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시간이 멈춘 바다

by 밤바맨 posted May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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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1995년 8월 15.  전날 서산기상청의 예보에 따르면 00시 40분에 썰물이 발생하여 06시 38분에 밀물이 발생하고, 13시 02분에 썰물이 발생하여 19시 02분에 밀물이 발생했어야 했다.  즉 하루 두차례 바닷물이 오고 가기를 반복해야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날 저녁바닷물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해수면이 높아져 해안의 바닷물이 육지 쪽으로 들어오는 현상인 밀물과 해수면이 낮아져 해안의 바닷물이 바다 쪽으로 빠지는 현상인 썰물이 발생하는 원인은 달과 태양의 인력 및 원심력에 의해서이다달은 태양보다 질량은 작지만 지구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바닷물의 높낮이에 미치는 영향은 태양의 2배 정도이다밀물과 썰물은 대부분 달의 영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달과 가까운 쪽의 바닷물은 달의 인력을 최대로 받기 때문에 해수면이 상승하는 밀물이 발생하고 그 반대편은 지구 중심보다 달의 인력이 작게 작용해 뛰쳐나가려는 힘이 작용해 밀물이 발생한다지구를 둘러싼 계란모양의 바닷물이 형성된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다면 통상적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매일 2회씩 경험하게 된다

  특히 음력 7월 15일인 백중을 전후로 3~4일 간은 달과 태양이 지구와 일직선 상에 있으면서 일 년 중 달이 지구와 가장 가까이 위치하여 해수면의 높낮이 변화가 가장 뚜렷하다.  이 때의 밀물은 저지대를 침수시키거나 제방을 유실시킬 수도 있어 각별한 주의가 당부된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이 해방을 맞이 한 지 50주년이 되는 이 날도 음력으로 7월 19일이라 백중사리 기간이었지만 오히려 매일 겪는 두 차례의 밀물과 썰물조차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02


  하늘을 향해 보란 듯이 높이 치켜든 팔이 부르르’ 떨려오기 시작한다

  오랜 기다림의 결실일까,  한참동안이나 사방으로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녀석이 테이블에 살포시 내려 앉는다 잠시 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서서히 사정권 안으로 움직이고 있다


  '멍청한 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움켜잡은 파리채를 냅다 휘두른다.  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간혹 빠진 날도 있긴 하지만,  거의 매일같이 투자해 배드민턴 동회회에서 갈고 닦은 스매싱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본다

  

  찰싹


  옛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게 정확히 적중하는 순간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볼 걸 그랬나보다.  소리만 요란했지 결과는 애석하게도 불발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라켓에 셔틀콕이 아깝게 빗맞은 것처럼 헛스윙의 허무함이 밀여온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가 테이블과 마주치는 찰나를 틈타 홀연히 날아가 버리는 얄미운 녀석을 바라만 본다인간이고 벌레고 살고자하는 본능 앞에서는 실력도 무색하다.  누군가 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으나 괜시리 머쓱해진 마음에 종업원을 부른다.

  

  필군아!

  

  물론 그가 씨는 아니다.  아니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런 특이한 성씨면 평생 잊혀지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어딘가에 자가 들어가 있기에 항상 그를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다.  비록 그게 이름의 앞에 들어가는지,  뒤에 들어가는지는 기억이 가물 가물하지만 말이다어쩌면 외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식당일이 고되기도 하거니와 그에 비해 받는 액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여겨지는지 종업원들이 자주 바뀌는 게 이 바닥의 현실이다.  그때마다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익힌다는 것은 컴퓨터로 말하자면 바탕 화면에 자주 사용하지도 없는 파일들을 잔뜩 깔아 놓고 지저분하게 정리도 없으면서 메모리를 낭비하는 짓과 같이 쓸데없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내 머리가 컴퓨터처럼 비상하여 많은 양의 데이터를 담고 있음은 분명 아니다

  

  삼년 전쯤그는 우리 식당에 불쑥 찾아와 일자리가 없냐고 물어봤다.  특별히 구인광고를 붙인 것도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아무렇게나 차려 입은 츄리닝에,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있는 모습이 영 신뢰가 안가는 모양새였다

  누추한 차림을 보아하니 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몇 마디 말을 걸다보니 청년은 고깃배를 탔었는데 구타가 심해 육지에 잠깐 정박하는 틈을 타 몰래 짐도 하나 못 챙기고 도주했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식당이 잘되어 일손이 모자랐던 터라 그를 고용하기로 했으나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기에 급한 대로 신분증을 맡아 놓고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꽤 성실하게 일을 잘해서 신분증은 돌려 줬으나 그때 봤던 이름 어딘가에서 자를 본 것 같다.  

  미쳐 통장 개설도 못한 그에게 월급도 현금으로 주고,  이제는 사장 겸 주방장이 되어버린 나와 달랑 둘이서만 일하기에 딱히 이름을 사용할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정도나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이 오히려 대견할 따름이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짜장면이라 함은 학교 운동회나 친구 생일파티 등의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아주 귀하디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 처음 그 맛을 접했을 때부터 중국집 사장님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수많은 역경을 뚫고 막 내 꿈을 이룬 나이에는 예전처럼 그 음식이 그렇게 귀한 대접은 받지 못했으나 그럭저럭 중국집이 호황을 누릴 수는 있었다.  왜냐하면,  어떤 분야에서건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철가방을 들고 번개처럼 빠르게 배달하는 중국집 종업원을 어느 대학의 명예강사로 모셔가는 일이 발생할 정도로 신속하고 정확한 배달 서비스가 한 몫 단단히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외식업계에서도 여러 다양한 음식에 제 자리를 빼앗기고,  배달음식에서도 컵라면을 비롯한 각종 간편식의 등장으로 서서히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는 추세다.  인건비라도 줄이려면 필군을 잘라야 하지만 그나마 여기는 촌구석이 되어 그런지 아직까지 배달을 시켜먹는 몇몇 단골이 남아 있기에 지금껏 한 식구가 되어 언제 폐업 신고를 하게 될 지 모를 이 가게를 어렵사리 지켜 나가고 있다

  

  식자재 창고 귀퉁이의 여유 공간을 칸막이로 막아 대충 만든 조그만 방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사장님.


  평소 같았으면 마대걸레로 홀 청소를 하거나 양파나 깍두기 등의 밑반찬을 손질하며 분주히 보냈을 시간인데 이렇게나 빨리 내 부름에 응할 줄은 몰랐다.  무엇을 물어볼 지 순간 고민이 된다.   

  

  어디 주문 온 것 없냐?

  

  없어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들리는 대답이다.  정말 요즘은 가게에 파리만 날린다카운터에 놓여있는 금고를 열어본다.  그래도 오늘은 나름 평소 이상의 매상은 올린 것 같다

  

  “매상도 괜찮고 기분이다.  그래오늘은 빨리 가게 문 닫자.  음식쓰레기 비워 와라!

  

  가게 셔터를 내리기 전 행해지는 하루의 마지막 일과를 지금 하라고 시키는 것이다. 


  저 약속이 있어서 그러는데 오늘은 사장님이 좀 버려주시면 안돼요?

  

  이 시간에 배달 전화라도 오면 어쩌려고 약속을 잡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더니 점점 가족처럼 편하게 대해 주니깐 이제는 요리 조리 빠져나갈 궁리만 느는 것 같아 슬슬 짜증이 난다

  

  나가는 길에 버리면 되잖여!

  

  옷도 다 갈아 입어단 말이예요.

  

  그러면서 두 팔을 벌려 문 밖으로 나오더니 밝은 곤색의 캐쥬얼 정장으로 말쑥하게 차려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 약속이 중요해 나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무언의 시위를 버리는 모양이다.  배달할 때는 행동이 느리다가도 이럴 때는 참 빠르다

  쥐고 있던 파리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는 주방으로 향한다.

  

  특별한 라벨도 없는 커다란 고무 대야에 각종 잔반을 모아 두었다.  왜냐하면 몽산포에는 군소리 없이 어떤 내용의 쓰레기도 마다하지 않고 처리해 주는 특별한 처리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안에 쓰레기를 모아 놓으면 자연스레 밀물이 들어 바다가 이를 수거해 간다.  우리 지역 뿐 아니라 바다를 인접한 모든 곳에서 그러하겠지만 서해의 청소부는 유독 힘이 강해 더 넓은 영역을 감당한다.

  예전에는 모든 종류의 쓰레기를 다 내어 놓았지만 지금은 환경문제로 음식쓰레기에만 국한되었다.  해안가를 거닐다 보면 가끔씩 중국어로 쓰인 제품봉지가 발견되곤 하는데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버린 쓰레기가 머나먼 바다를 횡당해서 이곳까지 떠내려 왔으니 환경문제가 국가분쟁으로 이어질 정도로 심각하긴 심각하다.  그래도 음식물은 금새 썩어 바다의 정화작용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에 그것만은 특별히 반대의견이 없어 간신히 허락되었다

  고무 대야를 옮기기 위해 낑낑거리며 손수레에 겨우 싣는다.    



 #03


  해안가에 인파들로 북적인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드넓은 백사장에 사람들이 운동경기를 하러 모여 드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자연이 내어준 대여료도 없는 이런 운동장에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밀물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배구 네트를 설치하여 경기가 한창인 그들 주위로 커다란 스피커가 눈에 띈다.  이 정도 장비를 철수시키려면 적어도 30분 이상은 족히 걸릴 텐데 운동장 사용  마감시간이 임박한 지금까지도 끝마칠 별다른 조짐이 안 보인다

  몇 해 전인근 갯바위에서 낚시객들이 조난사고로 고립돼 목숨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저 고기 잡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한 것이다.  아니면 알고는 있었으나 그들의 예상했던 속도보다 급격히 물이 차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이로 인해 한참동안이나 관광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더불어 그들을 대상으로한 매출이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이 지역 가게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때부터 지역경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만조시간이 가까워지면 너나 할 것 없이 아무라도 해안가에서 즉시 대피할 것을 알려주게 되었다.

 

 나도 재난 대비를 미리 알려 주려는 사명감으로 무리 중 한 명에게 다가간다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유.  인자 물이 찰 시간인디.


  그리 친절한 설명이 아니었음에도 뿔테 안경에 긴 머리를 곱게 빗은 여자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밝게 웃으며 화답한다.


  감사합니다.  저희도 이 경기만 끝나면 돌아가려고요.


  예의가 참 바르다상대가 이렇게 반응하는데 자신이 할 말만 딱 하고 마는 것도 좀 어색하기도 해서 형식적으로나마 몇 마디 더 물어본다.


  근디,  워디서 오셨소?


  .  저는 서울에서 왔고요,  지금 기독교 복음 선교회 행사 중이예요 이제 곧 끝날 것 같아요.


  상세하게도 일일이 자세히도 알려준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분을 좋게 한다

  대체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착한가 보다.  사실,  나도 착했던 시절이 있었다.  무슨 특별한 직책을 맡았을 정도로 열심히 다니진 않았으나 가급적 주일 예배에는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또한 방학이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수련회에도 꼬박 꼬박 참석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였는지 한동안 재미있다고 느껴졌던 교회가 갑자기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굵어졌기 때문인지 성경에 씌여진 많은 부분이 택도 없이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나 태초에 하나님이 갈비뼈를 꺽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나 모세가 홍해를 지팡이로 내려치니 바닷물이 갈라졌다는 내용을 어찌 받아 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그 외의 것들은 구체적으로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런 의문 사항들이 점점 교회에 대한 불만으로 번져 나갔다.  엄마의 잔소리만으로도 버거웠던 시기에 이거 하지 말아라저거 하지 말아라.하는 금기사항들 또한 너무 싫었다.   그렇게 서서히 나는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다

  잠시나마 착하고,  순진했던 과거의 한때를 회상케 만들어준 그녀에게 가게의 위치까지 알려주며 단체로 오면 싸게 드리겠다고 입바른 소리를 해본다.  

  이 지역에선 밀물 시간에 맞추어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게 관행이지만 외지인들이 보면 오히려 파렴치한 짓으로 보일게 뻔하다.  농촌에선 밭에다 버리고 개를 키우면 개에게도 주지 않느냐.면서 정당한 사유를 들어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있으나 궁시렁 궁시렁 말을 이어가기가 뭐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못한 채 도로 수레를 끌고 가게로 돌아온다


  웅성되는 인파 속에서 밀물아멈추어라!라고 하는 외침이 간간이 들린다.  저렇게 하다가 정말 커다란 사고라도 날 것 같다.  그런데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쩜 저런 어리숙한 믿음이 있어서 아직까지 착실히 교회에 다니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가게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물이 만수가 되기까지 대략 30분 정도 남았다.  그 전에 서울에서 왔다던 교회사람들도 전부 철수했을 것이니 조금만 기다렸다 나가야 겠다이리도 짧은 순간을 때우기에는 뭐니 뭐니해도 TV시청이 제격이다.  리모콘을 손에 쥐고 이리 저리 돌려 보다 자저거 대왕 엄복동이라는 광복특선다큐에 채널이 멈춘다

  엄복동은 일제 강점기에 활약했던 사이클 선수라고 한다.  그 시기의 스포츠 스타라 하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나 그도 이에 못지않게 우리 민족을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허나안타깝게도 역사적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아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 국민 스타인 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자전거가 생소했던 시절,  부품을 배달해 주는 자전거방 점원으로 시작해 사이클에 입문한 그는 1913년 4월 서울 용산에서 열린 전국 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하며 스타 탄생을 알렸다.  이후 월등한 기량으로 여러 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모든 면에서 자신들이 최고라는 일본인들은 그를 막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방해 공작을 펼치기 시작하지만 이런 견제에도 그의 우승 행진은 계속 되었다.  오히려 일본의 훼방이 심해질수록 그에 대한 민족적 응원은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다큐에 푹 빠져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간 듯 일본의 조작된 행동에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민족의 영웅 엄복동을 응원하고 있다가 잠시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바라보니 원래 계획했던 30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꼭 해야 할 일을 까맣게 잊고 TV만 보고 있었다니 이 정도가 되면 중독으로 의심할 만한 수준이 아닌가 하여 내 자신이 한심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  내 낙척적인 성격에는 그리 큰 흠집을 내지 못한다.  음식물 쓰레기는 내일 아침에나 내다 버려야겠다고 긍정적인 결론을 짓는다.  밀물과 썰물은 하루 두 차례씩 교차하지만 쓰레기를 버리는 시간은 주로 저녁 타임이다.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해야 할 아침부터 괜히 더러운 오물냄새를 풍기지 않으려는 이웃간의 소박한 배려인 셈이다.  비롯 이러한 약속을 어기게 생겼지만 어차피 지나간 일은 아무리 후회해 본들 누가 과거를 뒤바꿀수 있겠는가.  괜히 내 자신만 괴롭게 만들지 말아야 겠다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속 시원히 보던 다큐멘터리를 마저 보기로 한다.  하긴 정신없이 빠져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이긴 하다.  한편으로는 내 민족정신도 대단하였기 때문이고 말이다



  #04


  알람이 울려 이른 아침에 눈을 뜬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거리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작 쓰레기 때문에 보약과도 같은 귀한 단잠을 줄이게 되었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쉬어진다

  필군이 누워있을 방을 향해 목청껏 그를 불러 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어젯밤에 안 들어왔었거나 술을 마시고 깊은 잠에 빠져 있겠지.  가게 문을 열기 전까지만 들어오면 되니 별 상관이야 없다.  어찌되었든 내가 TV를 보느라 시간을 허비해서 생긴 일이니 내가 해결해야겠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비장한 각오로 주방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챙겨 가게를 나선다


  해변으로 가는 길에 보니 여기 저기 드문드문 쓰레기 더미가 보인다.  이게 그나마 위안이된다왜냐하면 연휴라 나처럼 시간을 놏친 이들이 많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땡그랑


  장수탕이라 씌여진 24시 불가마 사우나 앞을 지나칠 때이다.  현관에 매달린 종소리와 함께 커다란 낚시가방을 둘러멘 손님이 다급하게 뛰어 나간다.  빨간색 모자를 대충 눌러 쓰고 얼굴에 붙은 눈꼽을 떼고 있는 모습이 이제 막 일어난 듯 하다.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택시 문을 여는 순간 목욕탕 주인인 박씨가 이어서 달려 나온다.  출발하려는 택시를 세우고 그와 무슨 대화를 나눈다.  


  목욕탕으로 돌아오는 박씨에게 묻는다.


  누구랴?


  경기도에서 왔나... 어젯밤 수면실에서 자고 갔어.  버스 시간 늦겠다며 저렇게 서두르네.


  단골 손님도 아닌디 뭘 그렇게 깍듯이 배웅까정 다 한다냐?


  배웅이 아니라,  밤새 도둑이라도 들까봐 귀중품이라고 손목시계를 카운터에 맡기고 잤는데 헐레벌떡 나간다고 아침에는 깜빡 잊고 그냥 가더라구.  그래서 따라 나가 건네줬는데 너무 고맙다며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여기 사우나만 이용할 거라 하네.  믿을 수 없는 뻔한 인줄 알았지만 나도 고맙다고 했지.


  말을 마친 박씨가 나를 찬찬히 살피더니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시선이 멈춘다.  그리고는 대화의 화제를 바꾼다.


  근디 자넨 어찌 알았는가?

 

  무슨 소리인지 도통 영문을 몰라서 다시 되묻는다


  뭣을?


  어제 밀물이 안들었다고 이제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거 아니었나?” 


  가끔 태풍이 불거나 비바람이 몹시 심하게 치는 날에는 바다가 잔잔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제의 경우는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는데 밀물이 멈췄었다니뭔가 잘못 아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매일 들던 밀물이 어제만 아니 들었다고자네가 밤새 바닷가에서 지켜보진 않았을 테고 누구한테 그딴 헛소리를 다 들었다냐?”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핀잔을 주자박씨도 오기가 생겼는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한다.


  아까 그 손님이 그러더라니껜그 뭐냐백중사리로 물이 만수로 찼을 때 고기를 낚는 게 바로 낚시의 매력이라고 말여그래서 그에 알맞게 몽땅 채비를 하고 왔는디 물이 안 불어서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만 치고 빈손으로 돌아 왔다고 허더라고.


   입가에 마른 침을 튀겨가며 힘 있게 반박하는 그의 장황한 설명에 정말 사실은 사실인가 보다는 생각이 든다.  해안가의 널려있는 수많은 음식물 쓰레기도 이를 뒷받침 하는 것도 같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태어나 처음 겪는 전무후무한 사태다서해안에선 마치 개기월식도 아닌데 밤에 달이 안 떴다는 소리와도 같은 격이기 때문이다.   

  박씨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간다.


  나도 하도 이상해서 밖에 나가 확인까지 했다니껜.


  그랬더니?


  역시나 손님 말이 맞더구먼.  그래서 기상청에 전화까정 해보니껜 예상물때는 만수였다는 거여그런데도 밀물이 안 들었다니 참말 놀랄 일이지.


  장수탕 안으로 사라지는 박씨를 보면서 갑자기 어제 들었던 밀물아멈춰라!는 외침이 떠오른다진짜로 말이 씨가 되었을까

  과연 왜 그들은 그렇게 기도하였고그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중학교 때까지의 신앙 지식을 총동원해본다면 모세가 홍해 바다를 가르고자 했던 이유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이에 응답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도 그와 대등한 간절함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벌어질 수 있었겠는가정말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까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골똘히 고민을 하다 보니 순간 어제 보았던 배구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펼쳐진다.  배구팀 중에 일장기 마크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분명 한·일 친선 대회인 셈이었다.  그들은 8·15 광복절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며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염원했던 것이다

  결국어제 내 눈 앞에서 진행되었던 행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그 간절함의 이유가 될 듯도 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부른다.  길 건너 슈퍼 주인이다.  약간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아침 조깅을 나온 모양이다

  홀아비라 짜장면을 배달시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가게 단골이기도 하지만 밀린 외상값도 상당하다.  하지만 본인이 해결해야할 일은 별로 안중에도 없고,  마을 이장도 아니면서 이장이나 되는 것처럼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사사건건 관여한다.  만년 차기 이장직을 노리는 사람 같다.  


  어이인자서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가엊저녁에 뭐하고?


  갚으라는 외상값은 안 갚고 아침부터 슬슬 신경 거슬리는 짓만 골라 한다.  급기야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잔소리다


  에휴,  쓰레기에서 아주 악취가 진동을 하네.  난 어제 진작에 버렸지.  오늘 보니껜 자네처럼 게으른 사람이 많은 가벼.  저 짝에도 쓰레기가 보이네.


   그리 냄새가 고약하지도 않은데 호들갑스럽게 두 손가락으로 코를 쥐어 막고 있다.  참다  참다못해 나도 방금 들은 소식으로 보기 좋게 펀치를 날린다.


  자네가 버린 쓰레기,  아직까정도 그대로 있을꺼구먼.  어제 바다가 멈춰 있었거든.”  

  

  ?


  극도의 놀라움을 나타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간다.  아마도 자신이 쓰레기를 버린 곳으로 가서 사실을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묶었던 체증이 한 방에 가라앉듯 속이 다 후련하다


  아무튼 그동안 말도 안 된다며 무시해 왔던 모세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 나에게도 펼쳐졌으니 내일부터라도 당장 교회에 다녀야 할 것 같다.  또한 이렇게라도 해서 믿음이 식어가는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간다 못 간다 얼마나 울었나

   정거장 마당이 한강수 되었네

  

  찬송가를 부르려 하였으나 기억나는 곡이 없어서 어제 다큐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를 기분 좋게 흥얼거리며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  일찍 일어난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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