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 열세 번째 겨울에서 백이십 번째 겨울로

by 다이무리 posted Feb 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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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겨울에서 백이십 번째 겨울로


아내는 패키지여행이 좋다고 했다. 아무것도 계획되지 않은 건 질색이라고. 결혼식이 끝나고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도 나는 우리가 어디로 신혼여행을 가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별 관심도 없었으니까. 인당 오만 원 남짓한 뷔페 식탁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내 관심은 미리내뿐이었다. 청첩장을 보낼 때 주소를 적으면서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도 막상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섭섭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먼저 결혼하는 사람의 축가를 불러 주기로 약속했는데, 가족 중에도 부모님이나 형제가 죽었을 때만 제외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오기로 했는데, 완전 초라한 몰골로 와서 서로를 빛내주기로 했는데. 저녁 비행기에 오른 아내는 말도 없이 꾸벅꾸벅 졸았다. 한참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데다가 결혼식 준비를 도맡아 했으니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지낸 탓이었다.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식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수저와 젓가락도 비뚤게 놓지 못하고, 미리 밥 먹은 뒤에 어느 카페에 갈지 카페에서 나온 뒤엔 무슨 영화를 볼지 정해놓고, 그날 서로 거의 비슷하게 돈을 썼는데도 고맙다며 다음엔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선뜻 말을 건네는 일로 나는 아내의 첫인상이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사람보다 좋게 느껴졌다. 돈은 얼마나 버는지, 차는 있는지, 집안은 어떤 집안인지 일절 물어보지 않는 것도.

하도해수욕장은 다른 유명한 해수욕장보다 한적하고 또 물이 얕으며 백사장이 정말 넓다고 가이드는 주절거렸다. 아내는 그 가이드가 먼 친척이라고만 말해줬다. 밤바다는 빛 한 줌 없는 곳에서 왔다가 금방 물러났다. 아내는 구두를 벗고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같이 여행 온 부부들은 왜인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백사장을 돌아다녔다. 졸혼인지 늙은 부부 한 쌍과 어딘가 혼혈 느낌이 나는 남자와 몸에 꽉 끼는 레깅스에 짧은 터틀넥을 입은 여자 한 쌍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미리내를 떠올리고 있었다. 눈이 발목쯤까지 쌓인 추운 겨울이었을까? 겨울 바다에 가고 싶다며 조르는 미리내를 어찌할 수 없어 자정이 지날 무렵에 출발한 우리는 가는 내내 서로를 탓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 순 없다고 나는 말했고 가자고 했다고 이렇게 가는 게 말이 되냐고 미리내는 말했다. 길이 조금만 막혔으면 나는 중앙선을 침범해서 차를 돌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막상 바다에 도착했을 때 미리내는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보다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나는 기가 차서 대답했다. 지금은 밤이니까. 미리내는 눈덩이를 야구공 크기만큼 뭉쳐서 파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던졌다. 차갑고 아픈 소리가 났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그런 소리를 들었다. 아내가 허벅지까지 푹 젖어서 돌아왔을 때, 나는 그런 기억을 어떤 카테고리 안에 넣어야 한다면 차갑고 아픈 기억이라고 적어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기억들을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미리내와 나는 무려 띠동갑의 시간만큼 사귀었으니까.

언젠가 아내가 어떤 끔찍한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난 어느 밤 그 일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는데 왜인지 지나고 나니 다 괜찮고 좋은 추억이었단 걸 깨달았다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단 뜻이 아니라 그냥 어떠한 의견도 끼워 넣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벌에 쏘이듯 따가운 기억은 목에 박힌 침을 뽑았다고 하더라도 쓰라린 기억에 불과할 테니까. 그런데 나는 그 침이 알을 낳는 침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자꾸만 식도를 뚫고 들어오는 침, 침은 가늘고 얇아서 누가 빼줘야만 했다. 창백하고 조그마한 양손. 서울로 올라가야겠어요. 호텔에 도착해 먼저 씻으러 들어간 아내는 가운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말했다. 프로젝트 때문에요? 내가 묻자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건 누가 봐도 혐오를 담은 끄덕임이었다. 아무것도 꺼내지 않은 가방을 닫으며 아내는 내 표정을 보고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저만 올라가면 될 거 같아요. 나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곤 아내를 따라 나갈 준비를 했다. 아녜요, 혼자 갈게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혹시라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안 돌아오면 그냥 집으로 와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곤 정말로 혼자 공항에 갔다. 나는 욕조에 누워 혼자서 술을 마셨다. 필름이 끊길 때까지.

한숨도 못 잘 줄 알았는데 나는 어느새 깊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이불에서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찐득한 빛이 얼굴로 우수수 떨어졌다.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커튼도 안 치고 잠이 들었던가? 지난밤 방에 들어오자마자 커튼부터 끝까지 닫은 기억이 났다. 아내가 그새 돌아왔나? 소파에는 작은 몸이 누워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실루엣. 나는 보면서도 잠이 덜 깬 듯 소파 밑으로 늘어진 양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반지도 없이 가지런한 열 개의 손가락과 실핏줄. 나는 조심히 다가가 미리내의 몸을 살살 흔들었다. 미리내는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늘 푸석푸석한 머릿결, 작은 소리에도 반응하는 귀, 유난히 잘 붓는 입술, 잠이 들면 최대한으로 움츠러드는 새우등, 온통 멍이 든 다리까지. 미리내는 선잠을 잔 듯 번쩍 눈을 뜨곤 작게 물었다.

잘 잤어?

너무나도 평범한 말투를 들으니 나는 오히려 이 상황이 몹시 현실처럼 느껴진 나머지 조금 반가운 듯 말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기억 안 나?

결혼식에도 안 왔잖아.

청첩장도 안 보냈으면서.

보냈어.

진작 이사 갔는데.

어디로?

여기로.

그럼 우리 어제 우연히 만난 거야?

우연은 무슨, 술 먹고 전화해서 울고불고 왜 결혼식 안 왔냐고 따지길래 몰랐다고 했지. 다음부터가 진짜 호러였어. 그럼 지금이라도 오라고 해서 어디냐고 물으니까 제주도라고 해서 나도 제주도라고 얼떨결에 말한 게 잘못이지. 택시든 비행기든 타고 빨리 오라고 해서 온 건 아무리 끊어도 계속 전화한 네 잘못이고. 완전히 뻗었더라. 침대까지 옮기다가 짜증 나서 몇 번 바닥에 던졌는데 갑자기 일어나선 침대에 누워서 자던데?

내가 그랬다고?

억울한 건 난데 간밤에 비디오라도 찍어둘 걸 그랬네.

오란다고 진짜 오냐?

죽기 직전이라고 한 게 누군데.

너 내가 아는 미리내 맞아?

어떤 거 같은데?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미리내를 바라봤다. 처음에 봤을 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확실히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좀처럼 하지 않던 목걸이도 찼고, 웬 이상한 히피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왔고, 연했던 화장이 조금 어두워진 데다가 눈가가 짙게 빛나고 있었고, 무엇보다 혈색이 좋았다. 나는 스스로가 어색하게 말하는 걸 느끼면서도 입을 열었다.

새 옷 샀네?

헌 옷은 버렸으니까.

다행이다, 잘 어울려.

뭘 알고 다행이라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가이드를 해달라고?

 

짙은 안개를 지나는 중에도 나는 미리내의 옆모습을 계속 흘깃거렸다. 미리내는 왼편에 앉은 늙은 부부와 작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얘길 하는지 몰라도 간혹 웃었고 손가락을 접었다 피면서 신호를 주고받기도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미리내는 할머니와 각별한 사이였으니까. 처음으로 취직했을 무렵, 나는 미리내와 같이 부두 근처의 작은 마을에 있는 할머니의 집을 다녀왔다. 작은 평상에 누워 별을 보기도 하고, 할머니가 그렸다는 인상주의풍의 일몰 그림을 구경하기도 하고, 배를 타고 외딴 섬에 가서 돗자리를 펼쳐놓고 잠들기도 했다. 돌아갈 때 할머니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미리내에게 보여줬다. 휴게소에서 문득 그게 생각난 내가 묻자 미리내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게 수신호라는 걸 알려줬다. 손가락 하나는 매우 좋음, 손가락 두 개는 괜찮음, 손가락 세 개는 슬픔, 손가락 네 개는 분노. 우동 그릇을 휘휘 저으며 내가 물었다.

그게 왜 필요한데?

감정이란 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도 있잖아?

미리내는 차에서 내릴 때 나를 별로 신경 쓰지도 않고 늙은 부부에게 무언가를 안내하듯 앞장서 걸었다. 돌담을 두른 집들을 몇 채 지나가고 나서야 표지판이 나왔다. 날은 조금 쌀쌀했지만, 그늘이 없어서 볕이 거리에 온통 떨어졌다. 고요하고 소소한 곳이었다. 어딘가에 사람이 살고 있을 거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는 행렬의 맨 뒤에서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서울로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아내는 소식이 없었다. 하늘 한편에서 새의 무리가 열을 맞춰 날아가다가 뭍으로 내려왔다. 우거진 갈대를 따라 걸으며 가이드가 말했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흑두루미가 거쳐 가는 곳이 여기예요. 중간 경유지인 셈이죠. 저들은 이제 계속 남쪽으로 이동할 겁니다. 더 따뜻한 곳을 찾아서요.

우리는 풀밭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된 철새탐조대에 들어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새들을 가까이서 봤다. 망원경이 하나뿐이어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새의 종류와 설명이 써진 사진을 대충 훑었다. 늙은 부부는 곧 싫증이 났는지 다음엔 어딜 가냐고 가이드에게 물어봤다. 그러고 보니 어제 봤단 남자와 여자는 어딜 갔는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탐조대 바깥으로 나와 조금 젖은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리내는 상체밖에 보이질 않았다. 목에 걸린 카메라를 들고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찍는 모습은 내가 미리내와 사귀면서 가장 많이 본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어떤 사진들을 구별할 수 없었다. 같은 자리에서 연거푸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은 조금씩 다르다고, 빛을 입는 방식이나 손으로 만져도 느낄 수 없는 질감을 포착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내가 내미는 사진은 모든 사진을 이어 붙어도 한 장면도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히려 내가 기억하는 건 사진이 아니라 사진에 집착하는 미리내였다. 좁고 퀴퀴한 암실에서 끼니를 거르면서 인화한 사진들을 조금씩 말릴 때마다, 수백 장의 비슷하고 오묘한 사진을 고르고 고를 때마다, 어느 늦은 밤에 작은 통 안에 불씨를 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태울 때마다 나는 그 모든 일들로부터 미리내를 떼어내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미리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녀린 몸을 품 안에 끌어안을 때면 늘 무언가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걸 간신히 참기도 했다. 그런 일이 너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고 이미 오랫동안 해왔는데도 제대로 되지 않는 느낌이라면, 운명이 아니니까 당장 그만두라고.

미리내는 입맛이 없는지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우리는 차를 타고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차에 오르기 전에 미리내는 어디서 났는지 내게 멀미약을 건넸다.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묘하게 안심이 됐다. 버스로 몇 정거장을 이동하는 와중에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체질은 영 고쳐지지 않았다. 나는 늘 안쪽 자리에만 앉았다. 창을 조금이라도 열고 바람을 쐬지 않으면 계속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특히 온풍기를 틀 때 미묘하게 풍기는 냄새를 잘 견디질 못했다. 차 안은 따뜻하다 못해 후덥지근했다. 차에 올라타고 십 분쯤 지났을까. 미리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춥지 않으시면 난방 꺼도 될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으니 누가 자리에 탔어도 덥다고 느꼈을 테지만, 나는 그게 내심 고마웠다. 조금씩 숨통이 트이자 미리내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돌연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내가 아니라 미리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어떤 미신을 믿어서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어떤 발을 먼저 딛는지, 왜 종교에 싫증이 났는지, 목도리는 질색이지만 목티는 왜 입는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어느 나라의 어느 동네에서 살고 싶은지, 어렸을 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지, 세계의 모든 책을 태운다면 단 한 권 남기고 싶은 책이 무엇인지, 그 모든 질문에 답을 아는 유일한 사람. 갑자기 나는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양손 가득 들었던 짐은 호텔에 전부 두고 왔으니까. 도통 소질이 없는 모양으로 허밍을 조금 내기도 했다. 미리내는 잠깐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이제는 할머니와 같이 끝말잇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산일출봉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에 우리는 툴툴거리며 산책로를 올랐다. 나무 울타리를 따라 좁은 길을 올라가자 이상하게 깎인 바위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씩 제주의 경치가 보였다. 높은 곳에서 본 제주는 넓은 들판을 뒤로 건물들이 있었고 푸른 바다가 마치 땅을 침식하려는 것처럼 안쪽으로 계속 물결치는 중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 장소에 어울리는 사람이 미리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런 여행, 이런 여행에 같이 올 수 있는 사람, 이런 여행에 같이 올 수 있는 사람이란 항목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가장 많이 갖춘 사람. 미리내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런 질문을 계속 떠올리는 게 조금 불편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열두 해를 지나는 동안 나는 그런 질문 속을 유영했으니까. 한 가족이 살기에 좁지 않은 방 세 개짜리 집을 사고, 아이는 한 명만 낳고, 방학이 되면 미리내의 할머니 집에 놀러 가고, 양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드는 그런 상상은 매번 나를 두렵고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 상상을 이루기 위해선 둘 중 한 명은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으니까.

내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건 만일 미리내가 나와 사진 중 하나를 고를 때가 오면 어떻게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리내의 아버지가 작업실로 느닷없이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사진을 찍는 미리내의 뒤편에 우두커니 선 채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원했다. 미리내의 아버지는 운동을 즐겨 하시는지 헐렁한 옷을 입었는데도 체형이 무척 커다랗고 마치 곰 같았다. 불같이 화를 내지도, 차근차근 말로 타이르지도 않고 미리내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모습을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바라봤다. 미리내가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조금 저항하자 미리내의 아버지는 이내 바로 손목을 놓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살 요량이면 그냥 집으로 돌아와라.

싫어요.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고작 저런 팔푼이랑 놀아나려고, 네 인생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나 하려고 독립해서 나간 거냐?

팔푼이 아니에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설령 팔푼이라고 해도 제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어요.

미친년. 단단히 병에 걸렸구나.

그거 알아요? 정신병원에는 진짜 정신병 환자는 오지 않고 정신병자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만 환자로 온대요. 당신 같은 사람 말이에요. 다들 그러죠. 내 삶에 뭔가 엄청난 도움이 될만한 걸 가져왔다는 듯이, 자기가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런 건 다 내가 정하는 거예요. 모든 걸 정하는 건 나라고요. 내가 고르지 못한 유일한 건 태어날 순간뿐이에요.

그릇이 깨지고, 탁자가 부서지고, 사진기의 필름이 모두 늘어지는 악몽 같은 일은 없었지만, 우리는 한동안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미리내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암실로 들어가는 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문을 열었다. 붉은 조명 아래로 집게에 걸린 많은 사진. 미리내의 눈동자가 나를 쫓아 따라오다가 열린 문틈 사이로 멀어지며 이내 사진으로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순간 양쪽 눈이 마치 눈깔사탕처럼 데구루루 굴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입에서 싸구려 말이 튀어나왔다.

너도 이렇게 된 걸 후회하는구나.

이렇게 된 게 뭔데?

혼자 남게 됐잖아.

그게 무서웠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어.

아직도 늦지 않았어.

넌 늦었고. 나는 말이야. 네가 원하는 모양으로 절대 살아줄 수 없어. 내가 원하는 사람은 나도 몰라. 나 가끔 나를 뚫어지게 봐.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내 몸을 찬찬히 보는 거야. 어떤 모양인지, 어떤 냄새인지, 어떤 감정인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진짜로 모르겠어. 그냥 따뜻한 곳에 살고 싶어. 세계의 가장 남쪽에서 곧 멸종될 철새처럼 살까? 나를 모르는 나를 가장 아름답게 불러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단어가 뭘까?

그날 이후로 나와 미리내는 이 년을 더 같이 지냈다. 어떤 단어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미리내에게 그 단어에 대해 물었고 미리내는 늘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그런 단어는 결별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미리내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금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좋은 시간일까?

 

저녁 일정을 빠지기 전에 나는 가이드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너무 많은 기억들이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고 무엇보다 갑자기 아내가 돌아올까 두렵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이드는 내게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를 잡으며 속삭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비밀로 해드릴게요. 신랑이라도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죠.

나는 내가 대체 뭘 즐기고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미리내를 불러낸 기억도 없었고, 미리내와 중요한 대화를 나눈 시간도 없었고, 미리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기회도 없었다. 미리내는 좀 더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겠다면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동안 나는 바깥에 나가 맥주를 샀고, 바다 근처를 조금 걸었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몹시 피곤한 듯 전화를 받자마자 투덜거렸다.

얼마만의 여행이었는데.

거기 상황은 어때요?

뭐 그냥 엉망진창이죠. 여행은 어때요?

별일은 없어요.

아마 내일도 못 돌아갈 거 같아요. 어쩌죠?

하는 수 없죠.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아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미리내는 조금 오래된 영화를 보다가 내가 들어오니 소파에서 몸을 조금 일으켰다. 나는 식탁에 맥주를 꺼낸 뒤 말문을 열 좋은 말을 찾고 있었다. 오늘 같이 다녀줘서 고맙다고 하기도 좀 이상했고, 못 본 새 이뻐졌다고 하기엔 더 이상했고, 하여튼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난감해하고 있을 무렵에 미리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제 와서 지난 일을 뭘 어떻게 해 보겠다고 여기 온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건 나도 알아.

그래? 영 모르는 표정이던데?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잖아.

그런데 그 야심한 밤에 그런 전화를 걸었단 말이지?

아니, 애초에 넌 왜 제주도에 있는데?

부모님 고향이거든. 미리내는 제주도 방언이고.

그럼 아예 내려온 거야?

그게 있잖아. 재밌는 얘기 해줄까? 너도 봤잖아, 우리 아빠. 어렸을 때도 정말 나쁜 말만 하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뭐랄까 조금씩 늙으면서 말도 행동도 느릿하고 우스워졌지. 마지막으로 본가에 내려왔을 때,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가족인데. 평생 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데. 한 번 그런 생각이 드니까 계속 신경 쓰이는 거야. 그러다가 제주도에 내려와서 살면 더 좋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 부모님은 내가 태어났을 무렵에 서울로 상경해서 살다가 내가 독립하고 나서야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셨으니까. 나도 내가 태어난 곳에 좀 머물러보고 싶었어. 아빠랑 정말 오랜 시간 얘길 나눴어. 웃긴 게 뭔 줄 알아? 서로를 그렇게나 헐뜯었는데도 우리 이제는 두 번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친근하게 같이 산다? 아빠가 내가 찍은 사진도 봐줘. 이러쿵저러쿵 훈수도 두고. 우리 아빠가 너보다 사진 잘 볼 걸? 우리는 계속 이렇게 어리석게 살 운명인가 봐. 싫은 감정은 낑낑 숨기고 좋은 감정은 닳고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잘됐네.

잘된 일인가? 그럼 이건 어때? 이런 일도 있었어. 우리 이모가 최근에 집을 샀어. 혼자 사는데도 방이 세 개나 되는 집이야. 너무 쓸쓸하고 외롭대. 자꾸만 나를 부르는데 이제 이모네에서 너무 멀리 사니까 가끔 찾아뵐 수밖에 없어. 그런데 하루는 이모가 나한테 자기가 죽으면 이 집을 아무도 가질 수 없을 거래. 알고 보니까 이모가 대출을 왕창 받아서 집을 샀더라고. 그러니까 이모가 앞으로 반세기 동안 대출을 갚아야 그 집이 자기 집이 된다고 말하더라. 그건 얼마나 고독할까? 그렇게나 오랜 시간을 지나 이모가 갖게 되는 건 겨우 방 세 개짜리 집이야. 그것도 이모 혼자서 말이야. 누굴 재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예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방. 사람들이 아기를 낳는 이유를 알겠더라. 나 말이야. 결혼은 별로 안 하고 싶어도 아기는 조금 갖고 싶어졌어. 이런 마음도 곧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미리내는 조금도 술을 마시지 않고 말했다. 나는 잔에 맥주를 계속 따랐다. 분명 말을 하는 건 미리내인데 내 목이 자꾸만 탔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그걸 당장 묻고 싶었는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젠 미리내의 선택에 내가 후보로 들어갈 공간도 없을 텐데 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지 나는 좀처럼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커튼이 흔들리는 결을 따라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추워도 온몸이 차갑고 더워도 온몸이 차가운 사람이 누구였더라? 냉골 같은 살결을 만지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밤은 대체 몇 번이나 될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오래된 관습에 따라 순장을 한다면 같이 죽을 사람을 고르는 게 사랑일까 아니면 기어이 살릴 사람을 고르는 게 사랑일까. 아무런 답도 없는 상태로 뭘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모른다는 걸 말하는 것뿐이었다.

난 정말 너를 모르겠다.

나에 대해 전부 알게 되면, 그렇게 되면 어떨 거 같은데?

좀 더 나았겠지.

아니, 달라지는 건 없어. 십이 년을 서로 같이 살았잖아. 이제는 확신할 수 있어. 너랑 나는 백이십 년을 살아도 어차피 똑같았을 거란 걸. 나랑 헤어진 뒤에 네가 결혼하기까지 시간이 반년밖에 안 걸렸잖아. 고작 그런 일일 거야. 십이 년을 같이 살아도 도저히 결혼할 수 없는 사이도 있고, 반년을 같이 살아도 바로 결혼할 수 있는 사이도 있는 거지. 그건 누군가를 안다고 하는 일과는 다른 일일 거야.

그래서?

그래서는 없어. 그냥 얘기해주는 거야. 그게 끝이야.

그럼 하나만 부탁해도 돼?

뭔데?

너희 집에 가보고 싶어.

 

우리는 아침이 오자마자 호텔에서 나왔다. 나는 짐을 택시 트렁크에 싣고 조수석에 앉았다. 미리내는 처음 들어본 낯선 주소를 말했다. 여기서 꽤 먼 거리였다. 여행의 일정상 사흘 내리 제주도 동쪽 부근에 있었고 미리내의 집은 제주도 서쪽까지 넘어가아만 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는 모든 일이 그렇게 훌쩍 넘어가는 것처럼 이뤄지고 있단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안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멀미 때문에 자꾸 잠이 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지만, 어느샌가 눈을 감고 작은 대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미리내의 가지런한 말, 기사님의 투박하고 무미건조한 사투리. 들어본 적 없는 대화인데도, 어디선가 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미리내가 나를 깨웠다. 우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낮은 돌담 안쪽으로 아담한 집이 있었다. 문도 없고 마당을 지키는 개도 없이 아주 고즈넉한 집. 미리내는 서서히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며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나는 주뼛거리며 그 안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복층으로 된 집의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미리내가 말했다.

이층이 내 공간이야.

이층은 방이 두 개뿐이었다. 꽉 닫힌 문의 문지방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봐선 왼쪽 방은 암실이 분명했다. 나는 미리내의 말을 곱씹었다. 이층이 내 공간이야. 그 말은 잠을 자는 침실과 사진을 인화하는 암실 두 개의 방만으로 미리내가 존재한다는 말 같았다. 정말 사람이 두 개의 방만 가지고도 살 수 있을까? 미리내는 오른쪽 방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나는 약간 머뭇거리다 방문이 닫히기 전에 간신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물건이랄 게 별로 없었다. 오래된 상자 몇 개가 바닥에 쌓여 있었고 몇 권의 책과 작은 노트북, 작은 책상과 조금 생뚱맞게도 작은 안마 의자도 있었다. 미리내는 이 방에서 가장 이상한 물건을 소개한다는 듯 말했다.

이건 생일 선물로 받은 거야. 아빠가 내 자세가 조금 굽었다면서.

나는 미리내의 어떤 사진보다도 더 자세히 그 방안을 둘러봤다. 뭔가의 꼬투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긴 듯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나는 내가 무얼 찾고 싶은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그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누군가의 흔적. 누군가는 이곳에서 미리내의 이마에 입을 맞출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미리내의 밑 입술을 핥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미리내의 가슴 언저리를 빙글빙글 더듬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미리내의 골반을 훔쳐내듯 만질 것이다. 그건 어쩌면 내 루틴이기도 했다. 나는 미리내의 그 몸을 참 좋아했다. 여태 만져본 어떤 몸보다 더욱. 그런 얘길 누군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점에서 내게 가장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면, 전기톱이라도 들고 신체 일부를 자르고 마음도 일부를 잘라서 조립하듯 끼워 맞출 수밖에 없다면,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건 이유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순간 내가 역겨운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내가 끅끅거리며 입을 막자 미리내가 웃으며 말했다.

있잖아, 어제 그리고 오늘 말이야. 이틀 동안 같이 다니는 동안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가 네 부인처럼 보였을 거야. 어때? 끔찍한 순간이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갑고 아픈 소리가 났다. 미리내가 바다에 눈덩이를 던지고 있을 때 나는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상한 일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온몸이 언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미리내가 던지는 저 눈덩이를 갑자기 내게 던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무렵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을 조금도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의도 비꼼도 없는 말들이어도 그게 꼭 맞춤 정장처럼 내 몸에 찰싹 달라붙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든 옷을 벗고 알몸으로 다녀도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 그런 곳에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미리내는 끈질기게 눈덩이를 던지다가 휙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자기도 해봐, 이거 재밌어, 꼭 모든 공을 스트라이크로 던지는 기분이야. 그 말에 나는 몸 안에 모든 감정을 태워 조금씩 움직였다. 처음엔 잘 뭉쳐지지도 않는 눈이 불쾌했는데 이내 요령이 생겨서 미리내와 누가 더 많이 던지는지 내기도 했다. 그러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건 무언가 나아졌다거나 내 삶이 앞으로 정말 빛이 비치는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 눈덩이를 던지는 사람의 마음이 단순히 바다를 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오자고 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옹졸하게 세상에 혼자인 척 구는 나를 걱정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침이 오기 전에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너무 어둡고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한파의 밤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될 거 같아서, 그때 던질 눈덩이는 남겨둬야 해서. 나는 한 번도 그 눈덩이를 미리내 이외의 다른 사람과 던지게 될 거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택시에 올라타기 전 미리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야. 그냥 어떤 날 중에 며칠일 뿐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어디에도 없었던 며칠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차갑고 아픈 기억이라는 카테고리 안을 가득 채워둬야 다른 좋은 카테고리는 한동안 비워둘 수 있을 테니까.

 

새로 바른 벽지의 냄새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그래도 며칠 침대며 세탁기며 새로 산 물건들을 받으며 지내는 동안 코가 조금 무뎌졌다. 나는 모든 물건을 혼자서 받고 사진을 찍어 어디에 둘지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어쩔 땐 내가 선택한 위치를 찬성했지만, 또 어쩔 땐 다른 위치를 정해주기도 했다. 침대는 창문 밑에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러닝머신은 테라스 근처에서 타면 좋을 거 같아요. 텔레비전은 거실 말고 서가 쪽에 두면 좋을 거 같아요. 나는 아내의 말투가 여전히 좋았다. 고작 물건을 놓은 위치를 정하는 일에 좋다는 말을 남발하는 버릇도. 서울로 돌아온 뒤로도 아내는 며칠이나 더 프로젝트 준비로 바빴다. 같이 저녁을 먹다가도, 잠깐 처가에 들러서도, 좋아하는 공원을 걷다가도 연락이 오면 부리나케 떠났다. 아내는 늘 내게 미안해하면서 앞으로 조금이면 된다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더블사이즈 침대에 누워 잠이 든 뒤론 이른 아침에 내 옆에 누운 작은 등을 바라봤다. 한 번은 나는 그 등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건 어떻게 봐도 아내의 등이었다. 얇은 잠옷 속으로 손을 넣어 살결을 만졌을 때, 보드라운 살은 몹시 뜨거웠다. 아내는 누가 만진 줄도 모르고 도무지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올해 처음으로 옷장에서 두꺼운 코트를 꺼낸 날, 아내는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끝났다면서 바깥에서 저녁을 먹자고, 오랜만에 술도 한 잔 마시고 여행이 어땠는지 느긋하게 알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미리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늘 앉던 자리는 산세비에리아 화분 뒤편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나면 아내는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할까? 나는 어떤 식으로든 객관적으로 얘기할 자신이 없었다.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기 위해선 나와 미리내가 어떤 관계였는지, 또 어떤 관계에서 헤어졌는지 설명해야 할 테니까. 그러다 문득 나는 그게 몹시 치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그 모든 시간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그냥 잘못했다고 말해야만 할까? 후회할 줄 알면서도 그 일을 하게 되는 건 내가 나를 모르는 만큼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나는 식당 문을 계속 주시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도 영영 기다릴 수 있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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