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일

by 별티끌 posted Aug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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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에게는 이런 일이 흔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일은 흔치 않았다. 처음인가? 오랜만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는 최선을 다해 거부하고 있었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겠지만.
 “퓨리넥스, 뭐하고 있어?”
 은발의 사내가 그를 불렀다. 달빛 아래여서 그런지 사내의 머리는 더 밝게, 더 푸르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그는 어둠에 너무나 쉽게 스며드는 칙칙한 검은 머리였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뿐이라고는 타인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붉은 눈뿐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것을 등불 삼아 밤길을 걷곤 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누가 알았을까.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도, 우연도 많다. 초자연적인 일을 겪고, 그 일부가 된 그에게는 더욱 많은 일들이 예견되어있었다. 그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사내는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생각이 많아졌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우거진 숲 속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이 많아졌다는 발상은 보통 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사내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세월을 쌓아온 존재다. 잠시 사내의 눈을 들여다본 그는 다시 어두운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면 돌아갈 필요 없어.”
 그는 사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숲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둠은 그의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은발의 사내는 엷은 미소를 띤 채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를 따라 나섰다.
 “경험자가 있어서 다행이네.”
 경험자라는 말이 왜인지 그의 가슴을 찔렀다. 마음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죄책감이 몸을 간지럽혔다.


 이런저런 일을 해봤지만, 경호는 처음이었다. 애초에 이쪽 부류한테 경호를 맡기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인 것을 넘어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새 무슨 사상이다, 신념이다 하며 헛소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보니 이런 엉뚱한 사람도 생기는구나 하며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이상한가? 나는 오히려 자네 같은 자들이 경호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귀족은 낮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어서 가르치듯이 말을 이어갔다.
 “요즘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무서운 세상이네. 내 딸을 동성에게 맡기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지. 내게 필요한 건 인간성을 초연한 존재라네. 자네 같은 인외(人外)의 존재가 그런 면에서 제격이지.”
 일리 있는 말이다. 요즘엔 사상이나 신념이 다양해진 것으로도 모자라서 다양한 성적 취향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다닌다. 범죄가 발생해도 범인이 꼭 남성이라고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용병 세계도 변화하긴 마찬가지다. 남성주의가 만연해서 여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 바닥에서 여성이 늘어나고 있는 건 이런 변화가 한 몫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인외의 존재가 안전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 엉뚱한 생각이다. 그들은 둘 중 하나다. 텅 비었거나 욕구만을 좇거나. 어느 쪽이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에게는 최고로 위험하고 더러운 일을 맡기고, 칼 같이 관계를 끊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경호라니. 하지만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아무튼 나흘 뒤에 떠날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 이왕 일찍 온 거 내 딸과 좀 친해지기도 하고. 형제들을 일찍 잃은 아이라 새 식구를 반갑게 맞이해줄 걸세.”
 자리에서 일어난 귀족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화사하게 햇볕이 내리쬐는 정원에서는 소녀가 꽃병을 들고 꽃꽂이를 하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고생 하나 하지 않고 키워졌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전형적이고 보수적인 귀족 집 아가씨였다.
 볼일을 마치자마자 일이 시작됐다. 정원으로 가 먼발치에서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종종 근처 하녀를 불러 마음에 드는 꽃의 이름을 물어봤다. 그리고 그 이름까지 마음에 들면 꽃을 꽃병에 꽂았다.
 저런 애가 여행을 떠난다고? 스스로 가고 싶어 하는 건지, 아버지가 시켜서 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긍정적인 결과가 상상되지는 않는다. 저택 근처 숲을 지나가기만 해도 불평하면서 돌아가자는 소리가 나올 게 뻔하다.
 그때 소녀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발견한 건지, 이제 용기를 내서 다가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맑은 미소를 띤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불쑥 꽃병을 내밀었다.
 “안녕, 아저씨! 오늘부터 내 경호라며? 잘 부탁해.”
 분명 귀족은 소녀와 친해지라고 했다. 소녀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첫 만남부터 뇌물이라, 진부하다. 어차피 여행이 끝나면 끝날 계약관계다. 인간적으로 깊은 사이까지 될 필요는 없다. 그래서 꽃병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한편, 저택 밖에 있는 꽃밭에 나가기로 약속했다.


 “정말 금방 도착했어!”
 밤이라고 해도 숲길을 걷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더욱이 익숙한 길이라면 일사천리였다. 숲에서 나오자 언덕이 드문드문 있고 강이 흐르는 평지가 펼쳐졌다. 가까이에 마을이 있었고, 저 멀리 언덕 위로 저택이 보였다. 불이 하나도 밝혀지지 않은 마을과 저택은 그의 기억 속 밝은 모습과는 달랐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생기라고는 모조리 사라진 것 같았다.
 “와, 정말 탁 트였네. 대비해놓지 않았으면 파죽지세로 밀고 갔겠어.”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훤히 보였다. 단지 이곳이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런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옮기던 중,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섰다. 기억을 떠올릴 새도 없이 습격의 흔적이 먼저 눈에 띄었다. 마차 몇 대가 그대로 지나간 듯 꽃들은 너덜너덜했다. 그 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마을이 보였다. 여유로웠단 걸까. 그들은 곧장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뒤에서 사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엇? 저택으로 바로 안 가?”
 “먼저 가도 돼.”
 사내의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의 발소리가 뒤따라오는 게 들렸다. 둘은 말없이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얼핏 보아도 약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필요 없으니까. 불탄 흔적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치명적이니까. 단지 죽음의 악취만이 풍겨왔다.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른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면서 신발에 모래 끌리는 소리가 났고, 작은 돌이 채였다. 죽은 자들은 그 소리에 반응했다.
 “왜 굳이 일을 늘리는지 모르겠어.”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는 거기에 반발이라도 하듯이 대꾸했다.
 “이들의 세력을 줄이는 게 목표 아니었나?”
 “이런 인형들 쓰러뜨리는 건 도움이 안 돼. 사법사(死法師)를 없애야지.”
 사내가 가르치듯이 말했다. 그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둘은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형체를 바라보며 자세를 취했다. 준비물은 마술을 부여한 은제 칼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면 호위병을 줄인다고 생각해. 의식은 길어.”
 “고집도 참.”
 그는 한 걸음 두 걸음, 순식간에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생명을 잃은 기억 속 장소에 뛰어들었다. 달은 마을에서 가까운 산꼭대기에 걸려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여행을 떠난다. 나흘 동안 쭉 소녀를 지켜봤다. 통성명도 하고, 일상을 함께했으며, 소녀가 마을로 오가는 것도 따라갔다. 첫인상은 변하지 않았다. 소녀는 순진무구하고, 상냥했으며, 고생을 몰랐다. 여행은 실패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소녀는 이 작은 세계 안에 틀어박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소녀의 방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방 안에서 기척이 사라진지는 좀 됐다. 소녀는 잠들었고, 날이 밝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으니 잠시 쉬어도 될 터였다. 그럼에도 지난 나흘 간 이렇게 밤새 방 앞을 지키고 서있었다. 소녀가 몰래 밖으로 나가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쉬는 것보다는 계속 일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휴식이 필요 없는 자에게 휴식은 사치였다. 사치를 즐기는 취미는 없었다.
 그때 방 안에서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문이 살짝 열렸다. 소녀는 문 뒤에 숨어 고개만 살짝 내민 채로 서있었다. 잠이 안 오는 걸까? 평소처럼 정중하게 물었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들이 나가기 전날 꼬마 아이 같다. 하지만 재워야 했다. 여행길은 고되다.
 “나도 그 정돈 알아, 데일. 단지….”
 데일은 용병으로서 사용하는 이름이다. 통성명을 한 뒤로 소녀는 아저씨 대신에 이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조심스럽게 말하는 소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원망이 담겨있었다. 누가 밤새도록 문 앞을 지키고 있으니까 못 나간 것이리라. 그러다가 결국 이렇게 직접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왜 이 시간에 나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낮에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그래도 정 가고 싶다면 내일 잠깐 들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데일이 오기 전부터 다녔던 곳이라 위험하지도 않거든?”
 소녀는 드물게 고집을 부렸다. 그 모습에 호기심이 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계약에서 벗어나는 짓을 하는 건 어리석다. 소녀는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아, 꼭 계약을 지키셔야겠다? 그러면 데일도 따라와.”
 아무리 소녀를 보호하면 된다지만 굳이 위험한 곳으로 내보내서 일을 늘릴 필요도 없다. 이런 모험은 나중에 계약을 따질 필요 없는 사람, 이를테면 친구에게 제안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 하, 좋아. 목표가 바뀌었어. 그러면 내 방으로 들어와.”
 그러자 영문 모를 소리가 이어졌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게 왜 이쪽으로 이어지는 걸까. 당연히 이것도 거절이다. 아무리 친분을 쌓으라고 해도 밤중에 소녀의 방에 거리낌 없이 들어가는 사이까지 요구한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해서 경력에 흠집 낼 필요는 없다.
 “데일은 정말 사무적이네. 더 친해질 수도, 부탁도 할 수 없어.”
 거듭되는 거절에 소녀는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 편이 낫다. 이건 잠자코 듣기만 하면 된다.
 “나 부를 때도 아가씨 말고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잖아. 자, 에나라고 불러봐. 에-나.”
 에나 사일런스. 그게 소녀의 이름이었다. 물론 여행길에 오르면 아가씨가 아닌 이름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괜히 신분을 노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택에서는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는 게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거절했다간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에게 화를 살 수도 있다. 에나 아가씨로 타협을 볼 필요가 있었다.
 “그 선 긋는 게 너무 싫어….”
 소녀가 중얼거렸다. 다 들렸지만 들리지 않은 척 했다. 그런데 소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결심한 표정이었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 나가는 거 방해하면 네가 밤에 나 덮치려 했다고 할 거야.”
 그 당돌한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용병으로서의 생명을 단숨에 끊어버리는 것은 물론 인간 세계에서 잠적해야 할지도 모르는 협박이었다. 그런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신분은 그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녔다.
 한 번의 일탈과 용병으로서의 생명, 계약을 지키기에는 너무도 큰 대가였다. 애당초 소녀가 위험한 곳으로 간다고 해서 계약을 불이행하는 건 아니었다. 소녀가 어떤 돌발행동을 하든 안전하게 지키기만 하면 계약 이행이다. 가정교사가 아니니까. 그렇게 합리화를 하고는 소녀에게 마지못해 일탈을 허락하는 시늉을 했다.
 소녀가 향한 곳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이었다. 영지와 외부 세계의 경계인 숲을 끼고 있는 산이었다. 밤인데도 소녀는 능숙하게 산길을 올랐다. 치맛자락이 나뭇가지에 스치거나 풀이 발목을 간질이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확실히 예전부터 자주 다니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야생동물을 만나면 어쩌려고 이런 길을 다닌 건지.
 “자, 여기야!”
 목적지는 산꼭대기가 아니었다. 산 중턱 즈음에서 소녀는 꼭대기로 향하는 길과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풀이 더욱 우거졌지만 소녀는 거침없었다. 그렇게 절벽 끝에 다다랐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이 탁 트인 장소였다. 소녀가 팔을 쭉 뻗은 하늘에는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은하수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얼굴에는 여태껏 보지 못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소녀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 비밀장소야. 아버지, 어머니, 하인들도 몰라.”
 그런 곳에 왜 데려온 걸까.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분명 소녀는 목표가 바뀌었다고 했다.
 “비장의 카드란 거지. 지금까지 데일이랑 여기저기 같이 다녔는데 하나도 친해지지 않았어. 나도 여기까지 데려오고 싶진 않았는데….”
 소녀가 다시금 원망 담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반쯤 장난이었는지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런 소녀는… 첫인상과 달랐다. 소녀는 꽤 욕심이 있고, 나름 목표로 하는 일에 다양한 수단을 동원할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걸로도 사무적인 관계를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조용하게 여행이나 하고 돌아올 수밖에.”
 조용하게 여행이나 하고 온다니, 마치 무슨 일을 꾸민 것처럼 얘기한다. 아니면 단순한 계약 관계를 넘어 자신의 동지가 되어줄 사람을 찾는 것처럼.
 “아, 참 데일. 그런데 앞으로 데일이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은 안 할 건데, 이 장소만은 얘기하지 말아줘.”
 소녀는 절벽 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절벽 아래로는 약간의 바위, 그 외에는 울창한 숲이 깔려있었고, 하늘에는 여전히 은하수가 밝게 수놓아져있었다. 소녀의 하얀 드레스는 거기에 섞여들 것만 같았다. 소녀가 고개와 몸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 검지를 세워 입가에 갖다 댔다.
 “침묵은 금이야.”


 “아아아악!!”
 마을의 한 집안 구석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여기에서 사법사를 찾은 건 의외의 성과였다. 그래봐야 말단이겠지만. 사법사의 맨살에 칼날을 대자 살이 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죽은 몸이기 때문에 타는 내가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사법사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강제로 들었다.
 “말해. 사법회가 여기 온 목적이 뭐야? 사일런스 남작과는 무슨 관계지?”
 사법사의 코앞에서 붉은 눈이 부라렸다. 그러나 사법사는 킥킥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법사가 말했다.
 “몰라서 묻는 건가? 너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용병 데일.”
 순간 번쩍이는 물체가 내리쳤다. 그가 칼을 내리쳐 사령술사의 손가락 하나를 자른 것이었다. 절단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고통을 참는 건지, 고통이 전해지지 않은 건지 사법사는 크게 웃었다. 사법사가 말을 이었다.
 “오오, 고문하는 건가? 나쁘지 않아. 그럼 나도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해줘야지. 지나가는 길에 너무나 밝고 활기찬 곳이라고 느껴져서 짓밟아버리고 싶어졌다! 자, 어때? 흐흐흐.”
 “남작이랑 무슨 관계인지 물었다.”
 “원했던 대답이 아닌 모양이군. 그럼 내가 반대로 묻지. 넌 왜 여기로 돌아왔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하지만 넌 잘못이 없는걸. 할 일을 하고 돌아갔을 뿐이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가호를 바라는 자들에게 가호를 내려주는 일을 할 뿐이지. 뭐, 막상 신이 강림하시니 좀 미련을 드러내긴 했다만, 지금쯤 모두 공평한 죽음께….”
 그는 거기서 사법사의 목을 내리쳤다. 더 이상 들을 가치 없는 광신도의 말이었다. 하지만 사법사는 이걸로 죽지 않는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사법사의 머리를 주먹으로 찍었다. 사법사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벌써 끝났어? 어지간히 신경 긁어댔나 보네.”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아쉬워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날을 닦았다.
 “비꼬기나 하면서 얘기는 통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사내를 지나쳐 문 밖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진한 탄내가 코를 찔렀다. 한때 이 마을의 주민이었던 자들은 자비도, 가호도 받지 못한 채 육시를 당하고 불에 타 재가 됐다. 그는 그 광경에서 의식적으로 눈을 돌렸다. 더 지체해서는 안 된다. 사내도 일을 마친 듯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연기 때문에 저쪽에서도 알아챘을 거야. 얼른 가자.”
 “뭐 알아낸 거 있어?”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에게 사내가 물었다. 그의 몸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
 “여느 때랑 같다. 자기들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떠들어대지.”
 그의 말에 뒤에서 사내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맛에 사는 녀석들이니까. 아, 산다고 하긴 뭐한가? 뭐 어쨌든 그래, 결국 사일런스 씨도 사이비에 빠졌던 거야?”
 “… 그런 거면 좋겠군.”
 그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사법사의 말은 독이다. 어느 하나 믿을 구석이 없고, 마음에 담아둘 필요 없는 소리다. 그럼에도 사법사의 말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결코 죄책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이곳에 돌아온 게 아니다. 이곳을 떠났던 시점에 그는 할 일을 마친 상태였고, 여기에 돌아온 것도 또 다른 할 일 때문에 온 것뿐이다.


 여행을 떠나면서 본 저택의 마지막 모습은 몇 대의 마차를 맞아주는 귀족이었다. 어린 딸이 집을 비우니까 어른들의 사정을 잔뜩 처리하려는 걸까. 마차에 하나 같이 검은 커튼이 쳐져있던 게 신경 쓰였지만 무시했다. 사일런스 가문은 항상 뭘 꾸민다. 그러니 의미는 두되, 아주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침묵은 금이다.”
 네 번째 여행지를 떠나기 전날 밤, 만찬은 소녀의 방에서 단 둘이 이뤄졌다. 여행길은 여태껏 경험한 것 중 가장 쉬웠다. 여행지마다 그 지역의 토호가 소녀를 성대하게 맞아줬다. 다른 여행지로 떠날 때도 그들이 은혜를 베풀어줬다. 귀족의 연줄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가훈이야. 데일은 우리 가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역사에는 크게 관심 있지는 않다. 유력한 가문이면 몰라도 어지간한 귀족들은 인외의 존재에게 언제 태어나고 죽는지 모르는 거리의 부랑자들과 큰 차이 없었다. 그나마 고용주기 때문에 알아본 바로는 사일런스 가문은 100년 전 내전이 종식되면서 작위를 받은 가문이었다. 이른바 신생 귀족이었다.
 “맞아. 원래는 미천한 상인이었지. 보급품이랑 관련 있었다고 해. 그래서 기회를 얻은 거야.”
 상인이라. 그 사실을 알자 가훈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침묵은 금이다. 굉장히 상인스럽다. 하지만 왜 하필 침묵일까? 상인이 금으로 여길 수 있는 건 온갖 것이 있지만, 침묵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상인이라는 존재들은 쉴 새 없이 나불대면서 자기를 드러내려하지 않던가?
 “그게 차이점이었어. 대부분의 상인들은 당장의 이익, 금전적인 이익을 따지잖아? 우린 좀 더 큰 걸 바라본 거지. 정치, 권력, 인맥…. 선조께서 보급품을 고르셨던 것도 애초에 상업 이상을 탐내셨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해.”
 왕과 귀족의 권력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시기다. 그런 야망을 품을 수도 있는 때다. 그렇다고 해도 꽤 대담하다. 그 야망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침묵이 어떤 역할을 했을지 예상이 갔다. 대담하면서 동시에 비상하다.
 “아, 너무 띄워준다. 뭐, 확실히 그런 분께서 초대 당주셨으니까 우리 가문이 생길 수 있던 거겠지.”
 소녀는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쑥스러워했다. 당연했다. 여행길에 오른 수개월 동안 소녀에 대한 인상은 첫인상과 많이 달라졌다. 소녀는 생각보다 가문에 소속감이 있었으며, 가문의 후계자라는 자각도 있었다. 온실 속 화초 같았던 모습도 저택을 나오자 보기 힘들었다. 다른 귀족들과 교류하는 모습에서는 어엿한 차기 당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데일, 그거 알아? 우리가 침묵하는 건 어디까지인지?”
 그런 점에서 저택에서 소녀의 모습이 과연 진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외의 존재조차도 눈치 채지 못하는 가면이 고작 열다섯 넘은 소녀에게 있을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소녀의 주변 환경이 원인일 것이다. 나고 자라면서부터 배운 생존 기술인 것이다. 어디서 그런 걸 보고 배웠을까. 그것은 아마 일찍 죽었다는 형제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침묵은 말이지, 가족도 예외가 아니야. 어쩌면 나 자신한테도…. 우리 증조부 재산이 지금도 막 발견된다니까 글쎄? 난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 정도는 힘들겠더라고. 데일한테도 이렇게 다 얘기하고 말이야.”
 소녀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떨쳐내기 위해서인지 과장된 몸짓과 큰 목소리로 말했다. 겸손한 말을 하지만 이것도 아마 진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솔직하기는 하다.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지켜본 모습으로 생각해보건대, 그건 아마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픈 의도일 것이다. 솔직함은 이런 데에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사람을 만들어서 도대체 어쩌려는 걸까? 침묵은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그 말은 곧 사일런스 가문에서는 가족도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일까? 가족도 믿을 수 없는데 믿을 수 있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 에나는 날 믿고 싶은 걸까.
 와인 잔을 비우며 생각을 떨쳐냈다. 밤이 깊었다. 소녀는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데일, 내 곁에 있어줄 수 있어?”
 그때 소녀가 다시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뜬금없는 소리였다. 촛불 뒤로 보이는 소녀의 얼굴은, 불빛 때문인지 와인 때문인지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 얼굴에서 고집이 보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저택을 나서고 싶다고 고집을 부릴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런 애매한 물음에는 대답해줄 수 없다. 그래서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넌 의심했었어?”
 “뭘?”
 저택으로 향하는 길에 사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가 반문하자 사내가 말을 이었다.
 “남작이 사법회와 손이 닿았다는 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이 스쳐갔다. 모두가 그를 붙잡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으로 다 끝나지 않았단 건 알고 있었다. 지나가듯이 본 적 있는 마차와 현재 상황을 끼워 맞춰보면 그들이 그를 붙잡았던 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가 갔다.
 “아마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법회와 연결 지을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직접 사법회에 대해 얘기해줬더라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이미 물은 엎어졌다. 물이 엎어졌을 땐 후회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낫다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저택은 고요했다.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도, 그들을 맞이하는 적들도, 사일런스 가의 사람들도 없었다.
 “벌써 의식이 끝났나?”
 “그럴 리 없어. 벌써 정리까지 끝났으면 마을에 사법사가 남아있었을 리 없어.”
 그가 물었으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둘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정원을 지나쳤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의식 중간에 훼방이 있었을지도 몰라.”
 “… 에나.”
 그는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철저히 온실 속 화초 같은 여인을 연기하던 소녀. 실제로는 가문을 이을 야심이 가득하고, 이를 위해 자기 사람들을 만들고 있던 소녀. 여행에서 생존해서 돌아온 진정한 후계자. 당주인 사일런스 남작 외에 사법회와 맞설 이가 있다면 그 소녀 밖에 없다. 둘은 저택 정문 앞에 다다랐다.
 “… 그럼 그렇지.”
 문 앞에 서자 둘의 표정이 달라졌다. 문 틈새로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는 문으로 손을 뻗었다. 더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눈이 바쁘게 굴렀다.
 저택 안은 익숙했던 풍경과 딴판이었다. 불은 하나도 밝혀져 있지 않았고, 가구와 장식품은 죄다 어질러져 있었다. 공기도 피 비린내로 가득했다. 그리고 집안을 배회하는 사람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둘은 반사적으로 전투를 준비했으나 그들은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목적 없이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밖에 없었다.
 ‘지배받고 있지 않아. 근처에 사법사도 없어. 버리고 간 것 같아. 어떻게 된 거지?’
 그의 머릿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잠깐 사이에 사내가 그와 정신 연결을 한 것이다. 상대방의 허락 없이 정신을 연결하는 것은 큰 실례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를 내지 않고 저들을 자극하지 않는 건 좋은 판단이었다.
 ‘저 사람들 알아?’
 사내가 그에게 물었다. 아까 마을에서처럼 이곳에서 조종당할 사람들은 뻔했다. 이름까지 아는 건 아니지만 한 번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옷차림이 익숙했다. 사일런스 가의 하인들이 입는 옷이었다.
 둘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카펫이 발소리를 죽여줬지만, 옷깃 스치는 소리 하나 나지 않게 조심했다. 역시나 저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사내가 다시금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의식을 어디서 했는지 찾아봐야겠어. 퓨리넥스, 너 이 집 구조 알지?’
 ‘알다마다. 앞장설게.’
 저택에서 의식을 치를 만큼 큰 곳은 정원과 이곳 현관, 그리고 식당뿐이다. 하지만 정원과 현관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사법에 의한 의식은 마력이 약하고 친화도가 낮은 사람이라도 그 잔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흔적을 남긴다. 정원과 현관에서는 그런 잔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살펴봐야 할 곳은 단 한 곳이다.


 문을 벌컥 열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몇 개월이나 지난 일인데도 이곳에 돌아오자 분노가 차올랐다. 식당에는 귀족이 기다란 식탁 끝에 홀로 앉아 오찬을 즐기고 있었다. 귀족은 음식을 들던 걸 멈췄다.
 “오, 자네! 돌아왔군. 그래, 여행은 어땠나?”
 뒤로 하인들이 황급히 들어오는데도 귀족은 뻔뻔하게 인사를 건넸다. 끌어내려는 하인들을 뿌리치고 귀족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귀족은 하인들을 제지하고 말을 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가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그래도 이번에는 잘 고용한 모양이군. 그동안 내 자식들을 데리고 여행 다녀온 경호원 중에 화낸 사람은 없었다네. 모두 죄책감에 사로잡혀있었지.”
 귀족은 아무렇지도 않게 진실을 말했다. 소녀의 추측이 맞았다. 사일런스 가에는 조금 유별난 전통이 있었다. 후계자를 선별하는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방식은 여행을 떠나 살아 돌아오는 것이었다. 소녀의 형제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모두 이 15살 이후의 여행 때문이었다.
 소녀는 이러한 선례를 봤기 때문에 여행에 대비할 수 있었다. 여행지에 미리 인맥을 쌓아놓으면서 안팎으로 자기 사람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북쪽 여행지에 다다를수록 한계가 드러났다. 사람이 적고 폐쇄적인 그곳에 고작 15살을 넘긴 소녀가 사람을 두고 있을 리 만무했다.
 북쪽 땅의 영주는 여태까지 만난 자들과 다르게 최소한의 숙식만을 제공했다. 그렇게 빈곤한 귀향길이 시작됐다. 아마 이곳에서 쓰러진 사일런스들이 많았을 것이다. 한 번 선의를 베풀어준 귀족에게 다시 한 번 선의를 바라는 것은 결례를 넘어서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오로지 생존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여행의 목적이라네. 살아남되, 비굴해져선 안 된다. 그게 우리의 비결이지. 그게 없으면 침묵도 소용없다네.”
 하지만 해도 너무했다. 정상적인 경로대로였다면 귀향길도 어지간한 여행길보다는 쉬웠을 것이다. 모든 식량과 물은 소녀가 섭취해도 문제없었으니까. 하지만 강도라니, 납치라니, 마녀사냥이라니. 이 시련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덕분에 여행길에서 한참 이탈한 곳으로 빙 돌아왔다. 인연에도 없는 배까지 타서.
 “그게, 아무래도 상대가 자네여선 너무 쉽지 않겠는가? 내 사례는 배로 쳐줄 테니 화 풀게나.”
 귀족은 일말의 죄책감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 지긋지긋한 용병에서도 벗어날 텐데 잘 된 거 아닌가?”
 귀족의 말에 약간 분노가 가시고 황당해졌다.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귀족이 말을 이었다.
 “내 자식이라지만 이토록 훌륭히 해낼 줄은 몰랐지. 중간에 내치지도 않고 돌아와서는 대신 분노해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을 만들었지 않았는가?”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험난한 여행길에서 소녀가 가장 의지한 존재. 이렇게 계약까지 완수해냈다면 분명 소녀와 더없이 가까운 사이가 됐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때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네요, 자식이 그 정도로 훌륭하지는 못해서.”
 여행으로 인해 꾀죄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소녀는 벌써 깔끔한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바싹 마른 입술과 앙상한 몸만이 험난한 여행길을 대변해줬다. 소녀가 귀족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데일은 남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확실히 잘 고용했더라고요. 여행길에서 그는 제게 사랑을 속삭이지도, 제 몸에 손대지도 않았습니다.”
 소녀의 말을 이해하기를 잠시, 귀족의 얼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귀족은 많은 걸 예상했으나,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다. 결국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녀와 분명히, 생각 외로 가까워지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소녀에 대한 충성심 혹은 애정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인외의 존재는 둘 중 하나다. 텅 비었거나 욕구만을 좇거나.
 텅 빈 녀석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욕구를 좇는다 해도 용병질이나 하는 녀석들이 충성심이나 사랑을 추구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충격 받을 일인가?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귀족과 더 이상 한 마디도 섞기 싫다는 마음이 앞섰다. 얼른 계약금을 받고 떠야 한다.
 “기, 기다리게! 재계약! 재계약은 어떤가? 오늘 하루 저택에서 쉬게 해줄 테니 생각해주게!”
 귀족이 다급하게 외쳤다. 안타깝지만 당장 재계약은 어렵다. 계약 내용이 예상이 가서 그다지 끌리지 않는 것은 물론, 지금부터 다른 일을 하러 가야 한다. 용병 일은 아니고, 사실상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유 시간이 많았지만 지금 꽤 촉박해졌다.
 하지만 하루 정도 쉬는 걸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어딘가에서 한 번쯤 쉬어야 할 거 오늘 하루 쉬면 괜찮겠지 싶다. 재계약은 다시 생각해봐도 힘들겠다고 하면 되리라.
 “고맙네! 혹시 뭐 필요한 거라도 없는가? 뭐든 말만 하게! 아, 그리고 계약은…”
 “아버지, 데일이 아니라 저랑 할 얘기가 많으실 텐데요?”
 귀족은 고맙다고 했지만, 불안해하는 기색과 다급함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런 귀족을 붙잡은 건 소녀의 싸늘한 목소리였다. 저택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냉철한 모습이었다. 이제부터는 가족끼리의 얘기다. 자리를 떠도 상관없을 것이다.


 익숙한 복도를 지나 식당에 도착했다. 식탁과 의자는 모두 어디로 치웠는지 휑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이미 새까맣게 타버린 마술식만이 참상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한 중년 남성이 쓰러져있었다. 귀족 예복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그 옷은 피에 젖어있었고, 남자는 신음하며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남작!”
 그는 황급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쓰러져있는 남자가 바로 이 저택의 주인, 사일런스 남작이었다. 그의 부름에 귀족은 기침을 했다. 곧 가래가 끓는 듯이 탁한 목소리가 입 안에서 흘러나왔다.
 “데일…? 자네가 왜…?”
 “왜는 제가 더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뭐가 아쉬워서 사법회에까지 손을 뻗은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 에나의 말도… 끝까지 듣지 않았군….”
 소녀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귀족은 상처 부위를 부여잡고 기침했다. 귀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시험은… 여행이 끝난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내가 끝이지….”
 여행의 끝은 귀족, 정확히는 현재의 당주. 여행은 생존의 기술과 더불어 후계자를 지원해줄 확고한 동맹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경우에는 사법회와 손을 잡아 사람들을 희생시키려는 당주의 계획을 미연에 방지하고, 당주를 끌어내리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차기 당주는 그 악명 높은 사법회와 원만하게 갈등을 해결한다. 이 얼마나 무모한 계획인가.
 “그래서 내… 자네가 필요하다 한 것인데….”
 귀족은 상대가 그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마지막 계획에서 그는 이탈하고 말았다. 일개 귀족 가문이 홀로 사법회에 맞설 방법은 없다. 물론 생존의 대가인 사일런스에게 그의 이탈 상황을 가정한 차선책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인외의 존재 하나 없는 전력으로는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법사로 부활시키는 게 아니라 하수인으로 만드는 의식이었던 건가?”
 그와 달리 마술식을 살펴본 사내가 말을 꺼냈다. 귀족이 정말 사법회의 후원자였다면 하수인으로 만들 리가 없었다. 그들의 하수인이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보통 그들에게 맞선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의미로 죽어서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이 집안은 꽤나 야만적인 관습이 있다고 들었는데, 당신은 그나마 자식을 사랑했군.”
 “그러지 않은 조상님은 계시지 않는다….”
 귀족이 다시금 기침했다. 귀족은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이렇게 돌아올 거였으면… 왜 그때 내 말을 듣지 않은 건가…! 자네만… 너만 있었으면…!”
 “아뇨, 당신이 부족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싸늘하게 말했다. 다른 조직도 아니고 사법회를 가지고 놀 생각을 한 것부터 귀족은 자살을 택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가 사법회 소탕에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스릴 중독에 빠져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 꼴이다.
 그는 이런 우연 때문에 자기 탓을 하곤 했다. 거기에는 떠나간 자들이 그를 탓한 것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동안 그들이 그를 인간의 시선에서 바라보거나 텅 빈 도구로 여겨서 그랬을 뿐, 그가 자기 탓을 할 이유는 없었다.
 다행히 귀족은 말귀 알아듣는 게 빨랐다. 귀족은 그의 옷깃을 놔주었다. 귀족의 손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귀족이 모든 것을 포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에나는 잘못 없네…. 데일… 내, 부탁… 하나만 하겠네…. 에나를… 부디….”
 그러나 귀족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눈에서 생기를 잃고 말았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사내였다.
 “이 의식, 완성되지 못했어.”
 사내가 마술식을 가리켰다. 문 쪽의 술식은 이미 다 타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사내가 가리킨 반대편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하얀 뼛가루로 그려진 술식이 남아있었다.
 “그게 저들이 저렇게 버려진 이유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
 “… 대충 죽었다 살아나는 단계에서 그쳤다고 봐도 되는 건가?”
 “응.”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의식이 중간에 방해받았다는 사내의 추측이 옳은 셈이다. 귀족 이외에 의식을 방해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 아까 집안을 배회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 사람을 본 기억은 없다.
 그때 귀족의 손이 다시 꿈틀거렸다. 사내의 말대로라면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칼을 꺼냈다. 그리고 살짝 무리해서, 칼이 심장을 지나도록 귀족의 몸을 갈랐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손에 자국이 남았다. 이걸로 귀족의 몸은 다시 움직이지 않게 됐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찾으러 갈 거야?”
 “혼자 어디서 흐느적거리다가 문제 생기면 안 되잖냐. 갈 만한 데를 알아.”
 “그래, 난 여기 질서 좀 맞출 테니까 너도 끝내고 와.”
 그는 대답하지 않고 식당을 나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은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같은 높이에 매달려 있었다.


 저택에서 하루 쉬면서 딱히 할 건 없었다. 따로 할 일은 없었고, 이곳 사람들과 쓸데없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잠을 잘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캄캄한 밤이 되었다. 이대로 좀 더 버티다 이른 새벽에 귀족의 제안을 거절하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면 될 것이다.
 “데일.”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짧은 노크 후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는 척, 기척 없이 가만히 있어봤다.
 “안 자는 거 알아. 잠깐 나와서 얘기 좀 해.”
 하지만 상대는 1년 넘게 붙어 지낸 사람이었다. 편법은 통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는 아버지와 할 얘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쪽에 할 말이 많은 모습이었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에서 귀족에게서 본 두려움이 느껴졌다.
 “데일…. 혹시 아버지와 한 얘기 아직도 생각 중이야?”
 예상과 빗나가지 않았다. 소녀도 설득을 위해 찾아온 것이다. 이쯤 되면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사일런스 가는 명백히 계약자를 농락했고, 엄밀히 말하자면 계약을 위반했다. 다른 일거리가 있는 자를 자신의 사람으로 구속하려는 무례한 짓도 저질렀다. 더 할 얘기는 없었다.
 “그, 그렇지만 내 얘기라도 들어줘! 지금부터는 네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고. … 부탁할게.”
 또 이런 상황. 결국에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계약이 끝난 이상 더는 이들의 도구가 되어줄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이 도구는 이미 다른 곳에서 필요로 한다. 이런 식의 동정 사기는 경쟁에서 오히려 독이 된다. 다른 도구도 널려있으니 여기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새로운 걸 구하는 게 나을 것이다.
 “잠…! 데일!”
 역시 이곳에 머물기로 한 것은 실수였다. 문이 닫혔다. 딱히 챙길 짐은 없다. 꺼낸 게 없으니 그대로 들고 떠나면 된다.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소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방에서 나왔다.
 그때 뒤에서 무언가가 꽉 휘감겼다. 소녀가 뒤에서 온 힘을 다해 껴안은 것이다. 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한 힘은 아니지만, 어째선지 움직임이 뚝 멈췄다. 소녀는 그대로,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그러다가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 사랑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곁에 있어줘.”
 경멸감과 혐오감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소녀의 팔을 풀어버리고 뒤를 돌아봤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턱을 붙잡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해 표정을 확인했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어렵지 않았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소리를 내뱉은 양 불쾌감을 흘리고 있었다. 귀족이 간과한 게 있다. 아무리 오래 붙어 있는다 한들 인외의 존재가 그 대상에게 애정이나 충성심을 느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인간이라도 마찬가지다. 귀족은 감정이란 것을 너무 얕봤다. 많은 것이 변하고, 다양한 것이 나타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감정은 이성에 비해 천박한 가치였다. 깊게 고려할 필요 없는 가치였다. 오히려 인간보다 인외의 존재는 그것의 막강함과 무서움을 알기에 경계한다.
 이 지경까지 온 이상, 더 이곳에 남아봤자 소녀에게 고통이 될 뿐이다. 소녀의 얼굴을 놓고 허리 굽혀 사죄했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결례를 저질러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 아니면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비굴해져선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도망치듯이 저택을 벗어났다. 소녀의 마지막 모습은 기억나지 않았다. 소리 죽여 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을 뿐이다. 


 이곳에 온 건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는 길을 잊지 않았다. 그때와 같은 밤의 산길이었지만 숲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문제될 건 없었다. 중간에 산꼭대기로 향하는 길과 다른 방향으로 꺾었다. 그대로 쭉 나아갔다. 곧 수풀 하나 없이 탁 트인 절벽이 나타났다. 은하수가 수놓아진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절벽 끝에 앉아있는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 속의 모습보다 머리가 좀 길어졌고, 하얀 드레스 차림이 아니었다. 활동 시에 입는 옷이었는데, 좀 더러워져있었다. 역시 사법회와 맞선 건….
 “에나.”
 그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 박자 늦게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눈이 퀭한 게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특별한 외상은 없는데 말이다.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데일? 어째서…?”
 그는 대답하지 않고 소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찔하게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당신이야 말로 여기서 뭐하고 있던 겁니까? 당신을 쫓던 사법사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저 아래 쪽도… 제 동료가 정리해주고 있고요.”
 그의 물음에 소녀는 작게 웃었다. 그가 되물을 새도 없이 소녀가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라니, 더 이상해졌어. 차라리 아가씨라고 불러.”
 더 이상 계약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망 있는 귀족 가문도 아니다. 일부러 존칭 써가며 말할 필요는 없다.
 “… 이렇게 농담할 시간 없어, 에나.”
 그러니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었다. 소녀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내 친구님께서 이제야 편하게 말 걸어주네.”
 소녀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물어볼 게 많은 건 나야. 대체 데일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뿌리치고 떠났는데 하필 그가 쫓던 자들의 목표가 여기였다. 그의 탓이라고 한 귀족에게 그는 귀족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했다. 더 이상 자기 탓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자세한 사정이라도 들었더라면, 조금이라도 협상의 자세를 취했더라면…. 그런데 그는 귀족의 이기심에 이기심으로 대응하고 말았다. 이건 인정해야 했다. 그때 그는 감정적이었다.
 “얘기하기 힘들면 됐어. 우연이라고 생각할게.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정리했어?”
 그가 대답하기를 주저하자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바꿨다. 그가 달리 행동했다면 이 상황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단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소녀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도 거기에 따랐다.
 “모두 질서를 맞춰줬지.”
 질서를 맞춘다,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사법으로 되살아난 자들을 잠재울 때 쓰는 그들만의 언어다. 하지만 문외한도 사법을 겪어봤다면 한 번 듣고 무리 없이 이해 가능한 말이기도 하다. 소녀도 그 의미를 되묻지 않았다. 단지 갑작스럽게 그에게 몸을 기댈 뿐이었다.
 “에나?”
 “신경 쓰지 마….”
 그는 놀라 소녀를 돌아봤다. 소녀의 안색은 나빴다. 거칠게 숨을 내뱉으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데일, 그럼 나도… 그렇게 할 거야?”
 처음부터 짐작은 했지만 소녀의 몸 상태는 좋지 않다. 독에 중독됐거나, 저주를 받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둘 다 사법사들이 애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특별한 외상이 없는 소녀에게서 추측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소녀가 말한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저주 쪽인 듯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해주 방법은 시전자를 처단하거나 되살아난 자를 잠재우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살해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시전자를 찾아내 처단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손으로 고통을 끊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 네 질서를 맞춰주는 건 누굴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속삭이는 정도로 작아졌지만, 그가 알아듣는 데는 문제없었다. 질서, 자연을 벗어난 것은 사법에 의해 되살아난 자들만이 아니었다. 그와 저 아래에 있는 사내도 따지고 보면 질서를 벗어난 자들이었다.
 “글쎄.”
 그런데 누구는 질서를 맞추고 누구는 당하다니, 이건 차별인가?
 “데일.”
 소녀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말해.”
 “똑같이 질서에서 벗어난 처지인데… 같이 자살할래?”
 똑같지는 않다. 소녀는 의지 없이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이가 될 것이고, 그는 여전히 자아와 주체가 남아있다. 여기서 떨어져도 그는 살 것이고, 소녀는 온 몸이 산산이 부서져 죽을 것이다. 차별을 넘어서서 부조리하다. 부조리하다는 말 외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미안. 난 죽기 위해 살진 않아서.”
 하지만 그 부조리를 재차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약자들에게 보상해줄 의무도 없다. 그도 원해서 이런 존재가 된 건 아니기에.
 “농담이야. 데일도 참.”
 소녀의 숨결이 더 약해졌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죽는 게 두렵지 않은 걸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소녀는 이곳, 절벽 끝에 걸터앉아 의식을 잃었을 때 떨어지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고 후환도 남기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곁에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 마음은 그대로일까? 곧 소녀가 그의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 정말 그 방법 밖에 없어?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야?”
 그런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는 달리 없었다.
 “같이 뛰어내려 줄 순 있어.”
 그 말에 소녀는 천천히 그의 옷깃을 놨다. 소녀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눈물 맺힌 소녀의 눈과 마주쳤다. 소녀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정말… 지독해….”


 “정리하라니까 퍼질러 잤냐?”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사내가 이마를 쿡 찔렀을 때였다. 눈을 뜨자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 높이 뻗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절벽 밑은 이끼가 드문드문 낀 돌바닥이었다. 그가 쓰러져 있던 곳에는 피가 튀어있었다.
 그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도 마찬가지로 피가 튀어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시체는 남아있지 않았다. 실패한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사내는 그가 소녀를 찾고 있단 걸 눈치 채고 말을 이었다.
 “그 여잔 내가 마저 정리했어.”
 사내가 그에게 그의 칼을 던져줬다. 그는 재빠르게 칼을 받았다. 몸이 산산조각 났다가 다시 맞춰진 것일 텐데도 그는 통증 하나 느끼지 않았고, 반사 신경도 그대로였다.
 “어떻게 뛰어내리면서 등에 칼을 박을 생각을 하냐? 너란 놈은 진짜.”
 칼을 돌려준 사내가 불쾌함을 털어내려는 듯 손을 털었다. 그는 칼날을 닦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 했을 뿐이야.”
 그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제 이곳에서의 볼 일은 끝났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옷을 최대한 정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내 곁을 지나칠 때 사내도 빙글 몸을 돌려 그와 발을 맞췄다.
 “그래도 사법회랑 충돌하는 일은 없어서 쉽게 끝났어, 그치?”
 “그래도 역시 다신 하기 싫은 일이야.”
 “흐응, 그래?”
 사법사 한 명과 싸운 건 잊어버린 듯 사내는 가볍게 말했다. 말단 한 명 쯤은 지나가던 사슴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걸까?
 “그럼 잠깐 쉬다 올래? 마침 우리 형이 고용인 하날 찾고 있는데……”
 숲길을 지나며 그는 사내의 목소리에서 숲의 소리로 관심을 옮겼다. 새 소리, 벌레 소리, 나무와 꽃이 흔들리는 소리가 대신 귀를 채웠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이제 여기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돌아온다고 해도 적어도 백 년은 지난 뒤에 올 것이다. 그때 이 숲이, 생명이 꺼진 저택과 마을이 남아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쯤 되면 잠깐 스쳐갔던 장소 정도의 가치만이 남으리라.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에게는 이런 일이 흔했다.

유창원 yoochang777@naver.com 010-2795-2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