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모르는 사람

by 다이무리 posted Mar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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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모르는 사람인 척합니다. 어느 공중전화 앞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묻습니다. 누구세요. 가끔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린 전화를 받은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대신 말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가 보채는 소리, 연인이 기타를 튕기는 소리, 그릇이 깨지는 소리, 욕설과 고함 끝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낮게 내뱉는 죄송해요, 라는 사과의 소리. 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하철을 탈 땐 무임승차를 했고, 편의점에서 커피 캔을 꺼내 계산도 하지 않았습니다. 계단에 앉은 거지의 모자를 걷어찼고, 젊은 여자가 자판기에서 주스를 뽑을 때 남은 잔돈을 주웠습니다. 그리고 광장 옆에서 전화를 겁니다. 처음 보는 풍경 속에서 처음 번호를 누르듯 굴다가 처음 들어본 목소리에 안심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길 다행입니다.

 

나는 떠 있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딛지 않고도 술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녀의 기도는 늘 이런 식입니다. 절 찾아주시고 찾은 뒤에는 누가 옳은지 확인해주시고 확인한 뒤에는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자비를 베푼 뒤에서야 우리 중 한 명을 죽여주시고 남은 한 명에겐 은혜를 내려 주세요.

그건 텔레파시도 아니고 외계인의 속삭임도 아니고 이명도 아닌, 세계 어딘가에 사는 어떤 여자의 음성일 뿐인데도 오직 내게만 들립니다.

 

성당에는 처음입니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살핍니다. 우는 사람도 있고 웃는 사람도 있고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장을 진하게 한 남자도 있고, 쇼트 커트를 한 여자도 있고, 서로 손을 맞잡은 연인도 있습니다. 기도 시간에 눈을 뜬 채 모두를 둘러보는 남자 옆에는 방언을 터뜨리는 여자가 있고 여자 뒤에는 갓 성인이 된 청년이 조금 긴장한 듯 낮은 목소리로 성경을 외우는 중입니다. 과연 이들 중에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간청하는 이가 있을까요. 촛불이 일렁입니다. 조명이 모두 꺼지자 보이는 건 아주 희미한 촛불 몇 개뿐입니다. 음성이 가득합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인 듯 가사를 외칩니다. 약간 따라합니다. 가사를 모르지만, 부를 수 없는 건 아닙니다. 부를 수 없지만, 저들과 아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앉은 건 아닙니다. 이뤄질 거라는 믿음도 없고, 세세한 요구도 없고, 오래 이곳을 다녔다는 자부심도 없고, 무엇보다 나는 그녀를 찾으러 왔을 뿐이니까요. 믿는 사람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성전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그녀가 세계 어딘가에 있을 거라 굳게 믿습니다. 그러니까 세계는 곧 성전입니다. 모든 사람의 믿음이 이루어지면 좋은 세계일까요. 나는 성당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곳에는 더한 것을 비는 사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녀는 평일 저녁에 기도를 자주 하는데 그 기도는 새벽에 다시 들려오기도 합니다. 믿음은 꽤 견고한 편이지만, 가끔은 믿음이 아니라 최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그렇습니다. 듣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듣고 계시지 않아도 언젠가 들을 수 있기 위해서 저는 늘 기도합니다. 설령 무시하더라도 주파수만이라도 맞았으면 합니다.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어떤 사연을 청해서 상품을 받지 못하더라도, 읽어주실 때 제 믿음은 현실이 됩니다. 은혜 없이도 은혜로워집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나인데. 어서 그녀를 찾아서 그렇게 말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병원 의자에 앉아 문득 졸았습니다. 접수 표의 숫자가 점점 다가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가끔 방에서 나와 담배를 피웠습니다.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벅벅 닦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진찰받는 걸 몰래 훔쳐보기도 했습니다. 손을 달달 떠는 사람, 계속 딸꾹질을 하는 사람, 가슴골을 보여주는 사람, 바지를 내리고 자기 성기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때마다 차분히 말을 건네고, 손을 잡아주고, 바지를 직접 올려주기도 했습니다. 다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은 별로 신통치 않은 표정을 하고 나갔습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정상인가요. 의사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물론 그 대답은 붕 떠 있는 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여자가 죽으면 모든 게 편할까요, 라고 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좋을까요. 여자도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사는 게 다 따분하고 재미없으면 어떻게 하죠. 의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모든 게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해보세요, 거긴 어땠는지. 나는 약통 몇 개에서 알약을 꺼냈습니다. 알약은 색이 다 달랐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금연 껌을 꺼내 씹는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약을 전부 다 먹으면 어떻게 돼요. 여자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는 게 뭔지 모르시겠죠. 의사가 말했습니다. 죽지 않고 개똥밭을 굴러도 좋다는데요. 나는 여자에게 문을 열어줍니다. 원래 열려있었던 것처럼. 의사는 등 뒤에 대고 말합니다. 언제든 다시 오세요.

 

그녀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얘기하길 꺼립니다. 내가 그녀에게 들은 생활은 이게 전부입니다. 저녁상에는 생선을 구웠어요, 남편은 비린내가 난다고 싫다고 했어요. 생선은 원래 비린내가 나는데. 방을 닦으면 윤이 난다고 싫다고 하기도 했지요. 미끄러져서 뇌진탕 걸리라는 것 같다고. 하루에 십 분만 집을 비워도 전화가 왔어요. 친정에, 친구들에, 그이가 아는 모두에게요. 저를 찾을 때까지 옵니다. 때릴 땐 꼭 복부랑 가슴 위주로 때려요. 상처가 나도 잘 가릴 수 있고, 누가 봐도 눈에 띄지 않으니까요. 저는요, 그이를 사랑했던 적이 언제였는지가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러니까 태어났는데 그이가 남편이고 저는 아내인, 그런 시절이 이생의 첫 장인 것만 같아요.

나는 내가 찢어진 한 페이지처럼 느껴집니다. 첫 페이지는 아니고 끝 페이지는 더더욱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은 페이지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부 주인공의 친구이거나 두 마디쯤 실없는 얘길 나눌 뿐이고 배경은 쓸데없이 고즈넉하고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떠나지 않는 그런 페이지입니다.

 

나는 여자를 따라 버스에 탑니다. 비가 내릴 모양인지 하늘이 어둑합니다. 이내 빗방울이 차장에 부딪힙니다. 신호를 잘 지키지 않는 버스 기사 때문에 여자는 자주 넘어질 뻔합니다. 나는 여자의 뒤에 서 있습니다. 치마를 입은 여자는 자꾸 두리번거립니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탄 뒤론 바닥이 미끄러워졌습니다. 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여자를 살핍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지만, 키가 큰 편은 아닙니다. 희고 고운 손을 가졌지만, 반지를 낀 건 아닙니다. 머리를 묶고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장례식에 다녀온 건 아닐 것입니다. 무언가를 기도는 하겠지만, 누굴 죽여 달라고 말할 것 같이 생기진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나조차도 잘 모릅니다. 내가 지금 뭘 입고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누굴 붙잡고 물어보고도 싶습니다. 내 겉모습이 어떤 거 같냐고, 뭐가 나일 것 같냐고. 누굴 죽여 달라고 말할 것 같이 생긴 사람이란 결국 허깨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허깨비는 종종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났던 거 같은데 그 누구도 실제로 누굴 죽이진 않았을 것만 같습니다. 하차 벨이 울렸는데, 아무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좁은 가운데 노인 한 명이 탑니다. 필시 구걸을 할 것만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목에 멘 스피커에선 슬픈 노래가 나오고 주머니에선 십 년 전에나 씹었을 것 같은 껌이 뭉치로 나옵니다. 누군가는 몇 개 사기도 했습니다. 노인은 버스 기사의 성화에 두 정거장이 지나지 않아 내렸습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그새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는 그 앞으로 가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습니다. 허벅지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창문을 조금 연 여자는 나를 보는 듯했습니다.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습니다. 눈을 감았다 떠도 계속 여자의 눈이 보였습니다. 뭔가를 잘못한 거 같았습니다. 병원에서부터 따라왔지만, 나쁜 일을 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혹시라도 그녀에 대해 알까 묻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없었습니다. 나는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입니다. 아무리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습니다. 여자는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습니다. 아니, 왜 자꾸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데, 갑자기 내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씩 웃으며 말합니다. 좋으면서 뭘 그래요. 여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 다시 앉습니다. 나와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 눈동자가 계속 흔들렸습니다. 나는 죄송하다고 연거푸 말하곤 금세 내립니다. 문이 닫히기 전, 누군가 뒤통수를 잡아채는 것만 같았습니다.

 

기도를 들은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빌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종종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제가 아주 많은 걸 빌었고, 그중 몇 개는 이미 이뤄진 것을 알아요. 모든 소원이 곧 모든 믿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제가 빌었던 모든 기도는 곧 모든 믿음을 근원 삼아 빌었어요. 결코 자신의 이득이나 안위를 위한 것은 없었죠. 제 기도를 듣고 계신다면 무슨 말인지 아실 거라 믿어요. 인제 와서 저는 저를 위한 기도를 하나 빌고 싶어요. 작고 소박한 기도에요. 세계에선 늘 누군가가 죽고, 죽은 뒤엔 뼈를 태워 뿌리고, 뿌린 뒤엔 서서히 잊고, 잊은 뒤엔 아예 없었던 사람이 되잖아요. 그건 아주 적은 시간에 이뤄지잖아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나쁜 사람이 없어진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부디 간절한 기도를 조금이나마 귀를 열고 받아주세요. 어디에선가 듣고 계시면 벼락도 좋고 해일도 좋고 태풍도 좋고 암도 좋고 심장마비도 좋고 익사도 좋아요. 죽여만 주세요. 부디 죽여만 주시면 돼요.

나는 그녀의 기도 끝자락에서 낯선 언어를 들었습니다. 날이 추운 교정에서 학우 여러분도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시길 바라며 오늘 방송 마치겠습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건물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학생들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인 모양입니다. 코트 깃을 여미지만, 여자는 대부분 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었습니다. 남자들 몇은 일부러 뒤로 걸으며 다리를 훔쳐보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들 몇몇 머리에 꿀밤을 날리는 시늉을 하며 키득대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커다란 건물 안에 들어갑니다. 바깥 테라스에는 카페가 있는데 그쪽에도 제법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버스킹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커다란 음성이 건물 안까지 들어옵니다. 나는 학생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몇 마디 물어볼까 하다 관둡니다. 가끔은 그럴 때가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고, 가방에 청개구리 닮은 인형을 달고 다닌다는 말만으로도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며칠 내내 들었던 그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들은 그녀 안에서 어쩌면 그녀보다 오래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말은 곧 말하기 전부터 완벽한 형태를 가진 채입니다. 나는 그녀를 애창곡처럼 맞출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건물의 후문에는 낮은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남자 넷에 여자 하나입니다. 여자는 뭔가 심하게 잘못한 것처럼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있습니다. 남자 중에 가장 덩치가 큰 이가 담배를 뻑뻑 피우며 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몰래 그들의 뒤편 기둥에 숨습니다. 얘기가 충분히 들릴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대충 무슨 분위기인지는 알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곤 무리 안에서 도망치듯 뛰어갔습니다. 남자 넷은 계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남자 넷을 따라갈지 여자를 따라갈지 고민하다 아무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남자 넷은 여자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옛 애인이 돌아왔단 얘기를 했을 수 있고 내가 오해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교문 앞까지 가서야 그런 건 다 가짜임을 깨달았습니다. 여자를 다시 찾고 싶었지만, 가방을 메고 삼삼오오 모여 걷는 이들은 다 그놈이 그놈 같았습니다. 나는 그녀를 찾아 교정을 더 돌아다닐까 하다가 관둡니다. 어쩌면 그녀의 기도는 수년 전의 기도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옷걸이처럼 굽니다. 체육복을 벗어 던진 학생들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나는 교실로 돌아갑니다. 이건 누구 것, 이건 누구 것. 최대한 조심스럽게 사물함을 열어 체육복을 넣습니다. 몇 주 전에는 야구부 선배의 체육복을 잃어버려 화장실에서 팬티가 벗겨진 채로 엉덩이를 맞았습니다. 그런 일은 이제 싫다고 생각합니다. 체육복은 스무 벌 가까이 되고 급식실로 갈 수 있을 때가 되니 모든 음식이 식은 채였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야단을 칩니다. 맨 뒤에 나가 뚱하니 서 있습니다. 내 자리에 앉은 이는 최근에 전학 온 아인데 그 전 학교에서 선생님 뺨을 때렸다고 합니다. 나는 점점 벙어리처럼 굽니다. 입술 사이에 풀을 바른 듯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옥상에서 떨어지는 게 덜 아플지, 강에 빠지는 게 덜 아플지, 목을 매는 게 덜 아플지를 고민합니다. 학교 수업시간이 끝나면 화장실로 불려갑니다. 그날은 어디선가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 벙어리 고추를 빨아라, 병신이 벙어리 고추를 빤다.

나는 바지가 벗겨진 채로 서 있습니다. 여자는 멍하니 나를 쳐다봅니다. 나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하고 온몸이 언 채로 서 있는데 남학생 몇이 여자를 끌고 와서 내 성기에 여자의 손을 올립니다. 서서히 성기가 커집니다. 이내 나는 가장 슬픈 기억을 떠올립니다. 고백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옛 소꿉친구, 어떤 말을 해도 돌아오지 않던 큰 누나, 침대 하나 없이 빈방을 떠올리는데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흰 액체가 쏟아집니다. 여자는 바닥에 누워 헛구역질합니다. 나는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여기서 뭘 해야 할지는 곧 몇 대를 맞아야 끝이 날지에 대한 시간 계산에 불과합니다. 빨리 울어서 불쌍한 척을 해야 할까, 아니면 최대한 견뎌서 약자를 괴롭힌다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게 해서 이 게임을 끝내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데 첫 방이 날아옵니다. 오늘은 조금 운수 나쁜 날인가 봅니다. 나는 여자의 가슴을 만집니다. 정말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여자의 살결을 만집니다. 길쭉한 물건들이 튀어나옵니다. 샤프 펜, 둥그런 수정 테이프, 단소와 리코더, 차가운 아이스크림, 시든 오이와 흙이 묻은 당근. 여자는 울다 비명을 지르다 울다 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뻗어 있는데, 입안으로 뭔가 들어옵니다.

먹어 봐, 벙어리 새끼, 이거 먹으면 말할 수 있대, 니네 엄마가 그랬어.

씹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씹어선 안 될 것들인데, 나는 이빨이 나가도록 꼭꼭 씹어 삼킵니다. 오도독오도독, 그건 무슨 말일까요. 나는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게 되었느냐고.

한 해가 지나고 나는 괜찮아졌습니다. 대신 다른 애의 고추가 다른 여자의 입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소변기 옆에 서서 가방 안에서 길쭉한 물건을 꺼내줍니다. 작은 머리핀, 머그잔, 두 켤레의 양말을 뭉친 덩어리, 유통기한이 지난 순두부와 두꺼운 마늘 소시지. 쉬는 시간마다 불려오는 애들이 달라집니다. 누군 들어오면서부터 우는데 그럴 땐 망보는 애들이 두어 명 붙습니다.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항도 하지 않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애들이 있는데 그런 애들은 곧 무기 앞에서 무릎을 꿇곤 합니다. 꽁초는 그럴 때 사용됩니다. 그해에 나는 괜찮아졌지만 두어 번은 욕조 안에서 손목을 그었던 것 같습니다. 두어 번인지 이십 번인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피가 가득 차서 욕조의 물이 빨갛게 변할 줄 알았습니다. 실은 빨간 게가 아니라 파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외계인이니까요. 나는 실험대상이니까요. 눈을 감고 숫자를 세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모두 화장실에서 나가고 난 뒤, 바닥에 쓰러진 애들을 부축해줄 때면 그들은 대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벙어리 새끼 주제에 뭘 착한 척이야, 꺼져.

수년 전의 기도도 가끔은 오늘의 기도보다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모든 기억은 기억이 되는 도중에조차 진실치 못합니다. 나는 기억 한복판에서 버려지면 어떤 게 내 기억인지 가늠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얼굴이 지워지고, 주름과 핏줄이 지워지고, 그저 실루엣만 남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떤 기억이 내 기억인지도 모른 채 택시를 잡듯 손을 흔드는 일뿐입니다. 나는 강의실 한복판에 앉아 잠깐 졸았습니다. 어느새 학생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내 옆에만 자리가 있는데 그 누구도 내 옆에 앉질 않습니다. 교수님이 들어왔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누가 나갑니다. 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녀는 아이를 등에 멘 채입니다. 아이가 울어서 나간 것 같습니다. 나는 서둘러 그녀를 따라 나가려는데, 갑자기 교실 문이 잠깁니다. 자꾸 누가 출석만 하고 나간다며 교수가 툴툴거립니다. 나는 멍하니 있다 창문을 엽니다. 강의실은 사 층인데, 뛰어내릴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풀썩 뛰어내립니다. 중력이 없는 것처럼 흐물흐물 떨어집니다. 그녀는 아직 건물 안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혹시나 강의실로 다시 들어갔나 싶어서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불쑥 튀어나옵니다. 헐렁하고 낡은 청바지를 입었지만, 다리가 길었습니다. 뿔테안경을 썼지만, 종종 안경을 벗고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얼굴에 상처가 몇 개 있고 목 언저리가 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잘 보이지 않게 얇은 목 티에 마스크를 썼습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갑니다. 그녀는 학교 부지에서 나가 뒤편의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의 갓길로 빠지자 아주 가파른 언덕이 나옵니다. 그녀는 언덕 꼭대기의 집에 들어갑니다. 뭔가 바쁜 일이 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문이 닫히기 전에 어서 몸을 집어넣습니다. 얇은 커튼이 있습니다. 나는 몰래 커튼의 가장자리를 조금만 걷고 안을 들여다봅니다. 그냥 작은 방입니다. 이부자리에는 남자가 누워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식탁을 꺼냅니다. 뭔가 만들 생각인지 냉장고를 열었다가 고작 김치가 든 통 하나를 꺼냅니다. 김치찌개를 끓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몇 년이나 이렇게 지냈지. 잠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남편이 묻습니다.

 

자그마치 구 년입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첫 행사인 체육 대회 날에 나는 은영이와 만났습니다. 술에 잔뜩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던 은영이를 데려다주면서 인연은 시작이었습니다. 은영이는 처음에 나를 싫어하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벙어리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글을 적어 주고받았습니다. 사귀기 시작한 뒤론 은영이는 수화도 약간 배웠습니다. 군대에 갈 땐 짧은 문장까지 만들 수 있었습니다. 기다려달라곤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초조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초조함을 표현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아득한 곳에서 홀로 버티고 있을 나를 상상하며 슬퍼할 은영이에게 짐을 더 줄 수 없었습니다. 우린 전화도 할 수 없었지만, 서로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그동안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차가운 총 안에는 스무 발의 총알이 들어 있었습니다. 공을 차고, 진지를 만들고, 차가운 주먹밥을 먹으며 웃었지만, 그건 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일이란 생각이 들면 나는 가끔 묻고 싶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꼭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꿈을 꾸었습니다. 어슴푸레 눈을 뜬 은영이가 나를 죽이는 꿈을 꿨습니다. 나는 은영이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그렇게만 하면 돼, 심장에 깊숙이 찔러 넣으면 돼, 하고 말했습니다. 은영이는 칼을 빙글빙글 돌렸습니다. 나는 칼에 꽂힌 채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이내 먼 곳으로 날아갑니다. 유령이 된 것처럼 떠다닙니다. 꿈속에서 은영이는 내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종류가 있대. 유령, 귀신, 사람. 유령은 투명하고 연할 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사람. 귀신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가져 어떻게든 저주를 하고 폭언을 하고 끝끝내 죽음을 불사하게 만드는 사람. 그리고 사람은, 그냥 사람, 유령도 못 되고 귀신도 못 되고 아무것도 안 돼서 사람으로 남아버린 사람. 넌 어떻게 생각해.

 

군대에서 나왔을 때 은영이는 졸업반이었습니다. 한 학기 반짝 같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은영이는 나를 살뜰히 챙겨줬습니다. 교수님이 무언가를 물을 때, 조별과제에서 팀원들과 소통할 때, 학생식당에서 식권을 살 때, 하물며 교회를 다니길 권하는 어느 동아리 사람을 뿌리칠 때조차 말은 은영이의 몫이었습니다. 나는 그저 은영이의 손을 꽉 쥐고 내 주머니 안에 꼬옥 넣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은영이를 마치 보모처럼 여긴 건 아닙니다. 나도 은영이의 일부였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소문에 은영이가 힘들어할 때, 실없이 추파를 던지며 야한 농담을 던지는 선배가 한잔하자고 연락했을 때, 이유 없이 교수실로 불려가 펑펑 울며 문을 열고나올 때, 나는 은영이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아무 말도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영원은 말도 아니고 시간도 아니고 한없이 나눠 가져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감정이라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떼어 붙였습니다. 눈이 안 좋은 은영 대신 멀리 있는 걸 내가 봤고, 말을 할 수 없는 나 대신 은영이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귀가 네 개, 눈도 네 개, 입도 두 개, 다리랑 팔이 각각 네 개인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샴쌍둥이는 아니지만, 원래 한 몸을 두 개로 자른 것처럼 굴었습니다.

그리곤 은영이는 작은 디자인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서로 보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돈이 없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을 만날 시간은 많은데 정작 주머니에서 한 푼을 꺼낼 수가 없어서 곧 시들해졌습니다. 은영이와 데이트 역시 그랬습니다. 모텔비까지 은영이가 전부 냈습니다. 나는 은영이의 몸을 더듬다가도 최저임금을 떠올렸습니다. 그건 경멸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주제에, 벙어리 주제에 뭘 더 배워서 어쩔 것인지 내게 물었고 기어이 그럴듯한 대답을 내는 내가 더더욱 싫었습니다. 한강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했지만, 나는 너무 커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지난날보다 더 나는 자살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내 시체의 값이었습니다. 그 한강에서 자살하면 값을 문다는 소문을 들었으니까요. 나는 침대에 누워 한숨도 잘 수 없었습니다.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까지 거절할 수 없었던 은영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몸을 만지는 와중에도 몰려오는 잠을 견딜 수 없는지 눈을 깜빡였습니다. 나는 몸에서 손을 뗐습니다. 뭘 적을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여전히 말은 은영이가 했지만, 그건 다 짧은 단어뿐이었습니다. 갈까, 먹을까, 저기 좀 들어갈까, 이거 살까, 같은 말이었습니다.

은영이는 회사 얘기를 종종 했습니다. 자기를 챙겨주는 세 살 연상의 사수에 대해서도요. 사진 속 그 사수는 참 반듯하게 생겼습니다. 예의가 바르고 학력을 따지지도 않고 우스갯소리로도 이상한 농담을 하지 않고 늘 은영씨, 하고 부른다고 종종 칭찬하더군요. 나는 대학원에서 잘 되지가 않았습니다. 소통도 막막했고 교수들 역시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시작한 은영이는 더욱 바빴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두 시간 남짓도 보기 어려웠습니다. 은영이의 자취방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지만, 나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은영이의 자취방에 말없이 찾아갔습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나는 은영이와 사수가 함께 침대 위에서 몸을 섞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들은 회사에서 나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었고, 그다음엔 백화점에 가서 명품 속옷을 서로 나눠 입었고, 간식으로 먹을 와인과 치즈를 샀을 거고 그래도 시간이 남았으면 영화를 보거나 뮤지컬을 봤을 테고 돌아오는 길에는 방 세 개짜리 신혼집 얘기를 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러길 진심으로 바라는 내가 세계에서 제일 싫었습니다. 그게 나의 생각이었을까요. 그게 정말 내가 한 상상이고, 그런 마음이 곧 내 마음이었을까요. 나는 마음을 도려내고 싶었습니다. 마음이 멋대로 나를 옭아매는 꼴이 싫었습니다. 은영이는 의자에 앉아 자고 있었습니다. 책상에는 켜진 노트북이 있고, 메신저가 켜져 있었습니다. 좀 쉬어야 해요, 은영씨는 로봇이 아니잖아요. 사수의 말에 은영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을 때 벌어야죠, 그래야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도 할 수 있죠. 나는 그날 저녁까지 그 문장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내가 과연 은영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습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안에 쌓인 말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물이 들어차는데도 짐 하나 버릴 수 없는 여객선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태운 모든 사람을 익사시킬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요. 떠났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적지 않았어요. 그냥 유령이 되고 싶었고 하다못해 귀신이라도 되고 싶었지만, 사람이곤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죽었냐고요. 아니요. 나는 나를 제일 아끼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꼭 죽어야만 그렇게 되나요. 죽지 않아도 죽은 것처럼 굴어요. 나는 그 방에서 나올 때 이미 혼만 쏙 빠진 거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거지요.

 

고개가 획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이불에서 나와 상을 엎었습니다. 창문은 반쯤 열린 채였습니다. 찌개 국물이 바닥을 타고 나에게까지 흘러옵니다. 나는 서둘러 발을 들려다가 이내 차분해집니다. , , 나는 떠 있었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새 그녀는 남편의 발에 밟히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누워 있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은 남편은 이내 뭐든 던지기 시작합니다. 작은 앉은뱅이 의자도 던지고, 국자도 던지고, 그릇도 던지고, 아령도 던집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옆집에선 나올 생각조차 하질 않습니다. 그녀는 몸을 더 웅크립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칩니다. 나는 그녀를 보고 그녀는 나를 봅니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눈물을 흘리진 않습니다. 두 손을 모이고 있지도 않은데 기도가 들릴 것만 같습니다. 나는 커튼 사이로 유연히 방 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녀도 그녀의 남편도 정작 나한테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주방에서 칼을 꺼냅니다. 날이 제법 녹슨 칼이라 뭘 썰어도 잘 썰리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칼을 들고 한참을 서서 그녀가 맞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이리저리 던지다가 지쳐서 잠깐 앉습니다. 좋아하면 다야, 가서 돈도 벌고 집도 치우고 번듯하게 살아야 그게 부부지. 그녀의 남편이 중얼거립니다. 나는 속이 메스껍습니다. 이렇게 된 뒤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배를 도려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도려냅니다. 완벽한 원은 아니지만, 원에 가까운 타원형을 그려냅니다. 배 안에서 무언가 줄줄 흘러내립니다. 거무죽죽한 액체이지만, 그건 마치 하나의 은하수 같습니다. 나는 그걸 아직 덜 깨진 그릇에 담습니다. 넘칠 것 같았는데, 그릇 안에 담다 보니까 액체는 마치 원래 그 정도 양이었다는 듯 딱 알맞게 출렁입니다. 나는 그걸 그녀의 남편 머리에 붓습니다. 온몸이 물들어야 맞는데, 그녀의 남편은 서서히 쓰러질 뿐입니다. 땅바닥에 몸이 닿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립니다. 나는 모로 누워 그녀의 얼굴을 봅니다. 그런데 왜인지 그녀는 울고 있습니다. 뭐가 그리 서글픈지 펑펑 울기 시작합니다.

 

경찰서에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조사는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물음은 있었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나는 답답한 나머지 계속 몇 번이나 말하려 했습니다. 내가 죽인 거라고, 증거는 없지만 자수하는 범인을 잡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냐고. 그녀가 뭐라고 변명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그저 빌었을 뿐이니까요. 경찰 역시 한숨을 푹푹 내쉬었습니다. 평소에 자주 다퉜다고 하시던데요. 경찰의 물음에 그녀가 간신히 대답했습니다. 다들 그러고 살잖아요. 나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다들 그러고 살지 않는다고, 설사 다들 그러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게 이유는 될 수 없다고요. 나는 그녀의 뒤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고개를 획 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사님, 저요, 저희 남편이 죽을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거기에는 분명 저랑 남편밖에 없었는데 마치 누가 같이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죽음이 아닐 거예요, 저희 남편 죽인 사람 좀 잡아주세요, 부탁드릴게요, 형사님. 나는 벼락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녀가 아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그녀였다면 그런 얘길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녀가 내게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면 범인을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녀임을 느꼈고 그녀를 따라갔고 그녀가 기도에 말하던 대로의 사람을 만났는데 뭐가 어찌 된 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어요. 어쩌면 그녀는 여러 명이었을까요. 아니요. 그녀는 단 한 명일 거예요. 그녀는 그러니까 아직도 어디에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녀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경찰서에서 나오기 전에 이 글을 적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을 변호하고 진짜 죄를 지은 사람을 밝히고 아직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가기 위해서요. 나는 곧 이곳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녀를 찾고 난 뒤에는. 자수할 생각이니 수배령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바로 이곳, 이 글을 남긴 이곳으로 돌아와 두 손에 수갑을 차고 형무소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 전에 나는 그녀를 다시 찾으러 갑니다. 그런데 밤이 늦었습니다. 일단 무작정 거리를 걷습니다. 거리를 걷는데, 모든 여자가 다 그녀 같아서 놀랐습니다. 이제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는 몹시 불안해집니다. 어쩌면 세계 어디에도 그녀란 존재는 없을 것만 같아서요. 그럼 대체 누가 내게 기도를 하는 걸까요. 나는 뭘까요. 나는 기도를 할 자격도, 기도를 받을 자격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생각합니다. 나는 유령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구나. 그럼 나는 뭐지, 하고 생각합니다. 비가 옵니다. 나는 하나의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건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입구에 있는 비닐을 우산에 씌웁니다. 나는 하염없이 건물 앞에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데, 볼일을 다 본 사람들은 비닐을 버리며 나갑니다. 하나둘 쓰레기통 안에 비닐이 쌓여갑니다. 나는 그 비닐들을 꺼내어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세련된 비늘처럼 생겼습니다. 나는 서로의 귀퉁이를 묶어 그걸로 옷을 만듭니다. 몸에 딱 맞는 옷입니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는데, 나는 그냥 걸어갑니다. 누군가 말을 걸면 방금 떠오른 나의 늙은 시절에 대해 말해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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