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왕궁의 불꽃놀이

by 신필령 posted Oct 08,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헨델 - 왕궁의 불꽃놀이를 듣고 집필했습니다.

조용하고 소심한 황녀 케르넨 파실레스, 그녀에게 다가온 파스키노라는 가명으로 접근한 한 남자.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 판타지 소설입니다.

미숙하지만 잘 봐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왕궁의 불꽃놀이

박해원

 

태자 전하,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영애.”

파실레스 제국의 황태자 루세프의 생일 연회가 열린 날이었다.

파실레스 제국의 황제와 황후는 물론, 먼 외국의 왕족들도 초대받은 떠들썩한 큰 연회였다.

다른 황녀들은 명성 높은 가문의 영식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담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3 황녀 케르넨 파실레스는

시끌벅적한 인파를 벗어나 연회장 주변의 정원에서 한가하게 산책하고 있었다.

나는 시끄러운 건 질색인데…… 조용히 책이나 읽고 있어야겠네.’

그녀가 조용히 책을 읽던 중, 한 남성이 조심스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3황녀 케르넨 파실레스 전하시죠?”

, .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흐음, 그냥 자세히 알고 계시지는 말고 파스키노 무누스라고 알고 계세요.”

케르넨은 자신을 격식 없이 가볍게 대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고 가장 얌전한 황녀와 결혼하겠다는 악질적인 의도로 접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파스키노 무누스…… 라틴어군요. 황홀한 선물이라는 뜻이네요. 무누스라는 가문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데, 가명인가요?”

, 가명입니다. 이름 그대로 황녀 전하께 황홀한 선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선물이라니요?”

별건 아니고, 그냥 대화 조금 나눠보자고요.”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선물이요?”

전하, 오늘따라 달이 참 밝죠?”

그 주제를 피하고 있는 파스키노의 말에 케르넨이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맞 대답했다.

그러네요. 달이 참 밝아요.”

그가 케르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 전하께 조금이라도 잘해주며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왔었죠?

친해지고 싶다며 밀어붙이고, 부담스럽게 만들며……

……맞아요. 근데 그걸 어떻게…… 우리 초면 아니었나요?”

다른 곳에서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던 고민.

 힘든 일을 말하지 않음으로서 품격을 지킬 수 있다는 황녀 수업은 지금껏 케르넨을 착하고 얌전한 황녀,

그리고 그녀의 고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제가 눈치가 조금 좋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감정을 꽤 많이 느껴봤거든요, 꽤 힘드셨을 텐데 용케 잘 참으시던데요?”

누구신데 그걸 겪어보신……

하하, 저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시지 말고 선물은 선물로, 겉면만 들여다보세요.”

그는 설핏 웃어보였다.

“3 황녀시니까…… 형제들 맞춰주느라 고생을 꽤 하셨겠네요. 소문으로는 5 황녀님을 직접 키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케르넨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파스키노가 자신을 예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왕 선물 받은 거, 편하게 즐겨보세요. 힘들었던 일도 다 털어놓고.”

하아, 제가 왜 황녀로 태어났을까요. 차라리 황자로, 아니, 권력 따위는 없더라도 남자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으음, 저로서는 황녀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요. 황녀로 태어난 게 왜요?”

편하게 사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그저 제 재능을 꽃피우고 싶어요. 여자들은 똑똑하면 거슬리게 한다며 혼인도 못 했던 걸요.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요.”

위인이 될 만큼 성공한 이들은 고난을 헤쳐 나가지 않았나요? 전하께서 극복하시면 될 일이에요.”

“ ‘황녀는 연약하지만 품격 있고, 남자에게는 순하지만, 아랫것들에겐 위엄 있어야 한다.’ ”

케르넨은 지금까지 들어온 단정한 황녀의 규칙을 읊조렸다.

이게 가능한 규칙인가요? 약하지만 세야 한다. 뭐 이런 거……?

 전하는 이딴 이상한 규칙에 얽매여서 환갑 넘긴 고위 귀족한테 팔려가지 말고 하고 싶은 행동 다 하면서 하세요.”

케르넨은 다소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 죄송해요. 이런 말은 처음 들어봐서……

이게 정상입니다. 생각보다 더 이상한 이야기에 세뇌당하고 계셨군요.”

으음……

케르넨은 가만히 고민했다. 자신에 대해 꽤 자세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개심 가질 거 없어요. 전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을 뿐이에요.

물론 전하와 이렇게 편하게 만을 나누는 일은, 오늘 이후로는 없을 거예요.”

케르넨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다는 말에 놀란 표정이었다. 놀라는 그녀를 본 그는 쿡쿡,”하며 웃었다.

무슨 말이죠?”

저는 이제 파실레스 제국에 오지 않을 테니까요.

이 나라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 자유분방하게 사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더는 연회에 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전하 얼굴 한번 뵈려고 참석했네요.”

더 자세하게 설명해줘요.”

케르넨이 앙칼진 고양이 같은 얼굴로 추궁하듯 물었다. 여유로운 파스키노 특유의 표정은 당황한 듯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 그건 다음에 얘기하도록 해요.”

언제요? 다시 저희 제국에 오지 않을 거라면서요.”

하아…… 그랬었죠. , 그래요. 황녀 전하께선 제가 꽤 마음에 드신 모양인데요. 제가 제대로 본 것 맞겠죠?”

, 으음……

그렇다고 하는 게 맞겠지? 파스키노의 신분을 알아야 하겠으니까.’

, 맞아요.”

하하, 그러시다면 저를 한 번 찾아보시는 거 어떠십니까?”

……?”

말 그대로입니다. 선물이 그리 마음에 드셨다면 두 번째 선물도 찾아보세요.

그때는 제 신분 공개와 소원 하나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소원이라……좋네요.”

물론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설령 못 찾으셔도 원망은 마시길.”

꼭 찾을 거니까 얌전히 기다려요.”

생긋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파스키노가 입을 열었다.

……전하, 그나저나……

?”

우리 춤이나 출래요?”

갑자기 이 정원에서요?”

하하…… 달빛을 받으며 춤추는 것, 낭만적이잖아요.”

, 좋아요.”

마침 연회장에서는 아름다운 댄스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정원에도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제2 정원에는 아름다운 검은 장미와 푸른 장미가 피어있었다.

푸름과 검음이 섞인 장미와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어우러져 오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장미, 예쁘네요.”

파스키노 눈 색이랑 같네요.”

케르넨이 싱긋 웃었다. 공교롭게도 푸른 장미는 케르넨의 벽안과, 검은 장미는 파스키노의 흑안과 같았다.

……파스키노, 제가 마음에 드나요?”

원래 전하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니 훨씬 좋은 사람이신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 친구 할래요?”

좋아요,……케르넨.”

파스키노가 케르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거칠고 큰 손에 아담한 손이 포개졌다.

한바퀴, 두 바퀴 돌 때마다 케르넨의 흑발이 살랑살랑 춤을 췄다.

파스키노의 머리카락도 덩달아 하늘거렸다. 한층 분위기가 깊어질 때 쯤, 파스키노가 고요함을 깨고 말을 걸었다.

케르넨, 테라스 좀 보세요.”

테라스에는 황후 미켈란이 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불편하시면 그만둘까요?”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계속해요.”

신경 쓰이지 않으신 건가요?”

, ……어마마마께서는 제가 남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좋아하실 걸요.”

흐음, 실제로 보니 가족관계가 꽤 독특한 제국이에요.”

후후, 그런가요?”

미켈란은 설핏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몰려오기는 했지만,

하아……긴장되네요.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있는 건 처음이에요.”

파스키노가 말했다. 케르넨도 다소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조금…… 즐겨보려고요.”

하하, 그럴까요.”

그가 케르넨과 손을 잡고 있던 팔을 굽혀 케르넨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였다.

케르넨.”

왜요?”

케르넨은 너무 착하고 얌전하게 살았어요.”

푸흐…… 그런가요? ……착하다는 말, 다른 사람들이 하면 너무 악질적인 속이 보이는 말 같았는데,”

후후, 착하다는 건……케르넨에게 독이 될 거에요.

악질적인 귀족들도 당신이 착하고 조용하니까 구혼해왔잖아요 머리도 좋으면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돼요.”

……그래요? 한번 생각해볼게요.”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연회가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쉽네요. 제가 당신 정체 꼭 찾아낼 거예요.”

하하, 그래요. 케르넨도, 나도……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이렇게 밝고 예쁜 달을 만나지 못할거에요.”

무슨 말이에요?”

그럼 이만.”

파스키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손을 흔든 뒤,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케르넨은 황후이자 그녀의 어머니, 미켈란 파실레스를 만나러 갔다.

어마마마, 잠시 여쭐 것이 있어서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아아, 케르넨. 네가 먼저 다가와 준 것이 얼마 만인 줄 모르겠구나. 알현요청 없이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단다.”

감사합니다, 이른 시간에 멋대로 알현을 요청함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격식을 갖추며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케르넨은 미켈란의 눈에는 소심하고 여린 처녀로만 보였다.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내심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야, 괜찮아. 그보다, 물어볼 게 있다니, 무엇이니?”

어제 저와 함께 있던 남성이 누군지 아시나요?”

후후, 그 흑발 흑안의 영식 말이구나.”

, 맞아요.”

케르넨, 잠시 여기 앉아보겠니?”

미켈란은 티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래, 케르넨.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그 영식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말해주겠니? 찾는 걸 돕고 싶구나.”

제게 가명으로 접근했어요. 자신을 파스키노 무누스라고 알고 있으라고 했고,

제게 말 그대로 황홀한 선물을 주겠다며 힘든 일이 있으면 다 털어놓아 보라고 했어요.”

으음, 그랬구나, 일단 네 아버지께 가서 초대장을 보낸 가문을 물어보고 오자꾸나.”

케르넨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성과 교제한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케르넨은 그곳에서 만난 영애를 뵙고 싶다며 작은 거짓말을 했다.

황제 파실레스는 3황녀의 사교성을 기대하며 초대 가문 명부를 케르넨에게 주었다.

으음……네이파 가문, 하일러 가문……

백 가지가 넘는 가문들 사이에서 본명조차 모르는 파스키노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케르넨, 그런데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니?”

. 선물은 선물로만 알고 있으라고…… 정 궁금하면 직접 찾아보라고 하고 아무 말 없이 사라졌어요.”

어머, 낭만적이네. 마치 신데렐라의 한 장면 같구나.”

, 그런 거 아니에요. 단지 친구일 뿐이에요.”

후후, 그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가 난 참 좋구나. 네가 여태껏 숨겨왔던 모습 같다고나 할까?”

……그런가요?”

아무튼, 케르넨. 더 생각해 보아라. 사랑인지, 우정인지.”

미켈란은 문을 살포시 닫으며 나갔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를, 파스키노를…… 사랑한다고?’

그녀는 여태껏 터무니없는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느낀 감정과는 달랐다.

하지만 언제부터? 물론 그녀는 처음 그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부터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는 아냐. 그저 격식 같은 걸 차리지 않아도 불순하지 않은 그에게 호기심을 가진 것뿐이야.’

그들이 함께 대화를 나눌 때?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행복했던 감정이 과연 사랑인지, 그저 우정이었던 것일지. 가려내기 어려웠다.

하아……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빨리 그를 찾아야 해.’

그녀는 테라스에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가장 오래 지켜보던 영애는 아마,’

세르피아 비벌란 영애.”

그녀는 작게 그녀의 이름을 읊었다.

마리!”

, 전하. 부르셨어요?”

진녹색 머리카락의 소녀, 케르넨의 시녀 일을 하던 마리였다.

비벌란 영애를 만나러 갈 거야. 준비를 도와주겠니?”

, 전하.”

그녀는 너무 화려하게 치장하기 싫다고 말했지만, 마리는 비벌란 영애가 텃세가 심하다며 유행한다는 로브 아 라 프랑세즈를 집어 들었다.

…… 마리, 이건 너무 화려해. 이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무슨 소리세요, 전하! 너무 아름다우세요. 빨리 다녀오세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황궁 밖으로 나섰다.

어머, 황녀 전하시군요. 응접실로 모실게요.”

, 비벌란 영애.”

비벌란 백작가, 사교계에 한창 떠오르는 가문이었다. 유전색인 코발트색 머리카락과 바이올렛 눈동자는 극찬을 받고 있었다.

막내인 허비 비벌란은 유순하다고 알려졌지만, 장녀 세르피아 비벌란은 희대의 악녀였다.

그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한 남자를 찾으러 왔어요.”

아아, 어제 황녀 전하와 함께 있던 그 영식 말이죠?”

, 맞아요.”

그래요, 그가 누군지 알아요.”

……다행이네요.”

그녀는 숨을 푹 내쉬었다. 일이 꽤 잘 풀릴 것 같았다.

그와는 어떻게 만났죠?”

제게 힘든 걸 털어놓으라고 했어요. 자신이 선물이라면서요. 하지만……마치, 바람처럼 사라졌어요.”

그렇군요. 저는 그를 정말 많이 아낀답니다. 그래서인지 그를 찾고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나쁜 사람을 소개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러시군요. 그를 아끼지 않는 건 어렵죠. 매력적이고 성격이 어른스러운 멋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말인데, 그를 사랑하나요?”

너무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뭐야…… 너무 무례한 질문인데……?’

물어보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가 나쁜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요. 전하의 의도가 궁금하네요.”

말하는 게 좋을까?’

……사실 헷갈리기는 하지만, 맞아요.”

……?”

그를 사랑한다고요.”

후후, 신데렐라의 한 장면 같네요.”

신데렐라. 신데렐라. 신데렐라.

지겹고,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왜?’

그녀의 어머니가 감동받아서 한 말,비벌란 영애가 비아냥거리기 위해 한 말.

무슨 뜻이죠?”

그녀는 황녀의 품격을 잠시 접었다.

무슨 뜻이냐고요? 바로 내일 아침, 황녀 전하가 신데렐라의 왕자 흉내를 낸다는 소문이 돌게 된다는 뜻이랍니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케르넨은 애써 관리하던 표정을 굳혔다. 유순하던 케르넨이 미간을 좁히자 비벌란 영애는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잠깐, 왕자 흉내? 그게 뭐 잘못된 건가? 내가 왕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공주님이야?’

케르넨은 너무 착하고 얌전하게 살았어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기만 해야 하나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 경박해지나요?”

사교계의 사람들은,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가면 집안이 망한다 말하죠. 게다가, 황녀에요, 당신은. 그러다 나라가 망해요.”

후후, 착하다는 건……케르넨에게 독이 될 거에요. 악질적인 귀족들도 당신이 착하고 조용하니까 구혼해왔잖아요 머리도 좋으면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돼요.”

당신, 그의 지인이 맞나요? 파스키노가 당신 같은 사람과 어울리는 줄은 몰랐네요.”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아있는 비벌란 영애를 내려다보았다. 이전의 얌전하고 단정하며, 연약했던 케르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하, 고정하세요.”

고정하라니요? 그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이정도 열정은 보여야 하겠지요? 우리 경박 따위는 모르는 예의범절의 표본,

세르피아 비벌란 영애께서는 그를 무척 아끼시잖아요.”

, 뭐 어쨌든 내일 아침 소문이나 잘 들어요.”

마음대로 해요. 사교계고 뭐고, 이젠 중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전하, 괜찮으세요?”

마리가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며 말했다.

……괜찮아, 마리. 르보나 백작부인을 불러주겠니?”

그녀는 마리보다는 성숙하고, 차분한 자신의 시녀, 르보나 백작부인을 불러내려 했다.

하지만 휴식 시간이실 텐데……

그녀는 마리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부탁할게, 마리.”

차갑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마리 앞에서 다 큰 처녀가 우습게 우는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

, !”

마리가 우왕좌왕거리다 후문으로 콩콩 뛰어나갔다.

마냥 조용하던 내가 이러니, 당황스럽겠지.’

파스키노를 만난 뒤, 케르넨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참고만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

물론 이렇게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하면 안 되겠지만.’

그녀는 이미 충분히 지쳤었다.

전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 어머,”

케르넨은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르보나 백작부인은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전하, 비벌란 백작가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지금까지 정말……너무……너무 힘들었어요.”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배 다른 황자, 황녀들에게 치이며 산 것, 악질적으로 접근하는 남자들에 대한 일을 털어놓았다.

또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 그와의 연회에 대해 자세히, 황후와 비벌란 영애에게 알린 것보다 세세하게 설명했다.

제게 말도 안 하시고, 17년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가끔은 투정부려도 괜찮아요. 아직 17살이잖아요.”

…… 부인, ‘를 찾는 걸 도와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죠. 그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으면 종이에 정리해서 보여주세요.”

그럴게요.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르보나 백작 부인이 방을 나가자 케르넨은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파스키노가 흘린 단서……뭐가 있지?’

황녀 전하, 전하께 조금이라도 잘해주며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왔었죠?

친해지고 싶다며 밀어붙이고, 부담스럽게 만들며……

그래, 그런 말을 했었지.

사실 저도 그런 감정을 꽤 많이 느껴봤거든요,”

그는 아마……황자나 왕자 아닐까?’

초대국가들은 귀족은 정략결혼, 황족, 왕족들은 연애결혼을 추구했다. 그 부담을 겪어봤다면 황족, 왕족에 속할 것이다.

그녀는 다시 명부를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귀족이 아닌 황가 명부를 읽어보았다.

황제, 황후. 황녀. 황제. 황후.’

황자는 없었다. 그녀는 파스키노가 황제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황제, 또는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서는 25세 이상의 나이가 필요했다.

그런 젊은 황제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 왕족.’

물론 초대받은 왕족도 꽤 많지만 이정도면 꽤 많이 추려졌다.

……흑발 흑안을 가진 왕자.’

스무 명이었다.

저는 이제 파실레스 제국에 오지 않을 테니까요. , 자유분방하게 사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더는 연회에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자유분방하게 사는 걸 선호한다.’

……

조용히 명부를 읽고 있던 그녀는 펜을 꺼내들었다.

베일란테라 왕국, 첸탈란 왕국.”

이 두 나라는 유전적으로 흑발 흑안을 물려받았다.

르보나 부인, 첸탈란 왕국의 왕자들은 파실레스의 다음 연회에 참석하죠?”

그녀는 르보나 백작부인에게 물었다.

그럴 거예요. 전원 참석한다고 하더군요. 베일란테라 왕국은 잘 모르겠네요.”

혹시 베일란테라 왕국에 사교계에 두문불출한 왕자가 있다는 소식은 없었나요?”

베일란테라 제국의 왕자들은 모두 사교계에 잘 나오지 않아요. 태자 저하의 생일연회는 저희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부탁하셔서 참석하셨다네요.”

파스키노는 분명히 베일란테라 왕국에 있을 것이다.

마차를 타고 간다면 며칠이나 걸릴까요?”

아마 열흘은 걸릴 거예요. 직접 가보시려고요?”

그래야죠. 내일 마차를 준비해줄래요?”

, 전하.”

그녀는 편한 레이스 잠옷에 하얀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들었다.

케르넨도, 나도……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이렇게 밝고 예쁜 달을 만나지 못할거에요.”

침대 위의 샹들리에는 그녀가 스위치를 누르자 빛을 잃었다.

하루 동안…… 정말 바빴네. 며칠 후에는 만날 수 있으려나.”

옆으로 돌아눕자 황궁의 아름다운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만 해도 달이 참 밝고 예뻐 보였는데, 평범한 그믐달이네……

예쁜 건 그 아래의 파스키노였던가,

그 옆에 있는 나도 덩달아 다채로워진 느낌이었는데,’

그만하고 자자, 그녀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하, 아침이에요. 시중을 들어드릴게요.”

마리였다.

그래, 내일은 어떤 시녀가 동행하니?”

기사님은 제릴 경, 페이그 경이 동행하셔요. 시녀는 르보나 백작 부인과 저, 두 명이에요.”

알겠어, 마리. 드레스는, …… 엠파이어 드레스로 준비해줄래?”

, 전하!”

마차에 올라타자 일렁이는 햇살이 케르넨을 비췄다.

……파스키노, 그 곳에 있겠죠?’

여관에서 묵다가 다시 마차에 올라타기를 반복하니, 열닷새가 걸렸다.

실례합니다, 누구신가요?”

베일란테라의 기사였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파셀레스 제국의 3황녀 케르넨 파실레스입니다.”

흑발에 푸른 눈……

비벌란 영애에게 막말을 했대.”

신데렐라의 왕자님? 그런 말이 있던데.”

근처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자 분들을 뵙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그녀가 또다시 생긋 웃어보였다. 기사들은 케르넨을 귀빈실로 모셨고, 몇 시간 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희 1왕자께서 티타임을 요청하셨는데, 참석하시겠어요?”

그럴게요. 다른 황자 분들도 뵐 수 있나요?”

, 티타임에 전원 참석하십니다.”

기사가 티타임 장소라고 알려준 미라빌리스 궁에는 이미 도착한 황자들이 모여 있었다.

……3황녀 케르넨 파실레스입니다.”

자신들이 1왕녀, 2왕자, 3왕자라고 소개한 그들은 케르넨이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파스키노가 없어. 잘못 짚었나 봐.’

제가 좀 늦었습니다! 파스키노 무누스, 1왕자 벤터스 베일란테라입니다.”

이 목소리는……?’

잘도 찾아왔네요, 케르넨. 겨우 16일 만에 찾아오는 게 어디 있어요? 잠시 정원에서 산책이라도 해요.”

케르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파스키노, 아니, 벤터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원이나 빨리 말 해봐요.”

? 소원이라니요?”

날 찾으면 소원 들어주겠다고 말했잖아요.”

아아, 내 소원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달이 이렇게 밝은 것은.”

파실레스 제국의 3황녀와 베일란테라 왕국의 1왕자 벤터스의 예식은 누구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벤터스는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그녀는 왕비로서 해야 할 일을 위해 잠시 그의 집무실에 왔다.

역시, 똑똑하다는 소문과 처음 만났을 때 그 책 제목을 보고 알았어요.”

그는 케르넨의 서류를 검토하며 말했다.

어려운 책은 아니었어요. 물리학의 이론에 대한……

아아, 그 얘기는 머리 아프니까 다음에 해요, 그나저나 케르넨, 이상한 소문이 있던데.”

무슨 신데렐라 왕자 얘기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테라스에 있던 비벌란 영애를 만나러 갔는데 당신을 찾는다는 말을 하니…… 아는 사람이라며 찾아주겠다 하더라고요,

아무튼 거기에서 난 소문이네요.”

저는 그 사람 모르는데, 그냥 케르넨을 곤란하게 할 목적이었나 보네요.”

흐음…… 그런가요. 어쨌든 당신을 찾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벌써 아홉시네, 케르넨. 지금 빨리 궁으로 돌아가요.”

? 왜요?”

다음에 설명할게요. 일단 지금 빨리 가 봐요.”

? , 그럴게요.”

그녀는 거의 쫓겨나듯 집무실에서 나갔다.

, 빨리 오셨네요, 왕비님. 이리로 오세요.”

케르넨을 따라 베일란테라 왕궁으로 오겠다고 한 르보나 백작부인은 여전히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푸른색 슈미즈 드레스로 준비했어요. 여기로 오세요.”

그녀는 케르넨을 연회궁으로 쓰는 에풀레 궁으로 가게 했다.

여기에는 왜……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케르넨의 품에 꽃을 안겼다,

케르넨, 이벤트 준비했어요. 하늘 좀 봐요.”

하늘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왕궁의 불꽃놀이였다.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