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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作人)

 


 

지난 밤, 술에 취해 자취방에 들어왔을 때 아빠가 보였다. 방 안에 앉아 나를 노려보던 아빠는 오른손을 들어 내 왼쪽 뺨을 내리쳤고, 나는 눈을 감고 그대로 쓰러졌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빠는 방 안에 없었고 엄마가 내 짐을 챙기고 있었다. 왼쪽 볼이 살짝 튀어 올라 온 것이 느껴졌다.

엄마.”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박스에 내 짐들을 우겨넣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몇 통과, 문자가 와있었다. 어젯밤 나를 데려다준 과선배의 연락이었다.

어제 학교 수업이 끝나고 서둘러 자취방으로 향하던 중, 나는 학교 후문에서 PS와 다정히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은 P가 아닌, 같은 과 동기 S였다. SP와 잡고 있던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제야 P도 나를 발견했지만 그 손을 놓지는 않았다. SP가 더욱 세게 잡은 손을 빼내려고 낑낑 거렸다. 덫에 걸린 짐승마냥. 나는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PS는 내 곁을 지나갔다.

P는 나의 남자 친구였다. 아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그 끝에 얻은 자유가 준 가장 첫 번째 선물이었다.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와 말을 했고,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남자는 내 옆에 있었다. 나는 P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 단 한번도 P와 싸운 적이 없다. 아빠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P로부터 맞을 짓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모두들 P를 부러워했다. P가 한 여름에 바깥에서 내리고 있는 소나기를 함박눈이라고 해도 나는 그저 웃었다. 네가 눈이라면 그것은 눈이야. 아빠가 싫어하는 짓은 P에게도 역시 하지 않았고, P는 좋아해줬다. 그런데 P는 나를 때렸다. S와 꽉 잡은 그 손으로, 나를 훑어 내리던 그 눈빛으로, 내 옆을 지나갈 때 느껴지던 차가운 냉기로 나를 때렸다. 나는 맞았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맞아 심장이 온통 멍이었다. 아주 조금 정신이 들 때 내 앞에는 선배가 앉아있었다. 선배는 계속 욕을 했다. SP를 향해서 끊임없이 욕을 했다. 나와 가장 친한 동기였던 S, 그리고 그런 S를 짝사랑하던 선배는 우리 커플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P는 나에게 S와 선배가 잘 어울리지 않느냐며, 둘이 함께 잘 될 수 있도록 이어주자고 했다. 그런데 P는 결국 S와 손을 다정히 잡고 내 곁을 지나갔다.

너는 멍청하게 그걸 쳐다만 보고 있었어? 당장에 가서 그 새끼 뺨이라도 쳤어야지.”

선배는 소주잔을 거칠게 테이블에 내리쳤다.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P가 내 곁을 지나가는 동안에 P를 때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P를 향해 세상에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끌어 모아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감히 엄마가, 그리고 내가 아빠에게 그럴 생각이 없던 것처럼.

 

내가 어렸을 때, 파란색 대문이 아주 거칠게 열리던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 엄마는, 엄마 옆에 누워있던 나를 안아서 장롱 안에 넣었다. 그 안에서 눈을 비비고 어리둥절하게 있다 보면 아빠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살짝 열린 장롱 문 틈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끔찍했다. 내 목은 뻣뻣하게 굳어갔고, 다리는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 했지만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다. 내가 그 안에서 울면 아빠는 엄마가 아닌 나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니, 장롱 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엄마의 눈빛이 나에게 그렇게 알려줬다. 절대 소리 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항상 눈이나 팔뚝에, 보이지 않는 곳에 멍이 든 엄마와 어린 시절의 내가 집에서 평온하게 보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엄마의 멍 든 눈을 내가 달걀로 문질러주고, 냉장고 안에 있었던 그 달걀에서 더 이상 냉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 엄마의 다른 쪽 눈에는 또 멍이 들고는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일이 더 잦아졌고, 나는 더 이상 엄마가 장롱 속으로 나를 넣지 않아도 대문 소리가 거칠게 들리는 날이면 내가 알아서 장롱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장롱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를 볼수록 공포감은 더 커져 갔다.

아빠가 집에 들어와 망치를 찾던 날이 있다. 그 날은 파란색 대문을 거칠게 두들기며 당장 돈을 내 놓으라고 소리치던 김()씨 아주머니를 보던 날이었다. 그 날은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오 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은 엄마와 함께 아빠가 주위 사람들과 화투를 치던 컨테이너 박스에 갔던 날이었다. 나는 컨테이너 박스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제발 그 안에 아빠가 없기를 바라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컨테이너 박스의 문을 열기 전에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어 엄마에게 그냥 돌아오라고 손 짓 했다. 엄마는 다시 고개를 돌려 컨테이너 박스 문의 손잡이를 돌렸고 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문에 가려 엄마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고 엄마는 다시 컨테이너 박스의 문을 닫았다. 아빠는 그 안에 없었다. 그 날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그 안에 없어서. 엄마가 그 곳에 갔단 것을 알면 왠지 엄마의 몸에 멍들이 더 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빠의 눈과 귀는 그 안에 있던 모양이었다. 해 그늘이 마당을 차지하던 그 날, 파란색 대문은 거칠게 열렸고 아빠는 망치를 찾았다. 나는 장롱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엄마를 한 번 쳐다보았다. 엄마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이 미친년이, 감히 어디를 와? 네 같은 년은 나가 뒤져야해. 집에나 곱게 쳐 박혀 있을 것이지 어딜 와서 나를 쪽팔리게 만들어? ?”

망치를 찾던 아빠의 손에는 어느새 망치가 들려있었다. 망치의 못을 빼는 부분이 엄마의 눈을 향해 있었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오줌이 쏟아졌다. 내 오줌은 내복을 적시고, 장롱 안에 있던 얇은 이불을 적시고 장롱 문 틈 사이로 흘러갔다. 아빠의 망치는 엄마를 향해 내리쳐졌다. 엄마의 비명소리가 터졌고, 나의 비명도 터졌다. 아빠는 장롱 문을 거칠게 열었다. 시뻘건 아빠의 얼굴, 그 안에 담긴 눈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이에 힘을 주고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느그 엄마는 내 말을 안 들어서 이 꼴 나는거여.”

엄마는 벽에 기대어 있었다. 엄마의 눈 옆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울지도 못했다. 다리가 쉴 새 없이 떨려 장롱 벽에 부딪혔다. 아빠는 엄마를 향해 다시 망치를 내리치려다 나를 쳐다보고 그냥 망치를 거칠게 바닥에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집을 나가고 나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고만 있었다. 엄마를 일으킨 것은 같은 동네에 살던 막둥이 삼촌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빠의 말을 거역해 본 적이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가 그 날 이후로 엄마를 때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빠는 화투를 계속 치기는 했지만, 그만큼 집에도 돈을 가져다주었다. 집에는 하루에 한 번, 다른 집 아빠들과 똑같이 있었다. 아빠와 아침밥을 먹고 저녁밥도 먹어야 했다. 아빠가 자는 방의 불이 꺼지면 나는 실을 내 엄지에 칭칭 감아 빨갛다 못해 보라색이 된 그 엄지를 바늘로 찔렀다. 검은 피가 맺히는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피가 맺히다 엄지를 타고 흘러내리면 나는 괜히 눈물이 났다.

저녁 식사를 할 때, 내 젓가락은 엄마가 구워준 노릇노릇한 햄으로만 향했었다.

너는 왜 햄만 먹냐? 그런 것은 몸에 안 좋아. 여기 이 미나리 먹어.”

나는 미나리가 싫었다. 집 대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옆에 당수 나무가 있었고, 그 앞에 도랑이 하나 있었다. 검은 진흙들이 보였고, 역겨운 냄새와 미나리의 냄새가 피어올라왔다. 나에게 미나리는 그런 곳에서 나는 풀이었다. 미나리의 향을 맡으면 그 도랑이 떠올라 미나리를 싫어했다.

.”

나는 그 날 저녁에 미나리를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다. 씹지 않더라도 넘어오는 그 미나리 향에서는 진한 구린내도 함께 올라오는 듯 했다. 바로 옆에 놓아진 컵에 보리차를 따라 마셨다. 컵 안에는 보리차가 조금 남아있었다.

밥 먹다가 뭔 물을 마시냐. 물은 밥 다 먹고 먹어야지. 그리고 네가 컵에 딴 물은 네가 다 마셔야지, 이걸 누구 먹으라고 이렇게 남겨둬.”

그 뒤로 나는 햄도 먹지 않았고, 밥 먹는 중에 물도 마시지 않았고, 내가 컵에 따른 물은 내가 다 마셨다.

그 시절의 나는 아빠가 없는 낮 시간 동안 동네 친구들과 모여 공을 찰 때 가장 행복했다. 공을 찰 때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이 신경 쓰여 엄마와 함께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잘랐다. 가벼운 기분으로 공을 차다 집으로 돌아온 날, 그 날 이후로 나는 동네 아이들과 공을 차지 않았다. 대신 언니들과 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머리카락을 그렇게 짧게 자른 적이 없다.

여자는 공을 차고 놀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얌전하게 놀아야지. 머리가 여자는 가슴 팍 까지는 와야지. 뭔 선머슴아도 아니고, 너는 도대체가 왜 그러냐.”

숨이 막히는 나날이었지만, 숨을 멈출 수가 없는 나날이기도 했다. 아빠의 말을 거역하기에는 아빠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목에 힘을 주고 이를 빠드득 갈며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내가 그런 아빠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대학교를 아주 멀리 가는 것. 혼자 남을 엄마가 불쌍했지만, 엄마보다 내가 더 불쌍했기에 나는 책상 앞에 앉았고, 결국 집에서 다섯 시간 정도가 걸리는 S시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책상과 침대를 놓으면 가득 찰 정도의 작은 방이었지만, 그 곳에는 아빠가 없었기에 나는 행복했다. 처음에는 아빠와 함께 있는 엄마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는 괜찮을까?’ 라는 물음에서 엄마는 괜찮겠지, 라는 답변으로 변했다. 물론 S시에 와서도 나에게 아빠의 목소리는 여전히 함께했다. 동기들은 나에게 너무 각 잡혀 있는 거 아니냐고 놀렸다. 나를 둘러싼 친구들의 삶은 나와 달랐다. 밥을 먹다가도 자신이 물을 먹고 싶으면 물을 마셨고, 그 물을 마시다 남겨서 그대로 두기도 했다. 자유분방했다. S와 함께 쇼핑을 가던 날, S는 나에게 빨간 립스틱을 발라보라고 했다. 아빠는 나에게 화장을 하지 말라고 했다. 길을 지나가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들을 보면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나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지나가는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도톰하게 올라온 입술, 적당하게 벌어진 입술 위에 발린 빨간색 립스틱은 그 본래의 입술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줬다.

아빠가 보는 것도 아닌데, 너 아빠한테 벗어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거라며.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것 다해. 언제까지 아빠가 하라는 대로 할래.”

나는 그 날 한참을 빨간 립스틱 앞에서 망설였다. 결국 나는 빨간 립스틱 대신 색이 없는 입술 보호제를 하나 사들고 나왔다.

신입생의 3,4월은 바빴다.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오지를 못했다. 처음 몇 번은 선배들과, 동기들과 어울리는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여섯시가 조금 넘으면 울려 퍼지는 벨소리가 두려웠다. 그러다가 S의 끈질긴 설득으로 저녁 여섯시부터 시작되는 과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무어라고 말을 해대도 나에게는 그 소리들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귀에 물이라도 들어간 듯 계속 웅웅 거렸고, 여러 소리가 포개져 들려왔다. 그 안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내 핸드폰 벨소리 뿐 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S가 보았다. S는 내 핸드폰을 가져가 그대로 전원을 꺼버렸다.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빠의 맞닿은 이와, 살모사 같은 눈빛이 떠올랐다. S에게 화가 났다. S 때문에 아빠가 화를 내고 내가 혼날 것이라 생각하니 너무 서러웠고, 아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눈물이 났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아빠의 말이 떠올라 S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울자 S는 당황했다. 눈물이 떨어질수록 내가 지금 S 때문에 우는 것인지, 아빠 때문에 우는 것인지, 나 때문에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핸드폰을 켜서 아빠에게 전화를 다시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계속 멍하게 앉아있다 울음을 터트린 내 주위로 P가 다가왔다. PS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S는 말했다.

얘가 아빠를 엄청 무서워하는데, 지금 아빠한테 전화 온 걸 제가 뺏어서 꺼버렸거든요.”

S는 난처한 듯 했다. P는 별것 아니라고 했다.

, 뭐 그 정도 가지고 울어? 아직도 19살 고등학생이야? 그냥 오늘은 이대로 즐기고 내일 아빠한테 전화 오면 자느라 꺼버렸다 해. 난 또 뭐 큰일이라도 났다고. 그만 울고 한 잔 하자.”

S가 괜찮다고 말 했을 때는 멈추지 않던 눈물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아빠와 같은 남자가 말해서일까? 아니면 낮은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초승달 같은 눈을 하고서는 내 어깨를 두드려 주던 그 손 때문이었을까? 나는 전화기를 켜지 않았고, 술을 마셨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내 머리맡에는 핸드폰이 꺼진 상태로 있었다. 책상 위에 있던 탁상시계의 바늘은 오전 10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화면에 미지의 세계, 우주가 펼쳐졌고 이윽고 대기 화면이 떴다. 핸드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한 통이라는 알림 메시지만 떴다. 아빠는 어제 그 전화 이후로는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행인건가, 아니면 불행인건가. 아빠는 지금 잔뜩 눈에 살기를 채우고 이를 갈며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이라도 전화를 하면 조금 용서해 주실까? 아니, 어쩌면 지금 전화를 해도 나를 혼내실까? 나는 결국 아빠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제는 왜 전화 안 받았냐.”

아빠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평온 했다.

자느라 전화 못 받았다고 해.’

입 안이 말랐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현기증이 났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 어제 자느라, , 자느라 못, 못 받았어요.”

덜덜 떨렸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에 내가 정확히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난생처음으로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말을 내뱉고 나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아빠는 화를 낼 것이었다.

? 저녁 여섯시에? 어디 아프냐?”

아빠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아프냐고 물었다. 화를 내지 않는 아빠의 목소리, 전혀 이에 힘을 주지 않은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 아주 조금 심장이 평온해졌다.

. 감기 기운이, , 그러니까 몸살인 것 같아요.”

그래? 병원 가서 약 타다 먹고 쉬어라.”

아빠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핸드폰 화면이 검은색으로 변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잡고 토했다. 아빠가 화를 내지 않았다. 억지로 화를 참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나의 거짓말은 늘어갔다. 아빠가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 날도 늘어갔다.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빨간 립스틱을 사서 발랐다. S가 학과 모임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날에도 졸라서 함께 갔다. 그 곳에서 P와 조금씩 가까워졌고, P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 다녔다.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아빠에게 전화가 오면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고 전화를 받았다. 여전히 아빠가 무서웠지만, 아빠는 당장 내 눈 앞에 없었다.

 

난 이미, 아빠가 없는 세상의 맛을 보았다. 그런데 다시 나에게 아빠 곁으로 오라고 한다. 엄마는 내 앞에서 내 짐을 싸고 있다. 나는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P였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P의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나는 P가 미웠다. P에게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선배 말처럼 당장이라도 P에게 달려가 따귀라고 때리고 싶었지만 그 모습이 그려지지가 않았다. 내가 P의 따귀를 때린다, 엄마가 아빠의 따귀를 때린다. 절대 그려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엄마의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당연히 아빠였다.

. 지금 짐 챙기고 있어요. , .”

엄마는 핸드폰을 나에게 내밀었다. 엄마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내가 핸드폰을 바로 받아들지 않자, 엄마는 핸드폰 든 손을 흔들었다. 어서 받지 않고 뭐하냐고 나를 재촉했다. 핸드폰에서도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엄마의 눈을 쳐다봤다. 엄마의 눈 옆에는 망치로 맞아 찢어진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엄마는 내가 핸드폰을 받아들지 않고, 핸드폰 안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불안해했다.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나는 계속 엄마를 쳐다봤다. 아빠에게 맞아 살짝 옆으로 삐뚤어진 엄마의 코를 보았다. 엄마는 울기 직전 이었다. 나는 엄마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그대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엄마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엄마는 내 등짝을 때렸다. 당장 핸드폰을 내 손에서 뺏어 가려고 했지만 나는 핸드폰을 엄마에게 주지 않았다. 엄마의 눈은 작아질지를 몰랐다. 크게 떠진 그 눈 안에서는 전쟁이 일어난 듯 했다. 엄마의 어깨는 흔들렸다.

곧이어 내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뽑았다. 엄마는 나의 뺨을 때렸다. 난 엄마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았다. 엄마는 울었다.

엄마,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눈물이 변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빠에 대한 공포감이었을 것이다. 그 공포감이 엄마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줬을 것이고, 엄마는 그 그림이 무서워서 울었을 것이다. 조금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는 왜 자신이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물음에서 오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질문에 자기도 답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없었을 때,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여전히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아빠를 만나기 전에 엄마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길게 뻗은 다리와 시원하게 생긴 이마, 큰 입을 가졌던 엄마는 그 생김새만큼 시원하고 당찬 사람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한테 왜 그렇게 사느냐, 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엄마에게 시원함이나 당참 같은 것은 느낄 수가 없다. 길게 뻗은 다리에는 아빠와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의 흉터들이 있었다. 시원하게 생긴 이마는 이제 움푹 파여 있었고, 끝이 맞지 않은 앞머리에 가려져 있었다. 큰 입은 그대로 축 쳐져서 엄마의 얼굴을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엄마가 미웠다.

엄마는, 엄마는 왜 이렇게 살아?”

엄마의 울음소리는 더 커져갔다. 만약 엄마가 어렸을 때,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면 엄마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 내가 없었다면 엄마는 아빠로부터 진작 벗어났을 것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한 사람이다. 나 때문에 엄마는 아빠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옆으로 세워진 전신거울을 바라봤다. 정확히 가슴팍에 오는 긴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보였다. 제대로 화장을 지우고 자지 않아서 내 입술에는 여전히 빨간 립스틱이 남아있었다. 빨간 립스틱은 내가 바르고 싶어서 바른 거였고, 가슴팍에 오는 머리카락은 아빠에 의해서 길러진 것이었다.

엄마, 나는 어떤 사람이야?”

엄마, 하고 불렀지만 그것은 엄마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나에게 내가 하는 질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거울 속에 보이는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분명히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모습이었지만, 원래의 나는 아닌 것만 같았다. 삐에로의 과장되게 큰 입과, 웃는 눈, 그리고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게 삐에로의 모습이지만, 삐에로가 정말로 그리고 만들어내고 싶은 얼굴은 그 얼굴이 아닐 것이다.

엄마의 눈물이 멈췄다. 엄마는 박스에 넣어진 옷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어쩌면 엄마는 표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몰라서 항상 저렇게 아무 표정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빠에게 맞을 때, 어떤 표정으로 맞아야 할지를 엄마는 정하지 못했을 테다. 그것을 정해준 것은 아빠다. 아빠는 엄마에게 어떤 표정을 정해야 할지 알려줬다. 남들 앞에서는 웃어야 했고, 집에서는 웃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찡그리고 있어서도 안됐다. 그러다보니 엄마는 표정이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서 거울을 바라봤다. 여전히 거울에는 어색한 사람이 서 있었다. 거울 속에는 지금의 ’, 앞으로의 가 있었다. 잔뜩 웅크려진 엄마의 등이 보였고, 앞으로도 계속 웅크러질 엄마의 등도 보였다. 그 사이로 아빠가 서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어 살기가 느껴지는 눈을 하고서, 이를 갈며 엄마와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빠가 서 있었다. 그 거울을 통해 아빠와 눈을 마주쳤다. 겨우 일 초 였을까?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엄마의 눈이 보였다. 날카로운 흉터가 보였고, 초점을 잃어버린 눈동자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빠는 더 강하게 엄마를 때렸다. 나는 옷장 속에 숨어 귀를 막고 덜덜 떨고만 있었다. 거울 속에는 7살의 나와, 그때의 엄마 아빠가 있었다. 나는 무서웠다.

아빠는 지금 이를 갈며 내가 사는 자취방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엄마가 아닌 나에게 망치를 휘두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무서운 것은 아빠의 망치가 아니었다. 나에게 무서운 것은 지난날의 반복이었고, 그런 반복이 결국 나를 옥죄여 오는 현실이었다.

한 번도 감옥에 들어간 적 없는 사람들은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렵겠거니,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만다. 반대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감옥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잘 안다. 그들은 감옥에 있으면서 매일, 매일을 그 두려움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감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 감옥에 들어갔다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다. 감옥 속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이 다시 그 감옥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자기를 감옥 속으로 다시 데려가려는 사람에게 도망쳐봤자, 결국 다시 잡히기 마련이다. 데려가려는 사람에게 강하게 맞서야 한다. 그가 없어진다고 해도, 자신이 없어진다고 해도 맞서야 한다.

나는 아직도 멍하니 박스를 바라보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답이 없는 엄마를 안았다. 엄마의 품은 초라했지만 뜨거웠다. 반면에 한 번도 안아본 기억이 없는 아빠의 품은 분명히 너무 날카로우며 차가울 것이다.

 

자취방에서 나와 미용실에 들어갔다.

짧게 잘라주세요.”

가슴팍에서 멀어질지 모르던 머리카락들이 잘려나갔다. 아빠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 profile
    korean 2020.02.29 21:16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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