 문득 그렇게 말했다. 연우는 잠깐 그게 무슨 말인지 생각하다가 말고 다리 옆에 묶어놓은 자전거에 올라탄 뒤에야 대답했다.

그것도 다음 주에 알려주세요.

 

신부님은 며칠 전 미용실에 갔다가 우연히 거울을 봤는데 흰 머리가 너무 많아서 마치 스님처럼 아주 짧게 머리를 자른 뒤에 아주 시원한 게 좋다며 웃었다. 얼마나 호탕하게 웃는지 조용히 기도하던 신도 둘이 고개를 들고 의아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대놓고 싫은 표정이었는데 신부님과 표정이 마주치자 새근새근 웃었다. 나는 그게 조금 어이가 없어서 작게 말했다.

지금 그거 신부님이 아니었다면 분명 뭐라고 했을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미사 시간도 아닌데.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쉬운 일은 아니죠?

그냥 신부님이랑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얼굴 보는 거도 오랜만이네요.

죄송해요, 미사도 안 나가고.

그럴 이유가 있었겠죠.

사실은 저 연우랑 좀 싸웠어요.

나는 아직도 그게 어제 일 같아요. 연우는 우리 성당을 제일 오래 다닌 애잖아요. 어릴 때부터 봤어요. 사탕이 목에 걸려서 응급실 실려 간 것도 봤고, 짝사랑하던 애와 잘 안 돼서 이제 인생은 의미 없다고 말하던 일곱 살 시절도 봤고, 성당 구석에서 몰래 키스를 하던 모습도 봤고. 그래서 그 결혼식이 꼭 어제 같은데. 그러고 보니 둘이 어떻게 사귀었는지는 들은 적이 없네요.

성서 사십 주간이요. 연우가 그걸 같이 하자고 저한테 말했거든요. 성경을 사십 주 안에 차근차근 배우는 좋은 기회라면서, 아무에게나 권유하는 그런 게 아니라면서. 사실은 진짜 사십 주를 다 할 맘은 없었어요. 그냥 한 주, 두 주, 지루해지면 그만둘까 했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할 만했어요. 그게 끝나면 같이 뭘 먹으러 갔어요. 쌀국수나 스파게티나 일본 라면을요. 둘 다 면을 되게 좋아해서요. 그러다 같이 영화도 보고 같이 여행도 가고. 그 사십 주가 끝나고 저녁 미사를 할 때 대표로 수료증 받는 게 있잖아요. 백 명 이상이 그걸 했는데 제가 그걸 대표로 받았어요. 연우 덕분이었죠. 너무 떨리고 말도 못 하는데 끝나고 나서 연우가 사귀자고 했던 거 같아요. 사실 그거도 성서 사십 주간이랑 똑같았어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고 한 주, 두 주, 지루해지면 그만둘까 하고. 그러다가 좋아진 거 같아요. 그러다가 결혼한 거 같아요.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이 년 남짓이요.

싸운 이유가 심각하나요?

신도 둘은 젊은 여자들이었다. 얘기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성당 맨 끝자리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는가 싶더니 곧 슬금슬금 앞으로 와서 누가 봐도 얘기를 엿듣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지금부터 해야 하는 얘기가 누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인지, 듣는 건 괜찮은데 조금 부끄러운 얘기인지, 부끄럽기는 한데 그보다 추한 얘기인지를 생각했다. 성당 문이 열리면서 신도 둘이 기다린 남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성당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나갔다. 나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무릎 위에 덮었다. 신부님은 그동안 그저 잠이 온다는 듯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이 술술 나왔다.

신부님, 제게는 여태 겪은 모든 일이 심각했어요.

그럼 지금 겪고 있는 일을 원만히 해결하고 싶나요?

되도록 그래요, 하지만 신부님 원만히 해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가야 하는 그 길로 가는 거겠죠.

신부님 그거 혹시 아세요? 예전에 저 다리를 폭파하려던 사람이 있었대요. 그 사람은 뱃사람이었는데 강 근처에서 배를 몰아 강 건너편으로 사람들을 데려다주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리가 생기자 밥줄이 끊겼죠. 폭탄을 구하고 다리에 설치했는데 하필 그 다리 중간쯤에 노숙자 한 명이 있었어요. 그 노숙자를 아무리 달래고 어르고 해도 거기서 떠나질 않더라는 거예요. 포기할 수밖에요. 만약 뱃사공이 다리를 폭파했다면 저는 여기 성당에 오지도 않고 연우를 만날 수도 없었을까요.

과거를 너무 연연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저는 늘 과거만 사는걸요.

지금까지 한 많은 일을 후회해요?

그렇지는 않아요. 최선을 다해 살았어요. 누가 제 삶을 내려다보고 있고 제 삶이 아주 나태하고 게을렀다고 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이 저를 살아본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이 저를 살아서 더 나은 삶을 살아도 변하는 건 없어요. 제가 사는 건 또 아니니까.

그럼 지금 이 문제도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노숙자도 구하고 다리도 폭파해서 다들 괜찮게 살 수 있으면요.

연우는, 연우는 저와 이혼하려고 해요. 혹시 신부님이 연우를 만나주실 수 있나요?

우리 비밀 하나씩 말해주기로 할까요? 내가 먼저 할게요. 나한테는 부인이 있어요. 아주 오래된 부인이지요. 우린 테니스를 좋아해요. 부부끼리 밤에 테니스 어때요?

 

강변을 따라 이어진 길은 아주 어두웠다. 들풀 사이로 연우가 앞장서 걸었다. 개구리 우는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가 멎었다. 조용한 밤이었지만, 영원히 조용할 거 같지는 않았다. 겉옷 속에 양손을 넣고 바닥을 보며 걷는데 자꾸 땅이 푹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신부님은 강을 따라 잠깐만 걸으면 곧 테니스장이 나온다고, 포근한 곳이니까 너무 두껍게 입고 오지 말라고 말했다. 걷다가 길이 좁아져서 발이 강에 조금 빠질 때면 연우는 들릴 듯 말 듯 조심하라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말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보폭을 조절했다. 두 다리를 완전 찰싹 붙이고 걸을 때에서야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커다란 전등 두 개가 철조망 안을 비추고 있었는데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가까이 갈수록 체온이 오르는 느낌이라 연우도 나도 테니스장에 들어가기 전에 겉옷을 벗어 손에 걸쳤다. 나는 의자에 앉았고 연우는 곧바로 몸을 풀었다. 성서 사십 주간의 중간쯤이었던가, 여름에 갔던 소풍이 떠올랐다. 여자들은 차양이 넓은 그늘에 앉아 있었고 남자들은 빈 학교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볕 아래서 준비 운동을 하는 남자 중에 연우는 가장 어렸고 모든 게 싫증 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도 연우는 전반전에만 세 골이나 넣었다. 그 무렵에 우리는 이미 고백만 하지 않았지 사귀는 사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나는 연우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연우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말했다.

아무리 싫어도 하지 않으면 안 끝나니까.

 

나는 그날 몸이 아프단 핑계를 대고 후반전을 전혀 보지 않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괜히 말했단 생각에 질리도록 시달릴 두렴 때문이었던 거 같다. 마치 번지 점프도 무서워 덜덜 떠는 사람을 안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조교처럼.

 

누군가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연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찢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문이 열리고 갈색 단발의 여자가 들어오는 걸 멀뚱멀뚱 쳐다봤다. 신부님의 부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왜냐면 얇은 겉옷 안에 세련된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아주 날씬한 데다가 난쟁이처럼 정말 작았고 피부가 되게 하얀 편이기 때문이었다. 뭔가 분을 듬뿍 바른 아이 같기도 하고 길을 잃은 학생 같기도 했다. 전등 불빛이 바로 떨어지는 입구 앞에 선 채로 팔짱을 끼고 있던 부인은 잠깐 전화를 하더니 가까이 걸어왔다. 의자가 좁아 어깨가 닿는 거리 정도에 앉은 부인이 말했다.

그이는 주차할 곳을 찾고 있어서 금방 올 거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럴 거예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 이건 혼잣말이에요. 그이는 절 도통 누구에게 소개하질 않으니까요. 전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오늘 우리가 왜 이런 자리를 갖게 된 건지도요. 괜찮을 거예요. 우리 부부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으니까요.

신부님도 집에서 싸우세요?

말도 말아요. 왜 다들 그이에게 뭘 상담하려고 하는지를 모르겠다니까요. 자기 몸 하나도 잘 가누질 못하는 사람인데. 이젠 늙어서 조금도 움직이려 하질 않아요. 소파에 누워서 양말을 벗고 막 다급히 불러서 하는 말이 이거 세탁기에 좀 넣어, 같은 말 따위니까요. 짜장면을 시켜도 절대 받으러 나가지도 않고 청소기라도 좀 돌리려고 하면 데굴데굴 굴러 피하기나 하고.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성당에 있을 때랑은 완전 딴판이라니까요. , 오해하진 말아요. 어디 가서 이런 얘기 막 하고 다니진 않아요. 그이에게 들었거든요. 정말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신부님과는 얼마나 오래되셨나요?

성서 사십 주간을 들으며 연우랑 사귀었단 얘기 들었어요. 성서 사십 주간을 열 번 수료해도 그동안 만난 시간이 더 길 거 같고 이십 번보단 짧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동안 그이가 내게 어떻게 한 줄 알아요? 이 얘기를 들으면 더 놀랄 거예요. 싸우는 정도가 아닐 테니까요. 어떤 경조사든 그이는 늘 혼자 다녔어요. 아는 신부도 많았고 아는 동생, 심지어 친척의 친구하고도 친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아예 마주치지 않을 순 없었어요. 가끔 그이가 의도치 않은 시간에 나를 소개해야만 했나 봐요. 늙은 신부님 곁에 누가 있으니 다들 궁금해서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이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알아요? 나보고 자기 동생이라는 거예요. 더 웃긴 건 그것도 처음에만 친동생이었지 나중에는 형수의 동생이라고 하질 않나 그게 가물가물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어디 가선 형수가 일하는 병원 친구라고 하질 않나 참 웃기지도 않더라고요. 기가 막혀서.

그럴 땐 어떻게 하셨어요?

뭘 어떻게 해요? 그냥 가만히 있었죠. 그럼 그때 아 이 사람은 신부라서 결혼하면 안 되는 같이 사는 사람은 있고 그런데 그걸 밝힐 순 없으니까 당신들만 알고 비밀로 해주세요, 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그이는 이 문제가 싸울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니까요. 서로 사랑하면 다른 게 무슨 대수냐고. 가끔은 농담처럼 신부 그만두고 정식으로 결혼식이라도 올리자고 하면 버럭 화를 내곤 하더라고요. 그이에겐 그게 거의 훈장이니까요. 오랜 시간 한 번도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 걸은 외길이랄까요. , 누가 알까요. 길을 걸은 건 그이겠지만, 그동안 문을 열어준 건 나일 텐데.

그에 비하면 저희 문제는 약과겠죠?

그럴 리가 있겠어요?

?

우린 서로 남인데 자기 문제만큼 중요한 게 또 있겠어요. 그러니 어떤 얘길 나누던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여요.

부인이 벌떡 일어나 테니스 코트 안으로 들어가자 연우가 슬금슬금 걸어와 꾸벅 인사를 건넸다. 가벼운 웃음 끝에 서로 라켓을 들고 공을 조금 주고받았다. 신부님은 연우가 첫 서브를 넣을 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든 게 정말 잘 되고 있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성호를 그으며.

 

첫 점수는 긴 랠리 끝에 부인이 냈다. 심판이나 볼 보이도 없이 시작된 경기였다. 부인은 주로 포핸드 스트로크로 공을 쳤는데 그중에 발리가 제일 뛰어났고 연우를 상대로도 힘에서 전혀 밀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구석까지 공을 보냈다. 신부님은 코트에 가까이 서서 한동안 랠리를 지켜봤다. 가끔은 떨어진 공을 주워 건네기도 했다. 숨을 가쁘게 내쉬던 연우가 더블 폴트를 한 뒤 테니스 라켓을 발로 툭툭 걷어차고 나서야 신부님은 의자에 앉았다. 부인은 운이 좋았네요, 라고 말하며 웃었다. 연우는 주머니에서 헤어밴드를 꺼내 머리를 올려 묶고 자세를 다시 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부님이 작게 말했다.

투지는 있는데, 이길 운명은 아니군요.

테니스는 언제부터 치셨어요?

나한테 테니스를 알려준 게 아내니까 벌써 오래됐죠.

요즘도 하세요?

안 한 지가 꽤 됐어요. 나이가 드니까 여기저기 좀이 쑤셔서.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공 한 번 칠 때마다 다른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렇게 해선 좀처럼 이길 수가 없어요. 지금 눈앞에 있는 경기에 집중해야만 공을 코트 안에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신부님도 걱정이 많으시군요.

, 그럼 물론이죠. 어느새 늙어버렸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을 걱정하게 되죠. 그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여태 살아온 게 무용지물일 테니까요.

신부님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상상이 안 가요.

다들 그렇게 말한답니다. 항상 노안이긴 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도 이십 년만 지나면 내가 제일 젊어 보일 거라 말하고. 그런데 그대로더라고요. 겉으로 보는 게 다가 아니죠. 자매님이 처음 왔을 때도 그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래 성당에 다닐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인상이었달까요.

어땠는데요?

분명 뭔가 착오가 있어서 길을 잃은 것 같았죠. 그런데 그게 또 제대로 된 길을 알려줘도 갈 수 없을 거 같기도 했어요. 그래서 연우에게 괜히 나서지 말라고 말했어요. 돌이켜 보면 나도 잘 몰랐던 거죠. 잘못된 길도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 다른 건데.

신부님, 신부님은 잘 모르세요. 그건 틀린 말이에요.

테니스공이 발밑까지 데굴데굴 굴러왔다. 나는 그걸 주워 연우에게로 던졌지만, 너무 멀어 가기 전에 떨어졌다. 어느샌가 경기는 나와 신부님이 앉은 쪽으로 공이 거의 오질 않았다. 부인은 먼저 한 세트를 따고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연우가 자기 쪽에 떨어진 공을 줍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일방적인 경기였다. 누가 봐도 그랬을 텐데 왠지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단 생각이 들자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제가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이곳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다시는 볼 일 없는 풍경이라고 생각했죠. 학교 기숙사에 살면서 방학이 되면 근처에 사는 친구 자취방에서 머물곤 했어요. 불편한 건 전혀 없었어요. 제가 다녔던 학교는 기숙사가 아주 좋았거든요. 그 일은 졸업을 앞둔 봄에 일어났어요. 기숙사 배정이 끝나고 신입생과 한방을 쓰게 됐어요. 풋풋하고 귀가 토끼같이 쫑긋 세워진 귀여운 아이였죠. 뭔가 아주 순수한 느낌이라 좋았어요. 잘해주고 싶었어요.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 년을 같이 살아야 하니까요. 맥주와 치킨을 사서 같이 먹고 다음 날 무슨 수업을 듣는지 한참을 얘기하고, 거기에다가 지난 연애 얘기에 가족 얘기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이 들었어요. 아주 불콰한 꿈을 꾸다가 눈을 떴는데 방이 연기로 가득하더군요. 나는 한참을 거기서 그 아이를 찾았어요. 침대를 만져보고 거실 바닥을 두드리며 찾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방관 한 명이 들어왔더군요.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왔어요. 불길을 간신히 지나서 나오니 건물이 완전 주홍빛이더군요. 꽤 오랫동안 건물 앞에 길게 늘어진 소방차며, 수건을 얼굴에 두른 채 서둘러 달려 나오는 학생들을 보고 있었어요. 갑자기 고향 친구가 한 명 떠올랐어요. 친구 중에 그런 애가 있어요. 우리나라는 좀처럼 지진이 나질 않는 나라잖아요. 그런데도 지진이 일어날 때를 대비해 생존배낭을 항상 챙기는 애였어요.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던, 잠깐 친구네 집에 놀러 가던, 심지어 찜질방 같은 곳에 들어가도요. 그 가방 안에 뭐가 있었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그 아이가 떠올랐어요. 그 혼비백산 사이에서 그 아이를 찾아다녔는데 결국 찾을 수 없었어요. 화장실 욕조 안에서 발견됐다고 하더라고요. 그 늦은 시간에 거기서 뭘 했는지. 장례식장에서 절을 한 뒤에 평소에 말도 잘 하지 않던 선배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길래 거기에 같이 서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가방, 가방 안에 뭐가 있었는지 알 순 없지만, 어차피 필요 없는 물건이 아니었을까, 하고. 제가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아세요? 그 아이, 며칠 지나지도 않아 이름이며 얼굴이며 기억나는 게 없더라고요. 근데 기억나는 게 딱 하나 있어요. 자기는 불편한 관계가 싫다고, 누구든지 불편한 관계가 되기 전에 친해지는 걸 좋아한다고, 그래서 늘 가방에 선물이 될만한 물건을 들고 다닌다고, 내일 아침에 그걸 주겠다고 말했어요. 나는 뭘 받아야 했을까요. 뭘 받지도 않았는데 이미 잔뜩 받은 기분이 그날 이후로 사라지질 않는걸요.

그게 큰 트라우마였나요?

아뇨. 전혀 아니에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근방에서 몇 년을 더 살았어요. 그 기억은 트라우마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건 제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몇 안 되는 청사진이었어요. 그 이후로 뭘 하든 숨구멍이 필요했어요. 그 어떤 화재에서도 조금의 산소를 확보할 수 있게요. 불타버린 기숙사 공사가 끝날 때까지 친구 집에서 평생 쓸 일 없는 언어에 대한 자격증 공부를 했어요.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혹시나 한국이 망해서 그런 나라에 갈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전혀 필요 없는 걸 알지만, 생존 가방도 여덟 개나 샀어요. 뭘 결정하기 전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버릇도 생겼어요. 일단 칫솔 하나를 사더라도 그 칫솔을 만든 재료가 무엇인지, 그 칫솔을 만든 회사에 무슨 이상은 없는지, 그 칫솔을 써본 사람들의 평가는 어떤지, 그 칫솔을 쓰고 난 뒤에 다른 칫솔을 쓸 때 기분은 어떤지, 그 칫솔이 혹시나 잘 팔리지 않아서 단종 될 가능성은 있는지. 신부님은 알고리즘이 뭔지 아세요?

어떤 절차에 관한 용어 말인가요?

그 기억은 제가 살면서 거친 알고리즘이 너무 간단한 편이란 걸 알려줬어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누가 제게 어떤 나라에 다녀왔냐, 고 물어요. 그럼 전 얘기하죠. 해외여행은 가본 적이 없지만, 제주도 정돈 가봤다. 그런데 그 두 문장 사이에 생략된 게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어떻게 갔는지, 무슨 이유로 갔는지, 가서 뭘 했는지, 어떤 경로로 출발해서 어떤 곳에 들러 어떤 방법으로 돌아왔는지. 화재 이후에 제 삶은 그런 알고리즘 속에 예스도 노도 아닌 문항 하나를 억지로 넣어두는 일에 지나지 않았어요. 이 회사가 맘에 드는가, 맘에 들지 않는가, 사이에 절대적인 휴식이 필요하다고 적었고 동시에 잡힌 두 개의 면접 중에 어떤 게 나은가, 사이에 취미생활은 하루에 두 시간이 필요하다고 적었을 테죠.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정할 수 있는 게 없어져요. 가방은 많은데 줄 선물이 없는 거죠. 어느 날은 나노 블록에 미쳐서 종일 블록을 만들고 또 어느 날은 자기소개서에 미쳐서 제출할 일도 없는 자기소개서를 스무 장씩 썼어요. 도저히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을 때, 짐은 가방 한 개를 채울 수도 없는데 가방을 아홉 개나 어깨에 짊어지고 방을 나왔어요. 그런 상태로 여기로 돌아온 거예요.

멀리서도 연우가 얼마나 공을 열심히 치는지가 보였다. 다이빙해서 코트 안에 들어오는 공을 걷어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인은 마치 경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전하는 사람처럼 손뼉을 치며 칭찬을 건넸다. 경기는 여전히 부인이 유리했지만, 연우가 이길 수 없는 그림은 아닌 것 같았다. 세 번째 세트에 들어서면서 부인은 아주 낮게 서브를 했다. 이미 두 세트를 이긴 데다가 이번 세트까지 이기면 경기가 끝나는데도. 잠깐 공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일정하고 균일한 간격으로. 어쩌면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영원히 주고받을 것 같은 심정으로. 적막을 깬 건 신부님이었다.

그래서 돌아오니 어떻던가요?

연우를 만나고는 좋았어요. 같이 살게 된 게 문제였죠. 지금도 연우가 날 감당해야 하는 숙제처럼 구는 걸 참을 수가 없어요. 사소한 일에서 종종 부딪히곤 했어요. 이를테면 혼수를 살 때도 그랬어요. 그 넓은 가구매장을 둘러보는데 어떻게 한 가게에서 모든 걸 살 수 있을까요. 연우는 그걸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뭘 하나 사게 될 때마다 꼼꼼히 살피는 날 믿질 못했죠. 약국에서 영양제를 살 때도 바깥에서 초조히 서 있다가 몇 번이나 문을 열고 날 불렀어요. 섹스도 마찬가지였죠. 어떤 날은 되고 어떤 날은 안 되는 게 꼭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아기 문제도 그랬고요. 나는 그게 지금도 아기 뒤에 문제라는 단어가 붙는 게 어색해요. 연우는 늘 그런 식이었어요. 식사 문제, 아기 문제, 섹스 문제, 다 문제라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삶의 방식이 너무 수동적이라며 늘 투덜거렸어요. 나는 점점 집에 있을 여력이 없었어요. 바깥을 맴돌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거기에 들어갔어요. 남자들이 단체로 모여서 게임을 하는 거기요. 컴퓨터를 켠 다음에 가장 인기 있다는 게임을 켰어요. 시작부터 인물의 얼굴, , 신장 따위를 정할 수 있더라고요. 두세 시간이나 했을까. 남자들이 왜 게임에 열광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게임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어요. 그러다 보니 더 좋은 아이템을 사고, 더 좋은 던전을 돌아보고 싶더라고요. 그의 카드를 쓴 건 분명 잘못이었어요. 한 번 긁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게 다 빚인데. 그래도 기분은 좋았어요. 그 캐릭터가 마치 내 분신 같았거든요. 길드도 들고 오프라인으로 연락도 하고 같이 엄청나게 강한 몬스터를 레이드도 하고. 사실 그 시간도 잠깐이었어요. 카드 청구서가 날아온 날 연우는 딱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그만하자. 그 말투가 딱 그랬어요. 더는 풀 수 없이 어려워진 문제를 포기하는 거 같은.

사과는 했나요?

신부님, 신부님이라면 어떠세요? 이런 부인이 있다면요?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내 생각이 중요한 건 아니죠.

저요,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특별히 좋은 건 없지만, 지금 이대로의 삶이 좋아요. 벗어날 수도 없고 선택한 적도 없지만요. 그런데도 가끔은요, 정말 가끔은 비단옷을 입고 야밤을 걷고 싶은 기분이 들어요, 그런 기분 모르세요?

신부님은 앞을 본 채 입을 굳게 닫았다. 대신 코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면 듀스인가요, 하고 묻는 부인에게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는 두 번 연속 득점해야 끝난다는 얘기죠, 하고 대답했다. 서브는 부인 차례였다. 길고 빠른 서브가 연우의 코트 구석에 꽂혔다. 그다음에는 연우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서브를 받아 코트 앞쪽에 떨어뜨렸다. 다시 듀스였다. 연우는 다리가 약간 풀린 듯 주저앉았다. 비긴 거로 할까요, 하고 부인이 물었고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신부님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계속하면 질 텐데, 그래도 계속하려는 게 가상하네요.

말리실 건가요?

아내가 테니스를 알려줬다고 말했었죠? 실은 아내는 테니스 선수였어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크고 작은 경기에서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은퇴했죠. 지금은 테니스 강사를 하고 있어요. 나는 그게 가끔은 좀 딱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밤에 종종 테니스를 시작한 걸 후회한 적이 없냐고 물었어요. 올림픽 같은 데서 메달을 따는 선수는 정말 적으니까요. 대부분의 선수는 아무도 모르게 은퇴를 한 뒤에 코치나 작은 학교의 선생님이나 강사가 되곤 하니까요. 아내는 늘 대답을 안 했어요. 나는 그 이유가 불쾌한 질문이어서, 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차 안에서 문득 그게 다시 생각나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왜인지 아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렇게 묻는 사람이 많았다고, 그런데 대답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후회하냐는 물음에 예 혹은 아니요로 대답할 순 없다고, 다만 그 시간이 좋았고 좋았던 나머지 그 시간을 전부 몰아내고 싶기도 했고 정작 그 시간이 전부 지나간 뒤엔 아쉬웠고 또 그런 감정들 끝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라고. 운전대를 잡고 마른 침을 삼킨 뒤에 다시 물었거든요. 그 하나가 뭐냐고. 아내가 웃으며 대답하더군요. 그 길뿐이었다고.

코트 중앙에서 연우와 부인이 악수를 나눴다. 표정만 봐선 누가 이기고 누가 진 건지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신부님은 가방에서 긴 수건을 꺼내 부인에게 건넸다. 한동안 그들은 네트 앞에 선 채로 짧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주고받았다고 말하는 건 입 모양이 명확히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영화 속인 듯 나란히 서서 간혹 웃고 가끔 주름진 얼굴을 만지면서 두런두런 얘기하는 장면. 나는 연우가 천천히 걸어와서 내 옆에 앉길 기다렸다. 연우는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피곤함이 열대야처럼 번지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신부님과 부인은 쉬지도 않게 다시 라켓을 잡았다. 이번에도 이쪽으론 공이 넘어오지 않았다. 연우에서 신부님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부인은 질 맘이 없어 보였다. 한 세트가 테니스공이 내는 소리만으로 가득하게 채워진 뒤였을까. 연우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져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잘 치시더라.

분해?

아니, 질 경기를 진 거니까.

근데 왜 그렇게 열심히 했어?

그땐 아직 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재밌었어?

테니스는. 이런다고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대사 엄청 진부하다, 뭔가 이상해.

어쩔 수 없어. 우린 헤어지는 거야, 다른 연인들이 그랬듯.

겨우 이런 식으로?

난 이미 충분히 설명했어.

신부님은 근처로 오지 않는 공은 아예 따라가지도 않았다. 공을 주울 때도 세월아 네월아 하는 식이었다. 부인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희미하게 웃었다. 이러다 날 새겠네, 하고 작게 말하기도 했다. 조금 랠리를 나누다가 이번에는 부인이 조금 지쳤는지 코트에 주저앉았다. 신부님은 겉옷을 벗어 네트 너머로 손을 내밀어 건넸다. 오늘 안에 서울을 가자면서 아직 경기도밖에 안 왔는데, 하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경기는 더디게 이어졌지만, 신부님도 부인도 그만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세트도 일방적인 부인의 승리였다. 세 번째 세트에 들어가고 나서야 연우가 다시 말했다.

어느 부자가 있었대. 독신이었는데 자기가 기르는 강아지한테는 그렇게 잘 해줬다는 거야. 그래서 죽은 뒤에도 그 강아지 앞으로 유산을 남긴 거야. 사람이 한평생 써도 절대 쓸 수 없는 금액을. 그 강아지는 보통 강아지가 절대로 누릴 수 없는 삶을 살았대. 고급 호텔에서 묵고 매달 최고급 미용을 받고 먹는 것도 제일 비싼 간식만 먹었다는 거야. 그런데 어느 날 그 강아지가 죽은 채로 발견됐대. 나이가 제법 있는 강아지니까 그냥 죽은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대. 그 강아지를 대신 키워주며 재산을 관리하던 여자가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야. 돈이 문제였지. 사실 그 여자는 부자의 동생이었고 그 강아지를 너무 좋아했대. 그런데도 돈이 눈에 밟혔던 거지.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단 마음이었대. 하지만 강아지를 죽인 건 두고두고 후회할 거 같다고.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지나간 일이잖아. 지나간 건 되돌릴 수 없어.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야. 내가 처음 얘길 꺼냈을 때도 이미 과거잖아. 들은 기억이 남는 거지 들은 순간은 이미 지나갔어. 난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모든 과거를 살고 있다고. 그리고 그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도 옮길 수도 없이 그냥 거기 있는 거야. 그러니 잘 보내줘야 하는 거지. 난 지금 마주하는 과거도 그렇게 하고 싶어. 여기서 그만 끝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

마지막 공이 천천히 떨어졌다. 드롭 샷이었다. 신부님과 부인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연우는 이미 일어서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대로 의자에 앉아 빈 코트를 바라봤다. 아직 줍지 않은 공들이 별자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왜 아무것도 줍지 않아,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한 번도 밟은 적 없는 잔디가 묘하게 메말라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하려다 말았다.

 

촛불을 들고 가던 신부님이 꾸벅 인사를 하고선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의자에 앉아 뭘 빌지도 않는데 기도하는 척을 했다. 이혼 신고를 끝내고 나서 연우는 같이 밥이나 먹자고 했다. 그럴 맘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도 쉬이 그러자고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언제까지고 그런 느낌일 거라 지금 거절하면 영원히 볼 일이 없는데도 고개를 저었다. 연우는 아쉽다는 듯 웃었다. 그건 다 가짜지, 아주 몹쓸 가짜야.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신부님이었다.

뭐가 다 가짜예요?

제가 무어라 말했나요?

, 제가 잘못 들었나 보네요. 뭐 기분 좋으신 일이라도?

그렇게 보이나요?

표정이 좀 개운한 느낌이라서요.

방금 이혼하고 왔거든요.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괜찮아요. 다들 겪는 일인걸요.

괜히 나서는 게 아닌지 모르겠지만, 슬플 땐 슬퍼하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전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사람이 이토록 많은 감정을 가진 건 모든 경우에서 필요하기 때문이겠죠.

잘 기억해둘게요, 지금은 슬프진 않으니까.

그렇담 다행이네요.

근데 혹시 전에 있던 그 신부님은 어디 가셨어요?

, 그게 있잖아요, 말도 마요, 자매님만 알고 계세요, 그 신부님이 글쎄 오랫동안 아내가 있다는 걸 숨겼다지 뭐예요, 저희도 이번에 그거 때문에 난리였어요, 누가 그걸 알려줬다고 제일 늙으신 신부님이 노발대발하시고 하여튼. 그 신부님은 이제 아마 어디 가셔도 신부님 노릇을 하실 순 없을 거예요. 이미 소문이 쫙 퍼져서. , 알음알음 들은 거론 먼 나라에서 결혼하신다고 한 거 같은데. 이제 서로 잘 된 거겠죠.

 

밤이 마치 차가운 틈새와 따뜻한 틈새의 이음새 같았다. 버스가 좀처럼 오질 않았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이곳을 벗어날까. 주머니에서 표를 꺼냈다. 표는 조금 구깃구깃했지만, 거기로 가기 위해 책 세 권을 샀고, 한 달을 인터넷을 뒤졌고, 옷을 몇 벌 샀고, 가방을 세 개나 꾸려 두 개는 미리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부쳤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창문을 열었다. 다리를 지나가는 버스는 자꾸만 이유 없이 급정차했다. 손잡이를 잡은 사람 중에 누가 기사에게 말을 거는 바람에 싸움이 붙었다. 버스가 도로 한가운데에 멈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이 서서히 감기는 기분이 들었지만, 싸움 구경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주먹이 허공을 지나가는 사이에 승객 몇이 일어서서 그들을 말렸다. 클랙슨 소리가 뒤에서 계속 울렸다. 문 열어. 남자가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다. 왜인지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남자는 내 앞으로 오더니 작은 창문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게 안 될 거 같았는데, 남자는 돌차간 나가버렸다. 나는 얼음이 되어 가만히 있었다. 다들 그게 별일 아니라는 듯 바라봤다. 아무 일 없을 걸 아는데, 밖을 보기가 무서웠다.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내려 다리 밑까지 떨어졌을 것만 같았다. 버스가 서서히 출발했다.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까맣게 잊은 채 곁눈질로 본 창문 끄트머리는 조금, 정말로 조금 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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