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골짜기 밭

by 사운 posted Mar 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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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짜기 밭

  


  

보잘 것 없는 두메산골에도 유명인사 몇은 있다. 땅부자 곽씨라 불리는 그는 한겨울에도 메리야쓰 한 장을 입고 마을 곳곳을 누볐다. 괭이 한 자루를 둘러맨 그는 닥치는 대로 땅을 개간했다. 자갈밭을 뒤엎어 기름진 밭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물론 밭과 길 사이의 좁은 틈을 뒤엎기도 했다. 혹자들은 황무지라 부르는 땅도 곽씨의 땀방울이 스며들면 농토가 되는 것이다. 그는 황무지조차 부족해 항상 아등바등이었다. 이런 그가 땅부자라 불리운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곽씨의 아버지 대까지만 해도 그저 가난한 소작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곽씨 대에 들어 집안 사정은 바뀌기 시작했다. 밀려있던 빚을 갚았으며 개간한 땅은 점점 늘어났다. 곽씨는 단숨에 가난한 청년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마을에는 이런 곽 씨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녀는 재작년 겨울에 가족을 여의고 정신을 놓아버린 한씨였다. 한씨는 밤낮 구분 없이 웃는 낯으로 불쑥 나타나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다. 그날도 한씨는 현대의 방문을 불쑥 밀어젖히곤 헤진 소매로 그를 깨우고 있었다.

현대야.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자빠져있노. 얼른 김 씨네 일하러 가야 안되나.”한씨가 웃으며 남자를 흔들었다. 해는 이제 막 이마 끝을 보일 뿐이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뜬 현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니미 소작은 개뿔. 아침부터 기분 드릅게 뭐라카노.” 한숨을 뱉은 그는 익숙한듯 손을 저었다.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한 씨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깔깔대며 뛰쳐나갔다.

 

배를 긁으며 방문을 나선 현대는 일찍 일어난 김에 괭이자루나 하나 깎아 두기로 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다 작대기와 쇠붙이를 들곤 마루 귀퉁이에 앉았다. 아침 찬바람에 코를 찡그렸다. 벌써 완연한 가을이 되어버렸다.

가을.. 가을이라


작년 가을, 그는 수년에 걸친 빚을 모두 갚았다. 빚쟁이 소작농 생활을 청산 한 것이다. 지난 세월 그는 피땀 흘려 키운 작물들을 온전히 쥐어볼 새도 없이 반을 뚝 떼어 주인네 마당에 쌓아놓아야만 했다. 단지 땅을 빌린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래, 반을 떼어 주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땅주인들은 정성 드레 키운 작물들이 벌레를 먹었네 알이 작네 딴지 걸었다. 내년부터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거라는 갑질은 또 어떤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는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소작을 그만둔 까닭이다. 앞으로는 빚잔치도 없을 것이다. 그는 마루에 기대 누우며 눈을 감았다.  


... 

 

그날은 다사다난했던 현대의 인생 중에서도 최악의 날이었다. 생의 첫 번째 빚잔치이자 어머니의 세 번째 빚잔치였다.

 

이카지 마이소. 살아야 갚지 안카겠습니꺼?”

가져 갈 꺼도 좆도 없으면서 빚잔치는 만다꼬 한다고 했노?”박씨와 이씨는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디 야들이 빚잔치 하고 싶어서 하나? 김씨네 아줌메가 지랄해가꼬 다 부른 거다 아이가.”

맞나? 낸 또 김씨 부인네가 하도 당당하게 불러싸서 이 집이 오라켄 줄 알았지.”

뭔 상관이고. 다 채 간다 움직이라.”

두 사람이 장롱을 들추며 말했다. 현대는 박 씨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박씨는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마당에서는 김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 가마솥 두 개 있다. 박가랑 내랑 한 개씩 가져가믄 딱이긋네.”

내 젊을 때는 이런 거 없이도 잘만 살았다. 이거는 자루라고 깎아 놓은 기가. 요것도 한 두어 개 들고 갈란다.”

시끌벅적한 마을 잔치에도 그의 어머니는 마당에 앉아 하늘만 볼 뿐이었다.

 

그렇게 수라장 같았던 빚잔치는 금방 끝이 났다. 빈약한 잔칫상 탓이었다. 얕게 떨리는 그의 주먹을 어머니가 잡았다.

미안타. 이랄 쭐 알고 돈은 쩨께 숨카났다. 그라고 김씨네 올 때부터 신 하나 신고 나갔다 아이가. 내는 젊을 때 이란 것도 안 신고 댕깄다. 니는 아무 걱정 마라.”

      

 

천천히 눈을 떴다. 속은 여전히 허전했다. 재작년 겨울이 너무나 추웠던 까닭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 깎은 괭이자루를 바닥에 찍었다.

 

현대는 남을 위해 일하기 싫었다. 그러나 그에겐 괭이질은 커녕 두 발을 비집고 설 땅조차 없었다. 이런 현대에게 곽 씨는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따라 현대 역시 개간을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곽 씨보다 좋지 못했다. 쓸 만한 땅은 물론이고 작고 쓸모없는 땅까지 모두 곽 씨가 이미 개간한 까닭이었다. 현대가 몇 개월을 쏘다녀 겨우 개간에 성공한 것은 작은 골짜기에 있는 땅이었다. 골짜기는 마을에서 거리가 제법이었지만 골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볕이 꽤 들었고 흙도 질이 좋았다. 현대는 그곳에 무를 심었는데 생각보다도 더 잘 자라주어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만했다. 단지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무가 흙에 묻히거나 물에 휩쓸려 갈 것이 걱정될 뿐이었다.

 

자루를 다 깎은 현대는 집을 나섰다. 아침조차 거르고 골짜기로 향하던 현대는 길가의 밭에서 곽 씨를 만났다.

? 행님, 행님은 이 일찍부터 일하는 겁니꺼현대가 반갑게 인사했다. 곽씨 역시 웃으며 현대를 맞았다.

니는 만다꼬 이래 일찍 나왔노

골짜기 간다 아입니까. 아니. 실은 미친년이 새벽부터 깨워가지고예. 근데 행님 지금 엎어뿌는 땅 그거 김 씨네 땅 아입니까. 질도 괜찮은기 개지랄하기 딱 좋은데예?”

내 저번 주에도 앞산에 있는 밭 뺐깃다이가. 양심이 있으면 또 지랄하긋나? 안 그카길 빌어야지.”

빌어예? . 어데다 빕니꺼. 해봤자 그노마한테 빌어야 하는 거 내는 안 빕니더.”

못 빌께 또 어데있노. 한 번 빌어가꼬 하나 더 멕이고 입히는 거 아이가? 그라믄 내는 수백 번도 더 빈다.”

행님, 역시 땅부자는 뭐가 달라도 다른 갑습니더.”

 

땅부자라는 단어가 나오자 곽 씨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사실 곽 씨의 사정 역시 땅부자와는 거리가 멀었던 까닭이다. 그가 개간한 땅들이 족히 다섯 마지기는 넘었다. 그러나 밭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모조리 빼앗겨 버렸다. 농기계가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밭들. 배추 열 포기에 꽉 찰 것만 같은 밭. 해가 들지 않아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작물이 자라지 않는 밭. 이것이 곽씨의 밭들이었다. 밭의 위치 또한 제각각이며 지랄 맞아서 배추에 물을 주고 다음 밭으로 이동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심지어 최근에 개간하고 있는 밭은 산자락에 있어 그곳에 일하러 가는 날 밤에는 항상 나무 밑에서 노숙을 해야만 했다. 오늘도 나무 밑에서 노숙을 하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이 나온 참이었다. 씁쓸하게 땅부자라는 단어를 곱씹은 곽씨는 가래를 뱉어내곤 괭이질을 계속했다. 가을임에도 그의 개간은 멈추지 않았다.

 

곽씨와 헤어진 현대는 골짜기로 향했다. 현대는 골짜기가 좋았다. 골짜기 외에 다른 곳에서 일을 할 때면 너른 논밭들이 눈에 밟혔다. 그 너른 밭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그들 앞에서 손바닥만 한 밭을 개간하고 돌들을 뽑아낼 때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죽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가 12리나 떨어진 골짜기를 개간하기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골짜기는 땅 주인이 뭐라 말하기도 애매한 땅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골짜기는 마치 어릴 적 장롱과 벽 사이에 이불을 얹어 만든 비밀스러운 장소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골짜기 구석을 파내다 누워버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다른 사람의 논밭에서 일할 때에는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내 것을 내가 가져가는 것. 그 당연한 것을 지금까지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드디어 현대는 정당한 몫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뭇 사람들은 그가 바보라고 했다. 개간을 시작하고 현대의 돈벌이가 오히려 줄었기 때문이다. 개간에 든 힘과 노동을 생각하면 작년에 곱절은 일했지만 돈벌이는 반의 반 토막이 난 것이다. 그래도 현대는 웃었다. 무들을 뽑아내면 풀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누워있기를 한참. 풀숲에서 무언가 불길한 것이 움직였다. 현대는 깜짝 놀라 버지럭거리며 일어났다. 이리저리 몸을 꼬고 당기는 것은 흙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선명한 살무사였다. 새까맣고 투둘한 눈과 마주치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식은땀을 핥아낸 그의 입꼬리는 경련하듯 올라갔다. 저 녀석을 잡아 팔면 삼일 치 일당은 거뜬하리라. 알싸한 긴장감이 코끝을 시렸다. 그는 궁둥이를 빼고 작대기를 주워 떨리는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곤 뱀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한번, 두 번. 묘한 쾌감이 연기처럼 퍼져갔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는 발작하듯 작대기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숨은 점점 가빠졌다.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머리를 까뒤집은 살무사를 발견했다. 주변은 엉망이 되었다. 현대는 양 손을 바지춤에 닦더니 엉거주춤 꼬리를 잡아들었다. 달리 주머니가 없던 까닭이다. 뱀을 덜렁거리며 골짜기를 내려오던 그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웃음에 양 볼은 얕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채 반절도 가지 못해 짧은 탄식이 울려 퍼졌다. 축 처져있던 살무사가 그의 발목을 물어버린 것이다. 현대는 깜짝 놀라 발을 세차게 털었다.

 

에라 씨벌... 좆 됐네

머리를 벅벅 긁은 그는 독을 빨아 뱉어내려 했다. 그러나 발목 뒤의 상처가 입에 닿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독을 꾹꾹 짜낸 후 옷을 찢어 무릎을 둘러 묶었다. 찬 숨을 뱉어낸 그는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찰나 같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벌써 혀가 알알했다. 다리도 절뚝이기 시작했다. 뜀박질을 할수록 독은 퍼질 것이다. 그렇다고 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뛰어도, 뛰지 않아도 문제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숨을 골랐다.    

 

...

 

      

니는 왜 내 땅에다가 또 지랄이고. 내가 내삐 둔 땅인 거 몰랐나?”

땅이 버려진 거 같아가꼬 내는 살릴라고 그랬지. 그라고 길가라서 밭이 얼마 나오지도 않고... 어떻게 안되긋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네. 그라고 니 얼마 전에 우리 선산에다가도 지랄해놨나? 그거 니제?”

선산이라캐도 쫌 멀리 아니드나? 내는 그냥...” 그 순간 김씨는 곽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곽씨는 몸을 웅크렸다.

곽 씨는 김 씨의 아버지뻘이었다. 그러나 곽 씨는 이러지도 못하고 매질을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씨가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뭐꼬! 뭐꼬?”그녀는 김씨의 앞을 막아섰다.

니는 만다꼬 끼어드노?”숨을 들이킨 김씨는 씩씩대며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한씨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뛰쳐 나가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고래고래 김씨를 불렀다. 김씨는 한씨가 또 해괴한 짓을 한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젓더니 돌아가 버렸다. 한씨의 앞에는 두 남자가 쓰러져있었다.

      

...

      

현대는 간신히 눈을 떴다. 어찌 됐건 죽지는 않았나보다. 누군가 그를 집으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늦은 밤이었다. 다리를 내려다보니 노끈이 묶여있었다.

니 일어났나?”한 씨였다. 현대는 한 씨를 보곤 저도 모르게 화를 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니 넘어져가꼬 까치... 까치... 하다가 쓰러진 건 아나? 내가 발목 보고 빨아는 놨는데 괜찮을런가 모르긋네.”

아 예... 아줌메는 이 밤까지 집에는 안갑니꺼?”

니 죽 끼리 놓고 집 갈라 카니까 비가 쏟아지는데 갈 수가 있어야지.”

비라고예?”

 

빗소리가 쏟아졌다. 현대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빗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농사꾼들은 빗소리에 흥이 날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달랐다. 골짜기에 밭을 개간한 후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한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여나 흙이 밀려오거나 밭이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대는 자리를 박찼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라도 걸을 수는 있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번개가 내리쳤다. 장대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잠시 내린 소나기가 아닌 모양이다. 차고 습한 바람이 속을 채웠다.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괭이를 챙겼다.

 

앞은 마치 먹을 뿌린 듯 했다.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골짜기 밭은 12리나 떨어져 있었다. 해진 군화를 신으며 발목을 만진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니 뭐하노! 지금 그 몸으로 이 비에 나간다꼬?”현대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물기 가득한 괭이자루를 꽉 움켜쥔 그는 비틀거리며 달려나갔다. 질퍽이는 땅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군화는 어느새 빗물로 가득 차 뛸 때마다 질꺽이는 소리가 났다. 숨이 차올랐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려가던 그는 무언가에 걸려 구르고 말았다. 발목 탓이 아닌 모양이다. 크고 물컹한 것이 손에 잡혔다. 그가 허둥대고 있는 사이 지척에서 짐승소리가 들렸다. 가까웠다. 현대는 화들짝 놀라 버둥대며 일어났다. 으르렁대는 소리는 빗속에서도 선명했다. 스무 걸음, 아니 열 걸음 앞일 지도 모르겠다. 현대는 머리가 뻣뻣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을 두리번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쳐대던 번개도 조용했다. 빗소리만이 가득 찬 적막은 무거웠다.

 

그때였다. 짐승들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그는 괭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휘두르기를 몇 번, 괭이자루가 얇았던지 어느새 그는 작대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질퍽거리는 다리를 뽑아낸 그는 침을 흘리며 네 발로 논을 벗어났다.

 

논을 벗어나자 그의 눈앞에는 붉은 안광이 가득했다. 무엇일지도 모르는 것들이 족히 수십 마리였다. 그는 살려 달라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친 빗소리에 묻혀 목소리는 사라졌다. 더이상 현대의 머릿속에 골짜기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몇 번을 구르고 넘어져 이미 방향감각은 사라졌다. 앞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다리도 절뚝인다. 현대는 그대로 주저앉고만 싶었다. 그러나 짐승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비명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목이 쉬어 애를 써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손발을 허우적댔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자 짐승이 발목을 물었다. 그는 작대기로 다리를 마구 내리쳤다. 남은 한 손으로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밀었다. 그는 간신히 짐승을 떼어 내곤 달려나갔다. 어디로 달리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짐승들은 헐떡이며 으르렁댔다. 현대는 미친 듯이 앞으로, 그저 앞으로 도망쳤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발목의 통증은 점점 참기 어려워졌다. 작대기로 내리친 다리는 부러지지만 않았으면 다행일 것이다.

 

번개가 쳤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골짜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친 듯이 달려간 곳이 골짜기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대는 비틀거리며 물을 거슬러 올랐다. 불어난 물은 짐승들을 밀쳐냈다. 짐승들이 돌에 맞고는 낑낑댔다. 그 소리에 현대는 쉬어버린 목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짐승 소리에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골짜기는 어디선가 쏟아진 나무들로 막혀있었다. 힘껏 나무를 밀어보았나 소용없었다. 그는 허우적대며 골짜기 벽을 타기 시작했다. 현대는 손톱이 부서져라 벽을 긁고 나무뿌리를 잡아당겼다.

 

그가 버둥대는 사이 짐승들은 지척으로 다가왔다. 그는 짐승들을 차버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짐승들은 눈이 보이는양 다리를 피해 그의 모가지를 깨물었다. 그는 등부터 땅에 처박혔다. 짐승들이 까맣게 달려들어 그의 온몸을 물어뜯었다. 현대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

 

      

현대는 찡그리며 눈을 떴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짐승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물웅덩이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닦아냈다. 이상한 점은 작대기로 내려친 다리와 바지 속만 빼면 몸이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제 겉만 보면 아무도 그의 새벽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꿈같던 새벽을 주억거린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밭에 다가갔다. 밭은 흘러온 토사로 이곳저곳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한때 괭이였던 것을 흘겨본 그는 어기적어기적 집으로 향했다.

 

현대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또 한 씨가 있었다. 비바람 속으로 사라진 현대가 걱정이라도 된 것일까. 현대는 힘없이 자리에 누웠다. 이제 그는 쉬고 싶었다. 한 씨는 그의 옆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항상 웃기만 하던 그녀의 울음소리는 꽤나 거슬렸다. 흐느끼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

죽어삤다.”

깜짝 놀란 현대는 한씨를 바라보았다. 검은 상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남을 기리기에 현대는 너무 지쳐있었다. 

장례식이라도 지금 가자."

내일... 내일 갈께.” 현대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짜냈다. 그러자 그녀는 훌쩍거리더니 어딘가로 달려갔다. 현대는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 잠이 들었다.

 

 

해가 졌다. 그는 불을 하나 들곤 마을로 향했다. 불은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마을은 늦은 밤임에도 시끌벅적했다. 현대는 조심스레 걸음걸이를 고친 후 집으로 들어갔다. 한 씨는 침울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상복을 입은 그녀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현대는 한 씨와 눈이 마주쳤다. 한 씨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대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마루 귀퉁이에 털썩 앉았다. 최씨는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한씨라고 했다. 그는 오늘 새벽 논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현대는 몸을 떨었다. 짐승들, 짐승들의 짓이 분명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사람들에게 짐승들의 짓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찢어지는 쇳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그는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사람들을 붙잡곤 꺽꺽댔다. 그러나 술에 취한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씨는 그가 너무 세게 잡는다며 손을 뿌리쳤다. 현대는 짐승들에게 물린 발목을 보여주었다. 뱀의 이빨 자국뿐 상처는 없었다. 그는 짐승에게 물린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상처는 없었다. 그는 이를 바득대며 바지를 들춰보았다. 바지 속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러나 차마 바지 속을 꺼내 보여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현대는 실소를 터뜨렸다. 여전히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마구 웃어댔다.


어느새 한 씨가 그에게 다가왔다. 한씨는 그의 입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대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는 도시로 갈끼다.”

현대야. 도시도 여랑 똑같으면 우짤낀데?”

 

그는 말없이 벌떡 일어나 술 한 잔을 받아넘겼다. 얼큰했다. 현대는 책장 위의 작은 거울을 바라봤다. 그가 있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현대는 집을 들리지도 않고 길을 나섰다. 어둠 속으로 비틀대는 그의 모습은 어제와 같았다.





주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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