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차 창작콘테스트 - 붉은 원피스

by 상상 posted Dec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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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원피스

                                                                                                  

   나는 서랍장을 열고 붉은 원피스를 꺼냈다. 붉은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 얼굴엔

붉은 기가 돌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요즘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얼굴로 열이  오르며 붉어진다. 의사는 여성 호르몬의 수치가 떨어졌다고 했다. 뭐가

급하다고 반갑지 않은 소식이 남들보다 먼저 오는지. 이마의 땀을 닦고 나서 원피스

를 바닥에 펼쳤다. 색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선명한 붉은색이다. 목선 가운데로

가윗날 한쪽을 집어넣다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였다.

준을 처음 만난 날 입고 있던 옷이다.

 

영어 회화 첫 개강 날이었다. 강의실 문을 여는데 남자들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나는 반을 잘못 찾은 건 아닌가 하는 당혹감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학원으로부터 받

은 문자를 확인 후  다시 들어갔다. 구부정하거나 삐딱하게 앉은 남자들 사이로 유

난히 곧추앉은 남자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출입문 쪽의 빈자리에 앉으면서 강사에게

인사를 했고 강사는 이름을 물었다. 나는 이름을 말한 후 영어 닉네임은 일부러 만

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내친김에 내 소개까지 해버렸다.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하는

절차라서 부담 없었다. 강의실 문을 열었다가 닫아버린 것은 잘생긴 남자들을 보고

놀라서란 변명도 했다.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곧추앉은 그만 웃는 듯 마는 듯했다.

 

옷을 잘못 입고 나오신 것 같습니다. 전 붉은색만 보면 덤벼들거든요. 수업이 끝나

고 둘이 펍으로 갔을 때 그가 했던 첫마디였다. ? 한 옥타브 올린 목소리로 반문했

더니 순진하단 듯이 쳐다보았다그는 안주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고 말했다. 붉은색은 위험하다고 . <, >탕웨이 립스틱이, <화양연화>

장만옥 의 옷이 그렇다고 했다 . 그는 말끝에 십 년 전 , 첫 애인도 붉은색을 즐겨

입었다고 혼잣말을 했다. 불륜이 연상되었지만 내 나이의 무게를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과거형인데 , .

  대화는 붉은색으로 이어졌다. 그가 붉은색에 꽂힌 이유는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사진집 때문이라고 했다. 붉은 소파를 들고 다니면서 전 세계의 다양한 장소에서 다

양한 사람들을 촬영한 기록이라고 했다. 사진집을 덮고 나서도 사진 속의 붉은색이

떠올랐단 말도 덧붙였다.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리거나 머리

를 쓸어 올렸다. 뜸을 들이면서 말하는 습관은 그를 신중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지금도 사진작가는 지구 어딘가를 돌고 있겠죠. 언젠가 나한테도 붉은 소파를

내밀면서 사진을 찍자고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붉은색은 흔드는 색인데 말이죠

이 남자에게 붉은색은 어떤 의미일까. 사연이 있어 보여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반 이상 남은 치즈는 마르고 손도 안 댄 크리스털 통 속의 얼음은 물로 변해있

었다. 나는 트러플 치즈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그도 나를 따라했다. 나는 치즈

를 입안에서 굴렸다. 치즈가 녹으면서 입안에 퍼지는 향처럼 그와의 관계도 천천히,

오래 가길 바랐다.

꼿꼿이 앉아있는 그를 보고 나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신이 맘에 듭니다. 술친

구 합시다. 헤어지기 전 그가 했던 제안이다. 자신에 찬 말투와 억양이 좋았다.

리는 영업이 끝날 때까지 한 장소에 있었다.

 

  우리는 학원을 핑계 삼아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났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수업의

연장일  때가 많았다. 질문을 받으면 답을 길게 할 때도 있지만 워낙 말수가 적은

그였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술병을 가운데 두고 얼굴만 마주 보았을지도 모

른다.

  하루에 영어 한 문장씩을 같이 만들자는 제안을 했을 때 , 그는 오글거린다는 반

응을 보였다. 사랑은 유치할수록 좋다며 구슬렸다. 무슨 제안을 하면 처음엔 손사래

를 치다가도 결국 들어주었다. 내가 문자를 보냈다. ‘나는 오늘……한 사람이 운을

띄우면 상대가 문장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답이 왔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느라 점

심은 걸렀지만 술을 거를 수는 없다. 술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 문장에는 내가 없고

내가 원하는 답도 없다. ‘배신이란 단어가 첫사랑과 관련된 말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얘기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몸통의 일부만 들이미는 식의 문자는 애매할 때

가 많았다. 다음 날은 그가 먼저 문자를 보내왔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나는 그가 원하는 답을 보냈다. 그는 주로 답글 대신 이모티콘을 보내왔는데 역시

글자는 한 자도 없고 술병 모양의 이모티콘만 도배되어 있었다. 그나마 하트 이모티

콘 하나를 선심 쓰듯이 끼워 보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나를 안달 나고 갈증 나게 했

.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의 독사진은 모두 옆모습이었다. 옆에 앉아서 그의 옆모습을

감상하는 게 좋았다. 그의 뺨을 쓰다듬거나 콧날에 손가락을 대어 보기도 했다. 거만해

보이는 삼각형 눈썹과 그 위로 생긴 주름, 힘차게 뻗은 코, 약간 나온 턱선이 이루는 옆

얼굴 라인은 나를 설레게 했고, 뜬금없이 내뱉는 한마디는 나를 끌어당겼다. 아주 예뻐

. 이 말을 듣고 잠을 설쳤다. 얼굴이 예쁘다는 건지, 목소리가 예쁘다는 건지, 맘씨도

예쁘다는 건지, 옷만 예쁘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편한 대로 해석하고 나서야 잠

을 청할 수 있었다.

  그와의 데이트는 계획 없이 이뤄질 때가 많았다. 그날의 기분에 맞는 제안을 해서 나

를 들뜨게 했다. 술을 마시다 말고 바다를 보러 가자며 서울역으로 나를 끌고 가거나,

홍콩으로 밤 도깨비 여행을 떠나자며 집 앞으로 오기도 하고, 새벽에 잠결 묻은 목

소리가 듣고 싶다며 전화를 주기도 했다. 그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나에게 직진했고,

당은 할 줄 몰랐다. 또한 따지지도,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종일 그에 대한 생각을 달고 살았다.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궁금했다. 나이가 들어도 연

애 감정은 젊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한 번은 내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일할

땐 여자 생각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눈을 흘겼더니 내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밉지만

밉지 않았다. 그의 무뚝뚝한 성격과 무심함과 속말을 잘 안 하는 점이 서운하면서도 민

준바라기를 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가족 얘기를 아끼는 편이고 어머니에 대

해선 아버지를 떠났다고만 말했다. 길을 걷다가 다정한 모자간을 보면 한참 바라보면

서도 자식을 낳고 싶지 않다고 말 한 적도 있다. 그 사람 속의 풀어내지 않은 응어리

나 지나친 음주를 비롯하여 못마땅한 점들이 생겨났다. 그런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에

너지 소모가 심해져서 몸까지 아프고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였다.

 

  여전히 가윗날은 원피스의 목선을 향해 있었다. 애꿎은 빈 가위질만 몇 번 했다.

위가 잘 드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은빛 날을 옷 끝에 대어 본다는 것이 그만 가

위질 돼버렸다. 옷은 망가졌고 다음 동작으로의 연결은 쉬웠다. 서걱서걱 소리와 함께

옷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결의에 찬 가위질을 하면서 그뿐 아니라 그녀와의 관계도 잘라

내리라 결심했다. 그와는 뜨거운, 그녀와는 따뜻한 관계였다. 십 년 동안 언니, 동생으로

지내던 관계가 일 년을 사귄 남자 때문에 폭격을 맞는다고 생각하니 입안에 쓴 기가 돌았

. 내가 아프면 죽을 쒀서 달려오고, 무조건 내 편이던 그녀를 주저 없이 끊어내려는 나

를 보면서 질투가 지나치면 가윗날이 그녀를 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굳이 잘못이 있다면 그날 하필 붉은 원피스를 입고 나왔던 일밖에.

옷의 조각을 뭉쳐서 방구석으로 던졌다. 터지거나 깨지는 파열음이 들려야 속이 조금이나

마 후련할 텐데, 옷 조각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흩어져서 방만 지저분해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날의 일이 또 떠올랐다.

 

  이른 저녁, 민준의 손을 잡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를 채 둘러보기도 전에 입

구에 앉아있던 그녀가 일어났다. 반듯한 이마처럼 예의 바른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

. 나는 그녀를 대학원 모임에서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같은 부서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상대를 잘 설득하는 점이 영업부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이 아닌 , 입고 있는 붉은 원피스에 눈이 갔다. V 넥 칼라와 굵

은 벨트가 부착된 플레어 원피스였다. 살짝 보이는 가슴골이 신경 쓰였다. 그가 손을 놓으

려고 하자 나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

  민준과 그녀가 네 번째 만나는 자리였다. 함께 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가 그녀에게 꽃

다발을 내밀며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잡았던 손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나는 그에

게 꽃 한 송이 받아 본 적 없다. 책이나 운동 기구를 받은 적은 있었다. 꽃을 사 오자는

제안은 그가 했고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프리지어 무

척 좋아해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의를 생각해서 그럴 수 있지 하고 쿨하게 넘기려는데 그의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그녀

의 반응이 가시처럼 걸렸다. 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지 않나요, 그가 말했다. 꽃을 싫어

하면 더는 여성이 아닌 거죠, 그녀가 답했다.

  쟤는 왜 여성성을 운운하는 건지.

 

  셋은 거의 동시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 근황을 물었고 나는 듣고 있다가 그녀가 일

을 잘한다는 칭찬으로 끼어들었다. 그녀가 웃으며 치아를 드러냈다. 치아가 하얗다는 생각

과 동시에 내 치아 색이 궁금해졌다. 창으로 들어오는 지는 햇살이 그녀의 상체를 비췄

.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는 듯했다. 그녀가 돋보였다. 헤어샵에서 손질 받고 왔다는 단발

머리도 세련되어 보였다. 특히 애교로 빼놓은 귀밑머리가 여성스러움을 더했다. 그녀는

탕웨이장만옥 이었다. 이 애가 이렇게 미인이었나.

  메뉴판을 들어서 하나는 그녀에게, 다른 하나는 나에게 내미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까 .

그녀는 메뉴를 고르느라 눈을 내려뜨고 있었다. 끝이 살짝 말린 긴 속눈썹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메뉴판을 들여다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양이상의 눈매가 유혹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왜 미처 몰랐을까? 전엔 그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의 비교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옷 입는 감각도 떨어지

고 머리 손질도 서툰 편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입는 옷은 홍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

는 제품이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으로 차양을 만든 그녀에게 나는 벽으로 붙어 앉으라고 말

했고 그는 일어나서 뒤에 있는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 사이 직원이 와서 물을 놓고 갔다.

시야가 편해진 그녀가 말했다. 형부, 센스만점이세요. 그녀를 위한답시고 내가 한 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나는 입만 씰룩거렸고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비위가 틀리기 시작했

.

 

  지난 세 번의 만남과 달리 그녀가 신경이 쓰였던 이유는 몇 주 전 민준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그의 후배 제안을 전해 듣고 나서부터다. 결혼 적령

기를 막 넘긴 여자라고 했다. 게다가 후배는 띠동갑도 커버할 수 있는 능력자라며 민준

을 추어올렸단다. 뭐라고 대답했냐고 물었더니, 됐다, 한마디만 했단다. 그는 왜 나의 존재

를 말하지 않았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된 기분이었다.

날 이후로 내 나이가 더 의식되었다. 평소에도 그보다 나이 들어 보일까 봐 전전긍긍하

는 나인데.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연하이고 내 후배는 그보다 다섯 살 아래다. 말하자면 그

녀와 나 사이엔 긴 시간이 틈입해 있다. 외모로는 그녀에게 밀리지 않는다 해도 탱탱한

피부와 싱그러움은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부분이었다. 나의 젊음이 부럽다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

  각자 좋아하는 메뉴를 시켜서 나눠 먹기로 했는데 민준은 굳이 파인애플 볶음밥을 추

가했다. 셋 다 입이 짧아서 남길 텐데도 인색하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만류하지는 못했

. 그는 내가 아끼는 후배의 생일이니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후배님,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십니다. 그가 말했다. 내 동의를 바라는 듯한

그녀의 눈빛과 마주친 나도 반응을 보였다. 붉은색이 잘 어울린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민준은 고기를 잘라서 내 접시 위에 그리고 그녀의 접시 위에

도 올려주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는 선을 넘어주었으면 할 때는 넘지

않고, 넘지 않아야 할 때 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음식을 먹기 전에 내 접시에 먼저

덜도록 길들이는데 한 달 걸렸다.

 

  

  후배님,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가 고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

이며 행동이 과했다. 자꾸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가닿았다. 생리를 건너뛰어 민감해진

탓일까, 생리가 석 달째 소식이 없다. 이제부터 피부가 쪼그라들고 목소리가 굵어지는

일만 남은 걸까, 식탁에는 매번 콩이나 두부를 올리고, 흰 머리카락을 뽑고, 약국에 들러

윤활제를 사고, ‘산부인과 성형 이란 광고에 시선이 가게 될 거라는 선배의 말이 떠올랐

. 그러면서 덧붙인 한마디, 부정할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나는 먹기만 했고, 둘은 대화를 이어갔다. 직장이 우리 회사 근처라면서요? 식사 대접

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야릇한 기분이 드는 순간 민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

응했다. 말로만 그러는 거 아니죠? 그의 말이 내 귀에는 기다렸어, 로 들렸다. 그녀의

이름은 물론 회사도 알고 있으니 맘만 먹으면 나 몰래 연락하는 일은 쉬웠다. 나는

소스병을 집는 척하면서 피클 접시를 엎었다. 접시는 뒤집어지고 그녀의 붉은 원피스에

국물이 튀었다. 나는 미안하단 말만 반복하며 공중에서 두 손을 떨기만 했다. 그가 얼른

물티슈를 건넸다. 얼룩이 표가 나지 않아 붉은색 국물이 야속했다. 그녀의 붉은색 옷도

야속했다. 무엇보다도 봄날 저녁의 붉은 노을이 더욱 그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먹기 시작했다. 대화는 멈추고 먹는 소리만 들리는데 느닷없이

그녀가 재채기를 했다. 그가 블레스 유 .’라고 말했다. 그녀는 간격을 두고 재채기를

두 번 더 했고 그는 모두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그의 시선은 나를 아랑

곳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쟤는 별 걸로 다 관심을 끄네, 나는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그녀에게 밀면서 다 먹으라고 했다. 어머 , 튀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

했다.

 

   나는 밥을 깔짝거리다가 파인애플 조각을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얼른 주워서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개 간식 던져주듯이 그녀의 접시에 올리면서 인간이 어디까지 치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내 맘이야. 작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움찔했다. 다행히 그는 밥을 먹다 말고 문

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둘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디 불편해요? 후식이 나왔을 때 그녀가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색함을 모면하기 위해 갑자기 복통이 온다

며 일어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나를 일으켜 세웠

. 비틀하면서 그의 품에 기댔다. 그녀에게 우리 둘 사이를 과시하고 싶었다. 그가 나를

붙들면서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업힐래요? 나는 참을만하니까 집으로 데려

가 달라고 했다.

그의 등에 업혀서 집에 간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서운함을 넘어서 원망이 되

던 날, 술을 작정하고 마셨다. 그날 나는 필름이 끊긴 척했고 그의 등에서 시체처럼 늘어

져 있었다. 그는 나를 업고 걸으면서 내가 듣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미안하다. 앞으로 잘

할게, 란 말만 반복했다.

  그가 직원을 불러 계산을 치른 후 나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왔고 그녀도 내 핸드백을 들

고 따라 나왔다.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꺾인 상태였다.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4

이 반갑지 않다고 했었고 4월이 가까워지면서 불안해 보였다.

  나는 핸드백을 건네받으며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싶

은 충동을 느꼈다 .

   

그 후로 불길한 기운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영어 문장 주고받기는 흐지부지해졌고,

비록 오늘도 수고했어요, 란 반복적인 내용일지언정 매일 보내오던 문자도 며칠씩 걸

렀다. 대신,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를 가끔 보냈다. 4 월이 두렵다고 했다. 한 사람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있다고도 했다. 적어도 내가 일회용 밴드가아니

란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었다. 처음엔 설명 없는 한 줄의 문자나 말들이 호감으로 느껴

졌다. 자신을 맘껏 열어요, 단 지갑은 열지 말고. 라든가 내가 음식을 못 한다고 걱정

하면 흔한 게 식당이죠. 라는 말로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곱씹으면 의도를 알 수 있는 말도 했지만 최근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

어놓았다.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나중에 설명해주겠다고 미뤘다. 캐묻는 여자는 싫다고

했었다. 그 또한 캐묻는 성격이 아니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쪽이었다. 그는 내 몸을

닳도록 쓰다듬으면서 내 맘을 쓰다듬는 일은 서툴렀다. 서운한 감정을 모았다가 지나간

일까지 몰아서 퍼부으면 당신은 기억력이 너무 좋아, 란 말로 입막음을 해버렸다. 내가 토

라지면 손을 잡아주었지만, 구체적인 말로 무엇 때문에 미안하단 사과는 하지 않았다.

투는 일이 있어도 아니, 일방적으로 내가 골을 내도 데이트를 일주일 이상 건너뛴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말다툼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두 주째 만나자는 말이 없

이 지나갔다. 변명도 없이 지난주는 건너뛰었다. 그냥 일이 있다고만 했다. 늘 그렇듯이

사소하게 시작된 나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상상이 더해지고 그 로 인해 잠까지 설치고

업무에 지장까지 주게 되면서 부피를 키워갔다.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그가 화가 난 나

를 방치하다가 어느 날 연락을 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자 그를 안고 싶어졌다. 선배는 남

편 외도의 낌새를 알아챘을 때, 고갈된 성욕이 다시 생겨났다고 했다. 남편의 바람이 지나

간 후에도 선배는 몇 년간 마음을 끓이더니, 어느 날  자기 파괴적 행위를 멈추겠다고 선

언했다. 늘 남편이 우선이었던 선배가 자기중심적으로 변했다. 인문학 강의를 듣고 그림

을 배우러 다니고 주말에는 그림 소재를 찾아서 밖으로 나갔다. 선배는 일상의 배경에 자

신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켜 그려 넣고 자신만의 표식을 해두었

. 선배는 길바닥의 비둘기가 되기도 하고, 빈 벤치가 되기도 하고, 때론 빗방울이 되기

도 했다. 그림 그리기에 빠지면 남편의 동선에 둔감해지고, 집을 비울 때도 카레를 한 솥

끓여놓고 남편에 대한 신경을 끊고 나온다고 했다. 선배의 표정이 편해졌다. 나도 선배처

럼 되고 싶다.

 

  나는 한 글자만 그에게 보낸 후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주말에 만나자고 했

. 그녀의 생일 이후로 회사에서 냉랭하게 대하다가 전화를 하니 놀랐겠지, 그녀는 선약

이 있다며 미안해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린 건지 내 맘이 불안한 건지 모르겠지만 여

느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혹시…… 과한 상상이 더해갔다. 두 사람에게 외면당한 나는 거

북이 걸음 처럼 지나버린 주말의 끝에 있었다.

  가위를 든 채로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고 억측은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들어갔다.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잘라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휴대폰이 울렸다. 경고음처럼

들렸다. 그가 만나자고 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그와 자주 만나던 집 근처의 펍으로 갔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데 평

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먼저 절교 선언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구석 자리에서 이미 취해있었고 위스키는 바닥나 있었다. 그의 몸이 좌우로 약씩

흔들렸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가 마주 앉자 한참 뜸을 들이더니 미안하다고 했

. 그의 눈도 목소리도 풀려있었지만 말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목소리가 너무 무거워서

내가 따지고 들 틈이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만 만나자고도 했다. 역시 말이 짧았다.

매달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변명이라도 댔다면 내 연륜을 생각해서 약간의 너그러움을

발휘할 수도 있었는데. 매력으로 다가왔던 적은 말수가 헤어지도록 결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입을 통해 결별 이유를 듣고 싶었지만 말해 줄 그도 아니고

내가 먼저 묻도록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의 뺨을 후려치는 거로 끝내고 싶었

.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를 떠올렸다. 뭔가를 숨기는 듯했던 전화 목소리. 가증

스러웠다. 나의 미래를 망쳐 놓은 그녀의 뺨으로 머리로 숱하게 손이 올라갔다. 그와 그

녀를 서로의 입술이 닿는 거리까지 한 프레임 안에 넣었다가 그녀만 프레임 밖으로 밀쳐

내기도 했다. 머릿속으로 별별 상상을 하는 와중에도 그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 무던히 표정 관리를 했다. 주먹을 쥔 손이 떨렸고 얼굴은 뜨거웠다. 고개를 숙인 그의

몸은 여전히 좌우로 흔들릴 뿐이었다.

 

  긴 침묵 끝에 우리는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서 그는 나를 안으려 했다. 그를

밀쳤다. 그는 저항하는 나를 다시 강제로 안았고 나는 팔의 힘을 풀었다. 그는

오랫동안 나를 부둥켜안았고 내 뺨이 눌렸다. 내 짐작이 틀렸는지도 몰랐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걸까. 그는 내 귀에 대고 잘 살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어둠 속으로 비척비척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귓전이 얼얼했다. 현기증이 났다. 눈앞의 풍경이 흔

들려 보였다. 나한테 정착하고 싶다던 그를 무엇이 무너지게 한 걸까. 우리의 관

계는 불면 날아가는 먼지만도 못했던가. 상처는 먼지처럼 날리고 사랑만 가슴에

담으라던 선배의 말에 반대되는 꼴이라니.

 

  화가 치밀어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고 들어온 후로 얼굴이 더 화끈거

리고 머리에 불을 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열을 식혀줄 뭔가가 필요했다. 그가 말한

사진집이 생각났다. 그 때문에 생긴 열을 그와 관련된 물건으로 식히려 하다니,

애하면서 이런 모순투성의 나를 종종 발견했다. 사진집을 꺼냈다. 그의 말을 듣고

바로 샀지만 꽂아두기만 했던 책이다. 냉동실에 얼려 둔 수건도 꺼냈다. 침실 창문

을 열고 창틀에 앉아서 지퍼백에 넣은 얼린 수건을 머리에 얹었다 책을 펼쳤다.

은 소파에 앉거나 눕거나 기대서 찍은 사람들 사진과 함께,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도

실려 있었다. 행복 , 소망 , 두려움 등을 묻는 내용 중에서도 사랑이란 단어에 시

선이 갔다. 처음 만난 날, 사랑은 개뿔이라고 했던 민준의 말이 생각났다. 거친 표현이

무례하면서도 맘에 들었고, 사랑이 개뿔이 아니란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

. 아픔이 있을 거라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그를 포용하는

방식은 그를 더 알아가고 어루만지는 식이 아니라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급

급함이었다. 알게 모르게 그가 연하라는 사실을 의식했던 모양이다. 서로 부딪히면서 관

계를 촘촘히 다져 가지 못했다. 깊은 시간이 아닌 깊은 공감이 부족했다.

 

  머리가 시리다 못해 아팠고 잠시 후엔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수건을 집어던졌다.

하필 조각난 원피스 옆에 떨어졌다. 저걸 깁는다 한들 원상태로 안 되겠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 후회하지는 않았다. 창가에서 내려와 창문을 닫고 의자로 옮겨 앉았

.

사진집을 마저 보았다. 중간 중간에 그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면 잠시 멈추거나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가야 했다. 때론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찬물을 마시기도 했다. 상념

을 물리치면서 사진집을 끝까지 읽었다.

  작가는 하필 붉은색을 택했을까? 사진 속 배경은 무채색 같은 일상이고, 소파의 붉은

색은 삶을 추동하는 자극제인가, 아니면 죽음을 향한 표식인가. 작가가 쉬지 않고 사진

을 찍고 인터뷰할 사람들을 찾으러 다니는 행위도, 민준이 좇는 붉은색도 같은 이유일까.

  시계를 보니 그가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글을 확

인해 보기로 했다. 새벽 5시였다. 그의 블로그로 들어갔다. 30 분 전에 올린 글이 보였

. 노크도 없이 그의 방문을 연 느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떠났다. 그때 나는 중 2 였다.

뒤늦게 찾아온 나의 첫사랑도 약혼식을 올린 다음 날 떠나갔다.

둘 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4월의 이별이었다.

그 후로 나는 몇몇 여자들을 만나왔다.

4월이 되면 자꾸 뒷걸음질 친다.

나의 연애는 자꾸 미끄러진다.

  그녀는 불은색 원피스가 무척 잘 어울렸다.’

 

  술 탓이었는지 오타가 더러 있었지만 정신은 멀쩡한 듯했다. 처음 두 문장을 읽고 그와

나 사이가 멀게 느껴졌다. 나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건 뭐지? 그는 여자를

좋아한 걸까, 붉은색 원피스에 집착한 걸까, 한 줄 띄고 마지막 문장이 있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그답다. 글에 나오는 그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문장을 붙잡고 있는 한,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설령 마지막 줄을 붙여 썼다 한들 그에게 매달리지 않기로 했

다 후배 때문에 흔들릴 믿음이라면 여기서 멈추는 편이 낫다. 계속 만나는 한, 마음을 졸

이고 나 자신을 들볶을 테니. 젊게 보이려고 눈썹 끝을 뭉뚝하게 그리거나, 젊은 여자를

향하는 그의 시선에 불안해하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몸매를 강조하는 옷에 집착하

지 않기로 했다. 내 나이와 성별에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나 자신을 놓아주기로 했다.

20대의 나였다면 달랐겠지. 60대의 나라면 어땠을까.

망설이다 그의 연락처와 카톡을 차단했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휘발되고 나

는 본래의 하나로 돌아왔다. 그의 옆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가 한 말이나 행동이 아닌 옆

모습이라니.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맞는 듯하다. 개뿔, 없는 걸 잡으려고 허공에다 헛손질을

한 건가.

  

사랑에 관한 사진집의 인터뷰 내용을 생각하다가 사랑이 끝난 후에 대해 생각하다가 씁쓸함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입이 썼다. 밤을 새우고 나니 입안이 텁텁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출근도 해야 하므로

정신을 차리기에 적당한 뭔가가 필요했다. 냉장고에서 레몬을 꺼냈다. 혀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상큼

함과 뒤에 이어지는 달콤함이 좋아서 기분전환으로 한두 조각 먹곤 했다. 습관적으로 신맛과 단맛이

없어질 때쯤 레몬을 뱉어 내곤 했다. 이번엔 뱉지 말고 끝까지 씁쓸한 맛을 음미해야겠다. 한 입 베어

물었더니 과즙이 사방으로 튀었다. 천천히 씹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붉은색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음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엔 일상으로 돌아

가야 한다. 나는 웃는 법을 잊어버리고, 뭘 한들 재미도. 의미도 없을 것이다. 휴대폰을 닳도록 만지작거

릴 테고, 매일 밤 그의 블로그 언저리에서 망설이겠지

 나는 더 젊은 남자를 만나서 더 안달복달해야 한다. 그는 더 많은 여자를 떠나보내고 더 많은 실연을

겪어야 한다. 더 허우적거려야 극복하는 법을 터특하겠지. 레몬의 씁쓸한 맛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떤 사물을 봐도 그를 떠올리지 않게 될 때까지. 그러다 보면 붉은색을 보아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날이

오리라. 아니, 다시 붉은색 옷을 즐겨 입고 붉은색을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

  그녀에게 말해줘야지. 그날 붉은색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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