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차 소설 부문 공모_꺠진 가면은 뜨지 않는다.

by 제리강 posted Jan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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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에는 바다란 의미가 있다. 한없이 거대하며 또한 복잡한 그것의 이치를 헤아리기 힘든 것처럼 나 역시 스스로에 대해 의문, 공허함, 때로는 회의를 가졌다. 분명 그것은 나의 깊은 뿌리이자 용기이며, 자존이고 영감이나, 그럼에도 족쇄였다. 허나‘불려질 이름’이라는 것을 가진 사람이 그 누구더라도, 그는 삶 속에서 무수히 되새김질 될 것이다. 최초로 나의 이름을 꺼낸 것은 내 조부나 부모였을지 모르나, 앞으로 다시는 누구도 진짜 나를 찾을 수 없으리라.     



<깨진 가면은 뜨지 않는다.>     


바스러지듯 스쳐 간다. 지나 보내고 있다.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모두가 가는 각자의 길에 방향을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로지, 지금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에서 우측으로 떨어진 저 바다만이 그런 것에서 자유로운 듯했다. 해안에 널브러진 과자조각을 줍는 저 흰 갈매기조차 무엇을 향하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잠시 그 내음의 선을 따라 거닐며 생각에 잠겨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러지 못한다. 나를 둘러쌓고 있는 보이지 않는 테두리에서 도망가지도, 그 실체조차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어디 보고 있나? 이제 이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도착해서 보이는 데가, 앞으로 네가 있을 곳이다. 우리 사회로 들어 온 것을 환영한다, 맙」

그가 이제 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다만 문장의 어감이 거슬렸다.‘앞으로 있을 그곳’은 여정 중인 현재지만 또한 정해진 미래다. 그 도착이라는 말을 쓴 것은 종착지에 계속 나를 옭아매기 위한 의미로 사용한 것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현재는 그 미래에 도달했을 땐 아무 의미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에 몹시 언짢았다. 나는 바다를 향해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고, 끝내주게 나는 감칠맛은 오히려 날 괴롭게 했다. 그리고 곧, 차는 멈춰섰고 밖에서 가져온 묵고 역겨운 냄새를 토해냈다.        


<1>


「리벨, 지금 몇 시지? 이 작업을 오늘 안으로 끝낼 수나 있을까?」
「정신 차려. 막 점심을 먹고 오후 일을 시작했을 뿐이야」

그렇게는 말하면서 나는 삽을 조용히 올려놓고 발을 빼 빠져 나왔다. 굳이 말과 행동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레 다른 이들처럼 멀뚱히 삽을 땅에 집고 옆에 서서 힘든 티를 내면 되니까. 웃기게도 스스로는 남이 나 자신에게 가질 이미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본인의 안정과 여유 앞에선 그것이 그저 허풍이라 생각한다. 이런 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떤 것이든 한도 끝도 없이 파고들어 봤자 의미는 가벼워지고 가치는 찾을 수 없게 될 뿐이다. 그 즘되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족쇄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이니 뭐든 적당히가 좋다.

「저기, 리벨? 거기 그 삽 지금 안 쓸 거면 잠시 줄래?」

당연히 아는 목소리였다. 다만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그’였기 때문에 고개만 말없이 흘깃 돌리고 손에 쥔 것을 건넸다. 그 역시 별말 없이 과묵했고, 리벨이‘진짜’내 이름이든 아니든 그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항상 한 해의 이맘 때 즈음에는 태풍이 수차례 찾아오는 것이니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좀 재수가 없었다. 다음 달에 신입을 받을 가치 확인 증명 검사를 위해 여름까지 방치하였던 무너진 벽과 울타리 보수 공사를 시작 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 운동장 귀퉁이에 쌓아둔 자제와 흙들이 간밤의 큰 비와 만나면서 시작됐다. 
밤새 쓸려간 흙이 배수로를 몽땅 막아 이곳, 저곳에서 물이 넘치기 시작하고 설상가상으로 강풍으로 큰 나무까지 여럿 꺾여 오전 새벽부터 대작업이었다. 모두 웃통을 벗어 던지고 한 손에 삽을 들며 흙을 퍼내겠다고 기어들어갔지만 방대한 양과, 부족한 인원, 젖은 흙의 무게로 작업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작정 퍼낸 흙을 다시 어쩔 지도 문제였다. 결국 오후 무렵에 외부 인력의 중장비까지 도입 돼 다시 시작되었지만 냄새와 무더위로 작업능률은 쉽사리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차, 누가 뭐라도 하지 않는데 자기 발로 다시 들어간 저 녀석은 이곳의 생활에 꽤 성실히 적응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어디까지나 이놈과 내가 이전에 나눴던 대화를 배제한다는 전제에서 말이야. 항상 이 녀석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나와 같은 작업선에서 일을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달 중순 즈음이었다. 딱히 특별하다 할 이유도 없이 어느 때처럼 하루 작업을 마무리하고 화장실에서 등과 목, 얼굴을 씻으며 작업화를 간단히 닦아내고 있었다. 화장실에선 내 뒤로 거울에 비친 어느 누군가가 지나간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아는 체나 인사를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게 윗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평소에는 소리 지르고 이래저래 귀찮게 구는 놈들이지만 여기 이 공간에서만큼은 딱히 건들지 않으니까. 그들이 가진 공간의 영향력이 작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이 가진 자유가 어느 정도 존중받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 얼굴에 묻은 검댕 자국을 지우는 거에만 집중하고 있을 터였다.‘그’가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난 널 알아. 아니 널 알 것 같아. 맨 날 서쪽 현관으로 다니지?」
「......」

뭐야 이 새끼는 또. 가만 보자, 누구였지.

「그리고 음...」
「그건 작업을 위해 집합하는 곳이 의례적으로 그곳이기 때문이고, 누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쪽으로 다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볼 때, 넌 왜 여기에 있지?」
「아무렴? 나는 네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고.」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어색함인가 아니면 괴리감인가. 그와 나 사이에 처음으로 주고받은 대화에서는 무언가 우리 사이에 불투명한 막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네가 지내는 방은 이 건물에서 나와 반대인 서쪽이야, 분명 그쪽에도 화장실이 있을 텐데 네가 왜 굳이 이곳에 왔지?」
「뭐 틀리진 않네. 다만 하나 지적을 하자면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이쪽으로 온 게 아니야. 네가 있는 동쪽은 산 방향으로 뚫려 있어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거든. 이 건물을 설계한 멍청한 놈들은 왜 전체적으로 산을 등지게 짓지 않았나 모르겠어.」 

놈은 내 옆의 세면대로 와 물을 틀고 가볍게 자신의 몸을 닦아냈다.

「덕분에 저쪽은 다들 몸을 씻어내느라 언제나 만원이거든. 냄새나는 놈들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딱 질색이라서. 하여튼 반가워. 맙이었지?」

이때부터 그가 나를 뭐라고 부르든 귀찮아서 그 부분에는 대꾸하지 않게 됐다. 혹시 이놈이 진실을 알아, 내게 생길 번거로움도 생각해 봤지만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적어도 이때에는 그랬다.

「저기 ‘서쪽씨? 뭘 하다 여기 왔어?」
「나는 대학생이었어.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었지. 그러는‘동쪽씨는?」
「내 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야. 이런 질문을 여기서 한 번도 안 받아 봤어? 그러니까, 어쩌다가 무슨 계기로 여기에 왔냐는 거야. 네가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냐가 아니라 네가‘이곳’에 오게 된 이유.」
「마치 그 이유란 것이 나의 죄목을 말하라는 듯하군. 너도 다른 이들처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응당히 이곳에 가둬졌다고 생각해? 날 그렇게 착각하지는 말아.」

이해의 혼선이나 오류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그 방식 또한 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보편성이란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인간은 대게 주위에 민폐를 끼치고 말 부류다.

「뭐, 그래서 일단 들어봅시다.」
「그때 아주 멋진 물건을 손에 넣게 됐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내가 가지고 갈 순 없었어. 결국 언젠가는 내 다음 주자에게 넘겨야만 했었지. 그렇지만 내가 가진 것을 그대로 온전한 상태로 넘겨 줄 수가 없더군. 흐흐흐. 그것은 대단히 배반적인 일이었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 덕분에 너 자신은 응당히 이곳에 가둬진 것은 아니라고 떠들지만, 현실은 다른 주위의 모든 것들로부터 통제받고 있지. 그래도 아쉽게 됐어. 그 대단한 물건이 뭔지는 몰라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사실 네게 거짓말을 했어」
「뭐?」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 화장실로 온 것이 맞아. 네가 여기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거든.」

들어오는 것을 봤다는 말인가. 누구에게 나를 물어봤다는 뜻인가. 어느 쪽이든 얘기를 들어봐야 알겠군. 귀찮은 놈한테 걸렸어.

「그래, 사실 알고 있었어. 네게서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거든. 다만 네 의중을 떠보고 싶었지. 좋아, 내게 무슨 볼일이지?」
「너와 단둘이 얘기를 하고 싶어. 가능하면 간섭을 받지 않고.」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는지 몰라도, 적어도 이곳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떨어져 은밀히 뭘 할 수 있는 곳은 아냐. 너도 알 텐데?」
「나도 알아. 하지만 정확히는 독립적인 공간과 시간의 영역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지. 완전히 제로란 의미가 아니야. 어느 사회든 틈이란 것은 항상 조금이나마 벌어져 있는 법이니까. 실제로 네가 어떤 상황이던간에 때가 맞춰지면 난 네게 접근할 수 있어.」

난 서둘러 화장실 칸막이를 다 열어 확인했다. 문밖에도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실수다. 이런 얘기를 들을 거였다면 물으면 안 됐는데. 

「말은 그럴 듯 하지만 결국은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진다는 말이지. 특히 아까부터 너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섞어 쓰는 것만 봐도 그래. 좋아! 그게 어찌 됐든, 처음에 거짓말로 감추면서까지 하려는 얘기가 뭐지?」
「그 대단한 물건, 지금 내게 있어. 그리고 그 일로 네게는 부탁이 있는 거고.」

낭패다. 방금 내가 들은 말이 정확히 무엇이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든, 그래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놈은 지극히 위험한 부류의 인간이다. 이곳에서는 가까이하면 안 되고 엮여서도 안 되는 놈이야. 언젠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결국 이쪽 세계와의 균형을 무너뜨리려 할 거야.

「그리 시작부터 정색하면서 받아들이면 말도 잇기 전에 내가 무안해지잖아. 어이! 이봐?」

어느새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면서 흥분해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는 점점 눈을 얇게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돌아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무엇을 덮어 지우려 하거든 명심해둬. 새로 싹 칠하고 자신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도 그 토대에는 나를 뺄 수가 없어. 애초에 네가 나와 대면했다는 시점에서 무의미한 것일 테지만.」
「계속 알아들을 수도 없게 뭔 헛소리야!」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난 이놈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분명 접점이 있다. 그런데 녀석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뭐든 떠올려 보려 하면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봤을 땐 녀석은 이미 여기에 없었다. 화장실 밖으로 재빠르게 쫓아 나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날 저녁,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2>   


이곳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무언가를 피워내고 공간을 형성해도 제재를 받지 않는 곳. 하지만 동시에 어느 위치에서든 눈에 잘 들어오고 해가 진 뒤에도 불이 들어와 그 아래로 훤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셋이서 모여 조용히 가슴에서 빛을 밝히고 연기로 자신을 감쌌다. 얘기를 떠들다 욕이 나와 한껏 지껄이다 맨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가장 막내 토스였다.

「뭔 일을 이리도 매일 부린 답니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것 아니오?」
「어쩔 수 있냐. 여기는 그런 곳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상식을 버려. 그리고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그게 빨리 적응하는 방법이야」
「그게 말처럼 쉽답니까? 이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오. 저들이 지껄이는 말들과 선전이 사실상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억지가 아닙니까? 그들이 말하는 가치는 저 밖의 사회에서 만들었다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저 밖에서 말하는 세계랑 다르단 말이오. 정말로 우스운 것이라면, 저들은 이미 우리가 모두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소. 그리고 새로운 사회에서는 새로운 가치가 태어난다고 변명하고 있소. 명백히 모순이오. 내 말이 틀렸소?」
「그래,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래 봤자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때 저만치 떨어져서 오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지금 무엇이 잘못됐다거나 혹시 우리 얘기가 어떻게 새나갔는지 생각했다. 그만큼 당당히 혼자서 다니는 인물이 다가오는 것은 이곳에선 자연스레 경계되는 일임은 당연했다. 이윽고 몇 보 사이에 나는 그것이‘그’임을 알았다. 

「왜 말을 하다 끊으시오? 잘 얘기하다 한 눈 팔고 말이야. 대체 누가 있는데 그러시오?」
「있어라. 잠시 다녀오마. 늦어지면 먼저 방에 들어가고」
「허 참, 무슨 일인지 몰라도 오래 끌지 마시오」

놈은 이미 나에게 아무런 경계가 없다. 언짢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럽게 손을 올리고 씩 웃어 보였다. 그런데 녀석은 난 데없이 왔던 길을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나를 찾는 것은 놈이었는데 멀어질까봐 쫓아가는 것은 나였다.

「이봐. 나한테 용건이 있어서 왔던 거 아니야?」
「좀 걸을까? 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때 혼자서 빙빙 도는 버릇이 있거든. 자!, 막지 말고 앞으로 가.」
「뭐?」

그는 나를 앞으로 밀어냈다. 나는 한 번씩 그를 뒤돌아 보며 걷기 시작했고, 그는 결코 내 옆에 서 있지 않고 언제나 동행선 상에 서서 나를 뒤쫓아 왔다.

「낮에 말은 무슨뜻이야?」
「들은 그대로야. 네게 부탁이 있다는 말이지」
「그것 말고도 네가 훔친 그것이 아직도 갖고 있다고 했잖아!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지 몰라도 혹시 그게 위험한 일이라면 나는...」
「낮에 내가 대학생이었던 거 얘기했나?」
「말 돌리지마. 네 개인적인 부분은 궁금하지 않아!」

녀석의 걸음걸이가 느려지는 것 같았다. 나와의 거리가 멀어진다.

「난 어릴 때부터 가치를 매기는 것을 좋아했어. 무엇을 함부로 평가하여 대가로서 결정짓는 것. 어쩌면 최소한의 정당한 양심이었을지도 모르고, 한낱 오만한 저울질이었을 수도 있지.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에 대해 현실감각이 자랄수록, 그 생각은 더 다듬어지고 정교해졌어. 쓸데 없는 그 습관이 결국은 날 여기 서있게 했어」
「그래서. 그게 이제 네가 할 말이랑 무슨 연관이 있지?」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가치란 것에 대해 알고 싶었지. 결국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다가가며, 또 만들어지는지를 알고 싶었어. 하지만」
「하지만?」
「누군가는 남이 원하는 필요를 찾아 만족시키려 하고, 또 다른 이는 자신이 팔고 싶은 가치를 만들어 그것이 남의 가치가 되게 만들어. 둘 중 어느 쪽이든 다 긍정이며 적극적이야.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거야. 자신의 것, 자신의 생각이 다 옳다고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힘의 원천이자 자신감의 토대이기 때문이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회의감이 찾아왔어.」

   얘기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곳에서 둘이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로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는 오해라도 받았다간 피곤한 일이 생기고 만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유가 있다. 의미가 있다. 가치가 있다고 떠드는 자들은 많아도 정말로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일부로라도 겉으로 드러내려는 사람은 좀체 없어. 분석과 전략을 위해 문제점을 찾기는 하지. 하지만 그것은 가치의 발견이 아니야. 비가치가 가치로 입증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더 나아가 아무리 오지랖이 뛰어나도 그런 일에 일부로라도 확인을 하고 투자를 하는 이들은 더 드물어.」
「네 말대로,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가치와 비가치가 공존해. 모든 이들이 그 경계를 명확히 알지는 못할지라도 두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자각하고 있지. 비가치의 입증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대부분의 인간이 일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머무나 당연한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우선 그것이 스스로의 가치에 반하고 자신을 토대로 하는 정체성과 자존을 위협하기 때문이야. 따라서 리스크가 있는 거지. 이제는 돌려 말하지 말고 하고자 하는 말의 중점만 말해」
「그 입증, 내가 해보려고」

놈이 어느새 내 뒤에 바짝 붙었다. 숨소리마저 살갗에 닿는 것 같다.

「...내가 널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것은 완전히 역설이 아니야. 네 말을 빌리자면, 리스크가 따르긴 해. 하지만 입증 자체에 내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거지.」
「아니, 너는 착각을 하고 있어. 이곳에 네가 와서 느끼는 가치의 경중이 네게 혼란을 주고 있는 것뿐이야. 정말 본질적인 부분이란 그런 것이 아니야.」 
「...어째서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순간이 삶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여긴 나와 마찬가지로 네가 걸아왔던 과거의 길이 있어.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있을 미래도 있지. 이대로라면 여기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어!」
「지배라는 말을 함부로 오용하지 마. 왜 그렇게 가치를 매기고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여기 지금 우리가 있는 통제사회와 저기 밖의 사회가 괴리감이 느껴질 거라는 것은 나도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그렇기에! 더욱더 그것은 착각이 아니야. 너와 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느끼는 두려움, 규제를 통한 공포와 폭력은 실재하는 것이야. 네 모든 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테지. 어째서 넌 그것을 외면하는 거지? 아니 외면할 수 있지?」

순간 이놈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를 보았다. 아직 같이 생활하는 방을 쓰는 녀석들은 계속 떠들고 있다.

「외면이 아니야. 난 인정한 거야.」
「인정이라고?」
「그래. 난 이곳에서 스스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어. 너의 그 목적의식 아래 저항적 생각도 그것이 이곳에 적응하는 과정 중의 반작용 중 하나라는 것을 언젠가 깨닫게 될 거야. 비교를 통해 자신에게 찾아오는 박탈감은 늘 인간을 괴롭게 하지. 하지만 그런 식으론 언제라도 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네가 어떤 식으로 설교를 해도 감각이란 쉬이 바뀌는 것이 아니야. 넓게, 일반적으로, 본질적으로 같다.’는 모두 스스로의 날카로움을 잃게 만드는 말이지. 너는 내게 이곳에서 현실감각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오히려 충돌이 무서워 자신 현실감각과 세심함을 깎아내린 것은 네 쪽 아닌가? 자위해서 너를 조이는 족쇄가 진짜로 풀렸다고 생각한다면 넌 정말 바보야.」
「어디, 어느 시간에 있든 편하게 통용되던 일상이 어느 순간에 내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너한테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럼 구체적으로 넌 무엇을 입증하고 싶지?」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야? 만약 이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고 믿는 자가, 그것을 입증을 해내고 싶다면 다음으로 하려고 하는 일이 뭘까?」
「...넌 지금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아. 네가 하려는 것은 어쩌면 저 밖의 사회와 공존하는 삶도 파괴할 수도 있어.」
「충고 고마워. 오늘 대화는 정말 속삭이듯 은밀했네.」
「다시 말하자면 네가 하는 말은 한 번씩 이해하기 힘들어. 그거 알아? 너랑 이러고 있지만 사실 머리가 계속 지끈거리고 뇌가 새하얘지는 느낌을 받아.」
「그런 소리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요새 몸의 여러 군데군데가 얼얼하고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 어이구. 여긴가?」

놈은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자기 귀를 몇 번이고 후려갈기는가 하면, 주먹으로 자기 입을 피가 튀도록 세게 치고, 괴상하리라 만치 자기 무릎을 무자비하게 때려댔다.

「이봐! 그만해. 괜찮아? 뭐하는 짓거리야?」
「휴, 이젠 나도 자신을 모르게 돼버렸는데 어쩌겠나.」
「...이제 시간이 정말로 없거든. 아마 들어주지 않을 테지만 원래 내게 부탁하려던 용건. 그것만 빨리 말해.」
「내가 앞으로 입증하려 할 것이지만, 아쉽게도 그 확인은 나의 몫이 아닌 것 같아. 널 보고 확실히 알게 됐어.」
「네가 벌일 일을 스스로 가늠할 수 없다? 끝까지 알 수 없는 놈이군.」
「‘알 수 없다’라. 적당한 표현이군. 음, 네 말대로 저쪽에서 여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네. 자칫 내가 뭘 하기도 전에 성하지도 못한 꼴이 되어서는 안 되지. 그럼 그만 돌아가자.」
「그래. 혹시 이 얘기를 다른 누군가에게도 한 적이 있나?」
「흥, 위험 부담을 늘릴 일은 안 해. 아, 혹시 내 보물에 대해 궁금하면 나를 찾아와도 돼」
「글쎄, 혹시 정말로 흥미가 있다면 찾게 되겠지.」

우리는 그렇게 중앙 현관을 통과해 양쪽으로 갈라졌다. 물론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아주 작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왜 하필 나지?」     


<3>


유발할 동기가 없었든, 다른 집중할 게 있었든, 마치 보이지 않게 잘 숨어버린 것처럼 그와 관련된 것은 어떠한 것도 당분간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더위가 좀 꺾인 듯하네.」
「꺾이다 못해, 이제는 잘 때 좀 춥소. 차라리 예전이 낫지 않소?」
「예전? 예전...」
「흐흐, 배가 부른 거죠. 조금이라도 더 편해보려고나 생각하고, 어찌 보면 바깥에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일 텐데 하고 말이오. 이게 참 적응이 될 것 같으면서도 어렵소. 그 새로운 상식이란 거, 쉬운 일이 아니오.」
「예전이 생각이 잘 안나. 너 뭐라고 했지?」
「요즘 어디 아프오? 흠, 저번에도 좀 이상하긴 하더니. 자꾸 바깥하고 비교하게 돼서 적응이 말처럼 쉽지 않다고 했소. 아니, 이조차도 적응의 과정일 수도.」

우리가 생활하는 방에서 내 바로 옆자리를 쓰는 토스는 가만히 두면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녀석이다. 하지만 나는 더러 그와 하는 얘기를 즐긴다. 편하게 던지는 말을 통해 내가 보지 못했던 이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그의 특이한 말투는 묘하게 계속 흥미를 불러온다. 

「누구나 삶에서 더 높은 가치를 선호하며 전과 비교해서 그것을 상실했을 때에는 박탈감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폭력과의 충돌이며 어떻게 말하면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배반이라고 할 수도 있지. 결국 나의 삶에서 쭉 이어져 온 길 위에서 발생한 사건은 피할 수 없으니까.」
「뭐 본질적으로 접근한다면 나도 별로 할 말은 없을 것 같소. 그렇게 이해한다면 내가 느끼는 피해와 비상식의 위화감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위안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하지만 이것을 리벨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군. 과연 사회 전반의 평과와 가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겠소? 단지 우리를 둘러쌓고 있다는 사회가 아니오. 나란 일부분을 포함하는 세계란 의미에서 사회요.」
「못하겠지. 내가 아무리 자신을 분리시키고 객관화 할 수 있다고 해도 스스로를 완전히 별개인 양 때어 낼 수 없어.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이고 배반이기 때문이야.」
「마치 배반이 어쩔 수 없는 숙명인 양 얘기 되었지만 사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 생각하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난 도저히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 리벨 말대로 본질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곳은 사회에서 보자면 ‘희귀’요. 그리고 확장시켜 본다면 그 희귀란 것은 사회어디에나 존재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결국 확률적인 문제이지만 말이오.」
「가치가 어느 선까지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정말 미묘한 질문이지.」
「마치 여기 오기 전 들었던 그런 말 같네요.」 

『듣거라. 망각이란 자신의 인생이 가진 동일선상의 뿌리에, 줄기에 위배된 새로운 가치를 만들려고 함이다. 그건 전반의 상식에 그릇되며 네가 사회에서도 똑같이 못된 여지를 조장할 수 있음을 인지하여, 너의 그릇된 일탈과 어긋남을 다시 과거에 반추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따라서 부적합이 견지된 너는 새로운 증명 이전에 너의 과거로부터 박탈시키도록 정한다. 이상』

「하던 얘기와는 상관없는 거지만 말이오. 그 저번에 비 오고 다음날 대 작업 끝내고 다 같이 모여서 피워댈 때 있잖소. 그때 누굴 만나러 간 거요? 이곳에서 리벨이 우리 외에 딱히 친구를 만드는 것은 본적이 없는데. 뚫어져라 보고 있기에 놀랐소. 혹시‘윗적’한테 그때 찍히기라도 한 거요?」

우리는 윗적을 이곳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지휘하는 자들을 싸잡아 이르는 말로 부른다. 필요성이라는 말을 숨기고 우리의 안위와 가치를 위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다. 실제 이곳에서 늘 가치의 상대성은 공생을 위협한다 배운다. 그리고 그렇게 교화된다. 마침내 우리의 반작용과 희생은 아름다움으로 덮여 부조리, 비합리성, 불필요 등이 묵인되고 있다. 

「설마 그때 우리를 보고 있던 게. 어이쿠!」
「별일 아니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호들갑 떨지 마. 네가 잘 적응하고 있다면 그걸로 된 거지」
「아. 윗적이라고 하니까 생각 난건데 저기 마주보고 있는 방 쓰는 트레이스란 놈 있잖소. 그 놈은 진짜 끄나풀 아니오? 뭐 만하면 저들이 하는 말에 동조하고, 어찌 보면 우린 모두 같은 편인데 말이오. 위에 관한 욕이라도 나오기만 하면 눈 시퍼렇게 뒤집어쓰고 씩씩대니 원. 처음부터 난 그놈이 우리와 다르다 느꼈소.」
「그래 봤자 인간이다. 너도 처음엔 저런 녀석을 보고 신기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엔 알게 될 거다. 여기에 알게 모르게 많다. 허깨비에 씌인 놈.」
「가끔 보면 옆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도 하시오?」
「그러냐? 그것참 편하구나. 오히려 네가 안 받아치니까 서로 번거로움도 덜하고 좋군.」
「에이 섭섭하게 왜 이러시오. 그래 봤자 인간이란 말은 참 맞는 얘기 같소. 결국 제 길로 찾아간다는 것일 테니. 리벨은 앞으로 이곳에서 어떨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이냐?」
「뭐 특별히 크게 변하거나 달라진다는 말은 아닌데, 그래도 시간이 흐르잖소. 시간이 간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그것은 또 이전과는 다른 길을 본다는 말이오. 비록 그게 동행선 상의 길이라도 리벨의 모습은 이전과 같을 수 없소」
「재미있군. 분명 나는 앞으로 달라질 것이고, 보이는 세계 또한 변하겠지.」
「바로 그렇소.」
「그러나 네 말처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나처럼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이.」

평소에 잘 웃지도 않는 토스가 이때는 몸까지 못 가누며 바닥을 쳤다.

「리벨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진짜 웃긴 거 아시오?」

때로는 아니라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있다. 나 같은 경우 표정에서 드러나나 보다.

「허허, 화내지 마시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데, 리벨은 내가 처음 봤을 때보다 꽤 변했소. 이건 순전히 나만 느끼는 게 아닐 테니 확실하오.」
「..뭐 그렇다고 하자. 나의 어디가 그렇게 변했다는 건데?」
「음, 이런 말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나와 같은 느낌이었소. 이곳에 와서 알레르기를 겪는 인물 같았지. 그 뒤 시간이 흘러 금세 뿌리를 내리고 새로이 이곳에서 탈바꿈하였소. 한데 지금은 또 달라졌소. 사람은 분명히 여기 있는데 붕 떠다니는 느낌이오. 뭐랄까 이곳에서 리벨의 공간이 줄어든 느낌이오. 아마 그 이유는 단순히 리벨이라는 개인이 가진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었다는 말인가. 흐흐」
「그래도 리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한 리벨일 뿐이오.」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까 하다가 그저 눈만 조용히 감았다. 


<4>


거닐다. 거닐다. 거닐었다. 반대편 끝이 나올 때까지가 아니다. 단지 내 앞에 구부러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가듯이. 내가 앞으로 있을 길 위에 보이는 심상들은 전부 미래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래로 이어질 듯 아직 따라오고 있는 과거일 뿐. 그렇다. 지극히 복잡하고 커다란 물살의 아주 소극적인 수용자이자 반응자일 뿐인 나는 그 앞의 흐름은커녕, 지금 여기 서 있는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한다. 사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선의 간격은 티끌같이 의미가 없는 것. 그럼 나는, 나라는 존재는 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과거... 아니 과거란 이름의 새로운 미래...

「왔어?」

어느덧 눈에 들어온 것은 2층 복도 끝, 창문 밖의 풍경,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였다. 오랜만에 그를 보니 나도 알 수 없는 마음에 내심 반가웠다. 이것이 또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모른다.

「뭘 보고 있냐?」
「이곳으로 들어왔던 길. 그리고 어쩌면 또 앞으로 펼쳐질 길」
「어두워진 밤에 주황색 가로등이 비춘 길은 감상에 빠질 만큼 낭만적인가?」
「난 늘 저 길을 보고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낮이든 밤이든. 이 주위는 산이 많고 특히나 아름다워. 하지만 길 말고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러냐.」

그리 말하면서 창문틀에 걸터앉았다. 이 일대만 비추기 위해선지 불이 몇 개 들어오지 않아 멀리까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네 말대로. 저 길은 이곳으로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그 길이지」
「이곳으로 오는 중에 누가 그랬어.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 있는 이곳이 이제 내 미래라고. 그래서 지금 이 길은 이제 내 과거로 남을 것이라고 했지.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저 길은 이미 그때의 길이 아닌걸」
「이곳에 오게 되면 누구나 듣는 얘기야」
「그래, 어쩌면 과거가 맞는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더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저것에만 옭매여 속박당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아. 내게는 과거의 길이 이젠 새로운 미래로 보여!」

녀석의 표정에는 순간 환희를 웃도는 전율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보물을 넘기지 못하고 내가 갖기로 결정했는지도 몰라. 어긋난 길 위에서 그 해답을 찾아 안식을 얻으려고,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난 네게 저번에 미쳐 못 들은 얘기를 마저 들을까 해서 왔어.」

녀석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대체 무엇을 숨기고 들어왔는지 이젠 알아야겠다.


「그래서, 그건 지금 어디에 있지? 방에 있는 네 배게 안에 숨겨두었나? 아니면 설마 바보같이 중요한 물건을 사람들이 열어 볼 수 있는 서랍 같은 데 넣어 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지금 네가...」

그는 몸을 돌려 가만히 서서 내 눈을 그대로 응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내 보물에 집착하지? 저번에는 그렇지 않았잖아? 결국 그것이 너를 끌어당기고 말던가?」
「...유난 떨지마. 난 그저 네가 저번에 내게 한 부탁의 내용이 궁금했을 뿐이야. 이곳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고 있으면 가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니까.」
「어휴 더워서 창문 좀 먼저 열게. 해가 졌는데도 푹푹 찌는군. 그래, 네게 입증의 확인을 해 달라 했었지. 관찰자이자 그리고 결정자로서.」
「그렇게 구체적으론 얘기하지 않았어. 알기 쉽게 얘기해. 헛소리는 이 이상 집어 치우고. 이미 알겠지만 나는 너에 대해서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난 이미 행동으로 옮기고 있어. 그것은 언젠가 종결을 맞게 되겠지. 내가 비로소 멈추게 되는 그 순간, 내 앞에서 걷지만 말고 제대로 나를 돌아 봐줄 수 있겠어?」

 지끈거리는 머리 안으로 강한 호소가 차오른다. 그것은 한 번 빠지면 헤엄쳐 나올 수 없는 칠흑같이 짙은 어둠. 숨이 막힐 듯 아주 깊은 나락. 지나치게 유혹적이지만 이대로 놈의 페이스에 맞춰줄 수는 없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냥 지켜보라는 건가. 이봐, 난 항상 너를 신경 쓰고 있을 정도로 그리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나의 일이 있어. 시간이 뒤로 흐르지 않는다면, 네가 어떤 무슨 짓을 저질러서 결국 어떻게 되는가는 결국 나도 알게 되겠지. 이젠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야. 난 간다.」
「고마워 들어줘서」
「승낙한다는 말이 아니야. 그냥 신경 쓸 게 없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는 의미지.」
「이미 내가 말을 하고 네가 들은 시점에서 사건은 발생한 거야.」

이때부터일까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불안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를 완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면서 무언가 마음이 놓였다. 그와 나의 차이를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통해서 나의 다른 무엇을 엿본 것 일까. 그와 그렇게 헤어졌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5> 


「그래도 이렇게 여유가 있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오. 그렇지 않소?」

나무를 등에 받쳐 기대어 한 쪽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녀석 말대로 이런 여유는 나쁠 게 없다. 느긋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이 많다고도 할 수 없다. 핑계라기도 그렇지만 지금 하는일 지나치게 진전이 없어 짜증난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곳의 흙은 물이 쉽게 아래로 빠지지 않고 따라서 잘 마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자주 불필요한 명목으로 큰 차량들이 수시로 외부에서 이곳으로 드나드는데 그때마다 커다란 바퀴자국의 길이 그대로 남아 나중에 엉망으로 남곤 한다. 요즘엔 관리를 위해 서로 다른 흙 등을 섞어 까는 방법도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 그런 것까지 투자할 리는 없다. 여하튼 흙이 마르고 나면 바닥에 패인 홈을 삽으로 다시 평평히 고르는 일 따윈 비가 자주 오는 기후인 이곳에서는 일상과 같은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 월하고 면담이 있군.」
「저번에 결정됐다고 했었는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소? 사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나는 그게 리벨이라고 믿지 않았소. 장님이라느니, 귀머거리라느니, 벙어리라니, 그게 사람한테 할 소리요? 대체 그러한 말을 만들어내 저 밖으로 신고해서 일을 여기까지 벌인 놈이 누구란 말이오? 윗적들과 얘기는 해보셨소?」
「그들 또한 바라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애초에 여기 있는 그 누구도, 한 인간이 가치가 재평가받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변화를 싫어하는 윗적들도 그냥 넘기지 못할 거야. 자신들의 권한으로 어쩔 수 없이 ‘바깥 사회’로부터 간섭이 시작되었으니.」
「쉿!.. 뒤에 그놈이오.」

건너 방을 쓴다 해서 서로 인사하는 사이는 아니니 별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앞잡이 노릇을 즐겨 하는 놈이니 말을 섞기는 고사하고 친분을 만들고 싶은 자들도 없을 것이다. 트레이스는 조용히 나무로 와서 내 반대편에 기대어 앉았다.

「날씨가 차다. 또 비바람이 불 것 같군. 그만 돌아가자.」
「배고프오. 오늘 저녁은 뭐랍디까?」

트레이스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이에도 놈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민하고 날카로우며 성실한 놈이다. 물고 놔주길 싫어하는 놈은 피하려고 해도 어떻게든 엮일 수밖에 없다.이날 저녁, 난 간부 한 명의 통제하에 면담을 이유로 아주 약간의 바깥 세상으로 인도받았다. 

「오랜만이야 얼굴은 전보다 좋아 보이는군. 리벨, 요즘도 화장실은 잘 가고 있나?」
「월, 나는 그 정도의 일상생활 때문에 당신 만나러 온 것이 아닐텐데요.」

윌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곳 출입 정문을 빠져 나와 코앞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 같은 작은 집이다. 저 울타리 안은 원칙적으로 외부의 사회인은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에 결국 나 역시 간부의 감시하에 밖에 나갈 수밖에 없다. 아주 조그만 거리의 차이지만 분명 내 눈에 비치는 세계가 바뀌는 건 사실이다.

「리벨, 우선 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유에 대해서 알고 있나?」
「제 진단은 이제부터 하시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내가 묻는 말은 이 일의 시작 말이야. 나도 보고를 받았지만, 어디서부터 사건이 발생한 건지는 모른단 말이지.」
「이곳으로 내가 나오도록 주도한 자가 누구냐는 겁니까?」
「리벨, 그리 의심하는 눈으로 날 볼 필요는 없어. 나는 너의 편도 아니고 네가 있는 곳의 그놈들 편도 아니야. 어디까지나 그저 사회의 일부분에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진행을 할 거야.」
「그래요. 뜸들이지 말고 얘기해요.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죠?」
「나만으로 모든 증명을 같이 해줄 순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종합된 결과 최종 승인만을 해줄 수 있을 뿐이지. 네 이상 증후에 대해서 알아내려면, 검사를 위해 몇 번 밖으로 나와야 할 거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는데 더 밖으로요? 그런데 어째 당신의 표정이 좋진 않군요?」
「혹시 기억은 나는가? 네가 맨 처음 사회에서 부적합 판결을 받고 그다음으로‘가치 확인 증명’은 치르고 그곳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게 지금 현재 주어진 새로운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지. 거짓 등의 회피로 네 근본적 인식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애초에 그 증명이란 것은, 사회에서 박탈당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를 대체하는 방법이잖아요. 새로운 다른 가치로 부여하고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과정일 것이고. 그리고 그 방법이란 새로 속할 집단에서 도저히 기존의 자신으로는 살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가치와 과업쯤은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란 말입니다.」 
「뭐 좋아. 딱히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게 딱딱한 시선으로는 보지 마. 난 적어도 네가 속한 곳에서 너를 감시하는 그들과는 생각이랑 태도는 많이 다르니까」

언제나 자신은 누구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가 내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애초에 이런 말을 밖으로 꺼낸다는 것은 나쁜 꿍꿍이가 있거나, 최소한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새로운 카드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 부분은 고맙게 생각해요. 당신이 사회에 발을 담구고 있으니 덕분으로 내가 이렇게 잠시나마 이렇게 당신과 함께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는 거지.」
「아직은 구경이지. 네가 이제 안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곳에서 총 책임자랑 면담을 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건 아마 헬릭스겠지. 그리고 네가 밖에 나와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숙지시키고 내보내 줄거야.」
「그렇다면 굳이 지금 내가 당신과 있는 것은 무슨 절차죠? 그것참 왔다 갔다 번거롭군요.」
「확실히 말하지. 너의 신분은 아직 그쪽 소속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론 네가 그쪽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이야. 그렇기에 지금 내 책임 아래 일시적으로 널 다른 곳으로 보내기 전에 확인을 받게 하는 거다.」

책임이라니 우습군. 앞으로 그 가증스러운 말로 내가 이제 너의 소유인양 의기양양 자신감을 얻겠지. 내가 이제 이대로 사회의 불순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저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말이야.

「난 당신의 그런 중립적인 모습이 참 좋아요. 월.」
「더 할 말은 없지? 그만 돌아가 봐. 널 감시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놈이 아까부터 눈이 빠지도록 지켜보고 있으니까.」
「한 가지 더, 당신의 소견은 어떻지? 당신이 앞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의‘책임’이잖아요.」
「능글스럽긴. 난 네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만 절대로 네가 정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네가 정상이었다면 이곳에 오면 안 돼. 네 자체에 문제가 있든, 너를 둘러싸고 인식과 가치에 전과 다른 변화가 생겼든. 어느 쪽이든 넌 지금 문제를 안고 온 거야. 말 그대로 문제. 그럼 알아들었으면 이제 꺼져.」     


<6>   


점심부터 필요한 서류를 확인하고 몇 시간의 교육을 받았다. 내 신분으로서 지켜야 할 자세에 관한 것인데 사실 어길 시에 내게 닥칠 불이익을 거듭 강조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나에 대한 정보를 재차 확인했다. 혹시 내가 이대로 그들의 통제에 벗어난 행동을 할 것 대비해서 빠른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다. 다만 헬릭스 소장은 의외로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끝나고 방에 돌아갔을 때는 문 앞에 트레이스가 서 있고 안쪽에서는 토스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야 주인공이 오셨군. 어이 리벨, 처음 네게 그러한 얘기가 거론됐을 때 분명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나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었지. 겉으로 아닌 척해도, 다른 이들이 갸우뚱 할 때에도 난 널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래, 네 잘난 척은 잘 들었으니까 할 말 끝났으면 꺼지지그래?」
「네가 무언가에 편승한다고 해서 네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냐. 뛰어서 갈 수 없는 길을 날아서 간다해서 네게 달린 사슬이 끊어질 것 같나? 천만에.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뿐이지. 비로소 스스로에 대해 더 크게 자각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내 말이 틀리나 리벨?」
「있잖아. 너같이 돌려 말하고 비유하길 좋아하는 인간은 가끔 보면 정말 혐오스러워. 네가 정말로 뭘 안다고 지껄여?」
「난 너에 대해 단순히 악의를 가지고 이러는 것이 아니야. 말했잖아, 난 널 주시하고 있었다고. 난 네가 뭘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 
「그래? 그럼 어디 떠들어봐. 시답잖은 소리를 해댔다간 바닥에 꽂아 버릴 테니까」
「뭐? 끝까지 해보겠다고?」

다음 상황은 의외였다. 토스가 뛰어들어와 녀석을 말 그대로 밀쳐버린 것이다. 깔아뭉개고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결국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지당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시종일관 토스는 담담하고 침착한 눈으로 끼어들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둘은 소동으로 인해 바로 소장 앞에 소환됐으나 하루밤에 걸친 경징계와 근신처분을 받고 끝났다. 뒤에 토스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대로 언쟁이 심해지면 앞으로 심사를 앞둔 나에게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자신이 나서서 막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안 그래도 언젠가 한번 혼내주고 싶었는데 이번에 호되게 분풀이 했다고 낄낄 거리면 신나했다. 
또한 그럼에도 나 역시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이 상황에 대한 내용을 진술서에 빼곡히 적어 제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이 일로 내게 행정적인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난 이때 처음으로 내가 가진 저항의식과 안도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출발 전에 가족과 연락을 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의 가치에 대한 문제로 간부들이 소집된 회의를 가졌고, 이는 새로운 증명의 문제로 회부해야 하기에 잠시 밖에 나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냥 딱히 특별한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문제가 없다. 신경 쓸 수준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게 주어지는 관심과 우려는 이제 불필요하다. 뭐, 그러한 대화였다.


<7>


「선생, 그러니까 지금 하는 말이...」
「관련 규정과 조항에 따르면 지금 계시는 곳에서의 리벨 당신의 가치가 부적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장난치지 마세요. 난 그냥 절차대로 이곳에 이끌려 나온 것이지 얼토당토않은 소리 지껄이는 걸 들으려고 온 건 아니라고요.」
「진정하세요. 나라고 당신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가져온 서류와 여기 월이라는 당신 담당자의 소견에 따르면 당신의 가치를 재증명해야 한다는 조항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이봐요. 나는 아무 문제없어요. 지극히 정상으로 지내왔다고요. 그런데 이깟 종이 몇 장으로 나를 평가한다고? 적어도 당신은 그런 것을 결정하고 판단할 권한이 없어요.」
「후... 리벨씨 잘 들어요. 뭐, 방금 말하신대로 난 그런 것을 처리하고 승인하는 그런 자격까진 없어요. 어디까지나 나의 역할은 당신이 가져온 기본 정보와 앞으로 몇 가지 심사를 통해 결과를 종합하여 객관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분명 앞으로 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난 무수한 사례들을 보아왔단 말입니다. 이건 분명 확저적인 결론도 아니지만 절대로 헛소리도 아니에요. 리벨 당신, 솔직히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워요.」

이 무슨 병리학자가 내뱉은 말 그 자체가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아니, 이제 그 말 자체도 문제가 될 것이고 그게 앞으로 불러올 풍파가 더 큰 문제였다. 나라는 인간에 수정돼 기입된 정보, 부여받은 새로운 낙인을 통해 내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 전부다 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네 결과가 이렇게 나왔지만 그래도 장래에 네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되도록 극복해주었으면 한다. 사랑한다, 아들」

우리를 옭아매는 사슬 중 하나는 어쩌면 사회에 남겨져 있는 안식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의 이들은 그 사슬이 요동치길 바라지 않는다. 소리 나길 바라지 않는다. 간만에 속이 매스껍다. 한동안 잊었던 박탈감이 다시 찾아왔다. 아아. 난 내게 잠시 찾아온 고요를 영원한 멈춤이라 착각했는가. 그렇다면 나는 또 계속해서 다른 인간으로 바뀌어 안식을 얻어야 하나. 허나, 이때에는 이미 사슬이 이미 충분할 정도로 부식되고 녹슬어 가고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8>


밖에 잠시 떠나 있는 것만으로 나는 매순간의 이동, 결과에 따른 내 소감까지 보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복귀하러 돌아가는 길 중 부모님께 말씀드려 그저 5분 동안 잠시 바다에 들린 것만은 비밀로 했다. 나는 그동안 신발 속에 꽁꽁 감쳐두어 빛을 받지 못해 하얘진 발을 담갔다. 내 모든 감각을 열어 이곳을 받아들였다. 천천히 발을 빼내 물 밖으로 들어보았다. 이질적이다. 전혀 이곳의 흐름에 스며들지 못하고 그저 떠다니고 있었다.

거봐, 괜찮다고 하지?
얘기 들어보니까 뭐래? 
편한 시간 보내셨네,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야지?

난 딱히 그들에게서 돌아서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오히려 적으로 대치하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냐.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야?

「뭐, 좋지 않다는군」

비합리적이고 부적절한 조치는 왜 일어나야 하고 무엇으로 그것을 변명할 셈인가. 이유에 대한 답은 꽤 간단명료했다,

「불충분하다. 규정에 만족 되지 않는다. 절차가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헬릭스 소장은 당분간 내게 검사 진위 확인 기간이라는 명목으로 근신을 명했다. 그는 가식적 옹호론자이다. 이곳에서 가장 큰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일까. 겉으로는 나의 편에서 적절한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설명하다가, 실제론 나와 끊임없이 카드게임을 하는 중이다. 사실상 그가 나를 더 검증할 수 없으니 내가 가져온 자료를 바탕으로 심문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가 도중에 자발적으로 포기할 가능성, 내 허점을 파고들 수 있는 순간들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소장은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생각들, 다음 행동들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내게 불공평한 게임이 아닐 수 없다. 난 저들과 적이 되고 싶지 않은데 왜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 이제는 자신과 싸워야 한다.이럴 때 일수록 특별한 계산없이 던져지는 토스의 말들이 심적으로 편해 고마웠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이곳의 일이야 뭐 별반 변화가 있겠소. 오히려 리벨이 없다는 걸 눈치 채지도 못 할 만큼 자연스러웠소. 리벨이야말로 별일 없었소?」
「내가 왜?」
「왜긴 왜요. 리벨을 어떻게든 가지 못하게 잡아두려는 놈들이 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들도 리벨이 상황을 알기에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거요. 아니 오히려 리벨을 시작으로 이곳이 흔들릴 것을 우려해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게 맞을 거요.」
「내가 그들에게, 아니 이곳에 안 좋은 바람을 넣을까 봐 그런 것이겠지.」

「허허허, 사슬을 길게 끌고 다녀오셨으니 어디 티끌 하나 묻어 왔어도 이상할 리는 없지 않겠소?」

한동안 이리저리 끌려다닌다고 심신이 많이 지쳤다. 벌러덩 누웠다가 간만에 서랍에서 공책을 꺼내 들었다. 왠지 지금 느끼는 심정을 정리해보고도 싶었고 이대로 가만히만 있다가는 어쩌지도 못하고 휘둘릴 것만 같았다.

「저기, 리벨」
「왜 그러냐.」
「난 사실 지켜보는 입장에서 리벨이 지금 고립되고 있는 것 같아 좀 걱정이 되오. 리벨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순 없는데 남에게서 이런 말 듣기 싫은 것도 알고 있소.」

끄적이고 있던 것을 덮고 다시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굉장히 무서울 것 같소. 스스로를 잃어간다는 것. 처음엔 보기 싫어서 보지 않으려 하다가도 곧 정말로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귀 기울이려 해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오, 입을 벌리려 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 버렸을 수도 있소. 그저 그 외로움이 어떨지 상상이 되어 나는 너무 무섭소.」
「듣기 싫다. 그만해라.」
「... 내가 주제를 넘었소. 잠시 할 일이 있어서 다녀 올 테니 편히 쉬고 계시오.」

간만에 꿈을 꾸었다. 평소에도 징후 없이 아주 깊이 잠드는 체질이라 밤에 내가 무언가에 시달린다거나 꿈을 꾸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애초에 무언 가를 마음에 오래 담아두거나 묵혀둔 지는 굉장히 오래 되었다. 아주 옛날의 기억이었다. 
나는 어릴 적 부모님과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낮에 일을 하러 나가시면 주로 할머니와 같이 있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침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내가 열쇠가 없음을 알았고, 할머니도 어디 마을 친구를 만나러 놀러 나가시고 없는지 한 참 두드려도 답이 없었다. 사실 그녀가 어디로 갔던가는 안중에도 없고 난 어떻게든 집에 몹시 들어가고 싶었다. 
집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어떻게든 틈을 찾으려 했다. 결국 2층 화장실 창문이 잠기지 않았음을 알아냈고, 나는 떨리는 발로 기어 올라가 몸을 밀어 넣기 위해 창을 뜯어내야 하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머리는 온통 그래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허리가 완전히 빠지기 전, 정면의 거울에 비친 나는 그대로 떨어지면서 잠에서 깼다.

「에휴, 누가 밤새 창문을 열어 둔 건지. 방에 냉기가 가득하군. 리벨은 오늘부터 과업을 하러 안 나가는 거 맞소?」
「그래, 이곳에서의 과업을 하기에 내 정체성이 불투명해졌으니까 말이야.」
「원래 리벨 같은 경우에는 따로 옮겨주고 보호를 해줘야 아닌가? 같은 장소에는 두면서 눈에 띠게 격리시키는 것은 고문이 아니오? 하여튼 이곳과 윗적들이란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소. 이미 불러내서 한 얘기씩 다 늘어놨을 텐데 말이오. 그럼, 몸조리 잘하시오. 다녀오겠소.」
「분명 그 얘기를 같이 듣고 싶은 놈이 하나 더 있을 텐데.」
「누구 말이오?」
「있잖아.」

씩 웃으며 자세를 취하고 주먹을 뺨으로 붙이는 시늉을 했다. 

「아하. 괜찮을 거요. 설마 같은 처지에 욕을 하려고. 여하튼 나는 가오. 이따 저녁에나 봅시다.」 

같은 처지라고? 무슨 말이지?


<9>


아침부터 낮시간까지는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에도 선례로 이곳의 궤도에서 벗어난 이탈자들을 몇 번 목격해봤으니 내가 곧 어떤 취급들을 받게 될 지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본인이 직접 그 세계에서 실감하는 건 역시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지나가는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했다. 내 동선을 조정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그 자체가 무서워 숨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 눈과 귀는 이때부터 멀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을 보면 훨씬 그 전부터 상황에 던져진 걸 수도 있다. 
이날 오후가 좀 넘어서 소장이 다시 면담을 위해 불러냈다. 그는 내게 정황적인 문제와 내가 밖에서 받아온 결과에서 미심쩍은 부분 때문에 한동안 어려움이 있었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새로운 가치 확인’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추측건데, 나에 대해 평가하는 새로운 자료들에는 빈틈이 없었고 그것을 막으려는 소장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는 의미로 보인다. 아무리 이곳에서 날고 기는 소장이라도 저 밖에서 공신력이라는 힘 앞에선 아무런 간섭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이 말만 들었을 때에도 난 상황이 나쁘지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장은 이어서 그것은 이곳의 정서와 맞지 않는 특별한 처사이며, 자신이 내부적으로 도와 힘쓴 배려를 통해 나온 결과라고 거듭 강조했다. 어찌 보면 이곳에 있는 신분상 당연히 그런 호의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반복했다. 하지만 소장 자신은 사회의 정당한 절차와 그 결과를 옹호하며 내게 그것을 응당 베풀어 줄 수 있는 식으로 떠들어 댔다.

「넌 어떻게 되든 이 헬릭스에게 자식이나 동생 같은 존재이니까 말이야」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느꼈을 때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말이다. 저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한 발 물러서는 것이다. 자존심이 좀 꺾이더라도 끝까지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려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 마음을 떠보는 것이다. 나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날 안심시키고 자신을 같은 편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원하는 말을 유도하려 할 것이다. 그는 지금 나의 마음이 이미 이곳과 돌아섰다고 확신하고 있다. 편한 분위기를 착각하여 그의 생각에 가만히 동조를 한다면, 그는 소위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 줄 마음은 없다.

「리벨, 네가 이번에 들고 온 이 종이에 적힌 바에 대해 말해보라면, 하겠나」
「아시다시피, 저에게 아직 확인해야 할 절차가 남은 것으로 압니다. 아직 지금 선에서는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굳이 의사를 드러내는 말에서 나의 주장을 밝힐 필요는 없다. 때로는 중립만으로도 상대방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받아칠 수 있으니까. 그는 잠시 팔짱을 끼고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군, 혹시 나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생각나면 면담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리고 난 최대한 가볍게 마무리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

「아, 결정 난 바가 없으니 그때까지는 제 가족에게는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번에 보니 괜히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소장은 이미 흥미가 없는 마냥 돌아서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곤 종이에 적힌 내용과 면담했던 대화의 내용에 관해선 곧 간부회의에서 거론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필요한 조치는 취해줄 것이니 그만 돌아 가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딱히 꼬투리 잡힐 만한 것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방으로 향하던 중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는 트레이스와 마주쳤다. 왼쪽 다리 전체를 붕대로 감고 목발을 짚으며 걸어왔다. 솔직히 그 모습을 봤을 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을 봤을 때 그것이 이전과 같지 않음은 즉각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토스가 아침에 한 말이 무슨 의미이었는지 알았고, 지금 녀석의 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 돌아왔다고 들었어. 듣기론 아주 순조롭다지?」
「네 말에서 전에선 느껴지지 않던 위화감이 느껴지는군. 주변을 적으로 만들던 위선자 연기는 이제 끝난 건가?」
 「괜히 찔러보는 것이라면 그만둬. 날 너와 동급 취급한다면 곤란해. 난 그저 단순히 일시적 문제를 앓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복귀할 거고」
「아, 그러셔. 너에게 익숙한 삶으로 얼른 돌아갔으면 좋겠군. 하지만 이건 말해주지. 네 생각만큼 일이 그렇게 일시적으로 풀리지 않을 거야」
「흥 자신도 어찌할 줄 모르고 휘둘리는 입장이면서 허세는.」
「그래? 그럼 어디 네가 그 시간들을 견뎌봐. 한 번도 그런 입장에서 서보지는 않았을 테니 기분이 그리 유쾌하진 않겠군.」
「야! 너 이것만 알아둬. 난 너랑 달라. 생각이 가지고 있는 본질부터가 다르다고! 알아?!」

그러곤 대답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드러누웠다. 그리고 저녁은 돼서야 토스가 저녁을 먹기 위해 흔들어 깨우기에 일어났다. 

「하루종일 뭐 하고 보냈소? 낮 동안 간부들이랑 친한 놈들 몇을 잡고 물어봤는데, 대충 듣기로도 리벨은 여기에 있을 동안은 계속 이런 차별적 근신을 당할 듯 싶소. 누군 부럽다는 소리도 하던데, 참고 버텨야 하는 본인이 제일 잘 알지. 그렇지 않소?」
「너 말이야, 전에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던 적이 있지? 네가 답해봐. 어째서 내가 앞으로 어떤 문제를 겪을 것 같지?」
「뭐 어떤 식의 대답을 원하오?」
「내가 지금 겪는 혼란을 줄여 줄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흠,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생각하며 느끼는 것이 많았나 보오? 쉽게 말할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는데 정리해보면 사회가 이제 리벨을 온전히 책임져 줄 수 없다는 것?」
「계속해봐」
「근본적으로 접점이 맞지 않소. 리벨의 현재 상태는 이 통제사회와 저기 사회라는 두 세계 사이의 괴리와도 같소. 며칠 전 리벨이 나갔다 들어오면서 가지고 들어온 것은, 피치 못하게 이곳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저기 사회의 기준이오. 보통 같으면 그것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오. 왜냐?, 이곳에 소속이 됐다는 의미는 그 전에 저 사회가 우리가 이곳에서의 가치를 확인했기 때문이오.」
「따라서 이곳에서 등을 돌리는 것은 똑같이 저 사회에 대단 배반과도 같다. 그 말을 하려는 거지?. 여기까지는 당연한 거야. 그렇다면 그 괴리가 어째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리벨은 현재 어떠한 입장도 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몸만 여기에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계속 겉돌기만 하고 있소. 개인의 문제는 스스로의 토대를 통해 정리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스스로가 속한 세계와 같이 걸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지금 이곳은 리벨과 트레이스 이외에 또 다른 이탈자가 나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럴 때에 혹시 리벨이 스스로 문제없음을 시인하고 발을 빼려 하다간 그것은 윗적들이 정말로 바라는 바일 거요. 저들은 지금 이 순간도 리벨이 견디지 못해 굴복할 것을 기다리고 있소.」
「알고 있다. 바로 그것이 소장이 무엇보다 바라고 있는 것일 테지」
 「문제는 그 다음이오. 리벨이 밖에서 찍혀 온 낙인 그대로 그것은 정말로‘가치파괴’요. 폭탄 같은 거란 말입니다. 저 사회의 인장이 찍혀 있는 이상 여기의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오. 허나 그것이 지워지고 다시 돌아오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든 반역의 표상은 피할 수 없을 거요. 집단이 토대를 무너뜨리려 한 것만큼 무거운 죄도 없으니, 단순한 징계로 끝나지 않을 거요. 저 밖은 고수하고 이 안에서도 어디도 영원히 소속되지 못한 채 영원히 떠돌게 될 수도 있소.」
「그것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군」
「이젠 어쩌실 거요?」
「어쩌다니?」
「이젠 리벨이 선택할 문제 아니오? 조만간 반드시 결정해야 할 거요. 통제사회 속에서 자신의 비가치를 입증해 여기를 떠날지, 아니면 이곳에서 가치를 다시 증명해 그대로 남을 것인지. 물론 모두 쉬운 일은 아니오.」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걸까. 언젠가 자신이 멈추게 되면 뒤돌아봐달라는 말. 그것은 건네받고, 건네주고, 계속해서 이어져 온 삶의 굴레. 난 왜 진작 눈치채지 못하였는지... 내게 결정이 있다는 것은 그것은 얼마나 가벼우면서도 무서운가. 이미 무엇인지도 모르고 넘겨받고 채 깨닫기 전에 이미 내 손을 떠나 있으니...

「글쎄, 사실 솔직한 심정으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레테가 있다면 뛰어들어 버릴 텐데.」
「레테? 레테라니 그게 뭐요? 처음 들어보는데.」
「레테(Lethe)는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의 딸이다. 노고, 굶주림, 살해, 다툼, 고통이라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망각을 의인화한 여신이지. 신화에 따르면 저승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강이 흐르는데, 모든 죽어서 가는 망자는 그 물을 마시고 생전의 기억을 다 잊게 된다는군.」
「별난 강도 다 있군요. 리벨의 심정은 이해하오. 하지만 리벨은 잘 해내리라 믿소.」
「고맙다. 그래도 넌 내 편이군.」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근데 그동안 기분 나쁠까봐 묻지 못했는데. 처음에 뭐가 그렇게 문제라서 부적합 조항인가 뭔가에 걸렸답니까?」 
「내 감각신경이 망가졌다는군. 제대로 보고 듣고 느끼기 어려운 상태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들은 그게 누군가의 자의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믿고 있어.」


  <10>


이곳에서 오래전 내게 흔치 않은 말을 건넨 자가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증명과제를 완성하는 확인을 자신을 대신해 부탁했다. 그 역할이 방관인지, 아니면 적극적 결정권자인지는 사실 그 당시에는 흥미도 없었다. 이곳에서 증명이라 함은 비공식적으로 금기어였다. 자신을 적대하는 자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결코 꺼내서도 안 되는 말.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조금씩 허깨비에 씌었기에 조심하는 게 좋다. 평상시엔 멀쩡히 걸어 다니는 인간이지만 그들 마음속에 있는 울분, 서러움, 억울함, 분노가 언제가 그들을 집어 삼킬지 모른다. 다행히 일정 시간이 지나면 차갑게 뒤집힌 그들의 눈도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는 한다. 허나 속박된 영혼은 달랠 수는 있어도 영원히 치유할 수는 없다. 

「뭘 그리 끄적이시오? 간만에 쉴 수 있는 주말인데 바빠 보이오.」
「다음 검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까지 스스로 안으로 해결하지 못한 궁금증들을 풀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말이야. 어째서 나는 가치를 상실했을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파괴한 것일까?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 잃어버린 걸까?」
「그걸... 결정해야 하는 것이오?」
「아니야 아니야 그 부분은 됐어. 음, 내가 이제 이곳에서 가지는 가치는 이제 저들이 원하는 가치가 아니야. 반대로, 내가 원하는 가치도 이제 저들에게서 구할 수 없게 돼 버렸어. 그렇다면 필요의 차원에서 다시 접근하면 어떨까?」
「애초 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과거의 리벨이오. 뭐 필요하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권리인 줄 아는 자들이었지만... 그게 최초로 리벨이 바랬었던 것은 아니었잖소.」
「그래 하지만 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

내가 가치를 잃음으로써 증명되는 것이 있고, 내 자아의 존립은 위협받는데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잃어가는 것뿐이라니. 그들이 준비한 조치란 달콤한 벌집의 가장 좋은 방에 가둬 놓고 하루종일 시도 때도 없이 주위에 왱왱거리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정신이 온전한 자라면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처사임을 깨닫고 슬그머니 기어서 도망쳐 나올 것이다. 나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오면. 아니. 문을 열고 나와 뒤돌아서면 항상 있는 그를 마주하게 된다.

「간만에 보는 것 같군. 이젠 날씨가 차니 우리 쪽 화장실을 쓸 필요도 없겠군.」  
「아니 최근에 다른 데로 방을 옮겼어. 그래서 그 부분은 해결이 됐어」
「잘 됐군. 그건 그렇고 너의 그 대단하신 증명은 대체 언제쯤 성과를 보여 줄 생각이지? 그렇게 떠들어 댄 것 치곤 시간이 자나도 너무 조용한 것 아닌가?」
「전에 말했듯이, 진행 중이야.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나의 정신도 몸도 이미 이전과 같지 않으니... 따라와」

그는 갑자기 내 손목을 낚아채고 그대로 중앙 계단을 통해 지하로 끌고 내려갔다. 원래 이곳에 이런 길이 있었던가? 먼 곳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미미하지만 그 냄새도 난다. 바보같군. 절대 그럴 리 없지만 근처에 바다가 있다.

「똑똑히 봐줘. 그대로 응시하고 피하려 하지 마!」

그는 자신의 옷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하나씩 벗었고, 난 피해야하고 눈을 감아야 할 순간을 놓쳤다. 이미 생각이 뇌리에 스치기도 전 모든 감각이 얼어붙었다. 그의 사지는 온데 간데 찢어진 상처로 성한 곳은 없다. 날카로운 무언가로 찌르고 그대로 그어버린 듯한 자국도 있다. 다시 자세히 보니 얼굴도 성하지 않다. 한 쪽 귀는 억지로 집어 뜯은 듯이 반 쯤 없으며 움푹 뭉개진 눈, 뒤틀리게 내려앉은 코, 웃어 보이는 저 입 안도 엉망진창이다.

「겁먹지 마. 제대로 보란 말이야」
「너... 너... 이게 어떻게 된..」
「난 자신을 잃어서라도 망각된 자신을 찾아야 해! 그것을 쫓기 위해서라면! 그와 만나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든 헌 가죽을 벗겨내고 새로 뒤집어 쓸 수 있어.」
「...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널, 누가 이렇게까지 한 거야?」   
 「그 누구도 스스로 테두리 안에 갇힌 자신까지는 상처 입히진 못해. 그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었잖아! 진짜 자신을 파괴하는 적은 따로 있어! 이제는 이해하겠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 같이 무서워도 두려워하지 마. 결국 이 재앙도 언젠가 네 영혼을 끌어안고 같이 떠나주겠지! 하하하 안 그래?」

그가 소리를 지르고 날 덮쳐 누르면서 잠에서 깼다. 최근 들어 벌써 몇 번째다.     

<11>


「리벨, 넌 오늘도 열외. 그리고 트레이스, 너도 역시 마찬가지다.」
「네? 그건 정말 말도 안 돼요. 전 간단한 거라도 할 수 있다고요. 저기 있는 저 녀석과 같은 취급 받고 싶은 마음 없어요.」 
「이것도 말해주지 않았군. 이건 지시사항이며 이것을 네가 어기는 것을 금한다. 그러니까 닥치고 조용히 방에 처박혀 있어. 스스로 다른 이들처럼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나? 그럼 밖에 나가 그 쓸모없는 걸 이름표를 달고 오지 말았어야지.」

보이지 않는 시선이란,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내 옆으로 지금 아래 장화부터 위 작업모까지 완벽히 무장한 그들이 뛰어나간다. 그들은 나와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지만 나를 보고 있다. 의식한다는 것은 감각을 연다는 것. 반면 나는 무방비하게 그것을 열어둘 수 없다. 어디까지 정신의 자존이 우선해야 한다. 

「제길! 개자식들, 그렇게 쉽게 얼굴을 바꾸다니. 그저 자신의 안위뿐!」

그렇게 그는 씩씩거리며 방에 들어가 버렸고,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통제로 쓰이는 책임이란 이름의 사슬은 결코 놓아주지 않으면서 그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다. 그것을 조정하는 자는 언제나 당하는 자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음에 희열을 느낀다. 오히려 큰 소리는 저 밖에서 들린다. 큰 돌을 들어 치우고, 흙을 옮겨 운반하고. 이곳의 현재 북쪽 언덕에는 신축건물을 짓기 위한 대공사가 한창이다.

「우리는 옷을 땀에 적셨다 꺼낸 듯한데 두 놈은 아주 살 맛 나겠군?」
「누가 아니래. 누구는 디디고 있는 땅에서 최후에는 지지대로 쓰일지 모르는데 말이야. 특히 트레이스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그래봤자 오래 가겠어? 여기서 진짜로 오래 버티는 놈은 없거든.」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유발시킨 다는 것은 동시에 그를 아주 예민하게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스스로 예민해졌다고 믿는 인간은 남을 경멸하기 쉽다. 무엇보다 그것을 알고 당하며 느끼는 본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정신 고문이다. 하루 몇 번씩 있는 집합마다 윗적은 우리를 모아놓고 성실함과 노력이 얼마나 숭고한 것이며, 그 희생이라는 세월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큰 자부심이 되는지를 거듭 반복해서 교육했다. 은유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가 된다. 그렇기에 직접 해를 가하지 않아도 그 대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스스로 베게 만들 수 있다.
투명한 유리의 방에 가둬 가만히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처음에는 바깥이 보이기에 기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고 상상해볼 수 있다. 허나 그 기웃거림은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만 가는 것은 능동적인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유리 감옥 안에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자신이다. 차라리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무엇이라도 하는 게 행복하다고 믿게 될 것이다. 스스로 가치가 상실된 채 고립을 실감하게 된 누군가는 기가 죽어 버리고, 점점 행동을 억제하게 돼 움직임이 줄어들게 된다. 통제사회에서 기회가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리벨, 방에 한참 안 보이길래 찾고 있었는데 대체 어디 있다 온 거요??」
「그냥 잠시 바람 좀 쐬고 왔다. 소장이 부르더냐?」
「아니 그건 아닌데... 그거 아시오? 요즘 리벨, 부쩍 혼자 다니는 게 늘었소. 일과시간에는 나도 나가 있으니 어찌하는진 모르겠는데 내가 찾을 때도 더러 안 보이곤 하오. 요즘 많이 답답한가 보오? 허허」
「그래, 그런가보지...」 
「어! 저기 보시오. 그놈 지나가오. 허허, 요새 고개를 드는 것을 본 적이 없소」

트레이스는 조용히, 아주 가벼운 동작으로, 누구와도 엮이지 않으며 그렇게 이동하며 이내 사라졌다.

「이미 기운을 많이 잃어버린 듯하오.」
「그래 보이네.」
「잔인한 처사요. 자신조차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송두리째 기반을 뺏기는 게 아니라면 자각하기 힘들지.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명확한 인간일수록, 언제나 당연한 듯이 지탱해주던 것이 사라진다면 견디기 힘들 거요.」
「심지어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이곳에선 특히 그렇겠지.」
「그런데 내 앞의 사람은 되게 태연한 것 같소? 리벨쪽은 일이 잘 풀려서 그런가? 여하튼 물론 저놈을 동정한다는 것은 아닌데, 저러다 저놈 크게 사고 한 번 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자신이 맡은 게 단역이라 믿었던 바보의 결말이지.」 
「흠, 그건 그렇고 드디어 이번으로 최종 절차까지 왔군. 혹시 두렵지 않소?」
「두려움과 불안은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어. 항상 내가 어떻게 될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어떤 변수를 만날지 고민했었어. 하지만 유리방에 갇힌 자는 무엇을 알아도 자신이 어찌될지는 몰라.」
  

<12>  


「기간은 오래 줄 수 없다. 모든 것을 되도록 빨리 끝내고 돌아오도록」

또다시 검사를 위한 사회에서의 소환이다. 어차피 밖에서 여유를 즐길 마음은 없다. 여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자리에 초조함이 채워질 테니까. 

「그나저나 지난 며칠간은 어땠나? 자네가 기다리는 동안 초조한 마음에 생각도 많았을 텐데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면 좋겠군.」
「전 괜찮았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네는 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지만, 사실 이게 아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만 했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네 부모한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슨 얘기든 하지 말아 달라고 했던 것 말이야. 허나 내가 이곳의 책임자인데 밖에서 자네의 보호자이기도 하신 그분들에게 무슨 부탁의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이곳에서 현재 자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여기 오기 전 밖에서 자네가 어땠었는지에 대해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네.」

순간 내 표정이 어땠을지도 모를 만큼 난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의 과거를 알아냈다. 그것도, 지금 나에 가장 가까운 인간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나의 눈에만 비칠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그런 인간이 앞으로 나에 대해서 아는 마냥 마구 헤집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공포와 경악스러움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허나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무엇을 얘기 나누셨든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저란 인간은 어차피 소장님이 들으신 것처럼 과거의 저이니까요」 
「...그런가. 곧 문이 열릴 걸세. 시간 맞춰 보호자를 만나서 나가게」

생각지도 못한 수였다. 어디까지나 그와 내가 서로 가진 패란 것은 내가 이곳에 온 뒤로의 사건들만 구성돼 있을 터였다. 헌데 그가 이번에 꺼내 든 것은 내가 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버린 것. 난 스스로 자아를 지키기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온전히 지킬 수도 없었던 그 이전의 것은 버렸고 내가 아니라고 스스로 세뇌시켰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다시 주워 꺼내서 나를 묶는 새로운 족쇄로 쓰다니! 어찌 그런! 두 세계 간에 오가는 중 난 이미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돼 버렸는데. 어디까지 나를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한 건가!

「얘야.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장과 얘기를 나눴단다.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사람은 그렇게 한순간에 크게 바뀌고 그러진 않아. 난 널 안단다.」

오가는 길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차의 안이다. 방향은 다르지만, 내 안의 묶은 내와 갈증은 바뀌지 않았다.

「내일 오전 10시 10분입니다. 늦어질 것 같으면 30분 전에 연락을 주셔야 하고 20분 이상 늦다면 다음 기회를 잡기 위해 몇 주에서 몇 달이 밀릴 수 없으니 참고하길 바랍니다.

이번엔 최종이라 할 수 있는 상급심의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과정이라는 것은 나 대신 부모님이 설명을 들어서 난 잘 모르지만 대충 ‘공식적인, 객관적이며,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러한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 같았다. 나로서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내가 받을 검사에 관한 내용과 유의사항에 관한 설명이 있는 서류를 받았다. 딱히 그렇게 유심하게 보아야 할 것들은 없었지만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에 대해선 줄을 긋고 표시했다. 

<검사 당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날 것. 그리고 필요 이상의 과한 수면은 자제. 전날 및 당일 각성제나 진정제 등의 신경 이상 유발 약물 복용 금지>

하루 사이에 이동이 많아 피곤해 잠이 쏟아질 법도 한데 이날도 마찬가지로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보호자 분은 밖에서 잠시 기다리시고 검사하시는 분만 절 따라오세요. 약 30분에서 한 시간 소요될 것입니다.」
「듣기론 잠을 자면서 검사를 받는다고 하던데, 그럼 그동안 꿈도 꿉니까?」
「비교적 낮은 수면 상태에서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검사라 그러한 전례는 들어보지 못했군요. 헤집고 나올 꿈이라면 어떻게든 나타나긴 하겠죠.」

감각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아주 복합적으로 탐지해 낸다. 그리고 저장된 기억과 인간의 감이란 것은 심지어 불충분한 요건과 단서마저 극복해낼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에 인간이 감각을 하나씩 상실한다는 것은 끔찍한 벌이다. 수용하지 못하고 소통할 수 없게 돼버린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도 외부로도 바스라져 간다.

「이걸 갖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돌아가서 보고해야 할 결과지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리벨 당신은, 저번 검사를 받은 뒤로 결과의 방향에 대해서는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고, 신뢰성을 면에서는 입증하실 수 있다는 것이니 다행이라 볼 수 있겠군요. 하여튼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 외에 앞으로 생활하면서, 이러한 증상의 문제로 필요한 얘기를 더 해줘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면 다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
「아니요 이건 의무적 절차입니다. 하지만 조만간 다시 만날 것 같으니까…」

의사는 안경을 닦으며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씁쓸한 웃음이지만.

「이봐요 리벨씨, 지금은 이러한 증명의 평가와 자료만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있을 앞으로의 과업은 단순히 이러한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겁니다. 음, 지금도 무척 힘이 들겠지만. 내 말은, 당신에게 힘내라고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고마워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잠을 잘 못자서 몹시 피곤한 상태거든요.」
「조심히 가 봐요.」 

난 조용히 문을 닫고 어딘가에 있을 부모님을 찾기 시작했다. 근처에 앉아계셨는데 담배라도 피우러 가신 걸까. 어차피 이젠 어디로 가버리든 상관없다.

「아까 보호자 분은 따로 옆방에 있는 상담실에 계셔 달라고 얘기 드렸지?」
「그렇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는 결국 내면의 관성에서 빠져나간 모양이야. 그의 자학적 경계 파괴 행위에 관한 결과지는 뽑아 뒀나?」
「네. 선생님」
「지금 가서 그분들께 전해 드리게. 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 검사는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주기적 방문은 부탁드린다고」
「알겠습니다. 선생님」     


<13>


어쩌면 헬릭스와의 싸움은 그의 이중적 잣대를 무너뜨리는 게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예상되었던 그의 반응은 언짢으면서도 묘한 쾌감이 들었다. 소장은 종이를 받아들고 여전히 읽을 수 없는 표정을 보였다.

「그래, 일전에도 얘기했듯이 자네가 이곳에서 충분히 혼자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졌던 것이 검사를 올바르게 치르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 생각하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혹시 말이야. 이러한 검증을 받는 과정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겠나? 혹시 이러한 일이 다음에도 있을 법해서 말이네. 그러니까, 예를 들어 피검사자가 이러한 항목들에 대해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 말이야.」
「저는 그저 사회의 흐름에 맡겨 지시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제가 가져온 결과지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자는 내게서 또 한 걸음 멀어질 것이다. 그는 나를 떠보기위해 간헐적으로 시험에 들게 했고,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날 자발적으로 굴복시키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 패가 유리하다고 해서 그가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원하지 않는 결과에 언짢을 뿐.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을 거다.

「잠깐만! 여기 나와 있는 이 부분 말이야. 진짜로 확실한가? 전에 나와 상담할 때에는 이러한 얘기는 없었지 않나?」
「‘상기 대상자에게 나타나는 이상은 그가 지난 기간 동안 속해 있던 기관과 그 환경에서 악화된 것으로 보여 짐’이것 말씀입니까? 그들의 소견입니다. 제가 특별히 개입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요. 제 부모와 얘기를 나눠보셨다면 소장님도 일부 동의하시는 부분 아닙니까?」

「아니, 그래도 말이야... 어찌 그래도 책임의 방향을.. 으음」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표정이다. 그럴 테지, 그가 가장 우려해왔던 부분일 테니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서 원치 않는 책임에 발목을 잡히는 것, 똑같이 당해보니 기분이 어떤가?

「알았네. 그만 나가보게」

돌아온 이곳의 분위기는 전과 비교할 때 사뭇 달라져 있다. 내가 이곳에 없어도 나의 정보들이 말과 손짓이 되어 그들에게 전해졌을테니. 일일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의사와도 상관없이 형성된 가상의 리벨은 이미 거의 사라지고 없다.

사회로부터의 간섭과 보호가 드디어 이곳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그는 몇 차례의 신뢰성 있는 검증을 통해 자신이 이곳에서의 가치가 없음을 증명했다. 곧 그는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가 부여받자마자 이곳을 떠날 것이다.

「요새 이곳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소. 정확히는 나도 그동안 한 번씩 얼핏 들은 게 있으니 꽤 전부터 있었던 얘기 같소. 물론 난 그저 우스갯소리 따위로 믿지만. 그런 말을 일일이 다 믿다간 여기가 어디 사람 사는 곳이라 믿을 수 있겠소?」
「어찌 보면 비일상적 소재가 때론 삶에 활기를 불러올 수도 있지, 특이 이곳처럼 새로운 무엇을 기대하기 힘든 데에선 특히」
「뭐 그렇긴 하오. 요새 겨울 준비가 한 창이라 일이 많아지고 다들 예민해지니까 오히려 그런 말들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소.」      
「그래, 그래서 요즘 떠돈다는 그 기이한 소문이라는 게 뭐냐? 윗적 중에 누가 전출이라도 간다더냐?」
「흐흐 그런 얘깃거리가 나와도 나쁘지 않겠군.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얘기가 아니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답니다.」
「이상한 소리?」
「화장실 잠긴 안쪽이나 잘 가지 않는 창고, 어두울 때 건물 외곽에서 누가 맞는 거나 때리는 소리가 난다는 거요. 그때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요즘은 워낙 잦아서 들은 놈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하오. 하지만 신경쓰지 않을려고 무시했는데...」
「무시했는데?」
「요즘에는 보면 곳곳에 바닥이나 벽에 혈흔이 남고, 어쩔 때는 붉게 물든 연장들도 더러 보인다는 거요. 섬뜩하지 않소?
「확실히 보기 좋은 현상은 아니군. 이미 윗적들도 이에 대해서 알고 있나?」
「아직 무슨 조치가 없는 것으로 봐서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중인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조만간이지 않겠소?」
「너는?」
「나 말이오? 난 직접 본 바는 없소. 짐작가는 놈은 있지만」

주위를 빠르게 살피고 몸을 내 바짝 옆에 붙어 앉아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며칠 리벨은 나가있어서 당연히 몰랐겠지만, 트레이스는 그동안 쭉 이곳에서 근신하며 지냈소. 그게 한동안은 계속 조용히 지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하는 많아지던 거요. 이곳에서 무조건 열외를 받은 놈이 움직여봤자 거기서 거긴데 뭐랄까 태도가 변했다는 거지. 실성한 것처럼 혼자 실실거리기도 하고. 난 그놈을 보고 대체 무슨 낙이 있다고 저럴까 그랬었는데. 음. 이건 엿들은 놈이 전해준 예기라 확실하진 않은 정보요. 새로운 증명의 안건으로 트레이스의 이름이 그저께 간부회의에 올라왔다 하오.」
「그럴 수도 있다 생각을 했었다만」
「하지만 가능성은 별로 없답니다. 뭐라나, 그의 현재 상태가 새로 바뀐 조건항에 미달이라고 했나. 리벨 이후로 그 기준이 높아졌다고 들은 것 같소. 어찌됐든 놈의 입장에선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면 더 최악이니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 아니겠소.」
「그렇군...」
「어찌 보면 가엽소. 리벨은 이제 소장이 뭐랍니까? 선택권을 주겠답니까?」
「선택도 아니야. 밖으로 이어진 새로운 사슬을 달아주려 하겠지.」


<14>
   

우리가 지내는 건물 뒤로 돌아가면 작업도구를 모아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창고가 있다. 그 옆으로는 지금은 쓰지 않는 오래된 간이 화장실이 두 개 붙어있다. 모두가 일과를 위해 낮에 건물을 비울 때, 나는 몰래 내려와 창고 안에 무엇이 담긴지도 모르는 박스 위에 앉아 한 대를 태웠다. 그런데 오늘은 화장실 쪽에서 나와 엉거주춤한 자세로 목발을 짚고 걸음을 옮기는 그와 마주쳤다. 듣던 것보다는 표정이 훨씬 좋군.

「여, 부럽구만. 이번에 헬릭스를 포함한 윗적들의 콧대를 확 꺾은 모양이던데?」
「친한 척 하지마. 방금 내뱉은 말은 네 입에서 전에는 나올 수 없는 단어였어. 알아?」
「딱딱하게 구는군. 뭐, 인정하지. 인정한다고. 나도 이제 내 주제를 아는데 여기까지 와서 어설픈 짓거리는 더 안 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난 너랑 단둘이만 있을 기회를 보고 있었어. 참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갑자기 트레이스의 뒤로 몸을 쓱 내비치는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무 표정도 없이 그저 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눈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 그동안의 정리해온 생각과 복잡한 심정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당장이라도 붙잡고 얘기하고 싶었다.

「야, 너.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 한동안 계속 안 보여서 네게 뭔 문제가 생긴 줄 알았잖아.」
「뜬금없이 뭔 소리야. 무섭게 왜 다가와?」
「너 말고 뒤에. 비켜 인마」

그는 대꾸하지도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 어? 야! 잠깐만 열어봐.」

그때 2층 창문을 통해 호루라기가 불렸다. 간부 중 하나가 손짓을 하며 크게 소리 지르며 트레이스는 당장 올라오라고 했다. 

「젠장,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너 어디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어떻게든 빠르게 가려는 그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는 사이 그는 이미 화장실에서 나와 내 뒤에 서 있었다. 

「벌써 너와 내가 만나고 나서 계절이 변했군. 더 이상 너희 쪽 화장실도 우글거리지 않을 테니 더욱 우리가 마주할 일이 없었고 말이야. 아, 저번에 방을 옮겼다고 했었나?」
「안녕 맙?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넌 이미 알고 있지 않아?」
「아... 한동안 네가 보이지 않아서 은밀히 무언가라도 준비하는가 생각했어.」

사실 두려웠다. 며칠 같은 꿈이 이어지면서 마주한 그에게 선뜩 무슨 말을 꺼내기는커녕 제대로 마주하면서도 몸이 떨리고 있었다.

「네 눈은 항상 나를 쫓고 있지. 하지만 머리로 한 번 그린 시점에서 그 자리엔 나는 사라지고 없어.」
「영문모를 소리는 여전하군. 네 보물은 어때? 여전히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가지고 있어?」
「음 굳이 뭐 하러 물어보지? 정 궁금하면 네 것이나 신경 쓰지 그래?」
「내 것이라니?」 

「이봐, 리벨! 너도 호출이다. 얼른 올라 가봐.」

2층에서 트레이스가 지르는 소리였다.

「사실 최근에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 저기 성가신 녀석은 트레이스란 놈인데, 상대하면 귀찮은 놈이니 혹시 말이라도 걸면 그냥 무시하고 있어도 돼. 얼른 돌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줘」

간부는 내게 혹시 최근에 떠도는 이상한 소문의 대한 출처와 그 진상에 관해 아는 바가 없냐고 캐물었다. 나는 시종일관, 그런 이야기를 믿지도 않으며 며칠 내가 이곳에 없었기 때문에 그에 관해 들어본 바도 없노라 라고 답했다. 면담을 마무리 짓고 허겁지겁 마무리하고 내려갔을 땐 트레이스만 창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왔어? 끈질기게 캐봤자 답을 들을 수도 없는데 그놈들도 고생을 하는군. 왜 그리 숨이 가빠? 뛰어올 필요는 없었는데 역시 너도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다른 한 녀석은 어디 있어?」

이젠 시간이 없다. 이 이상 더는 그를 잃어버리면 더는 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날 앞으로 가지 못하게 날 잡는 그를 향해 분노의 당연한 것이었다.

「야! 어디가게? 내 얘기 아직 시작 안 했어.」
「너랑 더 할 이야기는 없어」
「저 창고에는 왜? 혹시 거기 네 비밀이라도 있나?」
「뜬금없이 개소리하지 말고 이거 놔!」

그는 더 강하게 움켜쥐며 정색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모른 척 하려고? 이곳에 떠도는 가혹행위와 가치파괴 행위의 소문 말이야. 너도 불려가서 얘기 들어서 알겠지만 지금 윗적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난 흥미 없다고 했잖아!」
「자꾸 이런 태도로 나온다면, 나도 할 수 없어!」
「귀찮게 하지 마. 너도 아까 봤지? 지금 그녀석 어디로 갔어?」
「나는 봤지, 네가 그동안 저런 은밀한 곳에 숨어서 무슨 짓을 벌여왔는지 말이야.」
「무슨 말이야?」

그는 내 귓가에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난 정말로 네 증명의 비법에 흥미가 있어. 이건 네게 사실 부탁하고 있는 거야. 나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는지 몰라. 그런데 이것 외에 내게 길이 없어. 숨이 막힐 것 같은 메마른 길에 고립돼 있다면 모든 것을 떠안고 더러운 육신을 건지는 짓이라도 자행할 수밖에 없잖아! 제발 답해줘! 찢겨진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비결이 대체 뭐야? 내가 했던 생각이! 내가 벌인 일들이! 나를 쫓아와 가만 놔두지 않아. 어떻게 그러고도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지?!」 

「거기 리벨 아니오? 무슨 일 있소?」
「칫」

한 번 째려는 보지만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섰다. 저번에 그 일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흠, 저놈이 또 리벨을 귀찮게 한 거군. 하긴 저놈도 이제 생각이 많을 거요. 이제 와서 뭔가 해보려고 리벨 주위라도 기웃거리려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리벨을 잡고 매달려도 무슨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고. 음... 실제로 와서 보니 느낌이 섬뜩하구만. 이런데 있지 말고 그만 갑시다.」

 「그래..」

한 번 곁눈질로 안쪽을 보고 뒤돌아 섰다.


<15>


저녁에 일과가 다 마무리된 후 모두가 다 복귀했을 때 나는 본격적으로 그를 찾아 나섰다. 전에 그가 지내던 방으로 가봤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그 쪽 방에 있는 녀석들은 누구를 찾느냐고 했지만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지나갔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건가 싶어 저번에 그와 대화를 나누며 기대어 서 있던 창문으로 갔다. 눈도 오고 풍경은 변했지만 그는 없었다. 그와 맨 처음 만난 화장실부터 건물을 다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건물 뒤의 창고로도 가봤지만 역시 없었다. 
한 대 피우면서 오늘 더욱 선명한 연기를 따라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만약 이곳을 나가게 되더라도 그 후의 일도 생각해 두어야 했다. 이곳에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 그리고 내 앞으로 가지게 될 저 밖의 가치. 내 증명이 가지는 무게. 사실상 진실이 아닌 것들. 바닥에 드문드문 있는 검은 자국을 보고 오싹한 느낌을 받으면서 그제 서야 그가 저번에 만났을 때 방을 옮겼다고 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를 오늘 찾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 할 수 없이 방으로 복귀해야 했다.

「휴, 오늘 대체 흙 몇 수레를 퍼다 나른 건지 모르겠소. 아까까진 허리가 너무 아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소. 아직 마무리까지 해야 될 게 많은데 눈도 오기 시작하고 큰일이오. 앞으로 몸이 성치 않은 자들이 많이 속출할 거요.」
「그래, 몸 조리 잘 해라.」
「왜 이리 비효율적인지 모르겠소. 분명 사회에서는 더 나은 방법을 가지고 시간 대비 확실히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 낼 거요. 하지만 여기선 그런 의지가 보이지 않소.」 
「아니면. 정말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닐 수 있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혹사시켜 잡념이나 욕심을 비우게 만드는 거지. 그리고 어느세 적응한 자신을 보면서 지금 있는 공간에 대해 뼈저리게 느낄테고 말이야.」
「힘든 얘기는 여기까지만 합시다. 어차피 여기를 그런 곳이니까 말이오. 그런데 공책에 뭘 그리 보시오? 또 저번처럼 뭘 씁니까?」
「이번에는 공책에 옮겨 둔 말을 보고 있다. 옛날에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아 일기같은 거요? 음... 어디보자. 그 그림은 뭐요? 길쭉한 타원형이 금이 간 것 같기도 하고 구멍도 있고. 깨진 달걀 아니면 부서진 거울 같소.」
「글쎄, 어찌된 건지 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계속 생각 중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리벨 말이오. 뭘 잃어버리기라도 한 거요? 아주 건물을 쥐 잡듯 뒤지고 다니던데?」
「‘잃어버렸다’라. 누구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고 있었어.」
「호오, 난 리벨에게 날 제외하고 또 친구가 있는지 몰랐소. 혹시 나도 안면이 있는 자요?」
「눈에 띄는 놈은 아니니 잘 모를 수도 있다. 여름 즈음에 서편의 방에 있다가 얼마 전엔가 방을 옮겼다고 하더군.」
「오호? 방을 옮겼다는 점은 리벨이랑 똑같군. 그 친구가 얼마 전에야 옮겼다는 게 다르지만. 근데 이제 와서 뭐 하러 방을 이동한 거요? 최근에 누가 옮겼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하여튼 뭐 다른 특징 같은 건 없소?」
「나도 딱히 친한 건 아니라 잘 모르는데, 여름 즈음에 괜히 서편 화장실을 두고 우리 쪽에 와서 쓴다던가, 아니면 창틀에 기대서 자주 바깥을 보고 있는 다던가, 아니면 혼자 생각에 잠겨 빙빙 걷는다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토스가 크게 웃음이 터졌다. 

「너도 참 별난 놈이야. 웃을 부분이 어디에 있다고.」
「리벨! 잠시 나를 따라오게. 해야 할 얘기가 있으니」

평소엔 건물을 잘 돌지도 않고 자기 사무실에만 박혀 나오지 않는 게으른 소장이 굳이 찾으러 오다니. 덕분에 침묵과 함께 주위의 시선이 고정됐다. 옆에서 아까까지 웃어대던 놈도 진정하고 앉아 시선을 번갈아가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일 아침이다. 마지막으로 월을 만나게 될 거고.」

내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투는, 오히려 내가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의 늘어난 침묵은 바로 나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었으니.

「솔직히 지금 자네의 심정을 묻고 싶네. 이제는 그 오래 닫힌 입을 열 때도 되지 않았나? 구태여 지난 자네의 과정들에 대해 물을 생각은 없네. 그저 감상이 듣고 싶을 뿐이야. 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스스로 그 공간에 있는 자신을 숨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네. 자네는 어떻지?」

나는 무엇이 일어나도 그 공간에 없는 존재였다. 그렇게 되도록 자신을 납득시켰다. 스스로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했고 또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아야 했다.

「숨기지 못합니다. 나에 대해 어디 있냐고 스스로 자문한다면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 있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전과 다른 가치를 지닌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배반이군.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야. 인간은 미래를 볼 수 없다. 일부 과거의 순간들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급급하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 자신을 돌아볼 땐 그 역시 그 과거의 시점에선 새로운 미래의 세계가 돼버리고 마니까.」
「그렇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건 참 모호한 일이죠. 」

「자네와 함께한 그동안의 과정이 즐거웠고 이젠 마지막 면담이 되겠군. 자넨 자유야. 안녕히 가게」

10살 무렵이었다. 문학 수업시간 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설명을 듣다 지겨운 나는 흔들리는 커튼과 바깥에서 들어오는 꽃향기에 취해 있었다. 그러다 선생님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 다른 아이들을 환기했던 모양이다. 

「얘들아, 여기에 어둠속에서 불빛도 없는 배에 떠돌고 있는 한 인간이 있구나」

 모두가 말을 듣고 그녀의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잠시 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선장이시여,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돌려 가볍게 웃으며 손들고 대답했다.

「선생님, 여기에요. 저는 여기에 있어요.」


<16>


인간 하나의 열덩이를 몸에 품으셨고 그래서 나를 자기의 분신이라고 생각하시는 그분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구심점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녀가 내 자신의 가치와 그 방향에서 나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느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였다. 그것은 그 당시 내게 몹시 거대한 좌절을 느끼게 했고 내가 뭘 더 지킬 게 남았는지를 고민하게 했다. 자신이 누구에게 상당한 부분을 기인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과 실체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설사 그것이 기존의 자신일지라도 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분노. 그리고 난 앞으로 어떠한 인간이든 될 수 없다고 스스로 몰아 부친 뒤에는 커다란 공허함이 남았다. 바로 그때부터였다. 내가 진정으로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이 이상 쫓아 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서는 방법밖에 없다고 깨달은 것이.

「혹시 나오기 전에 소장이 너에 대해 소감을 묻지 않던가?」
「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누구라도 묻고 싶었을 테니까. 나도 그래서 얘기하는 거야.」
「사람들이란 참 이런 걸 좋아하는군요. 오히려 난 그런 질문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더 보기 싫은 인간에게는 내가 대체 어떤 인상으로 남아야 할까. 내가 그와 어느 수준으로 긍정적 관계에서 끊어내야 할까.」
「마치 도망자다운 대답이군. 하지만 딱 적당해.」
「고맙군요. 월, 그래서 이제는 당신 손에 들려있는 결말을 알려주겠어요?」
「희극의 결말대로다. 그저 넌 주어진 역할을 마쳤어.」
「그래요. 하나를 끝냈을 뿐이죠.」
「간섭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곳에서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사회의 본질이다. 그 속에서 계속 있기로 결정했다면 넌 이번과 같은 시험과 증명의 연속일 테지.」
「압니다. 아주 잘 알아요.」

그래, 중간 중간 잊어버리긴 했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무엇을 따라가면서 과거가 어떠냐고 묻는 것은 둥글게 말려져 있는 카펫을 펴는 것과는 다르다. 펴기 전에 그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같지만 적어도 그것을 다시 말았다고 해서 무늬가 바뀌거나 하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슬을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너다. 축하한다. 이제는 정말로 네 족쇄를 끊으러 가봐」

시간만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내가 보는 세계와 생각하는 세계 사이에선 말로 설명하는 시점의 역설이 생긴다. 난 내게 무수히 쏟아지는 과거를 보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점에선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의 과거로 남아 버린다. 그렇기에 그것을 과거라고 부르는 것은 배반이다. 언제나 자유로운 큰 바다의 일부가 되고 싶은 나였지만 결국 낯선 조류에도 자신을 실을 수 없었다.

「어허, 드디어 결정이 그렇게 난 거요? 난 이날이 오리라 믿고 있었지. 리벨은 눈은 처음부터 한 곳만 보고 있었거든.」
「그래, 이제는 나도 이곳을 더 보지 않아도 되겠지. 이제는 질려버렸어.」
「그 동안 실로 많은 고심과 계산을 했을 것이고 어떤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일어나는 것도 있었을 것이오. 허나 그 모든 것은 리벨이라는 어떤 인간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소. 정말로 이전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거요? 아니면 일시적으로 상실된 것이요?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각자 존재하지만 어째서 따로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병이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둘 중 무엇도 아닌 것 같아. 그냥 단순히 아니라고 단정 짓기에는 조만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본인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묶이게 되는 것은, 결국 스스로도 그 가치에 부합하는 기준을 자신이 갖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오. 결국 인간이라면 그것에 이끌릴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 리벨은 거역했소. 마치 자신을 버린 것과 같이. 내 앞에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오. 한 때는 리벨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믿었소. 허나 이제보니 그렇지 않구려 허허허.」
「네 즐거운 설명을 듣는 것도 이제 곧 끝나겠지. 그 동안 고마웠다.」
「다른 이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하지 않겠소?」
「네 말대로 난 딱히 이곳에서 친구가 없는 것 같다. 정을 붙이지 않은 건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해야만 했던 표상이었던 건지」
「그런데 전에 얘기하지 않았소? 그 저녁 내내 찾아다니던 친구 말이오.」
「너도 실은 전에 한 번 어스무리하게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름에 비가 왕창 쏟아지고 난 후 보수공사를 위해 쌓아둔 흙이 배수로를 막았던 날 있지? 그 날 저녁 모두 모여 있을 때 네가 내가 누구를 빤히 처다본다 했었잖아」
「기억하고 있소. 그래서 내가 지켜보고 있는 놈이 윗적이 아니냐고도 했잖소.」
「그때 내가 너희를 두고 따라갔던 놈이 내가 찾던 녀석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오? 허허」
「그날 유독 구름도 많았고 몇 보 사이에도 떨어지면 분간하기 힘든 밤이었으니 네가 잘 몰랐었을 수도 있지」
「내가 보기엔 따라간다고 보다는 계속 방황하는 것 같던데. 가다 멈추고, 또 가다 두리번거리고. 한동안 멈춰 서있다 또 가고. 그리고 어디가 아픈 마냥..」

내가 누구 얘기를 듣고 있는 거야?

「리벨 혹시 그자가 자기 쪽도 아닌데 와서 화장실에서 만났다는 그 자요?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너도 혹시 그의 얼굴을 본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이 뭐요?」
「허허, 웃기게도 아직도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재밌는 건 그도 나의 이름을 착각해서 다르게 부른다는 거지.」
「...혹시 여기 들어오기 전의 리벨을 기억하고 있소?
「사회에서 말이냐? 물론」 
「그저 지금의 자신을 토대로 찾아보고 있는 것 아니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토스는 깊은 한숨을 토하고 얼굴을 크게 쓸어넘겼다. 그리고 정말 고심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그날 밤에 그 방향에서 보고 있던 것은 그 친구분이라는 사람도 아니오. 이 건물 창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그림자가 신경 쓰였던 거지. 난 그날 이후 그 그림자의 정체가 트레이스였다는 것을 알았소. 리벨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저번에 단 둘이 얘기 나눌 기회가 있었소.」
「중점을 모르겠군.」
「처음에는 그와 그날 밤의 리벨의 거동에 관해 얘기했소. 물론 나는 그것이 얼토당토 안한 헛소리라고 무시했소. 그래서 그놈이 종종 리벨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내게 그 주제를 떠들러 왔을 땐 그가 이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지. 그래서 나는 더욱 그를 의심했었던 거요. 그가 지금 욕망하고 있는 것이, 리벨을 향하고 있다고 했을 때 나는 그가 그 모든 소문의 중심이라 그리 확신했소.」
「난 그놈 얘기하던 게 아닌데?」
「하지만 나도 그날 밤 리벨의 행동은 무언가 석연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오. 그래서 그가 ‘리벨이 스스로 망가트리려 한다. 그날 밤 혼자서 배회하며 하는 이상한 행동들을 너도 보지 않았던가?’라고 내게 캐물었을 때 솔직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소.」 


「요새 몸의 여러 군데군데가 얼얼하고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 어이구. 여긴가?」
놈은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자기 귀를 몇 번이고 후려갈기는가 하면, 주먹으로 자기 입을 피가 튀도록 세게 치고, 괴상하리라 만치 자기 무릎을 무자비하게 때려댔다.
「이봐! 그만해. 괜찮아? 뭐 하는 짓거리야?」

「내가... 그날 혼자?」
「여름 때 심한 더위로 이곳에서 피부병이 유행했을 때 리벨은 몸을 심하게 긁었소. 그래서 리벨이 우리 방으로 새로 배정되었지. 불결하고 사람이 많아 일부로라도 반대편 화장실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월이 소장에게 한 보고를 통해 자주 씻게 하고 감염을 피하기위해 내린 특별지시였소.」

「오랜만이야 얼굴은 전보다 좋아 보이는군. 리벨, 요즘도 화장실은 잘 가고 있나?」
「월, 나는 그 정도의 일상생활 때문에 당신 만나러 온 게 아닐텐데요?」

지금 내가 누구 얘기를 듣고 있는 거지?

「오래전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리벨은 이곳에 생활이 적응이 되지 않아 괴로워 할 때에는, 혼자 2층에 올라가 창문에 기대어 하루에도 몇 번씩 저 밖의 우리가 들어왔던 길을 보고 있었던 리벨이오. 고독할 때면 조용히 산책을 즐기며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지. 그래서 나는 리벨을 끝까지 믿었소.」

‘그 녀석? 나도 딱히 친한 건 아니라 잘 모르는데, 여름 즈음에 괜히 서편 화장실을 두고 우리 쪽에 와서 쓴다던가, 아니면 창틀에 기대서 자주 바깥을 보고 있는 다던가, 아니면 혼자 생각에 잠겨 빙빙 걷는다던가.’

「지금... 네가... 얘기하는 사람... 누구지?」
「나도 모르겠소. 어쩌면 그동안 리벨을 통해서 들었던 그 친구는 내게 있어서는 과거의 망령이거나 그조차 다시 망각되어버린 허상일지라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인물은 아니라는 거요. 그럼, 나는 가봐야겠소. 떠나기 전에 다시 봅시다.」


<17>
 

나는 두 세계를 번갈아 오가면서 사회 속에서는 내가 지니는 가치의 본질은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무엇을 정립하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배반이라 깨닫게 됐다. 
계속해서 부서지고 만들어져도 그저 삶의 연속선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풍화나 반작용이라고 여겼다. 어느 날 나를 만들고 형성하고 있던 가장 큰 잣대가 무너졌고, 덕분에 나는 내가 스스로 믿는 자신이 그 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한 낱 일시적인 거짓의 표상일 뿐이었음을 알았다. 그제야 레테(Lethe)가 어째서 기억을 없앤다는 뜻뿐만 아니라 진실을 은폐한다는 의미도 같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월이 확실한 승계를 해주었네. 이제는 자네가 이곳을 나가는 순간부터 소속 상, 신분상으로도 더 이상 나의 관할이 아니네. 자네가 이곳을 나가지만 그래도 확실히 말해주지. 저 밖은 이곳과 그리 다른 곳은 아니야. 어찌 보면 이곳보다도 더 음험하고 외로운 곳이지. 어찌 됐든 이곳을 만든 곳도 저 밖의 사회란 곳이니 말이야.」 

모두가 낮에 자리를 비우는 시간. 난 소장에게서 받은 종이 쪼가리를 들고 떠날 짐을 챙기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다만 그곳에는 먼저 방문하신 손님이 있던 모양이다.

「거기, 토스냐?」
「너, 아주 뾰족한 펜을 가지고 있네, 이거 아주 좋은 도구인걸」

드디어 미쳐버렸군. 이젠 그래도 안녕이야. 저것봐 내 물건을 뒤지면서도 거리낌이 없군. 그가 이것저것을 한참 잡아대다가 이젠 내가 저지해야겠다가 생각했을 그 순간에 그는 내 공책을 집어 들었다.

「내게 뭔가를 기대하고 부러워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훔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냐?」

그의 비정상으로 상기된 표정, 절박한 몸짓은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 장씩 넘기다 그제야 몸을 천천히 틀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공책을 펴서 손가락으로 그 그림을 가리켰다.

「이거 말이야, 지금 어디에 있지? 내게도 알려줘. 제발! 제발! 나도 이게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길쭉한 타원형, 갈라지고 깨진 무늬.

「왜 그것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것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미안하군. 나도 알려줄 수 없어서 말이야.」
「시치지 때지마! 서..설마.. 지금 네가 갖고 있나?」

「정말 내게 바라는 것도 많군. 이제는 내 물건까지. 졸졸졸 잘도 귀찮게 하는구나.」
「나. 난 봤어. 네가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다 봤다고!」
「마침 잘 되었군. 나도 떠나기 전 그와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때 거기에 있었던 녀석 말이야. 혹시 어디에 있고 이름이 뭔지 아나?」
「나도 너처럼 되고 싶었어, 이것봐봐봐!!!」

그는 팔을 한쪽 걷고 이제는 깁스를 푼 다리와 신발도 벗어 보여주었다. 온갖 멍을 포함해서 일그러진 살집, 태운 자국, 찌르거나 뜯어낸 자국.

「토스의 말이 맞았군.」
「난 왜 너처럼 될 수 없지? 어째서?」
「그만 남에 것에 손대고 그건 돌려줘. 그리고 그 녀석 본 적 없어? 그때 너 다음으로 내가 불려가고 난 다음에 너와 함께 둘이 같이 있었잖아.」
「그 다음이 아냐. 그 잠깐 전에 우리가 대화하고 있던 순간이지. 나와 있었던 건 처음부터 쭉 계속 너였었다고! 이젠 제발 그만 좀 해. 어지간히 자신을 객관화 시켜서 분리해내지마. 모두 끝났잖아. 이젠 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허. 허. 허? 설마? 너 이제는 정말 스스로를 멈추려는 거야? 그와의 간격을 좁히려고? 네 안의 시계들은 곧 모두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함께 깨져 버리겠군. 헤헤헤 미쳤어. 미친 거야!!」

그자 그가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잔뜩 겁에 질린 것 같다. 바닥에 떨어진 공책을 집었다. 그것이 그려진 종이 한 장을 뜯었다. 그리고 입으로 우걱우걱 씹어 삼켜버렸다.

「안녕히 가시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소. 리벨이 있는 동안에 같이 나눈 대화가 즐거웠기에 분명 난 섭섭하고 외로울 것이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할 거야」
「벌써 밖이 깜깜한데 누가 마중 오는 것도 없이 혼자 나가는 거요? 조금 전에 가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 것 같은데」
「일부러 나가는 것이 내일 아침이라고 얘기 드렸다.」
「네? 뭐라고 하던가요?」
「‘네게 도움이 되는 확인을 좀 더 하고 싶으니 같이 가자꾸나.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이란다.’라고 하시더군」
「그럼 그들이 앞으로 리벨의 길동무가 되겠군요. 그런데 어째서 나가는 시간을 잘 못 알려준 겁니까?」
「같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들과 내가 같이 갈 길은 물결이 지워버리고 없어져 버렸으니.」


<18>
    

간만에 맞는 내음. 부드러운 모래. 그 끝을 알 수도 없이 부서져 사라지는 파도. 어둠과 함께 보이지 않는 그 깊은 공허함과 함께 미궁으로 흘러간다 흘러 흘러 점점 서서히 그곳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내 뒤에 있지? 이젠 보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응, 넌 내 바로 앞에 있어.」
「네가 갖고 있다는 그 보물. 그게 원래부터 네 것이든 아니면 빼앗고 돌려주지 않은 것이든 난 상관하지 않아. 지금도 갖고 있지?」
「과연, 미학으로 형상화된 그것은 시간과 장소의 틈에서 잃어버리지 않지. 비록 낡고 부서지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말이야」
「이젠 내게 그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어. 바로 묻지」
「그래」
「그 보물이라는 게 혹시... 거울이야?」
「마치 무엇을 비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군. 분명 무엇을 담아내긴 했었지. 하지만 아니야. 오히려 점점 더 감추고 숨기고 말았지.」
「그럴 수밖에,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본판에 꿰매고 덧발라줘야 하니까.」
「어찌 그 치명적인 것을 난 여태 벗을 수 없었는지...」

뒤쪽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내 뒤에 있는 놈은 천천히 앞으로 손을 뻗었고 둥그런 그것을 건넸다. 그래, 가면이었다. 깨지고 부서진. 그리고 수업이 덧댄. 내 삶의 본질이었던. 나의 모든 순간이었던. 하지만 현재가 될 수 없었던. 영원히 손 닿을 수 없었던.

「두려웠던 거야. 가면을 완전히 벗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까.」
「그래. 나의 영혼은 과거를 붙잡고 있느라 현재에 없어. 그런데도 현재란 시간에 물들어버린 거짓된 과거의 가면이, 깨지고 갈라지고 매번 벗겨져도 정작 나는 완전히 내려놓을 용기가 없었어. 그건 과거에 존재해온 스스로에 대한 배반이니까.」 
「덕분에 나도 이렇게 같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말이야.」
「이젠 시간이 없어. 곧, 내 입을 통해서 말이 나오지 않게 되고 말 거야. 마지막 질문만이 남았어. 너와 나의 증명의 과업을 통해 나는...우리는... 망각의 끝에 어떤 최후를 맞게 되지?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건가?」
「망각의 앞에 결말을 묻는 것은 상당히 우문이지. 넌 계속 그래왔듯이 날 영영 잃어버리게 될 거야.」
「.....」
「허어, 벌써? 뭐, 그래도 찾지 못함에 안타까워 말아. 그리 괴로워하며 손을 내젓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 
「이미 듣질 못하는 군, 벌써 귀와 눈높이까지 왜곡되고 말았나. 어이, 마지막으로 몸부림치려고 해도 소용없어. 너도 각오를 하고 왔잖아.」
「.....」
「곧 네 어리석음이 머리 꼭대기까지 지배할 것 같으니 마지막 대답은 해주지. 원한다면 돌아가서 그것을 쫓아. 네 모든 집중과 집념을 다해서 말이야. 그럼 그것들은 네게 새로운 실마리와 조언을 주겠지. 그럼 더욱 선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될 거야. 그럼 그때서야 손을 위로 올리고 크게 흔들면서 소리치는 거야!」
「.....」

「아아! 나의 레테(Lethe)여..」     


<끝>


지원 : 소설부문
성명 : 강해서
생년 : 199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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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010-5706-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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