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회색꽃

by musguerison posted Mar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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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꽃


1903년, 인천의 제물포항. 뤼순 제독은 웅성거리고 냄새나는 군중들을 제쳐 뱃머리에 올라선다. “조선은 죽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여정을 찾아 떠나는 것이요. 하지만 뱃삯과 신분증이 구비되어있지 않는 자들은 즉시 돌아가야한다.” 뤼순 제독 옆에 서 있던 권승준이 통역을 해주었다.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라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소. 나라의 왕이라고 불리는 작자는 자신의 상투도 잘랐소. 시대는 변했다구!” 양반들의 수군거림과 농민들의 아우성이 교차했다. 돌쇠도 그 어지러운 무리 속 한 명이었다. 그는 오랜 노비생활 끝에, 대감집을 박차고 나와 배에 올라탈 순서를 기다리는 열일곱의 새파란 청춘이었다. 돌쇠는 유기아로 양반집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날 이후 그의 운명은 평생 노비였다. 마당을 쓸으라하면 깨끗이 쓸었고, 농사를 지으라면 지었으며, 양반들이 갈 길을 항상 밝혀주는 것도 돌쇠였다. 노비 신분의 얼굴 치고는 곱상한 외모와, 하얀 얼굴, 그리고 붉은 입술 덕택에 양반의 자녀들도 그 몰래 얼굴을 붉혔다. 오늘부로 그런 생활도 끝이다. 하와이라고 불리우는 서양나라의 섬으로 가기만 한다면, 자신도 천한 노비의 직급을 벗을 수 있으리. 돌쇠는 길고 곧게 뻗은 줄 끄트머리에 섰다. 사람들은 모두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배에 올라탔다. 

               닻이 올라갔다. 조선인들 중 반은 배에서의 제 자리를 찾기에 바빴고, 나머지 반은 멀어져가는 제물포항을 바라보기에 급급했다. 돌쇠는 제물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조선식 건물 옆, 하늘로 치솟을 것 같은 단단한 일본식 건물들. 이게 아비규환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하지만 이대로 떠나는 것이 조선에 대한 미운정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짭짤한 바다내음과 함께 무덥고 습한 바람이 그의 귓등을 세차게 스쳐지나갔다. 더운 날씨 탓인지 사람들은 곧바로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 돌쇠는 선실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옆자리 늙은 남자는 벌써 코를 골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기다려온 출항 때문인지 남자의 안색은 좋지 않아보였다. 돌쇠는 변소를 찾아 선실 옆 작은 통로로 향했다. 그 때, 누군가 돌쇠를 불러세웠다. 통역 권승준이었다. 그는 남색 계열의 실크제복을 깔끔히 입고 있었다. 더러운 하얀 천 옷을 입고 있던 돌쇠와는 상반되어 보였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그는 옅게 띤 미소로 돌쇠를 다뤘다. 돌쇠는 그의 웃음에 흠칫하며 잠깐을 망설이다가, 어색한 투로 “김정한입니다.”라고 답했다. 생전 처음 얻는 이름 석자였다. 부모도, 나라도 주지 않았던 돌쇠의 첫 석자다. “얼굴도 곱상한데, 여태 제 이름도 찾지 못한 걸 보니…” 권승준은 김정한을 위아래로 훑었다. “불가피한 신분놀음은 이제 중요하지 않지요.” 어린 사내는 누구보다 강한 어조로 답을 했다. 권승준은 김정한에게 배에서의 지루한 여정동안 일을 하나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바로 일본 부자, 과부인 유키라는 여자의 방에 가 밤마다 술을 따라주고 말동무를 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까탈스러운 여인네는 아니니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것이오. 그 쪽같이 얼굴도 곱고, 어린 사내는 배에 흔치가 않소. 일이 끝나면 내가 뱃삯의 삼할을 절감해주지.” 김정한은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 날 이후, 김정한은 매일같이 유키의 방에 가 술을 따라주었다. 그녀의 방에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알싸한 향 때문에 첫 며칠은 고역이였다. 하지만 곧 그것이 데킬라라는 서양의 술이란 것을 깨달았고, 그 향을 맡을수록 조선의 돌쇠는 서서히 사라졌다. 유키는 밤마다 그의 전남편에 대한 신세한탄을 했고, 어느 날엔 자신의 딸 아이는 일본인으로 태어나게 한 자신을 매우 원망한다고 하며 울분을 토했다. 정한은 이 곳이 지옥인지 천국인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확실한 것은, 밑 선실의 시끄럽고 냄새나는 조선인들이 있는 곳은 지옥이요, 외로운 일본 여자의 투정을 받아주는 이 넓은 방은 천국이였다. 정한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아침이 밝았고, 김정한은 여느 때처럼 자신의 선실 가장자리 자리도 돌아갔다. 옆자리의 늙은 남자는 여전히 잠을 청하는 듯 했다. 밥 때가 되어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보시오.” 미동도 없다. 남자의 복부에 올라온 빨간 점들이 눈에 띄었다. 죽은 모양이었다. 곧바로 사람들을 모았다. “이 남자가 닷새가 지나도 일어나지를 않소. 죽은건지 산건지, 제가 의학을 잘 몰라서…” 곧이어 사람들은 자신들도 머리에서 펄펄 끓는 열이 느껴지는데, 자신들도 곧 죽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덧붙였다. “역병이오.” 가운데에 앉아있던 천민이 입을 뗐다. “내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봤지.” 그는 붉은 반점을 자세히 쳐다보곤, “이건 수두요. 예전에 내가 일하던 양반집의 딸 아이가 있었는데, 그 년도 똑같은 증상으로 며칠을 끙끙 앓다가 죽어버렸어. 그년의 곱상한 얼굴도 결국 붉은 반점으로 모두 뒤덮였지.” 남자는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어보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저 구석에 숨어있던 한 양반은 자신의 아들놈도 열이 펄펄 끓는다며, 지금 당장 살아있는 사람을 바다에 버리는 것은 명백한 살인이라며 윽박을 질렀다. 천민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시체와 병자들을 모두 바다로 끌어내자고 목소리를 내었고, 양반들은 천한 것들이 우리 모두를 죽일 수 있다며 성을 내었다. 모든 병자들을 처리하기엔 인력이 모자라니, 일단 죽은 자들만 먼저 바다에 던지기로 결정을 내렸다. 옆자리 남자는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들것에 실려 바다에 던져졌다. 

그 날 저녁, 김정한은 다시 유키의 방으로 향했다. 방을 열기 전, 전엔 맡아보지 못했던 향이 났다. 문을 두 번 두드린 뒤, 방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방 안에는 유키말고 다른 소녀도 있었다. 유키의 딸이었다. “인사해요. 얘는 하린이야. 둘이 말동무라도 되면 좋을 것 같아서.” 유키는 이미 취해있었다. 김정한은 하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유키를 닮아 쭉 찢어진 눈과 오똑한 콧날. 정한과 하린은 서로에게 조선말과 서양어를 가르쳐주며 부쩍 가까워졌다. 정한은 자신 또래의 여자아이를 대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하린과 있으면 자신의 천한 기억들도 다 씻겨나가는 듯 했다. 항상 양반집의 까탈스러운 여인들의 응석만 받아주기만 해서인지, 자신에게 상냥히 서양 언어를 가르쳐주는 하린의 얼굴이 희고도 곱게 느껴졌다. 그녀만 볼 때면 부푸는 마음과 아랫도리에 항상 노심초사했다. 하린에게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배 선실에서 나무 판때기 같은 것들을 모아 그것들을 다른 모양들로 조각하는 취미였다. 그리곤 어느 날, 정한에게 자신이 만든 나무 조각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사람 모양을 한 남자 조각상이었다. 하린은 조각상을 지긋이 쳐다본 후, 조각상에 입을 맞췄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정한에게 다가와, 그에게도 입을 맞췄다.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엄마는, 유키는, 날 꼭 돈 많고 늙은 남자에게 보내려 할 텐데 말이야. 난 너가 좋아.” 반달진 그녀의 웃음이 정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었다. 

다음 날 새벽, 하린의 엄마 유키는 죽었다. 자신이 아끼던 술들이 진열되어있던, 그 큰 방에서 홀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것이 선실에서 유행하는 역병 때문인건지, 술에 중독되어서인지, 아니면 김정한의 계획된 수법인지는 아무도 알 겨를이 없었다. 하린은 늙은 남자들이 자신의 어미의 몸을 들춰 붉은 반점이 있는 지 확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사건을 무마시켰다. 그날 밤, 하린과 정한은 하와이에 도착하는 날 혼례를 올리기로 약속했다. 

며칠 뒤, 권승준은 애타게 김정한을 찾았다. “내가 급히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네.” 그는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하린이었다. “이 여자가 죽은 유키의 하나 뿐인 딸인데, 보다시피 용모가 아주 뛰어나지 않은가. 보아하니 이 여자에게 조선말을 알려주는 선생노릇을 하는 것 같던데, 나와 혼인을 할 수 있도록 설득을 좀 해줄 수 있겠나? 지 어미를 닮아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 들었소.” 김정한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권승준은 그런 정한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뱃삯을 모두 깎아주겠네. 도착일까지 일주일이 남았어. 몇십 년 동안이나 낯선나라에서 일하며 또 노비 노릇을 하고 싶은겐가? 여자 하나 때문에 평생을 힘들고 싶진 않을 거 아니오.” 권승준의 어조가 높아졌다. 김정한은 그녀의 사진을 받아들였다. 그 날 이후, 김정한은 하린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날 수 없었다. 차라리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였다. 하지만 도착 삼일 전,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하린을 찾아갔다. 그녀의 눈이 발갛게 물들었다. 정한은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나와 함께하면 고생길은 이미 훤히 보이오. 하지만 권승준이라는 작자는 미국에도 수백평의 땅이 있다고 들었소. 그 자와 함께 하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요. 굶을 걱정, 다른 여편네들 사이에서 기 죽지 않을 걱정…” 하린은 김정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허황된 것들을 믿지 말라 했잖아요.” 그녀의 손엔 이미 혼인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삼일 후, 갤릭호는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뱃바닥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큰 야자수들과 높은 하늘. 이 때 즈음의 조선에선 열사병에 사람이 여럿 죽어나가곤 했다. 하지만 하와이의 햇빛은 지상낙원을 연사했고, 빛의 그늘에 눈을 붙이고 바다내음을 맡으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신세계가 펼쳐졌다. 호놀룰루항엔 이미 많은 서양 사람들이 굶주린 조선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WELCOME COREA!” 라고 적힌 현수막은 심하게 나풀거렸다. 곧이어 뤼순 제독이 확성기를 들고 말했다. “선실에 있던 조선인들은 모두 두 명씩 짝을 지어 줄을 서서 농장주들의 간택을 기다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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