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신지옥도

by 펭하 posted Feb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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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지옥도

 

 

이것은 스스로 돌아보아 부끄럽지 않다는 자각을 갑옷 삼아

아무 것도 두렵지 아니하게 하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단테-

 

온통 어두운 청색으로 이루어진 방은 피카소의 청색의 시대를 연상케 했다. 어지러웠다. 나는 왜 여기에 온걸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집에 와서 같이 저녁을 먹으려던 중이였는데. 눈을 떠 보니 이곳이다. 방은 네모났다. 문이 있는 쪽 모서리를 지나면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냉장고 하나. 그 위에 아직 쓰지 않은 유리컵 하나. 그리고 방 모서리를 돌면 창문이 있었다. 또 다시 모서리를 돌면 헤드 쪽으로 맞닿아있는 침대 하나. 그 위에 유난히 새하얗게 놓인 베개하나와 어두운 톤의 홑겹 이불 한 장. 이불의 문양은 스트라이프였다. 그리고 스트라이프 여전히 청색의 잠옷을 입은 K. 마치 호텔 같았다.

 

등 뒤의 문고리가 잠기고 생각했다. 방 탈출 게임이구나. K는 청색 방을 하나씩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 위 메모지와 펜. 그리고 책상 서랍 안에, 찾았다, 흰 종이에 적힌 쪽지 하나. ‘그 사람을 만나 이유를 알아내시오뭐야 소름끼치네. 그 사람은 여기 나 말고 누가 더 있단 말이야. -걱정 마. -너는 곧 친구들이 생길거야-

 

냉장고를 열었다. 맥주가 가득했다. K는 맥주를 좋아했다. 나쁘지 않군. K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창문을 열어보기 위해서였다. 침대 높이까지 더하면 K의 눈높이에 딱 맞았다. 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는 창살의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 침대에서 내려와 K는 침대 바닥도 뒤졌다. 그는 평소 집착이 강한 편이었다.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아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의 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유난히 흰 베개였다. K는 베개의 천을 베껴내었다. -오 똑똑하군. 이것조차 못 찾는 사람이 많단 말이야.- 흰 쪽지가 툭하고 떨어졌다. ‘이름 K. 나이 28. 교통사고. 교사교사? 나 선생님이야? -그럴 리가-

 

K는  주섬주섬 베갯속을  다시 넣었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나가는 게 목표인가. 베개를 툭툭 털어 침대 위에 놓고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K가 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맥주 캔을 따는 것 밖에 없어보였다. 딱 봐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맥주캔에 K는 조금 들떴다. 잠깐, 먹기 전에 맥주 캔의 특징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평소 K가 좋아하는 브랜드 맥주캔이 6개씩 12. 어떤 문양도 기호도 조합할 수 없었다. 예민해진 K는 유리컵을 꺼내어 얼음을 채우고 맥주를 부었다. 밍밍한 맥주가 되어도 그는 얼음을 띄운 맥주를 먹었다. K의 아빠도 그렇게 먹었었다. 의자에 턱하니 앉아 세상 편한 자세로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K는 나른해졌다. 이 곳에 떨어지기 전까지 그를 짓누르던 일들이 떠올랐다. 아직 신입인 K. 일 못하는 부장 밑의 허둥대는 신입.

 

맥주는 쓰린 맛이었다. 한 캔, 그리고 두 캔을 채 마시지 못하고 그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꿈에서 K는 일만 했다. 지옥 같은 하루를 보내고 고개를 들었다. 다시 청색 방이었다. 꿈은 머피의 법칙 같은 하루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중요한 문서에는 커피를 쏟았고 셔츠의 얼룩은 보기 흉했다. 내가 한 작은 실수가 큰 실수가 되어 되돌아 온 하루였다. K는 꿈에서 깬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명처럼 너무나 작은 소리였다.

 

청색 방 안에서 몸을 편안히 누일 수 있는 곳은 침대 뿐이었다. 그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딱딱할 줄 알았던 매트리스는 의외로 편했다. 감기지 않는 눈으로 한참을 있다 그는 맥주를 마시고 잠이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냉장고 앞으로 갔다. 한캔, 한캔 반. 맥주는 달콤한 맛이었다. 그는 꿈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기분에 유리컵을 떨어트리고 침대에 누웠다. 포근함. 깃털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넌 독약을 마신 거야.-

 

한 여인을 만났고 여인의 품은 따뜻했다. K는 여인을 만지고 입을 맞췄다. 입술의 감촉이 생생하고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은 너무나 부드러웠기 때문에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한참 여인의 몸을 탐하다 잠이 깬 순간. 그는 생각했다. 다시 잠들고 싶다. 영원히 꿈에서 살고만 싶다. K는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두 캔을 더 꺼냈다. 그를 잠식하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여인을 다시 만나야겠다. K는 마시고, 잠들고, 잠에서 깨고, 마시는 일을 맥주가 줄어들 때 까지 반복했다. 그 후에야 K는 자신의 몸이 너무나 나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 K는 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중독. K는 중독에 취약했다. 꿈이 점점 흩어졌다.

 

타는 목마름이 느껴졌다. K는 깨달았다. K가 집착하면 할수록 심해지는 것은 갈증이고 집착의 대상의 꿈에 나오는 것이다. 그는 다른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로지 생각은 꿈속의 여인 뿐. 맥주, 맥주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맥주는 한 캔 밖에 남지 않았다. 한캔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K는 생각했다. 어쩌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지도 몰라. 아마도. 마지막 한 캔을 비우고 찌그러트리는 순간 철커덕하고 방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좁은 계단만이 있는 짧은 복도가 나왔다.

뭐야, 탈출이야?

K는 튀어나갔다. 청색 방의 청색 복도. -탈출 할 리가. 아직 그에게서 이유를 듣지 못했는걸-

계단과 내려가는 버튼 밖에 없는 엘레베이터. K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엘레베이터를 기다릴 시간 따위 없었다. 하지만 계단을 돌고 돌고 돌아도 끝이 나오지 않았다. 각 층마다 방이 존재할 뿐. 어떤 방은 문고리가 덜컹덜컹 이제 막 들어간 사람처럼 보이는 방도 있고 어떤 방은 고함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기괴한 건물이었다. 그래, 엘리베이터. 엘레베이터에는 층수가 적혀있지 않았다.

도착한 엘레베이터는 노란빛 조명을 하고 있었다. K는 단숨에 뛰어들었다. 버튼은 오로지 하나. 일층. 엘리베이터는 지상에 멈췄다.

 

지상의 현관의 파사드에는 지옥도가 그려져 있었다. 악마와 불에 타죽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왜 화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잔뜩 화나있는 사람들, 노역하는 자들, 꿇어앉아 하늘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들, 찔린 자들, 뭉개진 자들로 가득했다. 고통과 번뇌, 신음,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이 눈 앞에 그려져 있었다. 현관문을 지나 K는 편의점을 찾았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인데, 그곳은 바로 자신의 오피스텔 앞이었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길을 건너 20m만 가면 편의점이 나온다. 문득 섬광이 스쳤다. 그래, 나는 맥주를 사러가다 사고가 났구나. 내가 사는 오피스텔 앞 길은 새벽에 차가 많이 안다니지. 아마도 누군가가 방심했던 거겠지. 그래서 뺑소니 차량에 치였던 것이다. K는 억울했다. 집에는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친구와 아직 먹지 못한 배달음식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텐데. 아니야 지금 쯤이면 그녀도 나의 사망사실을 알았을까.

 

K는 붉은 하늘과 대비되는 청색 도시의 기괴함에 소름이 끼쳤다. 하늘은 뭉크의 절규처럼 화산이 폭발한 듯 매쾌하였고 주변의 건물들은 침잠되어 있었다. ‘BI편의점채도가 낮은 간판이 깜빡였다. K는 편의점으로 달렸다. 예상 외로 편의점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편의점 치고는 굉장히 넓은, 그것보다 훨씬 더 광대한 마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들은 K와 똑같은 청색의 스트라이프 잠옷 차림이었다. 사람들은 바쁘고 각자의 물건을 찾고 있었다. 라면을 찾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라면 한 상자를 가지고 옆 사람과 다투기 직전에 있었다.

라면을 빼앗긴 남자는 눈이 빨개진 채 울부짖었다. -아직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거야.. . 불쌍하지.- K는 남자가 달려들까 싶어 빨리 진열대를 빠져나와 음료코너로 들어섰다. 맥주는 많았다.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K는 깨달았다. 나는 돈이 없지. 그는 죽기 직전 들고 나왔던 만원을 기억해냈다. 호주머니를 뒤지려 했지만 잠옷에는 호주머니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하는 직원이라고는 멀리 보이는 계산대 직원 한 명밖에 없었다. K가 계산대로 달려가자 줄을 섰던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줄 서요.”

거 왜 그럽니까.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 기다리나?”

K는 죄송하다는 목례만 하고는 점원에게 물었다. 기계적으로 물건을 찍던 점원이 고갯짓을 했다. [CS센터] Customer Service 센터 

‘450, L씨 맞으시죠?’

등 뒤로 점원의 일하는 소리가 흩어졌다.

 

K는 고객 응대센터의 문을 열었다. 똑같은 몰골의 초췌한 남자가 K를 맞았다. 책상 위에는 변호사 M이라고 적힌 이름이 보였다. 저승에 온 마당에 변호사가 마트 고객응대센터에 웬말인가.

앉으시죠.”

, 맥주를 사러 왔는데요.”

남자는 퀭한 눈으로 바라봤다.

돈이 없으시죠?”

. 단 한 박스, 아니 네댓개라도 사고 싶습니다.”

소박하시네요.”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시죠? 우린 모두 죽었습니다. 여긴 저승으로 가는 길목이구요.”

, 그렇군요. 그런데 저는 지금 맥주가 매우 먹고싶습니다. 갈증이 아주 심합니다.”

이 곳에 있는 모두는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거나, 무언가가 하고 싶습니다. 그들도 지금 우리가 이곳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찾고 있어요.”

그가 켁켁거리며 기침을 했다.

 

저를 예로 들면 생전에 변호사 일을 했습니다. 고객을 상대하다 이 곳에 있게 되었지요. 옛날로 치면 지옥의 문지기 쯤 됩니다.” 남자는 기괴하게 웃었다.

고객을 상대할 때마다 고통이 밀려옵니다. 죄책감, 그리고 하지 못한 일들이 떠오르지요. 저는 아직 그것을 떨치는 법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 한 칸의 방 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 때 그렇게 하지 말걸, 그 때 그러지 말걸 하면서 말이죠.”

남자는 눈물도 마른 듯 했다. 굽어진 등에서조차 회한이 느껴졌다.

혹시 쪽지를 찾으셨습니까?”

K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죄명이 적혀 있을 겁니다. 이 곳은 지옥입니다.” -드디어 알아냈군.-

 

교사(敎唆). 무엇을 교사했단 말인가. 내가 살면서 한 일중에는 어린이 단체에 기부한 일, 대학교 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일한 일, 맞다 버스정류장에서 할머니 짐 내리는 걸 도와준 적 있다. 그건 여자한테 잘보이기 위한 의도가 더 많았다면 제외한다고 치면 살아 온 날들을 아무리 돌이켜 봐도 무엇이 잘못됐단 말인가. 요즘같은 시대에 지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처럼 조용히 살다 사고로 죽은 사람이 올 정도면 지옥도 과원이 되지 않나.

 

M으로부터 알아낸 사실에 따르면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타인에게 저지른 큰 잘못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고 했다.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꿈을 통해 무의식을 항해하는데 원래 망자는 잠이 들지 않기에 생전에 좋아하던 물건이 그 매개가 되어 잠이 들게 해주었다. 내가 했던 일을 회상할 때에 느끼는 죄책감이 화폐로 전환되어 손목에 찍히면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또 잠에 들고를 반복했다. 그 무한한 고통. M은 자신의 일을 좋아했던 것이다. 몇 명의 손님을 맞아야 그는 잠에 들 수 있을까. 이 도시의 끝은 깨지지 않는 거울로 되어있다고 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마지막 순간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라.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라. 도망갈 곳은 없다. M은 나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너의 행운을 빌지-

 

그제야 K는 자신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생각했던 방탈출 게임과 비슷하다. 자신의 몸이 힌트라고는 왜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K는 도시의 끝을 향해 달렸다. 민낯의 나를 마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보기로 다짐했다. 전산오류 같은건가. 혹시 이 지옥에도 전산오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따져야겠지. 그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도시의 끝에 도착할수록 지옥도에서 보았던 지옥이 떠올랐다. 혼이 나간 여러 명의 사람들이 찌그러진 채 누워있고 돌아다녔다. 옛날의 지옥과는 달랐다. 몽둥이에 찢기고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지옥 대신, 좀비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연기에 휩싸인 좀비도시. 처벌하는 자가 없어도 처벌 받게끔 지어진 도시.

담배 한 대만 사주시오. 나중에 내가 그쪽한테 갚겠소.”

볼이 움푹 패인 해골같은 남자가 말했다. K는 애써 모른 척 하며 끝을 향해 걸었다. 멀리서 자신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바라보았다. K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은 줄무늬 옷을 입은 영락 없는 죄수의 모습이었다.

 

K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결국 내가 한 일들이 나에게 돌아오는구나. 알면서도 모른 척 한 일들,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일들, 구린 냄새가 나는 일들, 길가다 남의 돈을 주운 일까지 생각났다. 거대한 거울은 눈물로 범벅이 된 K의 얼굴을 비추었다. 후회. 나는 왜 생전에 후회를 하지 않았던가. 고등학교 때 배우지 않나. 독립운동가들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것에도 후회를 느낀다는데 나는 왜 죄책감은 안좋은 것이라 치부했던 것일까. 요즘 세상은 정신승리라는 말로 자신을 무장하고 그것을 단단한 정신이라고 말하지 않나.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밑바닥에 있는 수치심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아서 나를 죽음 이후까지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 군-

 

어린 시절 일곱 색의 심이 든 볼펜이 너무 신기해서 문구점에서 훔쳤다가 돌려놓았다. 그 때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었다. 하지만 그 뒤로부터는 스스로를 둘러싸고 변명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일곱 살 때마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나는 물건을 돌려놓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K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무시한 일에 대하여 생각했다. 시골에서 전학온 K는 무식한 어머니가 부끄러워 틱틱대었다. 수능치던 날 어머니가 없는 돈으로 사 준 빨간 속옷이 왜그렇게도 부끄럽던지. 속옷을 던져버렸었다. 회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못느꼈던 슬픈 감정이 K를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버스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나도 모르게 발을 걸었던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몇 초간 바닥에 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내 발에 느껴졌던 감촉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고 아무 말 못하고 겨우 내리던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누구하나 일으켜드리지 않았는데.

여자친구 몰래 바람을 피려다 불발로 끝난 적도 있었다. 대학교 철없던 어느 날. MT를 갔다가 만난 신입생 여자아이가 내가 좋다고 했다. 술김에 게임을 하다가 몸이 닿았었다. 그 짜릿한 전율을 잊지 못하고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때쯤 내가 손을 잡고 달렸다. 그 때 술김에 넘어져서 팔이 부러지지만 않았다면 정말 용서받지 못할 뻔 했다. 한두 번 자랑삼아 이야기 했던 기억 마저 수치심이 되었다.

군대에 있던 시절 후임병이 내가 한 일에 혼이 났을 때 나는 나서지 못햇다. 나는 비겁했다. 그 때는 나역시 생존의 문제라고 여기며 나 아닌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숨겨 놓았던 빗장을 풀었다. 순수했던 시절부터 타락했던 시절까지 나 홀로 공상에 빠진 채 시간을 여행했다.

시간이 얼만큼 지난지도 모를 만큼 흘러있었다. 눈물로 온 몸의 수분이 빠져나간 것 같을 때 그는 몸을 일으켰다. 맥주를 사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윤동주의 자화상 중에서-

 

 

 

K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맥주 4캔이었다. 4캔이면 두 번정도의 잠과 맞바꿀 수 있다. ‘329K씨 맞으시죠.’ 점원은 나의 슬픔을 너무도 쉽게 맞바꿨다. 나는 삼백이십구층을을 눈물로 올라왔다. 계단에서 중독된 사람, 쓰러진 사람, 울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야.-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느끼지 못했지만 소리는 고주파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로 단어들로 문장으로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k의 발목을 잡았다. ‘나 좀 살려줘. 나를 좀 살려줘.......’

k는 죄송합니다 라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손길을 뿌리치고 나오면 끔찍한 기억들이 k를 멈춰 세웠다. 마트에서 사탕을 훔치는 친구의 손길을 모른 척 했던 것,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해놓고 나태했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시간들, 거짓말, 위선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법한 일들은 하나하나 k의 몸에 달라붙었다. 삼백 이십 팔층. 누군가의 고함소리로 복도가 뒤덮였다. 청색의 복도와 바깥의 빨간 화염의 기운이 합쳐져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너는 꼭 성공하길 바라-

 

맥주 캔 따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이 곳을 나가면 지옥을 탈출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까. 아니면 천국. 혹시 천국으로도 갈 수 있는 걸까. K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공포였다. 이것 역시 지옥에서 느껴야 할 감정의 일부였다. 맥주 한캔 반을 마시면 잠에 든다. 한 캔을 마셨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해 보라구.- k는 잠에 빠져들었다.


인터넷 세계를 떠돌다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남성과 여성이 관계하는 영상. 누가 봐도 몰래 찍은 것이 분명한. 그리고 적나라한. 인터넷에서는 간단한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으로 영상에 누구나 접근이 가능했다. 처음엔 잘못된 줄 알면서도 어느새 즐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남자를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는 여자와, 그 여자를 쾌락의 도구로 보는 것 같은 남자.

찍는거야?’

아냐아냐. 지울거야.’

수치심이 들었다. 무의식에 있었던 장면들이 살아나 그를 휘감았다.

나쁜놈. 지우라고.’

이따가.’

k는 깨어났다. 펜을 들어 메모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쾌락으로 바꾼 것을 참회합니다.’ -뉘우쳐라, 그리고 깨닫고 기도하라.- k는 목소리에 따라 두 손을 모았다. 평소 종교를 갖지 않았던 k였지만 지금은 목소리의 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욱 들여다보아라.-

 

마지막 두 캔의 맥주 캔을 땄다. 바람이 앞머리를 스쳤다. 커다란 나무 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고목 밑의 벤치. k가 나온 고등학교였다. 또다시 청색의 꿈이었다. k는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웅얼웅얼거리고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고등학교 때 한 때 친했던 친구였다. 이름은 재원. 재원은 홀로 교실 뒤편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다. 그 때 내 옆에 있던 한열이 재원을 향해 달려가 재원이 앉은 의자를 발로찼다. ‘, 돈 가져오랬지.’ 재원은 그 아이 손에 끌려나갔다. 체육시간 이었다. 둘씩 짝을 지어 배구 연습을 했다. 재원은 손목에 흰색의 아대를 하고 있었다. 온동 청색인 꿈 속에서 보이는 하얀 빛 같았다. 홀린 듯 걸어간 K는 물었다. -드디어 찾았군-

아까는 어떻게 됐어?”

맞았지 뭐.”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K는 고향에 온 것 같았다. 내가 찾던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나 K는 청색 방으로 돌아왔다. 꿈 속에서는 내가 무엇을 찾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 그래서 꿈이 흩어지기 전에 적어야 한다. K는 책상 위에 있던 메모지를 꺼냈다.

 

흰색 손목 아대 남자. 배구. 고등학생 재원.

유난히 새하얗게 보이던 재원의 아대와 나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빚을 진걸까. -그걸 찾는 게 너의 마지막 일이야.-

마지막, 마지막이었다. k는 캔에 남은 맥주들을 탈탈 털어 마셨다.

 

맞았지 뭐.”

재원아.”

재원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재원은 부탁하는 눈으로 K를 쳐다보았다. 재원아... K는 깨달았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가상의 일이 아닌 실제 K의 열여덟의 일이었다는 걸. 딱 그 대화까지였다. 그 대화를 끝으로 기억속에서 재원이 지워진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이후 재원은 자퇴를 했다. 그리고 스물 둘이 되었을 때 동창 카톡방으로 뉴스처럼 재원의 부고가 날아왔다.  K는 그 때 한동안 소식이 끊긴 친구의 부고에 모른척 시험공부를 했다. 그 동안 사귄 다른 친구들이 있겠지. 새학기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귄 자신을 얼마나 기억할까. 가서 내야하는 부조금도 부담이되었다. 없는 살림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느라 빠듯한 형편이었다. 재원의 죽음과 관련한 무엇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뭐야?”

 K는 재원의 팔을 잡아 채었다. 아대를 벗겨냈다. 손목에는 선명히 베인 자국이 있었다. 어떤 상처는 선명하고 어떤 상처는 흐릿했다. 학교를 나오지 않은 며칠간 이런 일이 있었던 거구나.

재원아.”

다행히 정맥을 그었대. 레이저로 지졌어. 이제 살만 해.”

눈물로 가득했던 재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원의 몸은 멍투성이였다.

너 너무 힘들었구나. 그동안 내가 몰라줘서 미안하다.”

수업이 마치고 나는 재원을 데리고 라면을 먹었다. 라면이 식어갈 때 쯤 재원이 웃었다.

나는 그 말 때문에 나를 안좋게 생각하는 줄 알았어.”

무슨 말?”

저 새끼 찐따잖아.’

그 말을 끝으로 재원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저 새끼 찐따잖아라는 말이 악마의 목소리처럼 변조되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그 때도 친구를 구하기가 무서웠다. ‘너 쟤랑 친해?’라는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건 아니, 저 새끼 찐따잖아.’라는 말이었다.-드디어 기억해냈군.- 그 말을 재원이가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거구나. 이게 바로 내가 고통을 받는 이유구나. 내가 친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한열은 재원의 욕을 한 바탕 쏟아냈다. 얼굴이 곱상하네, 머리는 좋아서 선생님한테 알랑방귀는 뀌네, 뭐네. 나는 듣고 있었지만 점심시간에 재원에게 달려가는 한열이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한열도 폭력적인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였다. 선천적으로 폭력과 분노가 몸에 베어버린 친구였다. k는 죄책감에 무릎을 꿇었다.

 

재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러 사람의 목소리처럼 무섭게 울렸다.

그 뒤로 난 이 세상에 나 혼자란 걸 알게되었어. 믿었던 너 마저 내 편이 아니였지. 나는 그 뒤로 내리막길을 타다 죽었던 거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용서 해 주겠니?”

용서라. 넌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걸까. 아니면 이 지옥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런 걸까.”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어릴 때로 돌아가서 라면을 먹고싶어. 그러면 너도 살고 나도 살지 않았겠니? 내가 니옆에 있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말에 재원은 분노를 잠시 멈추었다. 주위의 색깔이 조금씩 밝아져왔다.

넌 공부를 잘했지. 나는 그런 니가 마음 속으로 부러웠어. 얼굴도 남자치곤 예쁘게 생겨서 다른 아이들도 속으로는 부러웠을거야. 그런 니가 성격이 여리니 애들은 가만두지 않았던 것 같아. 미안해. 미안하다.”

만약 문이 다시 열리면 말이야. 당장 문을 열고 달아나. 뒤돌아 보지 말고 뛰어.”

 

꿈에서 깨어났다. k는 정신없이 메모장을 찾았다. ‘참회합니다. 친구의 죽음을 간사한 말들로 살인을 교사한 죄를 참회합니다.’

-왜 그 때는 알지 못했나-

소리가 선명해졌다. 소리는 심장안에서 나왔다. 양심의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아있던 양심이 목소리를 얻고 있었다.

제가 어리석고 비겁했습니다. 이렇게 뉘우칩니다.”

-양심은 너의 편이나, 사과는 받는 사람이 하는 것. 너의 작은 불의가 한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의 목숨을 자살로 이끌었다. 너는 나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었겠지. 니가 저 문을 열고 나가면 결과는 두 가지야. 받는 사람이 너의 사과를 받아주었다면 좋은 곳으로 가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넌 다음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네가 용서를 받아 빠져 나간다면 나를 기억해라. 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라. 용서를 받았다면 양심에 따라 살아라. 그럼 너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겠다.-

k는 무릎을 꿇고 참회하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저 문을 열고 나가자. 재원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머릿속으로 스쳤다. 뒤를 돌아 보지 말고 뛰어라.

철컥

문이 열렸다.

 

 

k는 밝은 빛 속에서 눈을 떴다. 지옥에서 보았던 매쾌한 연기와 불, 청색, 붉은 기운은 사라졌다. 그리고 k의 옆에는 간호를 하는 여자친구가 놀란 눈으로 k를 쳐다보았다. 병실은 지옥에서 본 방구조와 거의 흡사했다. k는 수일을 혼수상태로 있었다고 한다. k가 나간 뒤 과속을 했던 차량은 k를 들이받았고,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112에 신고했다고 한다. 자동차 파편과 k의 피가 뒤덮여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간지옥을 셀 수 없을 시간 동안 떠돌고 왔던 k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여자친구는 기절을 했다.

k는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하반신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자기 다리가 안움직이지.”

k는 여자친구를 끌어 안았다.

난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거야. 그 것만으로도 축복인걸

며칠 후 k는 운전자를 만났다. 운전자는 k의 앞에서 울고 있었다.

울 수 있을 때 마음껏 울어요. 그리고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더 이상 돌아보지 말아요.”

k는 웃었다. 양심을 되찾은 자와 용서를 알게 된 자의 웃음이었다. k는 사고현장에서 미처 수습되지 못한 거울 조각으로 자그마한 손거울을 만들었다. 그 뒤에는 문구를 새겨넣어 운전자에게 선물했다. 목각으로 새긴 하나의 문장. 

후회란 천국을 바라보면서 지옥을 느끼는 것이다     


나를 찾아오지 말아요. 그렇게 오랫동안 짐을 갖고 살지 마요.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합니다.”

운전자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은 죄를 짓고 살아간다며. k는 말했다.

용서는 하는 사람 마음입니다. 용서 받았다면 뒤돌아보지 마세요.”

 -이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는가-


k는 다음날 병원에서 퇴원했다. 간호사와 의사들은 k에게 박수를 보냈다. k의 소식은 언론에도 알려져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으나 그는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다. 인터뷰를 할 만큼 떳떳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k의 인터뷰만 빠진 채로 기사가 났다. 유명한 사이트 대문에 실리면서 k를 응원하는 댓글이 달리고 k의 얼굴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렇게 병원을 유명인사가 된 채로 k는 병원을 나왔다. 재활치료를 해야 하지만 통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연기 하나 없는 상쾌한 하늘과 모든 것을 비추고 있는 달. 달이 실컷 보고 싶어서였다. 퇴원하는 날 밤에는 달이 밝았다. 그날 밤 k는 여자친구와 치킨을 시켜 맥주를 마셨다.

 

다시사는 삶은 그림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메세지 하나

, 나 재원이다. 기사보고 문자한다. 그 때 니가 나한테 라면사 준 거. 그것 때문에 나 살았다. 고맙다. 이제야 연락하네. 언제 한 번 술 한 잔 하자.’

k의 동공이 커졌다. 휠체어 위에 얹은 k의 발이 꿈틀 꿈틀 움직일 것만 같았다. 지옥에는 없는 이세상의 달빛이 세상을 고루 비추고 있었다.  이 것은 꿈일까, 아니면 천국일까.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름 : 이유진

이메일: mletmt@naver.com

전화번호: 010-9514-5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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