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한 때
1
꼬마 한 명이 들어오면 꼬마 한 명이 나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케일럽은 이마에서 땀을 훔쳤다. 방 한 켠 낡은 나무 책상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음악 이론서며 풀어야 할 화성학 문제들이 쌓여있었다. 오늘, 그러니까 수요일 자정까지 다 풀어서 스캔해서 학교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야 하지만 케일럽은 과제 따위 엿 바꿔먹은지 오래였다.
“박자와 리듬 세는 문제 꼭 풀어와. 연습도 해 오고.” 책상에 쌓여있는게 본인 숙제라는 걸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케일럽은 웃으면서 아이들을 대했다. 무리해서 굳이 동네 아이들에게 (정확히는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돈을 받으며 피아노를 가르치는 이유는, 돈이 충분히 모이면 디아즈 양반이 서류 조작으로 집어넣은 음대를 때려치우고 자신의 돈으로 학교를 다닐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음악 말고 니가 할게 뭐가 있냐는 디아즈의 일침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꼬불꼬불하고 검은 머리가 삐죽 보였다. 늦둥이 여동생, 알렉스였다. 정확히는 알렉산드라지만, 모두가 편의를 위해 알렉스라고 불렀다. 본인도 짧은 걸 더 선호했다. 알렉산드라는 너무 거추장스럽다고.
“미. 미라고. 네 오른손에. 지금 백번째잖아.” 케일럽이 말했다. 알렉스는 소심하게 괘종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5개월이나 되었어. 이미 많이 바꿔준 것 같은데.” 케일럽은 본인이 직접 건반을 두들겼다. 그는 여동생의 머리를 때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행동을 하는 본인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눈을 비비는 동안 뱃 속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가족을 가르치는 것이리라. 방을 둘러보며 모차르트를 조금이라도 상기시키는 것은 다 버려버릴지 생각했다. 악보, CD, 잡지,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4월 12일 토요일에 크고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달력에 눈이 멈췄다. 날짜 위에는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모차르트의 초상화가 있었다.
“3일만 더 있으면 돼, 임마. 대회 까지 그 정도 밖에 안 남았어. 엄마가 들으러 오실거야. 열심히 한 거 나도 알아. 그러니까 서로 쉽게 가보자. 25 페이지.” 케일럽은 한 장을 뒤로 넘겼고, 알렉스가 멈추고 의자 뒤로 기댈때까지 똑같은 멜로디를 쳤다. 케일럽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렉스는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노래가 예전보다 좋게 들리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괘종시계가 밤 9시를 가리켰다.
“피아노 배운거 후회한 적 있어?” 알렉스가 물었다. “아니.” 창문 밖 어둠을 주시하면서 케일럽이 말했다.
“난 후회해. 이거 구려. 나 대회 더 이상 나가기 싫어.” 이제 말해주냐, 속으로 케일럽이 중얼거렸다. “오빠가 나 가르치는거 싫으면 엄마한테 말해봐. 다른 사람 시킬 수 있잖아.” 알렉스가 말했다.
“디아즈 씨 알잖아. 그 유명한 밀라 스티븐슨이 다른 사람을 쓰면 좋아하지 않을거야. 엄마도 그럴거고.”
“엄마한테 정말 그런지 물어본 적 없잖아.”
“물어보고 싶어?”
“오빠는?”
두 사람 다 대답을 피했다.
“네가 물어보고 싶으면 해. 내가 대신 안 해줄거야.” 케일럽은 음악실을 나갔다. 불을 키지 않은 어두운 부엌에 앉아서 볼만한 영화를 아이폰으로 검색했다.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머리를 식혀줄 드라이브 나갈 구실을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차 열쇠를 가지러 방에 올라갔다가 부엌으로 돌아왔을때, 현관문이 열리고 자주색 정장을 입은 여성이 곧장 음악실로 갔다. 그녀는 그녀의 자식들과 인사도 하지 않고 피아노를 열고 폭풍같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곧 세계 투어를 떠날 본인 작사, 작곡의 뮤지컬, [병 뒤에 숨어서] 를 여는 노래였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건반 위 아래로 날아다녔다. 케일럽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알렉스 곁으로 가서 여성을 턱으로 가리켰다. 알렉스는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여성은 아직도 피아노에 있었다. 머리는 흔들리고, 다리와 몸통은 건반을 누를때마다 힘을 전달하고 있었고, 모든 음표에 맞춰서 선율과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지금은 못해. 다 하시면 할게.” 알렉스가 말했다.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케일럽은 알았다. 어머니가, 밀라가 음악에 빠지면 다른 무엇도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번은 케일럽이 세 시간쯤 되는 강의를 들으러 갔다. 가기 전에 엄마를 확인해보니 그 날 저녁 동네 요양원에서 연주할 곡들을 연습하고 있었다. 강의 중반 쯤 지진이 동네를 강타했다. 큰 재해는 아니었지만 찬장에서 비싼 자기 그릇들이 쏟아져나왔고, 부엌 전등은 떨어졌으며, 천장과 벽에 금이 가 있었다. 케일럽은 학교에서 지진을 겪었다. 집에 왔을때, 밀라는 얼굴에 피 한 줄기가 흐르는 채 그대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케일럽은 그녀를 흔들어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지만, 귀 바로 옆에서 확성기로 소리를 질러도 통하지 않았으리라.
나가기 전에 동생에게 저녁을 준비해주려고 가스레인지를 켰지만, 알렉스는 냉장고에서 남은 스파게티를 꺼냈다.
“가서 드라이브 해.” 알렉스가 말했다.
케일럽은 터덜터덜 차고로 갔다. 고등학생때 처음 산 파란색 포드 퓨전 하이브리드였다. 승차감과 디자인은 다 제치고 오직 연비 효율 하나만 보고 산 차였다. 안에서 엔진을 틀기 전에 케일럽은 자기 집을 한번 보았다. 순간 집을 팔아버리면 어떻게 될 까 생각해보았으나, 만약 팔게 되었을때 다른 곳에서 산 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2
극장 안에 서서 포스터들을 보았다. 새로 나온 경찰 영화와 70년대 코미디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한 남자가 어깨를 건드렸다. 뒤돌아보니 10년 전 부터 케일럽의 가족에 대한 기사를 매 달 연재하는 조나스라는 기자가 있었다.
“여어, 케일럽!” 그가 크게 미소지었다. 왁스를 발라 넘긴 짧은 금발은 오늘도 빛나고 있었다. 얇은 입술 사이로 상아같은 치아가 보였다. 같이 미소짓고 싶었지만 얼굴 근육이 돌같이 느껴졌다. 간식 코너로 종종걸음을 친 뒤 뭘 먹을지 고민하느라 바쁜 척 했다.
“동생 대회 준비는 어떻게 되가?”
“잘 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한 뒤 점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 . . 음 . . . 팝콘 주실래요? 버터맛로 주세요. 잠깐, 죄송한데, 카라멜로 주실래요? 고맙습니다.”
“너희들 스티븐슨 씨의 월드 투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예, 뭐, 좋아요, 어, 치즈 나초에 살사 소스도 주실래요?”
“야, 배고프구나. 왜 알렉스 안 데려왔어?”
“몸이 안 좋아서요. 콜라 큰것도 하나 주세요.”
“좀 빨리 해요!”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케일럽은 뒤돌아보았다. 짜증내는 손님들로 가득한 긴 줄이 생기고 있었다. 돈을 지불한 뒤 거스름돈은 가지라고 했다. 음식을 팔 한가득 들고 있어서 콜라를 쏟을 뻔 했다. 70년대 코미디 표를 사는 동안 치즈 소스가 셔츠에 조금 묻었다. 조나스는 아직도 따라왔다.
“조나스, 미안한데요, 나 이거 진짜 보고 싶었어요. 나중에 전화주시면 그 때 얘기해요.”
케일럽은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들어갔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나초와 팝콘을 게걸스럽게 먹었고 영화가 30분 쯤 되었을때 콜라도 다 마셨다. 얼마 안 되어서 뱃 속의 작은 꾸르륵거림은 불꽃놀이 같이 큰 폭발로 팡팡 터졌고, 그는 극장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쓰레기는 처박아 버린 후 집에 서둘러 돌아갔다. 어떻게 운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길 위에서 역류를 삼켰다. 그의 몸이 불량식품을 내려보냈다고 복수를 하고 있었고, 그는 후회를 허벌나게 했다. 화장실로 달려가며 차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 식도로 다시 모든 것을 되돌려보내라고 위장들에게 빌었지만 뇌 속의 해방 신호는 꽉 막혀있었고 쉽게 오지 않았다. 그는 변기 위에 머리를 숙이고 끙끙거렸다.
더 이상 그 고문을 견딜 수 없었을때,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검지 손가락을 세워서 입 뒷부분에 갖다대었다. 효과가 있었다. 그의 배는 그의 용기에 감사했고, 근육들은 마지막 음식 한 방울까지 짜내었다. 케일럽이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장기들이 다 해주었다. 첫 짜냄이 끝나자마자 둘째 짜냄이 올라왔다.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구면서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머리는 아직 지끈지끈 아팠고 걸을때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알렉스의 방으로 갔다. 방의 불이 켜진 상태에서, 아이는 손에 초록 색연필을 쥐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얼굴 밑에는 그림이 그려진 복사용 종이가 있었다. 손에서 색연필을 빼내고 아이를 다독여 침대에 눕게 한 뒤 책상으로 돌아와서 그림을 보았다.
사람이나 동물은 없었고, 북슬북슬하고 긴 털을 가진 온순한 괴물이 종이의 오른쪽에 우뚝 서 있었다. 괴물은 기다란 팔을 종이의 가장자리에 뻗어서 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자그마한 연두색 덤불 다섯개를 감싸고 있었다.
그림을 내려놓고 안방으로 가보니 밀라가 침대에서 코를 골고 자고 있었다. 좀 전 처럼 옷도 다 입고 화장까지 한 채로였다. 케일럽은 그녀를 흔들었다. “엄마, 적어도 세수는 해요.” 밀라는 그의 손을 쳐내고 엉덩이를 긁었다. 케일럽은 화장 지우는 휴지를 가져와서 밀라의 얼굴을 닦았다. 그는 이상한 데자뷰를 느꼈다. 이미 베개에 빨간 립스틱이 조금 묻혀져 있었지만 그거는 신경쓰기 싫었다. 그는 봉제 인형같이 방으로 걸어갔다. 봉제인형들이 걸을 수 있다면 말이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보고 있던 중 한 새로운 기사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제목은 이랬다. “속보: 어머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려받은 케일럽 스티븐슨.” 조나스가 케일럽이 어떻게 극장에서 본인과 제대로 대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쓴 것이다. 셔츠에 묻은 치즈 소스까지 빼먹지 않고서. 케일럽과 알렉스가 학용품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가서는 조나스를 만났을때, 그는 두 사람이 날카롭게 울며 영역 다툼하는 길고양이들 같다고 묘사했다.
화면에 디아즈의 이름이 떴다. 디아즈는 밀라가 8살이었을때부터 매니저 일을 해왔다. 밀라가 케일럽의 일곱번째 생일 파티를 열었을때, 디아즈는 구석에서 그녀를 관찰했다. 나중에 케일럽의 친구들이 디아즈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물어보았고, 케일럽은 그냥 친구라고 답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친구가 그렇게 으스스해?” 같이 농구 하는 친구가 말했다. 케일럽은 반박할 수 없었다.
디아즈의 전화를 받을까 고민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자 이런 내용의 문자가 왔다. [꼬마야, 지금 힘든거 아는데, 기자들이 들이대면 좀 잘 해주라. 그리고 나 대신 조나스한테 전화해서 기사 내리라고 말해줄 수 있어?]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고 케일럽은 코웃음쳤다. 얼굴에 팔을 대고 그의 핏줄들이 그만 좀 지끈거리길 빌었다.
3
케일럽은 방과 후 알렉스를 차에 태웠을때 평소와 다를 것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녀가 눈은 쳐지고, 어깨는 힘이 없이 레슨실로 들어왔을때, 케일럽도 더 이상 하기가 싫었다. 그는 알렉스가 그를 쳐다보지 않는 다는걸 눈치챘다. 언제부터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았다. 쳐다본 적이 있기는 하던가?
“자, 빨리 해치워버리자.” 페이지를 넘기며 케일럽이 말했다. 알렉스는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 열 개 전체를 눌렀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케일럽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줘.” 침묵이 따랐다. “누가 괴롭혔어? 욕 했어? 선생님들하고 무슨 일 있었어?” 케일럽은 의자를 가져와서 알렉스 옆에 앉았다. “하루종일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대답해.” 알렉스는 그렇게 했다. 괘종시계가 오후 6시를 쳤고, 케일럽은 기다렸다. 시계의 울림이 멈췄을때, 알렉스와 케일럽의 배에서 동시에 꾸르륵거림이 나왔다. 케일럽은 치아 사이로 작은 킬킬거림이 새어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부엌에 불을 키러 와보니 지는 해로 인해 생긴 그림자들로 채워져있었다. 알렉스는 여전히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만두고 싶다고 엄마한테 말했어? 저녁으로 적당한게 있는지 냉장고를 보며 케일럽이 말했다. 알렉스가 뭔가 말하는게 들렸다.
“뭐?” 양파를 썰며 말했다. 알렉스가 다시 뭔가가 말했다.
“뭐라고? 안 들려.”
“밤 늦게까지 연습하셨어. 난 졸렸고.”
알렉스는 피아노 방에서 나와서 자기 방문을 쾅 닫았다. 케일럽은 저녁식사를 쟁반에 가져다 줄 때 말고는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4
케일럽은 다음 날 아침에 알렉스의 담임 선생인 허드슨이 방과 후 오라고 부탁하러 전화 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 학교 주차장에 가득 찬 다른 아이들과 자동차들의 무리를 헤쳐나가면서 허드슨이 문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약간 긴 갈색 머리와 짙은 초록색 셔츠를 입은 선생이었다. 둘은 악수를 했다. 케일럽은 선생과 악수를 하는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허드슨을 통해 교장실로 안내를 받으면서 그가 다리를 떨고 손톱을 뜯는 것을 보았다. 케일럽은 그의 긴장에 전염되어서 자신의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교장실에는 갈색 책상 앞에 안락의자 두 개가 있었다. 케일럽과 허드슨은 각각 하나씩 앉았다.
“알렉스는 최근 들어서, 말하자면 충동적인 행동을 보여왔습니다. 경고를 아무리 줘도 알아듣지를 못 하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해보고 싶냐고 물어봤지만 싫다고만 해요. 그래서 당신에게 알리기로 했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학부모님 중 한 분께서 시간 되시나요?”
케일럽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아빠는 5년전에 집을 나가실때 통화를 그만 두셨고, 엄마는 현재 매니저 이외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알렉스가 보인 행동엔 뭐가 있나요?” 케일럽이 물었다.
“수업이나 학업에 집중을 안 하는건 걱정거리도 아닙니다. 한 번은 짧은 역할극을 통해 서로를 배려하는 걸 연습했습니다. 알렉스의 차례가 왔을때, 제가 연기하는 못된 아이에게 공책을 돌려달라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구리다, 닥쳐라, 제기랄 보다도 더 심한 비속어를 몇개 썼 었어요. 제가 알렉스에게 공책을 돌려받을 친절한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권유했더니, 제 다리를 발로 걷어 차고 학우에게 지우개를 던졌습니다. 저에게도, 친구에게도 절대 사과하지 않았어요.”
케일럽은 문이 열리는 걸 들었다. 알렉스가 들어왔다. 허드슨을 보고, 아니, 노려보고 있었다.
“오빠는 더이상 들을 필요 없어요.”
“알렉스, 난 들어야 할 것 같아. 나중에 화 안 낼테니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어.” 케일럽은 양해를 구한 뒤 그녀를 교장실 밖으로 이끌었다. 알렉스는 뿌리친 뒤 복도를 달려갔다.
“차 옆에서 기다려!” 케일럽이 소리쳤다. 한숨을 쉰 뒤 교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뭔가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그가 다시 앉으며 물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걸 권하고 싶습니다.” 허드슨이 말했다. “아이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 요소들도 줄여야 합니다. 제가 따로 아이에게 말을 해볼테니 케일럽 군도 그래줄 수 있나요?”
케일럽은 그러겠다고 하고, 허드슨 선생과 교장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주차장으로 갔다. 알렉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알렉스에게 전화해보았다. 착신은 갔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케일럽은 집에 돌아가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다행스럽게도 알렉스는 시내 도보에 있었다. 케일럽은 알렉스 옆에 차를 몰고 갔고 앞자리 승객석 창문을 열었다.
“타고 가실래요, 아가씨?” 알렉스는 그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케일럽은 속도를 내지 않고 도보 옆에서 그녀를 따라갔다. 뒤에서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렸다. “알렉스, 나 계속 여기 있을 수 없어. 집에 걸어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 차 타고 싶으면 지금 타.” 알렉스는 계속 걸어갔다. 케일럽은 창문을 올리고 페달을 밟았다. 그는 머리를 긁고 운전대를 손바닥으로 몇 대 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라고?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줄여보자고?
핸드폰이 울렸다. 받아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울림이 멈추더니 다시 시작했다. 화면을 보았다. 디아즈라고 써있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저 운전 중 이예요, 말 길게 못 합니다.”
“꼬마야, 안타깝지만 스티븐슨 선생은 내년 말 까지 집에 못 온다.”
“왜요? 뭐가 바뀌었는데요? 금방 끝나야되잖아요.”
“선생이 9개 국에서 추가로 투어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건 잘 됐는데요, 말씀드릴게 있어요. 알렉스의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어요.”
“지금? 그렇다 하더라도 선생껜 알릴 수 없어. 20년의 공백 후의 월드 투어란말야.”
“중요한 거 아는데요, 알렉스가 지금 너무 큰 - 됐어요, 알렉스가 나중에 직접 엄마랑 대화하면 안될까요?”
“시간 없으신거 알잖아, 꼬마야.”
“아는데요, 1분도 안 걸릴거예요. 엄마께 알렉스가 대회 안 나가고 싶어한다고 말해줄 수 있나요?”
“잘 모르겠다.”
“왜 그런데요?” 바로 그 순간, 케일럽은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했다. 도보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걸 확신했지만, 지프 한 대가 케일럽의 차를 들이받았고 왼쪽 범퍼를 찌그러트렸다. 에어 백이 부풀어올랐다. 케일럽은 기를 쓰고 나갔다.
“디아즈 씨, 나중에 전화해요. 잠시만 알렉스랑 엄마랑 연결시켜주시겠어요? 애가 도움이 필요해요. 자식이 엄마에게 한번이라도 대화 좀 하게 해줘요, 네?”
“니네 엄마는 나 말고는 아무하고도 대화 할 줄 몰라. 알았어?” 한 경찰관이 상대 운전자와 함께 케일럽에게 왔다.
“통화 끊어주시겠어요?”
“왜 - 이게 어떻게 말이 되요?” 핸드폰에 대고 소리쳤다. “이게 어떻게 말이 되냐고? 니 조부모님한테 물어봐라. 난 내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디아즈가 끊었다.
“블랙박스 기록을 확인해봐야 하니 협조 부탁드려요.” 케일럽은 경찰관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견인차가 지프와 케일럽의 차를 끌고 가는 동안, 모든 작은 소리 하나 조차 케일럽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알렉스가 나무에 기대어서 그의 쪽을 보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 기록 갱신을 위해 3번가에 있는 경찰서에서 보고하세요. 알겠죠?” 경찰관이 차를 몰고 가며 말했다. 지프 운전자는 자기 볼일 보러 떠났다. 케일럽은 알렉스에게로 갔다.
“미안해.” 알렉스가 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조그맣게 말했다.
“니가 왜 미안해? 전화 통화 한 바보는 난데.”
“누구랑 이야기했어?”
“디아즈 씨.”
“뭐라고 했어?”
“내년 말까지 엄마 안 돌아온 대. 스케줄이 바뀌었다고.”
“놀랍지도 않네.”
“그러게.”
해가 완전히 졌다. 저녁 바람은 쌀쌀했고, 두 사람 다 덜덜 떨었다. 케일럽은 외투를 차 안에 두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었다. 택시 안에서 알렉스가 팔을 건드렸다.
“내일 어떻게 하지?”
“내일?”
“내가 제대로 칠 리가 없어.”
“있잖아, 이제 와서 바뀔 건 없어. 그러니까 내일 할 수 있는 걸 해. 뭘 쳐야 할지 기억이 안 나면 그냥 지어내서 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를거야.”
“심사위원들은 알거야.”
“상 탈 자신 없으면 차라리 마음대로 쳐봐. 그 다음엔 이 피아노 소동을 다 끝내버리자.” 알렉스가 미소지었다.
케일럽은 알렉스를 평소보다 일찍 재웠다. 핸드폰 이메일 함에 뭔가가 왔다. 첨부파일에 조나스가 쓴 기사가 있었는데, 곤란해하는 케일럽과 찌그러진 차 범퍼의 사진이 있었다. 메일은 디아즈에게서부터 왔고, 이렇게 적혀있었다. [대체 이게 뭐야?] 케일럽은 이렇게 대답했다. [깜짝 놀랐죠?] 소파에 핸드폰을 던져 놓고 방으로 갔다. 핸드폰은 밤새 울렸다. 아무도 와서 받지 않았다.
5
케일럽이 알렉스와 함께 무대 뒷편의 대기실로 갔을때, 모든 참가자들은 각자의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를 가지고 미리 연습하고 있었다. 각 방에서 음계들이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면서 서로와 부딫혔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정장을 고치고 있었고 참가자들은 그들의 악기를 세밀하게 완벽하도록 조율했다.
“엄마가 여기 왔으면 좋겠어?” 케일럽이 물었다.
“아니.”
“왜?”
“나 망치는 거 안 봐도 돼.”
“망치는게 아니잖아.”
“가끔 난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몰랐으면 좋겠어. 그러면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를 안 하잖아.”
“야, 거기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냐?”
“할 필요 없어.”
할 말이 없어진 케일럽은 알렉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커피를 사러 갔다. 시 회관의 로비에 돌아온 케일럽은 누군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뺀질거리는 눈, 두피에 딱 달라붙게 전부 빗어넘긴 금발, 그리고 보이는 모든 것을 적고 있는 공책. 조나스였다. 케일럽은 인파를 헤치고 기자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여, 케일럽! 들뜨지 않아?” 조나스가 말했다.
“또 우리에 대해서 쓰는 거예요?”
“그래, 너희 들 덕분에 내가 내 자리에 있는 거야.”
“밖에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래, 뭐.”
두 사람은 작은 덤불이 둥그렇게 심어져있고 분수 위에 하프를 연주하는 여인의 석상이 있는 곳에 갔다.
“조나스, 기삿거리가 별로 없는건 알겠는데요, 계속 이런 식으로 저희에 대해서 쓰시면 안 돼요.”
“디아즈가 무서운 거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나 -”
“그 사람 때문에도 아니고, 엄마 때문에도 아니고, 저 때문에도 아니예요. 알렉스 때문이예요. 한 아이와 그 미래를 좀 생각해주세요.”
조나스는 펜촉을 돌리고 끝부분을 물었다. 케일럽은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렸다. 대회가 곧 시작한다는 안내가 울렸다.
“내게 돌아오는 건 뭔데?”
“장문의 특집 기사를 쓸 수 있게 저랑 알렉스를 인터뷰 하게 해드릴게요. 아마도 역사에 남을 사람의 자식들로 사는게 어떤 건지 말할게요. 그 다음에는 저흴 내버려두세요.”
조나스는 편집자의 허락을 받아도 되냐고 물었다. 케일럽은 빨리 하라고 했다.
“알렉스가 치는거 보고 기사 써도 되냐?”
“그걸 저희에 대한 장문 기사에 포함시키세요.”
“알았네요, 큰 오빠 씨.”
“그렇게 부르지 마요.”
“사실이잖아.”
케일럽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조나스에게 뿌릴 것 같은 행동을 취했다. 조나스는 뒤로 움찔했다. 회관으로 돌아가면서 둘은 서로에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걸으면서 케일럽은 모두가 디아즈의 의사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디아즈 양반을 생각하니, 디아즈가 어제 언급했던 조부모님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디아즈가 단순히 매니저라기에는 의사 결정권이 너무 큰 것, 그의 뒷배경에 대해선 아는게 없다는 것, 어떻게 일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것. 밀라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따르는 것일까? 다음 할 것이 생각났다. 핸드폰에 저장해놓은 조지나 할머니의 요양원 번호를 찾아서 걸었다.
6
대회 후에, 케일럽은 조나스가 전화해서 편집자가 허락했다고 말해줬을때 피부에 소름이 돋는게 느껴졌다. 이걸 알렉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저녁 식사 후 알렉스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케일럽은 그녀 옆에 앉아서 깍지를 끼었다.
“무슨 일이야?” 화면에 눈을 고정 시킨 채 알렉스가 말했다.
“조나스 기억나?”
“우리 따라다니는 그 남자?”
“그래. 우리에 대해서 쓰고 싶대.”
“이미 하고 있잖아.”
“아니, 이번엔 제대로. 우리가 엄마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대.”
“그러면 디아즈 씨랑 엄마는 괜찮을까?”
“알렉스, 그런거 신경쓰는게 지겹지 않아? 이 기사가 엄마, 그리고 아빠에게도 닿게 되면, 우리가 사는게 좀 더 . . . 좀 더 . . . “
“견딜만 할까?”
“그래. 혹시 그것보다도 더 나아질지 누가 알아.”
“해보자.”
“좋아.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어. 요양원에 계신 조지나 할머니에게 가서 엄마와 디아즈씨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아내는 거야. 궁금한게 있으면 질문을 생각해봐.”
케일럽은 알렉스와 주먹을 부딪혔다. 다음 날 까지 둘은 둘의 오랜 전통인 침묵을 지켰다.
“우리 아기 돼지들, 이 할미를 드디어 찾아와 주었구나!” 보라색 니트 조끼와 갈 색 치마를 차려입고, 손에는 뜨개질거리를 들고 계셨다. 조지나 할머니는 한 명씩 꽉 껴안고 축축한 뽀뽀를 해주었다. 두 손주들은 애써 썩은 계란을 씹은 표정을 감추었다. 집의 음악실을 뒤져서 나온 오래 된 앨범을 꺼내었다. 가족의 추억을 더듬어보자는 일종의 미끼였다. 펼쳐보니 밀라의 첫 생일 파티, 첫 연주회, 유치원 졸업,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등등 거의 밀라의 사진 밖에는 없었다. 몸이 자란 탓도 있겠지만, 조지나 할머니는 대회나 연주를 나갈때마다 맞춤 드레스를 만들어 입혔다고 했다. 체크무늬 드레스, 반짝이 드레스, 사랑스러운 고딕 풍의 드레스까지.
“할머니 사진은 어딨어요?” 알렉스가 물었다. “이 쭈글쭈글한 할미 사진은 봐서 뭐하게? 이렇게 이쁘고 자랑스러운 네 엄마 사진 있으면 됐지.” 손주들이 멋쩍은 눈빛을 교환하던 안 하던 조지나는 딸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버지 여의고 밀라는 음악에 미쳐서 지냈다. 말 그대로, 학교 다녀오면 밖에 나가지 않고, 그 어떤 친구도 사귀지 않고 음악을 만들며 지냈다. 그런 밀라가 안쓰러워서 조지나는 병원에서 밤 늦게까지 일해가며 최고의 음악 선생님들을 수소문해서 붙여주고, 좀 멀리 나가야 할 때는 개인 기사까지 고용해서 집과 레슨 장소를 오갔다. 조지나가 의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진들은 어느새 밀라가 십대 초반으로 보일 즈음, 드문 드문 디아즈와 함께 찍은 것도 섞여있었다. 디아즈는 한결같이 밀라 뒤에 서서 그녀 오른쪽 어깨에 손을 하나 올리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그야말로 복덩이야. 나는 내 일 해야 되고, 매일같이 딸아이와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괴로웠단다. 그래서 매니저 구한다고 매니저 커뮤니티에 모집 공고를 올렸지. 어느날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어떤 사람이 다짜고짜 내 진료실로 와서는, 밀라를 최고의 음악가로 성공하게 해줄테니 자신의 과거와 배경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거야.”
“더 수상해요.” 알렉스가 말했다.
“나도 처음엔 그랬지. 그때 이후로 밀라가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그 사람과 떨어진 적이 없었어. 다행인건, 밀라가 우울해보이기는 커녕 자신의 재능이 꽃 피는 것을 느끼자 점점 얼굴이 밝아졌어. 발표하는 작품마다 상을 휩쓸고. 그러니 네 아빠랑 결혼한 뒤 네 엄마가 디아즈랑 같이 살려고 하자 네 아빠는 기가 막혀서 설득 끝에 차로 30분 이상 떨어진 집에서 살라고 했지.” 조지나는 꽃으로 수놓인 웨딩 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으며 남편 버트와 같이 찍은 밀라의 결혼 사진을 쓰다듬었다. “말도 안 하고 내성적인 애가 결혼도 하고 손주들도 보게 해주어서 이 할미는 여한이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성공한 네 엄마가 행복해 보이지 않니?” 케일럽은 반박을 하려다가, 20년 동안 큰 활동이 없을때 밀라가 부엌에서 술을 몇 병이나 비우는 바람에 알코올 중독 치료까지 받았던 적이 생각났다. 작년에 자신이 만든 뮤지컬이 히트를 치자 케일럽은 엄마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할머니에게 다시금 축축한 입맞춤으로 작별 인사를 받으며, 케일럽과 알렉스는 마음에 복잡한 소용돌이가 치는 것을 느꼈다.
7
일부러 사람이 없을 월요일 아침의 ‘조 아저씨네 식당’을 고른건 잘 한 일이었다. 알렉스는 조나스의 질문에 대답할 때 몇 번이고 몸을 꼬면서 불편해했다.
“어렸을때 엄마에 대한 기억은 어때?” 조나스가 물었다.
“음 . . .어 . . .” 알렉스는 눈을 찡그리고 배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놀아달라고 해도 같이 안 놀아주시고, 매일 늦게 들어오시고, 절 봐주신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알렉스는 빠르게 대답을 뱉어낸 뒤 양 팔을 쓸어내렸다.
케일럽은 아직 어린 아이에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한 게 아닌가 하고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부정적인 마음을 쌓아둘 경우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빠의 골프채를 들고 와인, 위스키, 보드카와 상관없이 엄마의 모든 술병을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깨버린 자신같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16살때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엄마를 태워 알코올 중독 재활 훈련소에 떠밀듯 넣어버리고는 집에 돌아오면서 흘린 뜨거운 눈물이 아직도 얼굴에 남아있는 듯 했다. 아빠는 그 날 이후로 시내로 이사 가신 뒤 전화도, 방문도 하지 않으셨다.
담담하게 그 날 일을 풀어놓은 뒤, 케일럽은 알렉스와 자신을 위해 코코아를 두 잔 시켰다. 조나스는 본인의 카페 라떼를 휘저으며 다음 질문을 했다. “만약 이 기사를 통해 엄마, 아빠께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각자 해주었으면 해.”
“우리 같이 모여서 디즈니랜드도 가고, 요리도 하고, 예전에 했던 것 같이 책도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알렉스는 말한 뒤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어때?” 조나스는 펜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케일럽은 숨을 한번 크게 쉬었다.
“절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우릴 괴롭게 했던 모든 것을 함께 내려놓았으면 좋겠어요. 우린 할 수 있어요.”
모든 인터뷰가 끝난 뒤 배가 고파진 세 사람은 칠리 치즈 버거, 닭고기 시저 샐러드, 스파게티 볼로네즈와 미트볼을 시킨 뒤 말도 안 하고 허겁지겁 먹었다.
“아, 기사에 이걸 추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물우물 버거 패티를 씹으며 케일럽이 말했다. “아빠가 다시 이사 오실 수 있게 음악실을 원래의 침실로 바꿀거예요. 그러려면 많은 것을 정리해야 되서 차고에서 피아노랑 안 쓰는 물건들을 싼 값에 팔 거예요.”
“진짜로?” 알렉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았다. 사실 바로 그 순간에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케일럽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진짜로. 날짜는 4월 19일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예요.”
8
알렉스의 음악 경연 대회때 입었던 양복을 다시 입으며 케일럽은 마른 침을 삼켰다. 거울을 통해 넥타이를 매고 있는 자신을 보며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를 되뇌었다. 인터넷으로 아빠의 회사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아빠의 비서를 통해 만날 예약을 했다. “찾아오려는 용건이 무엇인가요? 사업? 의뢰?” 사무적인 목소리의 비서가 물었다. “워낙에 개인적인 일이어서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일급 기밀이어서.” 수화기 너머 서류를 만지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화요일, 오후 4시로 잡아드리죠.” 알렉스를 학교 앞에서 태워 조지나 할머니의 요양원으로 데려간 뒤 케일럽은 샌 프란시스코 시내로 차를 몰았다. 태양이 자신의 갈색 손을 비추었다. 선글라스를 낄까 생각도 했지만 케일럽은 얼굴에 내려쬐는 캘리포니아의 태양을 좋아했다.
[버트 매디슨, 금융업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케일럽은 문을 두드린 뒤 조심스럽게 아빠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버트는 책상에 앉아서 손을 모으고 아들을 맞이했다. 머리엔 머리카락이 없었지만 10년 전부터 입어온 갈색 정장과 체크무늬 넥타이를 멘 아버지의 모습이 케일럽은 낯설지 않았다.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오간 뒤 침묵이 따랐다.
“기사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주 토요일에 안 쓰는 물건 치우는 겸, 이웃 대상으로 한 무료 바베큐 파티 겸, 음악실을 비우는 겸 - “
“음악실을 비운다고?” 버트가 되물었다. “엄마의 의사는 물어봤어?”
“아니요. 물어보면 영영 못 할 거예요. 엄마는 어차피 내년 말까지 집에 안 들어오세요.”
“그래도 너하고 알렉스가 쓸 수도 있잖아.”
“저희는 음악이 지긋지긋해요.”
아들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린 버트는 “흠,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와주실 수 있어요?”
“나더러 오라고? 뭐하러?”
“뭐, 바베큐 굽는걸 도와주실 수도 있고, 물건 정리 도와주실 수도 있고요. 저희 둘이서 하기에는 부족하거든요.”
“디아즈는 뭐라고 - “
“그 양반이 뭐라고 하든 저흰 개의치 않아요.”
버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 특제 바베큐 소스를 바른 돼지 갈비살을 트럭 한가득 싣고 가마.”
피아노의 먼지를 털어낸 뒤 조율사를 불러서 음을 맞추었다. 부엌 식탁과 거실의 커피 테이블을 차고 앞에 놓고, 엄마의 앨범, 악보집, 음악 서적, 자서전, CD, 그리고 책장과 책상과 전등과 금색 술이 달린 자주색 커튼까지 내놓은 뒤 종류별로 모아서 가격을 적은 종이를 세웠다.
안 읽는 책, 오래된 옷, 비싼 음향 기기까지 알렉스와 바깥으로 옮겼을 즈음, 거대한 푸드 트럭 하나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조수석에서 버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파티를 시작해볼까!” 하고 내려서 조리대를 열었다.
“진짜 푸드 트럭을 고용하셨어요?”
“그럼 내가 장난하는 줄 알았냐?”
10시가 되어 장사가 시작된 후로 케일럽은 눈 코 뜰 새 없이 트럭과 가판대와 집안을 뛰어다녔다. 기다리는 사람들 줄이 벌써 모퉁이 길 을 꺾어서 생기고 있었다. 아빠랑 함께 온 조리사 분들과 옥수수를 굽고, 샐러드에 넣을 야채를 썰고, 가판대에 혼자 있는 알렉스를 한 쪽 눈으로 지켜보았다. 혼자 있는 알렉스가 마음에 걸렸는지, 어느 친절한 아주머니께서 시간이 될 때까지 도와주기로 자처하셨고 케일럽은 몇 번이고 감사인사를 했다. 피아노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안내해서 직접 연주도 해주었다. 두 시간마다 쓰레기 봉지를 갈았다. 좀 더 환경친화적으로 가자는 알렉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식을 담을 접시와 식기는 일회용 용기를 쓰지 않고 집에서 조달했고, 당장 할 일이 없으면 무조건 설거지를 도맡아서 했다. 버트는 몸의 모든 세포를 집중해서 최고의 돼지갈비 바베큐를 만들었다. 버터 바른 핫도그 빵을 굽는 냄새, 감자 튀김 냄새, 양념 옥수수 냄새,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보면 7월 4일 국경 기념일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오후 2시도 안 되어 물건의 반 이상이 팔렸고 음식은 벌써 재료가 바닥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찾아왔다. 동네 사람들은 다 한번씩 들른 뒤에 옆동네까지 소문이 난 것 같았다. 아빠의 명령에 따라 식재료를 조달해오기위해 케일럽은 차를 몰고 대형 슈퍼마켓에서 식자재를 쓸어담았다.
손에서 땀이 나서 차 핸들을 행여나 놓칠까 꽉 잡고 집에 돌아오던 중, 뒤에 따라오는 회색 차가 낯이 익었다. 안을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창문에 진하게 선팅이 되어있었다. 케일럽이 우회전을 하면 우회전을 했고, 차선을 바꾸면 따라서 차선을 바꾸었다. 기어코 두 자동차는 함께 집의 뒷마당에 들어섰다. 케일럽은 태연하게 차에서 식자재를 내렸다. 뒤따라온 차 문이 열리더니 선글라스를 끼고 감청색 정장을 입은 회색 머리 남자와 알렉스 같은 꼬불꼬불하고 긴 머리와 케일럽과 같은 갈색 피부를 가진 여자가 내렸다. 여자는 절대로 남자 앞에 걷지 않았고 남자는 당당하게 앞마당으로 나갔다. 케일럽은 사온 재료를 푸드 트럭 조리사에게 건네주고 두 사람을 서둘러 따라갔다.
9
“안녕, 버트.”
“안녕, 밀라.”
긴 머리의 여자는 푸드 트럭 앞에 서서 버트에게 인사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긴 머리 여자에게 쏠렸다.
“스티븐슨 선생님 아니세요?”
“우와! 여기 앨범에 사인해주세요!”
밀라는 트럭 앞에서 몰리는 사람들 손에 들린 앨범과 공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버트, 케일럽, 디아즈는 마당 한 구석에 함께 서서, 활짝 웃으며 사람에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는 밀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갑작스런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슬쩍 일어나서 현관문 옆에 있던 케일럽 옆에 섰다. 케일럽은 버트와 디아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알렉스를 집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헤드폰 쓰고 좋아하는 노래 크게 듣고 있어.”
“알아. 알아서 있을게.” 케일럽은 알렉스를 방으로 들여보낸 뒤 침을 꼴깍 삼키며 마당으로 나왔다. 디아즈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바베큐도 이제 끝났으니 돌아가세요.”
“저녁 6시까지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재료도 사왔는데.” 푸드 트럭 조리사가 말했다.
“내가 추가 수당 줄 테니까 조용히 있어봐요.”
“누구 마음대로 추가 수당이야?” 버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버트, 소리 지르지 마.” 밀라의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50이 넘은 중년 여자였지만 이 때만큼은 초등학교 2학년 알렉스보다 더 작아보였다. 버트의 고함 때문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물러났다. 케일럽은 푸드 트럭 조리사들에게서 재료를 다시 받아들고 조리대를 치우는 걸 도와주며 한 쪽 눈으로 세 어른들을 주시했다. 버트와 디아즈의 말싸움은 계속되었다.
“왜 왔어?”
“기사 보고 설마 설마 해서 왔는데 정말로 다 치우고 있었을 줄이야.”
“저 안에 있는 피아노부터 가구 하나 하나 내 돈주고 사온거야!”
“말 없이 떠나간 주제에 이제 와서 소유권 주장하겠다는거야?”
“왜 왔냐니까!” 버트는 남아있던 앨범이며 화보집을 가판대에서 집어 땅에 던졌다. “내 말이 말처럼 안 들려?”
“투어 떠나기 전 마지막 짐 챙기러 왔다. 꼬마야, 엄마 짐 가져다 드려. 안방에 있다.”
“내 아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버트는 제 분에 못 이겨서 바다사자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아내에게 버트의 눈길이 멈췄다.
“당신, 당신도 현실로 돌아와야 해.”
“밀라는 이미 충분히 현실을 살고 있어. 지금 공항으로 떠나야 해. 수백명의 사람들의 월급이 그녀에게 달려있고,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어. 가족사 때문에 다 망쳐버릴 셈이야?”
“날 가르치려 들지 마!”
“니가 니 마누라에 대해 뭘 알아?”
“밀라는 네가 만들어낸 가짜 현실을 살고 있는거야!”
“그동안 밀라가 널 그리워한 줄 알아? 꼬마야, 네 엄마 공항으로 모셔라. 난 시내에 할 일이 남아서 가봐야돼.”
디아즈는 씩씩대는 버트를 뒤로 한 채 타고 온 차를 몰고 빠져나갔다. 밀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케일럽은 엄마의 어깨를 감싸고 자신의 차로 이끌어드렸다. 차 안에 앉자마자 밀라는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를 뒤로 하고 케일럽은 차고에서 나와서 푸드 트럭 조리사들을 잘 달래서 추가 수당을 드린 뒤 되돌려보내고, 안방에 가서 침대 엎에 세워진 보라색 대형 여행가방 세 개를 끙끙대며 두 개는 양손에 끌고, 하나는 발로 차며 가지고 나와서 차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케일럽은 알렉스의 방에 뛰어올라갔다.
알렉스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헤드폰을 쓰고 있었다. 이슬같은 눈물이 얼굴에 범벅이 되어 두 갈래 길을 만들었다. 케일럽은 동생을 안아주었다.
“나 엄마 공항에 모셔다 드릴게. 이제 끝났으니까 좀 쉬어.” 알렉스는 오빠를 한번 꼭 끌어안았다. 동생의 등을 좀 쓰다듬어 준 뒤 케일럽은 밑으로 뛰어내려 와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버트는 자기가 어질러놓은 가판대와 마당을 치우고 있었다. 치운다기보다는 처리가 곤란한 물건들을 차고에 들여놓는 것이었지만.
동네를 벗어나서 공항행 고속도로에 들어섰지만 밀라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케일럽은 짜증과 죄책감과 동정심이 동시에 들었다.
“엄마가,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 할게. 정말 잘 할게.” 밀라는 딸꾹질을 하고 눈물을 훔치며 사과를 내뱉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엄마를 터미널에 바래다 드리며 케일럽은 케일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뭔가 말 하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10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해가 지났다. 케일럽은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을 맡은 알렉스의 나무 그림을 비행기 안에서 다시 천천히 보았다. 단순한 색깔에 단순한 모습이었지만 편안한 그림이었다. 순간 북슬북슬한 초록 괴물의 기다란 팔에 함께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자퇴서를 낸 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버트는 정말로 음악실에 이사를 왔고 업무도 이따금씩 집에 가져와서 했다. 그 덕분에 알렉스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셋은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보드 게임을 했다. 케일럽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취직해서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만드는지 배웠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서 먹기도 했다. 알렉스는 이제 아동심리치료소에 다녔다. 아버지가 치료비를 보태주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케일럽은 동네 꼬마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모아둔 돈으로 급하게 런던행 비행기표를 끊었고, 급하게 엄마가 공연하는 극장 근처의 호텔에 예약했다. 저번에 공항에서 미처 전달하지 못한 많은 말들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몽롱한 상태로 자다 깨다 하면서, 기내식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갔다. 허리가 아파왔다. 엉덩이 근육이 쑤셨다. 몸의 모든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케일럽은 기지개를 피다가 왼쪽 승객의 얼굴에 팔꿈치를 대었다. 급하게 사과 했고 옆 승객은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히드로 공항을 나서자 생각보다 날 선 런던의 겨울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나름 겨울 옷을 단단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겨울용 외투가 없었던 나머지 스웨터를 두 개 껴입었다.
케일럽은 호텔에 도착해서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잠들었다. 몇 시간 후 눈을 떠보니 입에서 침이 줄줄 새어나와서 하얀 호텔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얼굴에서 침을 닦아낸 뒤 케일럽은 호텔이 베개도 세탁하는지 궁금해졌다. 아니라면 케일럽은 다음에 그 방에서 묵을 고객에게 엄청난 실례를 한 셈이다.
엄마의 뮤지컬 투어는 이미 몇 달 전 부터 매진 상태여서 케일럽은 그날 그날 풀리는, 공연장에서 살 수 있는 표에 운을 걸어보아야 했다. 공연을 본 뒤 유명인사를 기다리는 팬인 척 하며 엄마에게 알렉스의 그림을 전달하고, 다시 가족 관계를 추스려보자고 할 계획이었다. 공연 시간은 저녁 7시였지만, 오후 4시부터 공연장에 도착했는데도 줄이 길었다. 벌벌 떨며 기다렸지만 오후 6시쯤 그나마 그 표들도 다 팔려버렸다. 케일럽은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날 새벽 1시에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놓여진 벤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문 옆에 달려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공연 실황을 감상했다. 공연이 끝난 뒤 숨겨진 오케스트라가 드러나며 지휘자인 엄마가 관객을 향해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나왔다. 공항에서 헤어지기 전의 울먹울먹한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실력만큼은 확실한 엄마였다. 케일럽은 실력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이리도 가혹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철 모르는 꼬마의 푸념이지 뭐.’ 케일럽은 이렇게 생각했다. 대가 없이 오는건 없다는 걸 케일럽은 잘 알고 있었다. 조지나 할머니 말 대로, 저렇게 일할 때 만큼은 엄마는 스스로 자랑스럽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공연이 끝날때 즈음, 케일럽은 내부에 경비원들이 공연 전보다 늘어났다는 것을 눈치챘다. 경비원 몇 명이 디아즈와 함께 케일럽에게 다가왔다. 케일럽은 일어나서 어깨를 피고 고개를 세웠다.
“용건이 뭡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거야, 꼬맹이. 뭐 하러 여기 죽 치고 앉았어?”
“아들이 엄마 공연장에 있는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있다가 끝나고 네 엄마 만나려 수작 부리려면 꿈 깨라.”
“일가족이 공연 관계자와 만나지도 못 합니까?”
“만나려면 미리 연락을 했어야지. 네 엄마 정신 겨우 추스리고 공연 올리고 있는데 네가 갑자기 와버리면 어떡하냐?”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해요?”
“누구? 나?”
“그래요, 당신. 듣자하니 우리 할머니에게 과거도 배경도 묻지 않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면서요? 떳떳하다면 그럴 필요가 없을텐데, 그렇죠?”
디아즈는 욕을 삼키고는 경비원들에게 케일럽을 밖으로 고이 모시라고 명령했다. 막이 내리고 사람들이 공연장 밖으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감동과 행복과 황홀함이 뒤섞인 표정들이 가득했다. 밖에 나오자마자 케일럽은 경비원들을 뿌리친 뒤 인파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경비원들이 자신을 찾으러 두리번거리는 걸 확인한 후, ‘관계자 외 진입금지’ 라고 적힌 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직원들, 음악가들, 배우들이 뒤섞여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태연하게 걸으면서 연주자 대기실을 지나, ‘밀라 스티븐슨’ 이라고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밀라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들을 보자마자 물을 뿜고는 사래가 들려 켁켁거렸다. 케일럽은 뻔뻔하게 엄마의 등을 두드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어떻게 들어왔어?”
“다 방법이 있죠. 공연 잘 봤어요.”
“누가 너 잡아가기 전에 얼른 나가봐.”
“전 걱정마세요. 그보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케일럽은 알렉스의 그림을 꺼내 보여주었다. 밀라의 얼굴이 인상을 썼다가 펴졌다.
“이게 뭐니?”
“알렉스가 그린 거예요. 보시고 마음이 어떻게든 움직이신다면, 저희 가족에게 돌아와주세요. 우리는 엄마를 지켜보기만 하는게 아니라 함께하고 싶어요.”
밀라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케일럽은 대기실을 나섰다. 아까 그 경비원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어깨를 으쓱 하면서 경비원들 사이를 지나서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11
그날 팔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비워내고, 바닥을 걸레질하고,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테이블 위로 올리고 나면 케일럽의 하루 일과가 끝났다. 몸은 피곤했지만, 대신 정오에 출근했다. 근무 시간 중간에 알렉스를 학교에서 데려와서 집에 데려다 놓는게 허용이 되어서 다행이었다. 얼마 안 가서 아빠가 퇴근하시니 걱정되지 않았다. 아빠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바로 옆에 있는 가게에서 일했다. 간혹 가다가 아빠나 아빠의 비서, 동료들이 와서 아이스크림을 사갔다. 그 때는 굳이 가족이라 티 내지 않고, 단지 조용히 아이스크림 값을 할인해줄 뿐이었다.
여느 때 처럼 케일럽은 마감 전에 바닥을 걸레질하고 있었다. 보통 마감 전에는 손님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지만, 가게 문이 열리는 것을 보자 걸레를 내려놓고 카운터 뒤로 갔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드릴까요?” 말하는 순간 케일럽은 얼음같이 굳었다. 밀라가 높은 굽의 부츠를 신고 보라색 숄을 두르고 들어왔다. 아직 밀라는 투어 중이었을 터였다.
“가족으로 돌아와달라는 말, 깊게 생각해보았어. 더 기다리면 못 돌아올 것 같아서 즉흥적으로 왔어.”
케일럽은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비볐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투어를 펑크내시면 어떡해요.”
12
조나스가 케일럽과 알렉스를 인터뷰한 그 식당에서, 스티븐슨 가족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우리 알렉스는 커서 뭐 되고 싶어?” 밀라가 물었다.
“몰라요. 사람들이 그런거 물어보면 싫어요. 대답하기 어려워서.”
“급하게 찾지 않아도 되잖아?” 버트가 말했다.
케일럽은 웃으며 눈을 굴렸다. 식당 창문 뒤로 짙게 선팅 한 회색 차가 굴러들어오는 걸 보았다. 케일럽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일어나서 식구들이 안 보는 틈을 타 주차장으로 나갔다.
디아즈가 나와서 선글라스를 정장 주머니에 꽃으며 식당쪽으로 걸어왔다. 케일럽은 디아즈를 막아서며 말했다.
“저녁만 먹으면 제가 엄마랑 잘 이야기해 볼 테니까 지금은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 네?”
“비켜, 꼬마야. 난 바쁘다고.”
“여어, 어쩐 일이신가?” 케일럽의 등 뒤에서 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버트는 목젖까지 올라온 화를 참으며 디아즈에게 말했다.
“나중에 돌아와줘.”
“아니면 다음주에 와도 돼.” 밀라가 버트 뒤에서 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요!” 알렉스가 밀라 뒤에서 소리쳤다. 디아즈는 이 모든게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사람 머리 아프게 하는게 무슨 집안 내력이라도 돼? 난 너네 엄마 도와주고 있는 것 뿐이라고.”
“모두들 진정해요. 내일 다같이 조지나 할머니께 찾아가서 계약서를 다시 쓰는거예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케일럽이 버트와 디아즈 사이에 들어오면서 말했다. 디아즈는 다음 날 아침 10시에 요양원으로 오겠다고 했다.
13
디아즈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스티븐슨 가족을 맡았던 뷰챔프 변호사와 조나스 기자를 증인으로 포섭한 뒤 일가족은 요양원으로 향했다. 요양원의 화초는 그새 바뀌어 있었고, 식당에서는 노인들이 호화로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자주 안 생기는 북새통이 일어나자 요양원 안의 노인들은 끼어들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조나스의 주요 임무는 그런 노인 분들이 끼어들지 못 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막무가내로 육아와 돈 문제와 일 문제에 끼어들려는 노인들 등쌀에 조나스는 식은땀을 너무 흘린 나머지 등에 땀이 흥건했고, 파란 셔츠 가 축축해졌다.
“너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형 공연은 나몰라라 하고 여기로 무작정 왔다는게 말이 된다고 보니?” 조지나 할머니는 밀라에게 일침을 가했다. 케일럽은 조지나 할머니께 아무 말도 못 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과연 일 외에 밀라가 자기 주장을 한 적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디아즈 씨를 해고하는건 나는 결사반대다. 그 사람 덕분에 얼마나 잘 되었는지 몰라.” 조지나는 그렇게 딸의 이력을 다시 줄줄 읊었다.
‘또 시작이군’, 버트, 케일럽, 알렉스는 속으로 말했다.
“너희들도 얼른 노력해서 엄마의 명성에 흠이 가게 하지 말아야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는 건 또 뭐고,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보이는 건 또 뭐니?” 알렉스는 몸을 움츠렸고, 케일럽은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집착할까.
“어머님, 오늘 이렇다 한 결론이 안 나오면 저희는 또 찾아올겁니다. 저희 이대로는 살기 싫으니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여보, 가지.” 버트는 본인의 안락의자에서 일어난 뒤 문으로 향했다.
“잠시 엄마랑 시간 좀 보내고 갈게.” 밀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 난 애들이랑 갈 테니까. 댁도 수작 부리지 말고 나와요.” 버트가 디아즈에게 말했다.
“고작 이런 얘기 하려고 내 아까운 시간을 뺏은겁니까?”
“고작 이런 얘기라니?”
“싸우지 마세요. 제발 싸우지 마세요.” 알렉스가 울먹이며 아빠를 붙잡았다. 버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알렉스의 손을 잡고 나갔다.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케일럽은 디아즈와 밖으로 나왔다. 디아즈의 차로 따라가서는 런던에 있을때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왜 우리 엄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디아즈는 케일럽을 무시한 뒤 차 창문을 올렸다.
14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욕조에 차가운 얼음물을 받고 잠옷을 입은 채 입술이 시퍼래져서 벌벌 떨며 앉아 있는 밀라를 보고, 그녀의 가족은 당장 해고하는건 너무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요양원에게 가족 단위로 마라케스를 흔들고 노래를 부르며 재롱을 부리기도 했다. 설득 끝에 디아즈가 밀라를 관리하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하고, 밀라의 가족은 더 이상 밀라의 일 스케줄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걸로 결론이 났다.
뮤지컬 [병 뒤에 숨어서] 의 월드 투어가 끝난 뒤, 밀라는 아무런 스케줄도 잡지 않고 혼자서 휴가를 떠났다. 가족들에게조차 문자 하나로만 쉬러 간다고 말한 채로. 물론 모두들 밀라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야자나무로 둘러싸인 리조트에 있던, 아이슬란드의 얼어붙은 빙하를 구경하고 있던, 밀라만이 알고 있으리라.
월드 투어가 종료된 지 반 년 후 어느 날, 케일럽은 밀라와 알렉스를 심리 치료소에 내려주었다. 처음 하는 심리 치료인만큼 케일럽도 같이 따라 들어갔다. “물어볼 수 있는건 다 물어보고 와.” 버트는 일 때문에 같이 못 가는 걸 매우 아쉬워했다. “고객이 예약을 오후에만 잡지 않았어도 사무실 정리하고 갈 텐데. 어땠는지 잘 말해줘.” 거듭 알렉스에게 약속을 받아낸 뒤 버트는 출근했다.
“디아즈라는 분은 어떻게 처음 만나셨어요?” 치료사가 물어보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연락 끊고 사라지신지 얼마 안 된 날이었어요. 보통 끝나고 집에 곧장 오는데, 그 날따라 독일에서 온 현악기 4중주단의 음악회에 너무 가고 싶은거예요.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는 그레이트 아메리칸 뮤직 홀에 갔어요. 돈은 없고 혼자서 들어가는 사람들만 구경하는 도중에, 어느 청바지와 낡은 점퍼와 야구모자를 쓴 아저씨가 제게 와서는 ‘표를 싸게 줄 테니 네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련?’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같은 짓이지만, 저는 뭐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그 제안을 승낙하고, 너무 행복한 마음으로 음악회를 감상했어요. 엄마의 진료실에 갈 수 있는 카드를 그 사람에게 준 채로. 그 이후로 그 사람은 제가 뭘 먹는지, 언제 연습하는지, 무엇을 입는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기에게 알리게 하고, 자기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게 했어요. 거기서 만나기 전에는 뭐 하던 사람인지는 저도 몰라요. 물어보려고 하면 엄청나게 혼이 났거든요. 아, 거기서 표를 파는게 익숙한 걸 보니 암표 상인이었을지도 몰라요.”
‘정말 끝까지 알 수 없는 사람이네. 엄마도, 디아즈도.’ 케일럽은 생각했다. 아무리 보고 싶다지만 낯선 사람이 준 표를 받아들인 엄마가 기가 막혔다. 이 이상 뭘 알아내기엔 힘들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다시피 한 사람이니 주위 사람의 말도 들어보기가 힘들었다.
치료가 끝난 뒤 밀라와 알렉스는 차 뒷좌석에서 손장난을 치면서 놀았다. 케일럽의 핸드폰이 울렸다. 예전의 사고가 떠올라 받지는 않았지만, 전에 자신의 교통사고 처리를 담당한 경찰의 번호였다.
“네 가족에 대한 기사를 계속 읽고 있어. 재밌던데.” 경찰의 말에 케일럽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부탁한 대로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옛날 자료를 뒤져보았어.” 경찰은 서류를 가져와서 펼쳤다. “보니까 코너 스티븐슨이라는 피아니스트를 폭행해서 수감된 하비에르 디아즈라는 사람이 나왔어. 직업은 역시 피아니스트. 폭행하는 바람에 본인은 왼 손이 더이상 날렵하게 움직이지 않게 되었어. 신경이 끊어진게 있다나 뭐라나.” 케일럽은 뒤통수가 서늘하게 되는 걸 느꼈다. 코너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은 가족 중에는 없는 걸로 알고 있지만, 성이 같은 사람을 보니 남 일 같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한 뒤 경찰서에서 나왔다. 다시 따뜻한 계절이 돌아왔다. 안개가 걷힌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은 차분했다. 어제 밝고 천진했던 알렉스와 밀라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케일럽은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이 다시 되돌아오길 소망했다.
15
일주일 후, 자기가 일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의 앞치마를 두르며 케일럽은 주인에게 한 소리 들었다. “이렇게 거의 매일 자리를 비우게 해주는 주인이 어딨냐? 일 안 한 시간은 수당 못 주는거 알지? 오늘 같이 너네 아버지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해라.”
“네, 압니다. 전 불만 없어요.” 아이스크림 기계에 넣을 반죽을 섞으면서 케일럽이 말했다.
“어머님은 영국에 언제 가시냐?”
“이제 곧 가세요. 9월에 학기가 시작되니까.”
“오늘같이 가족들 치료 데려다 줘야 할 때는 언제 올 지 전화라도 해줘. 내가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웅웅거리며 아이스크림 기계가 돌아갔다. 오고 가는 손님들을 받으며 케일럽은 즐겁게 일 했다. 손님들이 가게 안에서 달콤한 간식을 즐기며 대화 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영업이 끝나고 뒷정리를 한 뒤, 외투 주머니 안 쪽에 둔 핸드폰을 보니 오늘 중에 부재중 전화가 50건이 넘게 와 있었다. 아빠의 것도 있었고 디아즈의 것도 있었다. 케일럽은 누굴 먼저 연락할지 갈등하다가 디아즈의 번호를 눌렀다.
“너 이 자식 제때제때 안 받아? 사람 환장하겠네!”
“근무 중에 핸드폰을 어떻게 봐요!”
“됐고, 내가 니 엄마랑 동생을 데리고 있는 중인데, 19번가 물류 창고 건물로 와라.”
“당신이 왜 데리고 있어요?”
“치료 끝나는 시간에 내 차에 태워서 여기로 왔다. 할 말이 있어.”
“이거 지금 납치 - “
“그래, 납치다! 말을 들어먹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 이거다. 니 동생을 담보로 난 너를 요구해.”
“제가 가면 알렉스는 풀어주시는 거예요?”
“그래, 퍼뜩 와, 어벙아! 경찰이 사방에 깔렸어! 니가 늦게 올 수록 일도 늦게 끝나니까 알아서 해!”
허겁지겁 길에 차를 대고 19번가의 창고로 왔다. 경찰차 몇 대가 창고 문 앞에 있었고 버트의 모습도 보였다. 버트는 케일럽을 보자마자 아들에게 쓰러지듯 안겼다. 두 사람에게 갑자기 피로와 안도와 분노가 밀려왔다. 버트는 두 손과 두 팔을 떨었다.
“핸드폰 안 보냐?” 버트의 목소리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저 근무 태만으로 잘리게 하시려고요? 엄마랑 밀라는 괜찮대요?”
“상처 하나 없다고 장담은 한 다만. 너는 정말로 들어갈 거야?”
“별 수 없잖아요. 나도 좀 묻고 싶은게 있으니까 모험을 해봐요.”
“절대 안 됩니다. 우린 타협하지 않아요.” 케일럽의 교통사고를 담당했던 경찰관이 다가오며 말했다.
“경관님,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입장 고려를 안 해준 것도 있어요. 한번 들어봐요. 제가 잘 책임질게요.”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렸는지 어떻게 알고?”
“제가 이 사람에게 직접 전화했어요. 제가 가면 뭔가 해결될 것 같아요. 힘은 제가 더 세니까 괜찮아요.”
“배짱도 크시네. 상부에 보고해보고, 안 되면 안 되는거야.”
“알겠어요.”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걸 기다리며 케일럽과 버트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창고 안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나 귀를 기울여봤지만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케일럽이 경찰 한 명과 함께 들어가도 좋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경관의 이름이 일사라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일사는 총을 꺼내 들고 케일럽 옆에 딱 붙어서 들어갔다. 케일럽은 내심 좀만 떨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속으로만 말했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노란 불빛이 보였다. 촛불 세 개가 켜져있었고 그 주위를 서성이는 디아즈와, 몸이 밧줄에 묶여서 서로 부둥켜안고 앉아있는 밀라와 알렉스가 보였다. 디아즈는 일사를 보자마자 자신의 총을 들어 겨누었다.
“진정하세요! 저도 왔습니다. 알렉스를 놓아주세요.”
“저 경관이 총을 내려놓으면 풀어줄거야.”
“경관님, 좀만 뒤로 가서 총을 내려놓으세요.”
“어둠에 숨지 마!”
일사는 천천히 총을 내렸다. 디아즈는 알렉스의 줄을 풀었고, 케일럽은 알렉스를 껴안았다.
“엄마랑 나랑 반드시 돌아올테니까 아빠 말 잘 들어, 알겠지?”
알렉스는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끄덕이며 일사의 손을 잡고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창고 문이 닫히자 케일럽은 밀라 옆에 가서 섰다.
“거래를 해요.”
“좋아. 너부터 말해.”
“저번에 대답 안 한 것부터 대답해줘요. 왜 그렇게까지 매니저 일을 자처한겁니까? 또, 코너 스티븐슨이라는 사람과 무슨 관계였죠?”
“내 대답은 나랑 같이 뉴욕에 가면 알려주마.”
“뉴욕이요? 뉴욕 주도 아니고 뉴욕 시?”
“거기 공동묘지에 너, 나, 네 엄마, 그리고 그 경찰 양반이 같이 가주면 모든 것을 말하지. 사람이 말 안 하고 사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지난 일주일동안 잠을 못 잤다. 범죄 등급도 1등급 납치가 아니라 2등급으로 해줘. 네 엄마와 동생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어. 확인 해볼테면 해봐.”
“비행기로 갈 거죠?”
“아니, 차 타고 갈거야.”
“그럼 며칠이 걸려요!”
“알아, 거기 갈 때까지 그 경찰 양반이 날 체포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금 당장 출발해. 먼저 네가 운전해.”
갑자기 자동차 여행을 가게 생긴 어머니와 아들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케일럽이 일사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하자 일사는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관할에서 수천 마일은 벗어나겠군.”
“저도 제 직장이 위태위태해요.”
“그냥 같이 가주기만 하면 돼?”
“그것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해요.”
“돈조차 요구 안 해?”
“뉴욕에 가는 비용은 경찰서에서 처리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별의 별 미친 놈을 다 봤지만 여행 비용을 대달라고 하는 건 처음이다.”
“이건 그냥 느낌인데, 미친 것 같지는 않아요. 거기까지만 가면 자기를 체포하래요.”
“하, 과연 순순히 잡혀줄 지 보자.”
일사는 뉴욕에 도착하면 자기 외에 일반 차로 위장한 다른 경찰차가 따라다닐거라고 했다. 디아즈가 눈치채지 못할 것 같진 않았지만 케일럽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뉴욕에 가는 길에는 몸 속 위장이 네바다의 사막의 열기에 바싹 타버릴 듯이 답답한 침묵이 뒤따랐다. 디아즈가 운전대를 잡는 건 일사가 격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케일럽, 밀라, 일사 순으로 5시간씩 교대하며 운전할 수 밖에 없었다. 케일럽은 믿기지 않는 이 상황에 여러번 허벅지를 꼬집었다. 알렉스는 버트와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그 즈음, 네 사람은 뉴욕시 맨하탄 섬으로 가는 다리에 올라섰다. 올라서기 전부터 빽빽한 자가용의 행렬이 이어졌다. 며칠동안 지지고 볶으며 씻지도 못하고 지독한 땀냄새를 맡으며 차에서 생활한 그 시간보다 뉴욕에 들어가기 전이 더 느리게 느껴졌다.
일행은 뉴욕 브룩클린의 그린-우드 묘지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데려온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걱정 마쇼.”
디아즈는 어느 묘비를 가리켰다. 묘비에는 단순하게 코너 스티븐슨 이라는 이름 밑에 1945-1977 이라고 적혀있을 뿐이었다.
“인사해라. 네 할아버지다.” 케일럽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밀라를 보았다. 밀라는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고 묘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아니, 몰랐어. 정말이야. 믿어줘.” 밀라는 슬픈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디아즈는 묘비 위의 먼지를 손으로 털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과 나는 대학교 동기다. 라이벌이었지. 조지나와 코너가 사귀었다 헤어졌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사는 걸 지켜보았다. 조지나가 의사가 된 뒤로 코너는 성공에 더 집착했어. 말 그대로 눈 뜨면 연습밖에 몰랐다. 아이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코너는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음악에만 매진했지. 밀라는 어땠을지 몰라도 조지나는 어느 순간부터 코너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 년에 단 하루라도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에 찾아가지 않았으니까. 너무 많이 연습하는 바람에 연주회를 한 달 앞두고 오른손 검지를 다치고, 왼손에는 염증이 생겨서 치는 방법을 완전히 바꿔야만 했어. 연주회에는 좌석이 반도 차지 않았지. 끝난 뒤 나는 코너의 대기실에 가서 잠시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했어. 코너는 불 같이 화를 내었어. 이거 아니면 자기는 뭐가 되냐고. 나는 피아노만이 길이 아니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코너는 준비해 둔 부엌칼을 꺼내고 스스로 해하려고 했지. 내가 막아보려고 고함도 치면서 코너의 양 팔을 붙잡고 다시 생각하라고, 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 반드시 그 칼을 강제로라도 빼앗고 진정시켜야 했었던 거야. 나는 그러지 못 했어.”
디아즈는 주먹으로 비석을 내리쳤다.
“이 멍청이가 힘 조절을 못 하고 칼을 자기 팔에 그으려는 바람에 나는 그거라도 막으려다 그만 내 양 팔을 긋고 말았고, 내 힘줄마저 끊어져서 나도 피아노 인생이 끝났어. 그토록 이 놈한테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던 나도 엄청난 고통에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어. 이 놈은 내가 기절한 사이에 그새 자기를 끝내는데 성공했지. 나는 경찰에게 내가 이 놈을 폭행한 걸로 처리해달라고 했어. 빵에서 썩으면서 조지나와 밀라에게 어떻게 전할지 고민해봐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어. 음악에 대한 열망, 그 큰 열망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산불같이 일었지. 누군가의 음악 인생은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자기 스스로 해하지 않고도 그 예술의 성취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었지만 아버지가 없어서 방황하던 밀라에게까지 생각이 미쳤어. 밀라는 날 본 적이 없으니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어. 그 뒤로는 너도 아는 바다.”
디아즈는 양 손을 모으고 일사에게 내밀었다.
“체포하쇼. 제 속이 다 시원합니다. 우릴 여기까지 따라온 당신 동료들에게 절 데려가라고 하시죠.” 디아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수갑을 채운 일사는 공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디아즈를 넘겼고, 케일럽은 돌처럼 굳은 밀라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밀라는 케일럽을 떨쳐내고 말 없이 코너의 비석을 쓰다듬었다.
16
“난, 난 아버지가 정말로 내가 싫어서 떠나신 줄 알았어. 그나마 자주 찾아올 때 술 마시고 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무능하고 게으르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딸이 꼴도 보기 싫어서 그대로 떠나신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것조차도 아니고, 아버지 인생에 나라는 존재는 없었네. 차라리 잘 되었어. 아버진 나 때문에 불행하신건 아니니까.” 다음 날 비행기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밀라는 요양원에서 조지나 앞에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조지나는 밀라의 시선을 피하며 뜨개질을 계속 했다.
“이 모든걸 모르고 있었어?” 밀라가 물었다. 조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밀라는 조지나의 뜨개감을 손으로 찢으며 소리쳤다.
“모를리가 있었겠니. 말해봤자 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하니? 네 인생에?”
밀라는 대꾸할 힘이 없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힘이 완전히 빠진 말라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빠를 정말로 좋아한 적이 있기는 해? 나는 점점 아빠랑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잖아.”
“네 아빠랑 너는 근본적으로 달라. 코너는 무능하지만 너는 재능있고 유능해.”
“그럼 내가 재능이 있지 않았다면, 엄마는 날 아빠랑 똑같다고 생각하고 미워했겠네? 내게 만족한 적이 있어?”
“모든건 너를 위해서야. 네게 최선의 길을 주려고 한 거야. 덕분에 네가 어디까지 왔는지 생각해봐.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가르치기까지 하고.”
“사직했어.”
“뭐?” 부드러웠던 조지나의 목소리가 바늘같이 날카로워졌다. “네년이 날 일찍 보내고 싶어 미쳤구나!”
“봐! 엄마는 내가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날 미워했을거야. 엄마는 이미 날 미워해. 하지만 난 후회 안 해. 가르치고 싶지도 않았어. 난 아빠처럼 되지 않을거야. 엄마가 뭐라고 하던지 상관 안 해. 당분간 나 찾지 마.” 밀라는 요양원 문을 박차고 나갔다. 조지나는 얼굴이 새파래지고 눈에는 핏줄이 돋아난 상태로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17
스티븐슨 일가족은 케일럽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한정판 트리플 초콜릿 민트 퍼지를 사들고 디아즈를 면회하러 갔다. 케일럽은 뉴욕에서 돌아온 뒤 사장에게 폭포수같은 잔소리를 듣고 월급마저 한 달에 2000 달러 (한화 약 220만원) 에서 1500 달러 (한화 약 170만원) 로 깎였지만 해고 당하지 않은게 어디냐며 주위 사람들에게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고마워. 감방 동료들이랑 잘 나눠먹을게.” 디아즈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오실 때 제 가게에서 일하게 해드릴게요.” 케일럽이 말했다.
“니가 사장이냐? 됐다.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할 게. 네 가족이나 잘 챙겨라.”
조지나 할머니를 찾아뵙지 않은 지 반 년이 지나갔다. 스티븐슨 가족은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갔다가 할머니가 정말로 가실 것 같았다.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노인네라지만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케일럽은 알렉스를 학교에 내려주고 엄마를 식료품점에 내려주었다. 직접 만든 닭고기 샐러드로 저녁을 지어 먹이겠다며 밀라가 고집을 피워서였다. 엄마가 그 어떤 음식이던지 태우지 않고 요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자기가 어쨌든 엄마를 도와줘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특제 소스로 양갈비를 구우시겠다고 나섰고, 알렉스도 자기가 잘 하는 미트볼 스파게티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무언가에 나서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 켠이 뜨뜻해졌다.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요리할 생각에 케일럽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