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아코디언의 달(月)

by 산중호걸 posted Apr 29,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따스한 햇볕이 중천에 걸려있건만 바닷바람이 서늘한 겨울. 한 대의 대형 쓰레기차가 정지선 앞에서 속력을 줄이고 깜빡이를 넣는다. 딸깍, 딸깍 소리에 맞춰 핸들을 잡은 손가락을 튕기던 트럭 기사 박씨는 고개를 돌려 조수석 위에 올려놓은 커피 두 잔을 힐끗 바라본다. 신호가 바뀌자 트럭은 좌회전하여 대교에 진입한다. 바닷바람을 가르며 홀로 5분여를 달려가던 박씨는 적적했는지 한 손으로 차량 라디오를 켠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자 박씨는 그 큰 몸뚱아리를 좌우로 우스꽝스럽게 들썩거리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흐르고, <초록섬>이라는 안내 표지판과 함께 붉은 차단기의 불빛과 함께 허름한 출입구 경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록섬>은 몰디브의 쓰레기 매립 섬인 틸라푸쉬 섬에서 그 모티브를 얻어 정부에서 5년 전 추진했던 프로젝트명이자 섬의 이름이었다. 하루 평균 200톤이 넘는 쓰레기들이 트럭에 실려 초록섬으로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트럭이 섬에 들어오기 위해선 섬의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차단 개폐기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를 조종하는 이가 바로 경비원 정노인이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 눈처럼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을 가진 정노인이 그 빼빼마른 몸으로 경비실에서 차단기를 여닫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보는 이의 맘이 편하지 않았다. 그중 트럭기사 박씨는 최근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특히나 정노인에게 살갑게 다가갔다. 조수석 커피의 주인도 바로 정노인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노인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트럭 기사의 신원을 확인하려 애쓴다. 그때, 박씨가 경적을 박자에 맞춰 5번 울린다. 그러자 정노인은 박씨임을 직감한 듯 손등에 큰 점이 있는 주름진 손으로 버튼을 눌러 차단기를 올린다. 박씨는 정노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올리고 차단기를 통과한다. 그리고 경비실을 뒤쪽에 트럭을 정차한 다음 비상등을 켠다. 양손에 커피를 들고 걸어오는 박씨의 발걸음과 트럭의 비상등 소리가 묘하게 어울린다.

 

이를 모르던 정노인은 1시를 가리키는 전자 벽시계를 보더니 노곤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댄다. 그때, 박씨가 경비실 문을 주먹으로 두드린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뜬 정노인은 흐릿하게나마 그 비대한 체격을 보고 그가 박씨임을 알아차리고 문을 열어준다. 박씨는 밖이 추운 듯 손을 비비며 빨개진 귀를 하고 들어와서는 난로 앞 소파에 앉아 노인에게 커피를 건넨다.

 

벌건 대낮부터 병든 닭마냥 졸고 계셔요? 팔자가 좋으시네... 누구랑 다르게...”

무슨 돈이 나서 이런 걸 사와? 돈도 없담서

아 그게 영업 비밀인데.... , 어르신 그거 이리 줘봐요. 내가 해드릴게.”

 

몸을 일으킨 박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빨대를 꽂을 구멍을 열심히 찾고 있던 정노인 대신 음료에 빨대를 꽂아준다. 그리고 다시 경비실 소파에 그 풍만한 몸과 육중한 엉덩이를 맡기고 이내 이야기를 계속한다. 박씨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요즘 사람들은 물건을 고치기보단 새로사길 선호해서 잔고장이 나면 바로 물건을 버린다는 것이다. 정씨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과정에서 값나갈 것 같은 물건을 발견하면 눈도장을 찍어놨다가 나중에 찾아서 고물상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그 영업비밀이 꽤나 벌이가 나쁘지 않다며 정노인에게 권한다. 정노인이 흥미롭다는 듯 고민하자 박씨는 점심시간을 활용해 자신과 다녀올 것을 권유한다. 몇 번의 권유 끝에 정노인은 무료함을 달래고자 박씨와 동행하기로 한다. 정노인이 남은 커피를 비우는 동안 박씨는 트럭에 올라타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린다. 이내 정노인이 나설 채비를 마친 뒤 비상연락처를 경비실 창에 붙이고 나와 트럭에 올라탄다.

 

박씨는 라디오를 켜고 소리를 키워 차 안을 채운다. 정노인은 노래를 따라 부르는 박씨의 모습을 보며 그 주름진 볼에 약간의 미소를 띠운다. 정노인은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본다. 트럭은 바다 위 도로를 호쾌하게 달리며 인공 섬 중심지를 향해 들어간다. 음악과 함께 한 몇 분간의 짧은 드라이브를 마치며, 두 사람은 쓰레기 매립지에 도착한다. 박씨는 정해진 구역에 차를 후진주차하고 수거해 온 쓰레기를 쏟아낸다. 정노인이 먼저 트럭에서 내려 쓰레기더미 앞에 서자 뒤이어 박씨도 그 옆에 선다. 박씨는 쓰레기더미를 눈대중으로 살피더니 더미를 밟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정노인은 이를 걱정스럽게 지켜본다. 박씨는 어느 정도 위로 올라가더니 몇몇 물건들을 밑으로 굴려서 내려보낸다. 정노인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굴러 내려온 물건들을 하나 둘씩 살펴보기 시작한다. 박씨는 정노인의 반대편으로 내려온다. 정노인은 팔 한쪽이 망가져 버려진 고급 로봇장난감과 그 옆에 솜이 튀어나온 곰인형을 살펴보고는 따로 바깥쪽에 빼놓는다.

 

어르신! 이쪽으로 와보셔!”

 

정노인은 삐걱거리는 무릎에 손을 올리고 힘겹게 일어선 다음 박씨 곁으로 간다. 박씨는 자신이 내려보낸 물건들을 살피다가 모서리가 조금 부서진 아코디언을 집어 든다. 박씨는 먼지를 조금 털어내고 이를 정노인에게 선물로 건네며 말한다.

 

이거 닦아놨다가 고물상 김씨한테 파셔. 값 좀 쳐줄 거 같으니까.”

 

정노인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아코디언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정노인은 아코디언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다가 먼지에 덮여있던 긁힌 흔적을 발견한다. 마치 날카로운 돌로 긁은 듯 뭉툭하고 조잡하게 남아있는 흔적은 마치 초승달 같은 모양을 하고이다. 정노인은 애써 침착한 척 해보지만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다. 박씨가 그런 정노인이 걱정되는지 말을 붙여보지만 정노인은 이를 귀담아듣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한다. 그러던 중 정노인은 불현듯 손목시계를 보더니 복귀를 재촉한다. 아코디언을 품에 안고 박씨를 지나쳐 방금 전 바깥쪽에 빼놓았던 장난감들을 챙겨 트럭에 탑승하는 정노인을 지켜보던 박씨는 석연치 않았으나 일단 트럭에 올라탄다. 섬의 입구로 돌아가는 길, 매립지로 올 때처럼 트럭 안이 음악소리로 가득 찬다. 박씨는 정노인의 눈치를 살피다 스피커 볼륨을 내린다. 마치 한참을 달린 듯 정적이 감돌던 트럭이 이내 경비실에 도착한다. 그러자 정노인이 차문을 열어젖힌다.

 

정노인은 박씨에게 감사인사를 건넨 뒤 문을 닫는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트럭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경비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경비실 책상 한 편에 위치한 돋보기안경을 꺼내 착용한다. 그리고 낡은 아코디언 위 흔적들을 천천히 훑어본다. 경비실 창밖으로 해가 서서히 저물고 어둠이 찾아온다. 저녁 8시가 되자 정노인은 경비실 불을 끈다. 그리고 소파에 늙고 여기저기 병든 몸을 힘겹게 눕힌다. 천장을 보고 누워있던 정노인은 이내 허리 쪽 통증이 느껴지는 듯 인상을 쓰고 몸을 옆으로 눕힌다. 그리고 책상 옆 거울에 비친, 이제는 너무도 늙어버린 소파 위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러자 거울 속 정노인이 5살 쯤 되어보이는 아이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아이는 땅바닥에서 악사(樂士)처럼 보이는 그의 아버지, 그리고 더 어린 남동생과 자고 있던 중에 눈을 뜬다. 그리고 손을 코앞에서 휘저어보며 아버지가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동생을 깨운다. 동생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앉자 아이는 동생에게 작지만 날이 선 돌멩이를 건넨다. 그리고 형제는 아버지가 깨지 않게 조용히 아코디언에 하늘에 떠있는 달 모양을 새긴다. 투박하게나마 모양이 새겨지자 형제는 웃음을 참느라 열심이고, 아버지 역시 실눈을 뜨고 이 광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총소리가 적막을 가르며 피난민들의 잠을 깨운다. 피난민들은 반사적으로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사방으로 산개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아이가 피난민들에 치여 아버지와 떨어지게 되고, 아버지는 아이를 목 놓아 부르며 찾아보지만, 피난민 무리에 묻힌 아이는 결국 다른 피난민들의 행렬에 휩쓸리고 만다. 아버지는 총소리가 더 가까워지자 들려오자 결국 막내만 데리고 피난민 행렬에 휩쓸려 도망치기 시작한다. 아이는 눈동자에 아버지와 동생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는다.

 

아이는 이역만리 떨어진 남한 땅까지 피난민들에 이끌려 내려온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악착같이 일하고, 바쁜 삶을 살아간다. 삶에 치여 가며 나이가 든 아이는 이산가족을 찾아준다는 방송국 프로그램 광고를 접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는 냉정하게 자신이 처한 현실, 주머니엔 동전뿐이며 단칸방 월세가 세 달이나 밀려버린 현실을 직시하며 이 기회를 포기한다. 세월이 흘러가며 아이 역시도 버젓한 가정을 꾸렸고, 일찍 요절해버린 아내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가족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결국 아이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시킨 다음에야 발을 뻗고 편히 누워 홀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되었다. 정노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에 동생의 얼굴을 덧대어 상상하듯 그려본다. 한참을 누워있던 정노인은 결국 잠이 오지 않는 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서랍에서 일자 드라이버를 꺼내고 돋보기안경을 착용한 뒤 낮에 가져왔던 로봇 장난감들을 꺼낸다. 정노인은 팔 한쪽이 없는 로봇 장난감에 다른 장난감의 팔을 이식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조금씩 떨리는 손이지만 꽤나 정교한 작업이 몇 시간 동안 이뤄지고, 정노인은 그렇게 나름대로 수리를 마친 로봇 장난감을 책상 옆 상자에 보관한다. 정노인은 기지개를 켜며 탁상 위 달력을 바라본다. 달력은 12월 달력이며 25일 성탄절에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표시되어있다. 정노인은 조금 노곤한 듯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서 잠에 빠져든다.

이튿날, 박씨의 트럭이 다시금 차단기를 통과한다. 박씨는 이번에도 차를 세우고 기지개를 켜며 경비실로 향한다. 정노인은 어제와 다름없이 멍하게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어제와 같은 노크소리를 들은 정노인은 경비실 문을 열어준다. 박씨는 인사를 건네고 들어오던 중에 책상 옆 상자 안의 로봇 장난감을 발견한다.

 

, 이거 어르신이 고친 거예요? 손재주 있으시네?”

예전에 먹고 살라고 배운 겨.”

그대로 가져다 팔아도 되겠다. 뭐 손주들 가져다주시려고?”

뭐 비슷혀. 오늘도 장난감 좀 많이 실려있나?”

아까 보니까 좀 있던 거 같은데요?”

그런가? 그럼 오늘도 좀 태워다 줄 수 있어?”

안그래도 지금 들어가려던 길인데. 타셔요.”

 

정노인은 고맙다고 말하며 일어나 경비실 열쇠를 챙긴다. 박씨도 뒤돌아서서 트럭으로 향한다. 그러자 정노인이 뒤에서 박씨를 부른다. 박씨가 뒤돌아본다.

 

자네처럼 젊은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도 바로 알아보지?”

얼마나 오래된 사람을요?”

이삼십 년 더 되었어도 말이야.”

그런 사람이 없어서 모르죠. 근데 있어도 알아보긴 어렵지 않을까요? 그 시간이 얼만데

 

정노인은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한다. 그리고 경비실 문을 나서서 트럭에 올라탄다. 박씨는 정노인에게 사연을 묻고 싶었지만 잠시 담아두기로 한 채 트럭에 올라탄다. 트럭은 바다 위를 가로질러 다시금 중심지로 들어선다. 정노인은 자기 몸뚱아리만 한 곰 인형과 기차 장난감 등 여러 가지 장난감을 골라내 조수석에 싣고, 박씨도 값이 나갈 듯 한 골동품을 골라내어 차에 싣는다. 30분 정도 각자 할 일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 경비실로 돌아온다. 박씨는 정노인이 골라온 장난감들과 인형들을 번쩍번쩍 들어 경비실 안에 들여놓아준다. 정노인은 고마움을 표시라도 하듯 경비실 냉장고에 있는 비타민 음료 하나를 박씨에게 건넨다. 음료병을 금세 비워버린 박씨는 물건들을 내려놓자마자 일이 있다며 경비실을 나선다. 정노인은 주워온 장난감들을 정리하려다가 아코디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알아보긴 어렵지 않을까요? 그 시간이 얼만데

 

정노인은 박씨의 말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돌려 아코디언을 외면하고 장난감을 종류에 따라 분류하는 데 집중한다.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경비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흐릿한 조명 아래 정노인은 반짇고리에 사용한 실과 바늘을 집어넣는다. 그러다 실수로 손등을 찔려 피를 보고 만다. 정노인은 손등의 상처를 확인하려다 자신의 손등에 있는 점을 보게 된다. 그리고 기억 속 동생의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던 손등 위 점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노인은 이내 고개를 젓고 박스에 자신이 수선/수리한 장난감들과 인형들을 차곡차곡 집어넣어 정리한다. 그리고 달력을 집어 들고 볼펜으로 24일 위에 X표를 친다. 정노인은 탁상시계의 알람을 맞춰놓고 소파 위에 몸을 눕힌다.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 경비실 주변에 소복하게 쌓인다.

 

이튿날, 정노인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경비실 근처에 쌓인 눈을 쓸어내고 있다. 정노인은 평소와 다르게 멋을 부리기 위해 노력한 듯 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다림질을 하지 못해 구겨진 체크무늬 셔츠가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주변 청소를 마친 정노인은 경비실로 들어가서 중절모와 넥타이를 착용한다. 그리고 평소완 다르게 들떠 보이는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몇 대의 트럭이 섬을 오고가지만 정오가 되어도 박씨의 트럭이 섬으로 들어오질 않는다. 정노인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마침 섬으로 들어온 다른 트럭기사에게 박씨의 행방을 묻고, 그는 25일이 박씨가 쉬는 날임을 말해준다. 정노인은 조금은 안심된 표정으로 다시 경비실에 들어와 앉는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목록을 누른다. 온통 이라고 저장된 연락처와만 통화한 기록이 나열된다. 정노인은 전화를 걸어보려 하지만, 차마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는 듯 이내 전화기를 내려놓고 조용하게 창밖을 바라본다. 시간이 흘러 저녁 8시가 되자 택시 한 대가 경비실 앞에 도착한다. 그리고 곧 박스를 든 정노인이 경비실 문을 잠그고 택시에 몸을 싣는다. 택시가 어딘가를 향해 출발한다.

 

잠시 후, 택시가 한 고아원 앞에 멈춰 선다. 정노인은 박스를 들고 힘겹게 차에서 내려 고아원 내부로 들어간다. 그러자 고아원 관계자가 몇몇 아이들과 함께 마중을 나와 정노인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정노인도 반가운 듯 웃음 짓는다. 아이들은 인사도 잊은 채 상자 속 장난감들을 나눠가지는데 열중이다.

 

어르신~,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허허.. 미안허요. 오는 길에 차가 좀 막혀서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 추운데 어서 들어오세요.”

 

정노인이 신발을 벗고 고아원 안쪽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박스를 빼앗듯 들고 장난감을 배분한다.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노인의 곁에 아이들이 하나둘씩 다가와 감사인사를 건넨다. 정노인은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간만에 얼굴에 기쁨의 미소를 짓는다. 그때, 한 여성이 고아원 입구로 들어온다. 여성은 힘겹게 울음을 참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민수야...!”

 

순간,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여인을 본다. 그러더니 가지고 있던 장난감마저 내팽개치고 달려가 여인의 품에 안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정노인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아원 관계자에게 이에 대해 묻는다.

 

저 사람은 누구요?”

, 민수네 어머니셔요. 겨우 연락이 닿았거든요.”

여태 뭐하다가 이제?”

같이 살던 남자가 완전 갓난애일 때 몰래 여기 데려다 놨어요. 못 알아볼까봐 많이 걱정했는데 단번에 알아보네요.”

 

정노인은 말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리고 여인 품에 안겨있는 아이를 보며 오래전 그날의 아버지 품에 안겨있던 동생을 떠올린다. 정노인은 큰 한숨을 내쉬려다 집어삼키고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이전만큼 밝은 표정을 짓지 못하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노인은 고아원 관계자와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택시에 올라타 경비실로 향한다. 정노인은 경비실 쪽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 경비실 옆에 주차되어있는 경차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박씨를 발견한다.

 

이리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여?”

, 외로운 어르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드리려고 왔죠

자네, 나한테 왜 그렇게 잘해주는겨?”

어르신한테만 이러는 거 아녜요. 원래 제가 어른들한테 잘 한다고..”

아니,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가 있을 거 아녀?”

 

박씨는 정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솔직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어르신?”

 

정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저희 아버지도 경비원이셨는데 최근에 돌아가셨어요.. 얼마나... 외롭게 가셨을지...”

 

박씨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정노인은 그런 박씨를 다독여준다. 정노인은 경비실 문을 열고 난로를 튼 다음 박씨를 소파에 앉히고 진정시킨다. 박씨의 어깨 들썩임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자 정노인이 조심스레 묻는다.

 

그런 일이 있었구만... 미안하네.”

아뇨. 어르신이 부담스러워 하실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나도 자네한테 못했던 얘기 좀 하지..”

 

정노인은 박씨에게 동생에 대해 말해준다. 그리고 동생을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밝힌 뒤 인근 마을의 약도를 가져와 박씨 앞에 펼쳐놓고 펜을 꺼낸다. 정노인은 박씨에게 아코디언을 수거했던 날 지나온 코스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박씨는 정노인을 만류해보지만 이내 소용없음을 깨닫고 코스를 표시해준다. 박씨는 정노인이 걱정된 나머지 자신의 차로 함께 이동하자고 말해보지만 정노인은 한사코 도움의 손길을 거절한다. 정노인의 시선은 오직 약도에 머물러 있었다. 박씨는 코스를 다 그려낸 약도를 정노인에게 건네주며 묻는다.

 

어르신, 동생이랑 떨어져 지낸지 몇 년이나 되셨어요?”

“...잘은 몰라도 50년은 더 됐지.”

 

그러자 박씨는 약도를 다시 자기 품으로 가져온다.

 

“10년도 아니고 50년이 넘으셨는데.. 그 아코디언 하나 때문에 여길 다 돌아다니시려고요? 어르신 정말 그러다 큰일나요!”

, 누가 자네한테 거까지 신경쓰라고 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혀! 이리 내봐!”

 

예민해진 정노인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강제로 약도를 뺏어낸다. 박씨는 그런 정노인에게 실망한 듯 그를 잠시 바라보다 경비실을 떠난다. 정노인은 약도와 아코디언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리고 아코디언을 깨끗하게 닦은 뒤, 경비실 구석에서 꺼낸 가방 안에 넣는다. 그리고 이내 소파에 누워 지쳐 쓰러지듯 잠든다. 정노인은 꿈속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꼭 닮은 모습을 한 남자를 마주한다. 정노인은 남자의 손등 위 점을 보고 그가 동생이 맞음을 직감한다. 정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팔을 벌리고는 남자에게 다가간다. 그 순간, 남자가 뒤돌아서며 정노인을 외면한다.

 

창배야.... 창배야.... 형이여 형.”

여태 뭐하다가 이제 왔어?”

..그게 말이여.. 창배야, 그게..”

그동안 충분히 찾을 수 있었잖아... 그동안 없이도 살아놓고 왜 이제 와서?”

 

정노인이 침묵한다. 정노인은 결국 남자 앞에서 가슴을 쳐가며 오열한다.

 

내도 살아야 했다! 내도...! 근데! 내도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고....”

 

이른 새벽, 알람이 경비실 안 정적을 깬다. 정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난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정노인이 시계를 바라본다. 새벽 5시 반. 아코디언이 든 가방을 메고 있는 정노인이 약도를 보며 경비실을 나선다. 정노인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한 시장거리로 들어간다.

 

혹시 창배라는 아를 압니까? 나랑 닮았고.. 북쪽 억양쓰고... , 이 손등에 점이 있소.”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죄송한데 저희가 좀 바빠서요. 저쪽 생선가게에 여쭤보세요.”

혹시 창배라고 아시오? 손등에 점이 있는디....”

 

정노인은 점포마다 방문하고 다니며 동생에 대해 수소문해보지만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한 듯 어두운 표정으로 시장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약도 위에 X표시를 한다. 약도가 X표시로 채워져갈수록 정노인의 시름은 깊어진다. 그러나 잠깐의 휴식도 허용되지 않던 정노인은 시간이 9시에 수렴해가자 급하게 택시를 타고 섬 출입구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트럭기사들을 위해 재빠르게 차단기를 올려준다. 트럭의 행렬이 소동처럼 지나가자 정노인은 경비실 의자에 걸터앉아 다시 약도를 펼친다. 그리고 날짜에 따라 탐색할 구역을 나눠놓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날 정오, 박씨가 트럭을 몰고 차단기 앞에 서지만, 걱정하는 마음을 몰라주는 정노인에게 서운한 듯 눈길도 주지 않고 섬 안쪽으로 들어간다. 정노인은 이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지만 마음 한 편이 불편한 듯 그러한 내색마저 숨기지는 못한다. 그날 저녁, 정노인은 8시가 되자마자 다시금 짐을 꾸려 섬 밖으로 향한다. 그리고 주택가를 돌며 동생에 대해 수소문한다.

 

.. 말 좀 여쭙시다. 혹시....”

혹시 나랑 비슷한 연배인데...”

그 말투가 북한투고..”

 

하지만 정노인은 대부분 문전박대당하고 만다. 정노인은 체력이 달리는 듯 후들거리는 가녀린 다리를 이끌고 경비실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든다. 정노인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이런 생활을 반복한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달력이 1월로 넘어간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정노인은 거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팔의 힘줄은 전보다 훨씬 튀어나와 보이고, 얼굴엔 광대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노인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8일 째 되는 날 새벽, 정노인은 한 아파트 앞 상가를 찾아가 동생에 대해 수소문해보지만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다. 지칠법도 하지만 정노인은 지치지 않는 듯 오픈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미용실, 마트 등을 방문하여 탐색을 이어간다.

 

마트에서 나온 정노인은 마트 옆 복덕방에 들어가 동생에 대해 수소문해보지만 역시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다. 그때, 단상 위에 앉아 과일을 먹던 청과물 가게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노인에게 묻는다.

 

들어보니까 꼭 그 할아버지 말하시는 거 같네.”

 

정노인은 맘이 급해진 듯 짚이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

 

확실한 건 아녜요. 근데 연배가 어르신이랑 비슷하고 북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정노인은 허겁지겁 장갑을 벗어 손등 위 점을 청과가게 주인에게 들이댄다.

 

.. 그 사람도 이렇게 손등에 점이 있소?”

, 어르신도 참... 그건 모르죠.”

잘 떠올려 봐줘... 내 이렇게 부탁해..”

아무리 그러셔도 모르겠는 걸 어떻게 해요... 근래엔 좀 뜸하셨지만 그래도 그 할아버지 저 아파트 주민이셔요. 한번 찾아가 보셔.”

 

정노인은 청과가게 주인의 손을 꼭 잡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급하게 복덕방을 나선다. 정노인은 떨리는 마음으로 아파트 경비실로 향한다. 경비원은 난로를 쬐고 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정노인 때문에 놀라며 돌아선다. 정노인이 말을 꺼낸다.

 

... 아파트 주민 명부 같은 거 좀 볼 수 있소?”

외부인 같은데... 안 되죠 당연히. 그리고 그런 건 동사무소에서 알아보셔야죠.”

그럼 이 아파트 주민 중에.. 혹시 내랑 비슷한 연배에 북쪽 억양 쓰는 주민은 본 적 있소?”

 

경비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불현듯 한 사람을 떠올린다.

 

. 그 할아버지 말씀하시나 보네. , 가족이세요?”

 

정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만요.”

 

경비원은 잠시 주소록을 살펴보더니 ‘106513라고 적은 쪽지를 건넨다. 정노인은 이를 소중하게 집어든다. 그리고 인사를 건넨 뒤 경비실 안 시계를 보고 급하게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탄다. 정노인은 택시 안에서도 쪽지를 소중하게 손에 꼭 쥐고 있다. 십여 분 후, 정노인은 섬 경비실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정노인은 책상 가장 아래쪽 서랍에서 통장 하나를 꺼낸다. 정노인은 통장을 펴 잔고를 확인하고는 이를 정장 재킷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성탄절에 입었던 구겨진 정장을 꺼내 입는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고, 그간의 힘든 시간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듯 중구난방으로 자라버린 수염을 깎는다. 그날 정오, 평소처럼 박씨의 트럭이 섬으로 들어오자 정노인은 차단기를 미리 열어준다. 박씨는 경비실 뒤에 트럭을 주차하고는 차에서 내서 경비실로 걸어온다. 정노인은 경비실 안에서 쪽지와 아코디언을 번갈아 바라보다 박씨가 왔음을 깨닫고 문을 열어준다. 박씨는 어색한 적막을 깨려고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하며 들어온다.

 

어르신. 제가 뭐랬어요! 고생을 얼마나 했길래 전보다 피골이 상접하시고..”

그간 잘 지냈나? ...전엔 내가 미안했네.. 미안했어.”

, 맘에 담아두지 마세요. 하하... , 혹시 동생분은... 찾으셨어요 어르신?”

찾은 거 같어.”

정말요?? 이야.. 어르신 진짜 대단하시네! 근데 찾은 거 같다?”

시간이 없어서 바로 여 왔지. 이따 저녁에나 다시 가보려 하는디... 걱정이여.”

무슨 걱정이요?” 

여태 없는 셈치고 살다가... 살날 얼마 안 남아서 부려보는 객기 같기도 하고... , 만약에 가가 날 보고 싶어 하질 않으면 어떻게 혀?”

어유, 우리 어르신은 근심도 많다니까? 여기까지 오셔놓고 겁먹으면 어째요.”

동생을 보면 먼저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따뜻하게 한번 안아주시면 돼요. , 어르신. 오늘 밤엔 제가 태워다드릴게 거까지. 먼젓번 일도 사과드릴 겸... 어르신 지금 복장으로는 오래 걸어 다니기 힘드셔.”

 

정노인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본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박씨의 제안을 수락한다. 박씨는 8시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한 뒤 정노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박씨는 이윽고 경비실을 나선다. 홀로 남은 정노인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시계와 아파트 경비원이 건네준 메모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저녁이 오길 기대한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저녁 8시가 오고, 박씨는 경차 안에서 정노인을 기다린다. 정노인은 다시 한 번 거울로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고, 통장과 아코디언, 메모지를 챙겨서 경비실 밖으로 나간다. 정노인은 박씨의 차에 올라타고, 박씨에게 목적지인 아파트 이름을 알려준다. 정노인이 떠난 경비실 책상 위엔 앞으로 동생의 주변에서 여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내용의 사직서가 남겨져 있다. 정노인은 룸미러를 통해 멀어져가는 초록섬을 보며 감상에 젖은 듯 시선을 떼지 못한다. 박씨는 어두운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카 오디오를 튼다. 다행스럽게도 오디오에선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박씨는 콧노래와 함께 그 큰 몸을 좌우로 흔든다. 정노인은 이 거대한 움직임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미소 짓는다. 정노인도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것처럼 보인다. 연식이 오래된 박씨의 차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선다.

 

그럼 다녀오겠네.”

, 어르신 천천히 다녀오세요! 뭐 죄라도 지었어요? 어깨 좀 펴시고!”

 

정노인은 그 말을 듣고서는 오랜만에 어깨를 펴본다. 그리고 메모에 적힌 주소로 이동한다. 513호 문앞으로 이동하는 동안, 정노인의 심박 수가 한 발짝 마다 한 박자씩 빨라져 간다. 혹시 알아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문전박대라도 당하면 어쩌나, 경비원이 오해하고 잘못 알려준 거면 어쩌나, 남한에 내려오지 못한 것은 아닐까 등의 수많은 생각이 정노인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하지만 정노인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발걸음은 513호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결국 문 앞에 선 정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힘껏 누른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정노인은 터질 듯한 늙은 심장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문 앞에서 이를 기다린다. 하지만 문 안쪽의 사내는 정노인의 신원조차 묻지 않고 문을 열어준다. 열린 문틈으로 새어나온 향 피우는 냄새를 맡은 정노인은 불안감이 온몸에 엄습함을 직감한다.

 

아버지 친구 되시나요?”

 

눈이 충혈되어있고, 볼이 야윈 상복을 입은 사내가 정노인에게 묻는다. 하지만 정노인에겐 사내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향 연기가 온몸을 감싸고 쥐어짜는 듯 했다. 그는 열린 문틈으로, 이미 흐려진 시력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는 영정사진 속 백발노인의 모습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 어르신. 아버지 친구분이 맞으신가요?”

근래엔 좀 뜸했지만...’

 

정노인은 순간 청과가게 주인의 말을 떠올린다. 정노인은 고인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사내에게 물어보려 하지만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정노인은 자신이 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단정지어버리며 사진을 보기위해 찡그렸던 미간의 인상마저 풀어버린다.

 

.. 내가 잘못 찾아왔구만... 미안하네.”

주소를 잘못 찾아오셨으면 도와드릴게요.”

아니여. 아니여. 내가 아예 아파트부터 헷갈렸네. 밤중에 미안하게 됐네. 미안해.”

 

정노인은 돌아선다. 사내가 문을 닫자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 계단, 한 계단, 정노인은 동생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신의 미련을 발자국 위에 버려둔다. 정노인의 기억 속 모습의 동생이 계단을 올라오며 정노인과 엇갈리지만, 정노인은 더 이상 그 아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아니 주지 못한다. 차 안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박씨는 갑작스럽게 정노인이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오자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린다. 박씨는 핸드폰을 주우며 정노인을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본다.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나 좀 다시 데려다 줄 수 있어?.”

네 어르신 당연하죠.”

 

박씨의 차가 아파트에서 빠져나간다. 정노인은 손에 꼭 쥐고 있던 메모지를 구겨 차량 안에 비치된 휴지통에 넣는다. 그리고 조용히 창밖을 바라본다. 정노인의 눈엔 도시의 조명이 달빛을 가려 달의 모양조차 보이지 않는다. 정노인은 조용히 숨을 고른다. 박씨는 이런 정노인을 연민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차가 섬의 경비실에 도착한다. 정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조수석 문을 연다.

 

, 어르신. 너무 상심하시지 마세요. 세상이 좋아져서 이산가족이라도 금방 찾을 수 있어요.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아녀 아녀. 말이라도 고맙네. 날도 늦었으니까 얼른 가서 쉬어. 내일 보더라고.”

“.... 어르신도 쉬세요!”

 

박씨의 차량 후미등이 어둠 속에 집어 삼켜지며 흐릿해지자 정노인은 발걸음을 옮겨 차단기를 통과한다. 정노인은 도심에서 벗어나 비로소 달빛에 의지하여 섬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긴다. 정노인은 처음 아코디언을 발견했던 그 장소로 향한다. 그리고 가방에서 아코디언을 꺼낸다. 정노인은 자신이 처음 봤을 때 초승달 모양이라고 여겼던 아코디언 위 뭉툭하고 조잡한 흔적을 바라본다. 정노인은 이윽고 아코디언을 360도 돌려본다. 초승달 모양이었던 흔적이 그믐달 모양으로 보인다.

 

“...다시 보니 초승달이 아이고 그믐달이네...”

 

정노인은 아코디언을 쓰레기 더미 위 제자리에 놓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는 깊은 숨을 뱉어낸다. 잠시 감정에 북받쳤던 호흡을 가다듬은 정노인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다. 달빛이 정노인의 길을 비춰준다. 정노인은 힘이 든 듯 잠시 자리에 멈춰 선다. 그리고 하늘에 떠있는 그믐달을 바라보고는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거기 잘 있지?” 정노인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정노인은 이를 거친 소매로 문대어 닦아낸다. 정노인은 다시 길을 걷는다. 그렇게 노인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