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우체국에서

by 비타민씨 posted Oct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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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서


 서는 등기를 보내기 위해 우체국에 갔다. 안에는 네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두 명은 금융업무 창구에, 나머지 두 명은 우편업무 창구에 있었다. 우편업무를 담당하는 직원 중 한 명은 이미 네 번이나 얼굴을 익혔던 여자였다. 그녀는 매우 친절했다. 후줄근한 차림의 고객에게도 미소 띤 얼굴로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는 말이다. 고맙긴 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그로서는 사무적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 적당한 친절이 좋았으므로 그녀의 친절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런 못된 생각을 가져서 그런 일이 생긴 걸까. 그 여직원은 우체국 택배를 이용하려는 다른 고객의 종이 박스를 포장해주느라 등기 우편 접수 업무를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등기 우편을 접수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고 꼭 그 직원에게 부탁해야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서는 옆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로 갔다.

그는 청남색 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서는 가져간 서류 봉투를 접수대 위에 놓여 있는 네모난 금속 저울에 올려놓았다. 등기를 여러번 부쳐보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무게를 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울 위쪽에 달린 빨간색 숫자가 움직이다 멈췄다.

"2천6백5십 원입니다."

그는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렸다. 서가 내민 봉투의 주소를 보았다가 모니터를 보았다가 하면서 순조롭게 일을 진행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서를 보았다.

"여기 나오는 주소랑 써 오신 주소랑 다르거든요?

그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서는 접수대에 딱 붙어 직원과의 거리를 가깝게 하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모니터를 보려고 했다기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랐기 때문에 몸이 절로 앞으로 나간 것이었다.

“적어 오신 번지 수는 ***빌라가 아니고 △△빌라라고 나와요.”

서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어떡해 해야 하나요?”

“이건 주소를 잘못 적어오신 거예요."

그가 말했다. 그것도 '잘못 적어오신 것 같아요.'도 아니고 '잘못 적어 오신 거예요.' 라고 말이다. 서는 네 번이나 등기를 보내는 동안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한 상태였고 그래서 바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마도 이 직원에게 답답한 인상과 만만한 인간이라는 느낌을 안겼을 것이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당하고 있을 인간이니 무시해도 되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근데 건물 입구에 ***빌라라고 써 있어요."

서가 다급하게 말했다. 주소를 잘못 적어서 우편을 접수하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직원은 자판을 몇 번 더 두드리더니 약간 짜증이 난 표정으로,

"여태까지 이렇게 적었어도 우편물이 잘 갔나요?"

"네?"

서는 이번에도 바보처럼 우물쭈물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서가 받는 우편물이라고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후 받는 물건 뿐이었는데 인터넷 쇼핑몰에서 받는 이의 주소는 항상 자동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알고 있는 주소가 하나 뿐이었으므로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도 직접 입력을 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매번 손으로 쓰는 주소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보내는 우편 접수 때 뿐이었는데, 보내는 이의 주소는 당선이 돼봤어야 잘못 썼는지 제대로 썼는지 아는 것이지 매번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조금도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을뿐더러 좀체로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서는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하는 상황에 대해 점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겉봉투에 쓰여 있는 받는 이의 주소를 보고는 ‘꼴에 무슨 작가를 하겠다고......’ 라고 놀리는 것 같았다. 작가를 지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낯모르는 사람에게 벌써 200초도 넘게 알려지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서류 봉투 모서리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이 마치 서의 인생을 압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접수 안 시켜주면 이거 안 가. 10분 후면 여섯 시가 넘을 것이고 그럼 오늘자 소인이 안 찍히는 거지. 그럼 접수 마감 기한을 못 지켰으므로 접수가 안 될 것이고 힘들게 쓴 원고는 한 달 뒤에나 있을 다른 응모처에 보내야겠지. 그럼 방세가 한 달 더 밀리는 거고 주인 여자에게 또 사정해야 되는 거야. 그럼 벌써 세 번째 사정하는 건데 이쯤되면 주인 여자의 인내심도 바닥났을 거야. 그러니까 빨리 주소를 잘못 적었다고 말해. 좀더 굽실대란 말이야. 그럼 내가 처리해주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서의 등기 우편을 지금까지 네 번이나 처리해주었던 친절한 여직원은 여전히 택배를 보내려는 고객과 소통하며 협력 중이었다. 보내려는 택배 상자가 하나가 아니라 보이는 것만 해도 벌써 네 상자나 있었다. 서는 그 여직원이 그리워 힐끔힐끔 그곳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럼 옛날 주소를 알려드릴까요?"

서가 말했다. 별로 다른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돌파구가 그것밖에는 없었다. 돌파구를 생각하는 일이 고객이 해야 할 일인지 직원이 해야 할 일인지는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물론 그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당황했을 것이다. 번지 수를 치면 세부 주소까지 똑같이 나오는 경우만 본 모양이었다.

"네, 그래 보세요."

직원은 서가 불러준 옛 주소대로 자판을 두드렸다. 서는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이건 흡사 신인문학상의 결과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빨리 저 서류 봉투를 눈앞에서 치워버려. 어서 확인증을 내놓고 나를 집으로 보내달란 말이야. 어서 가서 눈을 붙여야 해.’

기다림의 결과는 늘 그랬듯이 탈락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주소가 완벽히 맞지 않는지 그는 몹시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이번에는 구시렁거리기까지 했다.

"아, 왜 주소도 몰라."

이렇게 말이다. 그것은 명백히 인격을 무시하는 투였다.


 6년 전에 서는 인테리어 가게에서 일했다. 서는 그 일이 몹시 하기 싫었다. 그래서 화가 나 있었다. 부모님 집에서 살다가 거의 쫓겨나다시피 내려와 친언니의 가게를 봐주게 된 것이었다. 서는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설상가상 친언니와 형부는 일을 나가고 없었다. 손님이 오면 큰일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님은 찾아왔다. 중년 남자였는데, 테프론 테이프를 달라고 하였다. 서는 당황한 손으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게 뭔지 몰랐던 것이다. 전화를 받은 언니는 선반 맨아래 상자에 있는 하얀색 테이프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시시한 일로 중요한 일을 방해한 것에 기분이 언짢았는지 급한 일이 아니면 일할 때 전화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서는 언니가 알려준 위치의 상자에서 도넛 모양의 하얀색 테이프를 꺼내 주었다. 4백 원짜리를 팔기 위해 전화를 했다는 사실에 조금 민망하기는 했다.

몇 분 후, 귀찮게 또 손님이 찾아왔다. 그것도 어렵기만 한 노부부였다. 서는 견적을 뽑으러 오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장님 계시나요?"

노부인이 물었다. 노신사는 옆에서 노부인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들어주었다. 노인을 상대한 적이 별로 없었던 서는 허둥지둥댔다. 솔직히 말해, 싫다는데도 굳이 언니네 가게에서 일하면서 사람 구실 좀 하라며 등 떠민 사람들 모두를 원망하느라 바빴고, 손님이 온 것이 성가셨다.

“일 나가셨는데요.”

서는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다소 뻣뻣한 자세로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 수리해달라고 부탁해 놓은 게 있는데 연락이 없어서요.”

노부인은 계속해서 존댓말로 말했고 인상과 말투가 부드러웠다.

"사장님이 안 계셔서 모르겠는데요."

"……, 전화 해봐요."

노인의 말투에서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직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적개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일할 때 전화하는 거 안 좋아하셔서요."

서가 말했다. 노부인은 이제 노골적으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서가 그때 센스있게 대신 메모를 남겨두겠다고 말했다면,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서는 기분이 몹시 우울했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사춘기 소녀마냥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노부인이 계속해서 뭐라고 했지만 서는 들리지 않는 척했다.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이봐요,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우체국 직원이 말했다. 서는 직원의 무시에 어이가 없었으며 이렇게까지 된 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전 그저 그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일 뿐이에요. 제가 그 건물의 이름이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 건물의 역사를 다 알아야 하나요? 제가 아는 것은, 우체국 컴퓨터에 뭐라고 저장되어 있던 간에 현재 제가 살고 있는 건물 외벽에는 분명히 ***빌라라고 써 있다는 사실 뿐이에요."

서는 점점 흥분하여 심장 박동수가 증가했고 그 바람에 숨소리가 거칠어졌고 목소리도 찌그러졌다.

"여기 컴퓨터에 나오는 주소가 △△빌라라고 되어 있다고 건물 입구에 버젓이 ***빌라라고 써 있는데 우편물 주소를 △△빌라라고 적는 게 맞나요?"

서가 덧붙였다. 옆에서는 테이프 뜯는 소리가 시끄럽게 계속 됐다. 서가 화내는 소리도 찍찍대는 테이프 소리 때문에 반쯤은 묻혀 버렸다. 직원은 서의 분노에 기습적 일격을 당했다는 듯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렸다. 그는 조금 허둥대며 다시 자판을 두드리더니,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말없이 등기우편 접수증을 건네주었다.

서는 이대로 돌아서기에는 뭔가 찜찜했지만 상대가 싸움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 의향을 보인 이상 계속 짖어대는 건 교양 없는 짓이라고 생각해 접수증을 건네받고는 우체국을 나왔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서는 우울의 바다를 건너는 느낌이었다. 발걸음은 물속을 걷는 듯 무거웠다. 서럽고 외로워서 의기소침해졌다. 발이 자꾸만 물컹하게 빠지는 느낌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도 있으리라.

그 직원은 다른 직원에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때 다른 직원은 몹시 바빴었다. 금융 업무는 4시 반까지만 했고 그 시간이 넘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우편 업무를 맡은 다른 직원은 세 명의 고객에 둘러싸여 여러 개의 택배를 접수받느라 분주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몰라서일 확률은 전혀 생각지 않고 상대방이 모른다고 확신했었다. 아마도 서에게서 풍기는 이미지가 뭘 똑바로 알 것 같지 않은 사람 같았나보다. 고객인 서가 건물명이 달라도 번지수만 정확하다면 우편물을 받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다면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듯한 그의 무지를 바로잡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이런 생각은 말도 안 된다. 고객이 우편 업무에 대해 왜 알아야 하나. 그때 서가 화를 내어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직전이 아니었다면 그는 접수를 받지 않고 가만히 있을 기세였다. 만약 확실하지 않은데 접수를 덜컥 받았다가 우편물이 표류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분 전환을 시도했다. 그때, 파란 담장 길 끝에서 조그만 여자 아이가 물고기처럼 걸어왔다. 아이는 귀여운 발음으로 “아줌마, 우체국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라고 물었다. 서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호칭을 아줌마라고 한 부분에선 조금 불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니라고 하는 것도 미묘했을 테고 이모라고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가 다정한 말투로, 우체국은 왜 가느냐고 물으니 아이는 편지를 부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서는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후, 우체국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대답하고는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기 위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왠지 모르게 즐거울 것 같은 미래를 상상하였다.

‘우체국 직원도 세상만사가 우울한 시기였을 수도 있겠지. 나도 내 미숙함을 들켜버렸을 때 그걸 들춘 상대방에게 짜증을 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그때 똑같이 쏘아준 건 잘한 것이다. ’죄송합니다‘라고 했거나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면 나는 나를 무척 혐오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이다.’

“정말?”


 한 달 뒤, 서는 또 그 우체국으로 갈 일이 생겼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보낸 원고는 또 퇴짜를 맞았다는 얘기다. 그다지 불행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처음 떨어졌을 때는 인정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는데 다섯 번쯤 떨어지니까 적응이 된 건지 실망보다는 도리어 희망을 느끼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떨어졌는데 희망을 느끼다니. 그렇다고 희망적인 평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럴 가치조차 없는지 그 어떤 평도 받지 못했다.

아무튼 지난번의 그 찜찜한 일도 있고 해서 그 우체국에는 정말이지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우체국으로 가려면 금쪽 같은 버스요금과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아무 잘못도 없이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얼른 우체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청남색 셔츠의 직원이 보였다. 이번에는 창구에 앉아 있지 않았다. 우편물이 가득 든 카트를 밀고 있었다. 아직 그는 서를 보지 못했고 이쪽에서만 그를 본 상황이었다. 서는 고개를 숙이고 그 직원이 일을 처리하기 전에 순조롭게 일을 처리해 주었던 친절한 여직원에게로 향했다.

여직원은 즐거운 일이 있는 사람처럼 “어서오세요”라고 인사했다. 서는 서류 봉투를 저울에 올려놓았고 일은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그 직원은 서류 봉투의 주소와 행정상의 주소, 번지 수는 같지만 건물명이 다른 그 주소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직원은 건물명이 달라도 번지수만 같으면 문제없이 우편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고객에게 덮어씌우며 "주소를 잘못 아신 거예요."라고 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지난 일이다. 한 달도 전의 일이었다. 잊어버리지 못하고 담아두는 것은 졸렬한 짓이다. 아무래도 그때 싸움을 끝까지 했어야했다. 시작만 거칠게 하고 얼렁뚱땅 봉합해버렸기 때문에, 승부가 나지 않았다는 느낌이고 그것이 이렇게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인 것이 틀림없다.


 노인 부부는 새파란 점원으로부터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해졌다. 얼굴 색이 그렇게 되고 나면 화를 가라앉히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만약 노인 부부에게 '일한 지 이틀 밖에 안 돼서 잘 모르겠으니 연락처를 적어주시면 사장님에게 전해 드리겠다고' 라고 했다면 노인 부부는 흔쾌히 다시 한 번 연락처를 적어주고 기분을 추슬렀을 것이다. 서는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점원으로서의 자질이 없었던 것이다. 노부인은 그것을 간파했다.

"말을 똑바로 해줘야지 말이야. 왜 그러는 거예요?"

노부인이 마침내 화를 냈다. 서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녀는 화를 가라앉게 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야, 너 뭐야.“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노신사가 든든한 남편 역할을 자처하며 끼어들었다.

서는 사실 좀 쫄았다. 이 대 일이 되어 쪽수에서 밀리는 데다가 노신사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쩌렁쩌렁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서는 눈꼬리가 처져서 유순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그가 가부장적인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그렇다면 정말 골치가 아팠다.

서는 갈등을 회피하는 타입이었고 그것은 꽥꽥대는 소리에 대해 안 들리는 척 연기를 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말하기도 귀찮았고 말을 한들 뾰족한 설득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발동이 걸렸다. 화가 나기 시작한 사람한테 계속 말을 시키면 화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종국에는 폭발시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차라리 대꾸를 하지 않으면 제풀에 꺾여 멈출 확률이 높다. 물론 무반응을 받은 상대는 무시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럽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이 일촉즉발의 시간을 한시라도 빨리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노인네들한테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세를 전환해서 두 손을 모으고 착한 표정을 지으려니 구차스럽고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 내 가게도 아닌데 손님이 떨어져나간들 무슨 상관이랴 싶은 생각 등이 스쳤다. 그때였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손님이 왔는데 일어서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 가지고 시집이나 가겠어?"

노신사가 말했다. 서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물론 노인은 오해할 만했고 화가 날 만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원으로서 서의 태도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서의 인성을 바닥으로 보고 멋대로 할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는 지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외딴 섬을 여행 중이다. 처음 본 여자에게 이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 있다니. 여자는 오직 남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도 된다는 듯, 결국은 그거라는 듯, 그게 아니면 여자는 하자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듯. 그렇게 당당하게 그 노인은 천박한 결혼관을 드러냈다. 아마도 그는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남자가 그러면 개별적인 사례라고 생각하고 여자가 그러면 일반화시켜서 생각하는 쪽일 게다. 성별을 나누기 좋아하는 남자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남자인 본인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서는 이 순간 그의 아내와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남편을, 아들을 어느 정도로 떠받들어 키웠기에 저런 말을 저리 당당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그렇게 자랐어도 인간에게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하나씩 달려 있지 않은가. 속으로야 얼마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스스럼없이 밖으로 내뱉을 수도 있다니. 그것도 남의 귀한 집 딸에게.

그냥 젊은 게 버르장머리가 없다거나 싸가지가 없다고 했다면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중성으로 보아주었더라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그들이 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불친절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죄송하게 생각하며 다음부터는 손님에게 조금 더 신경썼을 것이다. 서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다. 말같지도 않은 말에 아파하거나 억울함을 느끼는 것은 지는 것이다. 강철 심장이 되어야 한다.

서의 머릿속은 점점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화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심장 어딘가에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중하고 합리적으로 보였던 백발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서가 느낀 충격은 더욱 컸다. 노부인에게 들었다면 덜 충격적이었을까.

먼저 서에게 불편함을 드러냈던 노부인은 남편의 갑작스런 발언에 당황했고 남편의 팔을 잡고 끌었다. 노신사는 무슨 말을 더 하지는 않았지만 씩씩거리는 게 느껴졌다.

"사장님한테 전해줘요. OO아파트에서 왔다고. 지난 주에 욕실 수리한 집이라 그러면 알 거예요."

노부인은 사태가 커지는 걸 원치 않는지 이렇게 말하면서 남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똑같애.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지."

우체국 대기석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가 말했다. 서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달걀형에 코도 오똑하고 이마도 시원하고 눈도 동그라니 예쁘기는 했다. 싫어할 남자는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서가 느끼기에 지금 우체국 내에서 그녀한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았다.

서는 볼일이 끝났지만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볼일이 아직 안 끝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라는 것이 그렇다. 지나치게 상하관계를 따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시를 당했다고 느껴질 때는 위아래를 확실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린 사람한테 무시당하는 것은 '무시+무시'가 된다. 분노가 두 배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연장자한테 무시를 당했다면 '예의>무시'이고, '예의-무시'가 되면서 예의가 조금 남게 되어 화가 가라앉는 것이다.

청남색 셔츠의 직원이 무거운 카트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가 이제는 빈 카트를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근데, 몇 살이세요?"

서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서는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에 나이에 있어서 여러번 오해를 받아온 터라, 지난번에는 자기를 너무 어리게 보고 더 무시한 거라 생각해 이왕 마주친 김에 확실히 따져야겠다고 생각하며 다가섰다. 적어도 열 살은 어리게 본 게 분명했다. 서는 그의 나이를 적어도 자기와 별 차이가 없거나 서너 살 어릴 수도 있다고 보았다.

"네?"

"몇 살이시냐고요."

서는 따지는 말투를 쓰고 있었다. 만약 상대의 나이가 자기보다 나이가 세 살 이상 어리다면 다시금 분노가 치밀 것 같았다.

사실, 서는 그에게 무시를 당하고 난 후 그를 다시 만나면 앙갚음을 해주겠다고 벼르면서 상대를 공격할 말을 연구했었다. ‘상대방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면 "나는 그쪽보다 ○살 많거든요?" 이렇게 말할까? 글쎄, 이건 아닌 것 같다. 속도 너무 좁아 보이고 본질과 상관 없는 사항으로 공격을 하는 것은 야비해 보일 것이다. 상대방 나이가 나와 동갑이거나 많다면 어떻게 말할까. 일단은 말문이 턱 막힐 것이다. 하지만 침착하게 다른 주제로 슬쩍 돌리거나 바쁜 척하며 돌아서는 것이다.’ 세 개의 경우의 수 중에 서가 유리한 것은 하나뿐인데, 유리한 경우에도 시원하게 패배와 회한을 안겨 주는 상황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화는 나지만 어떤 식으로도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 빌어먹을 나이라는 것이 궁금했고 기어이 이쪽의 나이가 그쪽보다 더 많다는 걸 확인하고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상대방이 좀더 미안해할 수는 있을 테니까.

그가 카트를 멈추고 자기의 나이를 말했다.

젠장, 동갑이었다. 동갑일 경우에는 어떤 복수를 해줘야 할지 미처 생각해놓지 못한 서는 당황했다.

"그쪽은 몇 살이신데요?"

그가 물었다.

"뭐……, 비슷해요."

서는 이렇게 우물거리고 도망치듯 우체국을 나왔다.


 서는 노신사가 또 가게에 온다면 복수해줄 말을 생각하느라 다음 날을 다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불행스럽게도 복수해줄 말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장가를 못 가지." 라고 하려면 서가 시집을 갔어야 했고 이미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부실하지." "그러니까 발기불능이지." 이건 너무 저질스러웠다. 게다가 서가 그의 성생활까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욕을 주는 것이 목적일 때는 왜곡과 날조를 더해야 소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난쟁이 똥자루지."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도 약오르게 하기에는 최고였다. 하지만 논리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러니까 시집을 못갔지'는 '그렇게 퉁명스럽고 불친절하니까 남자들이 싫어하지'라는 말이 될 여지가 있고, 논리의 비약은 있을지언정 소량의 논리는 들어있는 것이다.

서의 마음에는 답답함만 쌓여갔고 지금까지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신사는 그후로 볼 수가 없었다.


 서는 두 달 뒤에 또 우체국에 갔다. 똑같은 용건이었다. 불편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버스요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었다. 솔직히 이젠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불편하다 해도 잠깐일 뿐이었다. 그도 서를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우체국에서 만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가 저울에 서류봉투를 올려달라고 말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봉투를 저울에 올려달라고 말했다. 요금을 표시하는 빨간색 숫자가 멈추자 그가 봉투를 가져가서 서가 쓴 주소와 모니터를 번갈아보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행정상의 주소 체계에 대해 제대로 공부를 한 모양인지 이번에는 그 어떤 태클도 걸지 않았다.

“2천 6백 2십 원입니다.”

서는 주머니에서 3천 원을 꺼내 사각 트레이에 올려놓았다. 그가 3백 8십 원을 거슬러주었다. 그는 등기우편 확인증까지 일사천리로 건네주고는 “여깄습니다.”라고 제법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서는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다. 그전에는 쳐다보기도 싫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는 서가 좋아하는 저음이었다. 서의 마음이 스르르 녹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복수심이 치졸하게 느껴졌고 다음부터는 편하게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설 쓰시나봐요."

조용히 돌아서려던 서의 마음에 스멀스멀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자중하기로 하였다.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저 아는 사람이 쓰는데, 전 그냥 대신 접수해주는 거예요. 그 언니가 밖에를 잘 안 나와서."

"아 그래요? 이번에는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가 좀 웃는 것 같았다. 분명 덕담을 한답시고 해준 것 같은데 뭔가 또 당한 기분이었다. 더욱이 그 옆에 있던 친절한 여직원까지 이쪽을 보면서 합세를 하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녀가 특유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서의 얼굴이 빨개졌다. 둘이서 짜고 서가 몇 년째 실업자임을 만방에 알리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이번에 안 되면 이제 좀 때려치우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게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니 헛꿈 꾸지 말고 어디 가서 알바라도 하면서 성실하게 살라는 소리로 들렸다. 서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얼버무리며 그 스트레스 소굴을 빠져나왔다.


 서는 집으로 돌아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맡겨버렸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지 않게 음악을 켜놓았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1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것만으로 피로가 많이 풀린 느낌이었다. 기지개를 활짝 켠 후,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위에는 거울이 달려 있었다. 거울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닦아내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서는 미친사람처럼 혼잣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요, 제가 불친절했어요. 그점에 대해선 사과드리고 싶어요. 기분 나쁘셨을 거예요. 제 기분이 우울하다고 아무 죄 없는 손님한테 푸는 건 잘못된 거예요. 저라도 화가 났을 거예요. 더구나 새파랗게 어린 것이…… 생각할수록 죄송하네요.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러려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노인이시잖아요. 노인이 좀 포용력이 넓고 그래야 멋있죠."

여기까지 말하고 일단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평소 사람과의 만남이 적은 탓에 모노드라마를 자주 찍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내가 시집을 가든 말든 할아버지가 무슨 상관이에요? 할아버지야말로 그래 가지고 아내한테 사랑이나 받을 수 있겠어요? 할머니 표정을 보세요.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계시잖아요. 할아버지 같은 분이랑 사는 할머니가 불쌍하네요. 할머니는 지금 억지로 같이 살고 있는 게 분명해요. 아무리 화가 났다고 그런 폭언이나 내뱉는 분을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마지막 말을 포효하듯 내뱉은 후 속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수 년 동안 쌓인 억울함이 풀린 느낌이었다. 서는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기를 틀었다.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 끝 -



이름:민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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