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반고흐, 셰익스피어를 만나다

by 서우 posted Apr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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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흐, 셰익스피어를 만나다.


  

원하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면도칼이 손아귀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명석한 우뇌는 은색으로 빛나는 그것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스윽- 귓가를 스치고 잔인하게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 평생 잊지 못하리라.

나는 왼쪽 귀의 3분의 1을 도려냈다.

가능하다면 전체를 다 잘라내고 싶었는데.’

사건이 터지면 인간은 대담해지는 법이다.

독한 압생트에 의지해 고통을 잊어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살점을 저미는 아픔은 오장이 뒤집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한 방울씩 아주 천천히, 거친 나뭇결무늬 바닥 위로 핏방울이 고이기 시작했다. 작은 선홍빛의 점들은 하나의 세상을 이룬다. 확장된 망막은 점점 커지는 핏빛 웅덩이를 멍하니 바라본다. 죽음을 앞둔 물고기처럼 입술만 오르락내리락. 곧 빨간 웅덩이 속으로 머리가 곤두박질쳐졌다.

-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서서히 깊은 심연으로 정신이 가라앉는다. 나는 작은 수족관 안에 놓아진 물고기가 되었다.

 

정신을 잃고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주변에서 나를 두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착란, 환청, 노이로제, 망상, 내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 말들이 많다. 고갱이 떠나서 귀를 자른 거라고? 정말이지 인간의 상상력이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며칠 전, 자주 가는 이발소에 유화 몇 점을 걸어두었다. 이발소를 찾는 손님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호기심을 보였다. 신문에 얼굴을 가린 채 그들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지켜봤다.

저 그림 혹시 저기 노란 집에 사는 거렁뱅이 작자가 그린 그림 아니오?”

노란 집에서 동생 피나 빨아먹고 산다는 그 인간이 그린 그림이 맞나 보군!”

그림을 향한 신랄한 비판과 비아냥거림. 비수가 되어 가슴에 날아든다.

민망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발소 주인.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공기 덩어리가 피부에 와서 달라붙는다. 팔을 시작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가기 시작한다.

여태껏 믿고 신뢰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말초신경 하나, 하나 곤두선다.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나을까. 진정한 예술을 위해선 슬픔과 절망의 씨름에서 이겨야 한다고 다시 다짐을 해본다. 동생 테오를 위해서라도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재킷 안에서 압생트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한 손에는 펜을 한 손에는 잔을 집어 들었다.

막상 테오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자신의 인생을 털어놓는 푸념밖에 없다. 압생트를 따르는 손이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잔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려 퍼진다.

무능력한 인간!’

술에 취해 흥분한 나머지 면도칼을 들었다. 듣지 못하면 예술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으리라. 절망 앞에 무릎 꿇는 대신 우울한 인생을 선택하겠노라.

- 귓가에 낮은 소리가 연속해서 울린다. 귓불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떨어진 살점을 집으려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병원 대기실. 귀에 붕대를 감싸고 앉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처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어쩐지 초라한 자신을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주머니에 목탄이라도 있을까, 뒤적거리는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오른쪽 귓가로 날아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 화가님 되십니까?”

화가로 호칭해주는 자가 있다니, 놀라웠다. 고개를 돌리자, 초로의 남자는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고 인사를 했다.

저희 주인님께서 화가님을 댁으로 정중히 초대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을 셰익스피어라고 소개했다.

 

반갑소. 실물로는 처음 뵙는군요.”

셰익스피어는 손을 내밀었다.

피부는 부드럽고 머리카락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파이어 블루 같은 눈동자는 보고 있으면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같은 남자 눈에도 매력적인 모습은 호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완벽에 가까운 남자가 앞에 있다. 문득 심술궂은 감정이 들었다. 그에 대한 호기심은 어느덧 불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삶의 차이를 느끼게 만드는 인간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저를 어떻게 알고 계시죠?”

셰익스피어는 베르나르와 클리시 거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식당에서 베르나르와 전시회를 열었던 당시, 고압적인 주인의 행동에 다툼이 있었다. 결국 나는 식당이 아닌 탬버랭이라는 선술집에서 작품을 전시해야만 했다.

그때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항상 취해 있던 터라 말을 걸기 어려웠습니다.”

눈이 부실만큼 화창한 날씨였다. 셰익스피어의 등 뒤로 떠오른 햇살 탓에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눈가가 따끔거렸다.

, 내 소개가 늦었군요. 전 윌리엄 셰익스피어입니다.”

유명 작가와 이름이 같군요.”

나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불만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별 관심 없다는 말투로 그게 바로 접니다.”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실없는 농담이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닌 거 같은데.”

셰익스피어는 대답 대신 산책을 함께 나가자고 제안했다.

 

프랑스 남부는 소박하지만, 운치가 있는 동네 같군요.”

셰익스피어는 원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질릴 때까지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상당한 부호 같은데.”

내가 비밀을 하나 말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겠소?”

얼마든지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찢긴 귓가에 고통이 전달됐다.

난 작가 겸 뱀파이어입니다.”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알고 있을지 모르겠소만, 윌리엄 셰익스피어로 알려진 극작가가 바로 나란 말이지.”

이 무슨 악취미입니까?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습니까?”

내가 장난치는 걸로 보입니까? 당신이라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 밝히는 건데. 조금 서운하구려.”

남자는 체념이 섞인 웃음을 보이고는 멍하니 바라봤다.

눈을 보고 있자니, 정말 진심을 털어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도 나를 무시하고 있군. 내가 미쳤다고 하는 말을 당신은 믿고 있는 거야.”

내가 뱀파이어가 됐든 아니면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라고 한들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나는 그냥 글을 쓰는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요.”

셰익스피어는 내가 그림 그리는 걸 후원해주고 싶다고 했다.

동생 테오에 대해서는 내가 들었는데, 이제 막 결혼을 했다지요. 아마 후원이 힘들 것 같은데 내가 도와주겠소.”

셰익스피어는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한 달에 1000프랑이면 되겠소?”

그가 제시한 금액은 동생 테오가 다달이 보내주는 돈의 4배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변화의 기복이 없고, 상냥함을 품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와 돌담에 걸터앉았다. 아무렇지 않게 훌쩍 뛰어올라 돌담에 앉는 소탈함은 또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여타의 다른 귀족들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게 후원을 해준다고 해서 그를 달리 보기 시작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중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여유를 가진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여유롭게 그림 작업에 몰두하게 되면 자네가 잊고 있었던 걸 금세 찾아갈 수 있을 걸세.”

후원을 하는 이유에 대해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난 이렇게 좋은 친구를 하나 얻게 되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셰익스피어는 가슴 안쪽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내가 프랑스어는 아직 서툴긴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생각하네만.”

자신이 최근에 쓴 작품이라며 내게 읽어보라고 권했다.

천재는 멀리에 있지 않았다. 심오한 감수성에 사랑의 이야기를 이토록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진짜 당신을 셰익스피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정도의 글 실력이군요.”

셰익스피어는 호탕하게 웃고는,

내가 진짜 셰익스피어인데,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지.”

하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붉은 깃털이 달린 짙은 고동색의 큰 모자를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지 않았다. 이 남자는 어떻게 감정의 흔들림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문득 그가 정말 뱀파이어는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보기도 했다.

가난한 화가는 매력이 없지. 지금부터 약속한 돈을 주겠네.”

셰익스피어는 주머니에서 1000프랑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방금까지 면도칼이 쥐어졌던 절망의 손끝에는 희망의 움직임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제 자네는 애초에 원하던 예술작업과 전혀 다른 작업을 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모든 일은 자네 자신을 찾는 과정에 있는 것이니.”

나는 손에 쥐어진 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차 한 대가 앞에 서더니, 작은 짐 꾸러미가 던져지고, 뒤이어 한 여자가 밖으로 밀리다시피 하며 마차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여자를 보자, 셰익스피어는 반사적으로 몸을 튕겼다.

괜찮소?”

여자는 셰익스피어를 올려다보고는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어찌 이런 미인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한단 말이오.”

셰익스피어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한탄스럽게 말했다.

스커트 밑으로 보이는 다리가 막대같이 뻗어 있었다. 본인을 세라라고 소개한 여자는 구김살 없는 밝은 미소를 보였다. 남편에게 쫓겨났다는 여자는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바보였지요. 남자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의 미소에 심장이 툭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새 옷과 먹을 게 필요해 보이는데 우리 집으로 가지 않겠소?”

정말 그래도 될까요?”

여자는 놀라움에 눈이 커지며, 셰익스피어를 바라보는 얼굴은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 자리에 내가 있든 없든, 여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빈센트, 오늘은 이만 얘기를 끝내고 이번 주말에 보는 게 좋겠소.” 셰익스피어는 주말에 본인이 쓴 공연을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나를 그냥 헨리라고 불러주시오. 이번 작품은 다른 작가의 이름을 빌려 올릴 것이니 그렇게 알고 계시면 좋겠구려.” 셰익스피어는 나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기묘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을 뱀파이어라고 소개한 남자, 유려한 글 솜씨를 갖고 있으면서도 뒤에 숨으려고 하는 남자. 도대체 정체가 뭘까. 그에 대해 파악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무거운 머리로 노란 집에 다다랐을 때, 집 앞에는 셰익스피어의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아무래도 이사를 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하셔서요.”

집사는 셰익스피어가 마련했다는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작은 정원이 딸려있고, 커다란 창문이 인상적인 집이었다. 벽난로가 있는 집에 이토록 먼지가 없을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겁니까?”

지금까지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그건 주인님 마음이시겠죠.”

셰익스피어가 뱀파이어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집사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겠죠. 편안하게 받아들이시면 좋을 겁니다. 비밀이 많은 분이니까요.”

집사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대고 천장으로 고개를 올렸다.

여자를 꼬시는 데 작가 같이 근사한 직업이 또 있겠소.’

셰익스피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살아났다. 여자를 꼬시기 위해 글을 쓴다면서 정작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가 하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품행이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난한 화가가 작품 활동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상황에 도취되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더는 못난 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남들이 나를 욕해도, 한 사람만 나를 알아보면 된다. 예술은 모두에게 진정한 가치를 이해받고 존중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잡고 있는 펜 끝에 힘이 들어갔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애초에 원하던 나의 모습과 완벽히 달라지겠다고 썼다. 더 이상 동생의 삶에 침입자나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차올랐다.

종이 위로 스케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화판이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건 내게 있어 사치였다. 더는 습작으로 자신을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 셰익스피어가 후원해준 돈은 한 달 동안 작품을 그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돈이었다.

갑자기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식당에 가서 바게트에 수프를 먹는 것만 해도 부담스러웠다. 못하는 요리를 해서 집에서 끼니를 때워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별장 앞에는 모래사장이 있었고, 바다와 하늘이 같은 색감으로 펼쳐져 있었다. 캔버스를 모래사장 위에 펼쳤다. 하늘을 바라보며 표현하고 싶은 다양한 색을 넣고 깊이 있는 힘이 느껴지는 색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눈에 보이는 색감을 물감으로 만들어내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설레는 일이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담고 있는 들뜬 감성과 타오르는 에너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가슴 한편으로는 가을을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 같아서는 낙하하는 낙엽이 흩어진 거리를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란 잎과 짙은 고동색의 잎, 아직 녹색의 화사함이 담긴 잎들. 생명력 뒤에 담긴 쓸쓸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할 것만 같았다.

아주 흥미로워.”

등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셰익스피어는 손바닥을 이마에 올린 채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집으로 오기로 한 건 잊지 않았겠지?”

내일은 셰익스피어가 얘기한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혹시 자네 옷이 변변치 않을까 봐 몇 벌 챙겨 왔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만.”

집사가 챙겨준 옷으로 충분하네.”

셰익스피어는 의자를 당겨서 앉았다.

작품을 그리는데 돈은 모자람이 없는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자네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싶네. 이왕이면 풍경을 그린 그림이 좋을 거 같아. 나는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그림은 궁상맞다고 생각하거든.”

그의 말은 내게 충격적으로 들렸다.

여태껏 내가 그렸던 그림은 힘든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그도 그런 류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같은 풍경이라도 다른 느낌을 들게 만들어 주는 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갑자기 모베의 이야기가 귓가로 울리는 것 같았다.

자네는 타락했어.”

얼마 전에 모베를 별장으로 불렀다. 모베에게 작업을 하고 있는 별장도 자랑하고 그림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모베는 호화로운 생활에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보기 싫다는 말보다 타락했다는 말이 가슴을 더욱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을 바꾸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예술을 한다고 해서 당연히 가난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버리게. 예술은 고통에서 나오는 게 아니니까.”

셰익스피어는 예술이란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신들의 선택을 받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기에 예술이 더욱 고귀하고 위대하다고 덧붙였다.

위험을 동반하고 있기에 더욱 감미로운 게 예술이라는 말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네는 인생의 선을 넘었네. 그래서 자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도 좋겠다고 판단한 거지.”

자신을 구석까지 몰아붙여야지만 본인이 원하는,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정말 사실일까.

보통 그림은 어떻게 완성되나?”

스케치하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셰익스피어가 물었다.

초벌 그림이 나오면 스케치를 하고 물감으로 색이 입혀지게 되지. 설마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스케치가 유화가 되는 과정을 넘어서면 안 되겠나?”

셰익스피어는 그림도 사랑처럼 그려보는 게 어떻겠는지 제안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여자만 보이지 않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중간 과정을 빼먹고 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영감이 드는 순간, 그걸 표현해 내면 그것이 참다운 아름다움으로 발전되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 때,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말일세. 사랑은 그저 단순한 사랑일 뿐이니까.”

이상한 일이지만 그의 궤변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마력을 갖고 있다.

어쨌든 결정은 자네가 하면 되는 일이니 내가 더는 관섭하지 않겠네. 근데 하나만 더 말해주지. 기존의 관습을 깨버리는 순간, 자네가 원하는 예술이 나오는 걸세.”

셰익스피어는 두툼한 주머니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얼마든지 실패하고 돈을 낭비해도 상관이 없네. 관습을 버리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길 바라네.”

그는 이틀 후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코발트 색상의 셔츠가 햇살을 받아 더욱 진하게 보였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너무도 투명해 속을 알 수 없는 바다를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보다 더 변덕스러운 게 계절이 아닐까. 낮에는 눈이 부실만큼 화창하더니, 밤이 되자 바람이 드세지고 공기는 축축해졌다. 얄팍한 달이 길가를 비추고, 먼지 냄새나는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흙이 떠밀려내려온 길을 걸으려고 하니 짜증이 강하게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집에서 혼자 술이나 마시는 건데.’

나는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셰익스피어의 집은 빗물에 젖어 운치를 더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집을 감싸고 있었다.

주인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 앞에 서있던 집사는 밝은 얼굴로 맞이했다.

집으로 발을 들인 순간부터 공기의 밀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분명 셰익스피어라는 남자가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의 힘이 분명했다. 축축하고 서늘한 날씨도 그의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는 정말로 우리와 다른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뱀파이어라고 소개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군.”

셰익스피어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연극은 꽤 재미가 있을 거야.”

저번에 내가 읽었던 거 아닌가?”

여자를 만나면 글의 내용도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려 보였다.

세라. 여기 인사하지. 빈센트 기억하고 있지?”

어머, 사람이 확 달라지셨네요.”

세라는 그윽한 갈색 눈동자로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내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딘가 부족해 보였던, 위태로운 바위 위에 올라선 것 같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불안했던 하녀와 같이 보였던 그녀는 매혹적인 천사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수채화 물감의 아름다운 색상을 담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색이 그녀의 청초한 아름다움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만들어줬다.

피부는 생기가 없는 것에 가까워 건조해 보이지만, 어쩐지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듯 보였다. 아름다움이란 모순과 모순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닐까. 사랑에 빠지면 거지도 시인이 된다고 하더니. 가슴에서 음률이 만들어지고, 문장이 흘러넘쳤다.

나는 단박에 세라가 가지고 있는 매력의 한중간에 빠져들고 말았다.

어머나, 이제 시작인가 봐요.”

불빛이 잦아들고, 한 손에 장미를 들고 있는 남자가 2층 계단에서 일층으로 내려왔다.

같은 곳을 볼 수 있는 당신이 있어 나는 너무 행복하오. 우리 같은 꿈을 매일 같이 그리고, 같은 숨을 내쉬며 호흡 하나까지도 그대와 내가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소.”

남자 배우는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장미를 건넸다.

셰익스피어가 준비한 공연은 이전에 읽었던 내용과는 완벽하게 달라졌다. 사랑의 다른 온도로 상처를 입은 남녀의 이야기는 한 곳을 바라보는 남녀의 이야기로 바뀌어있었다.

한 곳을 볼 수 있기에 너무도 멋진 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여자 배우가 남자의 품에 안겼다.

배우들의 대사와 동시에 셰익스피어에 품에 안긴 세라는 너무 행복해요.”라며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품에 안긴 세라는 주변의 모든 것이 둘을 위해 존재하는 풍경처럼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 보였다.

창으로 굽이쳐 들어오는 달빛은 면도날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달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살을 에는 듯 잔인하기만 했다.

셰익스피어가 썼던 이전의 대본은 서로 다른 풍경을 보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보고 있을 때,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그가 그녀를 찾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처연한 사랑의 아픔을 담고 있었던 대본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달콤하게 변해 입안을 바짝바짝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자네한테 소개해줄 사람도 많은데 이렇게 취해서 되겠나.”

공연이 끝나고 한구석에 앉아 포도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누구? 누구를 소개해줄 건가? 여기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단 말인가?”

나는 괜한 짜증을 냈다.

자네도 참, 오늘 왜 이렇게 날카로운 겐가.”

많이 드셨나 봐요.”

세라는 셰익스피어의 품에 착 달라붙었다.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오르자,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건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술에 잠식될수록 그녀를 찾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그가 왜 셰익스피어라고 소개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셰익스피어가 다시 환생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글 솜씨를 갖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다. 세상이 이리도 불공평하다는 사실에 토악질이 올라왔다.

나는 빨간 물줄기를 카펫 위에 쏟아냈다.

구역질이 심해지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나를 피했다. 나는 어기적거리며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을 마시고, 또 토를 했다.

괜찮습니다. 이 친구가 술이 좀 약해서.”

나는 뭐라 변명을 하고 싶었다. 소리치고 싶고, 가슴의 응어리를 토해내고 싶었다.

불공평한 이유가 뭔지 묻고 싶었다.

빈센트를 집에다 데려다 주지.”

나는 집사의 손에 끌려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작은 흔적만 남기고 그곳에서 떠나가야 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기분이 좋든 아니든 술을 마시는 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과 같으니까요.”

세라는 마차에 탄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젠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무엇이든 도울 수 있으니까요.”

최대한 또박또박 말을 하려 애를 썼다. 그녀에게 얼마나 멀쩡한 목소리로 들리지는 의문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짙은 안개 속으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다.

 

이토록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일이 있었을까. 셰익스피어의 집을 찾은 이후 세라는 바람이 되어 나타나고 햇살에 몸을 드러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종달새 소리로 귓가를 적셨다. 분명 이런 게 사랑이리라.

사촌 케이에게 느꼈던 연정과는 그 크기와 아픔 면에서 비교를 불허했다. 나는 세라에게 어떤 고백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케이에게 단호하게 거절을 당하고 남았던 상처보다 더욱 쓰라린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못된 악몽이 뒤통수에 달라붙어 다니고 있는 것일까. 내게 세라는 망상이 되었고 유령처럼 내 옆을 떠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도 사랑을 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나는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놀리기라도 하듯 맑게 갠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차라리 시린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면 고통에 진폭이 잦아들 거 같았다.

빈센트 있는가.”

태양이 기울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셰익스피어가 거실로 들어왔다.

자네 쉬고 있었는가. 대체 그림은 언제 보여줄 텐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깔깔거리며 입술이 번들거리는 여자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도 가끔은 즐기는 게 좋지 않겠는가?”

셰익스피어와 함께 거실로 들어온 침입자 둘은 별장 안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 우리 술을 마시자고!”

나는 술에 취한 셰익스피어를 데리고 베란다로 나갔다.

어쩌자고 이러는 건가? 세라가 알면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 저 여자들은 매춘부 아닌가?”

자네 촌스럽게 왜 그래? 우리 같이 예술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에 흥미를 가져야 하네.”

또다시 시작된 그의 궤변.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세라한테는 싫증이 났네. 매일 같이 바가지를 긁는 게 누가 보면 안주인이라도 된 듯이 행동하지 뭔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넌더리 나는 애정행각을 보였던 남자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사랑 그딴 거 언제라도 갈아치울 수 있지! ?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자네도 나처럼 영원의 삶을 살다 보면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겠지.”

또 뱀파이어 얘긴가?”

셰익스피어는 크게 소리 내서 웃고는,

다들 어디 갔어! 파티를 시작하자고!”

매춘부 둘은 셰익스피어 목소리에 까르르 웃으며 거실로 나타났다.

부족하게 즐길 거였으면 애초에 즐기지를 말아야지. 지나침의 길을 걷다 보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네.”

셰익스피어는 병째로 와인을 마셨다.

여자들의 천박한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퍼져나갔다. 왜 셰익스피어는 세라를 놔두고 이토록 한심한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그가 생각하는 삶이 이런 종류의 유쾌함이라면 죽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있었군요.”

세라가 아침 일찍 별장으로 찾아왔다. 한숨도 자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지독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세라를 모델로 그릴 수 있다면. 가는 쇄골을 보면서 이루지 못할 소망을 품었다.

나는 베란다에서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압박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림 그리는 걸 편안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자들의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른다. 오늘은 아이처럼 웃다가도 내일은 표독스러운 배불뚝이 영감으로 변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줄기차게 와인을 마셨다. 세 병도 넘게 와인을 마셨는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더 마실 수 있다고 호기를 부렸다.

깊은 밤, 별빛이 하늘에 수를 놓고 나서야, 셰익스피어는 매춘부 둘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베란다에 앉아 바라보는 별이 빛나는 밤은 힘이 넘치는 들사슴 같았다. 어딘가 야만적이면서 몽환적인 기분을 들게 만들어 주었다.

침실에 있나요?”

나는 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세라의 눈빛은 혐오에서 경멸로 변해있었다.

또 여자들과 함께인가 보군요.”

세라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녀 옆으로 가 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았다.

내가 미안해요.”

세라의 등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당신이 뭐가 미안해요. 난 단지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래요. 이렇게 외롭게 만드는 남자 곁에 그래도 사랑받겠다고 붙어있는 내가 싫어서 그런다고요.”

세라는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지긋지긋하군.”

가운을 입은 셰익스피어는 계단 위에서 세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소. 예술가의 여자는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는 필연을 가지고 있다고.”

사고의 논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말을 또다시 하고 만다.

외로움을 견디는 게 당신이 다른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는 것도 참아야 한다는 소린가요?”

난 보통 남자랑 달라. 새로운, 아주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지.”

세라는 왜 나를 평생 사랑할 것처럼 대했냐며, 꽃에 물을 주고 시들기를 바라는 건 당신의 오만한 태도라고 악을 썼다.

나는 도무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여튼 여자란.”

셰익스피어는 세 명의 여자를 남겨두고 별장을 나섰다.

입술을 꾹 깨문 세라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보였다.

빈센트, 그때 제게 그랬었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말이죠.”

표정이 누그러진 세라는,

하나만 묻죠.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

대답하세요. 여자는 촉만으로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니까.”

처음부터 아니 꿈속에서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럼 저와 같이 지낼 수 있어요? , 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요.”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한마디에 주위를 둘러싼 모든 사물이 황금색으로 변해있었다.

 

정리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나는 셰익스피어에게 더 이상 후원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노란 집에서 세라를 기다렸다.

여기는 사람 사는 집 같네요.”

그녀는 작은 집 안을 휘 둘러보고 그렇게 말했다.

사실 주고 싶은 선물이 있는데.”

나는 그녀에게 해바라기 그림 하나를 건넸다.

그림을 본 세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해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소.”

어머나.”

세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보였다.

나를 정말 사랑하는군요.”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흘 후 셰익스피어는 세라를 찾아 노란 집으로 왔다. 세라와 지내는 동안 그녀가 원하는 건 모든 해주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모든 게 불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더럽다, 불결하다며 끊임없이 트집을 잡았다.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냉랭한 세라의 태도는 셰익스피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는 세라를 떠올리며 희곡을 썼다며 대본을 건넸다. 집안의 반대에도 사랑을 이어나가려는 로미오라는 남자와 줄리엣이라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당신이 사라지고 나서야 알았소. 당신이 없다면 독약을 먹고 죽는 것과 인생이 매한가지라는 걸. 제발 곁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겠소.”

세라는 이번에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희미하게 웃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죠.”

다음날, 세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짐은 방에 있었고 단 두 가지만 사라지고 없었다. 셰익스피어가 선물한 책과 내가 선물한 그림.

책상에 쪽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려 했던 삶 자체가 문제였겠죠. 나는 내 삶을 창조할 의무가 있는데 말이죠. 저는 혼자서도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갈 겁니다.”

세라가 사라지고 며칠 후, 셰익스피어 역시 흔적도 없이 종적을 감췄다. 마치 두 사람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는 듯,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늘의 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해바라기만 몰두해서 그렸다.

별이 드문드문 반짝거리는 밤하늘. 겨울의 차가운 밤공기가 코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여름의 축제처럼 내 가슴을 불꽃으로 수놓던 세라의 흔적은 이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곁에 은색의 권총이 반짝이고 있다. 권총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살아서 무얼 하느냐고.

나는 총으로 손을 뻗었다. 금속의 아픔이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어 버린다.

-

세라 당신은 지키고 싶었소. 나는 지키지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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