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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먼지 여관 : 어긋난 순서 맞추기]



언젠가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넌 곧 너의 일생에서 아주 선택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에 들어서게 될 것이란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네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답 해줄 수 있겠니 메리?」 

할머니는 어렸을 적, 제게 이런 질문을 곧잘 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였어요. 골머리를 썩고 있어 분해하고 있던 건 나였지만, 딱히 그분은 정작 나의 답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차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더 나를 분하게 만들었지요. 던져진 그물은 움직이면 할수록, 벗어나면 할수록 더 나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잠시 뒤 난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글쎄요, 아직 선택받지 않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특별한 기회를 얻은 녀석은 어쩌면 할머니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법 그럴싸한 답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대단한 숙제를 해결한 마냥 한껏 으쓱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나의 예상과는 달랐어요.

「나도 그리 믿었단다. 내 어느 미래 한 때의 수수께끼는 그 다음의 미래가 답을 알려줄 것이라고. 

할머니는 그러시면서 줄리의 허리를 가볍게 쓸어내리셨습니다. 줄리는 할머니가 처녀 때 여행을 함께했던 말의 손녀입니다.지금은 아주 작은 망아지입니다.

그랬더니 내 곁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그랬어. 이전의 나였던 과거가 그 길을 이어줄 것이라고. 하지만 끝내 난 그 모두가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단다. 메리, 넌 답을 찾을 수 있겠니?」 

그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때의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혼자 씩씩되는 아이 정도였으니까요.     



1장

       
<1>


밤이 깊어지자 하늘이 울리는 소리가 납니다. 땅이 흠뻑 적셔지는 중, 말을 탄 채 머리까지 커다랗고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처마 밑에 말을 묶어 놓고 문 앞에 섰습니다. 어째서인지 그는 자신의 몸을 때리는 수만 번의 두드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는 지금 자신과 그리고 그의 앞에 문에만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잠시동안 사내는 문 뒤의 정적조차 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가 언젠가 저 수수께끼를 깨달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장의 바람대로 그는 어둡고 공허한 세계로 자신을 밀어 넣었습니다.

칠흑은 저 밖과 이 안이 비슷하나 이곳에 발을 들임으로써 나는 달리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내 흰 숨결이 앞에서 길을 만들어 주었다. 허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내 왼쪽 어깨 뒤로 맨 작은 가방을 뒤적거렸고, 그것을 내 가슴 앞에서 밝혀 피워냈다. 한 손에는 받침 위로 초를 들었고 다른 손으론 앞을 내저었다. 우로 몇 보 돌아 다시 왼쪽으로 꺾었을 때, 내가 처음 이곳으로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온기를 볼 수 있었다. 불어서 초를 끄고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앞의 조그만 계단을 내려가면 좌측으론 벽난로와 그 앞은 널따란 탁자 주위로 등받이 의자가 있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 방이 하나가 있는데 잘 보이지는 않는다. 우측으론 무언가 어질러져 있는 높은 탁자와 주위로 소파가 있다. 그 뒤로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작은 계단을 내려가기 전 좌우로 난간을 만들어 놓은 게 인상적이다. 
언제부터인지 채 굳지 않은 초를 가방에 쑤셔 박는 건 습관이 돼버렸다. 난 조심히 발을 디뎌 내려와 불가에 다가갔다. 이 지역의 우기에는 더운 비가 내리기에 딱히 몸을 녹이기 위해서는 아니다. 다만 이곳이 낯선 나에게 있어, 첫 지표가 밝은 곳에 놓여있다는 호의에 감사했다. 난 등받이 의자 위의 작은 쪽지를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눈보다 더 높은 곳으로 들어보았다. 보아하니 이곳 주인의 글인 듯한데, 그냥 아는 사람한테 이야기하듯 한 문체로 썼다. 내용은 내 이름과 방, 식사에 관한 정도였다. 그리고 저 옆의 방이 주방인 모양이다. 가볍게 훑고 가방에서 말랑한 녀석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위층으로 가기위해 큰 불에게서 작은 불을 훔치던 찰나였다.

「정작 길을 잃은 자들이란 방금 땐 자신의 발조차 잊어버린 자들이야.」

뒤돌아보니 어떤 한 남자가 손에 잔을 들고서 반쯤 풀린 눈으로 내가 있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 있는 분,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에게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다가갔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를 그렇게 지나쳤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인사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단을 오르던 중, 우측 벽면에 작은 그림이 눈에 띄었다. 어두운 방에서  빛이 들어오는 천장, 그것을 향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손을 뻗고 있다.

「어딘가에 고립된 모양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속의 이는 곧 구원받는다는 표정이 아니야. 오히려, 미심쩍은 얼굴을 짓고 있지. 저 나가는 길이 그가 바라는 답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돌아보니 한 팔을 바닥에 늘어트린 채 소파에 누워있었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잔들을 보니 늦게까지 마시다 방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뭐라고 대꾸할까 하다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쪽지에 적혀 있던 대로 복도 왼쪽 끝 방을 열고 들어갔다. 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에 책상과 걸상, 침대 등이 있고 다행히도 옷을 걸어 둘 걸이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열쇠가 놓여있다. 딱히 방에 대해 이렇다 할 건 없지만,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창이 남으로 나있다는 것이었다. 커튼을 완전히 걷었다. 아마도 당분간 저 날씨가 계속될 것이다. 가져온 초가 많지 않으니 내일 주인에게 물어 여분이 있다면 몇 개 얻어야겠다.   


<2>


일어나니 커튼이 반 정도만 열려 있었다. 간밤에 비 소리가 시끄러워 스스로도 모르게 일어나 조금 당겼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빛이 적어 실내는 어두웠다. 내려오는 계단 중에도 화로의 불똥이 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제 주정뱅이가 누워있던 자리엔 말쑥한 사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거리고 있다.

「썩 괜찮은 아침이죠?」

내 인사를 못 들은 줄 알았는데 곧이어 고개를 들어 몇 번 눈을 꿈뻑였다. 그러나 다시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난 그를 한참 내려다보다 돌아섰다. 무언가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라 생각하곤 화로를 돌아 주방으로 아침을 가지러 들어갔다. 키가 몹시 작고 갈색 수염을 길에 늘어뜨린 뚱뚱한 사내가 소시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역시 이런 눅눅한 날에는 따뜻한 부어스트가 제격이죠.」
「당신은 그래도 제 인사를 받아주시는군요.」
「글쎄요, 그나저나 당신은 키가 몹시 크군요!」

그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놓고 컵에 흑맥주를 따라 주었다. 그러곤 목이 불편했는지 고기를 써는 판 위에 앉아 높이를 맞췄다.

「아까한 말은 농담이오. 반갑습니다, 난 앤빌마라고 하죠. 이곳 주방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못 보던 얼굴이군요.」
「나도 반갑습니다. 바우입니다. 지난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는데 문이 잠겨있지 않았고 이곳 주인이 쪽지를 남겨 놓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음, 그가 당신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군요. 반겨주는 이도 없었을 텐데 당신은 운이 좋은 편이오.」

난 고개를 살짝 거실 쪽으로 돌렸다.

「아, 저 친구가 밤에 그러고 있는 건 늘 상 있는 일이죠. 아까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건 그인 모양이군요.」
「게다가 왠지 다가가기 힘든 느낌이라서 말입니다.」

앤빌마는 접시에 호밀빵 몇 조각에 길에 썬 부어스트를 얹어 주며 말했다.

「으음. 그냥 내 느낌인데 당신은 저 친구와 궁합이 잘 맞을 겁니다. 물론 주인과도 말입니다. 아, 혹시 말을 가지고 왔습니까?」
「예. 어제밤에 처마 밑에 메어두고 왔습니다. 천둥 때문에 말이 밤새 잠도 이루지 못했을텐데 밥보다 얼른 가보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랬군. 그게 당신 말이었군. 관두십시오. 밖에는 지금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으니까요. 말을 넣어 두는 헛간은 집 뒤편에 따로 있죠. 제가 아침 일찍 이곳으로 오면서 웬 날뛰는 말이 보이길래 그곳으로 옮겨 뒀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일단 안심이로군요. 혹여나 말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그 밤에 뭐가 보였을 리가 없죠. 나는 이제 이곳을 정리해야 하니 거실의 아무 편한 곳에서 먹고 접시는 거기 놓아두시오.」

그는 내려와 엉덩이를 털고 린넨을 두른 채로 일에 몰두했다. 좀 더 그를 처다 보고 있긴 했지만 집중하는 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왔다. 그릇을 들고 둘러보니 제법 앉을 곳은 많았다. 그래서 그냥 멀찌감치 화로 곁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저 사람이 누구인지, 지난밤에 말의 의미가 무엇이든 알고 싶어졌다.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그는 고개를 몇 초 동안 들더니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저 상관없는 소릴 들은 마냥 시선도 맞추지 않는다. 나 역시 따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부어스트 맛이 썩 괜찮았다. 젊은 시절 인도를 갔을 때 먹어봤던 향신료 맛이 났다. 슬쩍 앞을 봤다. 펼쳐진 이 근방의 지도, 물품들 목록을 적은 종이 등이 있다. 이 근방 사람이 아니다.

「아아, 어떤 분이 제 앞에 계셨군요. 아까 누군가 지나가는 것 같긴 했는데 집중을 하느라 몰랐습니다.」

 마시는 잔에서 입술을 때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요즘 할 일이 잔뜩이라 정신이 없어서 말이죠.」
「어제 과음을 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하하 지난 밤의 저를 보셨나 보군요. 하지만 아침의 저는 또 다르니까요. 롬이라고 불러주세요. 이미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행상인입니다.」
「전 바우입니다. 제 고향에서 가게를 하고 있죠. 지금은 휴가차 예전에 일하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곳 기후를 몰랐던 건 아닙니다만 정말 재수 옴 붙었죠. 참, 당신에게 할 소리는 아니군요.」
「오히려 이곳 지형이 만들어낸 기후가 재미는 주는 점도 있죠.」
「그건 무슨 뜻이죠?」
「이곳에선 겨울에 가죽을 구하기 힘들어 가격을 높게 부르는 편이죠. 하지만 아래쪽에 로란산맥 이남으론 질 좋은 가죽을 좋은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지방은 높고 긴 산맥으로 떨어져 왕래가 없다시피 하지만, 다시 말하면 그 사이로 물건을 옮길 수만 있다면 이만큼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일도 없다는 말이죠.」
「문제는 그 길이겠군요.」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태초에 누군가는 다녀간 길인데 설마 방법이 없겠습니까. 사실, 저만 아는 산맥을 통과하는 비밀 길이 있습니다.」
「글쎄요. 그렇다면 가능하다 할 수는 있지만 아직 그럴 만한 계절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건을 크게 터트릴 생각이라면 벌써부터 준비하기 보다는 그동안 다른 거래를 하면서 자금을 모아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전혀 빠르지 않습니다. 아저씨도 장사를 한다면 아시지 않나요? 자고로 장사꾼은 때를 잘 맞춰야 하는 법이죠.」  

태엽을 감아 다시 돌리는 것 같다. 그렇게 이 녀석은 자신이 어떻게 장사를 배우길 시작했는지부터 어떻게 독립하게 되었는지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이 친구의 것과 같이 내 잔을 채우려 일어났다. 딱 그 순간이었다. 내가 자리에 서자. 그에게서 흘러나오던 말은 고장난 시계추같이 멈췄다. 한 동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오늘 아침 이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잠시 후 그는 펜을 잡고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 테이블에는 자신 이외의 인간은 없었다는 듯이. 빵 두 조각이 남았으나 난 자리로 돌아가지 못 했다. 그러곤 멍하니 화로로 와 앉았다. 그제야 오늘 주인에게 양초를 빌리기로 했던 것이 떠올랐다. 날씨가 이래서야 원. 불은 고즈넉하게 언제나 자신을 되돌린다. 무언가에 홀린 듯 길을 나섰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편지 한 통에 이 먼 땅까지 다시 온 것이 스스로도 놀랍다. 하지만 그녀와 약속이 지켜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이건 나를 피워내기 위한 여행이기도 했다.


「계단 아래로 어느 분들이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워내실까?」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젊은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난 숨막히며 뒤돌아 봤다. 하지만 그럴리 없지. 많이 쳐야 갓 서른이 되었을 아가씨다. 
  

<3>


「일어났어? 그게... 누가 지나가는 줄 알고 잠깐 내 소개를 했는데 결국 아무도 아니었어. 너 지금 내가 바보 같다 생각하지?」
「글쎄, 넌 원래 살짝 멍청이니까 딱히 이상해 보이진 않는데?」

그녀는 계단 마지막에서 발을 헛디뎌 엉덩이를 찍었다.

「아쉽네. 머리를 박아서 그 험한 말이 안 나오게 정신을 차렸으면 했는데.」
「미안하지 그럴 일 없을 거야. 이건 과거부터 있던 내 버릇이라서 말이야.」


난 화로 앞의 의자에 앉아 뒤돌아보고 있는데, 그녀가 손을 양 무릎에 지탱하면서 일어나려 할 때 눈이 마주쳤다.

「저기 롬?」
「왜? 부축이라도 해줘?」

여자는 손가락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일어났다.

「아니,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할 순 없지. 혹시 아침에 얘기를 나눴다는 사람이 저 분 아니야?」
「뭐? 어디?」
「저기 화로 앞에」
「거기 지금 누가 있어?」
「어..... 아니야. 내가 잘못 봤나봐. 아무것도 아냐.」

더 이상 그녀의 눈에는 내가 비치지 않는 모양이다. 접시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대로 턱은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생각이 떠오를 찰나 등 뒤의 문이 나를 불렀다. 문 너머의 실체와 마주하기 전에 난 우선 숨을 크게 들이키고 심호흡을 청했다.하지만 눈은 생각보다 아래로 향해야 했다.

「안녕, 들어와도 좋아요.」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그의 앞으로 의자를 돌려주고 난 침대에 걸터앉았다.

「친구는 어디에서 오신 누구죠?」
「전 플맆이에요. 오른쪽 복도 두 번째 방에서 왔어요. 할아버지를 대신해 전해드릴 말이 있거든요.」
「너의 할아버지가 누구시지?」
「이곳 우주먼지 여관의 주인이세요. 원래는 할아버지가 직접 손님께 인사를 드리고 안내를 해드리는 편이에요. 하지만 오늘과 같이 새벽 일찍 볼일로 할머니와 같이 자리를 비우시면 그럴 수가 없죠. 그래서 제가 대신 무언가 필요하신 게 있는지 여쭈러 왔어요.」

여기 오기 전에 머무르던 마을에서 이 여관에 편지를 보냈었다.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반송도 없었기에 적어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걱정은 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친구가 내게 그런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안다.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관심이었다. 이미 떠돌이 삶을 청산하고 정착한 지 꽤 지났지만 정작 내 마음속에선 아직도 구불거리는 길을 걷고 있었다. 
가끔은 길을 잃다 주저앉아 있는 꿈을 꾼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지만 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난 자신을 더 동여맸다. 때론 내가 맨 매듭이 그물이 되어 나를 묶어도 스스로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래 그럴 리 없지. 내가 흔들리는 건 뒤에 있는 녀석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 내가 이곳에 온 건 다시 한번 과거의 그 녀석을 만나 제대로 큰 소리 해주기 위해서야.

「어른들이 널 믿고 가실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구나. 아마 다른 볼일들로 한 번씩 자리를 비우시는 모양이지? 그럼 그분들께선 평소엔 어디 계시니?」
「앤빌마 아저씨가 이곳에서 많은 일을 도맡아 하시기 때문에 사실 할아버지가 특별히 하는 것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서재에 계시죠. 혹시 벌써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복도 끝을 지나면 있는 방이 서재에요. 할아버지가 특별히 아끼시는 공간이죠. 뭐 필요한 건 없으세요?」
「그럼, 며칠간 방을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아 낮에도 쓸 초가 필요한데 혹시 여분이 있다면 부탁해도 될까?」

작은 아이는 숨김없이 키득거렸다.

「아, 죄송해요. 그 밖에 다른 하실 말은 없으시고요?」
「이젠 됐어. 아, 맞다 플맆.」
「왜 그러시죠. 선생님?」
「이곳에 머무르는 젊은 친구들인데, 좀 이상한 부분은 없니?」
「음, 정확히 어떤 부분 말씀이죠?」
「뭐랄까, 연결점이 있다고 하지만 아직 불완전하달까. 그들과 나 사이에는 아직 충족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듯 말이지. 쉽게 말하면 소통이 힘들다는 거야.」
「먼지 거인이네요.」
「먼지 거인?」
「자신을 지나치게 큰 존재라 믿기에 무엇이든 보고 들을 수 있다 생각하지만, 그래 봤자 넓은 우주에선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요. 할아버지께서 종종 하시는 말씀이에요. 말이 통하지 않아 꽝 막힌 내게 쓰는 말이죠. 하하」   
  

<4>
   

대충 집으로 부칠 편지를 다 쓰고 보니 구름 사이가 조금 벌어지고 있었다. 언제 또 한바탕 쏟아질지 모르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다시 내려온 아래층은 정적이 흘렀다. 접시를 반납하러 주방 안쪽도 슬쩍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말은 밤새 추워 벌벌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에 씁쓸했다. 헛간이 집 뒤라고 했던가. 혹시 앤빌마가 그 사이 뭐라도 챙겨주진 않았을까. 인정이 많아 보이는 사내였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의 손잡이를 당기기 전, 다시 한번 약속을 떠올렸다. 이 문을 나가 집을 돌아가면 뒤에 그녀가 있을까. 아까까지 날씨가 좋지 않았으니 그렇지 않을 거야. 조급할 필요는 없지. 힘차게 문을 당겼다. 순간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균형을 잃어 벽을 짚었다.  

「이봐요.」

그 잠깐동안, 문이 커다란 유리처럼 보였으며 거기에 내가 비치는 듯 싶더니 이내 다른 모습들로 바뀌어 갔다.

「어디 아파요?」     

저건 내가 아니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곧 문을 열지도 모른다.

「이거 상태가 좋지 않군. 바우 괜찮아요?」

앤빌마가 내 팔을 움켜잡으며 흔들었다. 이상하다 주위가 어둡다.

「걱정말아요. 별거 아니에요.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밖에서 무슨 고생이라도 하고 온 겁니까?」
「밖이요? 아직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막 제 말을 보러 나가려던 참이거든요. 계속 굶겼다간 그 녀석이 어떻게 난폭하게 변할지 모르니까요.」
「내가 지하 창고를 정리하고 올라오면서 문으로 향하는 당신의 뒷모습을 봤습니다만, 그런 농담을 진지하게 하는 거 보니 상태가 멀쩡하지 않은 듯 하군요. 방에 돌아가 쉬세요. 난 이제 퇴근해야 합니다. 오늘은 일이 많아 좀 늦었군요. 그리고 당신 말이라면 걱정마세요. 아침에도 챙겨줬고 아까 낮에도 넉넉히 넣어두었으니까요.」
「앤빌마. 그럼 이제 다시 헛간에 안 들리는 겁니까?」
「당신 아까 내려오는 것 같더니 지금 말을 보고 오는 길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라니까요」
「허 참, 하여튼 보려면 내일 아침에나 봐요. 오늘은 늦은 듯 하니!」
「늦었다니요?」
「깜깜하단 말입니다. 밤이 됐다고요. 이미!」

그러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의 변화에 사고는 잠시 정지했다. 몸도 멈춰 버렸다. 그의 말대로 밖은 어둠이 맞았다. 그렇게 나는 오늘 이 집에서 나가지 못하고 문에서 돌아섰다. 벌써 오늘에 몇 번이고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나는 왜 아까 전 그 문을 열어 다시 진실을 확인하지 않았나 하고 몇 번이고 되뇄다.

「우리는 그저 볼 수 있는 것을 보되, 맞지 않는 눈높이는 도리어 상대방을 희롱하게 될 뿐이지.」

뒤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술에 쩔은 녀석이 있다. 내 지난날이 녀석과 같았음을 생각해보면 지금 내 모습이 어찌나 다행인가 생각해본다. 나 역시 무작정 앞으로 가던 시절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내 최종 목표는 정착이었다. 아니, 모든 행상들의 꿈이 그러할 것이다. 들은 말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뒤로했다. 어둠이 자리 잡은 복도에선 오직 끝에 있는 방 만이 아직 낮의 빛을 간직 한 듯 했다. 아마 아침에 자리를 비운 주인이 돌아온 것일 것이다. 서재는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문은 이곳에 있는 다른 방처럼 나무문이 아니라 불투명한 유리로 돼 있다. 열기 전 너머는 보려 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직 이곳이 낯선 손님이로군.」

발이 경계를 넘자 자그마한 등이 반겨주었다. 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옮기며 주위를 살폈다.

「어찌 낯선 사람이란 걸 바로 안 거죠?」
「자네의 걸음걸이와 숨소리를 들었지. 마치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까지 이 공간과 시간에 아무런 기대가 없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네.」
「당연히 그렇겠죠. 저는 여기가 처음이니까요.」
「자네에게 당연한 것은 과거뿐일 텐데?」
「마치 저를 아시는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서재라기보다는 골동품 창고라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책꽃이도 많고 책 또한 다 넣을 자리가 없어 바닥에 내려져 있을 정도지만 내겐 다른 것들이 더 눈에 띄었다. 두 개 바퀴 사이에 금속을 연결시켜 놓은 것 같은 괴상한 물건이 있는데 마차도 아닌 것이 제대로 균형을 잡고 굴러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옆에는 등이 있었다. 유리로 만든 알에 불을 가두어 둔 것 같은데 알랑거리지도 않고 요상했다. 그 뒤로는 돼지 꼬리 같은 기다란 선이 있는데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종잡을 수 없다.   

「어르신, 저는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 눈에 확실히 보이는 것은 과거의 흔적들뿐이고요.」
「과거만 쫓으려면 뒷걸음 치면서 다녀야 겠군.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문을 찾고 이곳으로 들어왔나?」
「어려운 말장난으로 놀리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낮에 플맆이라는 소년을 봤는데 그 아이가 나이에 비해 똑똑해 보였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어찌 됐든 이 여관에 온 걸 환영하네. 아주 궂은 날씨였을텐데 잘 찾아와줘서 다행이군.」
「얼마 전에 제가 보낸 편지는 받으셨습니까?」
「받았다마다. 오지 않아도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네」
「이 어지러운 서재만큼 이해하기 힘든 분이군요. 밤이라고 하니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죠.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쉬시게. 지내면서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뒤돌기 전 책 하나가 발에 걸렸다. 왠지 그 책만큼은 넘어가고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나. 어르신도 살아온 세월도 있고 하시니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제가 계속 과거를 향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주친 그가 뭐라고 할까요?」
「망각을 쫓다 만난 허깨비가 뭐라 하겠냐고? 허허 그야 그쪽도 자네를 허깨비라고 하겠지.」 
「전 현실에 있고 존재해요. 허깨비가 아니에요.」
「자네도 자신 앞을 모르는데 그쪽이라고 어떻게 알겠나?」
「괜한 말을 했군요. 그만 진짜로 가보겠습니다.」
「가게.」  

불투명한 유리문이 다시 열리고 닫혔다. 와 닿는다고 할 수 없다. 애초에 난 이해하지 못한 일방적 소통이었으니. 하지만 없다 할 수 없다. 무언가가 나를 향해 부딪히고 조금씩이나마 호소하고 있다. 다만 나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지금은 알아챌 수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책상에 쪽지와 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이 부탁하신 초를 찾아 다시 들렸는데 계시지 않아 그냥 이렇게 두고 가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실례가 될까봐 아깐 여쭈지 않았는데 요즘 같이 볕이 잘 들어오는 날씨에, 하물며 낮 동안에 굳이 커튼을 치고 초를 키시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플맆-




2장
 

<1>


이곳에서 시작되는 두 번째 아침, 밖에는 비가 오지 않지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새벽에 마무리한 편지를 길게 두 번 접고, 봉투 안에 정갈스럽게 넣었다. 동봉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매 번 계단 입구를 지키던 문지기는 아침에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주방에는 큰 냄비로부터 김이 나고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눋지 않게 대신 저어야겠다고 시작한 스튜안의 국자가 서서히 속도를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앤빌마? 거기 있어요?」

정신 차리고 돌아보는 사이에 국자를 빠트려버렸다.

「거기 있는 거 앤빌마 맞아요?」
「아 저는..」
「어머? 누구세요?」
「전 바우라고 합니다.」
「전 집배원 네트에요. 바우,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가 손을 앞으로 건넸다. 나도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어제 잠을 설친 탓인지 맞잡은 손이 흐릿해보였다.

「그동안 쌓인 우편물을 돌리려고 중입니다. 요 며칠 밖이 날씨가 심상찮아서 일을 할 수가 없었잖아요. 아시죠?」
「네」
「음, 당신 바우라고 했죠? 아, 당신에게 온 것은 없군요.」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아직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거든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앤빌마는 어디 자리를 비웠나요?」
「글쎄요. 저도 스튜가 끓고 있는 것을 보고 젓고 있던 참이라.」
「그래서 비프 스튜 냄새가 진동했군요. 앤빌마의 특기중 하나죠. 지하 창고에는 가보셨나요? 그는 더러 아래에 내려가 있거든요」
「혹시 그 작은 친구가 몰래 키가 커지는 연금술 계획을 실행 중인가요?」
「하하하, 아니에요. 그는 주기적으로 필요한 자재나 식재를 창고로 내려서 받고 있거든요. 아니면 밖에 볼일이 있거나요.」
「그렇군요. 혹시 제 우편을 맡아 주실 수 있나요.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내야 하는데 마침 당신이 있으니 부탁해도 될 것 같네요」
「아무래도 아직은 무리일 듯싶어요. 지금은 밀린 일이 많으니 어차피 지금 주셔도 당장은 보내지도 못할 겁니다. 혹시 모레쯤에나 제가 다시 들리면 그때 주시겠어요? 이렇게 하나씩 쌓이다 보면 꽤 정신없어서 말이죠.」
「사정이 그렇다면 뭐 그러죠.」
「네 그럼 전 이만」
「저기 혹시 네트」
「네?」
「전에 혹시 메리라는 이름으로 온 것이 여기로 오진 않았나요?」
「전이라 하심은?」
「한 일주일 전쯤이요」
「글쎄요. 기록은 남아 있을텐데 혹시 필요하다면 확인해 드려요?」
「아니요. 확실한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아참 이것들은 부인에게 전해 주시겠어요. 그녀가 알아서 해줄 거에요」
「부인이요?」
「그녀는 마릴이라고 하는데 이곳 안주인의 이름이죠.」
「꼭 전해드리죠」
「그럼 맡기고 전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봐요. 바우」
그대로 앤빌마를 찾아 볼까하다 뒤돌아 나가기 전의 그녀를 잡았다.
「잠깐만요. 저도 같이 나가요!」
「깜짝이야! 확실히 간만에 밖에서 무엇을 하기엔 좋은 날씨죠.」
「우선 저는 당신을 따라 이곳을 나가고 봐야겠어요.」
「저를 따라서요? 그 편지들은 어쩌시려고요?」
「잔말 말고 어서 나가봐요」
「당신은 안 나가고요?」
「난 당신이 나가고 난 뒤에 다시 문을 열고 나갈 겁니다.」
「바우, 스스로도 정말 별나다는 거 알죠? 난 바쁘니까 먼저 가볼게요」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틀림없이 보였던 청명한 하늘, 높게 뜬 해. 다행히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매슥거림은 없다. 난 한 번으론 부족한 마른 침을 세 번째 삼키고 나서야 문을 당겼다. 다만 당기는 힘이 지나치게 강했던 탓인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상당히 바보같다 생각하고 일순간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중요하진 않았다. 느껴진다. 아까와 같은 따스함. 그 밝음. 맑은 공기. 그러나 고개를 들고서 깨달았다. 그래 난 헛디디거나 미끄러진 게 아니었다.

「오, 미안해요. 문 뒤에 누군가가 있으리라곤. 괜찮으신가요?」  
   

<2>     


작은 체구의 노년 여성이 가진 분위기와 나지막한 말투는 지금 저 날씨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처음 뵈는 분께 이런 실례를. 어서 내 손을 잡아요.」
하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땐 이미 반쯤 일어나고 있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이런, 편지들이 이렇게 널부러져 있다니」
「아니 그것은 제가......」

그녀는 내가 넘어지면서 떨어트린 우편물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인사를 하려던 순간 그녀는 편지를 다 모으고 나서 처음부터 나라는 인간은 없었던 것처럼 그냥 휑하니 들어가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난 다시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틀림없이 아까와 같은 그림이다. 시간도 바뀌지 않았고 날씨도 그대로다. 저 밖은 아직 무엇이 잘 못 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당연한 기대, 의심할 여지없는 다음의 순간. 이 뒤에 일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늘 상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발을 앞으로 디뎠다. 디뎠을 터다. 나의 상식은 나의 바람대로 현실화 되었고, 나의 한쪽 발은 문을 넘어섰을 터다. 

한데 왜, 난 아직 여기에 있지? 어째서 저 너머에 있지 못하지? 무엇이 잘 못 된 것이냐. 무엇이 부족한 것이냐. 내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는다. 잠시 꿈을 꾸고 온 마냥 나의 육신은 그대로였고 정신마저도 얼마 안가 이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붙잡았다. 몇 번이고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무언가 덫에 걸린 거야. 그것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무언가에

힘없이 발을 돌렸다. 아까의 노인은 불가에 앉아 우편을 정리하고 있었다. 난 지독한 갈증에 무언가로 마실 것을 찾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왔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새벽에 편지를 마무리했고, 내려와서 네트와의 대화. 그리고... 

잘 못 됐다. 네트가 문을 열었을 때의 풍경은 한낮이었으면 안 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을 리가 없다. 네트와의 대화가 생각보다 길었던 걸까. 아니면 무엇을 빠트린 걸까. 생각이 막힐 때 즘 옆에 누가 다가왔다. 앤빌마다.

「바우, 여기 있었군. 아까 혹시 집배 일을 하는 친구가 오지 않았나? 마릴 부인 얘기론 문 안에 우편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고 하던데?」

롬과 같다.무언가가 나와 어긋나면 그 시간이 없었던 마냥 잊혀져버린다.

「아침에 만났어요. 마침 앤빌마가 없어서 그것들을 내가 받았구요.」
「그럼 그것들을 저렇게 해 놓은 게 자네란 말인가?」
「틀린 말은 아니네요. 사건을 어떤 위치에서 보냐에 따라 다르니까요」
「자네 괜찮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군. 자네가 원한다면 이 마을에서 아는 의사를 소개해주겠네.」
「전 멀쩡해요. 다만 조금, 아주 조금 생각이 많을 뿐이에요. 그보다 한 가지 물을 게 있어요.」
「무엇이든지.」
「제가 여기 온 이래로 저 문을 열고 나간 적이 있나요?」
「자네 말인가? 본적이 없는 것 같구만. 내가 항상 문 앞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그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뭐지?」
「다음에 당신이 저 문을 열고 나갈 때 날 데리고 가줘요. 아무 때라도 좋으니 혹시 나갈 일이 있으면 그때 나를 불러줘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니네만. 왜 그러는지 물어도 되겠나?」
「미안해요. 이유를 묻지 말고 그렇게 해줘요.」
「알겠네.」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로 나와서 마릴 부인의 뒤에 섰다. 이 여성 또한 저 밖의 세계처럼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일까. 질서 없는 혼돈에 언제까지고 움츠릴 수는 없다. 무엇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자신의 높이를 정해야 했다. 의자를 하나 끌어다 그녀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전 바우라고 합니다.」

  애써 웃어 보이며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아주 시간이 정지한 듯, 난 그녀의 아주 느린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찰나가 수년의 시간과 같았다. 다행히도 시간과 시간의 아주 작은 틈 사이에서 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오, 아까 그분이로군요. 벌써 밖에 볼일은 다 보셨는지요?」
「그 편지들을 떨어트려 놓은 게 접니다.」
「오, 안 그래도 난 네트가 그랬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알면서, 알고 계셨으면서 왜 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 상황에 계셨으면서 저를 당연한 듯이 배재하신 겁니까?」
「글쎄요. 사실 전 지금도 당신을 정말로 맛난건지 기억이 어렴풋하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궁금하기도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와 자신을 밝히니 우선 제 소개부터 할까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마릴입니다. 제 남편과 함께 이 여관을 운영하고 있지요.」
「전 바우입니다. 이 여관 2층에 묵게 된 여행자입니다.」
「오, 그게 정말 사실이었군요.」
「뭐가 말씀이죠?」
「호호, 난 지난주 그이가 2층에 다른 바우가 새로 올 것이라고 했을 때 저번에 이은 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결국 저번도 장난이 아니었지만요.」
「그 말은... 바우가 저 말고도 더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한 번씩 밤에 곤드레만드레 뻗어 있는 젊은 친구가 있죠. 하지만 그는 자신을 별명으로 불러주길 더 좋아하더군요. 그 친구가 뭐라더라 롬이라 했나?」     


<3>     


「스튜 간 좀 보겠나?」
「그러죠.」
「부인께서 다른 바우들에 대해 알려주더군요.」
「그걸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난 벌써 일찍이 서로 얘기를 나눈 줄 알았네만. 내가 저번에 서로 마음이 맞을 거라고 얘기했던 게 바로 그거지.」
「그러게요. 어째서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알게 됐을까요. 음, 조금 싱거운데요?」
「마릴 부인이 건강이 별로 좋지 못하셔서 그 정도가 딱 좋네.」
「저도 상관은 없지만요」
「나도 자네에게 궁금한 것이 있네.」
「아까 그것 말인가요?」
「아니 다른 거야. 굳이 원하지 않는 질문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것보다 자네는 이곳을 어찌 알고 왔나?」
「한 친구의 소개로 왔습니다. 음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될지. 전 꽤 어릴 적부터 행상 일을 배웠습니다. 제법 요령을 깨우쳤다고 생각했을 무렵, 한 친구를 만나 이 나라 저 나라 건너다니며 장사를 시작했죠.」
「그래서 저렇게 늙은 말을 데리고 다니는 거구만」
「지금은 제 고향에서 그렇게 원하던 제 소유의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눈이나 비 때문에 일을 망치거나 고립되지 않아도 됐죠. 산에서 도적을 만나거나 물건을 도둑을 맞을 염려도 줄었고요.」
「한데? 정착한 삶이 적성에 맞지 않던가?」
「천만에요. 늘 꿈꿔왔던 삶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생각이 다른 건 같이 여행을 했던 그 친구였습니다.‘정착이란 네가 멈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너의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정착할 수 있다.’란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이죠.」

아주 잠깐, 어떤 여자가 문 옆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저께 봤던 그 젊은 친구인가?

「어렵지만 아주 틀리지도 않는 재밌는 말이군.」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올해 여름휴가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 친구가 끝내 정착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 여관의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정해진 날짜는 따로 없이 맑은 날에 여관 뒤편에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저는 그것을 읽고서 망설임 없이 헛간에서 오랫동안 쉬고 있던 말에 다시 고삐를 채웠습니다.」
「그 친구란 사람이 말하던 정착이란 것을 확인하고 싶었나?」
「흥, 그럴 리가요. 저는 그녀의 말을 믿지도 않습니다. 제가 과거에 내렸던 결론이 잘못됐을 리도 없고요. 그리고 현재의 내가 있습니다. 지나온 길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이건 그저 제 자신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한 목적의 여행입니다.」

앤빌마는 찬장에서 컵 두 개를 내려 하나에는 뜨거운 허브차에 꿀을 넣어 내게 주었고, 다른 하나에는 맥주를 가득 담아 자신의 옆에 두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만났나?」
「아니요, 하지만 곧 만나게 되겠죠. 그가 정말로 이 마을에 있다면요.」
「그렇군.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네. 잠시 쉬고 있게. 내가 내일 아침거리만 얼른 준비하고 나서 같이 나가세나.」

거실엔 아까까지 있던 부인은 없고, 대신 어르신과 어제 아침에 보았던 어린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롬도 보이지 않는다. 의외로군. 저 노인이 어린 친구들과 편히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재미있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는데. 난 컵을 들고 방으로 올라왔다. 책상에는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만 덩그러니 있었다. 팔을 떨어트리고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로 책상에 발을 올리고 창밖을 보았다. 다시 맑아졌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듯 비가 내리고 있다. 메리가 이런 날씨가 좋아 한다고 얘기했던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이미지를 되풀이했다. 그러곤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자네 방에 있나? 아니! 책상에 저건 뭔가?」
「아, 일찍 끝났군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준비 됐네. 어서 가세나」
내려가는 길에 저번에 보았던 그림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래층에는 여전히 아까 둘이 떠들고 있었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만 하고 옆을 지나쳤다.

「먼저 앞장 서세요.」
「그러지, 저 밖이 자네가 정말로 아는 그 길이라면 문 너머로 발을 못 디딜 이유는 없네.」
「당연한 얘깁니다. 분명 그럴 거고요. 먼저 나가고 나면 제가 문을 잘 통과하는지, 그렇지 못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도 지켜봐주세요.」

문 밖의 시간은 황혼이 다 돼 있었다. 앤빌마는 나를 살짝 곁눈질을 하고 그대로 나가서 문 앞에 섰다. 그런데 나를 좀 더 지켜보는 보는 듯싶더니 그대로 길을 따라 가버리기 시작했다. 난 그를 쫓을세라 망설임 없이 뛰쳐나갔다. 분명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주 작은 순간 뒤의 이미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난 지금 문을 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문을 등지고 서 있으며 앤빌마는 어느새 내 우측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거봐, 멀쩡히 잘 돌아오기까지 하지 않았나.」
「어딜..... 갔었는데요?」

그는 자기 우측 손에 든 채소와 과일들을 들어 보여주었다.

「시장에 갔었군요. 그럼 나..는요?」
「자네는 나를 따라왔지. 분명 시장 앞까지는 동행했지 않았나?」   
  

<4>     


「농담하지 마세요. 전 여기 있었는데 누가 거기로 갔단 말입니까?」
「그럼 저 밖에서 존재했던 건 자네가 아닌 귀신이란 말인가?」
「아니요.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저는 틀림없이 저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나온 사내는 과거의 망령이지, 자네가 아니란 말이군. 그럼 지금 내 앞에서 있는 자네는 누구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방에 들어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고 누웠다. 수많이 쏟아지는 위화감과 의심들. 내가 깨닫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지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혹시 자고 나면 다 정상대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라고 기도했던 지난밤은 이미 지났다. 문, 통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계속 머릿속에 그 이미지들을 되돌렸다. 하지만 이미 덧칠이 너무 많이 이루어졌다.  

‘혹시 그 작은 친구가 몰래 키가 커지는 연금술을 실행 중인가요?’
‘하하, 아니에요. 그는 주기적으로 필요한 자재나 식재를 창고로 내려서 받고 있거든요. 아니면 밖에 볼일이 있거나요.’     

다른 문이 있다. 밖으로 통하는 문이 더 있어. 그대로 초를 들고 계단을 뛰어내려오다시피 했다. 그리고 옆 벽에 걸린 그림에서 멈췄다. 불로 비추고 눈을 박듯이 가까이 뚫어져라 보았다. 그 때문에 내 머리 가장자리가 그을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고 몇 번이고 턱에 넘어질 뻔 달려가 주방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그렇게 내 시야는 어둡고도 좁게 변해갔다. 커다란 와인통들과 층으로 쌓인 곡식류 상자, 그리고 고리에 걸려서 숙성 돼가는 고기와 함께 갖가지 식재료가 즐비했다. 그리고 안쪽으로 더 들어갔을 때 위로 이어져 있는 돌계단을 찾았다. 계단의 끝에는 두 개의 쇠로된 판으로 만들어진 문이 있어고 바깥에서 들어 올려 여는 형태인 듯했다. 한참을 낑낑거려보며 등으로도 밀어보았으나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다. 불로 비춰보니 열쇠 홈 같은 작은 틈이 있었다. 문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심지어 사과도 던져보았다. 그리고 결국 지처서 계단에 주저앉았다. 잠시 동안 난 완전히 이성을 잃어 있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불을 들고 내려온 자는 딱히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 밤에 창고에서 혼자 축제 분위기이신 분 얼굴 좀 봅시다.」
「또 보는군요. 롬.」
「당신은... 우리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사이 맞죠?」
「뭐, 그쪽은 곧 나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렸지만 말이에요.」

그는 와인통 하나엔 초를 두고 다른 통 위에 걸쳐 다리를 꼬며 앉았다. 나 역시 그처럼 다른 빈 통을 찾아 앉았다.   

「어쩐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죠. 당신도 나처럼 야밤에 목을 축이러 왔나 봐요? 그런 것치고 소란스럽긴 했지만.」
「보여요? 내 뒤의 문」
「네, 그게 어쨌단 거죠?」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그야, 닫히기 전의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겠죠.」
「밖이 세로운 세상이라고 하지 않는 군요.」
「그야 저 뚜껑을 열기 전에는 내가 알던 것뿐이니까요. 혹시, 문을 열 열쇠가 필요했던 거였어요?」
「날 내보내 줄 수만 있다면 열쇠든 해머든 상관없어요.」
「수단이 중요하진 않으신 분이군」

어린 바우는 내가 던져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가져다 털어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한 입 깨물었다. 그리고 내게도 하나 던져 주었다.

「내가 지금 도달하고 싶은 곳에는 새로운 과정이란 게 무엇이든 간에 의미가 없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그런 과정들로 덮어 써지면 안 돼.」
「혼자만 시간을 거꾸로 흐르시나 봅니다. 중간 과정이 없는 미래란 없는데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미래란 것에는 흥미가 없어서 말이죠.」
「당신, 과거를 쫓고 있는 거군요. 아마도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의 자신을」
「이곳으로 들어온 뒤로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버렸어요. 내 바로 뒤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돌아볼 수 없는 자는 앞은 물론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죠.」
「그 말은 저번에 들었던 것 같군요. 역시 바우야. 말이 제법 통하는군.」
「내 본명도 알아요? 말했듯이 난 당신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이것도 인연인데 하다못해 아저씨 이름이라도 알려줄래요?」
「굳이요. 말을 해도 돌아서면 잊을 것을.」
「뭐 어때요. 어차피 돌아볼 수도 없게 됐다면서요.」
「나도 바우야. 당신과 같은. 그리고 이곳의 주인장과 마찬가지로」
「바우가 하나 둘 더 늘어나도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찾는 열쇠는 지금 내가 엉덩이 밑에 있는 통 안에 있어요. 저번에 앤빌마가 이곳에 두고 가는 걸 봤거든요. 당신이 여길 떠나는 건 자유지만 문단속을 잘 하도록 해요. 나도 꽤 많이 도둑 맞아봐서. 내 일이 아니라도 뭔가가 없어진다는 거에는 진절머리가 나니까. 하실 말이 없다면 전 이만 자러 가봅니다」
「들어가봐요. 아니, 잠깐만 저기 롬」

서로 일어선 채로 난 그의 뒷모습을 봐야 했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뭐죠? 바우 아저씨.」
「바우가 더 늘어나도 놀랍지 않다는 말은 무슨 의미지?」

그는 발을 끌어 뒤로 땅에 직선을 그었다. 그리고 곧바로 주위로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다.

「지금 내 뒤에 누가 있는지를 잊지 마세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신 앞에 누가 있는지도 놓치지 마세요.」

그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 중에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어린 친구의 말대로 열어본 통 안에서 열쇠가 하나 나왔다. 망설임 없이 홈에 끼워 넣었다. 분명히 돌아간다. 돌아가긴 가는데, 완전히 돌아가지 않는다. 내 손의 열쇠는 추가 운동을 하듯 반복을 하지만 그 이상의 궤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 열쇠가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끝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늘 결정의 문 앞에 서 있던 나처럼.

 이번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열쇠가 있지만 나는 돌릴 수 없다. 깊은 절망이 내려앉은 계단 뒤로 온기가 느껴졌다. 문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게는 저녁부터 불과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벌써 동이 튼다. 난 다시 위로 올라왔다. 피곤하다. 주방을 지나 거실로 나왔다. 이젠 더 멀어지면 안 되지만 막을 수도 없이 망각은 서서히 나의 길을 가려버릴 것이다. 혹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더 잊어버린 것은 없을까. 

우선은 난로 앞의 저 여자가 누군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은 아침이죠?」

이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알까?    
 


3장


<1>


어제 아침 무렵에 나는 이 여관에 도착했습니다. 지난주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마친 오후,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왔습니다. 짐이라 해봤자 대단하다 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준비된 것도 아니지요. 그동안 난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요, 나의 발 뒤에는 항상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 선을 그어둔 지는 오래 되었지만 쉽사리 그것과는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나는 분명 발을 떼었다고 생각했지만 소름끼치게도 그것은 아직도 내 그림자를 자르고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내가 다른 곳을 향해 가더라도 말입니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왔고 언제나 나를 앞에서 이끌어주던 그녀는 지금 옆에 서 있지도 못하고 내 뒤의 선 너머 어딘가로 묻혔습니다. 이젠 난 내가 뒤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갈 것입니다.

「마침 잘 됐군요. 그곳이라면 내가 데려다 줄 수 있어요. 매주 오늘이면 물량을 넣어주러 가야되거든요. 이거 먹어봐요.」
「오 그렇게 해주겠어요? 으흠, 이 지방의 사과는 정말 달고 맛이 풍부한데요?」
「그나저나 여긴 그렇게 여행자들이 잘 들리는 마을도 아닐뿐더러 여자가 타지에서 혼자 다니다니. 이곳에 아는 지인이라도 있는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아까 여기 시장에서 만난 수염이 길게 나신 분이 자신 있게 그 여관을 추천하고 가시더군요.」
「앤빌마군요. 그는 그 여관의 관리를 맡고 있죠.」
「음, 그도 역시 물건을 구하러 시장에 나온 것 같던데. 당신에게 늘 그렇게 직접 주문을 하고 가는 거군요.」
「뭐, 직접 다 가져갈 수 없기도 하고 직접 보는 게 가장 좋으니까요.」
「주인은 직접 관리를 하지는 않는 모양이죠?」
「그분들은 나이가 좀 있으시고 점점 손을 놓으시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듣자 하니 한 분은 요새 몸이 좀 안 좋다 하시기도 하고.」

스프링베일은 곡물이나 육류 등이 들은 박스를 하나씩 마차의 짐칸에 실었다. 그리고 마차의 앞에 푸드득 거리는 녀석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몸집은 줄리보다 좀 크던가 비슷할 듯하다. 그래도 얼굴이나 갈기는 우리 줄리가 훨씬 예쁘다.

「이 지방에서 그 여관을 오랫동안 경영하셨나 봐요?」
「그렇지도 않아요.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두 분 다 장사꾼이셨어요. 결혼도 하시고 자식이 생겨도 계속하셨는데 덜컥 손자가 태어나니 그만 쉬셔야겠다고 마음이 드신 건지. 어찌 보면 잘된 일이죠. 짐칸은 비좁지않나요?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말발굽 소리 사이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 마차 위에서 보는 전경은 먼 미래가 가깝게도 스쳐가는듯 했다. 그는 날 문 앞에 세워주고 집 뒤편으로 돌아갔다. 낮이니 딱히 여관 문이 잠겨있지 않을 것이다.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창이 많지 않음에도 실내는 기분 좋게 환했다. 거실에는 상냥해 보이는 노부인이 벽난로 앞에 앉아 봉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안쪽에는 남자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난 그녀에게 다가가서 여쭈었다.

「안녕하세요.」
「오, 잠깐만 있어 봐요. 이것만 마저 정리하고 아까 하지 못했던 얘기를 계속 하죠.」
「네?」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주방 같아 보이는 곳에는 익숙한 목소리 그대로 앤빌마가 보였다. 그 외에 누군가 있는 것 같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계단 쪽 그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음, 어두운 방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건가. 사다리가 걸린 방만큼은 몇 번이나 덧칠된 것처럼 보인다. 뒤돌아보니 부인이 두리번거리고 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야 초점이 잡힌 듯하니 눈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하던 일은 끝나셨나요?」
「아, 당신은 아까 문 앞에서 본 그분이 아니군요.」
「아쉽게도요. 저는 마릴이라 하고, 이 마을에 들린 여행자입니다. 빈방이 하나 있는지 여쭙고 싶은데 혹시 이곳에 주인이신 바우를 아시나요?」
「호호호, 마릴. 이곳의 어떤 바우를 찾으시는 거죠?」
「여기 여관의 주인이 바우라고 듣고 왔는데요?」
「장난이에요. 어떤 바우를 찾는 건지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책에 푹 빠져있으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방을 보여드리죠.」

이 집의 성이 바우인 모양이군. 여관의 분위기는 꽤 좋다. 방만 멀쩡하다면 사나흘 정도 머무르면 될 것이다.

「오 내 정신 좀 보게, 그전에 이 편지들을 챙겨야지.」
「바우 부인.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혼자로 충분하답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기 전 주방에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 벽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보였다. 나와 비슷하게 서른 좀 넘어 보이는 연령대의 남자다. 계단을 올라간 이 층은 아쉽게도 조금 어두웠다. 날씨가 어두운 날에는 낮에도 초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는걸. 내 방은 복도 오른쪽에서 끝이다. 복도 끝에도 방이 있는 듯한데 불투명한 너머로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방은 예상했던 대로 딱 필요한 것만 갖추고 있었다. 벌레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어. 조용히 쉬어갈 곳이면 충분하지. 다행히도 채광이 좋아 방에 있는 동안에도 꽤 밝을 것 같아.

「그럼 부인. 괜찮다면 제가 이 방에 머물러도 될까요?」
「그러시죠. 당신이 마음에 들어할 것 같았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그럼 전 제 남편과 이곳 주방장에게 손님이 왔다고 알려주러 가야겠군요.」

정리를 좀 하고 곧바로 마을을 둘러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앞으로 그 문은 당신으로만 열리고 닫힐 겁니다.」
「네? 아, 단속을 잘하란 의미인거죠? 여행 중에는 항상 조심해야 하니까요. 아 그렇다고 이 동네나 이 여관의 치안이 안 좋다는 말이 아니에요.」
「안심하세요. 그 문고리를 다른 누가 돌린다 한들 그 너머의 방은 당신이 돌려서 나온 방이 아닙니다. 그들의 과거는 당신의 미래와 교차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미래 또한 당신의 과거와 교차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한 번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복도 끝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난 문을 닫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몇 번이고 문고리를 돌렸다 놨다를 반복했다.  
   

<2>  


짐을 간단히 풀고서 잠시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보았다. 며칠을 머무르게 될지 모르니 이곳 사람과도 인사를 나눠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문을 열고 나와 아까 부인이 들어갔던 오른쪽 방의 문을 두드렸다. 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불투명한 문 때문에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난 조심스레 문을 밀고 들어갔다.서재라고 해야 할까? 책이 바닥이나 책상에 높게 쌓여 있긴 하지만 무언가 연구를 위한 공간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 무언가 학자의 방이라면 이런 느낌일까 싶다. 바닥엔 무언가 써 놓은 종이들이 잔뜩 널부러져 있으며 그뿐만이 아니라 벽에도 그림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붙어있다.
 이 집의 조형도 같은 것일까. 밖에서 봤던 것이랑은 조금 다른데. 그리고 그 옆에는 좀 독특한 집 그림도 있다. 동쪽 어딘가에 있는 나라에서는 주로 나무나 흙을 이용해 집을 짓는다고 들어봤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엔... 잘 모르겠다. 이것을 집이라고 보아야 할지조차도 모르겠다. 탑 같기도 하고 높다란 성벽 같기도 하고. 네모 상자 같은 감옥을 그려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생님께선 뭘 보고 계시나요?」

뒤에는 7살 즘 될 것 같은 작은 아이가 서서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이 집의 손자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 남자애인 모양이야. 가까이 가 무릎을 굽혔다.

「안녕」
「안녕하세요. 전 플맆이라고 해요. 작은 저를 위해서 높이를 맞춰 주시는군요.」
「별거 아닌 행동이지만 나도 작은 친구의 나이 때에 이러한 배려가 고맙다고 느꼈거든요. 덕분에 제가 그때 목이 덜 아팠기도 했고요. 하하」
「선생님 재밌으시네요. 사람 사이 키 높이에 따라 볼 수 있는 게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요.」
「네? 어째서죠?」
「사실 이건 서로 대화하기 편하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꼬마 친구와 눈높이를 공유하고 싶은 거에요. 사람은 볼 수 있는 것을 보거든요.」
「아, 알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하신 거군요.」
「막상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또 부끄럽네.」
「그런데 선생님. 그렇게 되시면 이전 눈높이에 있던 세상을 보지 못하실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런가. 이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반대로 잃게 되는 것도 있는 건가. 난 그동안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음, 숙이고 있는 것도 오래는 못할 것 같다. 플맆은 그것을 눈치챈 건지 걸어와 책상에 걸터앉았다. 

「너 어린데도 참 똑똑하구나. 부모님이 널 자랑스러워하시겠어. 네가 한 말에 답을 주자면. 난 내가 예전에 볼 수 있던 것을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자신의 과거는 그림자 같아서 언제나 바로 뒤에 따라온다 하던데요?」
「그래, 하지만 그림자도 지금의 내가 아니야. 그게 나일 순 없고 인정하지도 않을 거야」
「과거가 우릴 구속할 수 없다면 무엇이 우릴 묶어 둘 수 있을까요?」
「굳이 묶이지 않아도 돼. 미래란 아주 조금씩이라 하더라도 과거와 떨어져 주니까.」

밖에서 마릴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이 작은 친구를 찾고 있을 지도 모른다. 플맆은 책상에서 사뿐히 내려와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재밌는 얘기 많이 나눴어요. 이런 얘기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니면 보통 잘 하지 않거든요.」
「나도 멋진 친구를 사귀게 돼서 반가웠어, 난 마릴이야.」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어떻게?」
「마릴은 항상 많은 시간 속에 존재하거든요.」
「뭐? 혹시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니?」

작은 아이는 그렇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마지막 나의 말에는 답을 해주지 않은 채 사라졌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내가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조용히 방구경이나 더 해야겠어. 그러다 커튼 사이로 얇게 들어오는 빛으로 생긴 그림자를 보고 아까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니 그런데 그림자는 나를 비춘 후의 미래인데 어째서 내 뒤에 있는 걸일까. 


<3>


아까보단 조금 환해진 복도를 통해 계단으로 내려왔다. 아래에는 젊은 아가씨와 노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마도 저분이 바우일 것이다.

「오, 그럼 이 여관은 할아버지의 첫 가계였던 거네요?」
「그래도 지금은 개조를 많이 해서 그때의 흔적들이 잘 없다네.」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어린 아가씨께서는 스스로 길을 떠나신 듯한데. 무엇이 걱정이신가?」
「길을 가다 어디서 멈춰야 할지요. 그리고 스스로 어디 있는지 몰라서 길을 잃을까 두려워요.」
「그렇다면 자네의 기준과 선택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와 함께하는 건 어떤가? 스스로를 길을 보지 못할 땐 옆에 있는 그 친구가 이정표가 되어줄 테지.」
「그럼 할아버지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다음에 제게 좋은 말을 고르는 법을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야. 다음에 집 뒤편의 헛간에서 아가씨께 괜찮은 말을 소개시켜 주지」

그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는데 동시에 재채기가 나왔다. 순간 어린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겸연쩍게 미소를 띠었으나 그쪽은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까 보았던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좋은 냄새, 비프 스튜로군. 옆의 끓고 있는 주전자에서 차를 한 잔 따라 갖고 나왔다. 거실에는 아까 그 인상 좋은 아가씨만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도로 들어가 한 잔을 더 따라 가지고 나왔다. 맞은편의 자리를 보니 누가 무언가를 쏟은 듯한데 잠시 머뭇거리다 쿠션을 깔고 앉았다.

「마시겠어요?」
「오, 고마워 바우. 오늘은 좀 신사다운데?」

내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지만, 냄새는 맡을 수 있는 모양이다.

「여기 지도에 표시된 이곳 말이야. 어째서 굳이 운하를 통해 곧바로 가지 않고 중간에 여기 표시된 작은 마을을 하나 거쳐 가려는 거지?」
「요새 운하로 물건을 옮기는 것은 다들 추천하지 않아요. 최근에 전쟁을 준비한다니 뭐니 해서 병사들을 사방으로 모아 운하 쪽 치안이 많이 소홀해져 있거든요.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거기는 거긴 단순한 작은 마을이 아닌 예부터 유명한 금 거래소에요. 지금 있는 돈을 전부 바꿀 셈인가 본데요?」
「오호 안전자산으로 말이지? 그래서 그렇게 가죽 거래를 서둘렀던 거구나.」
「이젠 고개를 들어서 나를 좀 봐줄래요?」

그녀는 목을 들고 나서도 한참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잔을 겨우 내려놓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방금전까지 듣고 있던 게 당신의 목소리 인가요?」
「당신이 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음 글쎄요... 전 단지 그저 잔은 건네기에 제 친구인가 했죠. 그리고 어째서일까요. 전 지금도 당신이 한없이 희미하게 느껴지네요. 당신은 누구죠?」
「전 메리에요. 책을 씁니다.」

왜 난데없이 어릴 적 이름 같은 게 튀어나온 걸까.

「작가요? 의외네요.」
「나도 알아요. 그렇게 안 보인다는 거.」
「아니요. 그래서가 아니라 아까 해준 얘기를 생각해보면 의외라는 거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런 쪽은 어릴 때부터 저희 아버지로부터 들고 자란 말이 꽤 많아서요.」
「그렇군요. 사실 저도 글을 좋아해요. 언니처럼 펜을 잡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땐 마을 도서관으로 가서 문을 닫을 때까지 구석에 기대 웅크려서 읽곤 했죠. 이젠 제가 그쪽을 선생님이라 불러드려야겠네요. 여기 사는 꼬맹이처럼요. 하하」
「혹시 어디 출신이죠.」
「클로우 지방이요. 혹시 알아요?」
「어쩐지.... 당연하죠. 저도 한때 거기 살았는걸요. 그런데 거기 도서관이란 것이 있었던가요?」
「오오, 여기서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될지 몰랐는데. 그럼요, 어머니께선 제가 태어나던 해에 새로운 주화가 발행되었다고 하셨죠. 그 기념으로 시청 맞은편에 도서관 착공을 시작했는데, 그곳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제 8번째 생일이 되어서야 가능했어요. 아직도 처음으로 제 자신이 그렇게 수많은 책으로 둘러싸여 있던 그 설렘을 잊을 수 없어요.」     

신주화가 발행되고 그로부터 8년. 시기가 맞지 않는데.....

「혹시 선생님은 과거에 혹시 절 보셔서 지금 알아보고 물어보신 건가요?」
「익숙한 분위기라고 해야 할지. 왠지 많이 친숙한 인상을 받았네요.」
「그렇군요. 혹시 그건 혹시 당신과 제가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낯설지가 않거든요.」

그렇구나. 이 위화감은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나였을지도 모를 모습. 

「그런가요? 선생님은 신비로운 사람이에요. 내 앞에 있는데도 아직도 당신은 멀리 있는 사람 같아요. 분명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사라지는 것 같고. 들리면서도 소리가 맴도는 느낌이에요.」
「우리가 아직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 사람이 가지는 우주는 그 자체로 방대해서 다른 누군가가 가늠하기 쉽진 않죠. 하지만 아직 우리가 서로를 잘 이해하진 못하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선생님은 선생님만의 것을 갖고 있죠.」
「당신은 영민한 사람이에요. 그런 견해는 제게 또 다른 영감을 주네요.」
「사실 이건 제가 생각해낸 게 아니에요. 어릴 때 본 책에 나와 있었죠. 오, 그나저나 선생님께 제 이름도 알려드리지 않았네요. 전 마릴이에요.」    
 

<4>     


나와 같은 이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 이상한 곳이다 여기는. 방금 전까지도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마릴은 잔을 다시 채우러 가겠다며 자리를 일어섰는데 주방으로 가는 듯싶더니 발을 돌려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가버렸다. 그저 아까까지 누구와 있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원래는 친해지면 여기 안의 소개 좀 부탁하려 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올 때 날씨가 좋던데 밖에서 건물 좀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방에서 겉옷을 챙겨 내려가 현관으로 갔다. 아까 주방에서 앤빌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그가 멍하니 서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던 거지?

「저기요?」

시선은 정확히 문을 향해있다. 다만 나가려는 의도인지는 읽을 수 없네.

「혹시 좀 비켜주실 수 있어요?」

정신을 어디 내려놓은 듯하다. 별 귀찮은 사람도 다 있군. 무시하고 문을 살짝 열었을 땐 바로 앞에 사람이 있어 놀라 넘어질 번했다.

「저기에 내가 있어」
「저기에 내가 있어」

문 경계를 두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둘이잖아?

「나는 여기에 있어」
「나는 여기에 있어」
「그래요 쌍둥이 신사 분. 당신은 둘이에요. 합쳐서 둘이라고요. 그러니까 이젠 그만 놀라게 하고 좀 나와 봐요.」

그러곤 내가 안쪽의 남자를 가볍게 밀자 바깥의 남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보았다. 여전히 없다.

「이봐요! 당신도 봤죠? 거울에 비친 듯이 당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

어느새 뒤돌아 서 있다. 뭐야 이 사람.

「어머 무슨 일이 생겼나요?」

뒤에서 바우 부인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계셨다.

「어? 바우 부인.」
「전 이제 마을에 볼일로 나가려던 참이랍니다. 혹시 길이 같다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오, 물론이죠. 그런데 여기 이 분이 아까부터 어딘가 이상해요. 불러도 대답이 없고 잠깐 뒤돌아섰을 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아요.」
「그거 큰일이군요. 그럼 그 친구는 지금 병원에 있나요?」
「아니요. 보이지 않으세요? 지금 우리 앞에 있잖아요!」
「호호, 글쎄요. 제 앞에는 지금 당신만이 서 있는걸요. 혹시 그 신사분이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하고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마치 영혼을 어딘가에 빼앗긴 사람처럼, 그의 눈은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그런데 정말로 보이지 않으세요?」
「사람은 볼 수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신사분의 인지가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제가 그분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다행히도 그분의 시간은 아직 당신과 함께 머물러 있는 모양입니다. 혹시 그분이 의식이 돌아오거나 상태가 안 좋아 보일 땐 챙겨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정신이 멍해져 얼마나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황과 사람들. 결국 난 그 자리에서 그냥 돌아왔다. 밖에 나가는 것도 포기하고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주저앉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상황정리가 필요했다. 분명 발끝까지 그대로 베낀 인간이 둘이나 있었고 알 수 없는 듯 한 행동. 심지어 부인은 그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며 지나갔다. 어색함인가. 아니 이건 위화감이다. 단지 내가 이해못하는 무엇이 있는 거야. 아니, 이건 무언가 장난을 치는 걸 거야. 쌍둥이일 수도 있잖아? 그렇지 그럴 거야. 잠시 뒤 들어온 앤빌마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 안녕하세요. 부인께서 새로 묵게 될 손님 얘기를 했을 때 바로 당신이란 걸 알 수 있었죠.」
「당신이 추천한 곳이에요. 좋은 곳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주방에서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요?」
「저녁으로 쓸 스튜가 끓고 있을 겁니다. 곧 준비를 해야죠. 쉬시다 늦지 않게 내려오세요.」
「그러죠.」

그는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행이군. 드디어 저 스튜를 맛 볼 수 있겠어. 나도 잠시 뒤에 내려와야겠다고 방에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였다.
 아, 별로 피곤한 일은 없었는데. 스스로 어찌나 바보 같은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스로도 우습다고 생각하며 허기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을 보니 한밤중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내려온 일 층에는 불만 피어오를 뿐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뒤적거린 주방에는 빵 몇 쪼가리와 식었지만 아쉬운 대로의 스튜가 남아 있다. 
옆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올라오는 소리에 놀라 불을 초로 비췄다. 흰옷을 팔랑거리며 귀신 같기도 하다. 아니 귀신보다 더 희미하다 말 할 수 있다. 이 집에 온 뒤로 처음 보는 사람이다. 나이는 아까 그 아가씨랑 비슷할 같다.

「처음 뵙습니다. 놀란 표정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사람이 나올 줄 몰랐나 보네요? 하긴 누구라도 놀라겠죠. 하하」
「저도 처음 뵙습니다. 사실 이곳이 처음이라 그쪽에 지하가 있는지도 처음 알았어요. 그 말대로 어떤 상황이라도 적잖게 당황했을 겁니다.」
「그런가요. 뭐, 혹시 이 밤에 출출해서 내려오신 건가요.」
「네, 다행히도 요기는 될 수 있게 조금은 남겨져 있네요.」
「그거 잘 됐네요. 그럼 저는 시간이 늦어서 이만.」

그가 떠나고 계단 밑을 보았다. 지하라고 생각했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캄캄한 벽만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번 더듬어 봤지만 역시 벽이 맞았다. 흠 어두워서 여는 손잡이를 못 찾는 건가. 아니면 비밀의 문이라도 있는 건가. 음식들을 가져와서 불가에 앉았다. 잘린 빵을 스튜에 찍어 먹어도 썩 잘 어울린다. 좀 싱거운 느낌은 있지만 나쁘지 않아. 불이란 오묘하다. 조금씩 스스로 형태를 바꾸어 가는데도 그리 거북하지 않다. 익숙한 모습과 낯선 모습을 번갈아 나타내며 그렇게 시간 속에 남아 있다. 
주방쪽에서 다시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네, 아까 주방을 봤을 땐 분명 아무것도 없는 듯했는데. 그런데 저 남자는 어디에서 튀어나온 걸까. 저 바위 같은 남자가 드디어 스스로 몸을 굴린 모양이군.

「좋은 아침이죠?」     


4장

   
<1>

   
「이젠 확실하게 보지 못하겠어요.」

바우는 앞에 있는 여자가 어제 부인이 화로 앞에 앉아 있던 것과 겹쳐보였다. 그의 눈과 한쪽입은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억지로 웃어 보이게 했다.

「당신 괜찮아요?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날 보았던 누군가는 날 봤다고 말하지 못해요. 나의 목소리를 전해도 그들에겐 잠시 머무르는 메아리인가 봐요. 어느새 내가 이 집의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다고 믿는 게 힘들어졌어요. 심지어 이젠 내가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내 눈앞에서 나를 아는 체 인사를 하네요. 내가 정신병에 걸린 걸까요? 혹시 당신,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듣고 있긴 한 건가요?」
「듣고 있어요. 진정해요. 당신이 나를 모르는 건 당연해요. 아마도요.」

마릴은 머뭇거리다 빵 한 조각을 때어 천천히 바우에게 건넸다. 바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신의 손에 무엇이 들려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건너왔던 시간보다 더 천천히 자신의 입으로 옮겨가 가볍게 물었다.

「미안해요. 좀 쉬어야 겠어요.」
「난 계속 여기에 있을 테니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 돌아와요.」
「당신이 여기에 있던 과거는 변하지 않는 건가요?」
「과거를 항상 떠나고 미래는 찾아오고 말죠. 다만, 멀리 가지 않고 맴돌 테니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나를 찾아요.」
「...그렇군요.」

바우의 방이 열리고 닫혔다. 그러곤 다른 방이 열리고 백발의 노파와 어린 아이가 나왔다. 노인은 곧바로 옆의 서재로 들어갔고 아이는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마릴은 화로 옆의 책장에서 볼 책을 고르는 중이다. 플맆은 그런 마릴을 한 번 슬쩍 보고는 전날 누군가가 어지른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술병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마릴이 뒤돌아본다.

「안녕?」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일찍 일어났네.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니?」
「아니요. 오늘은 할아버지와 여행을 떠나는 날이에요.」
「오, 그것참 재밌겠구나. 어디 멀리 떠나니?」

플맆은 병을 모아 바다에 내려놓고서 편하게 자리에 앉았고 마릴은 책을 한 손으로 든 채로 그런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여행이 아니라 할아버지 볼일 차 왕궁이 있는 대도시를 보러 가는 거에요. 그래서 이번엔 제가 졸라 동행하게 해 달라 부탁 드렸죠.」
「그렇다면 다음 주쯤 돌아오겠구나. 부인께서도 같이 가시니?」
「아니오. 두 분 다 자리를 비우실 순 없어서 할머니는 남아 계시기로 했어요. 아마 이번 기회에 엉망인 서재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겠다고 결심하신 모양이에요. 그것도 그것대로 잘된 일이죠」
「좀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 자체로 멋지던걸?」
「지금 그 말을 할아버지가 들으면 무척 좋아하셨겠지만 할머니는 역정을 내셨을걸요? 선생님께서는 여행 중이시죠? 무슨 모험을 하시려고 길을 떠나셨나요?」

나는 플맆의 옆으로가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잠깐동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플맆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무엇을 찾기 위한 여행이 아니야. 오히려 보내기 위한 출발이었지」
「무엇을 두고 오셨나봐요?」
「내가 어디에 있든, 어딜 보고 있든, 그건 단지 앞이었어야 했어. 설령, 내가 고개를 돌려 본다고 해도 말이야. 내 뒤엔 무엇이 남겨져 가든 간에 나는 보면 안 된다. 그렇게 믿었었어. 내겐 유일한 혈육이던 할머님이 한 분 계셨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전쟁 통에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그래서 내가 너만한 나이가 되기도 전에 그분에게 길러져 자랐어. 지금까지도 옆의 나라와 계속되고 있는 그 분쟁이 싹트기 시작했던 무렵이야.
    

<2>


「세금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맞는 말이야. 그곳은 교회를 앞세워 무역에서 많은 관세로 이윤을 챙기고 있지.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인 종교개혁까지 잎에 오르내리고 있어. 그래서 지금 왕국에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수도로 병력을 모으고 있는 거야. 너에겐 어려운 얘기일지도 모르겠네.」
「저는 선생님 얘기를 마저 듣고 싶은 걸요?」
「내 얘기?」
「왜 선생님께서 아직도 시간의 모순에서 고통받고 계시는지요. 혹시 이런 질문이 너무 실례가 될까요?」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내 부모님은 그저 전쟁통에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 몇 년에 걸쳐 이어지는 흉작에다가 전염병도 돌아 마을은 꼴이 아니었지. 그런데도 새로운 세금을 명목으로 교회가 돈을 매기기 시작하자 마을과의 갈등은 겉잡을 수 없이 격화되기 시작했어. 그 전부터 교회가 특점 물품을 독점해 자기의 입맛대로 가격을 정하고 시장을 조작해 왔는데 드디어 일이 터진 거였지. 그런데 뜬금없이 교회는 우리 마을에만 특혜를 주겠다는 식으로 회유하기 시작했어.」
「교회도 상황이 나빠지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대처가 늦은 거 아닌가요?」
「아니, 교회도 무르지 않았어. 교회는 사실 이미 그 전부터 마을의 지도자 일부 몇 명을 포섭해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던 거야. 자신들이 회유책을 폈을 때 본격적으로 상대 쪽 내부에서 심어둔 사람들로 해서 점점 수긍하는 분위기로 만들어버리려 했던 거지. 하지만 너무나도 강경한 입장을 들고 일어선 사람들에게는 일부 지도자만으로 선동하긴 역부족이었지. 그러자 교회는 이번엔 마을 사람들 속에도 자신들을 지지할 대변자를 심어야 한다 생각했지.」
「설마, 그 사람들이라는 게」
「그래, 내 부모님들은 교회의 끄나풀이셨어. 그러나 도중에 누군가의 고발로 모두가 있는 마을 광장으로 잡혀가셨다는 것만 들었어. 아마 교회가 포섭해둔 마을의 지도자들이 분위기를 돌리기 위한 계책을 쓴 거겠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러면 자신들도 언젠가 들킬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왜 마을 사람들은 결국 싸우지 않았죠?」
「무력이 충돌하는 것은 누구나도 원하지 않는 일이야. 아무리 그 분노가 극에 달한다고 해도 말이야. 누군가를 본보기로 삼는 것만으로 그 분위기가 사그라든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어. 웃기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그럼 선생님께선...」
「이미 상황을 짐작하시던 할머니께서는 그날 새벽에 미리 준비해둔 마부와 함께 아직 잠에 깨지도 못한 날 데리고 떠나셨다고 해. 물론 그 일 뒤로 마을에 돌아가 본 적은 없어.」
「할머님께서는 뒤에 두고 온 부모님께 돌아갈 수 없어서 줄곧 마음에 짐으로 담아뒀던 거군요. 선생님도 마찬가지고요.」
「난 그렇게 마음속의 부정을 오랫동안 묻어뒀어. 그마저도 유일하게 앞에 계시던 분께서는 어느날 내가 붙잡을 수도 없이 선로에서 벗어나셨지. 결국 혼자남게된 난 언제까지나 멀어지지 못한 채 계속 맴돌았던 거야. 아직도 난 여기에 있어.」
「쉽지 않은 얘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너무 심각한 얘기를 했네. 너도 짐을 챙겨야 할 텐데 그만 가봐도 돼」
「네 고맙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다시 인사드릴게요」

플맆은 이 층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마릴은 불가에 앉아 아까 고른 책을 폈다. 잠시 후 노인과 플맆이 내려왔고 나가기 전 마릴은 그와 가볍게 손 인사를 나눴다. 둘이 떠난 뒤 앤빌마가 호쾌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장작을 확인하고 몇 개 넣을 뿐 별 말은 없었다. 이 층에서 바우 부인이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부인. 그러고 보니 두 분을 배웅하진 않으셨네요.」      
「위 층에서 손을 흔들었답니다. 언젠부터였지, 더 멀리까지 보이는 게 좋아 그런 식으로 하는 게 편해져 버렸네요. 호호, 무슨 책을 읽고 계셨나요?」
「무슨 물결이라는 단어가 나오네요. 엘빈? 어느 시대 저자죠?」  
「제법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죠. 많은 사람들은 궤변이라고 그의 책을 도중에 던져버리곤 하지만요. 바우는 그 책을 아주 좋아했어요.」
「좀 믿기 힘든 내용이 있지만 소재는 아주 재밌네요. 기계들이 잔뜩 들어오는 부분에서 그런 세상이 실제로 온 다는 게 실감하긴 어렵지만요」
「그건 이미 큰 도시에선 낯설지도 않은 얘긴걸요」
「에이, 촌뜨기라고 놀리진 마세요. 제가 그 정도로 숙맥은 아니에요」

둘은 불가에 옮겨와 앉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바우 부인께서는 원래 이름이 마릴이시죠?」
「네, 그대와 같은. 직접적으론 얘기하지 않았죠? 호호, 그 이름은 누가 지어주신 건가요?」
「이건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가 지어주셨어요.」

노인은 고개 숙인 숙녀의 등을 몇 번 쓸어 내려주었다. 노인은 옆자리 작은 소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이 된 것을 확인한 노인은 주방에 들려 앤빌마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올라갔다. 지난 밤늦게 잠에 든 롬이 방에서 나와 아침에 소년이 정리한 자리에 앉아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잠을 못 이루던 바우가 결국 일어나 계단을 내려와 불가의 빈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렸네요.」
「그냥 잠시 쉴 시간이 필요했던 거에요.」
「하여튼 반가워요. 나와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바우」
「당신은 마릴인가요?」
「말해 무엇 하겠나요.」
「이곳에 이상을 알아챘습니까?」
「약간은요? 사실 잘 모르네요. 아직」
「여긴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막는 무언가가 있어요.」
「당신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던 그것 말인가요? 안 그래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어요.」
「맨 처음 들어왔던 저 문을 다시 나가려던 몇 번의 시도를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 했어요. 그저 경계에서 의식을 잃고 멈추고 말았죠.」
「아직 내가 밖으로 나가 본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믿기 힘든 말이네요. 사실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어제 문 앞에 서 있던 당신을 봤을 때, 문 너머로 당신을 똑같이 베껴놓은 다른 사람을 봤어요. 그대로 거울에 비춘 것처럼. 하지만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죠. 내가 궁금한 건 대체 그게 뭐였냐는 거에요.」
「문 앞에 또 다른 내가 있었다고요?」
「말 한 그대로요.」
「앤빌마는 문을 나섰을 때 나와 같이 시장까지 갔다고 했어요. 분명 난 여기 있었는데 나의 무엇은 떠나버렸다고 말이에요」
「솔직히 내 눈으로 앞에서 보기 전까진 이 이상 뭐라 할 수가 없겠네요.」
「그럼 날 따라와요」

바우는 마릴에게 우선 자신이 처음으로 증명하는 것을 지켜보면 그다음 순서로 마릴의 차례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을 목격할 제 3의 인물을 데려다 놓고 보기로 하자고 설명했다. 마릴은 말없이 끄덕였다. 문이 열리자 바우가 침묵을 깨고 발을 땠고, 정확히 문을 넘기 전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다음은 저번에 봤던 장면과 같았다. 마치 떠나간 바우의 영혼이 밖에서 기다리듯 또 하나의 그는 남겨진 그를 응시했다. 그제서야 팔짱을 낀 체 벽에 기대서 지켜보던 마릴도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마릴이 문을 닫고 한참을 흔들어 바우를 깨웠다. 그리고 의식이 돌아온 바우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필요 없이 마릴도 떨면서 손을 밖으로 뻗었다. 마릴이 정신을 차렸을 땐 바우가 앤빌마를 데려와 옆에 서 있었고, 바우는 그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고 마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3>


날은 바우가 이곳에 처음에 도착했던 그 날과 같이 칠흑으로 잠겼다. 먼저 정신을 차린 바우가 마릴을 흔들었고 둘은 서로의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할 뿐 결국 아무런 대화 없이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엔 앤빌마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난로에 장작을 올리고 있었다.

「오늘도 늦게까지 남아 계시네요.」
「어르신께서 가시기 전 부탁을 하고 가셨네. 아무쪼록 자신이 없을 동안 각별히 신경 좀 써 달라고 말이야.」

「집에 가족이 있지 않으세요?」

마릴은 대화를 들으며 낮에 자신이 보던 책을 정리했다.

「일 잘하고 알뜰하게 살 것처럼 보여도 이래 봬도 독신이지.」
「두 분이 그리 태평스럽게 안부나 물을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마릴, 여기 불가에 와서 앉으세요. 밖에 제법 오래 있다 온 것 같은데 몸 좀 녹이면서 얘기해요」
「밖에 있었다고요?」
「바우가 낮에 다짜고짜 내게 와서 부탁을 했네. 이제 곧 자신과 마릴이 밖으로 나갈 테니 지켜봐 달라고 말이야. 사실 저번에 이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황당한 부탁이었지만 그 진지한 표정에 거절할 수도 없었지.」
「과정은 됐어요! 그래서 당신이 목격한 것만 얘기해줘요. 분명 바우가 내 팔을 잡고 저 밖으로 끌어 당겼죠. 그때 당신은 무엇을 봤죠?」
「흥분하지 좀 말게. 자네가 설명한 그대로야. 자네 둘은 그렇게 밖으로 나갔네.」
「그리고요?」  
「목적은 모르겠으나, 그렇게 어디론가 향했지. 내가 한 일이라곤 그저 좀 더 지켜보다가 문을 다시 닫은 것뿐이었네.」
「그것뿐이라니...」
「이제는 내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자네들에게 묻고 싶네. 대체 무슨 문제 때문에 이러는 건가?」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당신이 이 집에서 나가는 걸 봤던 그 누군가의 실체는 그때 이 집에 남아서 떠나지 못하고 계속 속박 돼 있었어요.」
「바우, 그렇게 접근해서 안 될 것 같아요. 내가 물어봐야겠어요. 앤빌마. 모두가 알다시피 기이하게도 이 집에는 현재 각각 세 명씩의 바우와 마릴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존재해요. 당신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서로 다른 사람인데. 나이도 모습들도 제각기이지 않나?」
「잘 생각해봐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더군다나 이름이 같은 세 명의 사람. 뭔가 위화감 같은 걸 느끼진 않으세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자네들이 말한 이곳을 나갈 수 없는 이유가 그것과 어떻게 관련이 있다는 건가?」
「아직은 잘 몰라요. 하지만 무슨 이유가 있다면 분명 그 부분을 집고 넘어가야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뭐, 자네의 말이 맞다, 그렇게 전제를 해 보지. 뭐, 나로서는 자네들이 나가지 못한다는 부분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말이야. 그런데 나머지 바우와 마릴들은 자유롭게 들락날락 거리지 않나? 자네들의 기준에선 그들이 당연히 정상이란 말이지. 반대로, 다른 이들이 볼 땐 자네 둘은 역시 또한 출입이 가능한 사람들로 보이네. 하지만 자네들만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란 거지」
「결국, 그 말은 그런 뜻이네요.」
「그래, 자네들의 문제는 외부에서 해결할 수 없네. 무엇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그 방법은 자네들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거야.」
「알았어요. 고마워요, 앤빌마.」
「표정을 보면 도움이 되지 못했단 걸 안다네. 미안하군.」

같은 시간, 바우는 지하로 내려와 통을 깔고 앉았으며 마릴은 계단 끝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릴 부인은 서재에서의 일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둘 중 먼저 몸을 일으킨 건 바우였다. 그는 자기 방으로 향하는 중 그 그림을 다시 한 번 흘깃하며 지나쳤고 윗층 입구에 앉아 있던 마릴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고 지나쳤다. 바우는 방에 들어가서 초를 가지고 서재로 들어갔다. 멍하니 앞을 주시하던 그녀도 옷을 털고 일어나 그를 쫓았다.    
 

<4> 


「바우, 혹시 아래층에서 젊은 친구들을 본 적 있나요?」
「물론입니다.」
「난 그중 어린 마릴을 보고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그 중 젊은 바우가 나를 보는 것 같았소. 하지만 지금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나를 말이오.」
「정말로, 혹시 정말로 지금 그 둘이 우리의 모습들이었던 게 아닐까요?」
「저들이 우리 과거라 말입니까? 터무니없는 소리로군.」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그저 이것은 어떠한 영감일 뿐이니까.」
「아니, 완전히 잘못됐다고 넘길 말이 아닐지도 몰라요. 만약에 그렇다고 가정하면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우리 모두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하군요. 별도리도 없지만...」
「이미 받아들인 부분 아니던가요. 좋아요, 이 가정대로라면 지금 이 우주먼지 여관이라는 공간에는 마릴과 바우, 이렇게 두 명의 인간이 셋으로 분리된 시간으로 나뉘어져 나타나요. 즉, 지금을 현재라고 기준을 잡는다면 저들은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라는 거죠.」
「흥미롭군요.」
「지금 우리, 즉 ‘현재’라는 시간이 문제란 것이라 합시다. 그리고 저 과거와 미래란 시간에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의 벽을 허물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어느 쪽으로 접근할지 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네요.」
「어느 쪽으로 정한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생각해봐요. 당신 말대로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시간은 문제가 있어요. 그건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시간이 잘 못 됐던가. 아니면 현재에서 미래로 옮기는 시간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죠.」
「그거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네요.」
「네, 당연히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중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방금 바우의 말에 마릴이 정말로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그거야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에서 잘 못 됐다는 정리가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 아닌가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지금 현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전부 과거의 행보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접근하는 게 옳다고 보는데요?」
「아니요. 오히려 과거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우리 사람은 미래를 나아가는 데 있어서 순수하게 보지 못하게 되고 오염되는 것은 과거의 구속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진정한 해결은 현재에서 미래로의 흐름을 올바르게 나아가는 데 있어요.」
「그거야말로 정말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과거를 배반한 채 지금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요? 당신이 다녀간 길이 있기 때문에 방향이란 걸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 건가요?」
「천만에요. 길이라는 건 지금 이 순간 발생하는 거라고요. 과거에 내가 어떤 길을 다녀갔기 때문에 지금 내가 그 길에 있다는 말은 거짓이에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마릴이었다. 그는 뒤돌아서 숨을 크게 내쉬고 대꾸했다.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건, 우리가 가진 문제는 완전히 공통이 될 수 없다는 거에요. 당신과 나는 달라요.」
「동감이에요. 같은 현상을 이해하려 하지만 우리는 열려 있는 곳이 다른 모양이네요. 밤이 됐으니 생각을 정리하고 아침에 다시 얘기합시다.」

마릴이 먼저 자리를 떴고, 남겨진 바우는 서재에 정리된 여러 장의 그림에서 새 모양의 무엇을 그려놓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턱에 손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난 여태껏 하늘을 보면서 이런 새 따윈 본적도 없노라고 중얼거렸다.      



5장

  
<1>

   
이미 새벽부터 하늘과 땅이 흰 장막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어제 밤늦게 여닫힌 문은 아침 늦도록 열리지 않았다. 지난날의 일이 고된 것인지 안주인의 방문도 열리지 않았다.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든 젊은 두 남녀의 방이 순서대로 열렸고 그들은 주방장이 일찍이 만들어 놓은 식사를 해결하며 아침을 보냈다. 좀 시간이 지났을 무렵 마릴의 방문이 열렸고 방에 돌아가지 못하고 서재에서 잠을 청했던 바우가 깨어났다. 마릴은 기지개를 피면서 계단을 내려가던 중 옆 벽에 있던 그림을 흘깃 보았다. 바우는 지난 밤에 보다 만 그림 몇 점을 더 넘겨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화로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보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 따뜻한 차를 두 잔 타가지고 와 그녀에게도 한 잔 건넸다.

「뒤에 저들을 봐요」
「배경도, 걸어갈 길도 다른 두 사람인데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어린 아가씨는 몸을 식탁에 기댄 채 왼손을 턱에 괴이고 말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젊은 청년을 보고 있으며, 그는 왼손에 든 잔은 미쳐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즐겁게 모험담을 늘어놓고 있다.

「...저들은 우리가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없는 우리의 말이 피어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알아내야 해요. 어째서 우리의 모습이었을 지도 모르는 모습이 우리와 같은 시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를요.」
「글쎄 당신은 과거의 흔적을 쫓는 게 의미가 없다 했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제가 아니라 부인을 먼저 찾아봬야 하겠네요. 아니면 혹시 간밤에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착각하지 마요. 말했듯이 난 저들을 온전한 나의 과거라고 인정하고 있지 않아요. 저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현재겠죠. 오히려 나는 저들을 통해 나에게 없었던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이유를 찾으려는 거에요. 그 힌트는 저들이 보여주는 그때 그 시간 그 공간인 거고요.」
「나도 밤에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문제가 우리가 속한 시간의 기준에서 생각해야 할지를요. 결론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바우는 한 손을 들어 또 다른 바우를 가렸다. 그리고 한 쪽 눈으론 마릴을, 그리고 다른 쪽으론 또 다른 마릴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당연히 과거 현재 미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머물러 있는 지금 현재가 당연하잖아요?」
「마릴, 하지만 생각해 봐요. 당신도 아마, 아니 우리는 모두 이미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온전히 우리가 스쳐온 경로가 될 수 없음을. 더욱이 우리 각자를 대신할 분신이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걸요. 그리고...」
「그 뒤의 말은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꺼내려 하는 말이 무척이나 두렵습니다. 앞으로 그 말을 아주 조금이라도 가슴 속에 담게 되면 찾아올 괴기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요? 오, 바우. 난 그러지 못해요.」

마릴은 양 눈은 가려버렸다. 

「마릴... 우리가 있는 현재를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여기 머물러 있는 우리 둘 뿐입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요.」
「저쪽이 내 과거의 파편이라면 희망이 분명 있을 테요. 포기하지 않으면 가능성도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겁니다. 난 저기 있는 친구와 저번에 심오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소. 두고 보세요. 반드시 저 어린 친구와 무언가 닿고 볼 테니.」

바우는 자리에 일어서서 그의 뒤로 다가갔다.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몇 마디를 던졌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그의 손을 잡았다. 롬은 갑작스렇게 나타난 그에게 적지않게 놀랐다. 하지만 바우는 몹시 지지한 말로 롬에게 잠시 저쪽으로가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고 옆의 다른 어린친구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어린 바우는 웃으면 그러자고 얘기했다. 
그러나 바우가 화색이 돌아 먼저 일어났을 땐 롬은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바우가 얼빠진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아야지 하는 순간에 롬은 옆의 친구에게 점심을 사주겠다며 밖으로 데리고 나가버렸다. 고개를 떨구던 바우는 내게로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았으나 눈빛이 흔들려 제대로 처다 보지도 못한다. 난 다가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왼손을 올리며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숨을 내쉬웠다.   

<2>


「바우, 물리적 너머란 게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바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물론이고 당신이 한 수차례의 시도에도 우리의 인지는 저밖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볼 수 없는 것.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단편.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의미 있는 건가요?」

바우는 고개를 들지 않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이오. 저곳에는 우리가 들어온 길이 있소. 우리가 여기로 들어오기 전 발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오. 우리의 흔적이 말입니다!」
「그 흔적이란 것. 지금도 또렷이 들을 수 있으신가요? 전처럼 볼 수 있겠어요? 제대로 마주할 순 있겠습니까?」
「물어 볼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과거에요. 과거가 어디 도망간답니까?」
「그 과거...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바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우리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어요. 스스로는 다 보고 있다고, 다 듣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통의 문제는 온전히 그것을 전달받지 못하는 저쪽의 문제라고요. 우리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이상 나를 비참하게 하지 마세요. 마릴. 아니 내가 얘기하겠소. 나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소. 내게도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저들은 내게 훨씬 많은 메시지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게 내가 알아 듣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해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저들과 다름없는 게 아닌가 하고 두려웠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지금도 꽤 꼴사나운 모습인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벽 앞에 어떤 표정으로 서야 한답니까?」
「이곳에서 플맆이란 아이를 만나 보았나요?」
「재밌는 아이였소. 일전에 이곳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나를 먼지 거인이라고 부르더군요.」
「무슨 의미죠?」
「아주 큰 시야를 가진 줄 아는 한없이 아주 작은 존재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우주가 얼마나 큰 세계인 줄 가늠하지 못하죠.」
「지금 나의 한쪽 어깨엔 당신 손이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까진 여기에 그 누구도 나와 그러진 못했습니다. 난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던 건지도 몰라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들이 당연히 내 앞에 있는 것 마냥 대했습니다.」
「이전까지 우리가 있던 세계는 닫혀버렸고 새로운 눈을 떠버렸죠. 우린 지금 우리가 속한 이 공간과 시간을 다시 천천히 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요. 다시 원점이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네요.」
「바우, 기운 내요. 우리가 그저 틀렸던 건만은 아닐 거에요.」    
 

<3>

 
집 앞을 쓸고 있던 앤빌마가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말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마릴 부인도 창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고 가벼운 미소만을 지었고 뒤에 앉은 아이만 양팔을 흔들었다. 어제 일찍이 길을 떠났던 바깥주인은 길을 가던 중 한 마을에서 왕궁에서 파견된 급사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보고 급히 말을 돌렸다고 했다. 그리고 여관안의 식구와 객들에게도 늦지 않게 짐을 정리해서 안전한 인근 중립국으로 떠나는 게 좋다고 얘기했다. 마릴 부인은 사색 한번 없이 오래 살아온 집을 비우는 것에 담담했다. 거실에서 흥분한 사람들의 소리에도 화로 앞의 바우는 가져온 술을 마시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노인은 옆자리에 앉으며 손에 깍지를 끼었다. 마릴 부인은 둘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며 짐을 싸겠다며 플맆을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자네와 얘기를 해보는 건 여기 와서 두 번째로군.」
「두 번째라는 것을 기억하시는 것만으로 기쁘네요.」
「자네가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편지를 놓아두었다네. 기억나나?」
「그러고 보니 그랬군요. 작은 선물은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자네가 그것을 어찌 찾을 줄 알고 내가 여기 두었겠나?」
「한결같은 화로가 지표가 됐던 거겠죠.」
「지금도 그렇게 믿나?」
「아니요. 지금은 필요 없어요. 이 집에 처음 와 잘 몰랐을 때나 그러했고 이제는 무엇에 변화가 생기고 달라지면 그것을 느낄 수 있겠죠.」
「그렇다면 자네는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는 건가?」
「길을 잃었습니다. 왔던 길도. 나갈 길도.」
「왔던 길이 나갈 길이 될 순 없던가?」
「그리 믿었던 자신과 충돌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 현재와 미래의 연결이라 단정할 수 없는데도 애써 믿으려 했어요. 하지만 그 과거란 친구는 내 앞에도, 뒤에도 남아 있지 않네요.」

이 층에서는 부인과 어린 마릴이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짐을 챙기러 뛰어 들어가려 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서재로 걸음을 옮기던 다른 마릴을 보며 숨을 죽였다. 두 어 번 껌벅이던 눈은 이윽고 그녀의 발을 두 어 번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뒤의 있는 자는 앞에 있는 자를 쫓았다.

「나를 잠시 따라오겠나.」

두 명의 바우는 지하실로 내려왔다. 노인이 덩그러니 놓여 있던 통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지켜보는 이는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거친 손에 있던 열쇠가 다른 이의 손으로 옮겨졌다.
「전 이미...」
「자네가 말하고 싶은 ‘이미’란 것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네. 자네는 벌써 깨우치고 있어. 가슴속으론 알고 있지. 단지 엉켜있는 그것들 사이에서 다음으로 갈 계기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지금 자네의 손에는 무엇이 있지?」
「...과거입니다. 하지만 이전에 제가 알던 과거가 압니다. 이젠 현재에서 바라보고 있는 과거는 또한 미래란 말로 바꿔 쓸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렇네. 자네는 처음에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택했지. 이젠 다시 위로 오를 차례야. 때가 왔고 실체와 마주하면 자네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거야. 오래 머물렀군. 이만 기다리고 있을 친구를 만나러 가게!」

그가 계단을 올라 열쇠를 넣고 돌리기까지 그전까지 그를 감싸 돌던 의심과 위화감은 희미해져 갔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빛이 내려올 때 그는 당연한 듯이 위쪽에 올라 서 있었다. 아래에서 앳된 친구의 흔드는 손에 화답하듯 그는 가볍게 주름진 웃음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4>       

 
마릴은 책상에 엎드려있었고 앞의 어린 아가씨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지 않으세요?」
「......」
「깨어있다는 거 알아요. 지금 잘 때가 아니에요」
「......」
「허 참, 이럴 때가 아니라도 그러네.」

그녀는 바닥에 쌓아둔 책으로 탑을 쌓아 앉았다.

「저기요 선생님, 우리 가야 한다니까요.」
「어디를요?」
「여기 있지 말고 떠나야 한데요. 안전한 곳으로 멀리요.」
「가지 못해요. 오히려 멀어지고 있어요.」
「멀어지다니요?」
「제가 들어왔던 저 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좁혀지지 않고 제가 이곳에 들어왔을 그때부터 희미해져 가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인 것 같은데요?」

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들어 실눈으로 앞을 보았다.

「당신은 과거란 변해간다, 달라진다. 그렇게 말하며 미래에서 있을 과거의 흔적들을 없애려 하죠. 하지만 내가 볼 땐 당신은 과거를 지우지 못해요. 오히려 스스로 붙잡고 더 놓아주려 하지 않아요.」
「....당신 말대로. 난 그것들을 완전히 잊혀 보내고 있지 못해요. 그게 뭐 어때서요. 모두들 과거의 이정표는 아니라도 생채기쯤은 갖고 가잖아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그래서 당신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기대조차 사라진 나를 보며 뭘 기다린다고 하다니. 함부로 아는 것처럼 떠들지 마요. 나에 대해서 알긴 해요?」

마릴이 발끈하며 상대방을 보고 섰다. 그리고 앞에 있는 다른 마릴 또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이 어지러운 세상은 변해요. 오랫동안 시끌벅적 했지만 아직도 잠잠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죠. 당신이란 세상도 변해요. 천천히 움직이고 돌아다녀요. 그리고 지금 당신은 거기에 있어요.

마릴은 두 손으로 눈을 지그시 감쌌다.

「사실 맞아요. 돌아가고 싶어요. 기다린다는 말도 맞아요. 난 언제가 내가 변해 예전의 나와 교차해 마주할 순간이 오길 바라요. 떠나면서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두고 온 것들도 아직 그리워요.

그녀는 눈을 감아버린 마릴을 지나쳐서가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커튼을 거뒀다. 어둑한 방에 밖으로 난 틀 사이로 통해 많은 것들이 흘러들어왔다.그리고 그 빛은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비집고 들어가 눈을 뜨이게 했다.

「그렇게 당신 앞의 길에서 새롭게 조우하면 돼요. 앞으론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세요. 당신만의 새로운 말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손을 내리고 눈을 뜬 마릴이 한 걸음씩 다가와 창 앞에 섰다. 거기서부터 집 뒤편으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바닥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릴은 창을 열었다. 한 발, 한 손씩 그녀는 자신을 옮겼다. 마지막에 헛디뎌 떨어질 번 했으나 아래에 있던 바우가 받아주었다. 그녀는 일어나며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날 이곳으로 내려준 그 사람의 손처럼 곱고 매끄럽다. 자신의 뒤쪽의 커다란 숨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나의 말. 빛나고 아름다운 갈기. 믿음직하고 넓다란 등. 

아주, 아주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아.


   



<끝>



제목 : 우주 먼지 여관
부제 : 어긋난 순서 맞추기

지원 : 소설부문
성명 : 강해서
생년 : 1993.10.14
주소 : 서울 관악구 봉천동
메일 : rkd1014@naver.com
번호 : 010-5706-1181




  • profile
    뻘건눈의토끼 2020.01.31 21:34
    솔직히 말해서 저랑 연관된 내용이 있는줄로 착각 하고 읽다가 아니다 싶은데... 어쨋든 문학성의 가치가 돋보여요... 저도 과거의 나랑 제 혼자만의 공간에서 방이나 마루에서 강아지랑 자면서 힘든세월을 보내고... 약도 먹고 지내고 있는 사람이에요...
  • profile
    korean 2020.02.29 21:14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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