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우리의 여름은

by 릴리 posted Mar 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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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은


인스턴트 연애를 하기로 했다. 금방 뜨거워졌다가 식어 버리는, 온기가 가시고 난 자리에 자극적이고, 얼얼한 맛과 조금의 후회가 여과물로 남는 그저 그런 연애. 마지막에 그가 했던 말이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지민아, 너는 좀 연애에 대한 환상을 버릴 필요가 있어.’



나는 애써 상처 받지 않은 척을 했다. 아무리 지지고 볶았던 연애라도 결국 남는 건 마지막 모습이라길래, 팔자에도 없는 쿨한 척을 해봤다. 우리는 한강진 역에서 헤어졌다. 서로의 집에서 딱 30분 걸리는, 누가 더 손해랄 것도, 배려랄 것도 없는 더치페이 이별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면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였는데, 일부러 그의 앞에서 택시를 잡아 먼저 떠났다. 택시에 타자마자 기계처럼 집 주소를 읊고,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무심코 말한 마지막 말의 모서리가 너무 뾰족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나쁜놈, 자기는 뭐 처음부터 연애 박사였나? 첫 연애인데 그럴 수도 있지. 뭐, 환상을 버릴 필요가 있어? 그래도 어떻게 사랑했던 사람한테 그딴 싸가지 없는 말을 할 수 있지? 불필요한 감정이 밀려들 틈도 없이 평소엔 하지도 않았던 상스러운 말들을 중얼거렸다.



-



[당산역 스타벅스에서 봐요. 다음 주 일요일 저녁 8시.]



품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억지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외치는 게 불편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를 악 물었다. 애를 써봤자 그는 이제 내게 관심도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다보면 누군가 확 바뀐 내 모습을 그의 귓가에 슬쩍 흘려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었던 그에게 시시껄렁한 회전목마 밖에 되어 주지 못했다는 게 곱씹을수록 자존심이 상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러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벼운 만남,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산역 스타벅스. 흔한 소개팅 자리는 아니었다. 혜화나 강남, 이태원이나 연남동처럼 훨씬 더 전형적이고 무난한 장소들이 차고 넘쳤는데, 굳이 ‘당산’의 ‘스타벅스’에서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전화기 너머 덤덤한 남자의 목소리에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겨우 눌러 참았다. 약속 시간 때문이었다. 일요일 저녁 8시. 다음 날 출근을 앞둔 직장인인 둘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메신저도 귀찮아서 초면에 전화부터 걸고 보는 사람에게 뭘 더 바라나 싶어서였다.



“흐음...”



저녁을 먹고 7시 10분 즈음 집에서 출발했다. 다 끝나가는 주말 밤, 2호선은 한산했다. 자리가 드문드문 남아 있었지만, 굳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고 싶지는 않아서 문가에 기대 서 있었다. 여름이라 길어진 해 덕분에 아직 밖이 밝았다. 낡은 전동차가 때때로 덜컹이며 고물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럴 때마다 덩달아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도 흔들렸다. 당산역 2호선 근처 스타벅스 검색 결과 18건. 그 중에 직접적으로 지점 이름에 ‘당산’이 붙은 건 3개였다. 낭패였다.



[안녕하세요.]
[당산에 어느 스타벅스에요?]
[당산에 스타벅스가 좀 많은 것 같아서요.]



망설이다가 메신저를 보냈는데, 생각보다 1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초조했다. 이 사람 뭔가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상식적으로 소개팅 당일, 만남이 1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 오는 연락은 재깍재깍 받는 게 매너, 아니 기본 아닌가. 초조하게 액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곧이어 손에 쥔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또 전화였다.



[여보세,]


[당산역 1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요.]


[아, 네.]



친하지도 않은, 아니 아직 서로 얼굴 한 번도 안 본 사이에 벌써 두 번째 전화를 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어느 타이밍에  전화를 끊을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다음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음성이 요란한 음악과 함께 전동차 안을 채웠다. 다행히도 소개팅 상대가 먼저 말을 이었다.



[어디 쯤이에요?]


[이제 신도림 지나요.]


[다 와 가네. 커피 아이스로 드실 거죠?]



약속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10분 쯤 있다가 주문하겠다는 간결하고, 깔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용건만 간단히. 전화 에티켓을 원칙적으로 준수하는 스타일은 또 처음이라 통화를 끝내고도 한동안 좀 멍했다.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들은 많다더니. 어떤 의미로는 간만에 느껴보는 상식 밖의 신선함이었다.


높고 많은 계단을 일부러 하나씩, 천천히 밟으며 나왔다. 1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오른쪽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곧장 2층으로 향했다. 매장 안에 흐르는 음악의 비트보다 심장 박동이 더 빨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재 되어 있지 않은 지향은 내게 언제나 모험이었다. 애초에 날 때부터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같은 소모적인 만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 이제 와서 인스턴트를 지향한다고 해서 쉽게 길들여질 리가 없다는 뜻이다. 늘 소개팅 직전이 되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도망가, 본인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곤란에 빠지게 만들 만큼 대책이 없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현우씨, 맞으시죠.”


“아, 오셨네요.”



마침내 용기를 내어 2층에 입성한 나는 어렵지 않게 소개팅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현우라는 이름의 첫인상이 무채색으로 와 닿았던 건 그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위아래로 검은 착장과 온통 어두운 배경,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는 브이자와 잔뜩 노이즈 낀 사진의 퀄리티가 그의 성격을 대변해 주고 있었으니까.



“콜드브루로 시켰는데, 얼음이 너무 녹았네요. 다시 시켜드릴,”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저 원래 커피에 얼음 녹여서 먹어요. 카페인 센 거 마시면 밤에 잠이 잘 안 오니까...”



괜히 어색해서 오버를 하며 손사래까지 쳤더니, 어느정도 내 말을 믿어주는 눈치였다. 그가 펼쳐 놓았던 책을 덮었다. 시선이 자연스레 책 표지 위로 옮겨갔다. 손미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가볍게 분위기를 풀 만한 대화 주제가 될까 싶었던 기대가 1초도 안 돼서 수포로 돌아갔다. 난생 처음 보는 시인과 시집이었다. 머쓱해서 커피만 연신 홀짝이는 나와는 달리, 그는 이런 자리가 익숙한 듯 꽤 편안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엄청 일찍 오셨네요. 집이 근처신가요?”


“근처는 아니고, 일산에 살아요.”


“일산이요?”


“엄밀히 따지면 일산이 아니고 행신인데, 다들 잘 모르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1082번 타고 오셨겠네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일산으로 들어가려면 버스를 타고 좀 더 가야 한다고, 엄연히 행정 구도 다르니, 다같이 일산으로 묶어 퉁치지 말라고 얘기하던 그가 생각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젠 나에게 구애인이 되어버린 그. 그는 항상 거기 사는 사람이 아니면 차이도 못 느낄 이야기를 뭐 대단한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었다. 뭐, 덕분에 몇 번 가보지도 않은 경기도 저 너머의 일들까지 다 알게 되었지만.



“신기하다.”


“뭐가요?”


“행신동 아는 사람은 오랜만이라서요. 혹시 그 근처 사세요?”


“아, 그건 아니에요.”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가 된 구애인과 앞에 앉은 소개팅남. 그러니까 그와 현우가 같은 동네에 살고있는 건,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짧은 침묵이 맴도는 사이, 대답을 고민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진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헤어지던 날의 기억이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내민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냥, 몇 번 가본 것 뿐이에요.”



눈이 마주쳤다. 아직 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괜히 마음이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시선을 먼저 피했다. 현우의 눈빛은 옷차림을 닮아 색채가 없었다. 무미건조한 느낌이라기 보다는 담백했다. 다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직 서로의 직업도, 성격도, 취미도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사이 임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이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제가 잘못 짚었네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용기를 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앞에 앉은 그는 나의 과거를 모르고, 그는 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나는 거쳐온 시간들을 그에게 털어놓을 용의가 없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말을 뱉어놓고도,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현우가 한 문장을 덧붙였다.



“지민씨가 아니라, 지민씨가 전에 만나던 분이구나.”


“...뭐가요?”


“행신동이요.”



나는 그 자리에서 뛰쳐 나가고 싶었다. 너무 많은 감정이 속에서 뒤엉켜 어떤 결심 없이는 먼저 꺼내기도 힘든 이별이라는 게, 그의 입에서는 이토록 담담하고도 잔잔하게 재구성 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결코 멋 없는 이별을 자랑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는 그의 앞에서 사랑을 잃은 못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실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외로움 속을 헤맨 나머지, 이대로 있다가는 그에게 무턱대고 내 과거부터 꺼내 놓을 것만 같았다.



-



우리는 말부터 놓기로 했다. 아직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말을 놓고 시작하는 이유가 있냐는 나의 질문에 현우는 아무렇지도 았게 대답했다.



“우리 공통점 두 개 정도 있잖아요. 그걸로 충분한 것 같은데.”



‘일산’과 ‘행신’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과, 가을에 호수공원을 거닐어 보았다는 것. 현우는 그 정도면 공통점이 충분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호칭 하나에 깐깐하게 군 게 되려 머쓱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현우가 웃었다. 마주 앉은 지 10분만에 현우의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 순간, 조금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투명한 물이 가득 담긴 통에 물감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져 서서히 번져가는 것처럼, 온통 무채색이던 그와, 그 주변의 세상이 색상과 채도를 되찾아 가는 듯 했다.



“선유도 갈래?”



뜬금 없이 선유도를 가자는 현우의 물음에 우리는 반 쯤 남은 콜드브루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나 택시를 타도 됐지만, 우리는 우선 양화대교 쪽으로 걸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음식을 먹지 않아도, 계산할 때가 되어 서로 눈치를 보지 않아도, 2차는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어떤 질문이 실례가 되는 지에 대해서도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는 물어보지 않아도 서로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았고, 언젠가 한 번 쯤은 스쳤을 지도 모를 공간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눠 가진 사람들이었다.



“저기, 솔직히.”



언제나 이야기를 하기 보단 듣는 편에 가까웠다. 말하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주위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그리 원하지 않을 때에도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감정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보폭을 맞춰 걷는 현우는 뭔가 달랐다. 마치 내가 운을 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침묵을 지키며, 분위기가 쳐지지 않게끔 멘트를 건넸다.



“소개팅 나오기 싫었던 거지?”



눈을 깜빡이며 질문을 건네는 내 얼굴을 보고 현우가 웃었다. 두 번 째 웃음이었다. 그 애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잃고 쳐다보게 된다. 사람에 데인 상처가 없는 것처럼 여유롭고, 동시에 그걸 자랑 삼아 상대방을 깔보거나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게,”


“당산역 스타벅스에서 보자고 해서?”



민망해서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나의 물음에 웃음기 섞인 대답이 따라 왔다.



“완전 아니라고는 할 수 없고, 딱 반반이야.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집에 가고, 마음에 들면 같이 걸을까 했지.”



우리는 이제 막 양화대교 남단 교차로를 지나고 있었다. 주변에 차가 속도를 내어 달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워서, 나는 내가 현우의 말을 잘못 이해한 줄 알았다. 같이 걷는다는 것에 의미를 갑자스레 현우가 규정해버린 탓에, 자연스레 그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 아닌 확신을 해버렸다.


그게 또 이상했다. 내게 호감이란 인간 관계 마지막에 오는 감정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세세하게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호불호가 정해졌다. 몇 마디 말을 나누지 않고도 호감을 표현할 수 있는 현우는 나와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와...”


“예쁘지.”


“진짜 예쁘다. 맨날 버스 타고 지나다녔는데, 걸어 봐야겠단 생각은 한 번도 못했어.”



다리 난간에 팔을 올려 놓고, 도시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강과 조명이 밝혀진 선유도를 눈에 담았다. 열기가 가신 서울에는 신선한 여름 밤의 바람이 불어왔다. 맥주 한 캔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귓가에 울리는 경쾌한 음악이나, 맞잡은 손의 온기 같은 것이라도. 힐끔 옆에 선 현우를 쳐다봤다. 나보다 키가 한 뼘 정도 큰 탓에 눈높이가 살짝 높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끝나버린 사랑에 대해 가졌던 오기와 비슷한 감정으로 상대를 대하던 요즘과는 너무 다른 오늘이라, 스스로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무턱대고 그에게 팔짱을 껴 보고 싶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선유도 공원을 가자고 한 현우의 무모함처럼.



“난 예쁜 게 좋아. 사람도, 장소도. 선유도는 특히 여름이 예뻐.”


“자주 왔었어?”


“그랬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입을 오물거리던 현우가 대답했다.



“되게 오랜만이네.”



대답을 들은 순간 알 수 있었다. 여긴 그의 과거가 묻어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내겐 행신동이 단어만 들어도 마음을 시큰거리게 하는 과거의 기억이였다면, 현우에겐 선유도가 과거의 기억인 것 같았다. 현우의 표정은 아까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지만, 어쩐지 그 위에 조금의 씁쓸함이 머물다 지나간 것 같다.



-



내가 먼저 다리 밑에 있는 편의점을 가리켰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늦은 밤,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우리의 곁을 스쳤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너는 엄청 나쁜 새끼다... 야, 이게 웃기냐?”


“재밌잖아.”


“하나도 재미 없거든. 지도 차여 놓고.”



강가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은 우리 앞에는 빈 캔맥주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맥주 한 캔에도 쉽게 취하는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세 번 째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현우는 나보다 술이 쎄다고 했지만,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곤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 보여서 자꾸만 그 애의 빨간 볼을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실패한 사랑에 대해 떠들었다. 서로가 소개팅 상대라는 것을 잊은 것처럼, 아물지 않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워서 주위 사람들에게 못 하던 이야기를 죄다 쏟아냈다. 현우는 대체로 내 얘기에 웃었고, 가끔 추임새를 넣다가 더러 고개만 끄덕이기도 했다.



“너는 보기보다 감성적인 것 같아. 아까 그거 뭐냐,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그래, 그거. 그것도 이별을 극복하느라 읽는 거였네. 난 또...”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현우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술에 취한 탓에 현실로부터 멀리 붕 떠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현우의 모습이 현실보다는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를 사랑해도 될까.”
“너에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현우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바람을 타고, 내 볼에 닿았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이건 원래 현우가 엄청 좋아하는 시라고 했다. 독서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고, 활자를 인내심 있게 읽어 나갈 수 있는 성격도 아니라서, 소설보다는 호흡이 짧은 시가 더 편하고, 들고 다니기도 쉽다고 했다. 실용적인 이유 치고는 꽤 낭만적이라 웃음이 나왔다. 웃고는 있지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미련만 남은 사랑을 홀로 붙잡으며, 떼를 쓰고 있던 내겐 그 시구가 이렇게 들렸다. 너를 사랑하면 안 돼? 너에게 그런 고백을 하면 안 돼? 이제 내가 너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거야?



“파스타 좋아해?”


“응.”


“연남동에 맛있는 데 알아. 너 데리고 같이 가고 싶어.”



현우의 물음에 우리는 한동안 눈을 맞춘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그와 함께한 몇 시간 동안, 행신동 얘기 할 때를 제외하고는 내가 구애인인 그를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현우가 웃었다. 나는 속으로 한 번 더 현우의 웃음을 셌다. 계속 해서 보고싶은 웃음이었다. 내 안의 무언가를 녹이는,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자꾸만 더 찾게 되는 그 웃음을 한 번 더 보고싶었다.



“다른 사람한테 같이 가자고 한 건 처음이야.”



현우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내일 몇 시에 끝나?”



가끔 시간은 그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해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구애인이 내게 바랐던 ‘연애에 대한 환상을 버라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연인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고 싶은 못난 마음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내겐 그 자체가 성장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그저 한 순간 뿐인 정신 승리가 아니라, 끝난 우리 사랑의 마침표 앞에 서서 짤막한 감상평이라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7시.”



현우의 물음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7시라고 대답했다. 현우의 과거가 궁금했다. 지난 사랑이 그에게는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현우는 그 사랑에 뭐라고 감상평을 남겼는지. 현우의 현재도 궁금했다. 취미는, 습관은, 취향은, 꿈은. 으레 소개팅 자리에서 감정 없이 주고 받을 법한 정보들이 지금은 진심으로 간절해졌다.


내가 웃었다. 현우도 나를 따라 웃었다. 웃은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첫 만남에 불쑥 행신동에  대한 기억을 꺼내 놓던 나처럼, 다짜고짜 선유도에 가지 않겠냐고 묻던 현우처럼. 우리의 현재는 서로가 찍은 두 개의 마침표로부터 시작 되었다.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몇 날 며칠을 울음으로 지새우며 날짜가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과거를 궁금해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 한 번 없이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구애인을 잊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애를 마음에 담고 싶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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