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차 창작콘테스트 응모작 단편소설 -<2인용 자전거>

by 이은영 posted Apr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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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용 자전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름을 대변하듯 초록빛인 갈대들이 흔들린다. 다리를 조금 굴리는 것만으로 자전거는 쉽게 나아간다. 자전거 뒷자석에 탄 도희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도희의 긴 머리카락이 내 등에 닿는다. 간지럽다.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도희는 내게 몸을 맡긴다. 나는 자전거에 몸을 맡긴다. 자전거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편안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맡긴다. 갈대는 행복에 겨워 춤을 춘다.

 

이런 장면을 상상했었다. 그래서 갈대밭 여행을 계획했고, 자전거를 빌리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뙤약볕이 내려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땀은 바닷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만큼 흘러내렸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자전거가 너무 고물이었다.

자전거 대여소는 6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운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새로 교체할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했다. 어느 것 하나 성한 자전거가 없었다. 어떤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고장 나 있었고, 어떤 것은 분홍색 칠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어떤 자전거는 녹이 쓸어서 바퀴가 굴러갈지 의문이 들었다. 그나마 가장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게 2인용 자전거였다. ‘가을의 갈대가 이런 색일까?’ 싶은 황토색과 노란색 그 어디 중간쯤의 색이였다. 원래는 선명한 개나리색이었을 것 같은데 많이 낡고 닳아서 이런 색으로 변해버린 듯 했다.

할아버지는 그 자전거를 갈대자전거라 불렀다. 이 가게에서 유일한 2인용 자전거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2인용 갈대자전거를 빌리겠다고 말했다. 도희와의 우정을 돈독히 하는데 이만한 자전거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할아버지는 미간을 찌뿌리고 볼을 긁적였다. 우리가 갈대자전거를 빌려가는 것이 내키지 않은 듯했다. 할아버지는 다른 자전거를 빌리라고 유도하기 시작했다.

학생들. 저 자전거는 소문이 안 좋아. 누가 저 자전거를 탔다고만 하면 무릎이 까져서 온다니까. 다른 걸 빌리는 건 어떤가?”

나는 고집을 피웠다.

다른 사람들이 자전거를 잘 못 타서겠죠. 그냥 저걸로 빌릴게요.”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 빌려 가면 좋지. 그런데 그냥 학생들이 걱정 되서 하는 말이야. 저 자전거가 워낙 소문이 좋아야지. 저래 뵈도 11년 된 자전거야. 여학생들 둘이 타기에는 힘들 거라고. 그래도 괜찮겠나?”

괜찮아요. 여기 있는 자전거들 중에서 제일 멀쩡해 보이는 데요 뭘.”

그렇게 해서 빌린 게 이 2인용 자전거였다. 나는 앞에, 도희는 뒤에 올라탔다.

준비됐어 도희야?”

뒤를 돌아보니 도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셋을 세고 페달을 밟는 거야. 자 센다.”

.”

하나

간다!!!”


나와 도희가 호흡을 맞춰 페달을 밟았다. 페달이 조금 묵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우려와는 다르게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듯싶었다. 이렇게 자전거가 순탄하게 나아가듯이, 나와 도희의 어색해져버린 관계도 다시 순조롭게 회복되기를 바랐다. 나중에 도희와 함께, 흔들리는 한여름의 초록 갈대가 널려있는 벌판에서 노란 자전거를 탔던 추억을 웃으며 회상할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셋 둘 하나하고 구호를 외친 그 뒤로, 나와 도희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계처럼 종아리만 움직이며 페달의 무게를 느꼈다. 주변 풍경은 초록의 싱그러운 갈대들로 아름다웠을 테지만, 나는 그런 것에 주목할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내 뒤에 있는 도희에게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도희의 숨소리는 편안하게 들리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억지로 참는 듯 했다.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내게 들키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아마 이건 다 내 탓이리라. 내가 도희에게 갈대밭 여행을 가고싶다고 졸랐고, 거기서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는 게 꿈이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꿈에 그리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나를 위해, 지쳐도 지쳤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리라. 도희가 나를 위해주는 것처럼, 나도 도희를 위해줘야지.

도희야. 우리 조금만 쉴래?”


자전거에서 내렸다. 물병만 주고받을 뿐,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갈대 참 예쁘다.’ 라고 사소한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도희의 심각한 표정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러지도 못했다. 도희는 다크써클이 꽤나 짙었다. 낮에 자고 밤에 깨어있는 도희의 생활패턴으로 보아, 평소라면 이 시간에 자고 있을 터였다. 그런 도희를 내가 여행에 억지로 끌고 왔으니 피곤할 게 뻔했다.

사실 피곤하지 않은 상태여도 말을 안했을 것이다. 최근에 집에서 우리는 간단한 대화만 나눴다. 어쩌다 한번 길게 대화를 하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우리가 말다툼을 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자주 싸웠다. 조용히 나긋나긋하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는 항상 안 맞는 점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문제들을 바로바로 해결하려는 반면, 도희는 마음에 쌓아두고 덮으려 했다. 이런 성향 탓인지 우리의 관계는 더욱 더 나빠졌다. 이번 여행은 그래서 계획된 것이다. 도희와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이 어색한 관계를 어떻게 좀 해보려는 내 소망이 담겨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싶단 것도, 갈대밭에 가보고 싶다는 것도 다 핑계일 뿐이다.

어때 유림아.”

갑작스럽게 도희가 말을 걸어 당황스러웠다.

..? 어떠냐니 뭐가?”

갈대밭.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은 표정이 아니어서.”

좋아 아주. 정말이야.”

그래... 이제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슬슬 일어나 볼까?”


도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자전거 뒷좌석에 앉았다. 나도 도희를 뒷따라 자전거에 올라탔다. 도희가 많이 피곤해보여, 다시 돌아가야 하나 여행을 계속해야하나 고민을 하던 중, 도희가 소리쳤다.

. 페달이 안 굴러가.”

도희가 자전거에서 내렸다. 나도 뒤따라 내렸다. 내가 직접 뒤쪽 페달을 밟아보니 단단한 석고상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뒤쪽 페달에 연결된 바퀴에 돌이 끼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멀쩡했다. 페달에 녹이 쓴 것같지도 않았다. 겉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보였다. 도희가 말했다.

유림아 일단 앞에 있는 페달은 작동 되는지 확인해봐,”

나는 자전거 앞자리에 앉았다. 내 밑에 놓인 페달을 밟아보았다. 다행히 앞바퀴에 연결된 페달은 고장 나지 않는 듯 했다.

이쪽 페달은 잘 돌아가는데?”


자전거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림아 자전거가 움직여! 이제 멈춰.”

이상했다. 내가 종아리를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페달이 움직이다니. 나는 페달에 발을 뗐다.

이거 내가 돌리는 게 아니야.”

그럼 뭔데! 멈추라니까!”

페달이 저절로 돌아가고 있어!”

뭐야! 김유림!”

자전거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자전거가 지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가 지나왔던 자전거대여소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도희가 뒷자리에 타지도 않았는데. 자전거는 계속해서 앞으로 돌진했다. 나는 페달에 양 발을 떼고 빠른 속도를 온 피부로 체감했다. 저 멀리서 도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브레이크! 브레이크를 잡아!”

정면으로 칼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을 못 뜰 정도였다. 주변에 무엇에 있는지 가늠 할 수조차 없었다. 놀이기구를 타면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내 뇌는 진작에 작동을 멈춘 듯 했다. 귓속에 도희의 마지막 목소리만 맴돌았다. 브레이크.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말. 나는 바람에 저항하며 자전거 브레이크를 힘차게 움켜쥐었다


내가 멈춘 곳은 더 이상 갈대밭이 아니었다. 나는 내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 집 대문 앞에 도착해있었다. 도대체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내 집은 서울에 있고 갈대밭은 전라남도에 있다. ktx를 타도 3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나는 자전거로 불과 몇 분 만에 이동했다니. 게다가 더욱 이상한 광경은 따로있었다. 푸르른 갈대가 살랑이는 이 한여름에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함박눈이!

내 집 대문 앞에 서있는 익숙한 뒷태.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저 사람은 다름 아닌 도희였다! 나는 도희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도희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아무리 소리쳐도 도희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도희의 손을 잡았으나 멈춰버린 페달처럼 딱딱했다. 나는 그 이질적인 촉감에 놀라 재빨리 손을 떼었다.

이질적인 도희는 내 원룸 집 벨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도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희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마침내 벨을 눌렀다. 집 안에서 나온 사람은,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었다. 모자를 둘러쓰고 따뜻한 수면바지를 입고 있지만 틀림없는 나였다.

또 다른 내가 도희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오랜만이다. 나 기억나지?”

목도리를 두른 도희가 말했다.

당연하지! 7년만이잖아.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잠깐. 익숙한 대화였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익숙한 함박눈이었다. 그 다음에 나올 대사는 추우니까...

추우니까

일단 집에 들어가자.

일단 집에 들어가자.”

그 둘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치 재생된 장면이 끝난 듯 주변은 온통 까맣게 변해버렸다. 도희도, 집도, 눈도 보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되면 지쳐버리기 마련이다. 나는 눈을 감고 당분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게 꿈이라면 빨리 꿈에서 깨버렸으면 하고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눈을 감고 있는데도 갑자기 강렬한 불빛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불빛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눈을 떴다. 자전거였다. 자전거 전조등 불빛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어둠속에 자전거와 나. 그게 다였다. 그래서 다음에 듣게 될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유림아. 나 기억나?”

나는 그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누구야?”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자전거뿐이었다.

나야. 자전거.”

 

내가 드디어 미쳤나보네.”

미친 게 아니야.”

자전거가 말을 했다. 이렇게 구형모델인데 음성인식 기능이 있는 건가?

“...유림아 설마... 나 몰라? 너희 어머니 아버지께서 타던 자전거가 바로... 나잖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한 나를 보고 자전거는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땐 네가 어려서 옆에서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를 타고 나를 따라왔었잖아. 기억해봐.. 기억안날 리가 없잖아.”

그때가... 언제였어?”

11살 때.”

“... 12살 이전의 기억이 없어.”

그럼 너희 부모님에게 날 데려가. 부모님은 날 기억하시고 계실거야.”

엄마아빠 돌아가셨어.”

?”

돌아가셨다고. 우리 엄마아빠."

"거짓말..."

" 엄마는 내가 12살 때 살해당하셨고. 아빤 엄마를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

자전거가 전조등을 껐다. 자전거는 바퀴를 살짝 움직여 뒤로 도는 듯 했다.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고장난 기계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자전거는 한참동안 삐걱거렸다. 내가 전조등 빛을 볼 때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자전거도 우는구나. 내가 왜 사람도 아닌 물건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거라면 정말 부모님과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그래서 내가 팔려왔구나...”

“그러겠지...”

유림이 너는...괜찮아?”

괜찮아. 다행히 내게 그때의 기억은 없어.“

나도 이렇게 충격인데, 어린 너는 더 했겠지... 그래도 건강해서 다행이야. 보고 싶었어.”

자전거는 목이 잠긴 듯 했다. 그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 집에서 1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살면서 정말 행복했었어. 내가 갈대밭을 오고가면서 항상 너희 부모님과 네 생각을 했거든. 언젠가 한번쯤은 갈대밭에 오지 않을까, 언젠가 한번쯤은 만나지 않을까. 그렇게 11년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만났다싶었는데. 너희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너는 날 못 알아보다니...”

미안.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전혀 기억이 안나.”

그래서, 기억이 안 나서, 저 자전거처럼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냥 남은 건 부모없는 자의 자기연민일 뿐.

 

주변이 환해졌다. 나와 자전거는 내 집 거실에 들어와 있었다. 도희가 텔레비전 아래에 있는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나는 도희에게 달려가 껴안았다. 차갑다. 돌덩어리 같았다. 도희는 나란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지, 계속해서 서랍을 뒤졌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자전거가 말했다.

저건 실제 도희가 아니야.”

자전거는 콧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자전거를 쳐다보았다.

저건 과거의 도희야.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건 일종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과 비슷해. 너는 과거의 장면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고 있는 거야.”

그게 가능해?”

나니까 가능한 거야.”

너 자전거주제에 잘난척도 할 줄 알구나.”

겸손할 줄도 알아. 내가 마음대로 가고 싶은 장면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별로 쓸모 없는 능력이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태운 사람들의 과거 장면으로 마구 이동하거든. ”

쓸모 있어.”

아닐걸.”

그때로 가서... 과거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실제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고정된 장면을 유튜브 보듯 돌려보는 것뿐이야. 과거 장면이 재생되고 나면, 영상이 끝나듯 이 세계는 완전한 암흑으로 바뀌어. 일단 상황을 지켜봐봐.”

자전거의 말대로라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과거의 장면이라는 뜻이다. 과거의 도희가 서랍을 뒤지고 있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과거의 인물들이라는 뜻이다. 나도 몰랐던 도희의 과거를 보게 되다니.

도희는 서랍에서 펜을 꺼내들었다. 뒤이어 은빛 단추와 베이지색 크로스백을 꺼냈다.

서랍 안에 가방이 있어?”

자전거가 물었다.

아버지의 유품이라서 간직했던 거야. 펜과 단추는 어머니의 유품이고.”

도희는 그 유품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살펴보고선 서랍 안에 다시 넣었다. 그때, 굳게 잠겨있던 목욕탕에서 과거의 가 나왔다. 과거의 나는 갓 샤워를 마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도희에게 물었다.

도희야 거기서 뭐해?”

“... 아무것도 아니야.”

도희는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부탁이 있어.”

뭔데?”

. 여기에서 살게 해줘.”

이때의 일이 기억났다. 연락한번 없던 애가 갑작스럽게 7년 만에 찾아와서 같이 살자고 하던 날. 당황스러움을 감추느라 힘이 들었었다.

좋지, 근데. 너 미국에 돌아가봐야 되지않아?”

당분간만. 한국에 볼 일이 있어서. 그때까지만 부탁할게. 월세도 반반으로 내고, 수도세나 전기세도 낼 테니까...”

도희의 표정은 어딘가 간절한 구석이 있었다.

도희 너. 무슨 일 있어?”

도희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분명 나한테 말 못할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희는 어렸을 적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세월만은 변했지만, 그 표정은 그대로였다. 마음이 아파왔다.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친구인데 뭐 어때? 너한테 신세진 게 많기도 하고, 어렸을 적에 같이 산 추억도 되살려볼 겸.”

고마워.”

아니야, 어느 방 쓸래? 조금 더럽긴 하지만 방이 하나 비어있는데. 조금만 기다려. 내가 깨끗이 정리해줄게.”

거실.”

거실이라면 여기? 정말 괜찮겠어?”

 

여기까지. 과거의 재생이 끝났나 보다.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내 암흑으로 물들었다. 나는 문뜩 무서워져 자전거를 찾았다.

자전거! 어딨어?”

자전거가 전조등을 켰다. 그 불빛으로 인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

나 언제 원래대로, 그러니까 아까있던 갈대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그건 정확히 나도 몰라.”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위에 올라탄 사람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이 암흑 속으로 데려오는 것뿐이야.”

어떻게 데려오는데?”

데려오는 방법은 간단해. 페달이 고장난 척하고, 한명을 낙오시키고, 다른 한명이 자전거에 타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거지. 자전거를 탄 사람이 무서워서 눈을 감고 브레이크를 잡으면, 과거가 재생되는 암흑의 공간으로 오게 돼.”

그럼 자전거가 날 이 암흑으로 데려 온 건가.

날 왜 데려온거야?”

난 이 공간에서만 말할 수 있거든. 아까 말했다시피 난 너와 대화하고 싶었어.”

자전거가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내 눈치를 자꾸 살폈다.

. 여기에 평생 갇히는 거 아니겠지?”

아니, 아니야! 내가 경험한 바, 과거장면이 아무리 많아도 10번만 재생되고 나면, 재생된 후에 갈대밭으로 돌아갔어! 그 전에 가는 경우도 많았고!”

알겠어. 진정해.”

사실 나도 이런 능력이 생긴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구... 이만큼 아는 것도 놀라운 거야.”

하긴 자전거주제에 말하는 것도 놀랍지.”

자전거가 전조등을 빙빙 돌렸다. 자전거가 내 말에 삐졌다는 나름의 표시였다. 나는 그런 자전거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가 환해졌다. 또 다른 과거가 재생되려나보다. 이번에는 우리 집이 아니었다. 익숙한 강의실. 내가 다니는 대학교 강의실 안이었다. 수업이 끝난 과거의 내가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 대학 친구중 하나가 말했다.

룸메이트는 어때? 7년 동안 연락한번 없던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 같이 살자고 했다며. 조금 이상하지 않아?”

과거의 내가 답했다.

조금 이상하긴 한데. 괜찮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2년 동안 이 친구 집에 살았어. 그때 내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그 친구가 날 많이 도와줬어.”

그동안 연락도 안했다며.”

연락이 없는 건, 미국 가기 전에 나랑 다툰 적이 있어서 그런거고.”

또 다른 대학 동기가 물었다.

그래도 뭔가 수상한 짓을 하진 않았어?”

과거의 또 다른 나는 단호하게 다시 대답했다.

수상할 것까지야.”

대학 친구들이 웅성댔다. 그 중 하나가 또 네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룸메이트랑 살면서 안맞는 점은 없어?”

별로. 단 하나 있다면, 난 저녁 12시에 칼같이 잠드는데, 내 룸메이트는 야행성이라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난다는 거? 그것뿐이야.”

미국에 살다온 애라서 그런가? 야행성이라니.. 힘들겠다.”

내가 잠귀가 어두운 편이라 별로 힘들지도 않아.”

 

주위가 어두워졌다. 자전거가 전조등을 키기도 전에, 다시 주위가 밝아졌다. 공간은 대학 강의실에서 내 집 거실로 바뀌어있었다. 공간이 빠르게 바뀐 탓에 자전거는 적응을 못하는 듯 전조등을 껐다 켜길 반복했다.

역시나 거실에는 과거의 도희가 있었다. 도희는 벽지에 있는 낙서를 발견해 지우개로 문질렀다. 그리고 이어서 방바닥에 있는 낙서를 지웠다. 낙서의 내용을 봤으면 좋으려만. 워낙 도희가 빨리 움직이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자전거야. 방금 낙서, 뭐라고 적혀있는지 봤어?”

.. 나도 너무 빨라서 잘 못 봤는데.”

하긴 자전거가 앞을 본다는 것도 재밌는 거네.”

난 아까 삐졌던 자전거의 표정을 또 보고 싶어 일부러 놀렸다.

! 그래도 첫째 줄은 봤어. 벽에 있는 낙서랑 바닥에 있는 낙서 모두 똑같이 유림이에게라고 써져있는 것 같던데.”

나에게 무슨 할말이 있어서 편지를 쓰는 걸까. 그렇다면 왜 하필 벽과 바닥에? 왜 도희는 낙서를 해놓고선 지우는 걸까.

그때, ‘과거의 나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과거의 나는 문 뒤에 있는 낙서를 지우는 도희를 보고는 조곤조곤 화를 냈다.

지금 설마... 낙서한 거야?”

미안.. 얼른 지울게.”

이 집이 월세집인 거 뻔히 알잖아. 왜 그런 장난을 치는 건데?”

나는 아직까지도 도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의 감정에 이입이 되어 주변이 어두워지는지조차 몰랐다.

 

과거장면 재생이 끝났는지 암흑으로 뒤덮였다. 자전거는 전조등을 켤까말까 망설이는 듯 했다. 자전거가 전조등을 키기로 결심하자마자, 주변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자전거의 불빛 때문이 아니었다. 다시 다른 과거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까 장면이 거실이었다면, 이번에는 나의 방 안이었다. 방 안에서 과거의 나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는 장면만 보여줄 것인지. 나까지 졸릴 지경이었다. 자전거도 잠이 오는 듯 조용했다. . 이대로 조금만 눈 좀 붙이고 싶다고 생각을 지경이었다. 조금만 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몰아쳐서 눈을 감으려는데. !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방문을 세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자전거는 잠이 깼는지 바퀴를 굴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또 다른 (과거의) 나는 잠귀가 어두운 편인데도 잠이 깼다. 과거의 나는 눈을 비비고 방문을 열었다.

이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도희가 술에 취해서 방문에 머리통을 박았던 것이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도희는 내 기억 속 그대로의 말을 했다.

술이 취해서 문에 부딪혔어. 미안해...”

과거의 나는 뭐라 대꾸도 안하고 비몽사몽 잠에 취해서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도희는 술에 취했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발음이 또박또박 정확할까? 문을 박아버릴 정도로 비틀거리기는커녕, 얼굴마저 하나도 붉어지지 않았다. 아픈 기색 없이 너무나 멀쩡했다.

자전거가 말했다.

전혀 술 취한 것 같지가 않은데.”

자전거가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계속해서 과거장면을 지켜보려는데, 이대로 과거장면의 재생이 끝나버렸다.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고, 계속해서 다음 과거 장면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거실 안이었다. 자전거는 너무 빠르게 과거가 재생된다며 불평했다.

이번에는 아침인가보다. 창문 바깥에서 새 소리가 들려왔다. 도희는 거실 바닥에서 널브러져 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지쳐 쓰러져버린 강아지를 연상케 했다. 도희가 자는 곳 옆에 흰색 와이셔츠가 마구마구 구겨진 채로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내가 제일 아끼는 와이셔츠였다. 그 셔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단추가 하나 놓여있었다. 와이셔츠에서 떨어져 나온 단추였다.

내 방문이 열리더니 과거의 내가 나왔다. 그리곤 도희를 흔들어 깨웠다. 이땐 너무 내가 화나있었기 때문에 도희의 기분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가장 아끼던 셔츠를 이런 꼴로 만들어 놓다니. 셔츠에 단추가 하나 빠진 곳에서 실밥이 툭 튀어나온 것을 보고 있자니,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도희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캐물었고, 도희는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고 내게 연거푸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뿐이었다. 도희가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데. 나는 화가 나도 참아야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자전거가 망가진 셔츠를 보고, “심하군.” 하고 중얼거렸다.

자전거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내 표정이 좋지 않나 본지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도희라는 애. 원래 이런 친구야?”

나는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도희라는 애. 어디서 많이 봤다고 했더니, 어렸을 때 네 친구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 아버지가 날 여기에 팔아버렸어.”

?”

그 애 아버지가 날 자전거 대여소에 팔아넘길 때, 도희가 옆에 있었어.”

도희에게 들은 적이 있다. 어렸을 적,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기억을 잃고 난 직후에.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다시 밝아졌다. 이제는 익숙했다. 침착하게 앉아 또 다른 과거가 재생되길 기다렸다.

침대 6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얀 병원복 차림의 환자들이 링거를 맞고 누워있는 곳, 병원이었다. 그 큰 침대에 조그마한 아이. 12살의 어린 내가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12살의 어린 도희가 내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유림아. 넌 엄청 명랑한 아이였어.”

이 시기는 과거의 내가 기억을 잃은 직후였다. 내 잃어버린 과거를 도희를 통해 전해 듣고 있는 중이었다. 나한테 도희는 기억에 없는 존재라 처음엔 조금 낯을 가렸지만, 도희는 나를 과거와 이어주는 유일한 동아줄역할을 했기 때문에 도희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좋아했다.

유림이 넌 특이하게도 피망을 좋아하고, 소시지를 싫어했어.”

거짓말.”

정말이야. 이것 말고도 넌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많았어. 너희 부모님도 특이한 것에 한 몫 하셨고.”

예를 들면?”

12살의 어린 도희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무언가 말하길 망설이는 듯 했다.

..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 싱거워.”

그리고 어린 우리 둘은 사소한 얘기를 하며 깔깔댔다. 그러다가 다시 진지한 주제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린 도희가 말했다.

우리 아빠가 널 도와주신대. 너희 집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은 팔아서 네 통장에 그대로 입금해주신다고 했어. 너희 아버지 차도, 너의 어머니 스쿠터나 자전거도. 필요 없는 물건은 전부. 그 돈하고 보험금합하면 당분간 생활비 걱정은 없을 거래.”

너희 아버지께 너무 감사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아빠도 너희 아버지랑 친구셨으니까. 이 정도는 친구로서 해주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당분간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래? 집은 좁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깐. 혼자 사는 것보단 나을 거야. 아빠가 집세 같은 거 낼 필요 없대.”


주위가 어두워졌다. 자전거가 전조등을 내 얼굴에 비췄다. 전보다 밝아보이지 않는 불빛이었다, 자전거가 시무룩해하면서 말했다.

그래서 내가 팔린 거구나.”

. 그때 사소한 것 까지 다 팔렸어. 남은 거라고는 세 가지. 아버지가 아끼시던 베이지색 가방, 어머니의 펜과 단추. 이것뿐이야.”

단촐하군.”

그치. 별거 없지. 그래서 그 물건들이 정말 나에게는 소중해. 부모님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물건들이거든.”

나는?”

자전거가 전조등을 내 발밑으로 돌렸다.

?”

그러면 나도 마찬가지로 소중해? 나도 소중한 존재야?”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말을 하는 자전거가 귀여워보이기도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나는 자전거를 소중한 사람을 만지듯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그럼 있지.. 부탁이 있는데.”

무슨 부탁...?”

... 다시 너희 집으로 데려가 주면 안돼?”

나는 자전거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왜 안되겠어?”

정말?”

정말이야. 대여소 할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부탁해서 널 사올게. 아마 너한테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할아버지도 좋다고 팔 것 같은데.”

자전거가 신이 나는지 전조등을 빙빙 돌렸다.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도희 걔도 날 좋아할까? 너희 집에 같이 살잖아.”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아마 싫어할 것 같아. 도희가 오래된 물건을 싫어하거든.”

자전거는 말이 없었다.

“7년 전에 도희랑 헤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싸운 이유가 부모님의 유품 때문이었어. 도희는 부모님 유품인 단추랑 펜을 버리려고 했거든. 3년째 간직하고 있었으면 버릴 때도 되지 않았냐며.”

그랬던 적이 있었구나.”

그때 도희는 이렇게 말했어. 단추는 은색에다가 예쁘지도 않고, 펜은 곧 잉크가 말라버릴 것이고, 가방 따윈 새로 사면된다고. 어차피 나는 이 물건들에 대한 추억 따윈 없으면서 그런 거 간직해봤자 뭐하냐고.”

말이 심하네. 널 진정으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그래서 서운한 감정에 북받쳤어.도희가 미국에 가는데 공항에 마중 나오지도 않았고. 그렇게 7년 동안 연락이 없었던 거야.”

자전거가 물었다.

지금 현재 도희에 대한 네 감정은 어때?”

모르겠어. 나도 내 감정을 잘 모르겠어.”

난 그렇게 도희가 좋게 보이진 않는데.”

그치만...”

그치만?”

자전거가 되물었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나는 도희에게 지금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 걸까. 지금 도희에게 마음을 다하는 건 우정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 도희에게 받았던 도움을 되갚아주려는 심정 때문일까. 도희에게 드는 확실한 감정은 단 한가지다.

그치만 난 도희가 좋아.”

자전거가 나를 바라보았다.

도희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도희는 내 친구고. 난 도희가 좋아.”

 

주변이 밝아졌다. 또 과거장면이 재생되려나보다. 이젠 이 공간도 지긋지긋하다,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갈대밭을 보고 싶었다. 진짜 도희를 보고 싶었다. 과거장면의 재생도 이번이 마지막이길 간절히 바랐다.

형광등 불빛이 비쳐왔다. 창문 밖은 어두웠다. 익숙한 풍경. 우리 집 거실이었다. 유난히 시계가 째깍거렸다. 과거의 도희가 시계를 바라봤다.

오후 1156. 평소에 나는 이 시간이면 내 방 침대에 누워있을 것이었다. 아마 잠이 들었거나 잠이 들기 직전이겠지. 항상 12시를 넘기지 못하고 골아 떨어지곤 했으니까.

오후 1157. 도희가 서랍을 열었다. 부모님의 유품이 든 서랍이다. 도희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자전거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도희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본다.

오후 1158. 도희가 창문을 열었다. 초점을 잃은 듯한 눈으로 바깥의 어두운 풍경을 바라봤다. 불어오는 밤바람에 도희의 긴 머리가 흔들렸다. 또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방법... 통할까?”

오후 1159. 도희가 빈 상자에 유품들을 담았다. 베이지색 크로스백, 은빛 단추와, 만년필 모양의 펜. 도희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내쉬고 들이쉬었다.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렸다. 도희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0

9

8

7까지 셋을 때. 도희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도희가 소리쳤다.

아 젠장. 오늘 단추달린 옷을 입었잖아!”

단추달린 옷이 뭐 어떻다는 걸까. 도희가 당황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4

3

2

1을 세는 동시에 도희는 유품이 담긴 상자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선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 도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2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누군가 현관문을 쿵쿵 두드렸다. 도희는 그 소리를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았다. 그러나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고, 그 시끄러운 소리에 내가 방 안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문을 열었다.


순식간이었다. 단추, , 가방이 빠른 속도로 방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물건들은 도희를 놀리려는 듯 방안을 맴돌다가, 도희의 가녀린 몸에 몇 번씩이나 일부러 부딪쳤다. 아파보였다. 도희의 몸에 멍이 들 것 같았다.

베이지색 가방은 내가 자고 있는 방의 문을 온몸으로 돌진했다. 쾅쾅.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도희는 가방을 낚아채서 깔아뭉겠다. 반대편에선 펜이 벽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도희는 펜을 막아보려 다가가려했지만, 그러기엔 엉덩이에 깔린 가방의 힘을 감당할 수 없는 듯 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단추는 자꾸만 도희의 가슴에 부딪혔다. 도희가 입은 옷에 원래 붙어있던 단추는 떨어졌고, 그 자리에 어머니의 유품인 은빛단추가 자리 잡았다. 그런 단추의 모습은 마치 제자리를 빼앗고 권력를 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자전거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푸른 여름의 갈대밭이 보일 때까지 나는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젠 더 이상 한낮이 아니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갈대의 흔들림과 같은 방향으로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익숙한 뒷태. 저 멀리서 도희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도희의 눈에는 눈물을 맺혀 있었다. 어디갔다 왔냐며, 어떻게 된 거냐며, 왜 그렇게 자전거가 멋대로 움직인 거였냐며. 여러 가지를 내게 물었다. 나는 도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처음에는 내 얘기를 믿지 않은 듯했으나 곧 내 얘기를 들으며 웃고 놀라워하고 당황해하고 눈물을 보였다. 나는 도희에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내게 말하지 않고 숨겨왔던 것들에 대해서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도희가 입을 열었다.

너는, 아니, 너희 부모님을 포함해서 너희 집안사람들은 모두 특이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 집안사람들이 어떤 물건에 애착을 가지면 안돼.”

왜 안되는데.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

너희 집안 사람들이 어떤 물건에 애착을 가진지 10년째 되는 날, 그 물건은 특별한 능력이 생겨버리거든.”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렇게나 이상한 일을 겪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2인용 자전거는 아마 살아생전 너희 부모님의 애착을 받고, 10년째 되는 날 이상한 능력이 생겼을 거야. 그 자전거는 너희 부모님이 엄청나게 아끼고 좋아하신 물건이었거든. 그리고..”

“...”

그리고... 가방이나 단추나 펜도 사실 네 애착 때문에 네가 자는 동안 날아다니는 거야. 네가 저 물건들을 유품이라고 소중히 여긴지 10년째 되는 날 능력이 나타난 거지.”

... 이런 걸 어떻게 안거야?”

어렸을 적 너희 집에 자주 놀러갔는데 너희 집 풍경이 가관이었어. 다이어리는 흑인 목소리로 랩을 하고, 색연필은 1분마다 색깔이 바뀌고, 계산기는 피타고라스 흉내를 내고 있었어. 그래서 너희 집안 사정을 전해들은 거지.”

도대체 왜 비밀로 한 건데?”

네가 상처받길 원하지 않았어.”

“...왜 내가 상처받을 거라 생각한 거야?”

애착을 받은 물건이라고 저 자전거처럼 착한 친구들만 있는 게 아니야. 네가 가지고 있는 유품들처럼, 너를 공격하고, 너의 잠을 깨우고, 너에게 욕이 가득한 편지를 쓰고, 너의 옷을 망가뜨리는 물건들이 대다수야. 그래서 내가 그것을 걱정해서 유품을 받은 지 10년째 되는 날, 다짜고짜 너희 집에 찾아온 거고.”

도희는 위해... 그 한밤중에 물건들이 난동부리는 걸 막아준 거란 말인가. 지금껏 도희를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여겼던 내가 미워졌다. 

 "그래도 말했으면.. 말했다면 네가 혼자 이 짐들을 감당하지 않아도 됐었잖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또 있었어.”

도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너희 어머니. 이 능력 때문에 살해당하셨어. 그 말도 안되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빼앗으려는 사람 때문에 살해당하신 거라고. 너까지 그런 꼴을 겪게 할 순 없었어.”

 자전거는 삐걱거렸다. 말은 못해도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희를 멍하니 있는 나를 껴안았다. 껴안지 않을 수가 없었단다. 자전거도 우리를 감싸안 듯, 몸을 살며시 구부렸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갈대밭 한가운데서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서로를 느끼며 끌어안는 소리가 갈대들이 흔들리는 소리에 살며시 묻혔다.

 

--------에필로그---------

 

이 고물을 사겠다고?”

할아버지는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

나는 은행에서 돈을 뽑아와 할아버지께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큰 액수에 놀란 듯 기침을 했다.

흐흠.”

그리고 할아버지는 내 손에서 돈을 낚아챘다.

어여 가져가.”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2인용 자전거는 11년 만에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자전거가 우리집에 온 뒤로 자전거는 한 번도 이상한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 말도 걸지 않았다. 다른 여느 평범한 자전거처럼 묵묵히 굴러갈 뿐이었다.

나는 2인용 자전거를 도희와 함께 타고 여름을 만끽하기로 했다.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곳은 전부 다니기로 했다. 10년 동안 갈대밭만 맴돌았던 나의 자전거를 위해. 그리고 나와 도희의 행복한 추억을 위해.

다만.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집에 남아있는 애물단지들을 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무슨태풍이 불어 닥친 것처럼, 서랍 안은 열려져 있고. 옷이란 옷은 단추가 죄다 찢겨져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온 벽에 펜자국이 칠해진 낙서였다.

 

[ 유림이에게 ]

[안녕 이 새끼야? 코좀 그만골아 이 씨발 미*.]

 

이 뒤는 생략하겠다. 낙서의 내용은 죄다 내 욕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펜과 가방 단추를 가져왔다. 펜과 단추는 망치질을 하고, 가방은 가위로 조각내었다. 그런 모습에 도희가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선 나는 도희와 함께 집에서  멀리떨어진 계곡으로 향했다. 단추와 펜과 가방의 잔재들을 태워버렸다. 연기는 매웠고, 타는 건 금방이었다.

도희는 더 이상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을 찾았다. 도희는 할 일이 끝났으니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자전거여행을 했다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는 전부 다녔다. 신기하게도 그 수차례의 여행 동안에 한 번도 자전거가 고장난 적이 없었다. 11년이나 된 자전거라는 것을 체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자전거 여행에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갈대밭을 가기로 했다. 갈대는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을을 대변하듯 노란빛인 갈대들이 흔들렸다. 다리를 조금 굴리는 것만으로 자전거는 쉽게 나아갔다. 자전거 뒷자석에 탄 도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희의 긴 머리카락이 내 등에 닿았다. 간지러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도희는 내게 몸을 맡겼다. 나는 갈대빛 자전거에 몸을 맡겼다. 자전거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갈대는 행복에 겨워 춤을 췄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편안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맡겼다.


//끝//

 

  

성명:정혜수

연락처: 010-9786-6778 

이메일:hstre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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