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 다가가다

by 비타민씨 posted Feb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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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가다


아직 어둠이 지배할 때 김준기의 트럭은 산의 입구에 들어섰다. 산의 정맥이 땅을 가르며 높은 곳까지 펼쳐져 있었다. 길이 좁고 미끄러워 자꾸만 뒷걸음질치려는 트럭을 억지로 끌고가느라 온 얼굴에 흙먼지를 뒤집어써야했다.

산중턱의 평평한 흙길이 보이고 사위는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신중하게 트럭을 세우자 콧속으로 시원한 흙내음이 찾아들었다. 눈높이에서 굴참나무와 낙엽송이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가운데 트럭에서 내려 흙바닥에 발을 디뎠다. 위로는 광활한 하늘 아래 초록빛 숲이 산을 지키고 있었고 아래로는 논과 밭 그리고 조그맣게 보이는 민가가 질서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뚤배뚤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는 산 위쪽으로 향했다. 자연의 향도 흡입하고 꿀을 가져다줄 아카시 나무의 상태도 알아보기 위함이다. 나무가 말라있거나 아직 충분히 꽃이 피지 않은 상태라면 헛걸음을 한 게 되기 때문에 그것의 상태를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 눈앞으로 병풍처럼 둘러싼 굴참나무와 낙엽송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베일에 싸인 주인공은 그 뒤에 있었다. 그는 그 뒤가 궁금하였다.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카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는 굶주린 자식들에게 먹일 일용할 양식을 발견한 듯 흥분감에 휩싸였다. 마침내 그의 눈앞에 하얀 꽃잎이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 나무의 군락지가 나타났다. 그것의 꽃떨기에는 천연의 벌꿀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고 순수한 그 꽃잎을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의 우듬지는 울퉁불퉁한 구름의 끝과 맞닿아 있었다. 하얀 꽃잎이 서른 장쯤 달린 긴 꽃자루는 잎겨드랑이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타원형의 작은 나뭇잎이 10개쯤 마주난 형태의 초록색 나뭇잎이 보였다. 꽃망울을 박차고 나온 나비 모양의 꽃봉오리는 갑갑한 번데기에서 탈피한 듯 다부져 보였고 날개를 활짝 핀 나비와 반쯤 오므린 나비가 긴 꽃자루에 반반씩 매달려 있었다. 한두 시간 후면 오므리고 있던 나비꽃도 날개를 활짝 펼 것이다.

그는 손을 위로 뻗어 나비 하나를 따서 혀 안에 넣고 녹여보았다. 첫 맛은 떨떠름했다. 연구원의 얼굴처럼 신중하게 좀더 씹어보았다. 씹을수록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숨겨져 있던 단맛이 줄줄이 터져나오며 입안 가득 퍼졌다. 그렇게 입을 옴싹거리며 숨을 쉬는 동안 아까시 향기와 나무가 내뿜는 산소는 폐속으로 들어가 몸을 나무로 만들어주었다.

5월의 청명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푹신한 흙길을 걸어 다시 트럭으로 돌아왔다. 저 멀리 소실점을 향해 몰려 있는 구름 뭉치들은 시원한 눈꽃빙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연유를 부으면 달짝지근하고 시원할 것이다.

트럭 적재함에는 30개의 벌통들이 쌓여 있었다. 그건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직육면체 나무 상자였다. 그 안에 꿈틀거리는 수만 마리의 벌떼들이 들어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언뜻 보기엔 마술사의 상자나 이삿짐의 그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묘소에 가기 위해 산길을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이런 상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땐 그 안에 용도는 모르겠지만 흙이나 모래 같은 게 담겨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른이 되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게 됐을 때 온몸에 소름이 끼쳐 몸서리를 쳤었다. 그렇게 차갑고 똑바른 상자 안에 무시무시한 침을 가진 생명체들이 바글거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햇빛 때문인지 벌통들의 날갯짓 때문인지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하얀색 벌통을 한껏 벌린 양손에 안고 들어올렸다. 이 안에 날갯짓의 명수이며 독기 어린 침을 가진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고 상상하니 아랫배가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그 상자의 덮개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지만 떨어뜨렸을 때 덮개가 열리는 상상이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위험이 따르지 않는 직업은 없는 법이라며 위안을 해본다.

적재함과 흙바닥을 30번 오르락내리락하며 아카시 나무가 보이는 쪽을 향해 일렬로 벌통을 쌓아두었다. 학생들이 책상 줄을 똑바로 맞추고 칠판 쪽을 향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모자는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주었지만 고갤 드는 순간 태양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태양은 햇살의 양을 최소 3단계로 조절했는데 아침에는 조금 따뜻하게 한낮에는 조금 덥게 저녁에는 조금 시원하게 온도를 조율했다. 지금은 피부에 얇은 이불을 덮은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벌들은 빛이 있으니 날 수 있었다. 체크무늬 남방 위에 촘촘한 검은 그물로 된 방충복을 입었다. 얇은 사슬 갑옷을 입은 중세의 기사 같았다.

몸과 마음의 준비를 마친 그는 흰 상자들의 덮개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벌들의 간질거리는 사운드가 크레셴도로 울려퍼졌다. 안에는 갈색과 황색이 반쯤 섞여 있는 벌떼들이 서로의 등과 머리를 밟고 걸어다니고 있었다. 귀의 공포에 이어 눈의 공포가 합쳐졌다. 작은 존재들이 무수하게 모여있는 모습은 큰 존재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만큼 무서운 데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처음에는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벌들은 갑작스런 빛에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하늘이 열렸음을 알고는 투명한 날개를 활짝 펼쳤다. 좁은 상자를 박차고 높은 하늘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내는 윙소리는 달팽이관을 비비 꼬는 것 같았고 없던 어지럼증도 생기게 만들었다. 벌들은 푸른 배경을 지나 앞에 보이는 낙엽송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그것들의 위를 날아 더 높은 곳에 있는 나무를 향해 돌진했다. 꽃향기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존재 같았다. 푸른 빛 하늘이 갈색으로 물들었다. 하늘을 수놓은 수십만 마리의 벌들은 장관이면서 공포였다. 벌떼들의 막강한 세력에 연약한 흰 구름이 움츠리고 있었다.

벌들은 계속해서 벌통과 아카시 나무를 왔다갔다하느라 바빴다. 벌들은 하루에 천 번의 만남과 작별을 반복하고 그 만남과 이별 속에서 벌은 육각형의 방에 꿀을 채우고 인간은 사각형의 방에 돈을 채운다.

그는 조금 걷기로 하였다. 하늘에는 반투명한 양떼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잘게 찢겨진 구름들이 무리를 이루어 모여있는 모양이었다. 저 뽀송뽀송하고 귀여운 구름의 모양을 확실히 벌떼구름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겠다. 고개를 숙이고 조금 앞의 땅바닥을 보았다. 그곳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꿀벌이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보드라운 흙 한 줌을 손에 쥐었다. 코를 가까이 가져가 냄새도 맡아보았다. 메마른 느낌이면서도 포근한 고향의 냄새 같은 것이 풍겼다. 그 냄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묘한 힘이 있었다. 편한 마음은 잠시면 된다는 듯 흙을 바닥에 날려버리고 손을 탈탈 털었다. 하얀 운동화에 흙먼지 일부가 달라붙어 질척거렸다. 그는 문득 하얀 운동화처럼 인기 있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한때 여러 여자로부터 동시에 대시도 받아봤다. 그러나 그것이 겉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 감정들을 신뢰할 수 없었으며 겉모습과 다른 속모습에 실망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단 한 명의 끈질기고도 소중한 인연을 찾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곤줄박이가 지저귀었다. 그 아름다운 지저귐 속으로 투박한 바퀴 소리가 털털거리며 다가와 섞였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소리였다. 그는 이 상쾌한 풍경과 공기 속에 오롯이 혼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마음이 편안했던 중이었다. 그는 뿌연 흙먼지 속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이 멈춰 있는 흙길 위에 김준기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낯선 트럭 한 대가 그의 트럭과 5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주차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트럭의 적재함에는 수십 개의 벌통이 실려 있었다.

운전석 밖으로 낯선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또한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30대 초반쯤 되는 젊은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고 안경은 끼지 않았으며 이마가 넓고 목과 팔다리가 긴 편이었다. 까만색 면바지와 세로 줄무늬 남방셔츠, 흰 운동화 차림이었다. 소박한 미인의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김준기는 그녀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낯선 사내가 다가왔음을 느꼈을 텐데도 그녀는 트럭의 적재함에서 벌통을 내려놓으며 바쁜 척을 하였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그녀가 이동하는 대로 시선을 이리저리 따라 움직였다. 갈등을 슬기롭게 다루는 법을 모르는 그는 그냥 놔둘까도 생각했었다.

근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굴할 것까지야 없지만 너무 당당하지 않은가. 상냥한 양해의 말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이제 그녀는 벌통 나르기 작업을 힘겨워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진작에 상냥하게 굴었으면 같이 날라줬을 것이 아닌가. 그는 수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갈등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어쩌면 그냥 말이 걸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허락 받았어요?”

화낼 것처럼 구겨진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아무말없이 돌아서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그의 말에 그녀가 흘낏 돌아보았다.

“허락 받았냐구요.”

성질 급한 그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밭주인한테 꿀 한 말 주기로 했어요.”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김준기의 머리털이 쭈뼜 섰다. 하나의 땅에 두 팀을 받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다 필요없고 여긴 내가 먼저 찜했으니 다른 데로 가보세요.”

“밭주인과 얘기하세요.”

그녀가 귀찮다는 듯 벌통을 나르며 대꾸했다. 목소리가 아카시 향처럼 향긋했고 발음이 냇물 소리처럼 귀에 쏙쏙 들어왔다. 새침하게 굴고 있긴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선한 인상에는 교양이 흐르고 있었다. 트럭을 몰고 다닐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밭주인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밭주인과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결국 그녀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걸 짧은 대화 후에 확실히 알게 되었으므로 그만두었다. 사실상 그럴 권리도 없었지만 이미 벌통의 절반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내쫓는 것은 인정머리 없는 일이었고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 허공만 휘휘 젓다가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니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의 그런 선택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의 핏속에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우유부단함이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팔의 힘이 떨어졌는지 그녀의 벌통 나르는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으며 지나치게 낑낑대고 있었다. 힘도 약한 사람이 양봉을 하겠다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천성이 모질지 못했던 그는 사내가 되어가지고 여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는 스스로가 비겁하게 비춰지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도저히 마음이 부대껴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발을 질질 끌며 그녀의 트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도와줄까요?”

퉁명스러울 의도는 아니었는데 말투는 본의 아니게 그렇게 흘러나왔다. 말 안하고 그냥 도와주면 더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아 포기하였다. 그녀는 그의 퉁명스러운 호의에 대해 아까와는 달리 상냥한 말투로, 혼자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자존심이 상한 건지 아님 타인의 호의가 귀찮은 건지 아무튼 도움을 거절당한 그는 순간 뾰로통해져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연약한 척을 하질 말던가요.”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러면서도 여자의 벌통에 함부로 손을 뻗었다. 그는 우유부단했지만 예민한 면이 있어서 실랑이가 길어지면 슬슬 신경질을 내는 타입이었고 상대가 신경질을 부리면 같이 부릴 줄도 알았다.

그녀는 그를 황당한 듯 바라보았다.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몸 속에 화가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무거워서 낑낑거렸을 뿐 일부러 연약한 척을 했다는 평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남이사 번쩍번쩍 들어올리든 맥아리없이 들어올리든 오지랖이 태평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싸우고 싶지 않은데다 도와주고 싶다는 표현을 그렇게 투박하게 한 거라는 것도 읽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벌통을 부리며 언뜻 본 그녀의 운동화는 낡아 있었고 남방 셔츠의 밑단은 구겨져서 접혀 있었다. 머리카락은 뒤엉키고 헝클어져 있었다. 하늘은 그녀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골고루 햇빛을 내리비춰주었다.

덮개를 모두 열고 한숨을 돌리고 있던 그녀는 그가 다가오자 신경이 쓰였는지 괜히 바지를 툭툭 털었다. 목이 말라 보였기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생수병을 건넸다. 그녀는 사양않고 받아서 꿀꺽꿀꺽 삼켰다. 물이 지나치게 쏟아졌는지 입술을 벗어난 물줄기가 입 밖으로 터져나오며 가느다랗고 하얀 목의 능선을 타고 뇌쇄적으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한눈에도 당황한 표정으로 재빨리 손등을 입술로 가져가 입가와 목선에서 반짝이고 있는 물줄기를 터프하게 쓸어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못본 척 시선도 피해주었다. 오히려 그녀의 빈틈에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음을 느끼고는 속으로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툴툴거리는 말투로 그녀를 향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을 때 그는 예쁘고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친절하게 대꾸했지만 기분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의 툭툭 던지는 말투가 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의 사는 곳을 물었을 때 참다못한 그녀가 이윽고 화를 터뜨렸다.

“언제까지 그런 말투로 말할 건가요? 내가 당신의 신경질을 받아주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남자는 그녀의 갑작스런 정색에 무안을 당했다고 생각해 얼굴을 붉혔다.

다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고하정의 자세가 꽈배기처럼 비비 꼬였다. 눈동자가 하늘로 향했다. 연갈색의 작은 새가 멀리 보이는 나무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그 위를 거대한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날고 있었다. 남자의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어색한 표정과 빨갛게 뜨거워진 얼굴은 갈등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우리 산책갈래요?”

그는 멀어지는 거리를 다시 좁히려는 욕망을 담아 이전의 딱딱한 말투를 서둘러 교정했고 간지러울 정도로 더없이 다정한 어투를 선보였다.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사적인 호감을 표현한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혼자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싫으...면 할 수 없구요.”

그녀의 불안한 눈빛과 마주친 그는 덩달아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가 순진한 모습을 보이자 그녀의 경계심이 조금 녹아들었다. 그를 보는 그녀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수줍어하는 얼굴에 대고 “네, 싫어요.”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잠시만요.”

고하정은 그렇게 말하고 트럭으로 돌아가 밀짚 모자 하나를 주워다가 눌러썼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 연약함에 다부짐이 얹어진 느낌이었다.

김준기와 고하정은 나란히 서서 숲의 정맥 속으로 향했다. 다람쥐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나뭇가지를 휘감았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살짝살짝 비춰 신비로웠다. 반짝거리는 나뭇잎은 재잘거리는 여자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김준기는 기분이 들떴고 그럴 때는 싱그러운 나뭇잎처럼 재잘거릴 줄도 알았다. 살면서 경험했던 일화들, 이를테면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던 이야기, 학교에서 소풍갔던 이야기, 친구와 놀러갔던 이야기,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친구 이야기,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군대에서 발바닥이 닳도록 행군을 했던 이야기 등을 포근한 산길 위에 풀어놓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점점 다정해졌고 서로가 더욱 궁금해졌다. 숲이 숨을 쉴 때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숲의 정령들이 둘의 주위를 맴돌며 축복해주고 있었다. 지하에서는 지구의 핵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하늘 너머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사이를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여자가 조용히 탐험하고 있었다.

그때 아쉽게도 나무 그늘 외에 또 하나의 거대한 그늘이 그들의 머리 위로 겹쳐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비 소식이 없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전진만 할 수는 없었다.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보기도 하였지만 곧장 뒤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무성한 나뭇잎이 만들어주는 포근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촉촉한 한두 방울이었다. 그것은 웅장한 트레몰로를 예고하는 전주곡일 뿐이었다. 얼마 후 하늘은 구멍이 뚫린 듯 두껍고 단단한 빗줄기를 정신없이 쏟아부었다. 머리카락 끝과 코 끝, 턱 끝에 몽글몽글한 빗방울이 매달렸고 피부가 번들거렸으며 옷감이 밀착되어 색이 투명해지고 진해졌다. 흰 운동화는 물을 머금어 디딜 때마다 찍찍 소리를 냈다.

그들은 빗줄기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쯤 뜬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로의 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도 뒤이어 끄덕인 다음 곧장 왔던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발이 진흙 속으로 푹푹 빠졌다. 안 그래도 축축한데 팔을 뻗고 있는 나뭇가지를 스칠 때마다 얼굴에 물이 튀어 깜짝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뭉개뭉개 피어나는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고 한껏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가지 않았다. 내리는 비에 급격히 태동하는 마음을 가렸던 복잡한 생각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얼마 후 표면 위로 빗발이 튀어 반짝이는 각자의 벌통에 도착했다. 벌들에게 빗줄기 하나는 해일이 몰려드는 것과 같은 효과일지 모른다. 벌은 갑작스런 해일 공격에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젖은 날개를 늘어뜨리고 패잔병처럼 발을 끌며 걷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둘러 덮개를 닫았다. 벌 수확량에 있어서 적잖은 손해가 예상되었다. 그래도 벌들의 세계는 괜찮을 것이다. 재능있는 건축가들의 작품인 벌집은 비 때문에 무너질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벌은 부지런한 곤충이라 곧 다시 힘을 내어 일할 것이고 꿀은 신비한 물질이라 웬만해선 상하지 않았다. 또 벌들은 세찬 날갯짓으로 집안에 침범한 빗방울들을 증발시켜줄 것이다.

벌통 수습을 끝낸 그들은 이제 무겁고 축축해진 몸을 수습할 차례였다. 각자의 트럭으로 들어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고 마른 옷과 젖은 옷을 교체했다. 앞유리에는 빗줄기가 흘러내려 산과 나무들이 찌그러져 보였다.

그는 사이드 미러로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고하정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갑작스런 빗줄기의 테러를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자꾸만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비 맞은 생쥐 꼴이었을 때 그는 마음이 저릿해짐을 느꼈고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그는 지금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조금 긴장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트럭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녀의 집에 들어온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트럭은 길 위의 집이었다. 이곳에는 연핑크색 쿠션이 있었고 여행에 관한 에세이가 조수석과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길 위의 집을 구경하고 나니 땅 위에 고정된 그녀의 집은 어떤 모양일까 궁금했다. 책상은 무슨 색이고 침대는 또 어떨까. 그것들은 어느 위치에 있을까. 창문을 열면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뜨게 될까.

김준기는 네비게이션 옆구리에 USB를 꽂았다. 그는 조금 전에 그녀의 트럭으로 다가가 영화를 같이 보자고 말했었다. 그녀와의 산책 때 그는 자신의 얘기를 천진난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나게 떠들었다. 그녀는 그와 있으면 즐겁고 편한 기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그는 건실하게 살아왔으며 때때로 경솔하기도 했으나 사고의 그릇이 점점 커지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거친 청년이었다. 그녀는 무조건적인 거절보다는 선별적인 거절이 필요한 단계에 왔음을 느꼈다.

둘은 달빛 아래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공기청정제 덕에 트럭에서는 향긋한 자스민 향기가 났는데 그들은 향도 자연스럽게 맡지 못했다. 누가 의자에 묶어놓기라도 한 듯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로 있었던 것이다. 영화 또한 말을 아껴 어색한 분위기를 부추겼다. 말수 적은 이 남자는 그녀와 있으면 말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했다. 영화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꾹 참았지만 힘들었다. 힘든 일을 하고 있어 피곤했는지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겨오기 시작했다. 억지로 몇 번 부릅떠봤지만 점점 무거워진 눈꺼풀은 결국 산사태처럼 눈동자를 덮어버렸다.

네비게이션은 지도를 검색하는 본래의 화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순간이동을 한 듯한 당혹감에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느긋한 자세로 책을 보고 있는 그녀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책장 끝을 살며시 쥐고 있었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녀의 부드러운 뺨에 사선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의 곁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심장 안쪽이 저릿해왔다. 항상 트럭에서 잠을 깰 땐 허공만이 그를 반겨주었었다. 지금 그는 허공이 아닌 안개에 휩싸여있는 것 같았다.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에게서 책을 빼앗았다. 수줍어하고 있는지 지루해하고 있는지 불편해하고 있는지 알려면 그녀의 표정을 보아야했다. 그녀가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살며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입술을 한껏 옆으로 늘어뜨려 미소를 지어보였다. 수줍음이 만면했던 얼굴에선 이젠 자신감이 엿보였다.

“뭣 좀 먹을래요?”

한숨 자고 일어난 사람의 개운한 말투로 그가 말했다. 그녀가 정면을 보며 조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려 흙바닥을 밟으니 버튼을 누른 것처럼 햇빛의 명도가 한 단계 밝아졌다. 밝은 햇빛이 기분 좋게 얼굴에 닿았다.

그들은 트럭 적재함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그들 주위에는 신선한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김준기의 트럭에서 날라온 컵라면과 즉석밥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놓여 있었다. 그는 그가 준비한 메뉴가 그녀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기색을 살폈으나 그녀는 오히려 마침 라면이 먹고 싶었다며 허겁지겁 면발을 흡입하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그의 눈빛은 사랑에 빠진 자의 그것처럼 따뜻하고 몽롱하였다.

밤하늘에는 낮에 날아다녔던 꿀벌이 구름을 묻히고 공중에 박힌 듯 무수한 점이 돋아나 있었다. 한 번씩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일벌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여왕벌이 긴 날개를 펼쳐 근엄하게 날갯짓을 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저녁이 되니 아카시 향이 바람결에 더 멀리까지 퍼져 왔다.

이제 벌들이 가져온 꿀을 인간에게 떠먹여줄 시간이다. 벌집판의 꿀은 이제 통 속으로 들어가야한다. 순서를 기다리며 정렬해 있는 벌통 덮개를 열었다. 벌집판 위로 황색 꿀벌들이 서로의 머리를 밟고 산책 중이었다. 정기간행물실의 잡지들처럼 가지런하게 꽂혀 있는 벌집판들 중에 하나를 들어올렸다. 젤리처럼 부드럽게 반짝이는 액체가 육각형의 방 위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언뜻 이슬방울이 모여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햇빛과의 각도에 따라 오묘한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에 더 가까웠다.

똑같이 생긴 일벌들이 보초를 서듯 어슬렁거리는 그 거대한 성채를 그곳의 주인인 벌들로부터 완전히 빼앗아오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벌집판을 살짝 털어내자 벌들이 웽하며 시동을 걸었다. 빗으로 그들을 억지로 밀어내자 침입자임을 확신한 그들은 맹렬하게 날갯짓하며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방충복 안으로 들어간 벌은 침을 발사할 것이다. 그녀는 훈증기를 눌러대며 필사의 방어를 했다. 그래봤자 쑥 연기는 잠시동안 마취 효과를 줄 뿐이다. 그것들에게 살충제를 뿌리면 간단하겠지만 그랬다가는 계속해서 날아야 할 벌도 죽고 미래의 금전인 꿀도 못 쓰게 된다.

그도 채밀 작업을 하고 있었고 벌에게 쏘이고 있었음에도 그의 신경은 온통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녀가 아파서 인상을 쓸 때마다 같이 인상을 쓰며 원인이 불분명한 통증을 느꼈다. 보다 못한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 또다시 나온 신경질적인 투로 옷에 묻은 벌을 털어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계속해서 벌이 달려들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붙은 벌이 더 부당해보였다. 쏘려거든 자길 쏘는 게 덜 치사한 일로 여겨졌다.

그는 평소 벌에게서 받는 통증과 상처에 대해 더 힘들게 돈을 버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틀 밤만 지나면 상처는 깨끗이 아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그마한 몸집의 그녀에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연기 속에서 따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약자의 고통으로 여겨져 죄책감과 양심까지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해줄게요. 이리 줘요.”

그가 그녀에게서 훈증기를 뺏으며 말했다. 당황한 그녀가 잠깐 훈증기를 뺏겼지만 곧 다시 되찾아왔다. 이것은 그녀의 일이었다. 그게 고난이더라도 그저 당연히 겪어야할 과정인 것이다. 당연한 일에 혹여 연민의 감정이라도 느낀다면 그건 그녀를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어요.”

그녀가 벌들에 둘러싸여 급박한 말투로 말했다. 그가 사슬 갑옷 같은 방충복 속에서 얼굴을 붉혔다.

“좀 다른 일 할 수 없어요?”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불끈 솟아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그가 큰소리로 내질렀다. 그녀가 황당함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편한 일 많잖아요. 왜 굳이 힘든 일을 하려고 해요.”

그가 그녀의 벌집판을 낚아채 탈탈 털며 말했다. 고하정은 그의 행동이 자신의 능력을 비하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걸로 여겼다. 좀 편해졌다고 이제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리 비키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벌침처럼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섭섭함이 남자의 가슴을 관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투다. 아직 특별한 사이라도 할 수는 없지만 아무 사이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날아오르는 벌떼 사이를 무심히 가르며 생각이 많은 듯 고요해진 얼굴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육각형의 벌집에 가득 차 있던 아카시 꿀은 탈탈 털려서 약수통으로 이동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리면 벌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황당은 하겠지만 절망은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그저 또다른 밀원수를 찾아 날아로는 것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벌통이 정렬해있었던 곳은 공허한 공기만이 흐르고 있었고 트럭의 적재함에는 수만 마리 벌떼와 그들이 가져온 달콤한 꿀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밤길을 달려 장소를 이동해야했다.

처음에는 그의 존재 자체가 거절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애의 몸짓을 멈출 작정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영영 그녀를 못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의 굳건한 단절 의지와는 다르게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흙먼지와 보이지 않는 벽을 뚫고 그녀의 트럭 운전석 차창 앞에 섰다. 차창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투명하여 그녀를 환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정면을 보고 있다가 그를 흘끗 보고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픈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그녀의 옆모습을 말없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 왼쪽에 자그맣게 붙어 있는 귀가 점점 발그레해지더니 진분홍이 되어 멈췄다. 그녀의 왼쪽 뺨도 같은 색으로 변했다. 그녀도 그 열기를 느꼈는지 갑자기 머리카락을 내려 귀를 가렸다.

그가 그녀의 마음을 읽을 여유는 없었다. 단지 답답한 속을 풀길이 없어 차창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차갑고 투명한 벽을 두드렸다. 세게 두드리면 또 부드러운 갯벌의 재빠른 칠게처럼 지하 세계로 숨어버릴까봐 점잖고 가볍게 톡톡 쳤다.

상대는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는 안 그래도 닫혀져 있는 입술을 일부러 꾹 다물기까지 하였다. 마음의 문을 닫는 것도 모자라 밀랍으로 완벽하게 봉하겠다는 완고한 의지의 표현 같았다.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공기를 헝클어뜨렸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겨드랑이에 모여든 바람을 낭패감과 함께 느끼며 초조하게 서 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친해질 기회도 없이 멀어졌는데 그게 자기 때문인 것 같다. 큰 소리 조금 내고 얼굴 조금 붉혔다고 우주를 닫아버리다니 세상은 참 잔인하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귀를 닫아버린 사람에게 말 소리는 소음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글자가 상대에게 보이는 방향으로 뒤집어 차창에 밀착했다. 그녀가 성가시다는 듯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었다. 글자를 읽은 그녀는 곧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어서 재빠른 손놀림으로 네비게이션에서 USB를 뽑아 차창으로 가져왔다. 닫힌 창으로는 그것을 건네줄 수 없었으므로 검지손가락 길이만큼 창을 열었다. 조금 열린 마음의 문으로 그녀의 가는 손가락을 다시 보게 되자 서글프고 반가웠다. 매일 보는 사이라면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열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수많은 대사와 배경이 웅크리고 있는 플라스틱 육면체를 내밀었다. 차창이 점점 더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손목까지 밖으로 내밀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열려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곧장 받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그 마음의 보이지 않는 깊은 곳까지 읽어내야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그녀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차창을 좀더 내렸고 이제는 완전히 내려 조수석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는 건지 그녀가 손을 떨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떨림이 아른거렸다.

그녀의 가는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잡으려는 것이 USB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외로 틀어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쏜살 같은 기차가 지나갔다. 그가 낮게 한숨을 쉬고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그를 보았다.

“다 보고 돌려줘요. 내년 이 맘때쯤 여기 있을 거예요.”

남자가 말하며 뒤돌아섰다. 여자의 당황하는 표정이 언뜻 보였지만 그 뜻을 해석하려 하지는 않았다. 푹신한 흙길 위를 세 발짝 걸었다. 그녀와 걸었던 푹신했던 산책길처럼 그의 미래도 그럴 것이라 여기며 행복했었다. 등 뒤에서 다급하게 열리는 문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길 위의 집에 올라탔다. 아카시 향과 자스민 향이 뒤섞인 향이 트럭 안에 가득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핸들을 따라 육중한 바퀴가 서서히 방향을 바꾸었다. 전설처럼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남자의 트럭이 멀어져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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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민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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