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살았던 오늘

by 김예진 posted Nov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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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고 살았던 오늘


"췌장 암 말기 입니다 ."

 

 어느 날 들려온 암 소식. 내 나이 올해 52 . 53 을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는 취업 준비하고 있는 딸 한 명과 이제 막 제대해서 복학을 준비하는 아들 , 그리고 서울에서 버스 운전을 하는 남편이 있다. 그날따라 바람이 더욱 매섭게 불었다 . 나는 목도리를 칭칭 감고는 집 앞에 있는 마트로 향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코과자와 빵을 한 가득 사고는 다시 집으로 간다. 곧 남편이 전화 올 시간이다. 한 달에 한 두 번 볼까 말까한 그 이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항상 그는 저녁마다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따라 유독 보고 싶은 날이다.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그 이다.

 

 "오늘 뭐 먹었어?"

 

  몇 십 년 째 똑같은 질문이다그래도 지겹지 않다 .

 

 "김치찌개 먹었어. 당신은 ?"

 

 " 나는 여기 식당에서 두부랑 장조림 먹었지. 근데 왜 이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어 ?"

 

  그렇다 . 그는 나와 반대로 눈치가 빠르다. 하지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암이라는 소식을 전해주면 ,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이 안됐다. 아니 사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나 목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런가봐 ."

 

괜한 헛기침을 한다.

 

"병원 꼭 가보고. 약 잘 챙겨먹고 좀 쉬어."

 

"알겠어. 그럴게.“

 

 그렇게 우린 암묵적으로 내일의 통화를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빨래를 돌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들이 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 한다 .

"다녀왔습니다."

 아들은 한 마디 하고는 방으로 쌩 들어간다. 매 번 그래왔지만 오늘 따라 뭔가 서운하다. 나는 한 번 씩 단칸방에 살던 시절이 그립다. 가난이 그립다기 보다는 온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지내던 그 때의 온기가 그립다. 지금은 집에 같이 있어도 있는지 모를 때도 많다. 딸은 공부 하고  늦을 거 같다고 문자가 왔다

"지호야 . 먼저 밥 먹자. "

 아무 말 없이 나와서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는다. 휴대폰에 무슨 재미난 영상들이 그렇게 많은지 혼자서 실실 웃으며 먹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래도 조금은 미소를 지어본다. 빠르게 먹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다 하고 나서야 잠시 숨을 돌린다. 드라마 할 시간이다. 집안일을 끝내고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나의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피곤한 몸을 소파에 맡기고는 티비를 튼다하지만 드라마도 나의 병을 낙으로 바꾸진 못했다오늘은 일찍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에 방에 들어가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는 아이들이 나 없이 밥이나 먹을 수 있을지 남편은 하루의 마지막에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힘을 얻어 라고 해야 할지 온갖 걱정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너무 밝은 탓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물론 성인이고 이제 스스로 해야 할 나이이지만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주부로서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다 해주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어차피 나중에 결혼 하면 다 하게 될 테니 일찍 고생시키며 집안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엄마 노릇이기도 했다. 딸아이가 펜션에 놀러갔을 때 , 그것도 20 대 초반 쯤 이였을 때였다. 세탁기도 어떻게 돌리는지 몰라서 내게 묻던 그 아이를 두고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갈 수 있을지 막막했다. 현관문 소리가 들린다. 지혜 소리다 . 들어오자마자 나의 방문을 살짝 열고 나를 보았지만, 자는 척했다. 눈이 마주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결혼 전 까지는 모든 것 다 해 주고 싶었는데이제 가르쳐야만 했다. 혼자서도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일단 아이들에게 주던 용돈을 끊었다. 용돈을 받고 싶으면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분리수거, 빨래, 나중에는 밥하는 것 까지. 모두 하나씩 가르쳐 주면서 시키고는 그에 맞는 돈을 주었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며 어쩌면 집안일이 하기 싫어서 꾀부리는 모습 정도로 생각 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언제까지 해 줄 수 있을지 모르니. 아이들의 집안일 하는 모습은 마치 아이들이 첫 걸음마를 뗄 때를 보는 듯 했다그렇게 하루 이틀. 몇 주 가 지나고 나니 그래도 꽤나 걸음걸이가 익숙해졌다.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 입원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말이 입원이지 거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미 마를 때로 말랐고 ,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문득 젊었을 때 나의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크리스마스다. 거리엔 나의 또래만한 사람들이 저마다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다니고 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만 다른 이십대의 삶을 보내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도 유독 나의 주변에만 흐린 기분이다. 나는 구세군 자선냄비를 두고는 지하철 역 중앙에서 종을 울리고 있었다옆에서 무언가 나를 보는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마냥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둔한 내가 그 정도 느꼈으니 나를 얼마나 뚫어지게 본 건지알고 보니 같은 교회에 다니는 오빠였다. 내가 정리 할 때 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실 봤지만 못 본 척 하고 지나가려던 찰나에. 그는 우연히 날 본 마냥 놀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한참 후에 내가 그 때 왜 그랬냐고 캐물어보니 그 종을 울리던 모습이 너무 천사 같았다나 뭐라나. 아무튼 나는 관심이 없었다. 사실 난 그 당시에 먹고 살기 바빴고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몇 달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정말 듣기 싫었던 잔소리들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아직은 조금 더 엄마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조금 더 내 곁에서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원망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사실 그리운 감정은 없지만, 이 순간에 아버지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그렇게 한 순간에 세상에 혼자 놓여져 버린 나. 혼자 살아가야만 했던 그 때. 딱 지금의 내 딸 나이 쯤 이였겠다온갖 이유들로 나는 그의 고백을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그에게는 포기가 없었다.

 

"오늘 밥 먹으러 가자."

 예나 지금이나 밥 얘기만 한다참 한결같다. 괜히 식구라는 말이 끼니를 함께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였다. 그렇게 수 십 번의 밥 청혼 덕분에 우리는 식구가 되었고 월세로 단칸방을 구해서 살았지만 행복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계속 일을 다니셔서 집에 거의 없었다. 때문에 집안일은 거의 나의 몫 이였기에 결혼해서도 곧 잘 적응했다. 더구나 어머니의 타고 난 손맛을 물려받은 덕분에 내 손을 거친 음식들은 맛이 좋았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겐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남편이 항상 그렇게 말해왔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현모양처였다. 남편은 그 당시 집 근처 공장에서 일했다. 나는 항상 그가 퇴근하면 따뜻한 밥으로 맞이해주었다. 내가 자신 있는 일이라곤 그 뿐 이였다. 나는 딱히 잘하는 일이 없다. 돈을 벌어볼까 싶어서 스무 살을 넘기고 식당이며 카페, 피시방 등 여러 군데 해보긴 했지만 일주일을 채 버티지 못했다. 내가 버티지 못한 것이 아니고 사장이 버티지 못했다. 눈치 없고 둔하고 소심한 행동 탓에 . '어서 오세요.' 한 마디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다들 며칠은 잔소리를 해대더니 이제 포기 했는지 돈 봉투를 주면서, 이 때 동안 일한 몫을 줄 테니 나가라는 식이였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주부가 딱 인지도 모르겠다나는 지금의 삶이 좋다.

 하지만 그 삶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가 생겼다. 사실 나는 천천히 가지거나, 아예 없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누구를 책임 질 만큼의 살림살이는 되지 않았다. 겨우 우리 둘 먹고 살기에 바빴는데 아이라니. 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남편은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서는 나를 끌어안았다. 나의 옷에도 물이 가득 번졌다. 기뻐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남편은 그 후로 잦은 회식을 핑계 삼아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돈 봉투를 머리맡에 올려두곤 했다. 나는 그 돈으로 아기용품을 하나 둘 샀다나는 그 돈이 남편이 대리 운전해서 번 돈이라는 것을 이웃이 말해 주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 나도 참 둔하다. 술에 찌든 냄새로 들어 올 때면 그저 오늘 힘들어서 회식 때 다 퍼 붇고 왔다고만 생각했지 술주정하는 손님들을 태우고 혼자 씨름 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낙엽이 떨어질 때 쯤 아기가 태어났다. 딸 이였다. 나의  모든 걱정과 근심은 아이를 보며 사라졌다. 마치 낙엽이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꽃이 피는 봄이 오듯. 나에게도 봄이 왔다. 그냥 나의 아이가 있다는 그 하나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겼다 . 우리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 이였을까 . 문득 엄마가 그리운 날이다. 남편은 부족하지도 많지도 않은 돈을 벌어왔고 나는 아이와 함께 하루하루를 보냈다. 누워있기만 하던 아이가 뒤집고 기어 다니기 시작하더니 걷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매 순간순간이 새롭고 감격의 순간 이였다. 남편은 피곤한 기색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집에 오면 집안일에 아기재우기 등을 도맡아서 한다. 그 사이 둘째인 아들도 생겼다. 사실 넷이서 단칸방에 살기란 그리 쉽지 않았지만 옮길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 때 쯤. 어쩔 수 없이 빚을 내며 방 두 칸이 딸린 집으로 가긴 했지만. 어느 날 남편이 들어와서 데이트 신청을 한다. 오랜만에 둘 만의 시간을 가질 생각에 설렌다. 아이들 방문에 새어나오는 불빛이 사라지고야 우리는 밖으로 슬그머니 나간다.

 

 " 오늘은 돼지 국밥 ? "

 " 좋지

  그와 나는 먹는 취향이 같다 . 어쩌면 그 모습에 반해 버렸을 지도.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 많았지 ?"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지만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자기가 일하고 와서 집안일 도와주랴 애들 놀아주랴 더 고생 많지 ."

 

 "아냐 뭐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

 

  그는 꼭 뭔가 할 말이 있지만 말을 못 할 때면 말끝을 흐린다. 나는 여느 때처럼 가만히 기다려 준다.

 

 " 나 사실 서울에 취직 했어. 그래서 .."

 " . 자주 못 내려오는 거야? "

  나는 직접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말하는 편이 나았다.

 

 ". 그래도 매일 꼭 연락할게 ."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나와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인다. 서울이면 여기서는 정말 끝과 끝이다. 보내기 싫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점점 커 가는 아이들이 있다. 남들 다 갖고 있는 휴대폰도 사달라며 떼를 쓸 때면 못 사줬던 모습, 학원도 보내 달라 했지만 보내주지 못하는 모습들이 아른거렸다. 두 아이를 대학교 까지 보내고 결혼을 시키려면 돈이 더 필요한 건 현실 이였다. 결국 붙잡지 못했고 그는 떠났다. 정말 그 때 한 말대로 매일 같이 연락 왔다. 처음에는 매일 보던 남편을 하루 종일 못 본다는 것이 너무 허전했다. 아이들도 주말만 되면 아빠랑 놀던 놀이터를 갔다 와서는 마냥 신나지만은 않는 표정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몇 주 몇 달을 보내고 나니 마치 한 달에 한 두 번 보는 것이 마치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절대 아니다.

 이제 모든 것이 자리 잡고 익숙해 졌을 때. 나는 암이 발견됐다. 사실 나는 어려서 부터 소화를 잘 못하고 배가 아픈 일이 잦았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 근데 요즘 따라 심하게 아프고 약을 먹어도 별 차도가 없자 동네 병원을 찾았다. 그랬더니 나에게 큰 병원으로 가보라며 나를 내쫓듯이 했다. 그 때까지도 나는 아무 걱정은 없었다. 나는 흔히 한 번씩 맞아보는 수액조차 한 번도 맞아보지 않았고 입원을 해본 적이 없다. 고작 해봐야 다래끼 나서 안과 몇 번 간정도. 그렇게 얼마 만에 찾은 병원에서 나에게 췌장암 말기라는 소식을 전해주다니. 꿈이길 간절히 바랬다.

 

 "얼마 정도 살 수 있을까요 ?"

 "절제가 불가능한 상태여서, 평균적으로 6 개월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의사 선생님은 꽤나 단호한 말투로 내게 말했고 현실임을 직시했다. 나는 고민할 틈 없이 곧장 남은 인생은 병원에서 보내겠노라 다짐했다나의 어머니도 그랬고, 그 것이 자식에게 피해 주지 않는 길이라며. 한 번도 아플 때 나에게 돈이 부족하다거나 병시중을 해 달라고 한다거나 등의 도움을 딱히 청한 적이 없다.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거 같다. 아이들 결혼시키려고 조금씩 적금을 들어 놓은 통장을 꺼내 본다. 언젠가 아이들은 결혼해서 집을 나가고 우리만의 집을 지어 남편과 오순도순 노후를 맞이하겠노라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상상 속에만 머물 뿐 이였다. 내일은 입원을 하기로 이미 병원에 예약을 해 둔 날이다.

 

 " 지혜야 , 지호야. 오늘은 일찍 들어와. 아빠 오신대. "

 

 아이들은 커서도 아빠를 잘 따른다. 추억이 남들 보다 많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보기에도 몸만 멀리 있을 뿐 최선을 다하는 최고의 아빠이자 남편 이였다. 나는 오늘 따라 하루 종일 목이 바짝 마른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집안일을 하고 어느 때보다 더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 나는 마른 반찬을 조금 씩 해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제일 먼저 집에 온 사람은 남편 이였다.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만 들어도 이제 누군지 안다 . 아들은 빠르고 정확하게 손이 그렇게나 빨랐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네 개를 누르고 들어오고는 데 비해 지혜는  천천히 정확하게 누른다. 남편은 꼭 급하게 치다가 마지막 번호를 한 개 틀리고는 다시 번호를 치고 들어오곤 한다. 한 번 삐빅하고 두 번째가 되서야 열리는 문. 남편. 정답이다.

 

 "여보. 나왔어 ."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계이름으로 따지면 높은 솔에 머물러 있다. 내가 전화 받을 때마다 기분 좋아 지는 데 한 몫 했다.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을 보고는 잠시나마 나의 아픔을 잊는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양손 가득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들고 왔다. 오늘은 사과였다. 그는 빠르게 씻고 와서는 저녁 차리는 것을 돕는다. 차례로 지혜와 지호가 들어왔다 . 오랜만에 한 식탁에서 갖는 저녁식사이다. 말해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애꿎은 젓가락만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한다.

 

 "여보 , 얘들아. 엄마 내일부터 입원해 ."

 

 잠깐 정적이 흘렀다. 폰을 보던 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고 , 지혜와 남편은 동시에 물었다.

 

 " . 어디가 아픈 거야? "

 " 췌장암 말기래. 근데 나 걱정은 하지마. 나는 괜찮아 ."

  애써 덤덤한 척 했다. 수도 없이 이 그림을 그려왔기에 그래도 그나마 이정도 말 할 수 있었다 . 남편은 잠시 수많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딸은 애써 흐르려는 눈물을 참고 입을 오물오물 거리고 있다

​​

 "이제 너희 집안일도 할 줄 아니까 엄마가 마음 편하게 가는 거야. 둘이 잘 나눠서 하고 ."

 "엄마. 나 돈 벌면 같이 여행가기로 했잖아. 나는 아직.."

  참고 있었던 딸의 눈물이 한마디 하고는 왈칵 쏟아져 내렸다 .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건강했더라면 같이 가 줄 수 있었을 텐데 . 그건 좀 아쉬웠다. 생각해보면 이 나이 먹도록 비행기 한 번 타보지도 못하고 결혼하고는 집을 하루 이상 비워 본 적도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을 비우고 가는 곳이 병원이라니.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내가 울면 더 아파할 가족들이 보고 있으니. 그 날 밤은 유독 시계바늘 소리가 크게 들렸다 .

 입원을 했다. 사실 딱히 나는 치료할 방법은 없다 . 세계적 CEO 였던 스티븐잡스도 췌장암은 이기지 못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고 주부 일 뿐. 아니 지금은 그냥 환자다 . 병원에서는 세계적인 CEO 나 주부나 모두 아픈 환자에 불구했다. 의사들은 우리 모두를 환자분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사회에서의 직업도 직위도 중요하지 않다 . 환자복을 입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본다. 거울 속에는 나의 어머니가 보였다 . 어느새 닮아 있었다. 나는 혼자서 투병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간병인을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 일을 그만 두고는 주위에 직장을 구했다며 출퇴근길 마다 들렀다. 집에 있을 때보다 남편을 자주 볼 수 있는 이곳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나는 환자복을 입고 야윌 대로 야위어 갔다. 그래도 그는 언제나 내가 가장 예쁘다고 했다. 내가 보는 나의 모습보다 그가 봐주는 나의 모습이 좋았다. 잠시나마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를 울렸던 나의 20 대를 떠올려 본다.

 

 지혜는 항상 걱정스러운 얼굴로 병원을 찾고는 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좀 밝다 .

 “엄마 . 나 취직했어.”

 “와 뭐야 . 우리 지혜 이제 직장인이네 .”

 “. 이제 걱정 안 해도 돼.그러니까 나랑 곧..”

 

 지혜가 말을 채 끝내기 전에 심한 복통이 찾아 왔다. 여느 때보다 더 심했다. 숨 쉬기가 어려웠다. 지혜가 급하게 간호사를 부른다. 위험을 감지한 간호사는 당장 의사를 불러 온다. 의사는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는 이제 손 쓸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지혜는 급하게 연락을 하고는 잠시 후, 아들과 남편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그 때 까지 뛰어 준 나의 심장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사랑해.”

   

  그게 마지막 나의 기억이다. 나는 행복했다. 나를 그래도 끝까지 바라봐 주던 가족이 있었다. 조금 더 함께 한 추억들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만 조금 있을 뿐. 아플 줄 알았더라면 멀리 가는 남편을 가지 말라고 붙잡으며 함께 밥이나 몇 끼 더 먹을 걸 그랬다. 아이들이 각자 자기 일을 해야 한다고 바쁠 때면 한 번씩 같이 시간도 보내자고 한 마디라도 꺼내 볼 걸 그랬다. 나는 항상 건강할 줄 알았다. 아니 적어도 아이들이 결혼하고 자식을 놓을 때 까지는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딘가에 쫓기며 살아가는 삶은 마지막도 결국 쫓기며 끝나기 마련이다내일은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그 때는 별 생각 없이 들었는데 눈을 감고 나서야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겠다. 지금쯤 아이들과 남편이 내 편지를 읽었겠다. 하루를 끝내기 전에 나의 편지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나와 같은 후회는 하지 않길 바라며.

 

 ‘오늘을 잊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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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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