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회는 앉아서 가고 싶다.

by 지우 posted Oct 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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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회는 앉아서 가고 싶다.


 

1.

 

새빨간 원피스가 내뿜는 빛이 너무 강렬해 원회는 눈을 감았다.

지하철에 들어와 벌써 30분 째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바로 전 역에서 들어와 자기 옆에 서있던 저 여자는 1분도 채 안 돼 앉아가고 있다. 하필, , 자신이 서있는 바로 옆 자리란 말인가. 눈살을 찌푸리며,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1시간 동안 못 앉고 있는데, 고작 1,2분밖에 기다리지도 않은 사람이 저렇게 앉아버리면 그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새치기 한 것 같아 밉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래서 원회는 바로 자기 앞에, 거울을 꺼내들고 립스틱을 덧칠하고 있는 여자를 마구 째려봤다. 하지만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립스틱을 덧칠하는 그 여자의 두 눈이 자기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괜히 두리번거리는 척 딴청을 피웠다. 째진 눈매와 과감할 정도로 붉은 옷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 그의 어깨를 다시 한번 움츠러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회는 그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저 말없이 차창밖을 볼 뿐이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누구는 한 자리에 서서 죽어라 기다려도 한번 앉아보지도 못하는데, 누구는 뭐 한 게 있다고 열차 안에 들어오자마자 빈자리가 나서 쉽게 앉아간다. 이건 뭔가 잘못 됐다. 원회는 이런 불공평한 현실에 분개하며 자신이 화났단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새빨간 원피스가 무섭다는 이유로 원회는 자기 앞에 앉아 벌써 30분 째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는 두터운 푸른색 정장을 입고, 두툼한 턱살을 턱하니 보이게 고개를 뒤로 젖혀 졸고 있다. 편하게 자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고, 덩치가 거대해 얼핏 보기에도 한 명분 이라기보다는 1.5인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졸고 있기 때문에 원회가 노려본다고 해도 뭐라 할 염려가 없다는 점이 남자를 노려보는 가장 큰 이유다. 원회는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뻔뻔할 정도로 남자를 마구 쏘아봤다.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처음 보는 사람은 원래 코에 구멍 없이 살던 남잔데 원회가 눈빛으로 콧구멍을 뚫어준 줄 알겠다.

원회는 눈에 하도 힘을 줘서 미간의 주름이 깊게 파이고, 안면 근육은 땡기고, 눈알이 터질 듯 아파올때서야 이만큼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눈에 힘을 풀었다. 한동안 힘을 쓴 원회는 혹시라도 자기가 못 본 빈자리가 있을까 혹은 곧 떠날 것 같은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다. 하지만 꽝이다. 원회는 자신의 불운을 저주했다. 어떻게 매번 이런 열차만 골라 타는 건지. 열차 안에 모든 좌석은 꽈 차있고 자리마다 한두 명씩의 대기자가 줄 서 있다.

자리가 나면 좋겠다. 그래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자리에 앉고 싶어 하지만 원회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특히 더 앉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벌써 7개월째 의정부와 신촌을 왕복하고 있다. 9개 지하철 노선 중 가장 오래된 1호선을 회룡역에서 타고 출발해 9개 노선 중 유일하게 내선순환행이 있는 2호선을 시청에서 갈아탄 뒤 신촌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시간 15분 정도. 그렇지만 이건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시간이다. 가는 길에 인천 방면으로 가는 1호선이 늦게 오면, 오는 길에 시청에서 의정부행, 동두천행, 소요산행, 양주행이 아니라 성북행, 석계행, 동묘앞행, 청량리행만 오다보면 1시간 반은 훌쩍 넘기고 만다. 그렇게 1시간 반씩 걸려 오고가면 하루에 3시간은 지하철에서 보내는 거다. 3시간이다. 무려 3시간. 할 거 없이 무료하게 서있으며 시간 낭비하는 건 둘째 치고, 다리가 아파 죽겠다. 1,2시간이면 버틸 만하다. 하지만 3시간이라니! 그것도 7개월 동안 거의 매일. 이건 너무 하지 않나. 원회는 헌병출신이여서 오래 서있는 것에 자신이 있다. 하지만 지금 원회는 하루 8시간 근무만 서면 알아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군대에 있지 않다. 근무마냥 하루에 3시간씩 꼬박꼬박 서서 버티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또 해야 되는 사회에 있다. 군대보다 못한 사회라서 원회는 아픈 무릎을 몇 번 두드린 후 신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노선표를 살폈다. 신촌을 가는 이유는 그곳에 몸뚱이만 있으면 어떻게든 취직을 시켜준다는 유명한 '직업소개소' 가 있기 때문이다.

원회는 대학졸업 후 바로 취직을 못하고 변변찮은 알바로 1년을 보내면서 용돈을 벌다가 이런 푼돈으로는 폼 나게 살 수 없다고 알바를 그만 뒀다. 그 뒤 자신의 삶을 질을 높여보겠다며 자격증 취득에, 스펙 쌓기에 1년을 보냈다. 하지만 시대가 국제화 시대라 영어가 기본이었고 기본부터 닦기 위해 다시 1년을 보냈다. 근데 영어공부를 해보니 외국은 너무 정이 없고 한국인은 역시 한국이 최고라며 안정성을 추구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 준비로 갈아타게 됐다. 공무원 시험 준비에 또 1년을 보냈지만 성과가 없었고, 그러다보니 대학 졸업 후 4년이 훅 지나가버렸다. 그 사이 원회의 부모님의 인내가 바닥났고 결국 원회는 최후의 보루로 '직업소개소'에 다니게 된 것이다.

이제 8정거장만 남았다. 원회는 신촌부터 정거장을 하나씩 꾹꾹 마음속에 눌러 담듯 샜다. 더 이상은 알바도, 영어공부도, 스펙도, 시험도 할 수 없다. 지하철을 타고 직업소개소로 가는 길 밖에는.


 

2.

 

직업소개소는 일종의 학원이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 학원을 다니듯이 사회에서 취업을 못하는 백수, 백조들이 취업을 하기 위해 직업소개소에 온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를 했던 원회는 언, , 외와 탐구영역으로 채워져있던 색색의 빡빡한 시간표를 상상했다. 하지만 직업소개소의 시간표는 단순하다. 원회는 7개월째 '발성''달리기' 2가지만 배우고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건 남들보다만 크게 외치면 되고, 남들보다만 빠르게 달리면 돼요."

입학 첫날, 옆으로 쭉 찢어진 가자미눈을 한 강사는 그렇게 말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 모두가 면접에서 수도 없이 떨어져봤을거에요. 난 재능 있고 준비된 것 같은데 왜 떨어졌나. 그건 여러분들보다 여러분 옆에 있던 그 사람이 더 잘나보였기 때문이에요. 면접관 입장에서 보면 사원을 뽑는 건 주관식이 아니라 선택형 객관식이에요. 그러면 면접관들은 수많은 객관식 보기 중에서 어떤 걸 답으로 뽑을까요?"

수강생 전체는 가자미눈에 집중을 하고 답을 기다렸었다.

"그건 목소리크고 발 빠른 사람들이에요. 면접관들이 신도 아니고 1,2시간 면접으로 수많은 입사후보생 중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면접관들은 자신들이 가장 많이 보고 주의를 기울인 보기를 답으로 생각하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를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에 더 신경을 써야 돼요. 옆에 있는 그 사람보다 더 잘나 보이기 위해서 말이죠. 따라서 운빨도 중요해요. 하필 내 옆에 3단 고음 아이유나 달리기의 왕 치타가 있으면 게임 끝난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기도해요."

그런 이유로 직업소개소에 다니는 수강생들은 아이유까진 아니더라도 버럭 이경규 정도는 되길 바라며 하루에 1시간씩 벽면을 보고 크게 소리를 외쳤고 치타까지는 아니더라도 토끼 정도는 되길 바라며 1시간씩 5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뒤 다시 소리를 지르고 다시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해 총 4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수업을 받다보면 이건 뭐 체대준비생이 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수강생들은 이게 취업이 될까 싶다가도 이렇게 연습하다 정 안되면 올림픽에라도 출전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수업을 듣는 것이다.

어제 열심히 수업을 들어선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구멍은 따가웠다. 이제 3정거장이면 되는데도 도저히 버티기가 어려웠다. 원회는 정말 앉고 싶어서 이대로 1.5인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무릎에 주저앉아 버릴까 생각했다. 그때다. 원회가 노리고 있던 1.5인분의 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엉덩이만 들썩이는 게 아니라 가방까지 주섬주섬 챙기는데 다음 역에서 내리려는 게 분명하다. 원회는 기뻤지만 자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주변 경쟁자들의 쓸데없는 관심만 살까봐 기쁜 내색을 숨겼다. 영역표시를 하는 수컷처럼 여태까지 자신이 지켜온 자리를 탐내지 말라고 엄포를 부리듯 사방을 주시했다.

드디어 새빨간 원피스 옆에 남자가 일어섰다. 고진감래라더니 어찌나 체구가 큰지 1명이 일어났는데 2명분의 자리가 난 것 같다. 견물생심이라고 원회의 주변 사람들은 자리를 보자 언감생심 그 2명분의 자리를 탐냈지만, 사필귀정이라고 자기가 고생해서 얻은 자리는 자기만의 것이라 혼자만 앉을 생각이다. 하지만 측은지심이 있어 여태껏 1.5인분 때문에 0.5인분으로 압축해 앉아있던 새빨간 원피스 만에게는 0.3인분 정도 자리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원회가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하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저 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휙 튀어나와 1.5인분의 자리에 먼저 앉아버렸다. 지난 7개월간 단련된 그의 목에서 분노의 고함이 스파르타 인처럼 솟구쳐 나올 뻔했다. 그러나 그 동안 너무 갈기만 해서 오히려 날이 약해진 칼날처럼 원회의 목에선 기원전 900년의 스파르타인 대신 기원전 900년부터 스파르타인이 쓰던 골동품 같은 소리가 원회의 분노를 초라하게 나타냈다. 원회는 결국 자신의 앞자리에 앉은 그 남자를 노려봤다. 마침 그 남자도 고개를 들어 원회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소리쳤다.

!”

 


3.

 

미안. 네 자린 줄 알았으면 안 뺐는건데 미처 몰랐다.”

아니야. 모르고 그런 건데 어쩔 수 없지.”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는 김강경이다. 원회와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3년 동안 2번이나 같은 반을 했지만 그렇게 친하진 않은 사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2번이나 같은 반을 한 사이라서 왠지 반가워야만 될 것 같았다.

너 멋있어졌다. 잘 차려입고 다니네.”

원회는 강경의 푸른 재킷을 칭찬했다. 빈말이 아니라 학창시절엔 키 작고 볼품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7,8년 만에 보는 강경은 아주 멋있어졌다. 원회는 역시 옷이 날개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 고작 60만 원짜리야.”

원회는 재킷을 톡톡 터는 강경을 쳐다보며 말도 안 되게 비싼걸 보니 역시 옷이 아니라 날개였다고 생각했다.

근데 너 요즘 뭐해? S대 나오지 않았었냐?”

요즘 뭘 하고 싶은데 딱히 뭐 하는 건 없고,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고 있진 않으니까 뭔가를 하고 있긴 하는건데 도대체 요즘 자기가 뭘하는 건지 모르겠는 원회는 뭘 하느냐는 질문이 비난 섞인 뭐 하고 있냐로 들렸다. 게다가 강경의 말마따나 자신은 학창시절 공부 좀 했다는 S댄데 학창시절 나보다 공부도 못했던 놈한테 뭐 하고 있는거냐란 질문이나 듣고 도대체 지금 정말 뭐 하고 있는 건지 짜증이 났다. 그래도 같은 반을 두 번이나 한 사인데 짜증을 낼 순 없고,

으응, 그냥, 쉬고 있어.”

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냐. 쉬는 것도 좋지. 근데 너 계속 서있기 힘들지 않냐? 잠깐만 기다려봐.”

갑자기 강경은 자기 양 옆을 둘러봐서 오른쪽에 새빨간 원피스와 왼쪽에 약간 얼빠진 듯한 표정의 남자를 확인했다. 원회는 얘가 지금 뭘 하는지 어리둥절하게 그저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경의 왼쪽에 있던 얼빠진 표정의 남자가 사라졌다.

됐다. 빨리 앉어.”

강경은 상황파악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원회의 옷자락을 집어 당겨 자리에 앉혔다. 자리에 앉아서도 이게 어찌된 일인지 원회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자리에 오랜만에 앉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여기 있던 남자는 어디로 간거지?”

어디 갔긴, 바로 네 앞에 있지.”

그러고 보니 원회가 앉은 바로 앞에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남자가 바로 아까까지 자리에 앉아있던 얼빠진 표정의 남자다. 원회는 해명을 구하는 눈으로 강경을 차다봤다. 강경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더니 원회에게 귓속말을 했다.

위험했어. 옆에 여자는 자격증이 꽤 대단한 것 같아.”

자격증?”

. 저 여자 여기 열차 타자마자 바로 앉지 않았어? 줄타기 능력이 장난 아니야. 300점은 그저 넘겠어. 저런 여자는 한번 앉으면 도통 일어나지를 않지.”

원회는 도통 이게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은 왕년에 공부 좀 했다는 놈이라서 자기보다 못했던 강경에게 뭐라 다시 묻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같이 빈자리 없는 세상에서 앉아가기가 좀 힘드냐. 나도 지하철 타기 350점에 앉기 1, 뺏기 1급을 겨우 땄잖아.”

뭐가 몇 점이니, 몇 급이니 하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걸 보니 분명 뭔 자격증이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은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라 충격을 먹었다. 도대체 언제 자신이 모르는 시험과 자격증이 생겼단 말인가. 자신도 시험 준비, 자격증취득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한 사람인데. 원회는 자기가 분명 공부했지만 기억을 못하는 거라고 머릿속의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아무래도 국가공인은 아닌 것 같은데 사설인가? 근데 지하철은 국영 아닌가?

근데 넌 자격증 없나 보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1급이니 좋은 것이겠거니, 350점을 자랑하니 만점은 400점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찬물을 끼얹는 듯한 질문이 들렸다.

힘들게 서있는것도 그렇고, 나한테 쉽게 자리 뺐긴 것도 그렇고 아직 아무 준비도 안했나봐?”

아무렇지 않게 톡툭 던지는 강경의 그 말에 원회는 자존심은 뚝뚝 꺾였다. 거듭 밝히지만 왕년에 원회는 한 공부한 모범생이었고 강경은 그전 그런 학우 1이라, 시험 직전에 그거 시험에 나올 건데 너 아직도 공부 안했어?’ 라는 식의 대사는 자기가 학우 1한테 하던 건데 어쩌다 상황이 역전된 건지 원회는 억울하기만 했다.

. 바빠서. 딴 거 하느라.”

바쁘다고 둘러대면서 그래도 놀기만 한 건 아니라고 바빠서뒤에 딴 거 하느라를 붙여 말했다. 원회는 아직 내려야 될 역도 아닌데 다음 역에서 내릴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 벌려고 산업전선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도 피곤한테 지하철에서만큼은 앉어야 되지 않겠냐?”

왕년에 그저 그런 학우 1은 끈질기게 왕년에 모범생에게 말을 걸었다.

, 근데 내가 지금 내려야 돼서.”

지하철에서 앉아가고 싶으면 연락해.”

지하철에서 내리려는 원회에게 강경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지하철에서 내린 원회는 그제야 한숨을 푹 쉬고는 명함을 확인했다.

‘7급 공무원 김강경

자기가 알던 7년 전의 강경하고 7급 김강경은 너무 달랐다. 원회는 명함을 꾸깃꾸깃 접어선 주머니에 넣고는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4.

 

언제나처럼 원회는 열차보다 먼저 역 안에 들어가서 늦게 오는 열차를 맞이했다. 열차 안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텁 막히는 걸 느꼈다. 열차는 말 그대로 만선이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들어갈 수 있었는지. 누군가 바깥에서 억지로 쑤셔 넣었다고 밖에는 생각이 안 들었다. 원회는 자기 몫의 몸뚱이를 열차에 더 초과시켰다.

어제는 평소보다 두 배 더 많은 계단을 올랐고 소리도 2배는 더 크게 질렀다. 이게 다 직업소개소옆에 새로 생긴 직업취득원때문이다. 직업취득원은 직업소개소와 비슷한 류의 학원이다. 동종업계가 걸어서 10분 거리 내에 생겼으니 두 학원 사이에 경쟁이 곧 시작됐다. 직업취득원은 후발주자답게 선발주자와는 다른 차별화된 전략을 만들었다. 계단 오르기와 소리 지르기까지는 똑같지만 눈치 보기 훈련을 더 추가해 매일 수강생들을 모아 눈치게임을 시켰다. 근데 이 눈치게임이 수강생들 친목도모도 되고 수업만족도도 높아서 사람들 사이에 직업소개소 보단 직업취득원이 좋다는 평이 돌고 있나 보다. 그래서인지 요즘 직업소개소는 수강생들을 뺏길까 두려운지 종래의 수업량을 2배씩 늘려서 열심히 지도하고 있다. 그래서 계단 오르기도 2배 더 힘들어졌고 소리 지르기도 2배 더 힘들어져서 원회는 평소보다 4배는 더 앉고 싶었다.

겨우 지하철에 탔지만 머리가 어질 거려서 균형 잡기가 힘들었고 자꾸만 눈이 감기고 몸이 휘청거려서, 서있다기 보다는 서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앉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 이 생각이 들었을 때 원회는 어제 받은 명함을 떠올렸다. 뚝뚝 부러진 자존심이 만류했지만 죽으면 자존심도 없다는 생각에 주머니를 뒤적거려 명함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자기 자존심만큼이나 구겨진 종이엔 ‘7급 공무원 김강경이라 쓰여 있고 그 밑에 전화번호 11자리가 적혀있었다.

지하철에 모든 자리엔 사람들이 앉아있고 그 앞에도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다. 간혹 눈치 빠르고 염치없는 이들은 뒤에서 있다가 어떻게 쏙 끼어들기라도 하는데, 눈치도 없고 염치도 없으면 실패하더라도 어설프게라도 시도하겠고, 염치도 있고 눈치도 있으면 해볼까 말까 망설이기라도 할 텐데, 원회는 눈치는 없고 염치는 있어서 그저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만 했다. 혹여나 자신이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였더라면 쉽게 앉아갈 수 있었을 거다. 사회가 노인들을 우대해줘 노인좌석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약자를 보호하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러나 그래서 20대의 건장한 원회는 아름답게 죽어가고 있다. 빈자리는 정해져 있는데 약자들은 우선 앉혀야 되니까 그만큼 기회는 줄어든다. 그래서 못 앉는 자신은 약자가 아닐까 자문해봤지만 어쨌든 자신은 20대고, 건장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정말 못 앉으면 죽겠다. 다리는 풀릴 듯 계속 힘이 빠지고 목구멍에선 신내 나는 역한 물이 올라오자 원회는 핸드폰을 꺼내 김강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존심이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어제 205302개의 계단을 오른 다리와 벽을 향해 5308번 소리친 목구멍이 자존심의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통에 전화를 걸 수 밖에 없었다.

 


5.

 

지하철에 앉기 위한 3요소는 알고 있지?”

거들먹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배알이 꼴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하철에서 다시 만난 강경은 여전히 사람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글쎄? 인내랑 끈기... , 행운?”

몰랐지만 모른다고 말하기 뭣해서 대충 웃으면서 대답했다.

?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자리보기, 뺏기, 오래 앉기. 이걸 몰라?”

자기가 설마 진짜 행운이라 생각해서 행운이라 대답했을까. 그냥 웃자고 한 소린데 너무 정색하고 자기를 무시해서 원회는 짜증이 났다. 넌 얼마나 잘났냐고, 3대 영양소랑 빛의 3요소, 색의 3요소, 소설의 3요소, 르네상스 3대 거장은 아냐고 따지려다가, 또다시 다리랑 목이 말리는 바람에 따지지 못하고 대신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모를 수도 있지. 솔직히 지하철 자리 앉기가 뭐라고 시험까지 있냐.”

? 참나, 네가 지하철을 우습게 아네. 네가 지하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직 모르지? 지하철은 덕을 갖추고 예를 지키고 있으니 군자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봐봐. 차장과 지하철은 서로를 믿어야만 운행이 가능하니 이를 군신유의라고 하지. 한 개의 노선을 두고 여러 열차가 이용해 열차끼리 서로 신의가 있어야 하니 이것이 붕우유신이지. 65세 이상 노인에게 요금을 받지 않으니 장유유서를 지키며 약자를 위한 좌석을 따로 마련하니 겸양지덕을 갖췄지. 또한 뒷 차는 앞 차를 앞지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을 하니 이건 안분지족이고 나아감은 알 되 후퇴를 모르니 임전무퇴라고!”

한바탕 강경의 말에 원회는 얼이 빠질 정도였다. 한문 시간 외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들이 지하철과 이렇게 연관이 깊었다니. 원회는 재빠르게 강경의 말에 수긍했다.

미안. 내가 미처 몰랐다. 자리보기, 뺐기, 오래 앉기. 노트에 메모하고 밑줄 쳤어. 그 다음은?”

뭐가 그 담이야. 그게 끝이지. 대학 갈 때랑 똑같아. ,,외 말고 다른 게 뭔 필요야. 예술, 종교, 철학, 도덕, 예의 이런걸 다 버리고 시험에 나오는 것에만 집중해.”

자기보다 공부도 못했던 게 언,,외 운운하는 게 고까웠지만 강경은 자기가 언제 올챙이였냐고 반문하는 개구리 같아서 굳이 올챙잇적 얘기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자리 보기란 지하철에서 앉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일이야. 모든 지하철 칸이 똑같이 생겼다고 그 칸마다 똑같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건 아니지. 어떤 칸은 사람이 많고, 어떤 칸은 적고, 또 똑같이 북적거리더라도 어떤 칸은 곧 내릴 사람들로 가득하고, 어떤 칸은 종점까지 갈 사람들이 수두룩하지. 이런 걸 미리 예측해서 최대한 많은 빈자리가 빠른 시간 내에 날 칸을 찾는 거야. 요즘은 빈자리 자체가 워낙 없는 레드오션 시대인데다 직접적으로 자리를 얻는 능력이 아니라 소홀히 하기 쉬운데 그래도 운이 좋으면 블루오션을 찾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손쉽게 앉아 갈 수 있는 편리한 능력이지.”

설명만 들어도 귀가 솔깃하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걸 참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치밀한 시장조사가 만드는 정보력에 달려있지. 예를 들어 1호선을 봐. 사람들이 주로 많이 내리는 역은 환승역이야. 회룡에서 시청까지 봤을 때 환승역은 도봉산과 창동, 석계, 청량리, 회기, 동대문, 동묘앞역이야. 이때 환승 칸은 창동 8-2, 도봉산 2-1, 석계 10-4, 청량리 10-4, 회기 9-3, 동대문 9-3, 동묘앞 9-2번이지. 그렇다면 이 칸엔 사람이 많아도 환승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갈 테니 미리 줄타기를 하는 것도 좋지. 또 회룡-시청 사이에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성북, 종로3, 종각역도 염두에 둬야지.”

이럴 수가. 원회는 환승역에 모든 번호를 쭉 외워서 말하는 강경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이건 마치 학창시절 주기율표를 외우던 자신의 모습과 똑같지 않나.

줄타기 검정 시험, SAT(Searching Appropriate seat Test)는 매월 11일에 이뤄지고 한 달 전부터 철도청에서 접수할 수 있어. 11은 철로를 형상화한 날이지. 응시료는 5000원이고 필기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399점 만점이야.”

“399?”

. 400점은 너무 숫자가 높아 보인다나? 399로 줄이면 사람들이 부담감이 덜해 시험 보러 많이 온데.”

4만 원짜리 바지와 399백 원짜리 바지를 떠올린 원회는 과연 그렇다고 또 감탄했다. 원회는 배워가는 즐거움을 느끼며 재촉했다.

자리 뺏기 자격증은 뭐야?”

“TOEIC(Train Of Extortion Instant Contest)은 직접적으로 자리를 뺐을 수 있는 능력을 알아보는 거야. 자리 보기로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봐도 빈자리가 없을 경우엔?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야지. 내가 널 만나서 자리를 뺏은 것도 이 시험을 준비했기 때문이야. 필기 50, 실기 50인데 필기에선 만만한 사람을 찾는데 도움이 되도록 경제상태, 사회적 지위를 가늠하는 법을 보고 실기에선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밀치고 그 자리에 내 엉덩이를 쑤셔놓는 법을 보지.”

원회는 강경을 만난 첫날을 떠올리고 표정이 얼빵했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빼앗는다고? 그러면 내가 자리를 뺏은 사람은?”

서서 가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서가야 되는 걸? 빈자리는 하난데 사람이 둘이면 한명이 앉는 순간 당연히 다른 한명은 서가야지. 너 지금 상대방을 동정하는 거라면 그러지 마. 너 이제 나이도 있는데 네 부모님도 생각해야지. 너 언제까지 서서 다닐래. 너도 이제 앉아갈때가 됐잖아.”

너무도 슬퍼보였던 얼빵했던 남자가 떠올라 뭐라 반박을 하려했지만 그 순간 어머니가 자기를 보고 한숨짓던 모습이 생각 났다. 원회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러면 오래 앉기는?”

“TOFLE(Train On First Land Endure)은 빈자리에 앉은 다음 오래 버티는 능력을 시험봐. 네가 남의 자리를 뺐듯 남도 네 자리를 뺏을 수 있는 거잖아. 게다가 요즘은 지하철 선로가 경제마냥 불안정해서 오늘 앉아가더라도 내일이면 서서가는 세상이잖아. 한번 앉아서 종점까지 가는 게 목표지.”

엉덩이에 힘만 주면 되지 않나. 이건 자리 뺏기 보다는 할 만할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웠다.

노인들이 들어왔을 때 책 읽는 척하기, 임산부 앞에서 자는 척하기, 나보다 강해보이는 상대가 왔을 땐 나보다 약해보이는 상대로 주의 돌리기 등 다양한 기술이 있어. 예전엔 단순하게 엉덩이에 힘주는 것만 시험 봤는데 그런 시대는 확실히 갔지.”

안도의 한숨은 곧 절망의 한숨이 되었다.

다른 건 없어?”

원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졸랐다.

역시 그래도 S대 나온 애는 다르네. 정시 말고도 수시 같은 게 있으면 그것도 준비하려는 거지? 편법이긴 한데 위장하기, 부모님 빽쓰기, 창업하기 등이 있어. 하지만 워낙 특이해서 잘 쓰지는 못할 거야.”

괜찮으니까 말해줘.”

위장하기는 지하철 안에 노약좌석을 노린 거지. 흰 가발, 목발 등만 있으면 쉽게 노약좌석에 앉을 수 있잖아. 다만 적발될 경우 수반되는 위험이 큰 도박이지. 빽쓰기는 무슨 빽을 쓰느냐고 중요해. 지하철에서 자리가 나면 빽을 던져서 원격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거야. 재벌가 사모님들이 들고 다니는 빽은 워낙 고가에 휘황찬란하잖아. 그걸 던지면 어느 사람이나 피하기 마련이라, 그런 좋은 빽을 구하는 게 관건이지. 창업하기는 이동의자를 준비해서 지하철 안에 너만의 새로운 자리를 만드는 거야. 속편해보이지만 이동의자를 끌고 다니기가 웬만큼 힘든 일이 아닌데다 지하철 공익들이 그런 이동의자를 단속해서 유지하기가 힘들어.”

벼랑 밑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이었지만 막상 정말 지푸라기를 받아보니 지푸라기 보다는 아무래도 동앗줄이 낫지 않나 싶었다.

너무 어려운데? 그냥 한자리를 정해서 그 자리가 나길 꾸준하게 기다리는 노력을 하면 안 될까?”

그렇게 해서 언제 앉으려고? 너 임마 지금 세상이 노력하면 노력하는 대로 이뤄지는 세상인 줄 알아? 너처럼 안이하게 생각하면 평생 못 앉아. 누군 앉아가는데 넌 서가잖아. 넌 그게 억울하지 않아?”

원회가 잡으려는 게 썩은 동아줄이었는지 강경의 말투는 싸늘했다.

그냥 좌석 좀 많이 만들지 왜 이렇게 빈자리가 많아서 고생이냐.”

답답해서 중얼거린 건데 강경은 강하게 반박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생각해봐. 지하철이 처음 나왔을 땐 1호선 하나였어. 근데 지금은 서울내 노선만 12개야. 예전보다 거대하게 성장한 대한민국에 맞춰 지하철도 성장한 거야. 더 많은 지역을 다니기 위해서 지하철은 예전보다 더 빨라야했지. 그러기위해선 지하철은 다이어트를 해야 했어. 체중이 줄어야지 빨리 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좌석을 함부로 못 늘리는 거야. 대한민국이 더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러면 빨리 다니지 말고 좀 천천히 다니면 안 되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강경이 또 그 놈에 경제성장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운운하며 지하철에 반대하면 매국노라고 몰 기세라 꾹 참았다.

그러면 한번 해봐.”

이건 또 뭔 소린가. 강경은 지하철 한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하철 교육은 실습이 가장 좋지. 어디 한번 저 사람 자리를 뺐어봐. 너도 쉽게 뺏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냥 엉덩이에 손을 넣어서 힘차게 던진 다음 재빨리 네가 앉으면 돼.”

강경이 가리킨 곳엔 유난히 왜소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촌스런 2:8 가르마에 낡아빠진 갈색재킷에 반쯤 벗겨진 머리, 어쩌다 세탁기에 옷과 함께 들어가서 함께 쪼글아듯한 50대 중반의 남자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원회 자신이 보기에도 만만해보였다. 하지만 어쩌다 길가다 어깨를 부딪치면 먼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고개 숙을 것 같은 남자지만, 아버지뻘 되는 남자의 고개 숙여진다는 건 너무 민망한 일이라서, 자신은 감히 어깨도 부딪히지 못하고 조심히 비켜나갈 것 같다. 근데 이런 남자의 자리를 뺏으라니. 아무래도 황송하고, 송구한 일이라 고개가 조아려지는데 강경이 자꾸 재촉했다.

명심해, 여긴 야생동물이 판치는 정글이나 마찬가지야. 너보다 못난 놈은 자리에 앉을 필요도 없어. 네가 더 잘났으면 자리를 뺏는 거야.”

강경의 목소리가 너무 강압적이라, 그리고 어제 세계기록을 달성한 다리가 세계기록에 등재 될 만큼이나 아파서, 또 집에서 한숨 쉬고 있을 부모님이 생각나서 원회는 앞으로 갔다. 자기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안하면 강경이 또 뭐라 할 것 같아서, 하는 시늉이라도 내자고 앞으로 걸어가 아버지뻘 되는 남자 앞에 섰다. 좌석과, 아버지뻘 되는 남자 사이를 떼어놓는 자신의 손이 부끄러워 원회는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안 될 거 빨리나 끝내자는 마음으로 원회는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남자가 자리 밖으로 튕기듯이 나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원회는 우물쭈물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를 몰랐으나, 남자가 튕겨나가는 순간 강경이 뒤에서 자신을 밀어줘서 쓰러지듯 빈자리에 앉게 됐다. 순식간이다. 원회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자 강경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해.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원래 처음만 어려운 법이야. 앞으로 열심히 해봐.”

 


6.

 

강경의 말처럼 처음만 어려웠을 뿐 그 다음은 쉬웠다. 처음엔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어영부영 서성거렸지만 몸 둘 바를 몰라 하루 종일 지하철에서 서있기만 했더니 몸이 몸 둘 곳을 찾기 시작했다. 어깨가 축 늘어져 지쳐 보이는 아저씨,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아직 앳된 청년,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원회는 계속해서 누군가의 자리를 뺏어 앉았다. 특별한 요령을 배운 건 아니지만 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그 동안 계단 오르기를 한 덕에 기초체력이 좋아졌고 소리를 지르다보니 깡다구가 생겨서 쉽게 배울 수 있는 거라고 강경은 말했다. 아직 줄보기 능력은 서툴러 지하철을 타자마자 빈칸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신 자리 뺏기 능력은 타고난 것처럼 뛰어나 열 번에 여덟 번은 성공했다. 이제는 강경이 없어도 자기 혼자 힘으로 열 번에 여덟 번은 앉아가게 된 원회는 나날이 일상이 여유로워짐을 느꼈다. 계단 오르기도 예전에 비해 수월하게 했고 벽에다 소리를 칠 때도 힘이 넘쳤다. 모두가 앉아가지 못하고 누군가만 앉아갈 수 있다면 내가 그 누군가가 되자. 원회는 이 말을 명심하고 또 명심했다. 너무 박정한 말 같기도 했지만 3시간이나 지하철을 서서가는 자기 다리도 동정할 필요가 있었다.

원회는 직업소개소를 다닌지 9개월째가 되는 날에도 앉기 위해 지하철을 타자마자 목표물을 물색했다. 얼마 뒤지지 않아 한 아줌마가 걸렸다. 몸집이 풍선처럼 부픈 아줌마다. 무거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둔할 테고 부풀어도 풍선은 풍선이니 쉽게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달 전, 자리뺏기를 처음 할 때는 오로지 상대방의 체격과 나이만 보고 덤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몸집이 작고 나이가 많아도 깐깐한 성격의 노교수라면 쉽게 자리를 뺏길 리 없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젊어도 온순하고 착하게 생긴데다가 잘하는 것 하나 없이 보이고 좀 모자라기까지 해 보인다면 자리 뺏기 좋은 사람이다. 원회가 고른 아줌마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촌스런 옷 스타일 이여서 만만해 보였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단박에 아줌마 엉덩이 밑으로 손을 집어 었다. 아줌마는 갑자기 외간남자의 손이 들어와서 놀라는가 싶더니 원회가 힘을 주자, 어라, 예상외로 아줌마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원회는 당황해 더 힘을 줬다. 그러나 잠시 들썩이기만 했을 뿐 아줌마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오래 앉기 자격증? 원회는 아줌마를 쳐다봤다. 아줌마는 힘겹게 땀을 흘리며 조그맣게 집에 애가 셋이나 있는데...” 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원회는 자신감을 잃지 않고 더 힘을 줬다. 몇 차례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마침내 아줌마는 일어서고 원회는 그 빈자리에 자신의 몸을 넣을 수 있었다. 자리에서 튕겨나간 아줌마는 막내가 이제 초등학교 입학하는데...” 하며 중얼거렸고, 너무 많이 힘을 주고 중얼거렸는지 땀을 온 몸에, 눈 밑에도 흘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쫓겨난 아줌마는 풍선 같은 몸에 비해 풍선을 묶은 실 같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풍선만큼의 자리에 앉은 원회는 왠지 가슴이 아파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자세로 앉았다. 에드벌륜 자리에 물풍선이 앉은 꼴이라 빈공간이 많았지만, 빈공간이 많아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려도 몸에 부딪히는 것 하나 없었고, 아무것에도 부딪히지 않아 원회는 외로웠다.

신촌역에 도착해 직업소개소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원회는 도망가듯이 열차를 나갔다.

 


7.


학원에서 계단 오르는 것도, 큰소리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유난히 무릎 관절이 쑤시는 하루였는데 하필 오늘따라 수업은 더 힘들었고, 원채 몸이 안 좋은데 거기다 힘까지 빠지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원회는 집을 향했다. 학원에서 낮은 성취도를 보여줘서 원회는 자신이 한없이 작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지하철역에 평소보다 커 보이고 집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승강장 안도 축구경기장만큼이나 넓어보였다. 승강장 안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11명씩 2팀의 인원도, 거기에 3명의 주심, 부심도 없는 한산한 축구경기장은 쓸쓸해보였다. 너무 쓸쓸하고 또 조용하기까지 하고 피곤하기까지 해서, 원회는 그만 꾸벅 졸고 말았다. 아무도 원회를 깨우지 않아서 원회는 계속 꾸벅거렸다.

"빼에엑-"

원회를 깨운 건 엄청난 경적 소리였다. 뭐랄까. 분명 지하철 역 안에서 잠들었는데 자기가 자는 동안 누가 항구로 옮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타닉호 정도는 되는 배나 낼 법한 엄청난 소리가 들려서 원회는 잠에서 깨버렸다.

눈을 떴다.

원회가 본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큰, 입이 떡 벌어질만한 크기의 지하철이었다.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평소 열차보단 강아지와 고양이 정도의 차이로 느리게 오고 있었지만, 크기만은 고래와 멸치만큼 차이가 나는, 멸치쯤이야 4000만 마리라도 한 번에 덥석 삼킬만한 흰긴수염고래 같은 열차였다.

왈칵, 눈물을 흘렸다.

고래 같은 지하철 앞에서 원회는 한 마리 멸치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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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자

김지우, masic_eras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