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삶태기>

by 재이0803 posted Dec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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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태기

 

# 0.

나는 오늘, 자살하기로 했다. 사실, 어제나 그저께 죽었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고 이건 내일이라도 마찬가지다. 언제 끝내더라도 변하는 게 없는 시간은 쌓여봤자 별 볼일 없는 삶이다. 그래서 자살하기로 했다. 시작은 내 멋대로 못했으니 내 멋대로 끝이라도 내보겠다는 찰진 결심이다.

러시아워가 끝난 늦은 아침, 4300원에 산 슬리퍼를 신고, 2000원 짜리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가는 길이 제법 새롭다. 일주일 또는 이주에 한 번 다니던 구면의 길이 낯선 낌새를 낸다. 익숙한 길에 가벼운 슬리퍼 발자국을 내는 마지막 날이라 그런 건가. 괜스레 멍울지는 웃음에 멋쩍어진 나는 애먼 뺨을 때린다. 찰싹! 찰싹! 웃지 말자. 언제 사라져도 모를 가벼운 인생, 오늘만은 무겁고 진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뽀득뽀득한 몸과 마음으로 마무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건 일종의 내 자존심이다.

목욕합니다.’

위태롭게 서 있는 나무 입간판에 시뻘건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내 나이와 비슷하게 30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켜온 오래된 목욕탕. 몇 번이고 빨간 페인트로 덧칠된 통에 글씨는 목욕합니다인지 목욕함니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오랜만에 왔네? 일이 많이 바빴나 봐? 게임 회사 다닌댔던 그 총각 맞지?”

물음표를 연쇄적으로 생산해내는 목욕탕 아줌마에게 꼬깃꼬깃한 4000원을 내민다. 잔뜩 늘어진 회색 고무줄에 엮인 25번 열쇠가 4000원의 값을 치르고 돌아온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고무줄을 손목에 두르고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간다. 볼에 살이 옴팡지게 내렸네! 젊다고 안 챙겨 먹으면 쓰나! 목욕탕 아줌마의 목청이 계단을 따라 달려올 기세로 쩌렁쩌렁 울린다. 괄괄한 목소리에 등이라도 떠밀린 듯 남탕이라고 적힌 천을 가르고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간다. 일주일에 한 번, 새로운 물로 갈린 목요일. 나른한 평일 오전인데도 몇몇의 성성한 흰 정수리들이 옷을 벗고 입느라 벌써부터 분주하다.

김 씨 총각, 팔뚝이 아주 실해 보이는데 이 늙은이 등 좀 밀어 줄랑가? 저저, 500원에 돌아가는 기계는 영 미덥지가 않아서.”

칭찬 다음에 부탁이라. 실한 팔뚝을 자랑하고 싶은 남자의 환심을 자극해 급기야 손바닥에 초록색 이태리타월을 장착하게 하는 할아버지의 입담은 연륜에서 오는 삶의 팁일 것이다. 초록색 이태리타월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등살이 움직인다. 드문드문 희미한 부항 자국도 보인다. 죽은피를 쪽쪽 빨아내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시도한, 누르스름한 흔적이 어깻죽지를 뒤덮고 있다.

죽을 때가 다 됐나, 때 미는 것도 힘에 부쳐. 총각 나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을매나 좋을까. 등골 휘어가며 애 키우는 거 말고 튼튼한 다리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인생이나 즐길 텐데.”

젊음을 애틋해하는 한탄이 육체에서 깎여 나온 흔적들과 함께 조로록, 하수구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비누 거품으로 등을 씻고 탕에서 뜨끈한 물 한바가지를 끼얹어주자 할아버지가 선심으로 팩에 든 커피 우유를 건넨다. 유통기한이 오늘까지라 선심이라 표현하기엔 자존심 상하지만 커피 우유의 입장을 가련하게 여겨 고맙게 받기로 한다. 오늘이 지나면 커피 우유는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니까. 고작 하루 차이로.

노인이 빳빳하고 날카로운 카드를 꺼낸다. 저기, 거시기, 블랙커피 하나 주쇼. 유명한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알루미늄 캔을 가리킨다. 마누라가 먹으라고 챙겨준 커피 우유보다 서너 배는 비싸다. 차가운 블랙커피가 목구멍을 지나가자 뜨거운 열기가 시원하게 수그러든다.

근데 좀 전에 욕탕 들어온 그 놈은 뭐 하는 놈이랴. 젊은 놈이 일도 안 나가나. 남들 다 일할 시간에.”

뭔 컴퓨터 게임 회사에 다닌다던데 한참도 전에 잘렸든가, 그만뒀든가 했지 싶어요. 요 근처에 사는데 낮밤 할 것 없이 쓰레빠 끌고 편의점이나 오락실 왔다 갔다 하더라고.”

좁은 동네의 골목골목에는 비밀이 없다. 30년 넘은 목욕탕의 안주인은 구불구불하고 케케묵은 비밀의 요충지를 맡고 있다. 진위의 여부는 관심 밖이다. 중요한 건 퍼뜨리는 역할을 깐깐하게 다해내고, 비밀을 파헤치러 동네 이웃들이 목욕탕을 다시 찾는 것이다.

으이그. 튼튼한 몸 있으면 막노동이라도 하지. 나 젊었을 적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하고, 야근하고, 애 키우고. 그걸 40년 했어, 40년이나. 요즘 것들은 고생을 몰라서 원. 젊음은 돈 주고도 못 산다는데 저 놈처럼 구질구질하게 살 거면 나는 지금이 좋네. 연금 제 때 제 때 나와, 아들놈 딸년이 용돈 줘. 걱정할 게 어디 있어?”

등을 밀어준 젊은 청년의 수고를 금방 잊은 할아버지의 버릇은 별 볼일 없는 동네 구멍가게들을 순회하며 아들의 명의로 된 신용카드로 2500원 짜리 커피를 사면서 으스대는 것이다. 40년 일한 답례로 연금을, 아들딸을 키운 보답으로 남은 삶을 영위할 경제적 보상을 받고 있다는 레퍼토리를 반복하며.

 

* * *

 

# 3.

김 주임, 오늘도 야근이야? 그렇게 열심히 돈 모아서 어디다 쓰려고? 결혼할 여자라도 생긴 거 아니야? 정수리가 훤하게 빈 박 부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갔다. 김 주임 열정은 부서 사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돼서 좋다며 칭찬도 마다 않았다. 토끼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사원들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개인적인 일이니까 내 눈치 보지 말고 퇴근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컴퓨터를 종료시키는 소리, 패딩을 챙겨 입는 비닐 바스락 거리는 소리, 안도의 한숨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딩동. 사내 메신저에 새로운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제가 오후에 실수해서 난 버그 때문에 야근하시는 거죠, 김 주임님? 죄송해요. 제가 도울 건 없을까요. ㅠㅜ'

'괜찮아, 은영 씨. 1시간만 바짝 하면 끝나는 거니까 걱정 말고 퇴근해. 다음부터는 크로스 체크 잘해주면 돼. 너무 기죽지 말고.’

감사합니다, 주임님! 배울 점이 많아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내일 제가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할게요. 출근하실 때 커피 사오지 마세요! ^^’

답장을 보내고, 답장을 받으니 어느 새 사무실에서 혼자가 됐다. 괜찮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1시간만 하면 끝난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으며 네 실수 때문에 오늘 안에 퇴근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부정적인 말로 타인에게 쓸데없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상처로 미움을 받는 건 달갑지 않았다.

전자 기기들이 내는 대기 전력 소음만 흐르는 사무실이 문득 외로워졌다. 가슴이 묵직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불안함을 선포했다. 아주 쓴, 커피가 필요했다. 식도염에 위염이 겹쳤어요. 병원 신세 지고 싶지 않으시면 커피, , 매운 음식, 밀가루 전부 다 끊으세요. 그럼 무얼 먹으라는 건지 모를 내과 의사의 책임감 없는 처방이 떠올랐지만 지금 이 증상에 커피만큼 잘 듣는 특효약은 없었다. 의자에 걸린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일어났다. 미적거리다 늦은 사원들과 마주치기 싫어 부러 비상계단으로 방향을 돌렸다. 어서 가자, 나를 위한 위안을 사러.

은영아, 그거 들었어? 김 주임 이번 승진에도 미끄러졌다며?”

어어! 나도 모 대리님한테 들었어. 벌써 몇 년째 주임 하는 거래.”

어휴. 김 주임이 저러고 자리를 보존하고 있으니 우리 같은 20대가 올라갈 길이 막히잖아. 눈치껏 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져줬으면 좋겠는데.”

나영이 네 맘이 내 맘.”

은영과 나영은 회사에서 영 시스터즈로 한 묶음 취급당했다. 이름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앞머리 없는 단발이나 엇비슷한 체격, 풍성한 블라우스를 즐겨 입는 스타일 때문이었다. 컴퓨터 화면에 얼굴을 박고 있는 뒤통수를 보고 있자면 누가 은영인지, 나영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그녀들의 마음속에는 쟤보단 내가 낫지, 라는 우월감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사내 찌라시에서 봤는데 곧 해고당할 수도 있다던데?”

리얼로?”

김 주임이 말아먹은 프로젝트가 몇 개야. 이 정도면 회사도 많이 참아준 거지. 후배들도 김 주임 대놓고 무시하는데, . 은영이 너도 오늘 그랬잖아. 버그 낸 거 일부러 그런 거지?”

아니, 혼자 고고한 척하고 있는 게 짜증나잖아. 남들 퇴근할 땐 퇴근하고, 남들 출근할 때 출근하면 좀 좋아. 너어~무 착한데 일은 죽어라 못하고, 후배들 눈치 보이게 제일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니 답답해서 물 살짝 먹여줬어.”

근데 좀 불쌍하다. 좀 있음 마흔 아냐? 홀아비에, 그리고 본가에 할머니였나, 할아버지였나. 누가 아프셔서 돈 보내느라 탈탈 털려서 그 나이에 반지하 월세 산다더라.”

그건 불쌍한 게 아니라 한심한 거지. 난 마흔 돼서 그렇게 지질하게 안 살 거야.”

스파게티와 함께 남 걱정을 시원하게 말아 먹은 영 시스터즈는 예약해 둔 네일 숍 시간에 쫓겨 급하게 일어났다. 나이 마흔에 후배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반지하에서 살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네일을 예쁘게 발라 청담동 고급 Bar에 들러 최소한 수도권 아파트 전세에서 살게 해 줄 남자를 픽업해야 하니까.


* * *

 

# 2.

줄 없는 이어폰을 끼고 밀린 드라마를 보고 있는 대학생, 공짜 믹스 커피를 호로록 거리며 음미하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 ‘, , 부장님.’ 퇴근하고서도 상사의 전화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 ‘이거 상담만으로도 기록에 남는 건 아니죠?’ 간호사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남자. 생각보다 다들 멀쩡했다. 사지를 결박한 환자복을 입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이 난무하거나 초점 없는 동공으로 좀비처럼 늘어진 환자들이 즐비할 거라는 건 참으로도 척박한 오해였다. 36번 고객님, 1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32번 환자가 빠져나온 자리를 메우러 36번으로 호출된 사람이 들어갔다.

몇 번이세요?”

드라마를 보던 대학생이 한쪽 이어폰을 빼고 물었다. 42번이요. 내가 대답하자 시선을 들어 화면에 뜬 자신의 번호를 확인했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네요.”

대학생의 손가락이 가리킨 데는 ‘39번 한주희라는 자기소개가 떠 있었다. 앞으로 3, 40분 더 기다려야 하나. 중얼거리며 대학생 주희가 손목시계를 봤다. 굵은 시곗줄 위로 갈색 흉터가 몇 겹이나 길을 냈다.

안 아파요. 사는 것보다는.”

아저씨 눈빛이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눈빛이기에. 주희가 왼쪽 눈썹을 들썩이며 웃었다. 신선한 주희의 미소를 따라 지었다. 우리는 이렇게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도 있는데 어쩌다 바깥에서 밀려나와 39번과 42번이 되었을까. 조금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참은 지 며칠이나 됐어요. 내일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만들고 있거든요. 일단 오늘을 살아내려고. 내일은 동네 맛집 식당에 가서 김치찌개를 먹을 거예요.”

혼잣말처럼 할 말을 뱉은 주희는 39번이 호명되자마자 나머지 이어폰을 빼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일단 오늘을 살아내려고. 그래,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오늘 생애 처음으로 정신과라는 곳에 왔다. 42번이라는 번호표를 달고.

자다가 깼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뭐죠?”

사라지고 싶다는 거요.”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사라지고 싶은 이유요? 살고 싶은 이유가 없으니까요.”

내 이야기를 모조리 다 이해한다는 듯이 짐짓 고개를 끄떡이지만 핵심을 묘하게 비켜선 시선은 온통 오늘 저녁은 제육볶음이 나으려나,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루하게 움직이는 만년필의 발끝은 39번 주희에게도 처방했을 약을 괴발개발 적어놓고 있었다. 15분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겸연쩍은 대화를 하고 나오니 처방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56천원입니다. 15분에 56천원이라. 손에 남은 건 처방전 밖에 없는데 득에 비해서 실이 너무 컸다. 다시는 오지 말아야겠다. 처음이 마지막이 된다는 건 때로는 경제적인 결단에서 비롯된다.

 

2주치 약을 처방받아 약국을 나왔다. 21세 한주희. 반년이 넘게 주기적으로 정신과 약을 타가는 여학생이 안쓰러웠는지 약국 아저씨는 오늘도 비타민 C를 서비스로 봉지에 넣어줬다. 남들의 걱정이 고맙지도, 남들의 충고가 심금을 울리지도, 남들의 간섭이 도움이 되지도 않지만 이런 동정이나 연민은 괜찮았다. 왜 그리 약하느냐, 왜 버티지를 못하느냐, 힘내면 괜찮아 질 거다. 이해하는 척 느물거리는 말이나 이해 못해서 질책하는 말보다 차라리 불쌍히 여겨주는 게 괜찮았다.

37세 김석기

한 발 늦게 약국에 들어온 42번 아저씨의 약봉지를 흘깃 훔쳐봤다. 같은 2주치 인 거 같은데 주희의 약봉지보다 배가 훨씬 불러 있었다. 하지만 약국 아저씨는 비타민 C를 넣어주지 않았다.

“42번 아저씨.”

약국 밖으로 나와 구부정한 등을 하고 걸어가는 42번 아저씨를 불렀다. 이거. 은박에 사탕처럼 줄줄이 엮인 비타민 C를 내밀었다. 의아한 눈동자가 말을 대신했다. 이거 내일 드세요. 일단 오늘을 살아내야 하니까.


* * *

 

#. 1

13279백 원, 12개월 할부. 요양원 계단에서 미끄러져 엉치뼈에 금이 간 할머니가 퇴원하는 값을 치렀다. 196천 원, 3개월 할부.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의원에 들러 뼈에 좋다는 한약을 지었다.

저거. 저게 위장에 그렇게 용하다더라. 내 옆 침대에 흥남이 할매 알제? 할매가 저거를 꼬박꼬박 먹었더니 똥도 잘 누고 속이 마 편해졌다 안 카나.”

영양제 안 먹은 것도 많은데 그만 사요, 어머니.”

. 니 아들 돈이라 아깝나?”

약국에서 각종 영양제 1539백 원, 4개월 할부. 빼곡하게 인쇄된 영수증에는 비쩍 말라빠진 지갑 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살가죽만 겨우 들러붙어 있는 손자의 지갑은 본체만체 할머니는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약국에서 나오기도 전에 위장에 용하다는 약을 까서 삼켰다. 올해로 아흔 일곱인 할머니가 가진 생명에의 끈질긴 열망, 때로는 그것이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너는 약 제때, 제때 먹고 있지? 빈속에 먹으면 위 상한다며. 엄마가 보내준 반찬이랑 해서 끼니 꼭 챙기고.”

불현 듯 찾아온 엄마는 자취하는 아들 집 냉장고에 반찬과 국을 채워주다가 항우울제를 목격했다. 그리고 동네 목욕탕에 들렀다가 오락실에서 평일 오전의 시간을 축내고 온 아들과 조우했다. 해고와 우울증. 몇 달간 옹송그리고 비밀로 철벽과 가시를 세운 아들의 초췌한 얼굴에도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그저 거친 손바닥으로 뺨을 한 번 어루만져주고, 조금 더 자주 반찬을 보내주기만 했다.

우울증? 집에서 대학 보내줘, 번듯한 직장 있어, 이제 마흔도 안 됐는데 뭐가 문제고? 그게 다 정신력 문제다, 정신력. 둘째라고 애미 니가 너무 오냐, 오냐 키워서 안 그카나. 우리 장남 봐라. 일하면서 결혼도 해서 떡두꺼비 같은 손주도 낳고, 할머니 해외여행도 보내주면서 잘 산다 아이가.”

장남, 장남, 장남. 어렸을 적에는 장남이라는 게 무슨 대통령 같은 직급이나 유명한 돌림 노래라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장남은 미국 가서 번듯하게 살면서도 한 달에 수백씩 드는 할머니의 요양원 라이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장남만 찾았다. 그놈이 어렸을 적부터 장남이라고 고생 많이 했다 아이가. 가끔 괜찮고, 가끔 안 괜찮은 할머니의 기억은 장남이 고등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에 머물러 있었다.

가운데 낀 둘째의 아픔, 장남의 짐 더미 같은 책임감. 인터넷에는 1번과 2번이 매번 내가 더 힘들게 성장했다며 혹독하게 싸워댔지만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 다시 0

목욕은 몸과 머리를 개운하게 만든다. 가벼운 걸음으로 철물점에 들린다. 그러고 나서는 두꺼운 밧줄과 할로겐램프를 산다. 할로겐램프는 위장술이다. 밧줄만 샀다가는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운동회나 체육대회 줄다리기용으로 쓴다며 끊어지지도 않고 튼튼할 거라는 상품 소개를 하는 철물점 아저씨에게 묻는다. 5미터만 살 수 있나요? 피부가 거뭇한 아저씨는 살짝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5미터? 5미터는 따로 안 팔아. 이게 20미터인데 잘라서 팔면 나머지는 쓰레기 되는 거지, 무어. 20미터라고는 해도 3만원이면 되는데?”

죽고자 하는 방법은 이토록 저렴하다. 월세 55만원, 각종 보험이 30만원, 공과금만 해도 기본 15만원이다. 몇 달 전, 처음이 마지막이 된 병원에서만 해도 15분에 56천원이었잖아. 그런데 밧줄은 고작 3만원이란다, 3만원.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이토록 쉽다.

 

밧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미리 불러놓은 청소 도우미 아줌마가 화장실 청소를 마무리하고 있다. 마무리는 제가 할게요. 약속된 45000원을 봉투에 담아 아줌마에게 건넨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산하게 튀어나온 아줌마는 요즘 젊은이들은 융통성이 있어서 참 좋다며 분주하게 집을 나갔다.

, 일이 일찍 끝났어. 뭐 먹고 싶어, 우리 아들~?”

반지하의 창문 사이로 방금 빠져나간 그녀의 하체가 바삐 지나간다.

그러니까. 좁아터진 반지하 살면서 청소 도우미를 부르더라니까. 보아하니 일없이 노는 거 같은데. 우리 아들은 저런 포부 없는 인생 살면 안 된다. 너 잘 되라고 엄마가 남의 집 청소해주고 다니는 거 아냐!”

포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희망. 희망, 희망이라. 그런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 인생이 망했다 싶었던 게 언제였던가.

 

8살에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주전자처럼 생긴 놈을 문지르면 이 세계, 저 세계 점프를 하며 모험을 하는 만화 주인공들이 부러웠다. 14살에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만화 그리던 짬은 있으나, 남들이 인정할 만큼 잘하질 않으니 그 엇비슷한 직업을 고르는 게 낫겠다 싶었다. 17살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을 포기했다. 상상을 하던 버릇이 남아 이야기가 맴도니 그것이라도 뱉어내고 싶었다.

우리 둘째는 뭘 시켜놓으면 항상 중간 이상은 해요.’

중간 이상을 한다는 건 까놓고 말해 잘하는 게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 중간 이상인 채로 19살이 되자 나에게 꿈이라는 게 사라지고 어른이 된다는 현실만이 남았다. 집안 사정이 허락하는 지방 국립대라도 합격해야 한다는 절박함이라는 현실이 회초리가 되어 내내 쫓아다녔다. 종아리에 거뭇한 회초리 자욱이 남을 즈음 추가 합격이라는 턱걸이로 간신히 지방 국립대에 합격했다.

철학과를 나왔는데 어떻게 게임 회사에 지원할 생각을 하셨죠?’

면접관의 질문은 고루하고 한 데 고여 있었다. 왜겠어. 받아주는 회사가 없거나, 여기가 연봉이 세거나. 둘 중에 하나 아니겠어. 반항기를 동그랗게 접어두고 고여서 썩었을지도 모르는 포부 가득한 대답을 뱉었다. 이 회사를 통해 새로운 시도와 성장 어쩌고저쩌고. 고루한 것 중에 그나마 덜 고루한 나는 게임 회사도 턱걸이로 합격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 빨간 모자에 콧수염을 단 아저씨가 점프를 하며 버섯을 해치우는 게임 말고는 게임이라곤 해본 적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깨지고, 깨지기를 반복하면 나아질까 했지만 중간 이상은 됐지만 잘할 수가 없었다. 죽어라 일만 하다가 모든 게 다 의미를 잃었다. 가득 찼던 포부의 품이 수그러들고, 인생의 목적이 오그라들고, 승진도 못하는 데도 후배들의 앞날을 가로막는 수챗구멍 건더기 취급을 받아왔다. 서른여덟. 적금 통장에 도통 차오르지 않는 돈. 6년째 승진 누락. 작고 큰 숫자들이 야유를 해왔다.

이번에도 다른 회사에 계약 뺏기면 나도 더는 커버 못 쳐줘.’

미끄러지기 바쁜 인생. 자꾸만 떨어지기를 즐겨하는 삶이 속에다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었다. 숨을 크게 내쉬어도, 약을 먹어도 뜨거운 공기는 빠져나가지 않고 똬리를 틀었다. 이 열기가 나를 생으로 터뜨리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했다. 끝은 내가 결정해야 했다.

 

반지하 현관을 열고 나가면 바로 오른편에 촌스러운 연두색 문이 하나 있다. 보일러실이자 창고로 쓰는 제법 넓지만 후줄근한 공간이다. 양쪽 벽을 지지해 달아놓은 알루미늄 봉이 보인다. 몇 달 전에 설치했지만 건강 갱신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이루지 못한 운동용 철봉이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달아놓았지만 이제는 생명을 끊어내기 위한 차가운 철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난다. 드르륵, 의자를 끌고 철봉 아래에 놓는다. 천천히 밟고 올라가 챙겨온 밧줄을 동여맨다. 인터넷에서 배워 몇 번이나 연습한 매듭으로 단단히 고정시킨다. 비듬 방지 샴푸 냄새,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연한 락스 냄새, 밧줄에서 풍기는 기묘한 새것의 냄새가 마음을 안정케 한다. 이제 둥그런 저 과녁에 머리통을 쏘아 넣으면 된다. 그런데 뒷주머니에서 별안간 지이잉불도저 같은 진동이 울린다. , , , . 방향이 비틀리고, 의자가 비틀거린다. ‘쿠당탕당!’ 둥그런 과녁을 명중시키기도 전에 시멘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시멘트 바닥을 한 바퀴 휩쓸고 지나간다. 액정이 나갔어도 단단히 나갔을 테다. 어딘가 잘못 부딪힌 건지 숨을 쉬기가 힘들었고, 팔꿈치며 무르팍이 쑤셔댄다. 아프다고 괴성을 지른다. 시멘트 바닥에서 대굴대굴 구르며 발까지 구른다. 덮개를 씌워놓은 선풍기, 녹슨 공구들이 들어있는 가방, 미처 꺼내지 못한 겨울 이불. 깔끔하게 쌓아놓은 짐 더미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정면으로 무너지는 짐 더미를 피한다.

어휴, 죽을 뻔 했네.”

인생은 모순과 역설이 치열한 장기자랑 벌이는 전장이다. 전장의 수장은 때때로 우유부단하고, 휩쓸리고, 남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린다. 그 책임은 모조리 수장의 몫이다.

아픔이 밀어낸 생리적인 눈물이 눈 꼬리를 따라 흐른다. 시멘트가 짙은 회색으로 물든다. 누운 채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니 철봉에 매달린 밧줄이 기괴하게 흔들리고 있다.

오늘 우체국에 가서 반찬 택배 보냈어. 내일 도착한다니까 쉬지 않게 택배 잘 받아서 냉장고에 넣어 놔. 네가 좋아하는 오이소박이도 해놨어.’

번개 모양으로 금이 간 휴대폰에서 엄마의 반찬 공격이 시작된다. 한입 베어 물면 배를 가른 오이 사이로 감칠맛 나는 양념이 베인 부추들이 앞 다투어 튀어나온다. 그들의 탈주를 막으려 뜨끈한 흰 밥을 한 숟가락 밀어 넣으면 아주 조금, 기뻐지고는 했다. 내 전장의 약점은 그 무엇도 아닌 오이소박이인 것을 엄마는 아주 잘 간파하고 있다. 어디선가 저녁의 향기, 흰 쌀밥의 고소한 냄새가 흘러들어온다. 문득, 어머니가 차려준 쌀밥에 오이소박이 큰놈을 하나 올려 한입 삼키고 싶어진다. 명치를 문지르며 일어서니 군침이 꿀떡 넘어간다. 내일 현관 앞에 당도할 오이소박이. 살아갈 이유는 하루에 하나씩이면 된다고 했다. 내일 살아갈 이유는 흰 쌀밥에 오이소박이다. 그러니 일단 오늘을 살아내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 모레, 자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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